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타워] 대통령의 시간

  • 이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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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3-10   |  발행일 2022-03-10 제23면   |  수정 2022-03-10 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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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경 정치부장

참으로 전쟁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선물 보따리를 풀 듯 선거 공약을 비교하며 꿈과 희망으로 설레야 했습니다. 다투어 내놓는 장밋빛 미래에 행복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렇게 축제처럼 승자를 축하하고 패자를 위로하며 대통령 선거를, 민주주의를 즐겼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형수 욕설, 대장동 게이트, 법인카드, 쥴리, 주가 조작, 장모 사기, 주술 등등 입에 올리기조차 부끄러운 의혹들로 선거 운동 기간 내내 '귀에서 피가 나는 듯' 힘들었습니다. 국민은 내 편이 아니면 적, 둘로 갈라졌습니다. 선과 악의 이분법 속에서 나의 말은 너에게 닿지 않고, 너의 목소리는 나에게 들리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무거운 마음으로 투표를 했던 적이 또 있었던가 싶습니다.

적대와 증오와 분열로 가득했던 시간을 이겨내고 오늘, 대통령께서는 '승리'하셨습니다.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대통령 당선'이라는 기쁨에 취해 있을 이 좋은 날, 조금 일찍 푯값의 청구서를 내밀어봅니다. 선거가 끝나도 우리의 삶은 계속되어야 하니까, 또 정치인들이란 선거 기간에만 시민을 주권자 자리에 올려두고 목소리에 잠시라도 귀를 기울이니까, 조급한 이 마음을 탓하지 마십시오.

"첫째도 통합, 둘째도 통합, 셋째도 통합이다." '한국의 불행한 대통령'을 지은 라종일 가천대 석좌교수가 어느 인터뷰에서 차기 대통령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 꼽은 것입니다.

전쟁 같은 시간을 지나 지금 우리에게 남은 것을 생각합니다. 대통령 선거 한 번 치르고 나니 나라는 아예 '분단'되었습니다. '미움의 선거'에서 이긴 지지자들은 벌써 통쾌한 복수를 기대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적폐'니 '공정'이니 '개혁'이니, 그럴듯한 명분을 앞세우며 목소리를 높일 것입니다. 하나 권력은 섣불리 휘두르는 순간부터 빛을 잃고 훼손되기 마련입니다. 승리한 대통령에게 이제 더는 지지자나 반대자는 없습니다. 집토끼나 산토끼도 없습니다. 오직 국민이 있을 뿐입니다. 그 국민이 이념과 지역, 세대와 젠더로 갈가리 찢겨 있습니다. 모두 정치가 빚었고 선거를 거치며 강화된 현실입니다.

그래서인지 대통령 선거 한 번 치르고 나니, 선거가 더는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더욱 듭니다. 새 대통령의 역사적 과제가 '87 체제', 6공화국 정치체제 패턴을 바꾸는 일이라는 말이 또다시 반복되는 까닭입니다. 정권이 연장됐는데도 정책이 바뀌거나 뒤집히고, 어렵게 합의돼도 지속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정권이 바뀌면 결론도 바뀌고 진실마저 바뀌는 일이 허다했습니다. 제로섬 게임의 양강 체제가 막대한 비호감 속에 어찌어찌 지탱되면서 이번 선거까지 온 것입니다. 상대의 실패가 나의 성취가 되는 '싸움의 정치'로는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이끌어 갈 수도 미래를 이야기할 수도 없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한 삶의 양극화와 경제 저성장, 북핵과 미·중 패권 경쟁의 위협으로 인한 외교 불안, 수도권 집중에 따른 불균형과 지역의 소멸, 이상 기후에 따른 환경 위기까지 눈앞에 닥친 대한민국의 문제는 다양할 뿐 아니라 심각합니다. 삶은 고단하고 빈부 격차는 크고 미래는 불안합니다. 이 지경을 만들어놓았지만, 우리 앞의 수많은 난제를 풀 수 있는 것 역시 결국은 정치의 몫입니다. 다시 시작된 새 대통령의 시간에 희망을 품어보는 아침입니다.
이은경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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