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욱 큐레이터와 함께 '考古 go! go!'] 발굴은 지금도 진행 중: 새롭게 드러나는 이야기들
고고학자라면 누구나 자신만의 최애 사이트(발굴 현장을 지칭함)가 있기 마련이다. 그곳이 생애 첫 발굴 현장일 수도 있고 아주 특별한 유적일 수도 있다. 나의 첫 고고학 발굴은 울산 울주군 봉계리의 청동기 집터 유적이었다. 1998년 겨울 매서운 눈바람이 불 때 시굴조사를 시작해 이듬해 초여름까지 발굴이 이어졌다. 그때만 해도 유구(집터나 무덤, 가마 등 시설물을 의미함)의 형태나 그 경계선(어깨선), 문화층을 잘 구분해내지도 못했으며 선배들이 뒷주머니에 꽂고 다니는 트라울(Trowel, 발굴할 때 사용하는 도구로 일종의 흙손이지만 당시 발굴 현장에서는 책임자를 상징하던 것이었다)을 사용해 보는 것이 꿈이었던 때였다. 팔거산성 목조 집수지, 실물자료 부족한 신라건축 연구에 도움고고학자들 발견한 대구지역 유물들…고대역사 새로 쓴 계기우리나라 발굴 전성기 지났지만 교육 등 관련 사업개발 가능성경산 소월리 발굴 얼굴토기 다양한 표정 활용 이모티콘 만들기도
2000년대에 들어서는 발굴 현장 경험을 점점 쌓아갔다. 그중에서 경부고속도로를 확장하던 사업 구간에서 내 손으로 처음 신석기시대 빗살무늬토기를 발굴했을 때의 흥분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때만 해도 대구의 역사는 기원전 10세기경에 시작되었던 것으로 보았을 때라 신석기시대 유적의 존재를 보여주는 빗살무늬토기의 발굴은 대구의 역사를 새로 쓸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자료였다. 이후 대구에서는 신석기시대 유적뿐만 아니라 구석기시대 유적도 확인되었다. 이후 대구 욱수동의 석실묘를 발굴하면서 고분 유적에 대한 관심이 커지기 시작하였고 경북 고령 지산동고분군과 대구 괴전동고분군, 경북 경산 신상리고분군, 울산 하삼정고분군, 경북 왜관 낙산리고분군 등 고분 발굴의 경험이 이어지면서 자연스레 고분 연구자로 성장할 수 있었다. 어느 분야든 한 명의 고수가 등장하기까지 많은 희생과 기다림이 있듯이 고고학 또한 마찬가지일 테다. 혹자는 아직도 우리나라에 발굴할 게 남아있냐고 묻는다. 해방 후 우리 손으로 첫 발굴을 진행한 후 1990년대까지는 국립기관이나 대학박물관이 발굴을 주도하였으나 그 이후 발굴 전문기관이 주도하면서 국토개발이라는 이유로 많은 유적이 발굴되었다. 현직 발굴 전문기관 종사자들의 견해를 빌리자면 이제 발굴 전성기는 지났다고 한다. 이제 발굴 전문기관이 발굴 외에도 문화유산 교육이나 서비스 등 또 다른 문화사업도 적극 계발해야 할 때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에도 발굴은 계속되고 있다.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주위를 살펴보면 고고학 현장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도로를 달리다 저 멀리 언덕에 나무가 다 베어져 황토가 드러난 현장에 파란색 천막이 띄엄띄엄 덮여있는 것을 보게 된다면 이는 틀림없이 발굴 현장이다. 또한 우리가 사는 도심지의 주택이나 사무실 옆에서도 발굴이 진행되기도 한다. 따라서 오늘은 최근 몇 년간 우리 지역의 역사를 새롭게 쓴 주요 발굴을 살펴보고자 한다. 최근에도 도로를 개설하거나 넓히기 위해, 아파트를 짓기 위해, 산업단지를 조성하기 위해, 주차장이나 근린생활시설을 짓기 위해 많은 발굴이 진행되었다. 이렇게 조사된 유적은 신석기시대의 생활유적, 청동기시대의 삶의 공간인 주거지와 죽음의 공간인 고인돌, 삼국시대의 무덤과 집자리, 신라 도성의 방어시설, 옛 절터, 토지신과 곡식신에게 한 해 풍요를 기원하던 사직단 등 그 규모나 성격이 아주 다양했다.이 중에서 특히 언론에 주목을 많이 받았던 유적이 있다. 경산 와촌의 소월리에서는 자그마한 구덩이에서 사람 얼굴모양 토기가 발굴되었는데, 이 토기에는 눈, 코, 입, 귀가 표현되어 있고 눈과 입 모양을 각각 달리하여 무표정한 듯, 심각한 듯, 또는 말을 하는 듯한 표정을 삼면에 연출하였다. 최근 문화재청에서는 이 토기의 얼굴모양을 활용하여 이모티콘을 제작하여 새로운 콘텐츠로 활용하고 있다. 대구 칠곡에서는 구암동고분군 중 주요 고분이 지속적으로 발굴되었다. 56호분의 재발굴에 이어 이와 연접한 58호분의 발굴, 그리고 5호분의 발굴로 이어졌으며 현재는 304호분 발굴이 진행되고 있다. 이 발굴에서는 11자형 주부곽의 형태와 돌무지 봉토를 석열로 구획하였던 방법을 면밀하게 조사하였으며 대형분 옆 중소형분의 배치 관계도 밝혀냈다. 또한 구암동고분군과 밀접한 관계에서 축조된 함지산의 팔거산성에서는 나무로 만든 집수지(식수 등 물을 모으기 위한 시설물)가 확인되었는데 부재의 결구 방법이 잘 남아있었고 그 축조 방법을 잘 알 수 있었다. 이 나무 부재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고 실물자료가 거의 없는 신라건축 연구에 아주 중요한 자료로 시간이 지남에 따라 부식이 심하게 진행되는 유기물이라 조속한 과학적인 보존처리가 필요했다. 하지만 그 무게가 4.5t이나 되고 산 위에 있어 차량 진입이 어려운 상황이라 산림청의 협조를 받아 산림항공기편으로 이송하는 일도 있었다. 그 외에도 주목할 발굴은 더 있다. 1939년 이후 80년 동안 고고학 조사가 전혀 없었던 대구 대명동고분군을 발굴해 원삼국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 지속적으로 고분이 축조되었음을 확인하였고 주변 정치체와의 교류관계도 추정할 수 있었다. 경북 성주 성산동 제22호분은 성주의 전형적인 고분 축조 방법에 따라 축조되었고 최근 여기서 출토된 유물 378점이 모두 이 지역 박물관으로 귀속되어 주목받은 바 있다. 경산 임당동과 조영동고분군, 화원 성산리고분군 등에서도 발굴이 추가되었으며 예천지역에서 처음 확인된 대형 앞트기식 돌방무덤, 포항 영일만 일대에서 확인된 고분, 청도 송읍리의 고분 발굴도 우리 지역 고대 사람들의 삶과 죽음을 보여준다. 2022년 기준 한국문화유산협회 소속에 전국에 매장문화재를 발굴하는 전문기관만 84개 기관에 이르고 이 협회에 소속되지 않은 기관이나 대학의 박물관, 국립문화재연구소나 국립박물관 등을 더하면 발굴 종사자는 훨씬 많아진다. 지난 겨울 혹독한 추위 속에서, 오는 여름 찌는 듯한 무더위 속에서도 현장을 지키고 고민하며 우리 땅에 묻혀있는 문화유산을 발굴해 낼 고고학자들과 함께 이 일에 참여하는 모든 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이들이 수고하여 찾아낸 역사에 박수를 보내며 올해는 어떤 이야기가 새롭게 발굴될지 기대가 크다. 영남대박물관 학예연구원경산 소월리 출토 얼굴모양 토기 2면.〈화랑문화재연구원 제공〉대구 구암동 58호분-2〈2020년 필자 촬영〉팔거산성 내 목조 집수지〈화랑문화재연구원 제공〉김대욱 영남대박물관 학예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