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각각(時時刻刻)] 하지가 지난 새벽, 청년에게 보내는 반년의 안부
새벽에 문득 눈을 떴다. 이 시간이면 창밖이 밝아야 할 텐데, 어둠이 아직 남아 있었다. 달력을 보니 하지(夏至)가 이미 지나 있었다. 해가 가장 높이 떠 있던 날이 지나고, 낮은 점점 짧아진다. 계절은 어느덧 절정을 넘어서고 있었다. "시작이 반이라는데, 또 반이 지나면 1년이 다 간 건가?" 혼잣말이 새어 나왔다. 절반이 지나간 한 해. 1월의 다짐은 흐려졌고, 이룬 것이 무엇인지 떠오르지 않는다. 청년에게 이 시점은 유난히 낯설고 쓸쓸하다. 붙잡지 못한 시간에 대한 자책, 어디쯤 와 있는지 모를 막막함. 열심히 달려왔는데도 제자리에 선 듯한 느낌, 남들보다 뒤처졌다는 불안감. 며칠 전 하지감자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 무렵 캐는 감자는 크진 않지만 단단하고 맛이 깊다고 했다. 가장 뜨거운 계절의 시작에 수확되는 그것은, 작지만 알차다. 생각해보면 계절도, 인생도 절정에서부터 익어간다. 중요한 건 빠른 성장이 아니라, 천천히 단단해지는 시간이다. 얼마 전 종영된 드라마 '미지의 서울'에서, 쌍둥이 자매 미지와 미래는 서로의 삶을 바꿔 살아본다. 한 명은 서울의 모두가 부러워 하는 공공기관에서 일하고, 다른 한 명은 고향에서 하루살이 노동을 한다. 전혀 다른 삶 같지만, 둘 다 지쳐 있었다. 미래는 직장 내 괴롭힘에, 미지는 일상의 무게에 흔들리고 있었다. 서로의 삶을 살며 그들은 묻기 시작한다. "이건 내가 원한 삶이었을까?" 그 질문은 드라마 속 대사이기도 하지만, 지금을 사는 우리 모두의 마음 속에도 자리한 질문이다. 결국 그들은 서로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간다. '미지의 서울'은 한 사람의 이름이자, 아직 알지 못한 서울, 그리고 미지의 '나 자신'을 뜻한다. 이 드라마는 한 도시와 두 자매를 통해 우리에게 말한다. 우리 모두는 여전히 미지의 시간을 걷고 있고, 그 낯선 길 위에서 끝내 자기 자신으로 살아내려는 존재라고. 하지는 말해준다. 절정은 끝이 아니다. 해는 짧아지지만, 여름은 이제 깊어진다. 청춘도 그렇다. 속도를 내지 못했다고 조급해하지 말자. 중요한 건 지금 내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다. 예전에 스페인 바스크 지역의 한 협동조합을 방문한 적이 있다.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그곳에 성공의 비결을 묻자, 그들은 짧게 말했다. "시리미리(Sirimiri).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그 말이 오래 마음에 남아, 지금도 내 카톡 프로필 아래에 걸려 있다.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기 위해, 청년에게 제안하고 싶은 것이 있다. 첫째, 매일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자. "나는 왜 이걸 하고 있는가?" 지금 이 일, 이 만남, 이 선택은 과연 내가 원해서 하는 것인가? 이 단순한 질문 하나가, 우리를 타인의 기대나 외부의 속도에서 벗어나, 다시 자기 삶의 중심으로 돌아오게 한다. 질문은 방향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둘째, 그 질문에 대한 나만의 답을 짧게라도 기록해 보자. 하루 한 줄이라도 좋다. 기록은 나를 드러내는 동시에 돌아보게 한다. 하루하루가 흘러가버리는 대신, 쌓여간다. 기록은 방향을 점검하는 행위이다. 셋째, 그 질문과 기록 위에서, 내일 하나의 작은 선택을 바꿔보자. 핸드폰을 보는 대신 아침 햇살을 마주하는 일일 수도 있고, '아니요'라고 말해보는 작은 용기일 수도 있다. 선택은 결국, 내가 내 삶을 어떻게 살아가겠다고 결정하는 유일한 방식이다. 질문하고, 기록하고, 선택하는 하루. 그렇게 살아내는 하루가 쌓여, 결국 우리를 우리답게 만든다. 전창록 대구가톨릭대 특임교수
2025.07.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