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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은정 (소설가) |
황송하게도 소설가라는 타이틀로 허락된 지면이니 '작은 이야기'로 시작하겠다. 잘 알려졌듯 이야기는 힘이 세다. 이야기 하나면 평범한 길도 달라진다. 해발 650m의 고산지대에 위치한 경북도 수목원으로 가는 길이었다. 술 약속이었지만 시간이 일렀고 글 작업을 위한 사전답사라는 그럴싸한 이유도 있었다. 수목원으로 향하는 마지막 구간은 구불구불한 오르막이었다. 사이클을 타는 친구의 남편도 지났던 길이라고 했다. 소위 '장비빨'이 시원찮단 소리가 싫어서 페달을 죽기 살기로 밟았단다. 동호회원들을 멀찌감치 따돌리고 한숨 돌리는 순간. 웬걸, 주요 부위에 감각이 없더란다. 칠흑 같은 산기슭에서 한 남자의 당황스럽고도 절실한 몸짓은 한동안 수목원길과 더불어 떠올랐다. 혹여 오해할까 덧붙이자면 19금이 아닌 생존에 관한 이야기다.
소설은 작은 이야기들이 만드는 큰 이야기이다. 소설을 처음 쓸 때는 보고 들은 걸 위주로 썼다. 첫 소설의 배경은 재개발을 앞둔 달동네였다. 6·25전쟁 때 피란민들이 살던 토굴을 파고 거적을 덮어 살던 곳이었다. 가난한 동네에서 유일한 풍요는 가을마다 주렁주렁하던 감나무뿐이어서 감나무골로 불렸다. 방송작가로 입봉한 지 얼마 안 된 시절의 다큐여서 진심을 다했고 열정이 넘쳤으나 다방면으로 요령이 부족했다. 오르막과 내리막뿐인 골목을 부지런히도 걸어 다녔다. 귤 한 봉지를 사서 다들 떠난 동네에서 떠나지 못하는 주민들을 만났다. 쓰러져가는 판잣집에도 세입자가 있었다. 개발의 시대에 떠밀려 온 이들은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다. 그 경험을 그대로 옮긴 글을 보고 진짜 소설가가 덕담 삼아 '작가의식'을 언급했다. 그때는 의미를 몰랐고 지금은 어렴풋이나마 소설의 썰 푸는 방식은 다르구나 생각한다.
풀어내는 방식이 다를 뿐 세상에는 이야기 아닌 것이 없다. 하루를 살면 하루치의 이야기가 쌓이고 각자의 계절마다 다른 이야기가 있다. 타인과의 관계도 이야기로 엮어지고 인간사의 모든 문제도 이야기의 틀 안에 있다. 늦되이 등단하고도 청탁 한 번 받지 못해 생존이 불투명한 소설가의 이야기도 그보다 더 버라이어티한 당신의 이야기도 이 순간 흘러간다. 떠내려가는 이야기에서 무엇을 낚을지는 나와 당신의 몫이다.
배은정 (소설가)

배은정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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