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욱의 시선-비 오는 날, 창밖을 보면서 해야할 일은?

  • 김진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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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8-18 17:26  |  수정 2021-08-19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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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욱 교육인재개발원장 겸 CEO아카데미 부원장

"비 오는 날 , 창밖을 내다보면서 떠오르는 사람이 없다면 참 서글플 것 같다. 여자든 남자든 상관없이…"


30년전 필자가 입사했을 무렵, 당시 40대였던 선배 여기자에게 들은 말이다.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 그것도 빨간 장미를 사야 할 것 같은 비 오는 수요일에 창밖을 보고 있노라면, 그 선배의 말이 떠오른다. 어떤 사람에게는 떠오르는 얼굴이 지금도 볼 수 있는 사람이지만, 또 다른 어떤 이에게는 지금은 볼 수 없는 아련한 사람일 수도 있다.

비 오는 날 창밖을 보는 것이 아니더라도, 누구에게나 어떤 현상을 보면 생각나는 것들이 있다. 그게 사람일 수도 있고, 상황일 수도 있다. 각 자 다른 경험과 생각을 바탕으로 해서 떠오르는 것들이다.

얼마 전 SNS에서 본 한 장의 사진은 필자에게 또 한번 '멋지게 늙어가기' 것에 대한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90대로 추정될 정도로 아주 굵은 주름을 가진 외국인 할아버지, 할머니가 마주 보면서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실제 부부인지 아니면 실버모델인지 알 수 없지만, 깊게 파인 주름 많은 얼굴을 보면서도 "여전히 멋지다" "여전히 이쁘다"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이 사진을 보면서 필자는 오래전에 봤던 할리우드 영화 '레터스 투 줄리엣(Letters to Juliet)'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남편과 사별한 할머니가 10대때 만났던 첫사랑을 찾아 나서는 줄거리의 영화다. 첫사랑의 이름만 들고 50년 전에 흠모했던 사람을 찾으러 나선 할머니는 같은 이름의 여러 할아버지를 만났지만, 정작 첫사랑을 찾지는 못한다. 첫사랑이 이미 세상을 떴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 할머니는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 온다. 돌아 오는 길에, 할머니는 "저 사람이다"면서 어느 농장에서 일하던 10대 남자를 가리킨다.

10대 남자는 첫사랑의 손자였고, 첫사랑은 그 농장의 주인이 돼 있었다. 첫사랑의 존재를 확인한 할머니는 농장 안쪽 멀리서 자신에게로 오고 있는 첫사랑을 보자, 갑자기 만나지 않고 돌아가려 한다. 10대 남자를 보고 첫사랑이라고 말한 것처럼, 첫사랑도 할머니를 10대의 모습으로 기억하고 있을 텐데, 지금 같은 주름진 얼굴을 보여주기 싫어서였다.

할머니가 떠나려는 순간 첫사랑이 나타났다. 첫사랑은 할머니를 보자마자 알아본다. 그러면서 했던 말이 멋졌다. 정확한 멘트는 기억나지 않지만 요지는 이랬다. "내 눈에는 여전히 17살때의 이쁜 모습 그대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늙고 초췌한 모습을 보이기 싫은 건 여자만 그렇게 아니다. 남자도 마찬가지다. 필자가 퇴계 이황과 기생 두향의 애틋한 사랑 을 떠올린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퇴계는 은퇴 후 안동의 집에서 머물 때, 단양군수 시절 만난 40살 연하의 두향이가 선물로 준 매화를 방안에 두고, 매화를 좋아했던 두향이를 보듯이 했다. 그러다 퇴계는 늙고 병들어 자신의 모습이 초췌해지자 매화를 밖에 두게 한다. 매화를 두향이로 인식했던 퇴계는 자신의 늙고 초췌한 모습을 두향이에게 보여주기 싫었다.

그런데 두향이 눈에도 늙고 초췌하게 보였을까? 아니라고 본다. 두향은 퇴계가 세상을 떠나자, 스스로 강물에 몸을 던져 퇴계의 뒤를 따랐다. 그만큼 퇴계를 존경하고 사랑했던 두향이기에, 퇴계의 어떤 모습도 멋지게 봤을 것 같다. 우리나라 화폐 1천원권의 한 면에는 퇴계의 얼굴이, 그리고 배경에는 매화가 새겨져 있다. 매화는 곧 두향이다. 1천원의 화폐를 디자인한 사람도 필자와 같은 마음으로 퇴계와 두향의 사랑을 바라봤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은 늙어도 여전히 멋지게 보일 것으로 믿는다. 노후의 멋진 모습은 외모가 아니다. 성품, 배려, 경제력 등이 노후의 멋진 모습을 결정한다. 가끔은 창밖의 비를 바라보면서, 늙어서 멋지기 위해 지금 내가 뭘 해야 할지 생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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