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고산골에서 만난 보리밥
보리밥! 그 생각을 하면 지금 포항시 대보면 구만리 바다 언덕에 펼쳐질 '보리누름'에 가 닿습니다. 구만리 보리밭은 거의 10만평, 장관이죠. 기자도 초봄에 그곳에 다녀왔습니다. 봄엔 보리푸름, 초여름엔 보리가 누렇게 변해 구릿빛 자태를 뽐냅니다. 더없이 좋은 지역의 문화관광상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시절 여름철엔 보리밥이 인기 짱이었습니다. 쌀밥은 삼복 때 참으로 먹기 힘들었습니다. 목이 너무 마릅니다. 찰져 꼭 떡을 씹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보리쌀은 아니었습니다. 보리엔 행간이 있습니다. 꼭 시골 정자 그늘 같고, 삼베·무명을 닮았습니다. 무엇보다 밥알 중간에 박힌 등겨처럼 까끌까끌한 마디가 신세대들에겐 부담스럽지만 추억의 세대에겐 토속적으로 다가섭니다. 우물에서 길어 온 샘물에 보리밥을 몇 덩이 말고, 뒤란에서 따 온 풋고추와 햇된장이 가세하면 점심 끝입니다. 따글따글한 기세로 대청으로 쳐들어올 작정인 한 여름 대낮 마당의 열기도 이 '물보리밥' 한 그릇을 물리치진 못합니다 #지금은 '보리누름'의 계절 90년대초까지만 해도 보리밥은 보릿고개를 보낸 기성세대들에겐 어둑한 추억을 보여주는 먹거리여서 기피대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웰빙식'으로 소개되면서 전국에 보리밥 붐이 일어났습니다. 전주 비빔밥과 눈높이로 만날 순 없지만 보리밥은 퓨전 비빔밥처럼 인식됐죠. IMF 외환위기 직후 대구에서 보리밥 붐이 거세게 일어났습니다. 달성군 가창면 대림생수 옆이 대표적 보리밥촌이죠. 할매집, 새감나무집, 오복생수, 금강산 등 보리밥 전문점이 네 곳이나 모였습니다. 가격은 3천500원선. 80년대초부터 실버거리로 성장하기 시작한 대구시 중구 진골목 내 우리식당도 종로의 대표적 보리밥집으로 발돋움합니다. 고등어 조림에 콩비지 찌개, 무채무침 등 갖은 채소에 고추장·된장찌개 몇 숟가락과 참기름 한 방울 넣어 쓱쓱 비벼 먹는 보리밥 정식. 인심 좋으면 구운 토막 고등어도 따라 나옵니다. 물론 막걸리와 숭늉까지 놓여야 그림이 됩니다. 보리밥집이 잘 되자 나중엔 보리밥 뷔페도 생겨납니다. 고향정과 옹기 보리밥 전문 곤지곤지였습니다. 최근들어선 남구 봉덕동 고산골도 보리밥 계곡으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거기로 가봤습니다. #고산골은 '보리밥 계곡' 주말이면 이 거리에 곡식 파는 상인도 옵니다. 메밀, 햇콩, 흑태, 햇녹두, 결명자, 찰기장, 흑미,찰수수, 찹쌀, 현미, 찰보리쌀, 보리쌀 등이 고산골 분위기를 더욱 시골장터스럽게 만듭니다. 고산골에도 홍어처럼 '보리밥 3합'이 있습니다. 보리밥 곁에 반드시 고갈비(구운 고등어), 막걸리, 콩나물이 따라나옵니다. 요즘 이 거리에 보리밥집이 많이 생겼습니다. 원조는 고산골 할매 보리밥입니다. 그 다음에 생긴 건 고산골 연탄돼지갈비였습니다. 여긴 심야에 더 붐빕니다. 더 위쪽으로 걸어올라갔습니다. 3년 전에 생긴 선미식당은 초저가 콩나물 국밥집으로 유명하죠. 국밥 한 그릇이 1천원. 반찬은 깍두기 하나뿐. 그 가격에 맛 여부를 따지는 게 면구스럽습니다. 단골은 거의 등산객들입니다. 땀 빼고나서 콩나물 한 그릇, 거기에 막걸리 한 잔도 짠합니다. 이밖에 밀양집, 청림식당, 고산골 쉼터, 고산골 쉬어가는 집, 새 용두골 식당, 보리밥 보금식당(우거지 국밥 1천500원), 신토불이 옛날 보리밥, 싸리집 할매, 삼거리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왼편에 숲속 민속주점처럼 생긴 장날과 봉봉 보리밥 뷔페도 보입니다. 장날에는 주옥 같은 7080 음악이 샘물처럼 흘러나옵니다. 5년 전 문을 열었을 땐 라이브 가수도 있었지만 최근 보리밥 집이 너무 생겨 손님이 덜 온다네요. 장날은 보리밥 대신 고사리 들어간 비빔밥을 주로 팝니다. 밥이 입에 물리면 1천원짜리 잔치국수도 좋습니다. 이밖에 이 고산골에는 보리밥 붐을 타고 국일따로 고산점, 선지국 전문 할매집, 삼천포 콩나물국밥, 우리 콩두부, 청도 추어탕(추어탕 국수는 3천원), 실비집 같은 노다지 막횟집(참도루묵 구이) 등이 뛰어들었습니다. 본격적으로 등산이 시작되는 초입 진열대에 놓인 웰빙빵도 눈길을 끕니다.
2007.0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