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성] 익명의 공무원

  • 이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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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4-05-27 06:57  |  수정 2024-05-27 06:59  |  발행일 2024-05-27 제23면

1996년 대구에서 담장허물기 시민운동이 시작됐다. 전국 최초의 이 운동은 서구청 담을 무너뜨린 것으로 출발했다. 관공서와 학교·공공의료시설의 담장이 허물어지고, 수십만㎡의 녹지가 확보됐다. 그 자리에는 나무와 화초가 자라게 되고 이는 개방과 주민친화의 표상이 됐다. 담장허물기는 국채보상운동과 2·28민주운동에 이은 자랑스러운 대구의 시민운동으로 꼽힌다. 이후 이 운동은 서울·부산을 거쳐 전국으로 확산됐다.

지난 3월 경기도 김포시에서 악성 민원에 시달리던 30대 공무원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뒤 악의적인 민원으로부터 공무원을 보호하기 위한 각종 대책이 나왔다. 행정안전부는 민원공무원 보호 강화 대책을 발표하고, 지자체에서는 △악성 민원 대비 모의훈련 △악성 민원담당 공무원 힐링프로그램 진행 △민원공무원 소통강화 등을 앞다퉈 시행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대책들이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의문이다. 효과가 있다면 왜 진작 시행하지 않고 있었는지도 짚어봐야 한다. 한편으로는 언제든 불거져 나올 수 있는 잠재적 위험에는 신경 쓰지 않고 있다가, 사건이 터지면 실효성이 의문인 대책을 쏟아내는 공직사회의 고질적인 관행의 되풀이가 아닌가 의심스럽다. 그중 최악은 누리집에서 공무원들의 이름을 감추는 일이 아닌가 싶다.

전국의 지자체가 공무원을 보호한다며 대표 홈페이지에서 공무원들의 실명을 가리고 있다. 이는 인터넷 활용으로 향상된 민원서비스를 크게 후퇴시키는 행위다. 민원인들은 익명의 공무원에게 어떻게 양질의 서비스를 기대할 수 있을까? 30여 년 전에 사라진 관공서 담장을 인터넷에서 다시 쌓는 것 같아 안타깝다.

이하수 중부지역본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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