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의 직터뷰] 천주교 대구대교구 정홍규 신부 "24세때 조선 파견 '왕벚꽃 신부 에밀 타케'의 삶 韓·佛에 알리고 싶어"

  • 이창호,이현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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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4-01-31 08:22  |  수정 2024-01-31 08:22  |  발행일 2024-01-31 제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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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홍규 신부가 영남일보 편집국에서 에밀 타케 신부의 삶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정 신부는 "타케 신부 스토리는 지역의 소중한 역사·문화 자산"이라고 강조했다. 이현덕기자 lhd@yeongnam.com

옛 일제강점기 때 대구 유스티노신학교(현 대구가톨릭대학 유스티노캠퍼스) 학장을 지낸 '엄택기(嚴宅基·1873~1952)'라는 신부가 있었다. 한국인이 아니다. 프랑스인 '에밀 타케(Emile Taquet)' 신부다. 1897년 24세 때 사제가 된 뒤 조선에 파견돼 사목 활동을 펼친 선교사다. 그는 제주도에 최초로 감귤나무를 심은 것은 물론 우리나라 왕벚나무 서식지를 발견해 유럽 학계에 처음으로 보고한 이다. 그때가 1908년 4월이었다. 한라산 해발 600m 지점에서 자생하고 있던 왕벚나무였다. 왕벚나무 원산지가 조선임을 알린 역사적인 일이다. 나흘 전인 지난 27일은 타케 신부가 79세 나이로 대구에서 선종(善終)한 지 72주기 된 날이었다. 이런 타케 신부의 삶을 고집스럽게 연구해 온 신부가 있다. 천주교 대구대교구 원로사제인 정홍규(69·에밀 타케 식물연구소 이사장) 신부다. 그가 최근 '왕벚꽃 신부 에밀 타케'(대건인쇄출판사)라는 책을 펴냈다. 그를 만나 타케 신부가 어떤 사람인지, 대구와의 인연은 어떠했는지, 나아가 왕벚나무를 비롯한 '식물 주권'이 왜 중요한지를 들어 봤다.

▶앞서'에밀 타케의 선물'(2019년)·'식물십자군'(2022년)이라는 책을 내셨습니다. 이번엔 '왕벚꽃 신부 에밀 타케'인데요. 흥미로운 내용을 소개해 주신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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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홍규 신부가 최근 펴낸 '왕벚꽃 신부 에밀 타케' 표지.

"책을 만들면서 타케 신부의 편지글이 자꾸 눈에 밟혔어요. 이분이 20대 때 조선에 와서 무려 54년간 계셨어요. 선종 때까지 단 한 번도 고국에 돌아가지 못했죠. '매일 어머니를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입니다.(이하 생략·1932년 타케 신부가 고향의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내용의 일부)' 이 대목에선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시(詩)나 노래 속에 담긴 그 어떤 그리움보다 더 절절한 그리움을 타케 신부가 품고 있었다는 생각을 하니…. 아울러 그가 조선으로 오기까지 3개월의 여정 속에서 자신의 심정을 담은 선상일기도 인상적이었고요. 타케의 이런 삶을 신부의 증증 조카인 테디 또리옹(28·프랑스 고서 보관소 사서)씨가 연구해 논문으로 낸 내용 등을 엮어 이 책에 담았습니다. 자기 선조가 100년도 훨씬 전 한국에서 왕벚나무도 발견했고, 신학교 학장도 했으니…. 또리옹씨 논문은 일종의 '가문의 영광'에 대한 오마주이지요. 그동안 우리나라에선 이런 자료를 전혀 찾을 수 없었죠."

▶타케 신부의 삶, 특히 식물 채집의 궤적을 좇게 된 계기는 무엇인지요.

"2014년, 대구 남산동 한 주민이 제보를 해 왔어요. 그분 얘기는 '타케 신부가 1920~30년쯤 천주교 대구대교구 안에 왕벚나무를 심었는데, 한때 태풍으로 죽어가던 나무를 자기 할아버지가 막걸리를 뿌려 줘 살렸다는 얘기를 들었다'는 거예요. 순간 호기심이 생겼죠. 교구청에서 수년간 근무한 제가 타케 신부 묘가 교구청 성직자 묘역에 있고, 왕벚나무도 교구청 내 고택 옆에 심어져 있는 걸 알고 있었지만, 정작 이분과 왕벚나무의 스토리는 전혀 알지 못했죠. 그때까지 우리나라에서 타케의 삶이 한 번도 조명된 적이 없었어요. 왕벚나무 스토리에 대한 무지(無知), 심지어 교구청 왕벚나무를 일본 '사쿠라'로 치부하기까지 했으니…. 그런 뼈아픈 반성에서 '타케'를 파기 시작했습니다."

▶타케 신부가 왕벚나무를 대구에 심은 이유가 궁금합니다.

"타케 신부는 조선에 와 순회 사목을 하다 1922년 대구로 오게 됩니다. 앞서 13년간 제주도에서 펼친 식물 채집의 추억을 잊지 못해 남산동에 왕벚나무·당광나무 등을 심었던 것 같아요. 나이테를 조사해 타케 신부가 대구에 있은 연도와 비교해 보니 그가 심은 게 확실하다는 결론을 냈습니다. 1964년 대구대교구청 화재로 그분과 관련된 사료가 모두 소실됐어요. 불만 안 났다면 좀 더 디테일한 스토리를 찾을 수 있었을 텐데…."


"제주도에 최초 감귤나무 심고
한라산 왕벚나무 서식지 발견
유럽 학계에 처음 보고하기도
54년간 사목 활동, 고국땅 못 가"

"1920~30년쯤 대구대교구청 안
왕벚나무 심은 얘기 전해 들어"

"佛 고향마을에 왕벚나무 심어
타케신부 묘 모신 대구대교구와
유럽인 생태 관광 연결됐으면"



▶알면 알수록 타케의 삶이 흥미롭습니다. 앞선 제주도에서의 식물 채집 스토리를 짚어 주시겠습니까.

"타케 신부는 원래 식물학에 조예가 전혀 없었어요. 발령받아 온 제주도, 막상 먹고살 일이 없었던 거예요. 선교할 때 자금이 필요하잖아요. 궁리 끝에 시작한 게 감귤 나무 심기였죠. 그게 오늘날 제주 감귤 산업의 출발점이 됐죠. 아울러 당시 세계적으로 식물 채집이 유행처럼 번졌어요. 때마침 제주도에 온 선배 신부인 포리로부터 식물 채집 노하우를 전수받았죠. 당시엔 식물 묘목(또는 씨앗)을 유럽에 보내면 돈을 벌 수 있었어요. 그 돈으로 성당 터도 사고 선교 사업에 쓴 것이죠. 타케 신부가 제주도에서 식물을 채집해 전 세계에 보낸 것만도 2만여 종, 학명에 '타케'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만 해도 125종에 이릅니다. 그만큼 세계 식물학사에서 공로가 큰 분입니다."

▶여전히 벚나무 원조 논쟁이 있습니다.

"타케 신부가 1912년 독일 학계에 보고할 땐 우리 왕벚나무는 일본 왕벚나무인 사쿠라(소메이요시노)의 변종으로 신고됐어요. 타케가 변종으로 신고한 게 아니라 독일에서 감정을 그렇게 해버렸지 뭡니까. 앞서 1901년 일본 사쿠라가 독일 학회에 먼저 신고되는 바람에 사쿠라를 원조로 판단한 것이죠. 아직도 학명은 '프루누스 예도엔시스마쓰무라(Prunus yedoensis Matsumura)'로 돼 있습니다. 학명은 수정이 안 된다고 하니 안타까운 일이죠."

▶몇 해 전 한국과 일본의 왕벚나무는 별개라는 유전체 분석 결과가 나왔는데.

"결코 동의하지 않습니다. 일본에만 좋은 일입니다. 일제 강점기 때 우리나라 거의 대부분의 식물이 일본에 유출됐습니다. 또 그 식물 학명에 버젓이 일본 이름이 달려 있어요. 왕벚나무도 그 가운데 하나고요. 원산지는 하늘 두 쪽 나도 제주도입니다. 일본 소메이요시노는 재배종인 반면 우리 왕벚나무는 엄연한 자생종이기 때문입니다. 일본 식물학계도 소메이요시노 원산지를 물으면 '연구 중'이라는 궁색한 답만 해요."

▶경주에 토종 'K-왕벚나무'를 심었다고 들었습니다.

"5년 전쯤 경주 남산동에 200그루를 심었죠. 지금 제법 컸습니다. 더 심어야 합니다. 진해 벚꽃축제가 유명하잖아요. 거기 나무 100%가 일본산 소메이요시노입니다. 경주 김유신로에 있는 벚나무도 소메이요시노이고. 소메이요시노가 나쁘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래전 우리나라에 들어와 나이도 많이 들었으니 이젠 바꿀 때가 됐습니다. 이참에 병충해에 강하고 아름다운 토종 왕벚나무를 키우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K-나무'를 널리 알리고 대한민국 '식물 주권'을 지키는 길입니다."

▶'K-나무' 한류(韓流)를 기대해 봄 직합니다.

"이미 일본은 사쿠라를 미국 워싱턴에, 프랑스 파리에 심어 놨어요. 우리도 왕벚나무를 에밀 타케의 프랑스 고향 마을에 심을 필요가 있습니다. 거기에 제주도 상징인 돌하르방도 함께 설치해 놓으면 금상첨화고요. 우리만의 방식으로 '지구의 아름다움'에 기여할 수 있는 길입니다. 아울러 대구에서도 타케 신부의 묘가 있는 천주교 대구대교구청 일대를 프랑스 등 유럽인의 생태 관광으로 연결하면 좋을 것 같아요. 타케가 끝내 고국에 돌아가지 못한 사실도 프랑스인에겐 흥미로운 스토리가 된다는 것이죠. 관계 당국이 관심을 가져야 할 대목입니다."

정 신부는 지난 30여 년간 환경·생태운동, 대안학교 운영 등 활발한 사회 운동을 펼쳐 왔다. 2019년 대구가톨릭대 사회적경제대학원장을 끝으로 은퇴해 경주에서 원로사제로 지내고 있다. 그는 "원로 사제가 되면서 결심한 게 있었다. '더 빠르게 살지 말고, 더 느리게 살면서 최선의 목표를 위해 내 마지막 에너지를 쏟아보자'였다"고 했다. 스스로에게 내린 미션은 인간과 식물의 관계를 회복해 건강하고 행복한 사회를 만드는 일이다. 그는 시쳇말로 '하고집이' 신부님이다. 그 열정이 아름답다. 일흔을 앞둔 연세에도 늘 소년 같은 표정을 짓는다. 비결이 뭘까. 아마 '세상과 소통하려는 호기심'이 아닐까. 정 신부와 대화를 나누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창호 논설위원 leec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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