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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
"스마트팜 밸리 발판 삼아 상주 농업혁신 거점 도시로 성장하겠다"
대한민국 농업 중심도시 상주의 진면목을 새롭게 조명한 '상주, 삼백의 고장에서 스마트팜 도시로' 시리즈가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이번 시리즈는 지난 6월15일부터 10월19일까지 모두 10차례에 걸쳐 상주 농업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뤘다. 연재를 마치며 강영석 상주시장을 만나 지역 농업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들어봤다.농특산물 수출 年 15% 고속성장 해외홍보관 운영·판촉 이벤트 등판로 확대 다양한 지원정책 시행종합물류센터 조성 사업도 추진전국 농특산물 물류 허브 만들 것스마트팜 밸리 통해 한 단계 도약주거·교육·정착·창농 이어지는 청년농업인 유입 기반 확대 노력 ▶이번 시리즈를 간략하게 평가한다면."1천400년 역사를 간직한 상주는 고대부터 농업의 중심지였다. 전국 최대 명주 생산지로서 일찍이 양잠산업이 발달했고, 쌀과 곶감을 비롯한 다양한 농특산물이 전 세계로 수출되고 있다. 또 청년 농업인 양성 프로그램과 전국 최대 규모로 조성된 상주 스마트팜 혁신밸리를 통해 '미래 농업'을 실현 중이다. 시리즈 연재를 통해 이 같은 상주 농업의 역사와 경쟁력을 대내외적으로 널리 알리는 것은 물론 지역 농업 정책의 방향성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됐다."▶일찌감치 상주 농업이 발전할 수 있었던 배경은."상주는 평야와 산간지대가 고르게 분포해 농업을 하기에 좋은 환경을 갖췄다. 낙동강을 따라서는 비옥한 평야 지대가 펼쳐져 있고, 전체적으로 높은 산에 둘러싸인 분지 지형이다 보니 일교차가 크고 자연재해가 그만큼 적다. 여기에 적당한 강우량과 여름철 높은 기온, 풍부한 일조량까지 더해져 농업이 자연스럽게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천혜의 자연환경을 바탕으로 상주는 삼백(쌀·목화·누에고치·곶감)의 고장으로 불렸고, 지금도 전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농업 도시로 손꼽히고 있다."▶농업 규모는 어느 정도이며, 주로 어떤 농특산물이 생산되나."상주는 국내에서 농가 수가 넷째로 많은 지역이다. 연간 농업 총생산액이 1조4천억원에 이른다. 감을 비롯해 한우·육우·육계 생산량이 전국 1위를 자랑하고 쌀·배·오이(시설) 등은 경북에서 가장 많이 생산하고 있다. 특히 상주 농특산물은 해외에서 인기가 높다. 지난해 전문수출단지 21곳을 중심으로 배·포도·토마토·곶감·선인장 등 27개 품목이 30여 개 나라에 수출됐다. 모두 4천646t에 870억원어치다. 앞으로 상주시는 농산물종합물류단지를 조성해 전국 농특산물 물류 허브는 물론 세계적인 첨단 농업도시로 성장할 계획이다."▶농특산물 수출 성장세가 가파른데 어떤 노력이 주효했나."농특산물 수출의 경우 연간 15% 이상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뤄냈다. 품목 별로는 특히 프리미엄급 샤인머스캣과 배·복숭아 등이 고급 과일로 평가받아 높은 가격에 판매된다. 지난해 신선 농산물 기준 수출액은 포도 206억원·배 105억원·토마토 12억5천만원·곶감 8억원 순이었다. 상주시는 지역 농특산품 해외 판로를 늘리기 위해 2015년부터 수출지원팀을 신설해 운영 중이다. 수출시장 개척을 위해 해외홍보관을 운영하고 홍보·판촉행사 진행은 물론 해외 바이어 초청행사 등 다양한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아울러 독일·대만·뉴질랜드·태국·홍콩 등 5개국에 모두 12곳의 해외 홍보관을 운영 중이며, 베트남·미국·대만·러시아·캐나다·중국 등지를 매년 직접 찾아 홍보판촉 행사를 연다. 또 지역 농특산품에 관심이 있는 해외 바이어를 초청해 생산 농가 견학을 주선하고 있다. 그 결과 상주시는 경북도 수출정책 평가에서 2018년부터 5회 연속 대상을 받는 쾌거를 이뤄냈다."▶상주는 귀농·귀촌인이 많기로도 유명한데 그 비결은."귀농·귀촌 1번지 상주시의 성공 비결은 크게 세 가지다. 첫 번째는 우수한 자연여건이다. 곶감과 오이·포도·딸기·과수 등 고소득 작물의 재배에 적합한 토양과 기후조건을 갖췄다. 두 번째는 우수한 농업기반 인프라 구축을 꼽을 수 있다. 노동력 절감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농기계임대사업소가 권역별로 설치돼 있어 누구나 쉽게 농기계 사용이 가능하다. 암반관정·저수지 등 농업용수 확보도 전국에서 으뜸이다. 낙동강 용수 활용이 가능한 관개시설도 갖추고 있어 물 부족 없는 도시다. 마지막으로 상주는 사통팔달의 교통 중심지다. 여러 고속도로와 국도가 지나고 5곳의 나들목이 위치해 농산물 출하 및 유통 여건이 매우 뛰어나다. 더불어 상주시는 귀농인 유입을 위해 다양한 역량 강화 프로그램을 추진 중이다. 귀농인 농어촌진흥기금 등의 융자지원으로 농지와 농업시설 등을 마련할 수 있도록 적극 돕고, 농기계구입과 영농기반시설 조성도 지원한다. 또 주택수리비 지원과 주거임대료 지원 사업을 통해 귀농·귀촌인의 주거 마련 비용도 절감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희망자가 정착하기 전 임시 주거를 제공하는 '귀농인의 집' 프로그램도 운영 중이다."▶스마트팜 혁신밸리 조성으로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상주 농업은 스마트팜 혁신밸리를 통해 한 단계 도약 중이다. 스마트팜은 비닐하우스, 유리온실 등에 IoT·빅데이터·인공지능·로봇 등 4차 산업혁명 기술을 접목해 작물의 생육환경을 원격·자동으로 적정하게 유지·관리할 수 있는 농장을 뜻한다. 상주는 전북 김제·경남 밀양·전남 고흥과 함께 정부가 육성하고 있는 명실상부한 '스마트팜 중심 도시'다. 2021년 12월 준공된 상주 스마트팜 혁신밸리는 전국 최대 규모인 42.7㏊로 조성돼 스마트 농업의 메카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스마트팜 혁신밸리의 주목적은 청년 농업인 양성이다. 현장 중심의 체계화된 교육커리큘럼을 통해 스마트 농업 전문 인력 양성을 목표로 한다. 아울러 기존 농업인에게도 스마트팜 경영 기회를 제공하고, 임대형 스마트팜도 넓히고 있다. 스마트 농업 확산을 위해서다. 보육센터·실증단지·임대형 스마트팜으로 이어지는 핵심시설의 내실 있는 운영뿐만 아니라 청년 농업인들의 정착과 문화 활동을 지원하는 기반도 만들어질 수 있도록 신경 쓰고 있다. 청년농업인의 교육·주거·정착·창농까지 이어지는 과정이 원스톱으로 이뤄지게 되는 셈이다. 스마트농업의 최선진국으로 손꼽히는 네덜란드는 낮은 지대·적은 일조량 등 척박한 자연환경에 대한 대응책으로 기술을 개발했다. 반면 우리나라는 초고령화·급감하는 농촌 인구 등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추진되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발맞춰 상주시는 스마트팜 혁신밸리를 중심으로 대한민국 농업의 혁신을 선도하는 거점으로 성장해 나갈 것으로 기대된다."▶농업 외에 추진하고 있는 역점 사업이 있다면."먼저 문경~상주~김천을 연결하는 고속전철화 사업이 11월28일 예비타당성조사를 통과했다. 2023년 기본계획 수립을 시작할 예정이며, 총사업비는 1조4천억원이 들어간다. 2030년 준공을 목표로 KTX 주변 역세권 개발 계획도 함께 추진할 계획이다. 사업이 마무리되면 상주는 서울과 동서 남해안으로 연결되는 고속도로망과 간선 도로망을 갖춰 교통요충지가 될 것이다. 이외에도 대구시가 추진하는 군부대 이전 유치를 위해 온 힘을 다할 생각이다. 또 문화예술회관 이전·신청사 건립·공설추모공원 조성·적십자 병원 이전 및 신축 등 미래 상주를 위한 주요 사업을 차질 없이 추진하겠다."▶마지막으로 시민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은. "중흥하는 미래 상주를 위해 물질적인 번영뿐 아니라 정신적인 번영에도 힘쓰겠다. '존심애물(存心愛物)' 정신을 계승해 나보다는 이웃과 공동체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생각하고 실천한다면 우리 상주는 훨씬 더 살기 좋은 고장이 될 것이다. 저력 있는 역사 도시, 중흥하는 미래 상주를 위해 앞으로도 다양한 시민의 의견을 시정에 반영해 공감하는 소통행정을 펼칠 것을 약속한다." 대담=전영 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장 정리=김일우 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영남일보가 지난 6월15일부터 10월19일까지 10회에 걸쳐 연재한 '상주, 삼백의 고장에서 스마트팜 도시로' 시리즈의 주요 지면들.강영석 상주시장
2022.12.27
[농업으로 행복한 영양] 시리즈를 마치며-오도창 영양군수 인터뷰…"전국 명성 영양고추산업 다변화하고 스마트농업 실현하겠다"
작지만 강한 농촌으로 거듭나고 있는 영양군을 조명하는 '농업으로 행복한 영양' 시리즈가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이번 시리즈는 지난 9월15일 시작해 12회에 걸쳐 영양의 주요 농특산물을 소개하고 영양군의 농업 정책과 농민의 진솔한 이야기를 풀어냈다. 연재를 마무리하며 오도창 영양군수에게 지역 농업의 현황과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들어봤다.▶이번 시리즈를 간략하게 평가한다면."영양의 주요 농특산물을 대내외적으로 널리 알리는 것은 물론 군의 농업정책 방향까지 다뤘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또 영양 농업의 발전 방향과 새로운 비전을 모색하는데 중요한 계기가 됐다고 평가하고 싶다."▶지역 농업의 전반적인 현황과 향후 계획은."모내기 한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한 해를 마무리해야 할 시간이 된 거 같다. 올해 농업 분야는 잦은 기상 이변·원자재 가격 상승·코로나19 확산 등으로 유난히 힘든 한 해였다. 농업은 국가 기간산업이자 생명 산업이며, 농촌은 우리의 뿌리이자 삶의 터전이다. 이상기후·자연재해·농산물 시장개방·고령화로 인한 일손 부족 등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지만 반드시 극복해 내야 한다. 구체적으론 농업·농촌의 다원적 기능과 가치 제고에 힘쓰겠다. 영양군 대표 작물인 고추 산업을 다변화하고,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스마트농업을 실현할 계획이다. 또 부족한 농작업 일손 지원을 위한 지원 센터 확충은 물론 △농촌 용수 이용체계 재편 △엽채류 특구지정과 전문단지 조성 △농특산물직판장·고추전시장 통합 확장 △신활력 플러스 사업을 통한 토종 곡물 상품화 실현 등을 통해 농업인이 행복한 '부자 농촌' 건설에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엽채류 특구 지정·전문단지 조성농특산물직판장·고추전시장 통합토종고추복원지역 지정 생산 확대풋고추생산단지 조성도 적극 추진▶전국적 명성의 영양고추 장점과 고추 주산지 명성을 이어나가기 위한 묘책은."영양은 고추재배에 매우 적합한 중간산지로서 밤낮의 기온 차가 크다. 그래서 고추의 과피가 두껍고 고춧가루 생산 수율이 좋으며 비타민A와 C 함량이 많다. 또 고추 색깔이 곱고 선명하며, 매우면서 단맛이 강한 특성이 있다. 이에 더해 재배 기술도 탁월하다. 농업인 한 분 한 분이 고추재배 전문가들이다. 품종 선택에서부터 포장 관리·건조까지 최상의 노하우를 갖추고 있다. 최적의 환경 조건과 농민의 땀방울, 행정 지원의 세 바퀴가 잘 어우러져 전국 최고의 품질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도 전국 최고 고추 생산지로서의 명성 유지를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일 생각이다. 우선 영양고추산업특구 내 토종고추 복원지역을 지정, 토종고추 재배 및 생산을 확대해 나가고 있다. 홍고추 최고가격 보장을 통해 농가 소득을 안정화하고 건고추 위주 생산에서 풋고추 생산단지 조성 등 전략 품목 재배 확대를 통해 소득 및 판로 다양화도 추진할 계획이다."▶고추 유통과 마케팅도 중요할 것 같은데."영양고추의 원활한 유통을 위해 2006년부터 홍고추 수매·건조·가공·유통에 이르는 일괄처리시스템을 갖춘 영양유통공사를 운영 중이다. 영양유통공사는 계약재배를 통해 농가에 안정된 소득을 보장해 주고 불합리한 유통 구조 개선, 수출 판로 확대 등을 통해 지역경제 발전에 이바지하고 있다. 또 영양고추 핫페스티벌은 대규모 통합마케팅의 대표 사례다. 소비자를 직접 찾아가는 적극적인 홍보와 변함없는 품질로 높은 신뢰를 얻으며 14년째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앞으로는 'K-매운맛' 전도사 이미지와 영양의 고유한 문화를 기반으로 영양군 전체를 마케팅하는 방향으로 목표를 잡고 있다."▶고추 외에 농특산물은 어떤 것들이 있고 장점은 무엇인지."고추 이외에도 사과·담배·천궁·단삼·고랭지채소·어수리 나물 등 많은 농특산물이 있다. 천궁은 한방의 4대 기본 약재 중 하나로 전국 생산량의 70% 정도를 영양에서 생산한다. 일교차가 크고 고랭지의 비옥한 토양에서 재배된 영양 천궁은 약효가 높아 의약품·한방화장품 등의 재료로 전국적으로 유통되고 있다. 어수리 나물은 특유의 향과 맛이 배어있어 입맛을 돋우는 봄의 전령사로 명성이 높다. 단삼은 효능이 산삼에 버금가는 중요한 생약재다. 영양의 서늘한 기후와 적당한 강수량 등이 단삼이 자라는 데 최적지로 꼽혀 재배면적이 날로 늘어나는 추세다. 영양 고랭지 채소 역시 조직이 단단해 맛이 좋고 쉽게 물러지지 않아 대도시 소비자가 즐겨 찾는다."자작나무숲 등 친환경 자원 활용관광산업 새 성장동력으로 육성별빛 생태관광 명품화사업 주목외국인 계절근로자 도입도 늘려▶고질적인 농번기 일손 부족 문제에 대한 대책은."농촌 고령화 및 인구감소로 인한 농번기 인력 부족 현상은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특히 봄철 파종기와 가을철 수확기에는 단기간에 많은 일손이 필요하지만 개별 농가에서는 인력 확보에 한계가 있다. 영양군에서는 체류형 국내 인력 수급을 위해 '영양빛깔찬일자리지원센터'를 건립하는 등 2011년부터 일손 확보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하지만 물리적인 한계에 부딪혀 2016년부터는 베트남 화방군과 MOU를 체결해 외국인 계절근로자를 도입했다. 2017년부터 올해까지 352농가에 886명의 외국인 계절근로자를 연계하는 등 농촌 인력난 해소에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다. 특히 올해부터는 필리핀 딸락주와 MOU를 체결하고 결혼이민자 가족을 일꾼으로 초청하는 프로그램도 추가 진행해 수확기 인력난 해소와 인건비 안정에 크게 기여했다. 영양군은 앞으로도 외국인 계절근로자 도입을 확대할 것이며, 다양한 국가 또는 지자체와 교류의 장을 확대해 보다 원활한 인력 수급이 이뤄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사업 참여 농가와 외국인 근로자에 대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고 매년 설문조사·평가를 실시해 결과에 따라 인센티브나 페널티를 적용해 외국인 계절근로자 사업이 좀 더 효율적으로 운영되도록 노력하겠다."▶농업 외의 분야에서 추진 중인 역점 사업이 있다면."영양군은 다른 시·군에 비해 친환경 관광자원이 풍부하다. 특히 코로나19 확산을 계기로 맑고 깨끗한 영양의 산림과 생태자원이 주목을 받고 있다. 전체면적의 86%를 차지하는 산림자원 가운데 자작나무숲·금강송 군락지·흥림산 자연휴양림은 미래세대를 위한 새로운 자산으로 자리 잡았다. 영양의 수려한 자연경관과 지역만의 고유한 문화를 잘 활용한다면 관광산업이 새로운 성장동력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우선 지역 친환경 관광콘텐츠의 깊이를 더하기 위해 아시아 최초의 국제밤하늘보호공원에 별빛생태관광 명품화 사업을 추진하고 별천지 테마숲을 조성할 예정이다."▶끝으로 군민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은. "무엇보다 새롭게 시작된 민선 8기의 의미 있는 변화를 관심 있게 지켜보고 때론 따끔한 질책도 마다하지 않고 격려해 주는 군민의 성원에 감사드린다. 영양군은 농업군이다. 무엇보다 농업이 살아야 지역이 살고 삶이 윤택해지며 활기찬 영양이 된다. 다가오는 계묘년 2023년도에는 농업인이 살맛 나는 희망찬 한 해가 되도록 두 팔을 걷어붙이고 힘껏 달려 나가겠다." 김일우 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 연구위원영남일보가 지난 9월15일부터 12회에 걸쳐 연재한 '농업으로 행복한 영양' 시리즈의 주요 지면들.오도창 군수가 전국적 명성을 떨치고 있는 영양고추를 비롯한 농특산물과 영양 농업발전을 위한 정책 지원 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영양군 제공〉
2022.12.21
[스토리가 있는 청도 힐링 여행 . 5·<끝>] 금천면 선암로, 운림고택 중사랑채 판벽 구멍 셋…'400년 내시家系' 삶 엿보는 듯
금천면은 청도의 산동 가운데에 위치한 면이다. 그래서 옛날에는 중동면이라 했다. 면의 중앙부에는 밀양강의 지류인 동창천(東倉川)이 흐른다. 이곳 사람들은 비단같이 아름다운 천이라 하여 비단내 또는 금천(錦川)이라 불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금천면으로 개칭했다. 청도읍에서 청려로를 타고 산동으로 가다 보면 매전면 매전삼거리에서 선암로가 분기한다. 동창천 건너 금천면 신지리(薪旨里)를 지나 동창천을 거슬러 금천면 소재지인 동곡까지 이어지는 길이다. 선암로는 '선암서원(仙巖書院)을 지나가는 길'이라는 뜻이다.面 중앙부엔 밀양강의 지류인 동창천士禍시대엔 사흘 핏빛 물 거꾸로 흘러박하담·김대유 배향한 선암서원 지나밀양박씨 터 잡은 신지리 길 양쪽으론도열하듯 도일·섬암·운남·운강고택…임당리 '명포길'은 포구 흔적 담은 이름 ◆선암로 신지생태공원·선암서원선암로에서 선암서원 이정표를 따라 왼쪽 고샅길로 들어선다. 서원 가는 길에 먼저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어마어마하게 키 큰 곰방대다. 세상에서 가장 크다는 곰방대는 높이가 36m나 된다. 옛날 이곳에는 세라믹 공장이 있었다고 한다. 그때 사용되었던 굴뚝을 곰방대로 변신시켜 놓았단다. 곰방대를 중심으로 꽤 넓은 신지생태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공장으로 인해 단절되었던 천변의 녹지를 되살리고 걷기는 물론 유모차나 휠체어도 다니기 좋은 공원으로 재탄생됐다. 공원을 중심으로 동창천변을 소요하는 4㎞의 생태탐방로도 있다. 공원에는 박훈산 시인의 '보리 고개' 시비가 있다. 1919년 신지리에서 태어난 시인은 1946년부터 국제신보에 시를 발표하면서 문학활동을 시작했고 6·25전쟁 때는 공군 종군문인단원으로 활동하면서 조지훈·유치환 같은 문인들과 교류를 맺었다고 한다. '봄은/ 보리 고개/ 숨 가쁜/ 계절/ 꽃은/ 제멋대로/ 피어라.' 한겨울에도 이 구절을 읊으면 어쩐지 숨이 가쁘다.공원을 지나 호젓한 소나무 오솔길을 따라 조금 더 들어가면 선암서원이 모습을 드러낸다. 선암서원은 소요당(逍遙堂) 박하담(朴河淡)과 삼족당(三足堂) 김대유(金大有)를 배향한 곳이다. 박하담은 1520년에 밀양에서 이곳으로 들어와 동창천변에 소요당을 짓고 이웃 마을의 김대유와 우정을 나누며 평생 은거했다. '하늘을 위로 하고 못을 아래로 하여 여기에서 소요하고, 고금을 포섭하여 여기에서 소요하여 자적(自適)의 즐거움을 깃들이니, 마침내 집의 이름을 소요(逍遙)라고 하였다'고 한다. 신지리에 들어온 박하담은 김대유와 함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창고를 짓고 곡식을 모았다. 가뭄과 기근이 들 때를 대비한 것이었다. 창고의 이름은 동창(東倉), 그래서 강은 동창천이 되었다. 사화의 시대에 이 천은 사흘 동안 핏빛으로 물들어 거꾸로 흘렀다고 했다. 지금 동창천은 바닥이 고스란히 보이는 물 맑은 천이다. 박하담은 나라에서 여러 번 불렀지만 나가지 않았고 후학을 가르치다 이곳에서 생을 마쳤다.서원은 원래 1568년에 매전면(梅田面)에 향현사(鄕賢祠)로 창건되었다가 1577년에 군수 황응규(黃應奎)가 지금의 자리로 이건했다.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1878년에 박하담의 후손들이 다시 중창하여 선암서당으로 고쳤다고 한다. 서원은 안채와 사랑채인 득월정(得月亭)·행랑채·선암서당(仙巖書堂) 현판이 걸려 있는 소요당·장판각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살림집과 절충식으로 지어져 서원이라기보다는 별서의 느낌을 준다.동창천과 마주한 담장을 따라 장쾌한 소나무들 사이로 오솔길이 흐른다. 서원 밖 천변 일대를 '소요대'라고 부르는데 '소요당이 소요하던 대'라는 뜻일 게다. 담벼락 가운데 천으로 통하는 사주문이 나 있고 그 앞 물가에 기묘한 바위가 있다. 바위 아래에 깊은 소(沼)가 있는데 선호(仙湖)라 한다. '선인(仙人)이 우유(優遊)할 만한 곳'이라는 뜻이다. '선바위가 있어서 선호라고 한다'는 기록이 있는데 선암(仙巖)이 바로 이 바위라 여겨진다. 바위가 용머리를 닮아 용두암, 용두소라고도 하는데 1959년 태풍 사라 때 용의 목에 해당하는 부분이 떨어져 나가 지금은 밑둥치가 남아 있다. 선호 건너편으로 '뚝뫼'라 불리는 봉긋한 언덕의 솔숲이 보인다. 서원의 뒤로 돌아들면 1974년에 건립된 '임란창의의사전적비'가 있다. ◆선암로 따라 고택 가득한 밀양박씨 마을박하담이 세상을 떠난 후 마을의 역사는 그의 후손들이 이어나갔다. 임진왜란 때는 그의 후손인 밀양박씨 14의사(義士)가 의병을 일으켰다고 전한다. 부자·형제·사촌이었던 사람들이다. 그들 중 천성만호(天城萬戶) 박경선(朴慶宣)은 전투 중 한쪽 팔목이 잘려 나가자 적장을 끌어안고 어성산의 절벽인 봉황애에서 동창천으로 몸을 던졌다. 선암서원의 '임란창의의사전적비'는 이들을 기리는 것이며 비석의 뒤편으로 보이는 동창천변의 단애가 봉황애라고 한다.밀양박씨들이 오랫동안 터를 잡고 살아온 신지리에는 오래된 집이 많다. 선암서원을 위시하여 약 40동의 기와집이 있는데, 신지리는 청도에서 고택이 가장 많은 마을이라 한다. 선암로 양쪽으로 도일고택·섬암고택·운남고택·명중고택·운강고택 등이 줄줄이 이어진다. 여든여덟 칸이라는 운강고택은 박하담의 서당 자리에 운강(雲岡) 박시묵(朴時默)이 1824년에 중건한 집이다. 도일고택은 운강의 동생인 박기묵이 1899년 합천 군수로 있을 때 건축한 것이고, 섬암고택은 운강의 둘째 아들인 박재소가 분가하면서 건립한 것이다. 운남고택은 운강의 셋째 아들 박재충의 집이며 명중고택은 운강의 손자인 박래현이 별서로 건립한 건물이다. 이들은 대개 19세기에 지어진 것으로 고졸한 멋은 적지만 당당하고 깨끗한 풍모에 담백한 멋이 있다. 금천교 천변에는 운강이 철종 7년에 세운 아름다운 만화정(萬和亭)이 있다. 정자 문 밖은 아름다운 버드나무 뜰이다. ◆임당리 명포길 운림고택 가는 길신지리에서 북쪽의 임당리로 가는 길은 명포길이다. 선암로가 동창천을 향해 휘어지는 선호슈퍼 앞에서 분기해 임당1리 마을회관 근처의 사거리까지 이어지는 길이다. 임당(林塘)은 숲과 깊은 소가 있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다. 옛날에는 임당과 명포(明浦) 두 마을이 있었는데 1914년에 임당으로 병합되었다. 명포는 신작로가 생기기 전 동곡을 오가는 나룻배가 드나들던 포구였다고 한다. 신작로가 나면서 포구마을과 옛길은 기억에서 사라져갔지만 오늘날 그 이름은 길이 되었고 임당의 운림고택(雲林古宅)을 찾아오는 이들이 그 길을 이용한다. 명포길 끝 사거리에서 오른쪽 임당길로 들어선다. 마을회관 지나 오르다 왼쪽 임당2길로 들어서면 잠시 후 기와 얹은 돌담이 아주 길게 이어진다. 그리고 5칸 규모의 솟을대문이 나타나고 다시 담이 오래 이어진다. 이 커다란 집은 조선 후기 궁중 내시(內侍)로 정3품 통정대부에 올랐던 김일준(金馹俊)이 낙향하여 건립한 주택이다. 그래서 내시고택·김씨고택이라고도 불린다. 대문에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사랑채·안채·고방채로 이루어진 정침이 튼 'ㅁ'자형의 배치를 이루고 있다. 사랑 마당의 좌우측에는 큰 사랑채와 사당이 각각 자리한다. 안채는 정면 6칸 측면 1칸 규모에 엄청난 크기의 고방창고를 갖추고 있는데 건물과 담장으로 폐쇄되어 있으며 사랑채 옆의 작은 중문으로 드나들게 되어 있다. 운림고택은 대문에서 사랑마당을 거쳐 안마당으로 출입하는 중문까지 모든 통과 공간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일반 사대부 저택보다 한층 더 엄격하게 내외 공간을 구분하고 출입을 관리하는 배치다. 1988년 3월 이집의 사당 마루 밑에서 폭 7㎝·길이 70㎝ 크기의 두루마리가 나왔다. '내시부 첨지 김병익 가세계'였다. 임진왜란 직전 청도에 들어온 내시 가문의 족보였다. 400여 년간 16대에 이르기까지 성이 다른 양자들 이름과 이들이 묻힌 곳이 적혀 있었다. 이 같은 가계의 부인들은 친정 부모의 사망 때만 바깥출입이 허용되는 등 극히 폐쇄적인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제야 사람들은 알게 됐다고 한다. 왜 사랑채가 저리 크고, 왜 안채는 그리도 폐쇄적인지를. 중사랑채 판벽의 눈높이에는 하트모양의 구멍이 세 개 뚫려 있다. 내시의 삶 그리고 그들 부인의 삶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내시 제도는 1908년 대한제국 시대에 폐지됐다. 운림고택의 가계는 17대 김문선에 이르러 직첩(職牒)만 받고 내시 생활은 하지 않았으며 18대 이후에는 정상적인 부자(父子)관계가 이뤄져 가계를 이어오고 있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참고= 청도군지. 한국지명유래집. 한국학중앙연구원. 디지털청도문화대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경북도문화재지정조사보고서공동기획: 청도군운림고택(雲林古宅)은 조선 후기 궁중 내시(內侍)로 정3품 통정대부에 올랐던 김일준(金馹俊)이 낙향하여 건립한 주택이다. 그래서 내시고택·김씨고택이라고도 불린다. 대문에서 사랑마당을 거쳐 안마당으로 출입하는 중문까지 모든 통과 공간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일반 사대부 저택보다 한층 더 엄격하게 내외 공간을 구분하고 출입을 관리하는 배치다.앞쪽이 중사랑채와 돌담 뒤 판벽 모습.선암서원은 소요당 박하담과 삼족당 김대유를 배향한 곳이다. 안채와 사랑채인 득월정·행랑채·선암서당 현판이 걸려 있는 소요당·장판각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살림집과 절충식으로 지어져 서원이라기보다는 별서의 느낌을 준다.밀양박씨들이 터를 잡고 살아온 신지리에는 오래된 집이 많다. 약 40동의 기와집이 있는데, 신지리는 청도에서 고택이 가장 많은 마을이라 한다. 섬암고택은 운강 박시묵(朴時默)의 둘째 아들인 박재소가 분가하면서 건립한 것이다.옛날 세라믹 공장이 있었던 곳에 조성된 신지생태공원. 공장으로 인해 단절되었던 천변의 녹지를 되살리고 걷기는 물론 유모차나 휠체어도 다니기 좋은 공원으로 재탄생됐다. 36m의 공장 굴뚝을 세상에서 가장 큰 곰방대로 만들었다.
2022.12.20
윤경희 청송군수 "청송 황금사과, 과일시장 새 성장동력…전국 최고 브랜드로 키울 것"
대한민국 농촌의 변화와 혁신을 주도하고 있는 청송군의 선진농업 정책과 발전상을 조명하기 위해 연재한 '대한민국 선진농업 1번지, 산소카페 청송' 시리즈가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이번 시리즈는 7월12일 1편을 시작으로 15회에 걸쳐 청송의 주요 농·특산물을 집중 조명하고, 청송군의 농업정책과 농업인들의 이야기를 다뤘다. 연재를 마무리하며 지난 15일 윤경희 청송군수와 만나 지역 농업의 현황과 성과,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들어봤다.청송 천혜의 자연환경·기후조건 갖춰사과 재배 최적지…채소류도 고품질샤인머스캣 타지역보다 당도 뛰어나우수성 입증 작목은 확대 보급할 것주왕산·주산지에 휴양관광단지 조성산소카페 청송정원은 생태관광지로산림레포츠단지·파크골프장도 추진▶이번 시리즈를 간략하게 평가한다면."지역 농·특산물은 물론 농업인들과 군의 정책 등을 15개 주제별로 나눠 연재함으로써 청송의 농업 동향을 독자들에게 보다 세밀하면서 알기 쉽게 소개해 청송군을 대내외에 홍보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고 생각한다. 특히 청송군의 농정 방향과 발전 전략이 시리즈에 잘 녹아들었다고 생각한다."▶청송의 대표 작물인 사과의 품종 다양화, 품질보증제 등 정책을 추진하게 된 배경은."현재 청송사과는 부사가 전체의 80%를 차지할 정도로 단일 품종에 치우쳐있다. 때문에 수확시기에 인력난이 심하고, 출하가 몰리며 사과 가격이 하락하는 현상이 매년 반복되고 있다. 이런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최근 MZ세대에 큰 사랑을 받고 있는 황금사과(시나노골드) 품종 재배를 확대해 출하 시기 분산과 인력난 및 사과 가격하락에 대응하고자 했다. 2020년 도입한 청송사과 품질보증제도는 군수가 사과의 품질을 보증하는 제도다. 일정 기능 이상의 선별시설을 갖춘 유통시설에서 출하되는 사과 중 고품질 사과에만 사용하도록 엄격히 제한하고 있는데 이는 명품 청송사과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고 소비자의 신뢰를 확고히 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청송사과유통센터가 새롭게 출발했는데 앞으로의 역할은 무엇인가."청송군은 2011년부터 8년간 청송사과유통공사를 운영했지만, 부실 경영에 따른 누적되는 적자로 자본잠식에 빠졌다. 이에 2019년 유통공사를 해산하고 청송사과유통센터로 운영체제를 변경했다. 산지유통센터를 전문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민간조직에 위탁운영을 맡겨 경영손실을 없앴다. 청송사과유통센터가 보유한 2개의 APC(Agricultural Product Processing Complex)는 산지유통센터의 기능과 산지공판장의 기능으로 구분해 운영하고 있다. 유통공사 시절인 2018년에는 청송군 전체 사과 생산량의 6% 정도밖에 처리하지 못했다. 하지만 2021년산의 경우에는 유통센터에서 16%나 처리했다. 2023년까지 선별작업장, 저온저장고, 비가림시설 등 부족한 시설과 PC상자 등 물류장비를 확충하게 되면 청송군 사과 생산량의 25% 이상을 처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청송 농·특산물의 장점은 무엇이고, 향후 중점적으로 육성할 작물은 어떤 게 있나."청송군은 천혜의 자연환경과 기후조건으로 인해 사과 재배의 최적지로 자두, 복숭아 등 과일류와 채소류 또한 우수한 품질로 평가받고 있으며, 재배기술 경쟁력까지 갖추고 있다. 노지 작물의 경우 큰 일교차에 의해 당도가 높고, 조직이 치밀한 것이 청송 농산물의 장점이다. 실제 샤인머스캣의 경우 타 지역보다 당도가 우수하며, 과육이 단단하다. 3~4년 전부터는 시범사업을 통해 우수성이 입증됐고, 점차 확대 보급하고 있다. 앞으로 단일 품목에 국한하지 않고, 지역 적응시험을 거친 작목을 점차적으로 확대 보급해 편중된 재배 작물을 분산시킴으로써 안정적인 농업 소득을 꾀할 것이다. 사과의 경우에는 수출 등 유통 판로를 보다 확충할 계획이다."▶청송군의 농업에 대한 전반적인 현황과 향후 계획은."청송군 농업의 핵심은 과수산업이다. 그중에서도 사과는 전국 최고 품질과 생산량을 자랑하고 있다. 하지만 저출산 고령화에 따른 농촌인구 감소로 농업 전반에 노동력 절감을 위한 노력 없이는 경쟁력을 확보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농산물 생산 측면에서는 고부가 첨단농업, 즉 인건비를 줄이기 위한 스마트 과원·다축재배를 통한 혁신과원 조성을 통해 고품질 농산물을 생산하는 것이 중요하다. 유통 측면에서는 홍보 마케팅을 강화하고 해외수출을 통한 판로 개척으로 국제시장에서도 청송사과의 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 아울러 청송군은 전국 최고 사과 주산지의 명성을 이어 나갈 차세대 품종으로 시나노골드를 집중 육성하고 있다. 지역 농가에 널리 보급한 시나노골드는 포화된 과일시장에서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서 큰 성공을 거두고 있다. 앞으로 청송 황금사과의 홍보·마케팅에 더욱 박차를 가해 전국 최고의 사과 브랜드로 키워나갈 계획이다. 또한 청송군은 △안정적인 영농수행을 위한 기반 마련 △친환경농업 육성을 통한 고품질 농산물 생산기반 구축 △과수 품질향상 및 기반조성으로 생산경쟁력 제고 △새소득작물 육성 및 수출확대를 통한 농가소득 안정화 추진 △농가 직거래 및 농특산물 홍보 △산지유통시설지원 확대를 통한 유통기반 강화 및 농가소득 증대 기여라는 농정분야 전반에 걸친 시책을 마련하고 있다. 이는 앞으로 지역 경제를 활성화하고 농가소득 증대에도 크게 기여할 것이다."▶'산소카페'를 표방하는 청송의 체류형 관광 활성화 계획도 궁금하다."청송군은 전체 면적의 82%가 청정 산림이다. 주왕산, 절골 등 깨끗한 자연환경 속에 공장 굴뚝 하나 없다.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 지정, 국제슬로시티 3회 연속 인증, 동계 산악스포츠의 꽃인 아이스클라이밍 월드컵이 열리는 국제적인 청정 생태관광지역이 바로 청송이다. 최근 들어 고속도로 개통을 통한 접근성 향상, 소노벨 청송과 같은 대규모 숙박시설 개소 등 관광 인프라 확충으로 많은 관광객이 증가했다. 또 2021년 13만여㎡(4만1천여 평)에 조성한 산소카페 청송정원은 코로나19 확산으로 깨끗한 자연환경 속에서 힐링을 즐기려는 관광객들이 찾는 대체 관광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청송의 관광정책은 지역의 최대 강점인 자연환경을 보전하고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는 생태 관광에 무게를 두고 있다. 이를 위해 청송의 대표 관광지인 주왕산과 주산지에 친환경 휴양관광 단지를 조성하고, 산소카페 청송정원을 생태관광지로 만들어나갈 계획이다. 앞으로 청송군의 관광 네임밸류는 지속적으로 높아질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농업과 관광 외에 추진하고 있는 역점 사업에 대해서도 설명해 달라."군민의 삶이 달라지는 청송군을 만들기 위해 2023년 군정 운영 방향을 △탄탄한 미래 농업 기반조성 △꼭 맞게 든든한 보편복지 △생활이 나아지는 지역경제 △일자리를 만드는 문화관광 △여유롭고 쾌적한 도시환경 △소통으로 하나 되는 청송행정으로 설정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올해보다 560억원 증액된 4천660억원으로 예산을 편성했다. 올해 대비 가장 많이 증액된 분야는 문화 및 관광 분야다. 우선 일자리가 생기는 관광산업 육성을 위해 청송산림레포츠 휴양단지를 조성한다. 또 군민 건강 증진 및 여가 활동을 위한 산남지역과 진보지역에 파크골프장을 조성하고, 아웃도어 골프연습장 건립 등을 추진한다. 이외에도 진보 진안지구와 청송 금곡지구 도시재생사업, 진보면과 산남지역 전선지중화 사업을 비롯해 초밀식 다축재배 시스템 구축, 청송황금사과 연구단지 등 농업시스템을 바꾸기 위한 농업분야 예산도 각각 증액 편성했다."▶끝으로 군민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은."국제 유가 및 금리 인상 등 불안한 경제 상황에 따른 지역 경제 위기를 600여 명의 공직자와 함께 잘 극복해 나가고 청송의 새로운 도약을 이뤄나갈 수 있도록 군민 여러분의 적극적인 협조와 성원을 당부드린다." 대담=전영 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장 정리=김일우 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영남일보가 지난 7월12일부터 15차례에 걸쳐 연재한 '대한민국 선진농업 1번지, 산소 카페 청송' 시리즈의 주요 지면들.지난 15일 윤경희 청송군수가 지역 농업의 전반적인 현황과 스마트 과원 조성 등 지속가능한 경쟁력 확보를 위한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2022.12.19
[스토리가 있는 청도 힐링 여행 .4] 청도읍 새마을로…지눌의 은행나무 지팡이는 천년 세월 巨木이 돼 절집을 지키고…
청도읍을 중심으로 청도의 남쪽 밀양과 북쪽 경산을 잇는 길을 '새마을로'라 한다. 새마을로는 1970년대 우리나라의 가난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시작된 범국민적 지역사회 개발운동인 '새마을운동'에서 따 온 이름이다. 1969년 8월, 고(故) 박정희 대통령은 경남의 수해복구 현장을 시찰하기 위해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가던 중 철로 변 마을 사람들이 제방을 보수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는 기차를 세웠다. 그리고 이 마을의 잘 단장된 지붕과 우마차가 다니기에 불편함이 없도록 닦여진 안길, 정비된 우물과 넓어진 농로를 보고는 '바로 이것이다'라며 무릎을 탁 쳤다. 이듬해 그는 '이 마을을 본보기로 우리나라의 모든 마을과 국토를 가꾸고 보존하자'라는 마을 가꾸기 사업을 제창했다. 이것이 새마을운동의 시작이다. 대통령이 기차를 세우고 무릎을 탁 쳤던 마을이 바로 청도읍 신도리(新道里)다. ◆새마을운동발상지기념공원 새마을로는 경산에서 성현(省峴) 고개를 넘어 청도로 들어오는 화양읍 송금리에서 시작된다. 길은 경부선 철길과 나란히 달리다가 청도읍에 들어서면서 청도천과 합류해 남향한다. 청도역 다음 역은 신도리 신거역(新巨驛)이다. 청도읍 신도리와 신도리 동쪽 마을인 거연리의 앞글자를 딴 신거역은 신도마을 잘살기 운동 7차 사업으로 주민이 1967년 철도청에 건의하여 만들어진 간이역이었다. 대통령의 열차가 멈춰 선 바로 그 역이다. 1988년에 수요 감소로 역사가 철거되었고 현재는 열차가 정차하지 않는다. 지금 신거역에는 역사가 복원되어 있다. 역사 앞 철길에는 대통령 전용 열차를 복제한 차량이 전시되어 있으며 역 광장에는 고 박정희 대통령의 동상이 서 있다. 광장에서 번영의 길을 따라가면 새마을운동 발상지 기념관이 나타난다. 새마을운동의 탄생배경과 발전단계, 우리나라 발전에 미친 영향과 성과 그리고 새마을운동의 세계화 경향 등을 체험과 함께 알아볼 수 있는 공간이다. 기념관 앞 협동마당에는 새마을 운동의 변천사가 간략하게 새겨져 있고 그 너머로 조르라니 늘어선 마을의 집들이 보인다. 신도리는 현재 마을 전체가 새마을운동 발상지 기념공원이자 테마파크다. 마을에는 새마을 식당이 있고 돌담에는 옛 사진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1989년에 영업을 중지했다는 신도정미소는 과거 박종태씨 소유로 현재는 전시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야생화 단지와 피크닉을 즐길 수 있는 공원이 있고, 초가집과 슬레이트 지붕 집·기와집 등을 볼 수 있는 시대촌 공간이 있다. 마을의 가장 안쪽에는 새마을 체험 학습장과 새마을 학교가 자리한다. 체험 학습장은 새마을운동의 캐치프레이즈인 '잘살아 보세'를 테마로 새마을 단위사업을 연출한 세트장이다. 새마을회관과 창고·지붕 개량·절미가정·부녀회 저축·안길 정비와 농로 확장·퇴비증산운동·공동작업장·전기사업 점화식 등 당시의 모습이 생생하게 재현되어 있다.邑 중심으로 南 밀양~北 경산을 잇는 길박정희가 기차 세우고 무릎 친 신거역 새마을운동 발상지기념관 돼 역사 복원그 너머 마을 전체가 '새마을' 테마파크새마을로서 원리로 빠지는 원동길 끝일제강점기땐 독립운동가 집합소였던원효 '창건' 지눌 '중창' 천년고찰 적천사새마을 학교는 옛날 교실 모습을 재현한 곳으로 새마을운동을 테마로 하는 어린이 종합체험센터다. 수해 복구·편백나무 모래놀이장·물길 만들기·집짓기 체험·새마을농장·지붕개량 체험·마을 불 밝히기·분리수거 체험·희망 메시지 남기기·지구촌 새마을운동 등 아이들이 다양한 체험과 놀이를 즐기며 새마을운동을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마을의 변화는 신도리가 고향인 김봉영씨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 경성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를 졸업한 그는 전쟁이 끝나고 황폐한 서울을 보며 농촌이 잘 살아야 도시가 번성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1957년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마을의 이인우·박종태씨와 의기투합해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기 위해 먼저 작고 쉬운 일부터 시작했다. 마을 구석구석에 방치된 쓰레기를 치우고 꽃길을 만들고 공동으로 사용하는 우물도 청소했다. 마을이 깨끗해지자 지붕 고치기에 나섰다. 매년 수선해야만 했던 초가지붕 대신 오래 사용할 수 있는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꿔나갔다. 그리고 농로를 개설하고 담장을 고치고 마을 안길을 확장하고 전기를 가설하는 등 차곡차곡 마을을 바꿔나갔다. 이후 새마을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하면서 전국의 수많은 새마을지도자와 공무원·각계각층의 인사들이 신도리를 찾았다. 이제는 새마을운동의 과거와 현재·미래를 경험하고 여가를 즐기기 위해 많은 사람이 찾아온다. 또한 매년 수많은 외국인이 새마을운동을 배우기 위해 신도리를 찾아온다.◆원동길과 하지길신도리 북쪽은 화악산(華岳山) 골짜기의 원리(院里)다. 원리는 조선시대 의료기관인 제생원(濟生院)이 있었던 마을이라 원마을 또는 원동이라 불렸다. 그래서 새마을로에서 원리로 빠져나가는 길은 원동길이다. 동서로 길게 이어지는 원동길 끝자락에 천년고찰 적천사(碩川寺)가 있다. 664년 원효대사가 창건하고 828년 심지왕사가 고쳐 세웠으며 도선의 스승인 혜철이 수행한 곳으로 이름나 있다. 고려 때는 보조국사 지눌(知訥)이 적천사를 크게 중창했고 일제 강점기 때는 독립 운동가들의 집합 장소였다고 한다. 적천사 입구에는 두 그루의 은행나무가 서 있다. 한 그루는 수나무로 수령 500여 년, 또 한 그루는 암나무로 수령 800년에서 1천년으로 추정된다. 곧고 반듯한 수형에 사방으로 뻗은 가지가 넓고 깊은 그늘을 드리워 이끼에 뒤덮인 줄기가 서늘히 검다. 지눌이 적천사를 중창했을 때 그가 짚고 다니던 은행나무 지팡이를 심은 것이 현재의 적천사 은행나무라고 전한다. 은행나무 앞에 1694년에 이를 기록한 비석 '축보조국사수식은행수게(築普照國師手植銀杏樹偈)'가 세워져 있다. 신도리 남쪽은 유호리다. 신도리를 지난 새마을로와 청도천은 유호리 앞에서 크게 굽이치는데 그 모서리에 청도 레일바이크와 자전거 공원 등이 들어서 있다. 처음 경부선 철도는 유호리를 지나갔고 역도 있었다고 한다. 철도는 1943년 직선화되었고 옛 경부선 철로를 활용해 조성한 것이 청도레일바이크다. 왕복 5㎞의 레일바이크와 아치형 보도교인 은하수다리·테마 산책로·시조공원 등으로 조성돼 있다. 인접한 청도 자전거 공원에는 산악자전거 체험코스(MTB알파인코스)와 MTB스킬센터·MTB지원센터가 마련돼 있다. 자전거를 직접 가져와 탈 수도 있고, 대여도 가능하다. 18개의 데크가 설치된 캠핑장도 있어 가족 단위의 레저문화 공간으로도 인기다. 신거역 앞 새마을로에서 청도 레일바이크로 가는 길 입구가 있다. 길은 하지길, 거연리 최하단부의 마을인 하지(下枝)의 이름을 딴 길이다. ◆한재로청도 레일바이크를 지난 새마을로가 다시 크게 굽이쳤다가 또 한 번 더 굽어지는 귀퉁이에서 한재로가 빠져나간다. 한재로는 청도읍 초현(初峴)리에서 상리(上里)를 거쳐 각남면 신당리에서 청려로로 이어지는 긴 고갯길이다. 한재는 '큰 고개'라는 뜻으로 대현(大峴)이라고도 하는데 남쪽의 화악산과 북쪽의 남산 사이 동서 방향으로 발달한 좁고 깊은 골짜기다. 청도향토사학회에서는 골이 길고 오래된 길이라 정의한다. 원래 상리에서 초현리까지를 한재라 했는데 요즘은 이 골짜기 전체를 한재라 부르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길의 이름도 한재로다. 한재로의 봄은 참으로 호사로운 벚꽃 분홍이다. 그즈음 골짜기 땅을 가득 메운 비닐하우스가 들썩이기 시작한다. 비닐하우스는 죄다 미나리밭이다. 그 유명한 한재미나리가 바로 이곳에서 자란다. 한재미나리는 1년에 딱 한 번 수확한다. 2월에서 5월까지 밭마다 시기를 조정해 수확한다. 한재에서 미나리를 수확하기 시작했다는 소문은 초고속으로 퍼져나가고 이내 수십 대의 관광버스가 한재를 넘는 장관이 펼쳐진다. 2월 초에서 3월 중순쯤 미나리는 아삭하면서도 부드럽고, 3월 하순이 넘어가면 그 향이 짙다. 5월을 넘기면 미나리가 질겨져서 자체적으로 생산을 금지한다. 한재미나리는 1994년 전국에서 처음으로 미나리 무농약 재배 품질 인증을 받았다. 지금 한재골은 전국에서 손꼽히는 미나리 재배 단지다. 상리에는 한재로에서 빠져나가 적천사로 가는 임도가 있다. 길은 청도 읍내까지 이어져 새마을로에 닿는다.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참고=청도군지, 한국지명유래집, 한국학중앙연구원, 디지털청도문화대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공동기획:청도군동서로 길게 이어지는 원동길 끝자락에 원효대사가 664년 창건했다는 천년고찰 적천사가 있다. 적천사 입구에는 두 그루의 은행나무가 서 있는데 한 그루는 수령 500여 년, 또 한 그루는 수령 800년에서 1천년으로 추정되며 사진 속 나무다. 지눌이 적천사를 중창했을 때 그가 짚고 다니던 은행나무 지팡이를 심은 것이라고 전한다.새마을운동발상지기념관은 새마을운동의 탄생배경과 발전단계, 우리나라 발전에 미친 영향과 성과, 그리고 새마을운동의 세계화 경향 등을 체험과 함께 알아볼 수 있는 공간이다.옛 경부선 철로를 활용해 조성한 청도레일바이크는 왕복 5㎞ 거리를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달릴 수 있어 찾는 이들에게 인기가 많다.청도 자전거 공원에는 산악자전거 체험코스와 지원센터 등이 마련돼 있다. 자전거를 직접 가져와 탈 수도 있고, 대여도 가능하다.
2022.12.13
[스토리가 있는 청도 힐링 여행 .3] 화양읍 도주관로, 성내 걷든 성밖 배회하든…화양, 그 이름처럼 어디 가든 빛이 가득
화양(華陽)은 빛나는 양지.역사가 기록된 이래 경부선 열차가 개통되기 전까지화양은 청도의 중심이었다.남쪽에는 청도군의 진산인 남산(南山)이높이 솟아 양팔 벌려 화양 땅을 안고 있고그 아래로는 청도천(淸道川)이 동류하며 넓은 들을 펼쳐 놓았다.남산과 청도천 사이에는청도읍성이 자리한다.남산은 남쪽을 경계하고 청도천은 북쪽을 파수했다.동·서·북문이 있었고성안에는 민가와 함께관아와 객사·군기고 등이 융성했다.청도읍성은 조선시대 동래에서 한양으로 가는주요 도로가 거쳐야 하는8개 읍성 중 하나였고길은 동문과 서문을 통과했다.그 길의 이름은 오늘날 '도주관로'다.◆청도읍성을 관통하는 도주관로청려로 화양삼거리에서 청도읍성 방향으로 들어서면서 도주관로가 시작된다. 화양읍을 관통하는 큰길이다. 길을 따라 조금 오르면 양쪽으로 시원하게 뻗어 흐르는 청도읍성의 성벽이 보인다. 처음 성을 쌓은 것은 고려 때라 한다. 그때의 성은 돌과 흙을 섞어 쌓은 토성이었고 조선 선조 23년인 1590년에 왜란에 대비하라는 왕명에 의해 성은 돌로 다시 축조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성벽은 파괴되었고 동·서·북문이 소실되었다. 이후 수차례 개축하여 읍성을 유지했고 고종 7년인 1870년에는 남문을 건립하여 4대문을 갖추게 되었다.청도읍성의 운명은 1905년 경부선철도가 건설되면서 변하게 된다. 철도는 읍성을 우회해 현재의 청도읍에 놓였지만 일제의 읍성 제거 정략은 집요했다. 읍성 내에 신작로를 개설한다는 명목으로 동문을 비롯한 성문과 성벽 일부를 헐었고, 도로의 변화와 함께 객사가 훼손되었다. 화양읍에 있던 관공서는 청도역 주변으로 옮겨졌고 상권의 중심도 청도장으로 옮겨갔다. 그러나 1960∼70년대만 해도 청도에서 "읍내 간다"고 하면 화양읍을 의미했다고 한다. 화양은 몸과 마음이 기억하는 청도의 중심이었다. 성벽 일부와 기저만이 남아 있던 청도읍성은 지금 북문인 공북루(拱北樓)와 서문인 무회루(撫懷樓) 그리고 동쪽·북쪽·서쪽 구간의 성벽 1천800m가 복원되어 있다. 남문지는 마을길이 나고 논을 일구면서 사라졌다. 그리고 동문인 봉일루(捧日樓)가 있던 자리에 도주관로가 놓여 있다.도주(道州)는 고려 현종 1년인 1010년부터 근 100년간 청도를 부르던 이름이었고, 그 이름을 이어받은 도주관은 조선시대 청도군 객사의 이름이다. 객사는 왕을 상징하는 위패(位牌)를 모시고 지방 수령이 초하루와 보름에 배례(拜禮)하던 곳이자 청도를 찾는 관원이 머무는 곳이었다.성안을 가로지르는 도주관로를 따라가면 화양우체국 지나 도주관의 긴 담이 나타난다. 도주관은 정당과 우익사만 남아 있었으나 현재는 복원되어 웅장한 모습이다. 건물 앞에는 대원군의 명으로 세워진 척화비가 서 있다. 도주관 뒤편의 화양초등에는 수령이 행정 실무를 보던 동헌 건물이 있다. 영조 13년인 1737년에 지어진 것으로 '주홀헌(주笏軒)'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임금을 알현하듯이 백성을 보살피겠다는 뜻이다.도주관로에서 성벽 길에 오른다. 동문지에서 북문 지나 서문까지 읍성을 밟아본다. 성벽에는 치(雉)와 치성(雉城)이 설치되어 있다. 멀리까지 적의 동태를 살필 수 있는 구조물로 지금은 훌륭한 전망대 역할을 한다. 성벽 위에는 여장이 올라 있다. 가슴께에 닿는 높이와 두툼한 두께는 안정감을 주고 사각으로 뚫린 총안은 근사한 창이 된다. 북문과 서문은 옹성을 갖추었다. 성안에는 화양읍사무소가 자리하고 말을 징발하던 고마청과 남산에서 흘러내린 물을 가두어 읍성에 물을 공급하던 인공 연못 '성내지'가 있다. 성 밖에는 원형의 벽으로 둘러싸인 형옥이 있고 여름이면 1만 송이 수련이 피어나는 연못이 조성되어 있다. 복원 초기 단백석 같던 성벽에는 벌써 더께가 내려앉았다. 왕성한 담쟁이가 성벽을 기어오르고 성의 안팎으로 초목이 자라나 평화로운 숨결이 자욱하다. 성내를 거닐든, 성 밖을 배회하든, 성벽을 따라 전진하든, 어디로 걸음을 옮기든 머리 위에는 항상 빛이 가득하다. 화양, 빛나는 양지라는 그 이름처럼.경부선 개통 이전 청도의 중심 '화양'동~서 관통하는 큰길이던 '도주관로'복원된 성벽 안팎 곳곳에 역사 흔적성 밖에는 1만 송이 수련 피는 연못이서국 왕이 피신했다는 남산계곡은절경 가득해 계곡 트레킹 즐기는 곳남산길 끝자락 신둔사 마애부도 2기보주 있는 종형에 사리공 뚫어 특이◆동천리와 교촌리를 잇는 동교길동문 밖 도주관로에서 동쪽 성벽 곁으로 남산을 향해 오르는 길은 동교길이다. 화양읍성 동쪽에 개천을 끼고 있는 동천리(東川里)와 청도 향교가 있는 교촌리(校村里)를 잇는다. 동교길을 조금 오르면 왼편 구릉지에 청도 석빙고가 있다. 전국에 남아있는 6개의 석빙고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보물 제323호다. 석빙고의 입구 왼쪽에 석비(石碑)가 서 있다. 거기에는 '5천451명의 막일꾼이 모두 하루씩 부역하였고, 607명의 승려가 돌을 날랐으며 12명의 석공, 3명의 야장 그리고 1명의 목수가 일했다. 양식쌀 53섬, 와공전(瓦工錢) 300냥, 시우쇠 1천438근, 회(灰) 384섬이 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지금 청도 석빙고는 동서로 긴 내부구조와 지상에 남북으로 걸쳐진 4개의 홍예보만 남아 있지만 천년이 지나도 제 모습일 것처럼 굳건해 보인다. 동교길을 조금 더 오르면 청도향교가 나타난다. 청도향교는 화양향교라 불리기도 하는데 조선 선조 1년인 1568년에 화양읍 고평동에 세웠던 것을 영조 10년인 1734년에 지금의 자리에 옮겨 지었다고 한다. 향교 내에는 사당 출입문인 내삼문, 사당인 대성전과 동무·서무·공부하는 곳인 명륜당과 동재·서재 등이 있으며 우묘좌당(右廟左堂)의 독특한 건물배치를 보인다. 향교가 있는 교촌리는 청도의 양반 터줏대감들의 동네로 명당이라 한다. ◆화양남산길 따라 남산계곡으로청도향교 앞 동교길에서 동천3길로 빠져나가면 화양남산길이 남산계곡으로 향한다. 화양남산길은 도주관로 초입에서 시작되어 동천을 따라 신둔사까지 이어지는데, 대부분의 사람은 상류의 남산계곡주차장에서부터 계곡의 오솔길을 따라 오르는 계곡을 즐긴다. 남산계곡은 이서국의 마지막 왕이 피신했다는 골짜기다. 또한 500년 전 무오사화 때 고을의 선비들이 모여 시회를 열며 음풍농월하던 곳이다. 계곡 곳곳의 절경마다 옛사람들이 남긴 각자를 만난다. 13곳이라고도 하고 16곳 혹은 19곳이 넘는다고도 한다. 안내판에는 음용지(飮龍池)·백석뢰(白石賴)·봉화취암(奉和醉巖)·취암(醉巖)·운금천(雲錦川)·질양석(叱羊石)·만옥대(萬玉臺)·연주단(聯珠湍)·석문(石門)·산수정(山水亭)·유하담(流霞潭)·일감당(一鑑塘)·낙안봉(落雁峯)·자시유인불상래(自是遊人不上來)·금사계(金沙界) 등 15개를 소개하고 있으나 계곡을 따라가다 보면 용항(龍亢)·옥정암(玉井巖) 등의 선경도 만날 수 있다. '자시유인불상래'는 주자의 '무이구곡가' 중 제8곡의 마지막 시구를 빌려온 말로 '여기서부터 놀러 오는 사람은 올라오지 말라'는 뜻이다. '금사계'는 '관세음보살이 머무는 곳'을 나타내는 말이다. 관세음보살이 머무는 곳은 곧 화양남산길 끝에 자리한 신둔사(薪芚寺)다. 신둔사는 고려 명종 3년인 1173년에 보조국사 지눌(知訥)이 창건하고 봉림사(鳳林寺)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후 절의 자세한 역사는 알 수 없는데 현종 때인 1667년에 상견(尙堅)이 중창하였고 고종 때인 1878년에 중건하면서 절 이름을 지금의 신둔사로 바꾸었다고 전한다. 경내에는 영산보탑이라 불리는 5층 석탑이 있다. 그 옆에는 탑의 조성과 관련된 내용을 새긴 탑비가 있는데 1924년 3월1일 공사를 시작해 5월14일에 마쳤으며, 신도들의 헌금 800여 원을 들여 제작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둔사에는 다른 사찰에서 보기 힘든 마애부도 2기가 남아 있다. 부도는 요사채 뒤쪽 바위암벽에 10m가량 거리를 두고 새겨져 있는데 모두 보주(寶珠·불가에서 보배로 여기는 둥근 공 모양의 구슬)가 있는 종모양이다. 왼쪽의 것에는 '사리탑(舍利塔)'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오른쪽 것에는 '보현수이씨사리탑(普賢修李氏舍利塔)'이라는 명문과 함께 철종 3년인 1852년에 조성했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두 부도 모두 명문 위쪽에 사각의 자그마한 구멍을 뚫어 사리공으로 삼았다. 신둔사에서 동북쪽으로 뻗어 나간 능선에는 왕이 숨은 봉우리라는 은왕봉(隱王峰)이 있다. 이서국의 왕이 신라군을 피해 은신했다는 곳이다. 사람들은 신둔사가 이서국 왕실의 은신처와 관련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신둔사의 종소리가 은왕봉의 정령을 위로한다고 믿는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청도군지. 한국지명유래집. 한국학중앙연구원. 디지털청도문화대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공동기획 : 청도군고려 때 처음 지은 것으로 알려진 청도읍성에 가면 담쟁이가 성벽을 기어오르고 성의 안팎으로 초목이 자라난 모습을 볼 수 있다. 어디로 걸음을 옮기든 머리 위에는 항상 빛이 가득해 가족들의 나들이 장소로도 인기를 모으고 있다.이서국의 마지막 왕이 피신했다는 골짜기인 남산계곡에서는 상류의 남산계곡주차장부터 계곡의 오솔길을 따라 오르는 계곡 트레킹을 즐길 수 있다.신둔사에는 다른 사찰에서 보기 어려운 마애부도가 남아 있는데 보주가 있는 종모양이다. 명문 위쪽에 사각의 자그마한 구멍을 뚫어 사리공으로 삼았다.
2022.12.06
[농업으로 행복한 영양 .12·(끝)] 외국인 근로자 운용 정책…"공무원이 직접 관리, 외국인 근로자 이탈 없는 비결이죠"
국내 농촌 고령화로 인한 일손 부족 문제는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농업 종사자 열 명 중 네 명이 65세 이상 고령층이다. 1970년 전체의 4.9%에 머물던 65세 이상 농가인구 비율이 2020년 42.4%로 8배 이상 급증했다. 전체 농가인구는 자꾸 줄어드는데 젊은 층의 유입은 거의 제자리 수준이다. 부족한 일손은 농기계와 외국인 근로자가 메우고 있다. 대한민국 농촌은 이제 외국인 근로자의 도움 없이는 지속 불가능한 상황에 놓여있다. 이에 경북 영양은 보다 적극적으로 외국인 근로자 운용 정책을 펴고 있다. 법무부의 외국인 계절근로자 프로그램과 결혼이민자 가족을 활용한 각종 지원책을 통해 지역 농가에 실질적 도움을 주는 것이다. '농업으로 행복한 영양' 12편에서는 영양군의 외국인 근로자 활용방안과 앞으로의 정책을 소개한다.법무부 계절근로자 프로그램영양군 2017년부터 도입 시행공무원 현장방문 등 사전 준비중개인 없이 직접 모집·교육다문화가족센터 등 지원받아통역·문화적 갈등 극복 도움결혼이민자 친척 초청 활용도프로그램 설문서 90% "만족"◆외국인 계절근로자 프로그램 적응 위해 각별한 노력 쏟아"3개월간 고생하셨습니다. (영양)군에서도 틈틈이 현장을 방문하고 여러분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애썼는데 아쉬움은 없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이 출국하기 전에 작성한 설문지를 보고 더 나은 사업을 준비하겠으며, 내년에도 건강한 모습으로 만나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지난 11월6일 오도창 영양군수는 영양을 떠나는 외국인들을 배웅하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이들은 지난 8월11일 입국한 143명의 베트남 화방군 출신 계절근로자다. 가을철 농번기를 맞아 한국에 들어와 90일 동안 영양의 52곳 농가에서 일손을 도운 뒤 이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다. 이들이 영양에서 일한 것은 법무부의 외국인 계절근로자 프로그램을 통해서였다. 외국인 계절근로자 프로그램은 2015년 법무부가 외국인의 불법체류를 방지하고 농번기 인력난을 해소하기 위해 도입했다. 전국 지방자치단체를 대상으로 단기간 집중적으로 일손이 필요한 농어업 분야에서 합법적으로 최대 5개월 동안 외국인을 고용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영양군은 이 제도가 본격 확대 시행되던 2017년부터 참여했다. 영양군은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전부터 철저한 준비를 했다. 동남아 여러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를 방문했고, 베트남 화방군과의 협의가 급물살을 탔다. 2016년 10월5일 영양군은 베트남 화방군과 농업인력 파견 양해각서(MOU)를 체결하기에 이르렀다. 같은 해 11월15일에는 베트남 화방군 인민의회장을 비롯한 화방군 관계자를 초청해 영양군 농업현장을 보여주고 군수 등 주요 인사와 간담회도 했다. 이런 노력 끝에 영양군은 2017년부터 법무부의 외국인 계절근로자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게 됐다. 이후 매년 상반기와 하반기에 한 번씩 베트남 계절근로자들이 영양에 들어와 일손이 부족한 농가를 도왔다. 계절근로자 수도 2017년 71명에서 2018년 162명, 2019년 256명 등 해마다 늘면서 지역 농업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커졌다.하지만 2020년과 지난해에는 코로나19 확산으로 베트남 계절근로자 입국이 중단됐다. 그러다가 올해부터 방한이 허용되면서 베트남 계절근로자 프로그램도 재개됐다. 2017년부터 올해까지 베트남 화방군에서 영양에 일하러 온 외국인 계절근로자 수는 632명에 이른다. 눈여겨볼 것은 이 가운데 단 한 명의 이탈자도 나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는 전국적으로도 찾기 힘든 모범적인 사례로, 중개인 개입 없이 영양군과 베트남 화방군의 담당 공무원이 외국인 계절근로자 모집·교육·입출국 관리 등을 직접 맡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영양군은 화방군과의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 다문화가족지원센터의 도움을 받아 지역의 결혼이민자 가운데 통역원을 채용해 직접 소통했다. 또 영양에 들어온 외국인 계절근로자의 적응을 위해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추석이면 명절 음식과 베트남 음식을 전달하는 등 외국인 계절근로자들을 이웃이나 동료처럼 대했다. 상호 간 신뢰가 쌓인 영양군과 베트남 화방군은 2018년에는 더욱 돈독한 협력을 위해 자매결연까지 맺었다. ◆외국인 계절근로자 국가·지역 다양화 추진영양군은 오래전부터 지역 일손 부족 문제에 관심을 갖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영양의 대표 작물인 고추는 생산 과정의 기계화가 어렵고, 수확기에 인력 수요가 갑자기 많아져 수급에 어려움이 컸기 때문이다. 고심하던 영양군은 2011년 '영양 빛깔찬 일자리지원센터'를 건립해 운영하기 시작했다. 국내 대도시 인력을 일손 부족 농가에 공급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내국인이 농촌에서 일하는 것을 기피하는 데다 주로 고령 근로자 위주로 참여해 한계에 부딪혔다. 이에 영양군은 해외로 눈을 돌렸다. 2017년 법무부의 외국인 계절근로자 프로그램에 참여한 것이 대표적이다. 영양군은 코로나19 확산으로 프로그램 운영이 어려워지자 지난해에는 우즈베키스탄에서 112명의 계절근로자를 급히 데려와 42개 농가에 보내기도 했다. 영양군은 올해부터 결혼이민자 가족을 활용하는 방안도 도입했다.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한 결혼이민자의 4촌 이내 가족과 친척을 초청해 외국인 계절근로자로 일하도록 하는 방식이다. 영양군은 또 필리핀 딸락시와도 양해각서(MOU)를 체결해 필리핀 출신 계절근로자도 확보했다.올해 영양군에는 외국인 계절근로자 프로그램을 통해 베트남 화방군에서 143명, 필리핀 딸락시에서 119명의 근로자가 들어왔다. 또 결혼이민자 가족 초청방식으로 23명의 근로자가 입국하는 등 285명의 외국인 근로자가 지역 농가 98곳에서 일손을 도왔다. 경북에서 가장 큰 규모다. 특히 영양군은 외국인 근로자와 지역 농업인들이 언어와 문화 차이로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다. 다문화가족지원센터를 통해 통역 지원은 물론 여러 가지 문제가 생겼을 경우에는 중재에도 나선다. 그만큼 프로그램 만족도가 높다. 영양군 자체 설문조사에서 외국인 계절근로자 프로그램에 만족한다는 농가 비율이 전체의 90%에 육박한다.영양군은 인력 공급 및 인건비 안정을 위해 앞으로 외국인 계절근로자 운용을 확대할 계획이다. 농작업에 특화된 인력을 원활하게 확보하기 위해 출신 국가와 지역을 다양화할 생각이다. 영양군은 사업 참여 농가와 외국인 근로자에 대한 데이터베이스도 구축하고 있다. 매년 설문 조사 및 평가를 통해 상호 간 재계약을 원할 경우 우선 배정하고, 평점이 높은 농가와 근로자에 대해서는 각종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대신 평점이 좋지 않으면 사업 제외 등 페널티를 부여하는 등 외국인 계절근로자 프로그램이 안정적으로 정착되도록 애쓰는 중이다. 남한진 영양군 유통지원과장은 "영양군은 앞으로도 외국인 계절근로자 선발 및 현지 교육 등에 직접 참여해 근로자 선발 인터뷰를 함께 진행하고 현지 교육도 실시할 계획"이라며 "우리나라 문화와 영양군의 특성 등은 물론 지역 주요 농작업 방법과 일상생활의 기본적인 예의·기초 한국어 등을 교육하고, 영양지역 사업 신청 농가를 대상으로 한 교육과 설명·간담회도 확대해 나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글=김일우 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사진=영양군공동기획: 영양군영양군의 한 농가에서 베트남 출신 근로자들이 상추를 수확하고 있다. 영양은 베트남 화방군, 필리핀 딸락시와 농업인력 파견 양해각서를 체결하는 등 농번기 일손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외국인 근로자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국내로 입국한 뒤 코로나19 검사를 받고 있는 외국인 계절 근로자들.농번기에 맞춰 영양지역 농가에서 일하기 위해 입국한 베트남 근로자들이 영양군문화체육센터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오도창 영양군수가 지역 농가에서 일하는 외국인 근로자들에게 도시락을 전달한 뒤 격려하고 있다.
2022.12.01
[스토리가 있는 청도 힐링 여행 .2] 이서·풍각·각북의 길들...길이 길을 만들어…청도비슬산둘레길 곁길로 새는 '몰래길'까지
옛 문헌인 '오산지(鰲山志)'에 의하면,'청도(淸道)'라는 명칭은 '산과 시내가 맑고 아름다우며,큰 길이 사방으로 통한다 (山川靑麗 大道四通)'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동서로 긴 지형의 청도는 읍내를 중심으로 산이 많은 동쪽을 산동,들이 넓은 서쪽을 산서라 칭하는데 산서~읍내~산동을 잇는 등뼈 같은 도로를 청려로라 한다.청려로는 바로 '산과 시내가 맑고 아름답다'는 청도의 이름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길이며 이 길로부터 많은 큰길들이 사방으로 통한다.그중 산서에서 대구로 향하는 이서로와 헐티로 역시 청려로와 연결되어 있다.◆이서면 이서로는 청도 관문이서면은 산서에서 가장 큰 면이다. 뒤로는 삼성산(三聖山)이 높이 솟아 있고 앞으로는 청도천이 서에서 동으로 흐른다. 이서(伊西)는 청도 지역의 초기 성읍 국가인 이서국에서 따 온 이름이며 그 중심을 흐르는 길이 이서로다. 이서로는 대구 파동에서 가창 삼산리 지나 청도로 들어가는 팔조령 터널에서 시작된다. 팔조령은 과거 동래에서 한양으로 가는 영남대로의 주요 길목이었으니 이서로는 청도의 관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팔조령을 지난 이서로가 이서면의 너른 분지 속으로 내려앉으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청도박물관이다. 이곳은 고대 유물부터 근현대 사료에 이르기까지 청도를 대표하는 다양한 역사·문화 자료를 전시하고 있으며 청도의 관광지와 문화재·유적지를 비롯해 각종 특산품도 소개하고 있다. 특히 이서국의 실체를 조명하는 영상과 청도 지역에 남아 있는 선조들의 실제 생활 유물도 접할 수 있다. 이 밖에도 청도박물관은 매년 다양한 기획전시를 열고 있고 다채로운 문화행사도 진행하고 있다. 청도박물관 바로 옆에는 한국 코미디타운이 자리한다. 청도를 한국 코미디의 메카로 만들겠다는 포부가 담긴 이곳은 한국 코미디 역사 100여 년을 재조명하고 사라져가고 있는 재담·만담·악극 및 방송 코미디에 관한 자료를 체계적으로 보존하고 전시하는 박물관이다. 또한 생활관과 공연장 등의 인프라를 갖추고 있으며 코미디언을 꿈꾸는 이들이 모여 아이디어를 공유하는 아카데미 공간도 있다. 타운에 들어서면 한국 코미디의 역사를 다양한 체험과 함께 접하게 된다. 웃음 요술램프·몸 개그 훈련소·코믹 분장실·개그 오디션 등의 체험이 가장 인기가 많다. 한국 코미디 영화의 부흥기인 1950∼60년대의 영화도 상시 상영하고 있으며 코미디 관련 도서와 대본 및 각종 서류도 전시되어 있다. 정원에는 한국 코미디계의 대부인 구봉서의 동상이 있는데 그의 손등을 만지면 복을 받고 웃을 일이 생긴다고 한다.산서~읍내~산동 잇는 '청려로'가 축가창서 팔조령 넘으면 청도의 관문이서로엔 청도박물관·코미디타운자계서원 등 들렀다 청도천 건너면물길 시작 천변 300~400년 금곡숲대구 향한 또다른 길 각북 헐티로천년고찰 용천사·둘레길로 잇닿아◆삼성산길과 자계서원길이서면은 산서에서 집성촌이 가장 많다고 한다. 그래서 오래된 집과 재실도 많고 기리고 기억할 만한 서원도 여럿이다. 이서로를 따라 달리다 금촌리와 학산리 입구에서 삼성산을 향해 깊이 뻗어 있는 삼성산길로 들어선다. 삼성산은 세 명의 성인이 난 곳이라 생긴 이름이라 하는데 산의 세 봉우리에서 유래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삼성산길을 따라 약 1㎞ 정도 들어가면 금촌리 풍양지를 바라보는 자리에 동계(東溪) 이운룡(李雲龍) 장군과 향산(鄕山) 이백신(李白新)을 모신 금호서원(琴湖書院)이 있다. 동계 선생은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우고 경상우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에 이른 분으로 이순신 장군이 가장 아꼈던 장수 중 한 명이라 전해진다. 향산 선생 역시 임진왜란 때 왜적과 싸운 분이시다. 후손과 유림에서는 지금도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한다. 삼성산길에서 학산리로 들어서면 모산길이 있다. 모산(牟山)은 학산리의 자연마을로 '산을 의지하고 앉은 마을'이라고도 하고 '높은 지역'이라는 뜻이라고도 한다. 모산길 끝자락에 용강서원(龍岡書院)이 자리한다. 이곳은 밀양박씨 충숙공(忠肅公) 박익(朴翊)과 임진왜란 때 창의한 14의사를 제향하고 있다. 용강서원의 첫인상은 대단하다. 작은 마을에서 이처럼 규모가 큰 서원과 마주치는 일은 그리 흔하지 않다. 그러나 그보다 더 대단한 것은 한 가문에서 14명이나 되는 의사가 한 마음으로 왜적과 싸운 일이다. 용강서원의 충렬사(忠烈祠) 및 14의사 묘정비(廟廷碑)는 청도 지역의 창의를 대표하는 유적이다. 이서로를 따라가다 청도천을 건너기 전 서원리 자계서원길로 들어가면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을 배향한 자계서원(紫溪書院)이 있다. 조선 초 김종직의 문인이자 영남사림파의 맹장 중 한 사람인 탁영 선생은 무오사화 때 참화 되었다가 중종반정 이후 대제학에 추증된 분이다. 서원 마당에는 거대한 은행나무 두 그루가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다. 그중 한그루 은행나무 앞에 '탁영선생수식목(濯纓先生手植木)'이라는 작은 표석이 서 있다. 탁영 선생이 직접 심었다는 나무다. 수령 500년 된 나무로 높이 15m, 둘레는 4.4m나 된다. 자계서원은 가을날 은행나무 순례지로도 이름나 있다. ◆풍각 청려로와 각북 헐티로청도천을 건너면서 이서로는 끝나고 청려로가 이어진다. 청려로의 시작이자 끝은 풍각면의 금곡리다. 창녕으로 넘어가는 비티재 아래 마을로 오래전 이곳 골짜기에서 쇠를 캤다고 하여 금곡(金谷)이라 부른다. 이곳에서 청도천이 시작되는데 마을 입구 천변에 느티나무와 팽나무가 어우러진 금곡숲이 있다. 숲은 300∼400년 정도 이어져 왔으나 일제강점기 때 베였고, 지금은 남은 그루터기에서 돋아난 후계목들이 울창하게 자라나 있다. 마을 사람들은 예부터 금곡숲 나무들이 동시에 잎을 틔우면 풍년이 온다고 믿고 있다. 금곡숲은 2017년에 공원으로 가꿔졌다. 쉬어가기 좋은 정자와 벤치·화장실 등이 갖춰져 있고 8∼9월에는 맥문동이, 9∼10월에는 꽃무릇이 장관을 연출한다. 금곡으로 향하는 청려로가 신당교차로에서 대구를 향해 내어놓은 또 다른 길이 헐티로다. 헐티로는 비슬산 헐티재를 넘어 대구 가창으로 연결되는 길로 헐티재는 창녕·밀양·부산 방면에서 각북면을 거쳐 대구로 가는 가장 높은 고개다. 헐티의 의미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는데 일설에서는 험준한 고개를 헐떡이며 넘으면 배가 고파온다고 하여 헐티재라 불렀다는 이야기가 있다. 봄의 헐티로는 벚꽃으로 찬란하다. 여름은 녹음으로 장대하고 가을은 단풍으로 눈부시다. 헐티재 아랫마을인 오산리에는 천년고찰 용천사(湧泉寺)가 자리한다. 신라 문무왕 때인 670년에 의상대사가 당나라에서 수행하고 돌아와 세운 화엄 십찰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용천사에는 용천이라 부르는 샘이 있는데 가물 때나 장마가 질 때도 늘 일정한 양의 맑은 물이 흐르고 사철 마르지 않으며 한겨울에도 어는 법이 없다고 한다. 오산리에서 비슬산길을 따라 들어가면 지난 6월에 문을 연 청도자연휴양림이 나타난다. 편백나무로 지어진 휴양관은 청도의 특산물인 미나리, 반시 등 친근하고 재미난 이름을 가졌으며 최신 시설을 자랑한다. 특히 높은 고도에 위치해 있어 탁 트인 전망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청도자연휴양림은 최근에 조성된 '청도비슬산둘레길'의 기점 중 한 곳이다. 청도자연휴양림에서 비슬산의 동쪽 자락을 따라 6㎞의 도란도란 이야기길과 2.6㎞ 참꽃길이 이어지고, 5㎞의 숨소리길이 남쪽으로 크게 돌아 최복호 패션문화연구소 '펀앤락'에 닿았다가 다시 헐티로를 올라 용천사를 거쳐 휴양림 가는 6.4㎞의 타박타박 풍경길이 합해져 총 20㎞의 둘레길을 이룬다. 펀앤락에서 풍각면 성곡리의 철가방극장까지 이어지는 '청도 몰래길'도 있다. 개그맨 전유성과 패션디자이너 최복호가 만든 몰래길은 곳곳에 자신의 흔적을 몰래 남겨 자신만의 추억을 만드는 길이다. 참 많은 길이 있다. 도처에 길이고, 길이 길을 만든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참고= 한국지명유래집, 한국학중앙연구원, 디지털청도문화대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공동기획 : 청도군최복호 패션문화연구소 '펀앤락'에서 풍각면 성곡리의 철가방극장까지 이어지는 '청도 몰래길'. 개그맨 전유성과 최복호가 만든 '몰래길'은 곳곳에 자신의 흔적을 몰래 남겨 자신만의 추억을 만드는 길이다.한국 코미디타운은 한국 코미디 역사 100여 년을 재조명하고 체계적으로 보존·전시하는 박물관이다. 정원에는 한국 코미디계의 대부인 구봉서의 동상이 있는데 그의 손등을 만지면 복을 받고 웃을 일이 생긴다고 한다.청도박물관은 고대 유물부터 근현대 사료에 이르기까지 청도를 대표하는 다양한 역사·문화 자료를 전시하고 있으며, 청도의 관광지와 문화재·유적지를 비롯해 각종 특산품도 소개하고 있다.금곡숲은 300∼400년 이어져 왔으나 일제강점기 때 베어졌고, 지금은 남은 그루터기에서 돋아난 후계목이 울창하게 자라나 있다. 마을 사람들은 예부터 금곡숲 나무들이 동시에 잎을 틔우면 풍년이 온다고 믿고 있다.
2022.11.29
[농업으로 행복한 영양 .11] 새롭게 떠오르는 약용작물 '단삼'…자연 그대로 키워내 약효 탁월…국내 단삼 주산지로 '우뚝'
단삼(丹蔘). 효능이 산삼에 버금간다고 해서 인삼·현삼·만삼·사삼과 함께 오삼(五蔘)으로 불리는 약초다. 심장을 다스리는 데 중요한 생약재로 쓰이고, 혈액순환을 촉진하고 어혈을 없애는 등 혈관 건강에도 도움을 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십수 년 전만 해도 거의 전량을 중국에서 수입하다 최근 들어 국내산 단삼이 유통되기 시작했다. 2010년부터 상업적 재배가 본격화되면서다. 단삼은 서늘한 기후에 강수량이 적은 곳에서 잘 자라는 특성이 있어 국내에선 경북과 강원 등 일부 지역에서만 자생한다. 특히 영양은 단삼 재배에 적합한 기후·토양 조건을 갖춰 국내 주산지로 떠오르고 있다. 일월산 자락에서 자연 그대로 키워내 약효는 뛰어나고 잔류 농약 걱정도 없다. '농업으로 행복한 영양' 11편에서는 영양의 새로운 소득 작물로 주목받는 단삼을 소개한다. 단삼 대량재배 전국 첫 성공 정구식씨해발고도 330m 6천평대 무농약 재배전량수입하던 단삼 국내유통에 도움최근 수요 많아져 시기 앞당겨 수확단삼은 심장·혈액순환 돕는 생약재골다공증 예방에도 효과 있어 주목음식·화장품 원료로도 쓰이며 각광◆일월산 자락서 자라는 약용작물지난 11일 찾은 경북 영양군 일월면 도곡리 샘물농장 입구. 저 멀리 일월산(해발 1천219m) 정상이 시야에 들어왔다. 농장 안에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 앉아 식물 뿌리의 흙을 제거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흙을 털어낸 뿌리는 붉은색을 띤다. 한약재로 쓰이는 단삼이다. 작업장 한쪽에는 수확한 단삼이 수북이 쌓여있고, 플라스틱 상자에는 작업을 끝낸 단삼이 가득했다."단삼은 보통 3~4월에 심어서 1년 뒤에 수확하고 다시 심는 것을 반복합니다. 최근 들어 수요가 많아져서 예년보다 일찍 단삼을 수확하고 있어요. 내년에는 단삼을 더 많이 재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샘물농장을 운영하는 정구식(61)씨가 밭에서 자라는 단삼을 살펴보며 말했다. 그의 농장은 해발고도 330m 지점에 위치한다. 규모만 2㏊(6천평)에 이른다. 정씨는 전국에서 최초로 단삼 대량 재배에 성공한 농민이다.8대째 영양에서 사는 토박이인 그는 7남매 중 장남으로 어릴 적부터 농사일을 도우며 자랐다. 잠시 도시로 나갔던 적도 있지만 이내 돌아와 농사를 시작했다. 부모로부터 땅을 물려받아 수박·고추를 키운 것. 그러다 그는 2010년 갑자기 단삼 재배에 나섰다. 농촌진흥청 국립원예특작과학원 인삼특작부에서 쓴 단삼 관련 글을 읽은 것이 계기였다. 앞으로 건강이 중요한 시대가 되면 단삼이 '효자 작물'이 될 것으로 내다본 것이다. 같은 마을 주민 한 명과 함께 국립원예특작과학원 인삼특작부에서 종자를 얻어와 단삼 재배를 시작했다. 영양에서는 처음이었다. 이후 그는 도곡리 주민을 중심으로 친환경작목반도 꾸렸다. 전국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진 단삼 재배 농가 조직이었다."단삼은 서늘한 기후를 좋아하면서 가뭄에 강해요. 대신 비가 너무 많이 오면 안 되고 토양은 진흙땅이 나은 것 같아요. 영양의 기후와 땅이 단삼 재배에 딱 들어맞는 거죠."정씨는 단삼 가공 시설도 하나둘씩 갖춰나갔다. 수확한 단삼을 세척·건조·절단하는 장비를 모두 갖고 있다. 그가 생산하는 단삼은 전국 한약재가 모이는 서울 경동시장에 팔거나 프랑스에 수출하기도 한다. 건강식품회사나 화장품회사에도 납품한다. 판로가 안정적이다 보니 다른 농가에서 단삼을 팔아달라고 할 정도다.단삼은 장점이 많은 작물이다. 우선 같은 약용작물인 천궁에 비해 병해충에 강해 무농약 재배가 쉬운 편이다. 재배 과정에서 노동력이 크게 필요하지 않아 인건비 등 생산비가 적게 든다. 시장에서 단삼 가격 편차도 적은 편이라 가격도 안정적이다.실제 정씨는 단삼을 무농약으로 재배한다. 그가 단삼 재배를 선택한 가장 큰 이유도 무농약 재배가 수월한 약용작물이라는 점이었다. "농약은 소비자 건강뿐만 아니라 농부 건강에도 좋지 않아요. 어릴 적부터 부모님 농사를 도왔던 터라 농약이 얼마나 나쁜지 잘 압니다. 단삼은 농약을 사용하지 않아도 돼 생산비가 적게 들어 더 좋은 것 같아요."정씨는 아내 김영남씨와 함께 2017년 8월 농협중앙회로부터 '이달의 새농민상'을 받기도 했다. 전량 수입에 의존하던 단삼을 국내 최초로 대량 재배에 성공한 점을 인정받았다. ◆국내 단삼 주산지로 떠오르는 영양단삼은 꿀풀과에 속하는 다년생 식물이다. 적삼(赤參), 홍근(紅根) 등으로도 불린다. 단삼은 오삼(인삼·현삼·단삼·만삼·사삼)에 속하는 약초로 한의학에서는 말린 뿌리를 심장을 다스리는 데 중요한 생약재로 사용해 왔다. 주요 약효 성분으로는 혈액순환을 돕는 살비아놀산 B(Salvianolic acid B)와 탄쉬논 IIA(Tanshinone IIA) 등이 있다. 단삼의 뿌리 추출물은 혈전(혈관 속에서 피가 굳어진 덩어리)을 없애고, 혈액 순환을 돕는다. 심혈관 질환 치료에도 사용되며, 혈압을 낮추는 효과가 있다. 특히 여성에게는 생리불순이나 산후복통 등 부인병을 치료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단삼 추출물이 뼈를 파괴하는 파골세포의 형성을 막고, 골 형성을 촉진해 골다공증 예방에 효과가 있다는 사실도 최근 연구에서 밝혀졌다.단삼은 중산간지의 햇볕이 잘 드는 양지바른 곳에서 잘 자란다. 재배에 가장 적합한 지역은 해발 500m 안팎의 산 구릉지이며 연평균 기온 17℃, 연간 강우량 900~1천㎜인 곳이다. 단삼은 비교적 추위에 잘 견디고 기후 적응성도 좋아 재배 분포가 넓은 편이다. 단삼의 뿌리는 60~80㎝의 깊이까지 자랄 수 있어 토양층이 깊고 부드러운 사질 양토가 생장에 가장 유리하다.영양은 이런 면에서 단삼 재배 적지라고 할 수 있다. 전반적인 해발고도가 경북에서 가장 높은 데다 서늘한 기후와 적당한 강수량 등 단삼이 자라는데 유리한 환경 조건을 갖추고 있다. 국내에서 단삼은 경북과 강원 산간 지역에서만 자생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최근까지 국내에서 유통된 단삼은 대부분이 중국산이었다. 국내에선 대량 생산이 이뤄지지 않아서다. 2010년대 들어서야 중국산 단삼의 안정성 문제가 부각되면서 국내에서도 본격적으로 상업적 재배가 시작됐다. 현재 국내에서 단삼은 경북 영양·전남 곡성·강원도 철원·충남 청양·전북 고창 등지에서 일부 재배되고 있는데 생산량이 가장 많은 곳이 영양이다. 일월산 자락에서만 매년 3~6t가량의 단삼이 생산된다.단삼 뿌리는 차·주스·영양밥·샐러드 등 각종 음식과 화장품 원료로 쓰이며 수요가 늘어나는 추세다. 이에 농촌진흥청 국립원예특작과학원은 2016년 '다산', 2018년 '고산' 등 국내 육성 품종을 잇달아 개발해 보급하는 등 단삼 국산화에 힘쓰고 있다.영양군도 천궁을 대체할 작물로 단삼을 주목하고 있다. 천궁의 경우 오랜 기간 연작해 생산량은 줄고 병해충 피해는 커지고 있다. 이에 영양군은 농가 소득원 다변화 차원에서 단삼의 대량 생산 기반을 갖추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글·사진=김일우 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공동기획: 영양군경북 영양군 일월면 도곡리 샘물농장 단삼밭 전경. 영양은 서늘한 기후와 적당한 강수량 등 단삼이 자라는데 최적지로 꼽힌다. 단삼 뿌리는 차·주스·영양밥·샐러드 등 각종 음식과 화장품 원료로 쓰이며 수요가 늘어나는 추세다.붉은색을 띠는 단삼 뿌리는 혈액 흐름을 촉진하고 새로운 혈액을 생성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알려져 있다.국내에서 처음으로 단삼 대량 재배에 성공한 정구식씨가 자신의 밭에서 단삼 생육상태를 살펴보고 있다.
2022.11.24
[스토리가 있는 청도 힐링 여행 .1] 운문면의 길 따라...청도8경 '공암풍벽' 품은 운문호반 에코트레일 사계절 내내 호젓
▶시리즈를 시작하며= 햇살이 내리쬐는 청도의 길에서는 가을이 색색으로 무르익어 간다. 그리고 그 길에서는 도시에서 가지지 못했던 느긋함과 행복함, 힐링을 느낀다. 나뭇가지에 몇 개 남은 감을 쪼아 먹고 있는 까치를 보면서 농부의 나눔과 배려를 배우고, 운문사와 청도읍성을 지나면서 우리 문화의 여유로움을 느낀다. 청도는 가는 길마다 이야기가 쌓여 있고, 그 이야기들은 찾는 이를 웃게 한다. 영남일보는 핫플레이스로 떠오르고 있는 청도의 멋진 풍광들과 그곳을 찾아가는 길을 기획시리즈 '스토리가 있는 청도 힐링여행'을 통해 5차례에 걸쳐 소개한다.운문댐 완공후 새로운 명품길 탄생왕복 2시간 2㎞ 거리 곳곳에 전망대운문로 '신화랑길' 신화랑풍류마을화랑정신·문화체험 프로그램 풍성운곡정사서 본 운문호 풍광도 일품길은 모든 걸음의 이력, 걷고 걸어 땅에 새긴 시간이다. 청도 운문면에는 구름의 문으로 가는 운문로가 있다. 운문로는 운문재를 넘어가는 길이다. 운문재는 문복산·가지산·운문산 등 해발 1천 m가 넘는 산들에 포위되어 있는 험준한 고개다. 그래서 지나가는 구름도 산허리를 넘지 못하고 웅성웅성 멈추어 구름문을 이루고 있다고 하여 운문재라 했다. 오래전 그 길을 청도와 경산·대구의 소금을 전담하던 마바리들이 걸었다. 울산과 경주에서 해물을 지고 내륙인 고령과 창녕 방면으로 향하던 보부상들의 길이기도 했다. 많은 시간이 흘러 어떤 이력은 흐려지거나 잊혔지만 오래된 시간 위에 새로운 이력 또한 새겨지고 있다. ◆운문로의 신화랑길 운문면 소재지의 은행나무 가로수 길 끝자락에서 운문로가 시작된다. 운문댐 하류보를 바라보며 운문교를 건너면 새로운 길 하나가 샛길로 뻗어 있다. '신화랑길'이다. 2017년쯤 '신화랑풍류마을'이 조성되면서 마을 앞쪽으로 이어진 길에 명명된 이름이다. 청도는 화랑정신이 처음 발현된 곳이다. 세속오계를 탄생시키고, 이를 바탕으로 삼국통일의 위업을 위한 화랑들의 수련이 이루어진 곳이 바로 운문산 일대였다. 신화랑풍류마을은 이러한 화랑정신을 계승하고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새로운 화랑정신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조성한 복합문화관광 단지다. 이곳에서는 화랑정신이 흐르는 청도의 자연에서 몸 단련을 통해 내면의 변화를 일으킴과 동시에 마음 수련을 통해 삶의 질을 향상해 이를 지속 가능케 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신화랑풍류마을은 화랑문화 고유의 정통성과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한 신화랑 정신문화가 공존하는 힐링과 웰빙의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화랑정신기념관에서는 화랑의 정체성과 역사를 심도 있게 접할 수 있으며 또한 가상현실을 통해 승마와 궁술·검술 등을 게임형식으로 체험해 볼 수 있다. 화랑오계관은 연수교육 및 수련활동을 위한 공간이다. 1층에는 명상실이 마련되어 있으며 건강지수를 측정하고, 소리와 색채를 조합한 심리 진단과 치료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화랑궁도장에서는 국궁을 체험할 수 있다. 어린이를 위한 활도 준비돼 있으며 활을 잡는 법부터 명중시키는 방법까지 세세히 알려준다. 화랑수련장은 어린아이들의 눈높이에서 화랑도의 신체단련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다. 운문산 깃발꽂기·솥바위 건너기·육장군 동굴탐험·무적숲 미로·장군평 넘나들기 등 청도에 남아 있는 화랑들의 자취 어린 지명들을 이용한 다양한 어드벤처 시설물이 설치되어 있다. 또한 다양한 행사를 위한 대강당과 다목적 연회장, 체류형 고객을 위한 숙박시설인 화랑촌과 카라반, 오토캠핑장 등도 갖추고 있다.◆운곡지나 운문사길로 신화랑풍류마을에서 운문로를 따라가면 이내 길옆으로 운문호가 펼쳐진다. 이제 운문로는 봄날의 벚꽃으로 이름난 운문호 드라이브 길이 된다. 가을 벚나무 단풍이 스산히 아름다운 길이기도 하다. 이 길가 언덕진 자리에 운곡(雲谷)이라는 정사(精舍)가 있다. 정사는 학문을 가르치고 정신을 수양하는 집이다. 운곡정사는 취죽당(翠竹堂) 김응명(金應鳴)의 후손들이 살았던 경주김씨 종택으로 취죽당의 8세손인 운곡(雲谷) 김몽로(金夢魯)의 생가라 한다. 사랑채 상량문에 1695년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으니 역사가 오래된 집이다. 운곡정사 옆에는 취죽당을 모시는 재실인 원모재(遠慕齋)가 있다. 운곡정사와 원모재는 원래 운문댐 수몰지인 운문면 순지리에 있었던 것을 1993년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 지었다고 한다. 운곡정사에서 바라보면 운문호는 환히 아름답고 호수에 허리가 잠긴 개산 봉우리가 대문간 지붕 위에 올라 있다. 운곡정사 아래에는 호수를 바라보는 작은 전망대가 마련되어 있고 여인의 얼굴을 형상화한 미술 작품이 '봄 사랑'이라는 글귀와 함께 설치되어 있다. 반듯한 이마에 꽃을 피워 올린 여인의 옆모습이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운문호의 포토존이다.운문로는 신원리에 이르러 다시 샛길 하나를 내어준다. 천년고찰 운문사로 향하는 '운문사길'이다. 들목의 청청하고 장대한 솔숲을 지나면 운문사가 펼쳐진다. 평평하고 너른 대지 위에 수십 채 기와집이 들어앉았다. 운문사는 진흥왕 21년인 560년에 한 도승이 대작갑사(大鵲岬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다고 한다. 신라 말에는 승려 보양(寶壤)이 중창하고 작갑사(鵲岬寺)라 하였다. 이후 고려 건국의 과정에서 보양 스님의 도움을 받은 적 있는 왕건이 937년에 보은의 뜻을 담아 토지 500결(結)과 '운문선사(雲門禪寺)'라는 사명(寺名)을 내렸다. 그로부터 이어져 온 운문사는 오늘날 한국 최대의 비구니 도량이다. 17세기의 문인 이중경(李重慶)이 운문산을 유람할 때 한 스님께 운문 가는 길을 물었다고 한다. 스님은 '지팡이 들어 아득히 먼 길 가리키며, 흰 구름 깊은 곳에 절이 있다'고 했다. 운문사를 둘러싸고 있는 산줄기를 올려다본다. 저 천야만야한 산봉 가운데 가을 깊은 운문이 있다.◆운문호반 에코트레일운문호는 1996년 4월13일 운문댐이 완공되면서 생겨났다. 그때, 청도군 운문면 일대의 일곱 개 행정 구역이 수몰되었다. 호수는 운문의 많은 마을과 길들을 삼켰지만 그 물가에는 새로운 길도 생겼다. 운문호반 에코트레일이다. 출발은 청도에서 경주로 가는 길목인 운문면 공암리다. 공암(孔巖)은 구멍 난 바위라는 뜻이다. 청도 구룡산에서부터 흘러온 산자락 끝에 예부터 용의 머리라 불려온 반월형의 절벽이 있는데 그 용의 정수리에 공암이 있다. 가을날의 절벽을 '단풍나무가 벽을 이룬다'하여 풍벽(楓碧)이라 하고 여름날의 절벽을 '푸른 벽'이라 하여 창벽(蒼壁)이라 하는데 특히 공암풍벽은 청도 8경 중 하나이자 운문의 승경으로 손꼽힌다. 운문호반 에코트레일은 공암풍벽을 향해 나아가는 청도의 명품 길로 어느 계절이나 최고의 호젓함과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공암길 따라 공암리 마을 안으로 들어서면 마을회관 앞에 트레일을 알리는 안내판이 있다. 약 2㎞ 거리로 왕복 2시간 정도 걸린다. 20세기 초반 백운거사(白雲居士) 윤현기(尹玄基)라는 이의 정자로 알려져 있는 거연정(居然亭)을 지난다. 마을을 알리는 집들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즈음 운문호의 가장자리를 따라 데크길이 시작된다. 첫 번째 전망데크를 지나고 두 번째 전망데크에 다다르면 낙석을 주의하라는 석벽에 '풍호대(風乎臺)' 각자가 뚜렷하다. 좌측에 시문(詩文)이 있으나 흐리다. 백운거사의 흔적이다. 이어지는 숲길을 걷다 보면 세 번째 데크인 직벽전망대가 나온다. 다시 숲길을 따라 걸어가면 코스 종착지이자 반환점인 공암풍벽 휴게데크에 닿는다. 바닥까지 뚫려 있다는 공암이 까맣게 입을 벌리고 있다. 운문호가 생기면서 공암풍벽은 접근이 차단되었다가 데크길을 놓으면서 다시 개방되었다. 아주 옛날에는 산자락을 따라 실오라기 같은 길이 나 있었다고 한다. 이중경은 '유운문산록(遊雲門山錄)'에서 '길이 바위틈으로 가로질러 통하는데 틈의 깊이는 백 척이나 되고 또 백보 정도 뻗쳤는데 겨우 지나갈 정도였다. 밀양과 청도로부터 경주까지 귀하신 분들이 이곳을 경유한다. 동남쪽은 기이한 골짜기가 층층이 겹쳐있고 구름과 안개가 서로 섞이며 서북쪽도 그러하다'고 썼다. 주세붕(周世鵬)·류진(柳袗)·김극일(金克一)·손기양(孫起陽)·조정(趙靖)·조긍섭(曺兢燮) 등 많은 이들이 이곳을 그리는 각자와 시를 남겼다. 운문호반 에코트레일은 그들의 걸음이 새겨진 실오라기 같은 길과 물에 잠긴 오래된 마을길이 만들어낸 운문의 새로운 길이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참고=한국지명유래집(경상편), 국토해양부 국토지리정보원, 2015. 한국학중앙연구원. 디지털청도문화대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공동기획:청도군운문호반 에코트레일이 시작되는 청도군 운문면 공암리에는 청도 구룡산에서부터 흘러온 산자락 끝에 예부터 용의 머리라 불려온 반월형의 절벽이 있는데 그 용의 정수리에 공암이 있다. 가을날의 절벽을 '단풍나무가 벽을 이룬다'하여 풍벽(楓碧)이라 한다. 공암풍벽은 청도 8경 중 하나이자 운문의 승경으로 손꼽힌다.운곡정사는 취죽당 김응명의 후손들이 살았던 경주김씨 종택으로 취죽당의 8세손인 운곡 김몽로의 생가라 한다. 운곡정사에서 바라보면 운문호는 아름답고 호수에 허리가 잠긴 개산 봉우리가 대문간 지붕 위에 올라 있다.화랑정신을 계승하고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새로운 화랑정신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조성한 복합문화관광단지인 청도 신화랑풍류마을. 다양한 프로그램을 즐길 수 있는 힐링과 웰빙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2022.11.22
[농업으로 행복한 영양 .10] 친환경 고랭지 채소…해발 600~700m서 재배한 배추 '아삭아삭'…육질 단단하고 맛 고소
고랭지 채소 하면 보통 강원도를 떠올린다. 높은 산지가 많아 키우기 유리한 환경을 갖추고 있어서다. 경북에서 평균 해발고도가 가장 높은 영양도 강원도와 비슷한 조건을 지니고 있다. 환경의 이점을 토대로 영양의 고랭지 채소 재배도 조금씩 늘고 있는 추세다. 더욱이 영양 지역은 진딧물과 바이러스 발병률이 낮아 농약 사용량이 적은 편이다. 신선하면서도 안전한 먹거리를 원하는 까다로운 소비자 입맛에 맞춘 친환경 채소 재배가 가능한 곳이 바로 영양이다. '농업으로 행복한 영양' 10편에서는 영양의 고랭지 채소를 소개한다.30년 배추농사 외길 김춘권씨1992년 부산서 귀농 33㏊ 규모 농사일손 적게 들고 재배기간 짧아 장점강원도산과 비교해도 품질 안뒤져값싼 중국산·가격 널뛰기 가장 애로◆해발 600~700m서 생산되는 배추지난 10일 찾은 영양군 청기면 무진리 배추밭, 일꾼들이 가을배추를 수확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겉잎을 떼어 내 버리고 곱게 상자에 넣는 작업을 반복했다. 종이 상자에 '자연을 파는 사람들' '알배기 쌈배추'라고 적힌 문구가 눈길을 끌었다. 알배기란 배춧잎을 제거하고 알맹이처럼 만들어 쌈이나 겉절이에 쓰는 작은 배추다.이곳 무네미 농장의 대표는 김춘권(57)씨다. 무네미 농장은 영양에서 준고랭지 농업으로 배추만을 재배한다. 김 대표는 33㏊(10만평) 규모로 배추 농사를 짓는데, 이 가운데 23㏊(7만평)가 해발 600~700m 되는 곳에 자리한다. 그의 배추밭은 영양읍 무창리 맹동산(768m)과 독경산(684m)에 있다.김씨는 고향인 부산에서 장사를 하다가 1992년부터 영양에 귀농해 배추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이후 지금까지 30년 동안 배추 재배 외길 인생을 걸어왔다.배추는 영양에서 많이 키우는 고추보다 재배면적 대비 소득이 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일반 배추는 봄, 가을 이모작이 가능한 데다 일손이 적게 들고 재배기간이 짧다. 비닐하우스에선 한 달, 밭에서는 두 달 정도 키우면 수확이 가능하다. 여름 배추인 고랭지 배추는 이모작이 힘들지만 대신 단가가 높다. 여름 배추는 강원도 등 일부 지역에서만 나오기 때문에 생산량이 적어 가격 방어가 잘되는 편이다. 김 대표는 "고랭지 배추는 여름에 재배하기 때문에 비와 병충해, 기온 문제 등으로 농사도 어렵고 생산비도 많이 든다"면서 "대부분 강원도에서 재배하고 다른 지역은 영양 같은 경북 북부 일부 지역과 지리산이나 덕유산 자락 등에서만 일부 생산되기 때문에 가격이 높고, 단위 면적당 생산량도 적어 단가가 높다"고 설명했다.강원도와 비슷한 자연환경을 가진 영양의 배추는 고소한 맛을 지닌다. 또 육질이 단단해 아삭한 식감으로 소비자들에게 인기가 좋다. 실제 시장에서도 영양의 봄·가을 배추 품질은 좋다고 인정받는 편이다. 단, 여름 배추는 강원도 고랭지 배추에 비해 이름이 덜 알려져 있다."고랭지 배추는 강원도라는 인식과 브랜드 차이일 뿐 영양 고랭지 배추가 강원도 고랭지 배추보다 품질이 떨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란 게 김 대표의 주장이다.배추 농사를 짓는 농민에게는 가격 안정화가 절실하다. 가격이 널뛰기를 하는 경우가 많아 대처하기가 쉽지 않다. 더욱이 저렴한 중국산 배추와도 경쟁해야 하는 처지다. 고랭지 배추는 봄·가을 배추보다 가격이 크게 떨어지지 않아 사정이 조금 낫다.김 대표는 "올해 여름 고랭지 배추는 10㎏에 2만~3만원 수준이었는데 현재 가을배추는 10㎏에 2천~3천원까지 떨어졌다. 10㎏에 5천원 이하면 생산비도 안 나와서 그냥 수확하지 않고 버리는 게 더 나을 때도 있다"고 말했다.영양, 임야 많아 고랭지 농업 최적경북서 평균 해발 고도 가장 높아453농가 지난해 2만8천706t 생산일교차 커 병충해 평지보다 적어농약 사용도 최소화 깨끗하고 안전 ◆비옥한 토양 일교차 크고 일조시간 짧아고랭지 농업은 해발고도가 높은 산지나 고원에서 주로 이뤄지는 농업을 뜻한다. 표고가 높아 여름철에 서늘하고, 강수량이 많으면서 일조량도 풍부한 편이다. 이 같은 자연 환경과 기후조건을 이용해 농민들은 해발 400m부터 1천m 사이 산자락에서 채소 등을 재배한다.고랭지에서 자라는 채소는 품질이 뛰어나다. 고지대의 여름은 기온이 낮지만, 맑은 날의 낮 동안에는 일사와 자외선이 강해 고온이 유지된다. 반대로 해가 지면 기온이 급격히 내려가 일교차가 매우 크다. 이 때문에 여름철 고온에서 발생할 수 있는 병충해 피해가 평지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다. 또 고랭지 채소는 수확 시기를 앞당기는 촉성재배(促成栽培)가 가능해 시장에 물건이 부족할 때 높은 가격을 받고 출하할 수 있는 장점도 지닌다.국내 고랭지 채소의 대부분은 평창군 등 강원도에서 나온다. 하지만 영양처럼 해발 고도가 높은 일부 지역에서도 고랭지 채소가 생산되고 있다. 영양은 전체 면적 815.77㎢ 가운데 임야가 696.71㎢(85.4%)나 되고, 경북에서 평균 해발고도가 가장 높은 지역이다. 영양의 고랭지 채소는 일월산(1천219m), 검마산(1천8m), 맹동산(768m) 등 높은 산이 즐비한 영양의 고지대에서 생산된다. 영양은 여름이 시원하고 일조시간이 짧은 기후적 조건으로 인해 고랭지 채소 재배에 적합한 지역이다. 또 무상기간(서리가 내리지 않는 기간)이 짧고 여름의 평균기온이 20℃ 안팎인 데다 낮과 밤의 기온차도 커서 진딧물과 바이러스 발병률이 낮아 채소 농사가 수월하다. 특히 영양 고랭지의 토양은 비옥하고 경사도 적당해 물 빠짐이 좋다. 때문에 영양 고랭지 채소는 불필요한 농약 사용을 줄일 수 있어 깨끗하고 안전하다. 실제 영양에선 무농약으로 고랭지 채소를 재배하는 농가도 많다. 농약 사용량이 적은 만큼 생산비 절감이 가능해 농가 소득에도 도움이 된다. 영양의 대표적인 고랭지 채소는 배추와 무 등이 있다. 영양 고랭지 배추는 결구엽이 많고 조직이 단단해 쉽게 무르지 않으면서 맛이 고소한 특징이 있다. 영양 무는 잎이 푸르고 단단하며 잔뿌리가 적다. 시원한 맛과 달콤한 맛이 풍부하다. 무 잎에는 무기물과 각종 비타민 등이 풍부하고, 뿌리에는 디아스타제가 다량 함유되어 있어 소화에 좋다. 영양에서 고랭지 채소 재배는 조금씩 늘고 있는 추세다. 영양의 고랭지 채소 재배면적은 2016년 389㏊에서 지난해 524㏊로 증가했다. 생산량도 같은 기간 1만3천446t에서 2만8천706t으로 두 배 이상 급증했고, 재배 농가도 359가구에서 453가구로 늘었다.글·사진=김일우 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공동기획: 영양군지난 10일 김춘권씨가 영양군 청기면 무진리에 위치한 자신의 배추밭에서 배추의 생육 상태를 살펴보고 있다.지난 6월 영양군 영양읍 무창리에 있는 준고랭지 배추밭의 모습. 영양은 여름이 시원하고 일조시간이 짧은 기후적 조건으로 인해 고랭지 채소 재배에 적합한 지역이다. 지난 6월 영양군 영양읍 무창리에 있는 준고랭지 배추밭의 모습. 영양은 여름이 시원하고 일조시간이 짧은 기후적 조건으로 인해 고랭지 채소 재배에 적합한 지역이다.
2022.11.17
[대한민국 선진농업 1번지, 산소 카페 청송 .15·(끝)] 청송사과축제…지역축제서 전국축제로…황금빛 사과, 세상을 밝히다
국내 농업 1번지인 청송의 가을은 보다 더 특별하다. 붉고 노란 단풍이 주왕산을 물들이면 지역 과수원에도 같은 빛깔의 색이 곱게 번진다. 지역을 대표하는 농작물인 사과가 지천으로 널리고 청송은 축제장으로 변한다. 어느덧 17년의 역사를 가진 청송사과축제가 열리는 것이다. '대한민국 선진농업 1번지 산소카페 청송' 15편에서는 국내 대표 가을 축제로 발돋움한 사과축제를 소개한다.◆3년 만에 다시 열린 사과축제지난 12일 청송군에 들어서자 '제16회 청송사과축제'를 알리는 펼침막이 가득했다. 도롯가에서는 농민들이 나와 축제장으로 향하는 이들에게 사과를 하나씩 나눠줬다. 행사장에 도착하자 큰 풍선에 매달려 하늘 높이 떠 있는 '청송사과축제'라는 펼침막이 방문객을 맞았다. 주 무대와 소공연장 사이 읍·면별로 설치한 조형물들이 나들이객의 발길을 잡았다.청송에서 사과 재배가 가장 먼저 시작된 현서면은 옛날 사과를 담던 나무 상자와 나무 손수레를 전시했다. 한쪽에는 1924년 청송에 사과 묘목을 처음 들여와 심은 박치환(1878~1968) 장로에 대한 설명도 적어놨다. 신성리 공룡 발자국으로 유명한 안덕면은 공룡과 사과 조형물을, 주왕산면은 주왕산 조형물을 선보였다. 청송사과 홍보관도 방문객으로 가득했다. 홍보관에 들어서자 전 세계 사과의 역사와 생산량, 청송 사과에 대한 정보를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전시관 밖에는 수령 200년이 넘은 느티나무가 사과나무로 변신해 있었다. 행사장에는 환영존·농특산물 판매존·홍보존·체험존·사과 판매존·전시존·농기계존·운영지원 및 공연존·식당존 등으로 나뉘어 255개 부스가 마련됐다. 농특산물 판매존 입구에는 '택배비를 청송군에서 모두 지원해 준다'는 안내문과 함께 사과 등을 구매하려는 이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충북 청주에서 온 김미영(43)씨는 "가족과 주말을 맞아 단풍 구경을 왔다가 청송사과축제를 한다는 것을 알고 들렀다"며 "예쁜 조형물도 많아 아이들도 좋아하고 저렴하게 청송 사과를 살 수 있어서 좋았다"고 말했다.이번 축제에서는 '청송사과 퍼레이드' '청송꽃줄엮기 전국대회' '만유인력-황금사과를 찾아라' '도전 사과선별 로또' '꿀잼-사과난타'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됐다. 또 축제 기간 매일 열린 공연에서는 홍진영·소찬휘·현숙·최예진·김희재·양지은·지원이 등 유명 가수들이 대거 출동해 축제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지역 축제에서 전국 축제로청송사과축제는 2005년 지역 축제로 출발했다. 2013년부터는 매년 빠지지 않고 '경북도 최우수 축제'에 선정되기 시작했다. 축제의 인기가 높아지자 청송군은 2018년부터 행사 장소를 청송읍 월막리 용전천 현비암 앞으로 옮겼다. 이전에는 청송읍 송생리 청송사과공원에서 진행됐다. 청송나들목(IC)에서 행사장까지 거리가 10㎞에서 4㎞로 줄고, 장소도 넓어졌다. 2019년부터는 나흘 동안 열리던 축제 기간을 닷새로 늘렸다. 이 같은 노력이 더해지자 청송사과축제는 전국적인 축제로 발돋움했다. 문화체육관광부의 '2020~2021년 문화관광축제'로 선정돼 전국을 대표하는 35개 축제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것. 2020년 10월에는 제14회 피너클어워드(Pinnacle Awards) 한국대회에서 축제유형 부문 은상을 받았다. 피너클어워드는 세계적 축제들의 네트워크 구축 및 축제 정보 공유 차원에서 1956년 만들어졌다. 세계축제협회의 한국지부는 2007년부터 한국대회를 개최하고 있다.청송사과축제 방문객도 급속도로 늘었다. 2013년 열린 제9회 청송사과축제 때만 하더라도 방문객 수는 7만여 명 수준이었다. 이후 2018년 처음 방문객 10만명대를 돌파했고, 이듬해에는 방문객 수가 17만여 명으로 급증했다. 코로나19 확산으로 2020~2021년 청송사과축제는 취소됐고, 올해는 우여곡절 끝에 열렸다. 지난달 29일 서울 이태원 참사가 발생하며 국가애도기간이 선포됐는데 축제기간과 겹쳤다. 이에 청송군은 지난달 31일 긴급회의를 열고 축제 연기를 결정했다. 대신 청송군은 안전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축제 안전관리를 더욱 강화했다.올해 청송사과축제는 지난 9~13일 닷새 동안 청송읍 용전천 현비암 일원에서 '황금진 청송사과, 세상을 밝히다'를 주제로 진행됐다. 이 기간 행사장에는 역대 최다인 40만여 명의 인파가 몰렸다.청송군이 주최하고 청송군축제추진위원회가 주관한 올해 축제는 △문화체육관광부 △한국관광공사 △경북도 △청송군의회 △청송경찰서 △청송소방서 △청송교육지원청 △청송사과협회 △한국수자원공사 청송권지사 △한국수력원자력 청송양수발전소 △청송문화원 △청송군 지역 농축협 등 수많은 기관의 후원으로 성공적인 축제로 치러졌다. 윤경희 청송군수는 "문화체육관광부가 지정한 문화관광축제인 청송사과축제가 더 많은 관광객에게 사랑받고 다양하고 차별화된 경험을 제공할 수 있도록 앞으로도 최선을 다하겠다"며 "축제장을 방문해 주신 많은 분께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고 말했다. 글=김일우 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지난 9~13일 닷새 동안 청송읍 용전천 현비암 일원에서 '제16회 청송사과축제'가 열려 역대 최다 규모인 40만여 명의 인파가 몰렸다. 행사장에는 255개의 다양한 부스가 마련돼 방문객이 청송의 맛과 멋을 즐겼다.윤경희 청송군수가 축제장에서 '난타 퍼포먼스'를 펼쳤다.사과로 만든 조형물을 배경으로 방문객이 사진을 찍고 있다.축제장 곳곳에 마련된 사과마차 등 다양한 조형물이 눈길을 끌었다.청송사과축제 소공연장에서 진행된 '아랑고고 장구' 공연 모습.
2022.11.15
[역사의 중심에 선 예천人 .5·(끝)] 국파 전원발…元서 장원급제 '볼모' 같은 벼슬살이…과도한 고려 조공 절반 경감 이끌어
볼모 아닌 볼모가 되어 원나라에서 벼슬살이를 했지만 한순간도 자신이 고려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잃지 않았던 국파 전원발. 그는 원나라의 세금과 조공으로 인해 고국의 백성들이 흘리는 피땀에 힘들어했고, 그 피해를 조목조목 밝혀 세공을 절반 이상 감경토록 했다. 고려로 돌아온 전원발은 예천에 터를 잡고 후학을 가르치며 노년을 보냈다. #청년 인재, 타국에 볼모로 묶이다고려 1315년(충숙왕 2) 정월, 과거가 대대적으로 시행되었다. 이른바 응거시였다. 본디 고려에서는 과거의 본 시험을 동당감시(東堂監試)라 일렀다. 하지만 원나라의 간섭이 극심하여 고려의 과거에 합격해도 원나라에 가서 다시 시험을 치러야 했다. 고려의 젊고 유능한 인재를 데려다가 그네들의 입맛대로 휘두르겠다는 계산이었다. 이에 과거에 응시한다는 뜻의 응거(應擧)를 써서 응거시가 되었다.이때 현서 달지리(현 문경시 영순면) 출신의 18세 청년이 문과에 합격했다. 응양군민부전서(鷹揚軍民部典書) 전진의 아들, 국파(菊坡) 전원발(全元發·생몰년 미상)이었다. 용궁전씨 시조 용성부원군(龍城府院君) 전방숙(全邦淑)의 5세손으로, 전법총랑(典法摠郎) 전충경(全忠敬)의 증손이자 판도총랑(判圖摠郎) 전대년(全大年)의 손자이기도 했다.전원발은 마냥 기뻐하지 못했다. 원나라로 떠날 생각을 하면 심란하고, 그곳에서 무슨 일을 겪을지 불안했다. 하지만 고려는 힘이 없었다.元 간섭 극심해 고려 과거 합격자 차출다시 그곳 과거 치르게 해 인재 발묶어타국 벼슬살이에도 고려인 정체성 유지황제에 고국 대한 세공 폐단 따져 설득귀국 미뤄가며 외교적 가교 역할 수행공민왕 "中주인 바뀌어도 그대 덕에…"예천 용궁 무이리의 성화천 일대 하사고려 위해 일해 줄 걸 당부했지만 낙향원나라로 차출된 전원발은 원칙대로 다시 그곳의 과거에 응시했다. 뜻밖에도 결과는 장원급제였다. 당시 원나라에서 과거에 급제하기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어려웠다. 그런데 몽골인도 아닌 고려인이 최고의 점수를 받은 것이다. 그토록이나 뛰어난 인재를 원나라가 호락호락 놓아줄 리 없었다. 전원발은 볼모 아닌 볼모가 되어 원나라에 발이 묶였다. 그런 상황에서 전원발이 할 수 있는 일은 고려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잃지 않고 우뚝 서는 것이었다. 전원발은 사명감을 가지고 적응했고, 힘을 키웠다. 당연히 그에 합당한 벼슬도 따라왔다. 병부의 고위관직인 병부상서(兵部尙書)와 집현전 고위관직인 태학사(太學士) 그리고 영록대부(榮錄大夫) 등에 올랐다.그렇게 피눈물을 흘리며 정치적 입지를 넓히는 과정에서 사건이 벌어졌다. 고려에 대한 원나라의 조공 요구가 점점 과해진 것이다. 고려가 피폐해질 것은 불을 보듯 훤했다. 이를 좌시할 수 없었던 전원발은 순제(順帝·1320~1370)를 알현했다."고려는 바닷가에 위치한 작은 나라입니다. 세금과 조공의 폐가 지나칩니다."조목조목 따지는 전원발의 논리에 순제는 납득했다. "허락하노라. 아울러 그대의 애국심에 경의를 표하는 뜻에서 비단옷을 하사하겠다."이로써 금·은·명주·말 등을 비롯한 세공이 절반 이상 감경되었다. #충신의 노후를 함께한 마을, 무이리명나라 개국을 기점으로 전원발은 고려로 환국했다. 중간에 귀국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원 정부에 남아 외교적 가교역할에 충실했던 그를 공민왕은 진심으로 환영했다."중국의 주인이 바뀌었어도 그대 덕분에 세공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피로한 백성이 안심하고 쉬게 되었으니 실로 공이 크다. 마땅히 상을 주리라."공민왕은 말에서 그치지 않고 전원발을 축산부원군(竺山府院君)에 봉한 뒤 예천 용궁 무이리의 성화천(省火川·현 금천) 일대를 하사했다. 아울러 고려를 위해 일해 줄 것을 당부했다. 하지만 타국에서 그토록 그리워했던 나라가 간신으로 득시글거리는 것을 보고 전원발은 무이리로 향했다. 그리고 성화천 동쪽 바위 그윽한 자리에 청원정(淸遠亭)을 짓고 눌러앉았다.청원정은 당시로써는 보기 드문 평면 구조였다. 정면 3칸·측면 1칸 반 규모의 일자형에 온돌방을 중심으로 양측에 마루방을 각각 1칸씩 두고 전면에 툇마루를 설치한 후 팔작지붕을 얹어 미학적 가치를 입혔다. 전원발은 이곳에서 노후를 보냈다. 세 벗이 종종 찾아와 함께 지냈는데 서북면도병마사와 정당문학 등을 역임한 난계(蘭溪) 김득배(金得培), 판삼사사와 정승 등을 지낸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삼사좌윤과 성균관대사성을 거친 척약재(척若齋) 김구용(金九容) 등 학식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성정이 맑은 인물이었다.세 사람은 전원발의 재능이 아까웠다. 그중 김득배가 편지로 안타까운 속내를 내비치자 전원발은 담담하게 답했다. 江 修鱗縱/林深倦鳥歸/歸田是吾志/非是早知機.강이 넓으니 물고기가 자유로이 헤엄치고/ 숲이 깊으니 지친 새가 돌아오는구나/ 고향에 돌아와 밭을 일구는 것은 나의 뜻이니/ 세상이 괴로운 줄 일찍 알았도다.제자도 가르치며 한가로이 소요하던 어느 날, 자정미수(慈淨彌授) 대사가 입적했다. 법상종의 유명한 승려로 왕의 신망을 얻었던 그의 죽음에 어명이 떨어졌다."속리산 법주사에 비를 세우라. 글은 이숙기가 짓게 하고 글씨는 전원발이 쓰게 하라."전원발은 원나라에서 맹활약했던 인물답게 문장뿐만 아니라 명필로도 이름이 높았다. 전원발이 명을 받자와 '자정국존보명탑비(慈淨國尊普明塔碑)'를 일필휘지로 써서 올렸다.전원발이 내려놓은 벼슬길은 그의 자손들이 대신 걸었다. 아들 전한(全한)은 사복시정(司僕寺正·사복시에 속한 정삼품)을 지냈고, 손자 전강(全强)·전근(全謹)·전경(全敬) 형제는 모두 장원급제하여 고위관직을 지냈다.#나라를 살렸으니 소천(蘇川)으로 개명하라전원발의 무게감은 세월이 흐르면서 더 깊어졌다. 동방의 주자로 일컬어졌을 정도로 걸출했던 조선의 대학자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은 전원발을 일러 이렇게 평가했다."광풍제월(光風霽月)을 지닌 군자요, 고인(高人·벼슬에 오르지 않고 고결하게 사는 사람)으로 백대에 스승이 되는 선비셨다."광풍제월은 비 갠 뒤의 바람과 달을 가리켰다. 명쾌하고 집착이 없으며 시원하고 깨끗한 전원발의 인품을 정확하게 설명하는 표현이었다. 이황의 칭송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북송 시대의 유학자로 성리학의 기초를 닦은 주돈이(周敦신)의 생애에 비견한 데 이어, 고려의 유학자로서 조선에까지 은덕을 베푼 명현(名賢)으로 표현했다.그런 전원발이 살았던 곳답게 무이리 또한 충신의 마을로 거듭났다. 임진왜란 때였다. 당시 무이리에 은거하던 전 황해관찰사 백진양이 분연히 떨쳐 일어나 "전쟁에서 이기지 못하면 결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하고 출전했다. 얼마 뒤 백진양을 태우고 떠났던 말이 홀로 상처투성이로 돌아오다가 마을 앞에서 죽었다. 마을 사람들이 그 자리에 말을 묻어주고 백진양을 기다렸지만 전쟁이 끝나고도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에 그의 의관과 유품으로 마을 앞산에 묘를 만들고 백장군산이라 불렀다.바로 그 백진양이 활약한 임진왜란이 끝나고 100년이 흐른 1698년(숙종 24)이었다. 임금이 일렀다."전원발이 중국에 있을 때 우리나라에 부여된 세금과 조공의 폐해를 여러 번 아뢰어 수정한 것을 알 것이다. 그리고 그 세공의 수량이 조선에까지 이르러 우리가 편안하게 되었다. 그 공을 어찌 잊으리. 성화천을 소천강으로 고치라."소천강(蘇川江)은 글자 '소(蘇)'가 가리키는 대로 나라를 소생, 즉 되살렸다는 뜻이다. 마침 영남의 유림에서도 묘우(廟宇·신위를 모신 집)를 세우자는 의견이 제시되던 차였다. 이에 참봉 전찬(全纘)이 적극적으로 나섰다. 전찬은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수학한 전원발의 8세손이었다."국파 어른은 세상에 드문 명현이시니 후손된 자로서 그 덕을 갚아야 함이 마땅합니다."이로써 소천서원(蘇川書院)이 세워졌고 전원발이 제향되었다. 1701년의 일이었다. 신도비에는 이렇게 새겨졌다.'(…) 훌륭한 도리와 아름다운 자취를 세상에 다 전할 수 없음이 한스러우나 그 현저한 훈업과 월등히 뛰어난 기절은 오백여 년을 거쳤음에도 다하지 않았다. (…) 그리고 이 글을 보거든 지나는 이 옷깃 여며 숙연하라'고 끝을 맺었다.소천서원은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을 담당하던 중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68년에 지역 유림에 의해 다시 복원되었다. 아울러 임진왜란 시기에 소실되었던 청원정(경북도문화재 제533호) 또한 1918년, 생전의 전원발이 강의하던 자리에 다시 세워졌다. 지금도 예천 용궁 무이리에 가면 청원정뿐만 아니라 '국파전선생유허(菊坡全先生遺虛)'라고 새겨진 커다란 바위를 볼 수 있다. 글=김진규<소설가·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공동기획:예천군예천군 용궁면 무이리에 자리한 청원정(왼쪽 앞 건물)과 소천서원(오른쪽 뒤편 건물). 청원정(淸遠亭)은 원나라에서 귀국한 국파 전원발이 고향 무이리에 머물면서 노후를 보내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또 소천서원은 전원발을 제향하기 위해 세워졌다.예천군 용궁면 무이리에 자리한 청원정.전원발을 제향하기 위해 세워진 소천서원.문경시 영순면 오룡리에 자리한 국파 전원발 묘소.
2022.11.14
[농업으로 행복한 영양 .9] 새로운 농가 소득원으로 떠오른 영양 수박…일교차 큰 고랭지서 키워 당도 높고 과육 단단…"맛좋다" 전국 입소문
수박은 여름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먹거리다. 더위와 갈증을 해소하는 데 수박만 한 것이 없다. 수박은 수분 외에도 당질과 무기질, 비타민A와 비타민C 등의 영양이 풍부하다. 고품질의 수박은 농가의 소득원으로도 각광 받는 작물이다. 최근 들어 경북 영양에서도 수박 재배 농가들이 크게 늘고 있다. 고추·사과 등 농가 소득원이 비교적 단조로운 영양에서 새로운 효자 작물로 떠오르고 있는 것. 더욱이 영양 수박은 기온 차가 심한 산간 고랭지에서 자라 당도가 높고 과육이 단단해 '맛있는 수박'으로 입소문이 나고 있다. '농업으로 행복한 영양' 9편에서는 영양의 새로운 농가 소득원으로 떠오른 수박을 소개한다.청기·수비면 등 재배 농가 113가구2019년 106㏊ 면적서 4천907t생산무게 8㎏ 넘고 정품 생산율 95% 이상저농약인증 거쳐 친환경적으로 키워최신 선별기 갖춘 공동선별장 마련2009년 서울서 귀농한 김정문씨6.6㏊ 농지서 품질 좋은 수박 생산서울 가락동 농수산물시장서 인기영양사랑수박작목반 설립 일등공신 ◆영양의 새로운 소득 작물"영양에서 고추를 대체해서 키울 작물이 뭘까 고민을 많이 했어요. 여기저기 뛰어다니다가 영양이 수박을 키우기에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지난 7일 경북 영양군 일월면 가천리에서 만난 김정문(59)씨는 집 앞 복숭아 나뭇가지를 손질하고 있었다. 그는 영양에서 6.6㏊(2만평) 규모로 수박 농사를 짓고 있다. 수박은 보통 5월에 모종을 심고 8월에 수확한다. 일손이 많이 필요한 기간은 석 달 남짓이다. 그 때문일까. 한 해 농사를 일찌감치 끝낸 김씨는 조금 여유로운 모습이었다.영양에서 김씨를 빼고선 수박에 관해 이야기할 수 없다. 그는 몇 해 전 영양사랑수박작목반 설립을 주도했다. 일월면과 청기면을 중심으로 한 영양사랑수박작목반은 현재 지역 수박 생산량의 절반 이상을 책임진다. 김씨는 2019년 전국수박생산자협의회 영양지회를 만들어 4년째 회장직을 수행 중이다. 또 영양 수박공동선별장이 생기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의외로 그의 수박 농사 경력은 5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서울에서 태어나 한 대형 약국에서 관리자로 일하던 그는 2009년 가족과 함께 귀농했다. 우연히 영양으로 여행을 왔던 것이 계기가 됐다. 처음에는 농사가 아니라 농산물 유통업에 뛰어들 요량이었다."아직도 기억해요. 2008년 11월4일이었어요. 봉화에서 터널을 지나 영양으로 넘어왔는데 눈앞의 아름다운 단풍을 보고 순간 이곳에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처음에는 농산물 유통을 한번 해보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이래저래 알아보던 그는 수박 재배를 택했다. 지인이 사는 봉화군 재산면에 다녀온 뒤였다. 재산면은 수박으로 유명한데, 영양 일월면과 인접해 기후나 해발 고도 등이 거의 비슷한 지역이다. 그는 일월면에서도 수박이 잘 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당시에만 해도 그가 사는 마을에는 수박 재배 농가가 몇 가구에 불과했다."봉화 재산면과 영양 일월면의 차이라면 토질뿐이에요. 재산면은 물이 잘 빠지는 땅이고, 일월면은 조금 덜하다는 차이가 있어요. 수박은 배수가 안 되면 생육에 문제가 생기니까 그것만 신경 쓰면 충분히 품질 좋은 수박을 생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해발고도 300m가 넘는 영양에서 키운 수박은 일교차가 커서 당도가 높고 단단하며 식감도 좋았다. 또 산으로 둘러싸인 영양은 기후가 서늘해서 병해충 피해도 적은 만큼 농약도 적게 사용할 수 있었다."영양은 수박을 재배하기에 적당한 기후 조건과 자연환경을 갖고 있어요. 이를 토대로 얼마나 품질 좋은 수박을 생산하는 것은 농가의 노력이라고 봐요. 이제는 서울 가락동 농수산물 종합도매시장에서도 영양 수박의 품질이 좋다는 인식이 생겨났습니다." ◆고랭지 수박…당도 높고 저장성도 좋아영양에서 수박 재배가 본격화된 것은 2016년부터다. 2015년까지만 하더라도 수박 재배 면적과 생산량은 19㏊, 980t에 그쳤다. 이듬해 재배 면적(40㏊)과 생산량( 2천6t)이 두 배 이상 늘어난 이후 성장세가 두드러지기 시작해 2019년에는 재배 면적이 106㏊, 생산량 4천907t으로 급증했다.이후에도 영양 수박 재배는 꾸준히 늘면서 수박 재배 농가도 100가구를 넘어섰다. 지난해에는 재배 농가가 113가구를 기록했다. 현재 영양에서 생산되는 과채류 채소(오이·호박·토마토 등) 중에서 수박 생산량이 압도적이다.수박은 일반적으로 다소 높은 기온에서 재배되는 과채류 채소다. 낮 기온은 25~30℃, 밤 기온은 16~20℃가 적당하다. 기온이 10℃ 안팎으로 떨어지면 수박 생육에 매우 나쁜 영향을 미친다. 또 수박은 토심이 깊고, 공기가 잘 통하면서 물 빠짐이 좋은 토양에서 잘 자란다.영양은 수박 재배에 유리한 환경을 갖고 있다. 낮과 밤의 기온 차가 심한 산간 고랭지가 많아 당도가 높은 고품질 수박이 나온다. 영양에서 생산되는 수박은 보통 무게가 8㎏이 넘고, 정품 생산율이 95% 이상이다. 영양에서는 노지에서 재배된 수박도 12Brix 이상의 당도를 함유하고 있다.영양 수박은 청기면과 수비면, 입암면에서 많이 재배한다. 주로 시설하우스에서 저농약인증을 거쳐 친환경적으로 키워진다. 농민들은 화학 농약 사용을 최대한 줄이고 대신 자연퇴비와 영양제를 사용한다. 특히 수박밭에 관수 시설을 적절하게 설치해 습해나 병충해 피해를 줄이고 있다. 이렇게 생산된 영양 수박은 크기가 크고 당도가 높다. 과피가 얇으면서도 단단한 특성이 있다. 그만큼 저장성도 좋다. 높은 일교차에서 생산된 영양 수박은 아삭아삭한 맛이 일품이라고 한다. ◆생산량에 발맞춰 늘어나는 인프라영양군 일월면 가곡리에는 2020년 7월30일 수박공동선별장이 준공됐다. 영양군의 지원을 받아 농업회사법인 광일 주식회사가 운영하는 수박공동선별장이다. 수박공동선별장은 건축면적 850㎡에 비파괴 당도 측정기가 달린 2조식 최신 선별기를 갖추고 있다.그동안 영양 수박은 포전 매매(圃田賣買·수확 전 밭에 심겨 있는 상태로 작물 전체를 사고파는 것)와 개별 출하 등으로 브랜드 경쟁력이 떨어져 제대로 된 값을 받지 못했다. 수박공동선별장이 들어서면서 영양 수박 농가들에는 규격화된 수박 출하와 체계적인 유통으로 소득 향상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수박공동선별장 준공에 앞서 2019년에도 영양 수박 재배 농가에 기쁜 소식이 날아들었다. 전국 140여 개 이마트에서 영양 수박이 처음으로 팔리기 시작한 것. 그해 7월4일 영양 입암면 방전리 수박밭에서는 이마트에 납품될 수박이 첫 출하됐다. 오도창 영양군수와 농업인들은 같은 해 7월26일 서울 성동구에 있는 이마트 성수점에서 영양 수박 홍보 및 시식행사를 열었다 영양군은 늘어나는 수박 재배 농가를 위해 다양한 지원사업을 펼치고 있다. 올해 사업비만 3억1천여만 원에 이르는 '수박생산 지원 사업'이 대표적이다. 자부담 50%를 조건으로 수박 생산에 필요한 종자나 농자재를 지원해 준다. 수박 재배 농가들은 지원 사업을 통해 종자는 물론 관수 시설·수박 재배용 받침대 등을 저렴하게 구입하고 있다. 재배 기술 교육에도 힘을 쏟고 있다. 현재 영양군농업기술센터는 농업인대학을 운영하며 고추·사과와 함께 시설수박 과정도 가르치고 있다. 또 매년 1~2월 농업인을 대상으로 새해 농업인 실용교육에서도 시설수박 재배 교육을 한다. 김일우 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공동기획 : 영양군경북 영양군 일월면 가곡리에 있는 수박공동선별장에서 직원들이 수박을 상자에 담고 있다. 건축면적 850㎡ 규모로 최신 설비를 갖춘 수박공동선별장이 준공되면서 규격화된 수박 출하와 체계적인 유통이 가능해졌다. 영양사랑수박작목반 설립을 주도한 김정문 전국수박생산자협의회 영양지회장. 김일우기자영양 수박공동선별장에서 크기에 따른 수박 선별 작업이 이뤄지고 있다. 오도창 영양군수를 비롯한 군청 직원들이 서울지역 마트에서 영양 수박 홍보 행사를 갖고 있다.
2022.11.10
[역사의 중심에 선 예천人 .4] 이찬·김영인 부부…임금 고친 뛰어난 의술로 고향의 病者도 가리지 않고 보살펴
학식이 뛰어난 것만이 아니라 의술에도 일가견이 있어 임금의 병환도 낫게 했던 이찬이었다. 그러나 그의 의술은 임금에게만 머물지 않고 고향 예천의 지역민에게도 펼쳐졌다. 바쁜 국정으로 홀로 떨어져 있던 그의 아내 김영인은 시로써 남편을 그리워하고 응원했다. #붉은 끈으로 이어진 인연1644년(인조 22) 2월이었다. 영의정 심열, 좌의정 김자점, 우의정 이경여, 삼정승이 대전에 섰다."옥후(玉候·임금의 건강 상태)가 미령하시어 오랫동안 회복되지 않으시니 걱정과 황급함이 실로 큽니다. 항간에서 명의로 검증된 이찬을 불러들여 증세에 맞는 약재를 의논해 정하도록 하소서.""이찬의 의술이야 내 익히 안다. 8년 전에도 도움을 받았거늘. 그리하라."8년 전이란 어의의 치료에도 효험을 얻지 못한 인조의 병을 국창(菊窓) 이찬(李燦·1575~1654)이 고친 일을 일렀다. 당시 왕은 특명을 내려 이찬을 익위사사어(翊衛司司禦·종오품)로 등용해 고마움을 표했다. 이후 이찬은 종부시주부(宗簿侍主簿)·공조좌랑·군위현감을 역임하다가 건강을 위해 사임한 후 의술에만 집중한 터였다. 그런데 임금이 다시 찾은 것이다. 대전을 빠져나간 어명이 궐문을 넘어 이찬에게 닿았다. 명을 받잡은 이찬에게 두 마음이 일었다. 앓는 군주에 대한 염려와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은 데 대한 자부심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찬은 서애 류성룡의 생질로 문인임에도 불구하고 의술로 더 유명했던 것이다. 임금의 부름에 서둘러 입궐 준비를 하며 이찬은 고향 예천 용궁 무리실(현재 무이2리)에 두고 온 아내를 떠올렸다. 아내 김영인은 학자 설월당(雪月堂) 김부륜(金富倫)의 딸이자 계암(溪巖) 김령(金 ·1577~1641)의 누이로 나무랄 데가 없는 여인이었다. 총명하고 문사에 능하며 행실까지 아름다워 이찬이 무척이나 사랑했다. 이찬이 서안의 서랍을 열어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던 아내의 편지를 꺼냈다. 맨 위의 '寄遠(기원)' 두 글자부터가 이미 애틋했다.寄遠멀리 부칩니다生來人間赤繩纏/ 一朝相別兩可憐/ 天寒旅舍伺如在/ 寂寞空閨獨不眠.세상에 태어나 적승의 연을 이었는데/ 하루아침에 이별이라니 마주 보고 그저 웁니다/ 추운 날 객지에서 어찌 지내시는지요/ 고독한 규방에서 홀로 잠 못 이룹니다.적승은 부부의 인연을 가리키는 표현이었다. 사연인즉슨, 당나라 때 위고(韋固)라는 청년이 여행 중에 허난성의 송성(宋城)이란 곳을 지나다가 한 노인을 만났다. 달빛 아래 신비로운 분위기에 이끌려 대화를 나누게 되었는데, 노인의 주머니에 적승(赤繩), 즉 붉은 끈이 비어져 나와 있었다. 위고가 그게 무어냐고 묻자 노인이 "이 끈으로 사내와 여인의 발을 묶으면 부부가 된다네. 두 사람이 원수지간이든 이역만리에 떨어져 있든 바꿀 수가 없지" 하고 대답했다. 그러곤 위고의 배필이 누구인지 알려주었다. 부부를 맺어주는 월하노인(月下老人)의 기원이었다. 한마디로 이찬과 김영인은 하늘이 맺어준 사이라는 뜻이었다.이찬이 다른 편지를 펼쳤다. 有約重相見/ 如何久不來/ 梨花萬庭落/ 春鳥數聲哀.만나자 거듭 약속해 놓고선/ 어이하여 이리도 오지를 않으시나요/ 배꽃은 뜰 가득히 지고/봄 새 몇 마리가 슬피 우네요.이찬은 몇 번이나 읽은 후 고이 접어 서안에 올렸다. 그리고 지필묵을 챙겨 앉았다. 기쁜 소식이 생겼으니 아내에게 알려야 했다.#예천을 살핀 의술 이찬은 집안에서 따로 가르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뛰어난 수재였다. 의술만 해도 독학으로 명의의 지경에 이르렀으니 그 식견을 알 만했다. 성품도 남달랐다. 남의 선행을 보면 아낌없이 칭찬하는 반면 허물은 결코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옳고 그름에 관련된 문제는 절대로 타협하지 않았다. 누구든 찾아와 배움을 청하면 귀찮은 기색 없이 정성껏 가르쳤다.특히 이찬은 그가 가진 의술을 베푸는 데도 사람을 가리지 않았다. 사실 이찬이 살았던 조선시대에는 어지간히 큰 지역이 아니면 의료의 혜택을 누리기가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중앙에야 내의원·전의감·혜민서·활인서 등의 의료기구가 설치돼 있었지만 지방민을 위한 제도적인 기초는 미비했다. 소수의 의료인에게 의지해야 하는 데다 그마저도 일반 백성에게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그런 시기에 이찬은 임금도 고친 뛰어난 의술로 자신의 고향에 머무를 때는 한결같이 아픈 예천 백성을 살폈다. 그것도 소외당하는 주민이 생기지 않도록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거리의 멀고 가까움을 가리지 않고 한달음에 병자를 찾아갔다고 한다. 이찬은 예천 백성들에게 당연히 존경과 공경을 받았고 김영인이 그의 남편을 바라보는 것도 같은 마음이었다. 또한 이찬은 그의 자형인 청풍자 정윤목 대감과 함께 삼강서당에서 후학들을 양성했다. 그러나 중앙과 지방의 관직을 아우르느라 예천에 머물 새가 없는 남편이었다. 임지에 동행하기도 하지만 떨어져 지낼 때는 그리움이 뼈에 사무쳤다. 마치 답 쌓인 구름과 첩첩인 산이 남편의 귀향을 막는 것만 같았다. 別後愁誰語/ 路遠音信難/ 好還知何日/ 西望隔雲山.이별의 수심을 뉘에게 이르랴/ 길이 멀어 소식 닿기 어렵구나/ 좋은 시절 얼마런가/ 서쪽이 구름과 산으로 막혀 있구나.사랑하는 사람만 곁에 있어 준다면 바랄 것이 없는 환경이었지만 김영인은 남편의 큰 뜻을 받드는 데 소홀히 하지 않고, 남편을 지지했다. 이찬도 그런 아내의 마음을 고마워했다. 어느 날 몸종이 환한 얼굴로 뛰어 들어왔다. "마님, 나리께서 편지를 보내오셨습니다." 김영인이 반색해 받아들었다. 떨리는 손으로 뜯어 한 글자, 한 글자 따라가자니 목이 메었다. 남편의 애정 깃든 편지에 김영인은 넘치는 마음을 바로 종이에 옮겼다. 書札自何處/ 開緘感歎長/ 相思無限意/ 此日更難忘.어디선가 날아든 편지/ 뜯어보고 감격하였어요/ 임을 그리는 마음이/ 오늘도 가시지를 않네요.#부부가 한 책으로 전해지다김영인의 시를 이찬은 진심으로 아꼈다. 친정 동생을 생각하며 지은 시는 함께 안타까워하며 읽었고, 조카의 부음을 듣고 지은 시를 본 날은 남몰래 눈물도 지었다. 자신을 향한 애절한 마음이 담긴 시는 두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의 가슴을 미어지게 한 시는 따로 있었다.臥病深房日已久 / 精神氣力漸消然 / 平生辛苦寧容設 / 命在今朝更可憐.깊은 방에 누워 앓은 지 오래라/ 정신과 기력이 점점 쇠약해지는구나/ 평생의 고생을 어찌 다 말할꼬/ 실오라기 같은 목숨이 참으로 가련하구나.이찬은 흰머리도 나기 전에 병이 들어버린 아내의 곁을 든든하게 지켰다. 그리고 자신이 죽는 순간까지도 그녀가 지은 시를 소중하게 보관했다. 그로부터 200년 하고도 40여 년이 더 흐른 1895년(고종 32), 7세손인 이기락(李基洛)이 이찬과 김영인의 글을 꼼꼼하게 정리했다. 우선 이찬이 남긴 것으로는 시·편지·제문·만시 등이 있었다. 눈에 띄는 것은 처남 김령에게 보낸 4편의 편지 '여김계암서(與金溪巖書)'였다. 김령은 임진왜란 때 17세의 나이로 자진 종군하고, 명나라의 총병사 오유충과 유격장 노득공으로부터 후한 대접을 받았을 정도로 학식이 숙성한 인물이었다. 김영인의 동생다웠다. 그리고 이찬이 모아둔 김영인의 작품으로는 시 44수와 차운시 11수가 있었다. 이기락은 이 전부를 갈무리해 편집한 뒤 손자에게 간행을 당부했다. 뜻을 받은 9세손 이준구(李駿九)·이우구(李宇九) 형제와 10세손 이동욱(李東郁)은 3년 후인 1898년(고종 35)에 드디어 '국창집(菊窓集)'을 세상에 펴냈다. 김영인의 작품은 '국창선조비영인광주김씨일고(菊窓先祖 令人光州金氏逸稿)'라는 이름을 달고 합간되었다. '용산문집(龍山文集)'의 저자 이만인(李晩寅)의 서문이 권두에 실리고, '시려집(是廬集)'의 저자 황난선(黃蘭善)의 발문이 권말에 실렸다. 이때 황난선이 김영인의 시를 일러 이렇게 예찬했다."음조는 온화하고 부드러우며, 격률은 맑고 곱고 담박하다."김영인의 성품이 그러했고 김영인·이찬 부부의 금실이 그러했으며 예천에서의 삶이 또 그러했다. 글=김진규〈소설가·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공동기획:예천군경북 예천군 용궁면 무이2리 국창 이찬의 생가터에는 현재 종손인 이기동씨가 집을 지어 살고 있다. 이찬은 이곳 고향에서 예천 백성들을 위해 의술을 펼치고 후학을 양성했다.이찬이 자형인 청풍자 정윤목 대감과 후학들을 양성한 것으로 전해지는 삼강서원은 현재 사라지고 터만 남아 있다.예천군 풍양면 청운리에 자리한 국창 이찬의 묘소.
2022.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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