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0칼럼] 러더퍼드의 삶이 과학기술계에 시사하는 점
초등학생 1학년인 막내아들과 미용실에 다녀온 아내가 필자에게 놀랍고도 고민이 되게 하는 말을 전했다. 머리를 다듬어 주던 원장과 대화를 하던 아들이 아빠의 삶이 너무 고단해 보이기에 본인은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아빠가 본인들을 재우고도 주말 낮밤 없이 할 일이 많아 보이는 것도 이유이리라 생각할 수 있었지만, 연구자의 삶이 호기심 때문에 움직인다는 것을 설명하기는 아직 어려우리라. 아이의 속내와는 무관하게 지금의 세대에게 연구자라는 직업이 얼마나 매력적인가에 대한 고민이 커지던 찰나였다. 최근 이공계 병역 특례는 문이 매우 좁아졌고, 안정적인 자리에 정착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긴 데 반해 가능성에 대한 확신은 누구도 줄 수 없다는 점이 젊은 세대들이 선택하는 데 매우 주저하게 만든다.19세기 말에 태어나 핵물리학에 지대한 공헌을 한 노벨상 수상자 어니스트 러더퍼드는 뉴질랜드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로는 매우 드문 여교사였던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은 러더퍼드는 교사가 되려고 했으나 계속 실패했고, 영국 유학을 위한 장학제도에도 지원했으나 2등으로 낙방하고 말았다. 대학 시절 특별한 천재라는 인상은 없었지만, 한번 목표를 정하면 매진하는 고집스러운 성격을 지닌 그에게는 매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운명은 그의 편이었는지 1등이 의대 진학을 위해 장학금을 포기하자 그에게 기회가 왔다. 이후 그는 우수한 환경과 학풍을 지닌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수학하며 승승장구하게 되었다. 훗날 그는 뛰어난 제자들을 많이 길러냈는데, 그중 헨리 모즐리는 젊은 나이에 엄청난 업적을 이루어 노벨상 후보로 꼽혔다. 하지만 1차대전에 참전하여 사망하자, 스승인 러더퍼드는 의회에 편지를 써서 과학 인재들의 대체복무제도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이는 이후 많은 나라에 영향을 끼쳤고, 지난 수십 년간 우리나라 역시 이 제도를 통해 과학기술계의 인재 유입을 확대할 수 있었고, 환경을 탄탄히 가꿀 수 있었다.우리나라 대학 입시의 전공 선호도는 시대에 따라 계속 변해왔다. 그 상황들은 필연적인 것이었고, 지금의 의대 선호 현상 역시 마찬가지로 그 자체로 이공계의 위기를 상대적으로 재단하는 것은 불필요하다. 어차피 의대 전공의 정원은 정해져 있으며, 오히려 특별한 재능을 가진 러더퍼드와 같은 재원들이 이공계 진입을 통해 제대로 기회를 받고 성장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는 것이 더 중요할 것이다. 필자가 만난 다수의 석학들은 본인들은 천재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연구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끊임없는 호기심과 열정이라고 말한다. 천재가 다수를 먹여 살린다는 인재 제일주의 관점이 지배적인 분위기에서는 결코 탁월한 학풍이 생길 수 없으며, 우수 연구자의 지속적인 배출도 어렵다. 천재도 올바른 사회 문화적 여건이 갖춰진 상황에서 성장할 수 있고, 그것은 다수가 함께 이루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는 경제 위기로 정출연 연구자의 정년을 줄인 뒤 복구하지 못하였고, 다양한 형태의 직군에 있는 연구직 종사자들의 임금 역시 상승폭이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많은 과학자는 추가 수당이 없음에도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연구에 매진한다. 하지만 안정적인 삶이 중요시되는 젊은 세대에게 언제까지 열정만 바랄 수는 없을 것이다. 우수 연구자에게는 큰 지원금과 종신직을 보장하고, 연봉의 인상폭이 큰 서구권이 왜 학문적 토양이 탄탄하고 세계의 우수한 인재들이 몰려드는지 생각할 필요가 있다.박치영 DGIST 에너지공학과 교수박치영 DGIST 에너지공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