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성] 낙서 古今

  • 이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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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12-27 06:55  |  수정 2023-12-27 06:56  |  발행일 2023-12-27 제27면

옛 초중고 시절 학교 화장실은 으레 낙서(落書)로 도배됐다. 음담(淫談)·음화(淫畵)는 물론, 담임교사에 대한 뒷담화까지. 소사(小使) 아저씨가 낙서를 지우면 며칠도 안 돼 또 다른 낙서가 등장했다. 권위주의적 교육 풍토에 억눌린 욕구의 분출이었으리라. 그래서 학교 화장실은 학생들의 은밀한 해방구였다. 작금 직장의 엄숙한 회의 중에도 자기도 모르게 종이에 낙서를 할 때가 있다. 그러다 상사와 눈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민망스럽기 짝이 없다. 이처럼 낙서질은 고금(古今)에 걸쳐 밀폐된 곳이나 공개된 곳을 가리지 않고 행해져 온 인류의 습관이다. 심리전문가들은 인간의 낙서를 본능에 가까운 행위로도 보고 있다.

고대 이집트 피라미드에서도 낙서가 발견됐었다. 피라미드 돌을 날랐던 인부들의 솔직한 얘기가 담겨 있다. '일은 혹사당하는데, 임금은 쥐꼬리' '공사 조장과 다퉈서 속상하다' '어제 과음으로 땡땡이쳤다' 현대인과 다를 바 없는 고대인의 소소한 일상이 흥미롭다. 피라미드 낙서 중엔 이곳을 여행한 영국의 낭만파 시인 바이런 것도 있고, 수에즈 운하를 완성한 프랑스인 페르디낭 드 레셉스의 것도 있다. 문화재 낙서 행위가 논란이 되는 것은 옛날에도 마찬가지였다. 한 예로 청나라로 떠난 조선의 사신들이 현지 유물에 낙서를 해 국가적 망신을 샀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최근 서울 경복궁 담벼락에 스프레이로 낙서한 이들이 처벌을 받게 됐다. 범행을 사주한 자가 10대 낙서범에게 "월 1천만원을 줄 수 있다"며 취업 제안을 했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소중한 문화유산을 훼손하는 행위는 어떤 이유로도 용납될 수 없다. 누구든 정 낙서를 하고 싶으면 개인 물건에 하라.

이창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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