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규의 수류화개] 봄버들(2)…아이들이 부는 '버들피리' 마을안녕 기원 '당산나무' 연인의 애틋한 '詩 소재'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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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3-25   |  발행일 2022-03-25 제34면   |  수정 2022-03-25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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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도산서원 앞 왕버들. 4월 하순의 모습이다.

버들(버드나무)은 전 세계적으로는 520여 종이 있고, 우리나라에는 40여 종이 있다고 한다. 왕버들, 수양버들(실버들), 능수버들, 갯버들 등 다양하다. 수백 년 된 크고 오래된 버들은 대부분 왕버들이다. 왕버들과는 달리 수양(垂楊)버들은 이름 그대로 가지를 실처럼 아래로 드리우며 자란다. 원산지가 중국인 수양버들은 고려수양(高麗垂楊)이라고도 불리는 능수버들과는 차이가 있으나 일반인이 구별하기는 쉽지 않다.

버들은 암수 딴 그루지만, 드물게는 한 그루에 암꽃과 수꽃이 함께 있는 경우도 있다 한다. 하천 제방이나 고수부지, 호숫가 같은 데서 잘 자란다. 버들은 잘 살고 성장도 빠르다. 봄버들의 정취를 가까이서 느껴보기 위해 10년쯤 전에 시골 밭에 수양버들 한 그루를 심었는데, 너무 잘 자라는 걸 확인하고는 그대로 둘 수가 없어서 재작년에 베어 버린 적도 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봄버들은 시골 아이들의 즐거운 놀이 도구 중 하나인 버들피리의 재료였다. 물이 오른 버들가지는 양쪽을 잘라서 껍질만 통째로 남기고 나무 심지를 빼낼 수 있다. 그리고 입술이 닿을 한쪽을 얇게 다듬어 소리가 나게 하면 된다. 연주까지 해 보려면 적절히 몇 개 구멍을 뚫으면 된다. 시골에서 자란 사람들은 누구나 이런 추억이 있을 것이다.

수양·능수·갯버들 등 국내 40여종 자생
하천제방·고수부지·호숫가서 잘 자라
경산 반곡지·청송 주산지 왕버들 군락

성주 성밖숲 수령 300~500년 고목 유혹
흉사 막는 비보림…천연기념물로 지정

조선 기생 홍랑이 연인 최경창과 이별
애절한 마음 버들가지 꺾어 詩와 보내
국내 문학사 중 가장 아름다운 사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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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 성밖숲 왕버들의 늦가을 풍경.

◆대표적 왕버들

봄버들은 이른 봄날 정취를 만끽하거나 멋진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의 발길을 유혹하기도 한다. 그 대표적인 버들 숲이 경산 반곡지 왕버들과 성주 성밖숲 왕버들, 청송 주산지 왕버들 등이다. 반곡지 둑에는 200년 정도 된 왕버들 20여 그루가 있고, 성밖숲에는 300~500년 된 왕버들 50여 그루가 하천 옆에 자라고 있다. 주산지에는 물이 차고 빠지는 못 바닥에 수령 300년 정도의 왕버들 20여 그루가 있다.

이들 왕버들 군락지와 함께 의성 사곡 토현리 왕버들(수령 400년 추정), 안동 도산서원 왕버들(수령 400년 추정) 등 곳곳에 오래된 왕버들 고목이 자라고 있다. 왕버들은 느티나무처럼 옛날 마을에서 마을 안녕 기원 제사를 지내는 나무인 당산나무 역할을 하기도 했다.

성주 성밖숲 왕버들은 보기 드문 왕버들 고목 군락으로, 1999년 천연기념물 제403호로 지정되었다. 성주읍 경산리 하천 변에 있는데, 1만5천㎡에 300~500년 된 왕버들 50여 그루가 숲을 이루고 있다. 큰 나무는 둘레가 6m, 높이가 16m나 된다.

이 왕버들숲은 마을의 흉사를 막기 위한 비보림(裨補林)으로 조성됐다고 한다. 정확한 시기를 특정할 수는 없으나 당시 서문 밖 마을에서 아이들이 까닭 없이 죽는 등의 흉사가 이어졌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그 원인을 두고 '마을의 족두리바위와 탕건바위가 서로 마주 보고 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리고 두 바위 사이 중간 지점에 숲을 조성하면 재앙을 막을 수 있으리라는 한 지관의 말에 따라 성주읍성의 서문 밖 이천 옆에 밤나무숲을 만들게 되었다. 숲을 조성하자 우환이 사라졌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마을의 기강이 해이해지고 민심이 흉흉해지자 주민들은 이 숲의 밤나무를 베어내고 왕버들을 심어 새 숲을 조성했다.

그 이후 왕버들 숲은 지금까지 살아남아 다른 곳에서는 보기 어려운 장관을 보여준다. 이후로도 위기는 많았다. 잠업이 성행할 때는 왕버들을 베어내고 뽕나무밭을 만들자는 움직임도 있었지만, 숲을 살려야 한다는 여론이 우세해 왕버들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주민들이 대를 이어 가며 노력을 쏟은 덕분에 잘 보존돼 온 이 왕버들 노거수숲은 그 가치를 인정받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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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 작 '마상청앵도'(부분).

◆홍랑과 묏버들

버들과 관련한 여러 습속이 전한다. 그중 하나로 중국에서는 헤어지는 사람에게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주며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는 풍습이 있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이와 관련해 버들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멋진 한글 시가 있다. 조선 시대 기생 홍랑(洪娘)의 시조다.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임에게/ 주무시는 창밖에 심어 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잎 나거든 나인가 여기소서'

홍랑이 연인인 고죽(孤竹) 최경창(1539~1583)과 이별하며 지은 시다. 연인을 떠나보내는 애절한 마음을 버들가지를 빌려 표현한 이 작품은 우리나라 문학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 시로 꼽힌다. 당대의 대표적 문장가이자 선비인 최경창과 홍랑의 사랑 이야기는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사연을 담고 있다.

뛰어난 시인이기도 한 최경창은 1568년 문과에 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거쳐 1573년 함경도 북평사(北評事·병마절도사의 문관 보좌관으로 함경도와 평안도에 파견된 병마평사의 약칭)로 부임하면서 함경도 홍원 태생의 기생인 홍랑과 인연을 맺게 된다.

최경창은 1573년 가을, 서른넷의 나이로 북평사에 임명돼 함경도 경성에 부임했다. 경성은 국방의 요지였다. 이런 군사 요충지인 변방지역에 관리가 부임할 때는 처자식을 데려가지 않고 혼자 가는 것이 당시 원칙이었다. 그리고 관리가 부임하면 관청 소속 기생들을 소집해 점검하는 '점고(點考)'가 진행된다. 최경창도 부임 후 경성 관아의 기생들이 인사를 올리는 '점고'를 받게 되었다. 최경창은 이날 저녁 연회에서 홍랑과 운명적인 만남을 가지게 된다.

전남 영암 출신인 최경창은 문장과 학문에서 뿐만 아니라 서화에도 뛰어나고, 악기에도 능했다. 어릴 적 영암에 왜구들이 쳐들어왔을 때 구슬픈 피리 소리로 왜구들의 마음을 움직여 물러가게 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였다. 또 약관의 나이 때 송강 정철, 구봉 송익필 등 당대의 대가 시인들과 시회(詩會)를 하면서 그의 실력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조선 팔문장(八文章)'의 한 사람이기도 했던 그는 시의 경우 당시(唐詩)에 특히 뛰어나 '조선 팔문장' 중 옥봉 백광훈, 손곡 이달과 함께 '삼당시인(三唐詩人)'으로도 꼽혔다.

이날 기생 점고에 이어 최경창의 부임 축하 연회가 열렸다. 연회가 무르익어가는 가운데 기생으로서 재능과 미모에다 문학적 소양까지 겸비한 홍랑이 시 한 수를 음률에 맞춰 읊었다. 그런데 홍랑이 읊은 시는 놀랍게도 최경창의 작품이었다. 최경창은 시창을 다 듣고는 내심 놀라워하면서 홍랑에게 넌지시 읊은 시를 좋아하는지, 그리고 누구의 시를 좋아하는지 물었다. 홍랑은 "고죽 선생의 시인데 그분의 시를 제일 좋아한다"라고 대답했다.

이렇게 두 사람의 각별한 인연이 시작되었다. 최경창과 홍랑은 서로 정신적으로 잘 맞는 도반이 될 수 있음을 알게 되고, 또 사랑도 나눌 수 있는 처지가 되었기에 날이 갈수록 두 사람의 사랑은 깊어갔다. 홍랑이 최경창의 군막에까지 드나들 정도로 두 사람은 잠시도 서로 떨어져 있으면 안 되는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행복한 시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6개월이 지난 이듬해 봄 두 사람에게 이별해야 하는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최경창이 조정의 부름을 받아 한양으로 돌아가야만 했기 때문이다.

홍랑은 몸살을 앓을 정도로 마음을 다스리기가 어려웠다. 최경창이 한양으로 떠나던 날 홍랑은 최경창과 조금이라도 더 함께 있고 싶었다. 그래서 경성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쌍성(雙城)까지 따라갔다. 더 따라가고 싶었으나 멈춰서야 했다. 다른 지역으로 벗어날 수 없는 관기였기에 더 이상은 따라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기생은 관할 관아에 속해 있는 존재였기 때문에 해당 지역에서 벗어나 다른 지역으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도록 규제를 받았다.

홍랑은 최경창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다 돌아서야만 했다. 최경창도 눈물을 삼키며 다음을 기약하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홍랑이 최경창을 보내고 돌아올 때 함흥으로부터 70리 밖에 있는 함관령(咸關嶺)에 이르자 날은 어두워지는데 비까지 내렸다. 그곳에 잠시 머물면서 애틋한 사랑의 마음을 담은 시조 '묏버들 가려 꺾어'를 지었다. 그리고 이 작품과 함께 길가의 버들을 꺾어 최경창에게 보냈다.

최경창은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홍랑이 함관령에 이르렀을 때 날이 저물고 비가 내렸다. 이곳에서 홍랑이 내게 시를 지어 보냈다.' 최경창은 나중에 홍랑의 이 시조를 한문으로 번역하고 '번방곡(飜方曲)'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번방곡은 아래와 같다.

'버들가지 꺾어 천 리 먼 곳 그대에게 보내니(折楊柳寄與千里人)/ 나를 위해 뜰 앞에 심어 두고 보기 바랍니다(爲我試向庭前種)/ 하룻밤 지나 새잎 돋아나면 알아주세요(須知一夜新生葉)/ 초췌하고 수심 어린 눈썹의 이 몸인 줄을(憔悴愁眉是妾身)'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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