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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흥분하여 출국하기 전 외화통장에서 유로화를 좀 찾았다. 어떻게라도 외손자의 기를 살려주고 싶었다. 만나자마자 크게 안고 엉덩이를 힘껏 쳤다.
"장하다. 내 손자!" 친척들의 박수가 쏟아졌다.
함께 온 여자 친구도 우리의 모습을 미소 띤 얼굴로 바라보았다. 고등학생 때부터 사귀어 온 친구라 나는 그전에도 두어 번 만난 적이 있었다. 예쁘고 붙임성 있는 여자애였다.
다음이 문제였다. 가방이 없는 외손자는 친척들이 준 선물들을 여자 친구의 가방 안에 잠시 보관하려고 했던 모양이었다. 가방으로 손을 내밀자 이변이 일어났다. 여자 아이는 쌀쌀맞게 외손자의 손을 옆으로 밀쳐내었다. 손가락이 어찌나 잽싸게 움직이는지 손은 없고 손가락만 살아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외손자를 바라보는 여자 아이의 시선이 싸늘하게 굳은 것을.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우리는 모두 어리둥절하여 젊은 커플을 보다가 옆 사람과 시선을 교환했다. 여자아이가 자리를 떴고 뒤이어 외손자가 따라 나갔다.
이상할 것도, 이상하지 않을 것도 없는 침묵이 잠시 흘렀다. 우리는 일제히 젊은이들이 나간 빈 현관문을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이 좋은 날에? 이 좋은 선물들을 앞에 두고서?
우리는 말을 아끼면서 조용히 식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나의 시선은 딸에게로 옮겨갔다. 나 뿐 아니라 친척들의 시선도 하나 둘 딸에게로 집중됐다. 딸이 드디어 무언가 입을 떼려 하자 사위가 손을 들어 막았다.
"기다려 봅시다. 스물다섯살이지 않소. 사내녀석의 스물다섯은 시작도 있고 끝도 있는 나이요. 곧 돌아오겠지요."
박기옥 수필가·대구문인협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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