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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춘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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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장사꾼] '숨쉬는 순두부' 김규태 대표, 순두부 본연의 맛 특화…두부돼지두루치기·대게장순두부 메뉴도 적중
순두부에 승부를 건 '숨쉬는 순두부' 대표 김규태. 들안길 본점에서 그를 만났다. 올해 42세의 그는 대륜고를 나와 영남대 체육학부에 들어간 신체 건장한 사내다. 그런데 아버지가 그의 청년시절을 힘들게 만들어 버렸다. 사업에 실패한 거다. 가스불까지 끊기는 힘든 시절…. 그는 수영, 그리고 스노보드에 능해 전국체전을 딛고 올림픽 무대까지 엿보지만 타고난 뭔가가 하나 부족한 것 같아 지도자의 길로 빠진다. 2008년 북구보건소 운동처방사가 된다. 하지만 미래가 불투명했다. 집 한 채 마련하지 못하는 나날일 것 같았다. 알바를 뛰었다. 경호강 래프팅 가이드, 평창 피닉스파크 스노보드 강사로 부수입을 올렸다. 그렇게 열심히 뛰어 5천만원이란 종잣돈을 마련한다.2010년 10월, 수성구 지산동에서 숨쉬는 순두부 시대를 연다. 하지만 그의 첫출발은 치밀하지 못했다. 그냥 식당은 맛있게 하면 되는 줄 안다. 현실은 그게 아니었다. 국내 생산량의 70%를 차지하고 있는 두부 기기 공장인 대륙식품을 통해 제품을 구입하고 그 과정에서 관계자들로부터 두부 만드는 공정에 대해 배운다. 순두부 레시피도 지인을 통해 전해 받았다. 초창기 두부로 선방을 했지만 지역 정서상 두부 하나로 승부수를 띄우는 건 무리였다. 반찬과 사이드 메뉴가 받쳐줘야 승산이 있었다. 그냥 두부 하나에만 정성을 쏟았는데 손님들은 너무 밍밍해 먹지 못하겠다는 불만을 토로한다. 멍했다.이래선 안 되겠다 싶었다. 그래서 전문가 과정을 밟는다. 경북대 외식업최고경영자 과정에 입학한다. 그날부터 염도계, 전자저울 등을 놓고 소스, 물, 온도, 습도 등 모든 과정을 표준화했다. 분석해 보니 자신이 요리에 대해 실력이 짧은 일반 식당주가 힘든 건 바로 주방장의 횡포였다. 누가 하더라도 표준화해놓으면 그런 횡포를 예방할 수 있다고 믿었다. 적중했다. 충북 괴산, 영주, 영천, 경기도 장단 등지의 콩을 매입했다. 두부의 원형을 잡은 뒤 사이드 메뉴 개발에 돌입한다. 맨 먼저 등장한 사이드 메뉴는 두부돼지두루치기. 원래 술안주로 기용했는데 나중에는 밥과 세트를 이룬 괜찮은 메인메뉴로 사랑받는다. 그다음은 '대게장순두부'를 벤치마킹해 개발한다. 영덕의 한 가공업체와 계약을 체결했다. 1년에 80t 정도 사용하는데 두부와의 양 조절을 잘 못하면 비린내가 나서 여러 번 시행착오를 거쳐 냄새를 잡는데 성공을 한다. 순두부도 본연의 맛을 특화시켰다. 다른 가게에서 곧잘 등장하는 고추기름도 사용하지 않았다. 덕분에 강릉 초당순두부 이상의 부드러움을 유지하게 된다. 9년차가 되는 날 하절기를 겨냥해 콩국수 세트를 개발한다. 삶을 콩을 갈고 거기에 견과류 등을 넣어 과도하게 뻑뻑하게 만든 콩물이 보편적인데 그는 콩만 갈아냈다.현재 대구는 물론 인천, 대전, 세종, 서울 등 전국에 걸쳐 모두 18호점을 확보했다. 모두 8명의 직원이 새로운 라인을 형성하고 있다.4년 전 대구 식품 명가로 거듭나고 있는 서가앤쿡 이성민 대표와 의기투합. 'S&S 숨'이란 회사를 차린다. 수성구 수성로 350. 오전 9시~밤 9시. (053)753-0095 글·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두부돼지두루치기와 대게장순두부.
[김영복·이춘호 '한식 삼천리'] 여름별미 '냉면'(2) 반세기 넘게 사랑받는 '대구 4대 냉면집' vs 새로운 맛으로 도전 '신흥 냉면 강자'
◆평양냉면의 등장평양냉면은 1915년께 미국 시카고 인근에 첫선을 보였으며 이는 서울보다 5년 빨리 등장했다는 사실이 문헌으로 처음 밝혀졌다. 도산이 1925년 시카고 한인들을 모아놓고 '10년 전 이곳을 지나갈 때에 장씨에게서 냉면을 대접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다시 와보니 참 반갑습니다'라고 언급한 내용의 연설문이 최근 발견된 것이다. 평양냉면은 평양이 근대적인 도시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19세기 말에 접어들어 전문식당에서 팔기 시작했다. 1910년대에 평양 대동문 앞에는 2층으로 된 냉면집이 있었고, 1920년대 들어 평양 시내 수십 곳에 냉면집들이 속속 생기면서 냉면집 주인들은 평양면옥상조합을 설립했다. 이 평양냉면이 서울로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로 알려졌다. 이때 문을 연 냉면집은 낙원동의 '부벽루', 광교와 수표교 사이의 '백양루' 그리고 돈의동의 '동양루'가 전문점으로 이름을 떨쳤다. 이로 미루어 냉면은 서울보다 시카고 등 미 중서부에서 먼저 등장한 것으로 추정된다.소설가 김랑운은 1926년 잡지 '동광(東光)' 8집에 소설 '냉면'을 발표했다. 세계 경제 공황으로 생활이 어려웠던 시절, 신문 기자인 순호가 더위가 극성을 부리는 8월 줄어든 월급봉투를 들고 집으로 향하다 종로 근처에서 돼지편육과 채를 썬 배, 그리고 노란 겨자가 수북이 얹힌 냉면 한 그릇을 먹는 과정을 묘사했다. 1930년대 들어 냉면은 배달 음식으로 서울에서 자리를 잡았고, 당시 유기그릇에 담긴 냉면 값은 15전이었다. 배달부에게 별도로 10전의 수고비를 얹어 주는 경우도 있었다. 이로 미루어 평양냉면은 평양면옥상조합이 설립된 1915년 이전에 누군가에 의해 이미 시카고에 진출했던 것이다.1896년 작자 미상의 '규곤요람'에도 '냉면법'이 나온다. '밋밋한 맛이 나는 간이 덜 된 무김치 국에 메밀국수를 말고 그 위에 잘 삶은 돼지고기를 썰어 넣고 배와 밤, 그리고 복숭아를 얇게 저며 넣은 후 잣을 넣어 먹는다'라고 나온다. 1919년 당시 조선총독부 산하에서 경북 상주의 군수직을 임했던 심환진이 필사한 '시의전서(是議全書)'의 상편 주식류의 면편에서 냉면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여기서는 '나박김치나 동치미 국물에 국수를 말아서 양지머리·배·배추를 다져 넣고 고춧가루를 넣은 후 잣을 올려 먹는다'라고 기록했다. 또 '일부 지역에서는 고기 뼈를 우려내거나 고기를 우려낸 장국을 차게 하여 국수를 말아먹기도 한다'는 기록도 병기했다.평양냉면과 함흥냉면은 재료가 다르다. 북한 음식사전에는 '함흥냉면'이란 용어도 없다. 함흥냉면은 '농마(녹말)면'이라 해서 감자 전분으로만 만든 질긴 면인 반면 평양냉면은 점착력이 부족해 잘 끊어질 수밖에 없는 메밀로만 만든다. 북한산 메밀에 비해 남쪽 메밀은 점착력이 상대적으로 부족해 밀가루를 섞어 탄력도를 높였다. 참고로 전분의 경우 북한은 감자, 남한은 고구마 전분에 무게 중심을 둔다. 가격은 감자전분이 더 비싸다.1920년대 서울 진출한 평양냉면감자전분 사용해 질긴 함흥냉면메밀·고구마 전분 강원도 막국수지역별 고기·과일·동치미 육수전분에 밀가루 섞은 부산 밀면평양식 온면같은 의령 메밀소바대구 강산·대동면옥·대동강 등1950·60년대 창업 후 전통 지켜◆팔도의 별별 냉면들강원도 막국수도 냉면의 한 종류인데 거기는 대구와 달리 메밀 함유량이 높다. 메밀과 고구마 전분 혼합률이 7대 3 정도가 된다. 강원도 막국수도 문파가 있다. 춘천막국수, 봉평막국수, 원주막국수, 양양막국수. 차이는 뭘까? 춘천은 고기 육수, 봉평은 과일육수, 원주는 메밀껍질째 갈아 넷 중 가장 거무튀튀한 빛을 발한다. 그리고 양양은 동치미육수가 특징이라 일명 '동치미막국수'라 불린다.강원도 막국수는 소면처럼 뚝뚝 잘 끊어지지만 대구는 반대로 메밀보다 전분을 더 많이 섞어 가위로 잘라야 할 정도로 질긴 게 특징이다. 강원도와 대구의 냉면은 그 질김 정도가 엄청나게 차이가 난다. 대구의 냉면집에는 약속이나 한 것처럼 가위를 내준다. '잘라 먹어'란 의미다. 부산의 밀면도 한국 냉면의 새로운 이정표라 할 수 있다. 부산 우암동 내호냉면이 퍼트린 이 밀면은 '밀가루냉면'의 준말이다. 전분에 밀가루를 섞은 것이다. 메밀가루가 없는 게 특징이다. 의령에 가면 '메밀소바'를 맛볼 수 있다. 어떤 이는 '일본식 잔치국수' '의령식 냉면' '의령식 막국수'로 부르기도 한다. 언뜻 보면 밥에 장국을 붓고 찢은 닭가슴살, 달걀지단, 빈대떡 등을 올린 '평양온반' 같다. 이 소바는 일본의 전통 메밀국수. 광복 이후 일본을 통해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기술 전수자는 부림면 신반마을 어느 할매 정도로 알려져 있다. 그 할매의 레시피가 현재 의령소바의 전신인 셈. 의령소바는 일본 스타일과 많이 다르다. 면을 쓰유에 적셔 먹지 않고 삶아낸 면에 멸치로 우려낸 뜨거운 국물과 각종 고명을 얹은 것이다. '장터 잔치국수 스타일'이다. 의령전통시장에 3인방 소바 집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맏형 격인 '다시식당'과 둘째 격인 '화정소바'는 '본방사수'다. 화정소바 바로 옆에 있는 '의령메밀소바'는 공격적인 마케팅을 전개해 자기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맛의 전통은 '다시식당'과 '화정소바'에 더 실린 것 같다.흥미로운 건 제주도다. 고기국수는 보편적인 반면 그렇게 메밀 재배 면적이 광대한데도 '빙떡'은 잘해 먹으면서도 냉면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대구냉면 4인방1951년 창업한 중구 교동의 '강산면옥'과 중구 계산동의 '대동면옥'(최근 재개발로 인해 한옥을 지어 근처로 본점 이전), 1953년 부산에서 창업한 뒤 1969년 대구로 이전한 중구 공평동의 '부산 안면옥' 주인은 모두 평양 출신이다. 이와함께 1965년에 창업한 남구 봉덕동의 '대동강'을 합쳐 '대구 4대 냉면집'이라고 한다. 북한식 평양냉면에 가장 가까운 건 대동강, 북에서 피란 온 실향민의 입맛에 잘 맞다는 평가를 받는다. 경북은 풍기 '서부냉면'이 좌장격. 새로운 냉면 강자가 대구 도심 곳곳을 파고들고 있다. 수성구 대우트럼프월드아파트 맞은편에 있는 '삼교리 동치미막국수'는 강원도식 냉면, 그리고 '속초코다리냉면', '온채당', '제형면옥', '교동면옥', 대명동 수미담 진주냉면, 반야월 냉면, 박군자 진주냉면 등이 도전장을 냈다. 다음 회에는 한국에서 가장 독특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진주냉면'의 실체를 밝혀볼 작정이다. 대담=김영복 식생활문화연구원장·이춘호 음식전문기자정리·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비빔밥 전문 개정식당이 개발한 냉면지금은 기계식으로 면을 뽑지만 예전에는 목조 국수틀을 사용했다.동구 신천동에 등장했던 '반야월 밀면'.일제강점기 냉면 배달부는 요즘 택배기사처럼 나름 바쁜 직종이었다.1952년 6·25전쟁 중 피격된 서울의 한 건물에 냉면 간판이 선연하게 다가선다.
[김영복·이춘호 '한식 삼천리'] 여름별미 '냉면'(1) 독립 운동가 김구·안창호 선생도 즐겨 먹어
국수도 그렇지만 냉면(冷麵)의 지형도도 참 복잡다단하다. 국내 유수 언론의 기자들도 그 어원은 추적할 수 없으니 몇몇 유명 음식기원 연구가의 글을 통째로 긁어 와 사용하는 게 현실이다. 크게 보면 김영복 식생활문화연구원장, 음식칼럼니스트 윤덕로, 음식 원류를 추적하고 있는 황광해와 박정배 등이 그래도 객관적으로 냉면의 족보를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이번에도 김 원장과 냉면에 대해 많은 얘기를 다듬었다. 다음의 내용은 냉면에 관한 한 가장 풍부한 자료의 집적이랄 수 있겠다.냉면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차가운 국수'. 고려 초기에서 조선 시대 중기까지 '냉도(冷淘)'라는 음식명을 병행했다. 고려 말 삼은(三隱)의 한 사람인 목은(牧隱) 이색의 '목은집(牧隱集)' 제17권 시(詩) '하일(夏日)의 즉사(卽事)', 조선 중기 문신인 포천 출신 용주(龍洲) 조경(趙絅·1586~1669)의 목판본 '용주유고(龍洲遺稿)'에도 냉도란 단어가 등장한다. 학계 등에서는 계곡(谿谷) 장유(張維)의 시 '자장냉면(紫漿冷麵·자줏빛 냉면)'이 냉면 관련 최초의 문헌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냉도의 속살을 들여다보자. 유두일(流頭日)은 명절의 하나인 음력 6월15일을 가리키는데, 옛날 민속에 이날은 향인(鄕人)들이 동류수(東流水)에 나가 머리 감는 모임을 하면서 이것을 유두라 일렀다고 한다. 이날은 특히 유두면(流頭麵), 밀전병 등의 음식을 만들어 먹고 놀았다고 한다. 이때 유두면으로 '괴엽냉도(槐葉冷淘)'를 해 먹었다. 이것은 홰나무 잎의 즙을 밀가루에 섞어서 만든 일종의 냉면을 말한다. 중국에서는 냉면을 냉도, 냉도면, 과수면(過水麵) 등으로 불렀다. 청나라 반영폐(潘榮陛)의 '제경세시기승(帝京歲時紀勝)' 하지(夏至) 조에는 '서울(연경)에서는 이날 집집마다 냉도면을 갖추어 먹는데, 즉 속설에 과수면(過水麵)이라고 한다'라고 적어놓았다.당나라 시성 두보, 소동파 등도 '괴엽냉도(槐葉冷淘)'란 말을 사용했다. 냉도는 수화(水花)나 괴엽 따위를 밀가루에 반죽하여 떡을 만들고, 그것을 잘게 썰어 술에 담가 두었다가 식혀서 먹는 음식인 듯하다. 그리고 괴엽이란 것도 꽃 피는 괴화(槐花)가 아니며 느티나무인 듯하다. 우리나라도 느티나무를 '괴화나무'라 했다.중국의 냉도가 우리처럼 면을 차갑게 해서 먹는 것이지만 조리 방법 등이 전혀 다르다. 우리 냉면은 문헌적으로 고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봐야 할 것이다.조선 후기에서 구한말로 접어드는 시기에 남대문에서 종로에 이르는 거리에는 주점, 팥죽집 등 음식점이 즐비하였는데, '군칠'이라는 주점은 평양의 냉면, 개성의 산적 따위를 팔았고, 밤에는 불을 켜놓고 영업을 하였다고 한다. 평양과 개성의 특미가 서울 주점의 메뉴로 등장할 정도였던 것이다. 냉면 배달은 1900년대 초 자전거 보급 확대로 전성기를 맞는다. 한 사람이 여러 그릇의 냉면을 걷는 것보다 빠른 속도로 배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백현석· 최혜림의 저서 '냉면열전'을 보면 서울 종로구의 한 냉면집 배달부가 인근 양복집으로 냉면 81그릇을 배달했다고 한다. 당시 규모가 큰 냉면집의 경우 배달부만 15명을 뒀다고 한다.냉면은 독립운동과도 인연이 깊은 음식이다. 독립운동가 이탁(李鐸)은 광동군관학교를 수료하고 만주 봉천(현 선양)을 거쳐 국내로 잠입한 다음, 평안남도 평원군 숙천읍 동부지역에 냉면집을 구입하여 국내연락처를 설치하였다. 백범 김구는 상하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를 이끌면서 늘 체포와 암살의 위험 속에서 살았는데 한번은 전차 검표원으로 별명이 '박 대장'인 사리원 출신 젊은이의 청첩을 받고 축하차 방문하여 급히 냉면 한 그릇을 받아먹고 온 김에 이웃 동포 가게에 들렀는데, 미처 앉기도 전에 일경이 박 대장 집에 들이닥치기도 하였다. 그는 1948년 분단을 막기 위해 평양에서 김일성과 담판을 짓다가, 밤에 숙소에서 몰래 빠져나와서 냉면을 먹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는 1941년 중국으로 건너가 안후이 회남, 장쑤성 서주 등을 전전할 때 서주에서 냉면집을 운영한 적이 있다고 한다. 도산 안창호는 일본 사법당국으로부터 4년 형을 받고 경기도 경찰부에 유치되어 있을 때 간수가 냉면을 좋아하는 도산에게 냉면을 시켜 주었다. 냉면을 좋아하는 김구를 만나면 냉면 두 그릇씩 비웠다고 전해진다. 대담=김영복 식생활문화연구원장·이춘호 음식전문기자정리·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김영복·이춘호 '한식 삼천리'] 여름별미 '냉면'(2)에서 계속됩니다.김영복 식생활문화연구원장이 개발했던 닭가루를 이용한 '닭냉면'.개화기 시대 냉면을 재현했던 대명동 단포식당의 '냉교면'.온면 버전의 냉면처럼 보이는 '의령의 메밀소바'.
[동대구로에서] 행복방정식
문재인. 그는 대통령의 그늘에서 벗어나 이제 개인의 시간을 복원하고 있다. 그가 취임 선서를 할 때 한 구절이 참 새롭다 싶었다. '출발은 평등, 과정이 공정하면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고 했다. 역대 대통령 말 중 가장 인상적으로 들렸다. 무슨 까닭인지 거기에는 '자유'란 단어가 없었다.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거북함 때문이었을까. 만약 문 전 대통령과의 단독 인터뷰 타임이 내게 주어졌다면 그분에게 꼭 이런 말을 하고 싶었다. '원래 종교는 다른 종파와 잘 합쳐지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는 전 세계 유례가 없을 정도로 종교 간 신사협정이 비교적 잘 지켜지고 있다. 희한하게 한국의 지식인들은 대화와 토론의 채널을 모두 잃어버린 채 유빙처럼 떠돌고 있다. 시민들은 유튜버 전사들의 편향된 정치인문학에 편승해 더욱 사분오열을 조장하고 있다. 가장 치명적인 문제는 자유와 평등파의 막가파식 분열이다. 남한과 북한의 대립보다 더 섬뜩한 구도다.'자유파는 '보수', 평등파는 '진보'의 유전자를 갖고 있다. 그런데 어찌 된 셈인지 이 둘을 접합할 수 있는 '접합제'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그 어떤 권력도 종교적 지도자도 스타도 예술가도 그걸 할 수 없는 것 같다. 자유가 '저기압', 평등이 '고기압'이라면? 둘이 합쳐지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대지(大地)에 빌붙어 사는 모든 생명은 전멸한다. 자연은 인간의 미래를 위해 큰맘을 먹었다. 둘이 비라는 방식으로 한 몸이 된 것이다. 지금 우리를 힐링시켜주는 이 찬란한 5월의 신록도 그 덕분 아닌가.아이러니컬하게도 이 나라의 국격은 날로 상승 모드다. 세계 9위권 경제대국. 세계 1위권 한류 티켓도 여럿이다. 백남준이 비디오아트, 백건우와 조수미, 조성진 등이 클래식, 방탄소년단이 대중음악, 기생충이 아카데미상, 오징어게임과 파친코가 드라마시장, 손흥민이 프로축구, 조선(造船)이 세계선박, 그리고 삼성전자가 스마트폰…. 최근 유대인 CEO들이 '한류(K-megatrend)'를 보며 '한국주의보'를 발동했다.나란 항공모함을 호위하는 두 호위무사, 그가 바로 평등과 자유. 인격을 구축하는 핵심 부품이다. 평등은 자유란 에너지를 품고 행복마을로 진군한다. 그 과정이 공정이고 정의다. 인격은 그 어떤 이유로도 무시되고 차별되지 말아야 한다. 평등은 꿈과 희망을 만나면 그걸 성취하고 싶어 한다. 그걸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이 바로 자유다. 평등은 치약의 튜브이고 자유는 치약이다. 평등은 '필요조건', 자유는 '충분조건'이다. 인간은 사회란 어마 무시한 전장에서 '패자'가 될 수도 있다. 동등한 출발, 하지만 치열한 경쟁이 스며든 과정, 그게 피워낸 종점이란 꽃은 결코 동등치 않다. 차별을 차이로 승격시키는 게 정치다. 모든 게 동등하다면 그건 '주검'. 평등이 자유를 잘못 살아내는 바람에 봉착한 그 불평등까지 자유가 빚처럼 떠안아야 하는 것, 그건 모두를 빙하기로 몰아가는 '불공정'이다. 평등과 자유, 그 항성 궤도를 따라 도는 두 개의 위성, 그게 공정과 정의. 이 네 개의 회전체가 사철처럼 선순환할 때 자연과 인류의 행복 조건은 비로소 충족되는 것 아닐까. 보수와 진보가 머릴 맞대고 술을 마신다. 주량은 자유롭고, 그 취함은 평등하게 온다. 가끔 '그리스인 조르바'를 창작한 그리스 대문호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이 생각난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이춘호 주말섹션부장 겸 전문기자
[김동욱의 낚시시대/손맛] ■광어 다운샷 낚시(태안 신진도~마검포~가의도) "역대급 대광어 시즌이 왔다"
"그거 입질 아냐? 입질 같은데….""그런가? 아무것도 못 느꼈는데…."루디호(선장 이춘기) 오른쪽 선미에 있는 두 사람이 뭔가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정작 입질을 받은 사람은 그걸 느끼지 못하고, 옆에 있던 동료가 입질을 알려주는 거다."낚싯대 세워, 감아봐, 감아봐~!"그제야 사태(?)를 짐작한 정웅섭씨가 낚싯대를 세워 든다. 활처럼 휜 낚싯대 끝이 쿡쿡 수면 쪽으로 처박힌다.◆70㎝급 씨알로 기분 좋은 스타트"이건 큰 놈이야~!"이 선장이 뜰채를 들고 다가간다.드디어 수면 위로 시커먼 어체가 떠오른다. 광어다. 한눈에도 70㎝ 이상 씨알이다."철퍼덕~, 철퍽~!"수면 위에서 서너 번 몸부림치던 광어의 종착지는 이 선장의 뜰채 안."우와, 크다.""대박이네, 대박."어느새 주변에 몰려든 동료들이 감탄사를 쏟아낸다.오전 8시10분. 드디어 첫 광어가 올라왔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전혀 입질을 감지하지 못했던 초보꾼이 마수걸이를 한 것이다. 그러나 이게 다가 아니었다. 정웅섭씨는 10분 후 다시 그 자리에서 또 한 마리를 걸어 낸다. 순식간에 혼자 두 마리의 광어를 낚은 거다.◆신진항 외항이 광어 산란장지난 4월22일 오전 6시. 충남 태안의 신진도항에 7~8명의 꾼들이 모여있다. 이들은 루어낚시 전문 낚싯배 루디호의 단골손님들이자 네이버 카페 '루디호' 회원들. 매년 충남권 광어 다운샷낚시 시즌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꾼들이다. 여기에 한국다이와 김종필 마케팅 차장와 박민규 유튜브 한국다이와 촬영감독이 합류했다. 시즌에 맞춰 출시된 선상 루어낚시 범용 로드 '라이트 게임 엑스(LIGHT GAME X)'의 현장 시연을 위해 이번에 새로 들어온 한국다이와 솔트루어 필드스태프 김병철 프로도 함께했다. 오전 6시30분 신진항을 떠난 루디호는 방파제를 벗어나자마자 속도를 줄인다. "일단 광어 산란장부터 체크를 해 볼게요."이 선장은 '신진항에서 5분 거리의 외항 바닥이 광어 산란장'이라고 말한다. 바닥까지의 수심은 12~15m. 모래와 잔자갈이 깔린 곳이다. 그러나 수온이 아직 7~8℃ 선에 머물러 있다. 아직은 수온이 정상적으로 오르지 않고 있는 상황. 그래서일까, 첫 포인트에서는 1시간 동안 광어 얼굴을 보지 못했다. 드문드문 우럭이 낚이긴 했지만….◆마검포 바닥에서 마릿수 입질오전 8시 루디호가 이동한 곳은 안면도 마검포 앞 해상. 바로 여기서 정웅섭씨가 70㎝와 50㎝급 광어를 연거푸 두 마리 낚아낸 것이다. 이후 우럭과 노래미가 마릿수 입질을 했고, 오전 9시쯤 뱃머리에 있던 권영조 씨에게 세 번째 광어가 낚였다. 오렌지색 웜에 낚인 권영조씨의 광어 씨알도 50㎝ 정도. 아직은 활성도가 낮은 듯, 광어 주둥이에 아슬아슬하게 훅이 걸려 올라왔다."이것도 광어 같은데…."다시 채비를 내리던 권영조씨가 힘껏 챔질을 한다. 20m 수심 바닥에서 입질을 받은 권씨의 낚싯대가 크게 휘어있다. 천천히 낚싯대를 받쳐들면서 릴을 감는 권씨. 이윽고 수면에 무언가가 떠오른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 광어다. 비슷한 씨알의 광어가 같은 사람에게 다시 낚였다.갑판 분위기는 한껏 고조됐지만 다른 꾼들에게로 입질이 전파되지는 않는 상황이다. 루디호는 다시 방향을 남쪽으로 향한다. 이번에는 마검포에서 3㎞ 정도 남쪽에 있는 곰섬 부근. 그러나 우럭은 곧잘 올라오지만 여기서는 광어 입질이 전혀 없다. 다시 이동. 이번에는 북쪽으로 방향을 잡은 루디호가 한참을 올라간다.◆가의도 서쪽 어초밭은 광어 놀이터오전 11시 반. 루디호 엔진이 숨을 고른 곳은 신진도 서쪽 5㎞ 지점의 가의도 해상. 여기는 수심이 제법 깊다. 채비가 20m 이상 내려가는 곳이 있고, 깊은 곳은 30m가 넘는다."여기는 어초밭입니다. 어초낚시를 할 거예요." 이 선장이 꾼들에게 수심과 어초의 높이를 알려준다. 어초낚시라면 입질 받을 확률은 높지만 채비 뜯김은 각오해야 한다. 어초 구멍에 채비를 넣으면 거의 100% 확률로 입질을 받을 수 있지만 운용이 서툴면 어초 사이에 채비가 박혀버린다. 이 때문에 어초낚시를 할 때는 바닥까지의 수심과 어초의 높이를 머릿속에 그리고 있어야 한다. 내 채비가 어초의 능선에서 놀 수 있도록 섬세하게 운용해야 하는 낚시가 바로 '어초낚시'다. 여기서 꾼들 간에 실력 차가 확인된다. 김병철 프로의 진가는 여기서 드러났다. 루디호는 조류를 따라 오른쪽으로 흐르면서 어초 위를 통과하고 있다. 김 프로는 어초와 어초 사이의 구멍에 정확히 채비를 넣고, 밑걸림을 절묘하게 피하면서 씨알 좋은 우럭을 연거푸 랜딩해 낸다. 그러더니 마침내 광어 입질까지 받았다."씨알이 큰 건 아닌데, 차고 나가는 힘은 좋네."김 프로가 낚아낸 광어는 50㎝급. 초록색 웜에 유혹당했다. "어초 능성 위에서 웜을 놀렸는데, 그 아래 숨어 있던 놈이 덮친 것 같아요."그러나 이게 다가 아니었다. 김병철 프로는 곧바로 내린 똑같은 채비로 이내 비슷한 씨알의 광어 한 마리를 더 걸어 올린다. 단 5분 동안 두 마리의 광어를 낚아낸 것이다.이후 이춘기 프로가 씨알 좋은 우럭 한 마리를 걸고, 그 옆에 있던 박민규 촬영감독도 비슷한 씨알의 우럭으로 손맛을 본다. 이날 신진도 앞바다, 정확히는 가의도 서쪽 해상에서 낚은 광어는 줄잡아 10여 마리. 우럭과 노래미는 마릿수로 올라왔다. 7~8℃의 저수온 상황에서 건져 올린 쾌거였다. "5월 초부터는 본격적인 대광어 시즌이 열릴 겁니다. 지금 상황에서 이정도 마릿수를 확인했으니 올해 광어 다운샷낚시는 조황 전망이 아주 밝은 편이네요."이춘기 루디호 선장은 '올해 충남권 대광어 시즌이 어쩌면 역대급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신진도 신진항에서 출항하는 루디호는 5월부터 주꾸미 시즌 전까지 매일 광어 다운샷 출조를 한다. ▶출조 문의 | 신진도 루디호 010-6354-0233 (cafe.naver.com/rudyfishing) 월간낚시21 기자 penandpower@naver.com김병철 프로가 라이트 게임 엑스(LIGHT GAME X) 로드로 낚아낸 광어를 들어 보인다.다운샷 채비로 씨알 굵은 우럭을 낚고 있는 박재현씨.막 낚아낸 굵은 우럭을 들어 보이는 이춘기 프로.취재팀이 가의도 서쪽 해상에서 광어를 노리고 있다
[첫/날] 시인 김대호
"늦은 나이에 등단 후8년여 만에 낸 첫 시집비로소 내가 처음으로세상에 태어난 기분첫 시집에 생활을 담았듯생활을 떠나 무엇을 쓰겠는가"나는 김천시 인근 시골에서 태어나 자랐고 군대 시절을 제외하면 거의 이 작은 소도시에서 살았다. 어릴 때는 만화광이었고 특히 그때의 인기 만화 '바벨 2세'는 너덜너덜하게 읽었다. 악몽같이 찾아온 사춘기 때는 용수철같이 이탈하려는 자기를 잡아 두기 위해 무작정 소설을 읽었다. 동네 누님들의 혼수물품이었던 각종 전집류를 독파했다. 특히 삼성출판사에서 간행한 한국현대작가들의 소설 중 박범신의 에로틱한 글을 읽으며 수음을 배웠다.사춘기가 지나자 모든 세상일이 하향 평준화 되었다. 무엇을 해도 시들했고 빨리 늙고 싶은 게 유일한 소망이 되었다. 그 시절 그래도 나를 조금 의미있게 한 것이 소설쓰기와 독서였으리라. 그러나 이것마저도 군대를 제대하면서 시 쓰기로 종목이 바뀌었다. 작은 소도시에서 소설을 쓰며 가끔 만나 술추렴할 수 있는 업자가 한 명도 없었으므로 그것이 가능한 시 동인회에 들어가면서였다.소설과 시는 같은 문학 장르이지만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서울과 평양같이 지척에 있어도 서로 왕래할 수 없는 거리를 가진다. 무엇보다 멀티가 안되는 이유로 시 쓰기에만 줄곧 매달렸다. 우선 넘어야 할 산이 보였다. 김수영과 이성복과 황지우 시인 등이었다. 그들은 현대시의 판을 쥐고 있었고 그들을 넘어서야지 내 글이 생겨난다고 믿었다. 그들을 뛰어넘다니! 그것은 비현실적인 치기였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치기가 나를 여기까지 오게 한 듯 하다. 나는 그들을 뛰어넘겠다는 치기 대신 아주 실용적으로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들의 냄새와 조도와 헛기침을 내 문장에 슬핏 끼워넣었다.지금은 추풍령 발치에서 '시남(詩男)'이란 카페를 운영하고 있다. 너무 늦은 나이에 등단했고 8년여 만에 첫 시집(우리에겐 아직 설명이 필요하지)을 출산했다. 비로소 내가 처음으로 세상에 태어난 기분이었다. 모든 처음은 신선하고 말랑해야 할 터이지만 늦은 중년이 생산해 낸 첫 시집은 너무 어둡고 딱딱했다. 어두운 것은 개성적인 조도라 치고 딱딱한 것은 극복해야 할 그 무엇이다. 첫 시집에 생활을 담았듯 시집 출간 이후의 내 시 역시 거의 생활편이다. 생활을 떠나 무엇을 쓰겠는가 .지루하고 비겁한 일들로 이어지는 생활이지만 그것을 피해가고 싶지 않았다. 표현만 신선하면 골백번 생활을 쓴다 할지라도 지루하지 않을 것 같았다. 결국 시는 표현이다. 의미는 표현 속에서 태어난다. 의미가 시의 전반을 장악했을 때 그것은 대부분 시가 아니라 구호가 된다.첫 시집을 내고 몇 편이 호의적인 반응을 받았다. 그중 '글짜들'이란 시편의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글짜들의 무덤을 읽기 위해 책을 펼친다/ 흰 배경에 빼곡히 들어찬 검은 글짜들의 공동묘지가 한 필지마다 있다/ 이런 필지가 대략 삼백 장쯤 되는 책을 들추는 일은/ 죽은 것에 염을 하는 절차이다'나는 오늘도 글짜들에게 염(殮)을 하기 위해 고민 중이다. 어쩌면 이미 죽었을지도 모르는 나를 위해 염을 하기도 한다. 미래는 앞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겹쳐 지나갔을 수도 있다. 내가 그것을 모른 채 살고 있을 뿐이다. 속으면서 혹은 일부러 속아주면서 살고 있다.김천에서 '시남'이란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 김대호 시인.그가 8년 만에 펴낸 첫 시집 표지.
[이춘호기자의 뮤직로드] 통기타 가수 시기동 "뇌출혈·실명 절망의 나날 아내 헌신으로 기사회생 노래·통기타는 나의 구원"
처음부터 프로가 어디 있겠는가. 모든 예술은 '왕초보'에서 출발한다. 그 초보의 첫 단추를 마에스트로(거장)의 단계까지 뻗어 나가려면 연습만으로도 실력만으로도 천재성만으로도 부족하다. '하나 더'가 절실히 요구된다. 포기하고 싶지만 포기할 수 없는 절체절명의 열정. 그건 일종의 홀림이고 사로잡힘이다.통기타, 입구는 있지만 출구는 아무도 모른다. 대다수 통기타 가수는 누구 때문에 입문하고 그때부터 독학으로 어느 정도의 문턱까지 실력을 연마시킨다. 하지만 그건 아직 포구에 갇혀 있는 수준이다. 다시 말해 방파제 안에 있는 내항을 바다라고 착각하고 있다. 실력의 신지평을 열기 위해선, 무대에서 악보 없이 반주기 없이 오로지 자기의 필로 자기만의 리듬과 애드리브, 바운스와 그루브를 갖기 위해선 방파제 너머 진짜 바다(정규앨범 개인 콘서트)로 가 봐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자유로운 선율의 맛을 다양한 각도로 칼집을 넣기 위해 화성악도 필수적으로 연마해야 한다. 대다수 기타를 좋아하는 이들은 그 단계까지 못 오고 다들 중도하차를 한다.기타 입문 6년만에 방송무대 주목태어나고 시작된 불행한 가족사검은 터널 속 음악이 내밀어준 빛김광석·이문세와 나만의 레퍼토리이번달에 완성한 생애 첫번째 곡미련만 남기고 가신 '그리운 아버지' 두번째는 아내 위한 '오늘도 감사해'◆설상가상, 가족사시기동. 올해 48세의 그는 검은색 삶을 통기타 하나로 파릇하게 꽃피워내고 있다. 기타 입문 6년 만에 남들이 수십 년 거쳐야 할 관문을 '알집 버전'으로 돌파해 주목받고 있다. 2019년 추석특집 KBS 아침마당, '도전 꿈의 무대'에서 우승. 이에 앞서 대구가요제, 대구장애인가요제, KBS전국노래자랑 남구 편에서도 입상. '사랑의가족'이란 휴먼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도 출연했다. 나름 인지도를 갖게 된다.20대처럼 앳돼 보이고 활기차 보이는 표정. 하지만 그와 조금 대화를 나누다 보면 뭔가 이상한 기운을 감지하게 된다. 정상적이지 못한 그의 안면 근육 때문이다. 산 넘어 산, 설상가상! 시기동의 지난날을 한 줄로 줄이면 그렇다.1974년 겨울 야심한 시각에 의성군 안계면 외갓집에서 태어났다. 이후 불행한 가족사가 줄을 잇는다. 아버지는 오토바이를 타고 귀가 중 자동차에 치여 그 후유증을 못 이기고 돌아가신다. 설상가상으로 지금도 살아계신 103세의 할머니도 치매 증상이 시작되기까지 하여 어머니는 두 분 수발에 정신이 없었다. 제대 후 복학도 포기하고 막노동, 홀서빙 등 할 만한 아르바이트는 두루 경험한다. 아버지의 부재. 가계는 늘 빚투성이였다. 빚 청산을 하기 위해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일만 했다.38세에 영양사인 천사 같은 아내를 만나 5개월 만에 결혼식을 올린다. 인생이란 정말 알 수가 없다. 결혼식 올리고 몇 달 지나지 않아 처남이 오랜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갑자기 사망한다. 두 해가 지나고 나서인가, 장모님이 또 급성 폐암으로 병원에 입원한 지 이틀 만에 돌아가신다. 다섯 달쯤 후에는 장인까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그즈음부터 그도 몸이 급속도로 안 좋아진다. 뇌출혈이란 판정을 받는다. 날벼락이었다. 수술을 받고 누운 채로 한 달간 치료를 받았다. 생사를 오갔다. 잦은 수술로 왼쪽 눈은 완전 실명, 오른쪽 눈은 부분 실명 된 상태. 결국 시각장애인 판정을 받는다.검정 터널의 나날. 그걸 버티게 만든 건 아내와 통기타였다. 숨은 실력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통기타에 재능을 보인다. 그렇게 가수로 점점 입지를 다져가던 중 코로나가 터지고 모든 공연이 줄 취소되는 바람에 오도 가도 못 하게 된다. 시간만 낭비하느니 음악을 전문적으로 더 공부해서 노래도 직접 만들어보자는 마음으로 경북과학대 뮤직프로덕션과(실용음악과)에 입학해 2년간의 공부 끝에 학위를 수료한다. ◆새로운 날을 잡아라이번 달에 신곡 음원을 직접 하우스 레코딩을 통해 제작했다. 현재 5곡 정도 작곡해 뒀다. 대학에 들어가기 전 독학 수준의 실력이었다. 내가 얼마나 못 하는지를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었다. 혼자 열정적으로 돌아다닌 날들이었다. 원곡을 카피하는 수밖에 없었다. 수없이 반복해 들으면서 음표를 하나하나 따서 내 것으로 만들었다. 퀸의 명곡 'Love of my life', 그리고 제이슨 므라즈의 'I'm yours', 리차드 막스 'Now and forever' 등.하모니카도 뺄 수 없으니 입술에 진물이 나도록 불어댔다. 피아노도 필수라 여겨 요즘도 하루에 2시간 남짓 연습한다. 하우스 레코딩 기술도 익혔다. 어느 날, 핸들링 할 수 있는 악보를 한데 모아봤다. 4권의 파일북이 생겨난다.초창기에는 거의 김광석 노래에 꽂혔다.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서른즈음에, 나의 노래, 그날들, 바람이 불어오는 곳, 사랑했지만,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 일어나, 그녀가 처음 울던 날 등 김광석 레퍼토리로 막강군단을 이룬다. 그래서 김광석 야외공연장은 남다른 공간으로 다가선다. 다음에 도전한 노래는 이문세의 가로수 그늘 아래서면, 붉은 노을, 사랑이 지나가면, 사랑은 늘 도망가, 슬픔도 지나고 나면, 가을이 오면 등이다. 이밖에 장범준의 흔들리는 꽃, 벚꽃엔딩, 로이킴의 봄봄봄, 폴킴의 모든 날 모든 순간, 소리새의 통나무집, 김신우의 귀거래사, 이승철의 그런 사람 없습니다…. 얼추 50곡의 레퍼토리가 형성될 수 있었다.생애 첫 곡을 이번 달에 완성했다. 미련만 남기고 타계하신 아버지를 위한 '그리운 아버지'란 곡이다. 두 번째 곡은 아내를 위한 '오늘도 감사해'. 물론 어머니를 위한 곡도 곧 만들 예정이다. 언젠가 올릴 개인 콘서트의 그날을 위해~ 시기동 파이팅!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생사의 기로에 놓였던 뇌출혈 수술, 그리고 연이은 혈족의 타계 등으로 암흑 같은 시간을 보낸 시기동. 그가 지금처럼 파릇하게 기사회생할 수 있었던 건 아내의 헌신, 그리고 자신의 음악적 잠재능력을 일깨워준 통기타 덕분이다.이춘호 전문기자김광석 야외공연장은 그에게 남다른 공간으로 다가선다.2019년 KBS 아침마당 도전 꿈의 무대에서 우승한 뒤 아내, 고모, 담당 피디와 기념촬영을 했다.
어느 코로나 망자를 위한 弔詩
어느 무덤, 어느 폐광(廢鑛), 아니 어느 녹물 삭아 내리는 폐가(廢家)의 추녀 밑, 표정이 모두 사라진 땅속 유물 곁이거나 학살장의 으스스한 고요, 그것도 아니라면 어느 외딴 등대 아래 낮달처럼 번지고 있는 그늘에 일생을 걸어둔다면, 밤보다 더 어둑한 대낮을 모두 짓이겨 버리고 태양도 밝혀줄 수 없는 마지막 악령의 굴 안으로 기어들어 가 그는 마침내 코로나 팬데믹 망인(亡人)이 되어버렸다. 말도 버리고 글도 버렸으니 마지막엔 쓸모없는 혀도 잘라 버렸고 그래서 능히 지상의 모든 세기(世紀)를 탕진할 수 있었다. 전생으로 향하던 부모의 연대기까지 모두 부정한 걸 그는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 습관과 세속에 찌든 얍삽한 혼령은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렸다 악령(惡靈)에 오래 감금되었고 어느 날 보란 듯이 망령(亡靈)에 입문해 빙하보다 더 꽝꽝한 광인(狂人)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자기만의 창세기와 신화를 짓기 시작했다. 달무리 속에서도 용암 속에서도 암약할 수 있었고 세상이 해독할 수 없는 야릇한 미소까지 피워물 수 있었다.하지만 능지처참 된 육신은 차츰 피멍과 피고름 습기와 주름 썩거나 부패하거나 허물어 내리거나 말라버리거나 멍들어버린 버려지고 외면당하고 지워지고 있는 것들의 온갖 한숨과 울음, 그리고 오열과 우울을 채집해 와 제 척추 안에 야금야금 밀장시켰다. 그것은 그만이 허락한 연금술의 세월이었으리라. 인간의 영토에서 아득히 멀어진 그래서 그 용처(用處)를 잃어버린 가슴팍도 증발해 버리고 끝내 오감까지 깡그리 무장해제 된다. 오, 비극은 왜 절대 중력장을 벗어나지 못한단 말인가. 죽을 때까지 죽음만을 살아야 할 뿐, 스스로 악인이란 낙인을 찍어버린 그에게 일용할 양식은 해독제 없는 고독과 외로움, 그걸 수습할 수 있는 건 중얼거림이거나 식은땀이거나 쌍욕이거나 발광이거나 수음과 광기뿐, 그 황무지 같은 대지 위에 천사의 보법으로 다가오는 이가 있었으니 설한풍이거나 폭풍우거나 대숲 일렁거림이거나 나이테 형국으로 밀려오는 강물과 바다에 돋아난 윤슬 정도랄까.인적 드문 음지 혹은 야음 틈탄 달빛에 실려 망연자실 쉬 오지 않는 죽음만 기다리고 있다고 그는 고백했다. 몸만 염주처럼 돌리며 지난 달력의 날짜 위를 무료히 서성거리는 시간에는 폐지(廢紙) 같은 손바닥 펴놓고 굴욕의 가족사를 들여다 보고, 그게 하도 심란하면 술꾼들이 남겨놓고 간 소주를 울음 같이 들이켠다. 그런 그의 하늘에 박힌 별빛은 면도날보다 더 예리하게 가슴을 후벼판다. 파도는 주름살보다 더 서럽게 출렁거리고 알코올이 뮤즈로 난입 그의 위벽에 각인해 놓은 음표들은 원시 벽화보다 더 야수적이고 야만적이었다. 취기에도 수심(水深)이 있었던가. 순식간 용암 같은 혈류에 편승해 웃음이 울음으로 고꾸라지던 날의 지옥도(地獄圖) 같은, 때로는 쥐약처럼 진군해 오는 악몽의 꼭두를 만나 보기도 하지만 그는 맹세코 자살만은 하지 않았다. 그건 차라리 신기루의 몫이라 해두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눈을 떠봐도 늘 쓸쓸히 바람만 붐비는 거리, 출근을 잃어버리고 오직 동네 마트 앞 간이의자에 앉아 종일 술로 탕진하는 알코올 중독자의 굽은 등, 그건 덜 절망한 자에겐 얼마나 큰 각성이고 위안인가. 계속 마셔라 간이 작살 난 날에도 또 다른 간을 이식해 계속 더 퍼 마셔라 불 맞은 나무의 몰골로 새카맣게 죽어가는 그 사내의 동공에 하늘이 하얀 소실점으로 고여 있다. 이듬해 피어날 매화가 누에고치처럼 누워 있는 것 같았다.불빛이 사라진 포구, 세 다리로 걷는 비 맞는 고양이. 그가 스쳐 지나간 뒷골목 실비집 인생 저문 늙은 주모의 젖보다 더 폭삭 내려앉은 거미줄 투성이 전등갓에 추억과 그리움이 흐릿하게 매달려 있다. 구름이 가끔 귀뚜라미 울음 흘리면서 거기서 잠시 놀다 간다. 그는 그게 도시에서 버림받은 나비의 서신이라 믿는다. 바다와 별, 그리고 베어먹다 버려놓은 듯한 과일의 몰골을 지닌 달빛, 한없이 눅눅해진 그의 살점을 위해 지상에서 가장 우울하고 가난한 카니발을 매일 한 편씩 내밀어 본다.이제 그에게 허락된 시간이 다 방전된 듯 뒤꿈치가 조금씩 사막으로 풍화하고 있었다. 돌아보니 그가 타고 온 강도 바다로 몸을 바꾸고 그렇듯 삶은 능히 아득하고 죽음조차 도무지 미동이 없어. 숨 덩어리가 휙 콧구멍 속을 날개처럼 빠져나간다. 향긋한 곰팡이 냄새가 피어난 걸로 봐선 이집트 피라미드에 알처럼 슬어있는 미라 곁으로 날아갈 모양이구나. 오 노을이 청동빛으로 무너지고 있다. 육탈 의식을 집전하는 바람의 손길, 검은 머리 희게 둔갑시키는 세월만큼의 위력이었다.모든 게 온 곳으로 다시 돌아가고 있다. 몸의 주인이 몸이 아니듯 진짜 주인은 오래 전 그에게 빌려준 몸을 반납받아 사라진다. 간신히 붙어 있던 누더기 살점은 파도의 쉼표가 되고 빗줄기와 눈발, 그리고 햇살들이 달려들어 주검을 깡그리 뜯어가 버렸다. 눈시울처럼 남은 뼛조각 어느 여행자의 반지가 될지 누가 알겠는가. 그 많은 경전과 그 숱한 성인(聖人)의 혜안으로도 서둘러 절망에 방점 찍어버린 한 생을 일점일획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는 그게 '통쾌한 복수'라 여겼다. 갈 곳도 바랄 것도 위할 것도 없는 저 천지 망연자실한 바람의 종족이란 증표로 그는 세상에서 가장 여물고 적막한 단말마 하나를 명품으로 남길 수 있었다. 하지만 지구는 더 이상 그걸 소장할 용기가 없었다. 해가 뜨고 질 때마다 밑도 끝도 없이 새어 나오는 세기말의 그 비명 소리가 아침을 여는 새들의 첫 울음소리로 전송되고 있다는 사실을 누가 알려는가. 희망으로의 진군은 너무나 야비해서 멈춘 지 이미 오래 전의 일이고, 이승 향한 미련도 아쉬움도 없기에 그의 주검은 너무나 가볍고 투명하고 홀가분하고 한가하고 평화롭기까지 하여 능히 저승 딛지 않고 단번에 자연으로 등극할 수 있었다. 그를 잃고 홀로 남은 빈방의 그림자는 서둘러 그믐밤을 충전하는 파도로 투신해 버렸고,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경계의 또 다른 신생 광기는 실패한 자의 보법으로 세기말이란 버전으로 지금도 팬데믹 묘지로 꾸역꾸역 밀려들고 있다. 그가 없어도 여전히 실존하는 그라는 한 물건, 절망 앞으로 한 발자국을 더 내디딜 수 있는 만큼의 바람을 실시간으로 흘려보낸다. 그리고 바람의 사자(使者)로 변장해 갓 절망에 든 모든 손아귀에 일일이 백신을 쥐여주고 있다. 희망의 정수리에 절망을 번개처럼 이식해주는 것인가. 그건 아직 절망에 다다른 자가 지상에 단 한 명도 없다는 걸 말하려는 듯 모든 날이 실은 세기말 장송곡이라 귀띔하려는 듯. 글·그림=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 (에필로그=이 조시와 그림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유명을 달리한 망자를 위한 조시다. 아직 그들에 대한 정중한 배려와 위로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생각, 그리고 이 시간에도 자본주의의 냉엄한 범주에서 버티지 못하고 절망의 나락으로 추락 중인 많은 비극적 존재들을 위해 이 글을 헌정하기로 했다. 다소의 격한 표현은 기자의 문학적 상상력이라 이해해주기 바란다.)모두 6토막의 그림은 인간의 일생을 구분적으로 형상화 한 것이다. 태어나서 가족끼리 오순도순 즐기며(1) 동화처럼 화창한 나날(2)을 보내다가 시련(3)과 코로나로 영면(4)에 들고 이후 연옥 같은 중음계(5)를 거쳐 궁극에 고통과 절망이 없는 유토피아(6)에 도달한 과정이다.
[이춘호기자의 행간을 찍다] "절망 앞에서 한 발자국을!"
아침엔 봄, 낮에는 여름, 밤엔 초겨울 날씨였다. 4월은 서둘러 지고 여름이 와버렸다. 봄비가 내리면 밤꽃 향기가 조금씩 섞이기 시작했다. 그 흔적을 기웃거리는 바람은 역마살을 부추긴다. 송창식의 '나그네'와 '밤눈'을 오래 들었다. 이어령 장관도 가고 소설가 이외수도 갔다. 20세기 정서에 편승한 문인들은 목로주점 하나 제대로 분양받지 못하고 21세기에 자꾸 걸려 넘어진다. 만만한 게 낮술이었다. 세상을 떠돌다가 충북 옥천의 한 야산에서 옻된장을 만들고 있는 박기영 시인. '역마살 도사'인 그가 지난 주말 마당에서 옻 잔치를 벌였다. 한때 김민기, 정태춘, 하덕규, 전인권 등과 허교했던 싱어송라이터 이무하도 은둔을 풀고 여기 와서 성결한 노래를 풀어냈다. 다들 낮술에 젖어 들었다. 거기는 밤보다 아침이 더 어두웠다. 웃음이 꽃으로 추락하는 영토였으니 죽음은 바람보다 더 가벼울 수 있는 것. 절벽 앞에서 '한 걸음 더'를 생각해 낸 자의 일생을 한 줄로 줄여주는 울음, 그 옆에 주막 차리고 한 생을 저당 잡힌 얼굴 없는 자의 계절은 이번 세기에서는 결코 만날 수 없을 것이다. 모든 슬픔이 실은 전략이라는 걸 믿고 싶은 건가. 노을보다 더 영롱한 취기를 상여처럼 메고 태어나지 않은 듯 지나온 모든 필체를 지워나가는 그대 낮술이여.술이 깨기 전에 술을 들이켜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술병으로 출근하는 사람들, 그들은 툭하면 떠난다고 하지만 사실은 떠날 곳이 없다. 가장 무서운 게 혼자 되는 것이라는 걸, 그리고 그 언저리에 포진하는 외로움과 고독을 우린 절대 이길 수 없다는 것. 모두 떠나지만 파멸스러운 틈으로 술이 위로처럼 다가선다. 타인을 향할 때는 '포로', 자신을 향할 때 '머슴'이 된다. 몸과 맘의 소유권자가 실은 내가 아니라는 것… 명상에 든 바위. 나도 그 앞에 앉아 잠시 눈을 감는다. 절대적인 슬픔은 절대 노출되지 않는다. 태어난 자는 이미 진 자일까. 이미 사라져 버린 자는 한 수 위, 아예 사람으로 태어나지 않는 자가 어쩜 진짜 고수일까. 여수 아트랜드 장도에서 만난 사다리 꼭대기에 올라 망연히 하늘을 올려다 보는 사내를 행찍용 사진으로 내민다. 글·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여수 예술의 섬 장도. 최병수 작가의 설치 작품이춘호 전문기자
[해녀 인문학] 일제 강점기때 내몰린 제주해녀 경북 동해안권으로 몰리다
해녀는 '여자'가 아니다. 그들은 그 어떤 억센 남자보다 더 억세다. 그들은 생업전선에선 '전사(戰士)'로 돌변한다. 드센 목청은 파도 소리를 압도할 정도다. 하지만 그녀의 남편은 어찌 된 셈인지 대다수 생활력이 턱없이 부족하다. 그래서 그럴까, 해녀들은 툭하면 '지질히도 복도 없는 년'이라고 자신을 타박하지만 결국 팔자소관으로 체념하게 된다. 그 시절, 상당수 해녀의 남편들은 아내가 물질하러 가는 사이 무료한 시간을 주막에서 술추렴을 했다. 아내가 뭍으로 나올 즈음 바다로 가서 아내의 해산물을 받아 올려주는 게 그의 유일한 소임이다. 해녀들은 해산물 채취, 밭농사, 육아, 집안 살림까지 1인 4역을 감내해야만 했다.지난해 경북도가 의미로운 해녀 관련 인문학 도서를 출간했다. '경북도 해녀문화인문사전(하응백·김선태·권선희 공저)', 그리고 '경북 동해해녀음식이야기(섬학교 교장 강제윤 시인)'다. 제주도 해녀문화만 부각됐는데 이참에 경북 동해안 해녀의 연대기를 구체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다. 조만간 구룡포에 해녀학교도 개교될 예정이다.수익 분배율, 제주 해녀-5·어촌계-5경북은 3:7…구룡포선 해녀가 7로 높아일제 잠수기선 진출, 제주 연안 황폐1962년 경북 온 출향해녀 1584명 절정울릉도엔 전국 유일 홍합 따는 '해남' 35년간 물질 구룡포 성정희 어촌계장 경북도 153계 어촌계 중 첫 해녀 출신64세에 구룡포수협 첫 女 이사 경력도'어촌 뉴딜 300사업 꿈' 청사진 제시◆상군해녀해녀 중 해녀는 '상군해녀'. 나름 제사장 같은 위엄을 갖고 있다. 수십 명의 부하 해녀를 거느리고 다닌다. 그들은 계절별 최고의 채취 포인트로 안내해야 한다. 해녀 세계에는 공짜는 없다. 그래서 해녀와 어촌계의 관계는 더욱 복잡다단하다. 어촌계가 해녀들의 입어를 철저히 통제하는 곳도 있고 이와 달리 입어 여부를 해녀들이 결정하는 곳도 있다. 해녀가 채취한 해산물의 위판을 어촌계가 통제하는 곳도 있다. 마을 내 해산물 공동판매장을 운영하거나 아예 개별적으로 운영하는 횟집에서 자체적으로 판매하기도 한다.해녀와 어촌계의 수익 분배율도 지역마다 다르다. 제주도는 해녀와 어촌계가 반반씩, 경북 울진·영덕·경주의 경우는 해녀와 어촌계가 3 대 7로 나눈다. 하지만 구룡포 지역에선 해녀의 발언권이 세다. 해녀가 7, 어촌계가 3을 가져간다. 집단 수확물은 여름에는 성게, 전복·소라·미역·해삼 순이고 겨울에는 말똥성게·전복·문어·해삼 순이다. 개별적으로 채취하는 것 중에는 미역이 가장 많다.'물때(해녀 조업 일수는 연중 100일 남짓, 음력 8~14일, 23~29일 물살이 약할 때 일한다)'가 오면 호미를 팽개치고 수중으로 간다. 아이를 낳고 산후조리도 할 겨를없이 자맥질을 했다. 보통 전통해녀는 8세부터 마을의 얕은 바다에서 헤엄과 잠수를 익혀 15세 무렵에 애기해녀가 된다. 1970년대 초부터 속칭 '고무옷'이라고 하는 잠수복이 보급된다.◆제주해녀 경상도 입성제주도는 '대한민국 해녀 총사령부'. 그토록 막강한 제주 해녀. 하지만 일제강점기 일본 잠수기선이 진출하면서 제주 연안이 황폐해져 해녀 산업이 파산 지경에 이른다. 먹고 살기 위해 해녀들이 하나둘 제주도를 떠난다. 이들을 '출가·출향 해녀'라 한다. 부산에 근거를 둔 수백 명의 객주들은 일본 무역상의 하수인으로 해녀 모집 겸 감독자가 되어 매년 음력 정월~2월 제주도로 들어왔다. 고종 27년(1890년) 제주도에 처음으로 기선이 취항한다. 제주와 부산에 이어 제주~목포 노선이 취항한다. 1954년 경북지사와 제주지사 사이에 자유 입어를 허용하는 각서가 교환된다. 한때 어장 관리에 위협을 느낀 경북 어민들이 제주 해녀의 입어를 거부하기도 했다. 하지만 1962년 수산업협동조합법이 제정되면서 해녀 사회도 안정을 찾게 된다. 1937년 '제주도세요람'을 보면 경남이 1천650명, 경북은 473명, 전남 408명 등 2천801명, 일본으로는 1천601명이다. 1962년 경북에 도착한 출향 해녀가 1천584명으로 피크를 이루게 된다. 자연 부산·울산·포항·울릉도를 축으로 경북 동해안권에 제주 해녀가 많이 포진할 수밖에 없었다. 제주도 한림읍 협재리에는 지금도 '울릉도 출어 부인 기념비'가 서 있다. 제주 해녀 김공자가 독도의 명물인 강치를 안고 있는 사진도 귀한 연구자료로 평가된다. 독도에 제주 해녀들이 입도한 건 1954년부터. 거기서 수확된 미역 등은 울릉도로 실어 보냈으며 포항을 거쳐 동대문 시장까지 판로를 넓힌다. 제주도에도 2006년 해녀박물관이 생긴다. 제주도 다음으로 막강한 해녀 문화가 있는 데는 부산 영도인데 거기도 해녀박물관이 있다. 하지만 1975년 수협법이 개정되면서 제주 해녀들의 원정물질은 중단된다. 현재 경북 동해안에는 2천여 명의 해녀가 활동 중이지만 그 숫자는 매년 줄고 있다. ◆해녀와 해남1970년대만 해도 제주 출신 해녀 50여 명이 울릉도에서 물질했다. 하지만 지금 울릉도 해녀는 씨가 마를 정도로 급감 중이다. 잠수기 어선의 등장 때문이다. 9개 어촌계에서 잠수기 어선을 동원해 해산물을 채취하게 되면서 제주 해녀의 필요성이 사라진 것. 울릉도에는 아직도 전국 유일이랄 수 있는 '해남(海男)'이 있다. 죽암어촌계장인 손홍준씨(75). 30년 전쯤 울릉도에 홍합붐이 일 때 한 방송에서 삼선암에서 홍합 따는 해남으로 소개되면서 알려졌는데 지금은 작업을 하지 않는다.경북도 153계 어촌계 중 유일하게 해녀 출신인 어촌계장이 있다. 바로 35년간 물질해 온 구룡포 성정희(70) 어촌계장이다. 그녀는 구룡포에서 처음으로 대구 경북여상에 입학한 첫 도시 유학생. 28세 때 결혼해 부산에 살았고 남편 사업 실패로 34세에 고향으로 와 해녀의 길을 걷는다. 해녀 팀장에 이어 64세 때 구룡포수협 첫 여성 이사가 되고 지난해 일흔에 꿈에도 그리던 어촌계장이 된다. 꿈을 위해 카네기 스피치 교육도 받고 '어촌뉴딜300사업'이라는 구체적인 청사진도 제시했다.구룡포에서만 일을 하는 게 아니다. 일손이 부족해 지원요청을 하면 13~14명을 모아 원정을 떠나기도 한다. "하지만 갈 길이 멀어요. 해녀는 점점 고령화 되어가고 자원은 줄고 밤에 다이버 도둑까지 극성을 부립니다. 단순한 물질만으로는 해녀 공동체가 유지되기 어려울 것 같아요."하지만 해녀, 일한 만큼 이상의 대가 돌아오는 직업도 그렇게 많지 않으니 젊은이들이 과감하게 도전해 봐도 좋을 것 같다. 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해녀 중 해녀는 '상군해녀'. 나름 제사장 같은 위엄을 갖고 있다. 수십 명의 부하 해녀를 거느리고 다닌다. 그들은 계절별 최고의 채취 포인트로 안내해야 한다. 〈환동해지역본부 제공〉경북도 153계 어촌계 중 유일하게 해녀 출신인 어촌계장이 있다. 바로 35년간 물질해 온 구룡포 성정희(70) 어촌계장이다. 이춘호 전문기자
김남일의 '미역인문학'… 동해안 미역 채취 현장, 도내 해녀에 받은 영감, 新해양실크로드 완성꿈
상주 출신인 김남일. 그는 없는 일을 만든다. 역발상을 앞세워 돈키호테처럼 사각지대 국책사업을 찾아 헤맨다. 승려 혜초를 축으로 한 해양실크로드 탐험대, 기림사를 축으로 한 신라차문화 복원, 문무대왕 해양역사관, 경북 동해안 해녀학교, 호미곶 바다정원, 울릉도 공항, 울진의 국립해양과학관 등에도 그의 열정이 담겨 있다. 심지어 '울진·울릉 돌미역 떼배 채취어업'을 동해안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국가중요어업유산에 등재 시킨다. 이 책을 쓰면서 경북도 바닷가 5개 시·군 152개 어촌계와 수협조합장, 27개 읍면장님, 도내 1천여 명의 해녀로부터 많은 영감을 얻었다. 그의 요즘 화두는 '경북 동해안 바다인문학'이다. 해초·해조·해녀, 그걸 딛고 문무대왕 인문학을 축으로 한 신개념 해양실크로드 완성의 일역이 되고 싶단다.아직 갈 길이 멀다. "북한까지 포함, 해양바이오산업의 인프라가 깔린 '동해학' 정립, 가칭 '해조류의 보존 및 산업진흥에 관한 법률' 제정과 함께 '동해인문아카이브센터' 건립이 절실합니다." 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김남일 본부장이 출간한 미역인문학.
[청년 장사꾼] 경주 칵테일바 '분' 최재광 사장…경주 최부잣집 13세손 美 이민후 귀향, 전통 가미한 21가지 칵테일 라인 만들다
경주 황리단길에 가면 색다른 칵테일 바가 있다. 상호는 '분(芬)'. 분황사 할 때 그 '분'이다. 바텐더 최재광(36). 이 집 사장의 지난 시절은 극과 극을 오간다. 경주최씨, 그 짱짱한 최부잣집 13세손이었다. 그런데 오랫동안 문중에 대한 인식이 미약했다. 할머니가 교동법주 가양주 기능보유자인 줄도 몰랐다. 17세 때 미국 이민 가서 34세 때 경주로 귀향한다. 밑바닥 기듯 17년간 생고생 해가며 칵테일 기능을 배웠다. 칵테일 전문가인 '바텐더'는 술이 아니라 맘을 쥐락펴락하는 자. 단골의 맘 상태, 생리적 특성, 재력, 인문학적 수준 등을 감안해 그날 상황에 가장 적합한 메뉴를 제안해 낼 수 있는 교섭력·눈치·감각을 겸비해야 한다. 늘 같은 것만 마시게 해선 안 된다. 그래서 그럴까, 진정한 칵테일은 술이 맘의 초점에 정확하게 포개진다. 미국에 처음 가서 샌디에이고에 있는 '민속촌'이란 한인 주점에서 알바 하고 LA 칵테일 바 '카퍼스틸' 에서 칵테일과 관련된 미국적 정서를 배웠다. 이에 앞서 싱글 몰트위스키의 대명사로 불리는 글랜피딕(Glenfiddich) LA지부 위스키 홍보대사까지 된다. 그러면서 야심이 생긴다. 1900년대 후반부터 암흑기로 접어든 크래프트 칵테일 문화를 부활시키고 싶었다. 금주법 이전 칵테일 황금 시기를 한국 버전으로 재현시키는 것이다. 그는 그걸 위해 분자요리부터 한국 전통주에 대한 안목도 넓혔다.그리고 그는 어느 날 바 컨설팅 전문가가 된다. 코로나 정국, 잃어버렸던 최부자 가문을 자각하게 된다. 2013년 그의 고향 집을 포함한 고향 교리 전체가 민속마을로 지정된다. 고향 집은 지금도 아흔두 살의 할머니가 살고 계신다. 200년 된 그의 고향 집에는 150년 된 탱자나무, 350년 된 모과나무가 있다. 극한 경쟁의 미국, 거기서 야무진 근육을 익혔다. 무스로 뒤로 넘긴 올백 머리, 윗단추 두 개를 풀어 놓은 흰색 남방, 꽝꽝하게 정돈 된 이목구비, 야성이 느껴지는 음성, 능란한 화술과 매너, 언뜻 영화 대부에 출연한 알파치노 느낌도 전해진다.지난해 12월31일 칵테일 바를 오픈한다. 그는 상호에 민감하다. 처음에는 '주도가(酒都家)'를 생각했다. 그런데 고향 집 맞은편에서 수제 된장을 파는 할머니가 유명한 동양화가 소산 박대성의 누님이란 사실을 알게 됐다. 그 인연으로 소산으로부터 현재 상호와 글씨 꼴을 받게 된다. 그는 가게를 리모델링 할 때 전통이 숨 쉬는 바로 빚고 싶었다. 그래서 고향 집 중문 대문을 바텐 용 나무로 활용한다. 칵테일을 만들 때 허브, 약재 등 다양한 매개물이 중요하다. 미국에선 정향 같은 서양스러운 약재, 경주로 와선 고향 집 탱자와 모과, 황기, 당귀, 홍삼, 감초 등 약 30가지 약재로 각종 청을 만들었다.그렇게 해서 그만의 21가지 칵테일 라인이 형성된다. 직접 양재를 이용해 담근 수제 진토닉, 계란 흰자를 머랭으로 친 뒤 복분자, 생강, 꿀 등 한국적 물성을 섞어 만든 블랙핑크, 20대 여성을 겨냥해 식용 비눗방울을 이용한 수박바, 진지함보다 즐거움과 재미를 주기 위해 10여 가지 향기를 뿜어내는 가스 향기 훈연 증폭기도 사용한다. 칵테일용 큐빅 얼음도 용도별로 5종을 사용한다. "정작 미국의 칵테일바는 우리의 소주방 같이 수더분한데 우린 너무 진지하고 힘이 들어간 것 같은데 저는 그 분위기를 펀하고 편하게 깨고 싶어요. 한국적인 게 세계적이라는 걸 절감하는 요즈음인 것 같습니다. ㅎㅎㅎ"17년 만의 귀향 칵테일, 최재광표 신토불이 칵테일의 신지평을 여는 웃음으로 여겨졌다. 월요일 휴무. 오후 5시 오픈. 글·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최재광 바텐더가 자신의 시그니처 칵테일인 블랙핑크를 내밀고 있다.경주스러운 칵테일 문화를 만들어나가는 칵테일 바 '분'의 입구 전경.
[이춘호 전문기자의 푸드 블로그] 한국인의 '소울푸드' 미역(2)...경북 바닷가 5개 시군 어촌계가 품은 해조류…밥상에 올라온 '푸른 생명의 맛'
삼국유사 '연오랑세오녀' 편에도 미역이 등장한다. 연오가 따던 해초 부분 원문은 '一日延烏歸海採藻(일일연오귀해채조)'이다. '海採藻(해채조)'는 연오랑세오녀 설화의 현장이라고 추정되는 포항시 동해면 임곡리의 바닷가 미역으로 특정할 수 있다. 미역은 각종 고문헌에서는 해채(海菜), 감곽(甘藿), 조곽(早藿), 해곽(海藿), 해대(海帶) 등 다양한 이름으로 기술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다양한 해조류를 최초로 기록한 책인 정약전의 자산어보 해초 부분에는 해조, 미역, 토의채(土衣菜), 김, 감태, 청각채(靑角菜)를 포함하여 총 35종의 다양한 해조류가 기록돼 있다. 과거에는 해초와 해조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았다. 지금도 일반인들은 해초와 해조를 혼용하고 있다. ◆해초와 해조류의 차이해중식물, 바다에 사는 식물 중 해초(海草·Seagrasses)와 해조(海藻·Sea algae)는 보통 사람들이 많이 혼동하여 사용하고 있지만 분류학적으로 완전히 다른 식물군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미역, 다시마, 김, 우뭇가사리, 감태 등은 모두 해조류다. 해조류는 바다의 먹이사슬에서 기초단위로 초식성 패류의 먹이가 되며, 소형어류는 다시 이들을 포식한다. 소형어류는 먹이사슬로 대형어류로 연결된다. 해초는 '바다풀'이다. 바다 식물 중 종자를 통해 번식하는 고등 식물이다. 잘 알려진 해초로 '잘피(거머리말)'가 있다. 잘피는 꽃이 피는 일반 풀과 같다. 다만 서식지가 얕은 바다라는 것이 다르다. 육지에서 바다로 간 동물이 고래라면 육지에서 바다로 간 식물이 잘피다. 우리나라 연안에 사는 잘피 종류로는 거머리말(잘피)이 가장 흔하며, 이를 포함하여 애기거머리말, 포기거머리말, 왕거머리말, 수거머리말, 새우말, 게바다말(말잘피), 줄말 등 모두 8종이 알려져 있었으나, 기후 온난화로 바닷물 온도가 올라가면서 아열대성 잘피인 해호말이 2009년 발견되어 모두 9종으로 늘었다.1990년 이래 매년 약 7%씩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잘피를 2016년 5월 이달의 해양생물로 지정하고, 매년 5월 10일 바다식목일에 잘피를 심는 등 해양생태계 보전 및 보호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해양수산부 산하 한국수산자원공단(FIRA)에서 해중숲 조성 등 관련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해조류 대표주자 미역미역이 속하는 해조류는 바닷말이라고 하는 녹조류·갈조류·홍조류를 일컫는 말이다. 전 세계에 1만 종 이상이 서식하고 있으며, 우리나라는 500종 이상이 밝혀져 있는데, 식품으로 섭취가 가능한 것은 50여 종이다. 일반적으로 표층으로부터 깊은 수심으로 내려가면서 바다 깊이에 따라 녹조류, 갈조류, 홍조류의 순으로 나타난다. '녹조류'는 가장 얕은 곳에 서식하며 녹색이다. 파래, 매생이, 청각, 청대 등이 여기에 속한다. 갈색 또는 흑갈색이며 중간 깊이에 많이 분포하는 '갈조류'에는 미역, 대황, 다시마, 톳, 감태, 모자반, 곰피 등이 있다. 붉은색을 띠고 가장 깊은 곳까지 서식하는 홍조류는 김, 꼬시래기, 우뭇가사리(한천), 갈래곰보, 세모가사리 등이다.이에 대한 내용을 총괄하는 아카이빙 센터가 있다. 국립해양생물자원관 해양생명자원통합정보시스템 (MBRIS)의 유용 해조류도감이다. 2015~2019년 해양국립공원 내 26개 주요 섬 조사를 통하여 얻어진 해조류 출현종의 수는 총 241종으로 녹조류 24종, 갈조류 54종 그리고 홍조류 163종이 확인되었다.홍조류인 김과 달리 세계적인 희귀종인 민물에 서식하는 민물김은 녹조류의 일종으로 분류된다. 민물김은 현재 세계적으로 우리나라의 삼척과 일본의 일부 지역(큐슈 지방)에만 서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월 지역(막골 계곡)에서도 서식했으나 탄광 개발 이후 완전히 멸종됐고, 삼척 지역(초당굴 하류)의 수확량도 급격히 줄었다. 강원도는 삼척시 등과 함께 민물김 복원 사업을 2011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했으며, 2012년 10월에는 민물김 서식지인 삼척 소한계곡을 생태·경관 보전지역으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국내 해조류 생산을 보면 미역, 김, 다시마, 톳, 파래의 순으로 미역이 1위이다. 1990년 대비 2008년 생산량의 증감 비율을 보면, 미역은 41%, 김은 120%, 다시마는 263% 증가한 반면, 톳은 15%, 파래는 20% 감소하였다. 특히 다시마 생산이 급격히 증가한 이유는 2000년대부터 전복 양식이 성공하면서 사료 수요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글·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미역인문학 집필을 위해 숱하게 경북 동해안 미역 채취 현장을 누빈 김남일(오른쪽) 본부장.
[이춘호 전문기자의 푸드 블로그] 한국인의 '소울푸드' 미역(1)...1970년대 양식 성공…가공식품에 첨가하며 수요 급증
한국인의 탄생과정에 가장 곡진하게 개입하는 음식은 뭘까? '미역'이다. 아이를 낳은 며느리를 위해 시어머니가 손수 미역국을 끓여준다. 미역국이 끓는 동안 시어머니는 연신 양 손바닥을 비비며 삼신 할매를 향해 치성을 드린다. 해산용 미역을 살 때는 가격을 깎지 않고 최상품만을 엄선한다. 그 미역이 바로 '산모곽'이다. 이 미역은 오직 산모만 먹을 수 있다. 시어머니는 삼칠일(21일간) 동안 외부인이 집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대문 앞에 금줄을 매단다. 부정(不淨) 타는 걸 우려했기 때문이다. 첫 미역 국물과 며느리의 초유를 반드시 굴뚝 안에 뿌려준다. 천지 기운을 선순환시켜보려는 그 시절만의 특별한 통과의례다. 이제 그 전통은 사라지고 없다. 그래도 미역은 건재하다. 현재 김과 함께 한국인의 밥상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얼마 전 각별한 책 한 권이 우송돼 왔다. 지은이는 김남일 환동해지역본부장. '공무원이 이렇게 전문적이고 디테일 있는 책을 내도 되나'란 독백을 해봤다. 직접 경북 동해안 어촌계 해녀와 동행하면서 미역 채취 현장에서 체험한 바와 미역 관련 사료를 바탕으로 적었다. 한국인은 미역의 민족. 수천 년 동안 섭취해왔다. 대중화된 것은 1970년대 미역 양식이 성공하면서부터. 특히 남해안을 중심으로 전복 양식이 보급되고 라면과 같은 가공식품에 미역을 첨가하면서 수요가 급증한다.현재 한국의 해양은 겉으로는 멀쩡한 것 같은데 실은 점차 고사 중이라는 게 과학자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특히 동해안의 해초와 해조류는 그 희소성 때문에 체계적으로 관리를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수도권과의 접근성이 좋아지면서 경관과 전망 등이 좋은 지역을 중심으로 대규모 리조트나 소규모 풀빌라와 브런치 카페 등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 전통 어촌문화 환경을 해치고 있다. 대규모 화력발전소나 항만개발로 연안 침식 또한 심각해지고 있으며, 기후변화의 지표인 해조류나 해초류가 사라지는 백화현상으로 인해 바다 사막화 현상이 상당히 진행되고 있기도 하다. 이참에 동해의 미역문화를 비롯한 해양유산을 재조명하고 체계적으로 기록할 필요가 있다. 그 흐름의 일단을 환동해지역본부가 감당하고 있다. 경북동해안 해녀인문학, 경북동해안 포구역사 및 바지게꾼들의 삶 등을 총서 형식으로 펴내고 있다. 경북 동해안에는 해양생태계와 어촌문화 공동체가 잘 보존되어 있는 지역이 많다. 특히 울릉도·독도에는 국제보호종인 '넓미역'과 동해특산종인 '대황'의 군락지가 있다. 울릉도의 연안 전체가 해양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있고 해마도 서식하고 있다. 독도까지 포함하면 세계적인 생태섬이자 해초류와 해조류의 생태적 보고이기도 하다.우리 민족이 언제부터 미역을 먹었는지 정확한 연대를 특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고구려 시대 이전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는 있다. 8세기 당나라에서 발간된 일종의 백과사전인 '초학기(初學記)'에 '고래가 새끼를 낳은 후 미역을 뜯어 먹은 뒤 산후의 상처를 낫게 하는 것을 보고 고려 사람들이 산모에게 미역을 먹인다'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 초학기는 8세기 초 중국 당나라의 서견 등이 편찬한 유서(類書·일종의 백과사전)로 30권으로 구성돼 있다. 정작 우린 미역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 미역의 어원은 뭘까?고구려에서는 우리 말 '물'을 '매(買)'라고 한자로 표현했다. 미역을 '여뀌'라는 풀과 비슷하다고 해서 '물여뀌'라는 의미로 '매여뀌'라고 불렀다. '매여뀌'에서 'ㄲ' 아래 모음이 탈락하면 '매역'이 되고 '매역'에서 모음변이가 일어나 오늘날 '미역'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또 다른 증거는 고문헌과 제주 방언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1527년 최세진의 '훈몽자회'에서는 미역을 '메역'으로 기술하고 있다. 제주도에서는 지금도 '메역'이라 부르고 있으며, 미역이 많은 '바당'(해녀들이 물질하는 곳)을 '메역바당'이라 부르고, 우뭇가사리가 많은 바당을 '우미바당'이라 부른다. 이를 종합하여 단순화시키면 다음과 같다. 매여뀌 → 매역 → 미역.미역의 연대기를 따라가면 한민족의 생활문화, 그걸 넘어 한식의 원류와도 상통하는 걸 알 수 있다. 지금도 미역을 생산하는 어촌마을마다 미역을 위한 다양한 민속문화가 멸실 되지 않고 현대인과 소통하고 있다. 그 흐름 속으로 들어가 본다. 글·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이춘호 전문기자의 푸드 블로그] 한국인의 '소울푸드' 미역(2)에서 계속됩니다.전남 진도, 부산 기장과 함께 한국 3대 미역 특산지로 유명한 울진군 북면 나곡3리 어민들이 채취한 미역을 건조장에서 말리고 있다.울진군 북면 나곡3리 미역 채취 광경. 〈환동해지역본부 제공〉
[이춘호 전문기자의 푸드 블로그] 젓갈 장인 김명수·김헌목 父子…동해안 '멸치젓갈' 반세기 가업…아버지와 아들이 지킨 경상도 젓갈 자존심
한국 젓갈 문화는 서·남·동해안별로 조금씩 차이가 있다. 서해안부터 전남 여수까지는 '젓갈권', 동남해안은 '식혜권'이다. 더 구체적으로 보면 서해안의 '새우젓', 서·남해안의 '밤젓(전어 내장 젓갈)과 토하(민물새우)젓', 그리고 동해안 감포를 축으로 한 '멸치젓갈'로 갈라진다. 서해안 젓갈은 반찬용, 동해안 멸치젓갈은 김장용과 액젓으로 나눠진다. 액젓의 경우 백령도 까나리액젓이 명 성을 갖고 있는데 이에 필적할 수 있는 동해안 액젓이 바로 경주시 감포읍에 있는 김명수 젓갈이다. 지난 20년간 해양수산명인은 모두 10명, 경북도 수산 명인은 단 한 명. 반세기 가업을 잇고 있는 김명수(84)·김헌목(49) 부자이다. 2020년 해양수산 신지식인 대상을 수상했고 최근 '젓갈 명인'에 선정된다. 김경용-김종호-김명수-김헌목으로 이어지는 이들 젓갈 명가는 한때 한국 멸치젓갈의 본산격인 감포읍 전촌리에서 경상도 젓갈의 자존심을 지켜내고 있다. 22세때 부친에 제조 기술 이어 받아 父는 경주 감포 본점, 子는 천북공장 국산 정제염 사용 600여t 액젓 담가 염도 측량 정확지 않으면 쉽게 부패 경상도서 선호 저염도식 꼬리한 액젓 멸치 잡는 겨울에 제조, 3년이상 숙성'K피시 소스 감포앤초비' 세계화 시동 ◆감포의 젓갈 명인아버지는 감포읍 본점, 아들 헌목씨는 17년 전에 증설된 천북 공장을 지키고 있다. 그는 96년 22세의 나이에 부친으로부터 멸치액젓 제조 기술을 전수해 왔다. 천북 공장은 '와이너리' 같다. 50t 숙성조 20여 개가 땅속에 묻혀 있다. 3~10년 묵힌 액젓을 보니 붉고 투명하다. 와인 빛깔이다. 취급하는 어종은 멸치·꽁치·정어리·고등어. 멸치는 매년 12월 초부터 2월 말에 매입하고 나머지는 5월에 모아들인다. 예전에는 천일염을 사용했는데 35년 전부터는 국내산 정제염을 사용한다. 지난해 600여t의 액젓을 만들었다. 정제염 4천 포가 사용됐다. 사용하는 멸치는 대멸이다. 일제강점기 감포 앞바다에서 잡힌 대멸을 일본 어부들은 '와다리'라고 했다. 이때 '감포멸치'는 프리미엄 급이었다.헌목씨의 증조부(김경용)는 일본인으로부터 '후리'라는 멸치 어획법을 배운다. 광복을 맞아 일본인 젓갈 공장을 인수하면서 가업이 시작된다. 증조부가 돌아가시고 대고모의 부탁에 못 이겨 1961년 부친(김명수)이 제2의 젓갈인생을 시작한다.◆염도 인문학젓갈은 '염도예술'의 산물이다. 특유의 꼬리한 맛이 나도록 젓갈을 만들려면 염도를 정확하게 측량해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부패해 버리기 때문에 염도의 정확한 측정이 매우 중요하다.김명수젓갈에서는 염도 10과 염도 14, 이 두 가지 염도의 멸치액젓을 생산하고 있다. 염도 10, 저염도 젓갈은 어떤 배경을 안고 태어났는가? 6·25전쟁 무렵 일부 가정에서 담그는 멸치젓갈만 저염도였다. 공장표 멸치젓갈의 염도는 대부분 염도 14를 훨씬 웃돌았다. 10도 염도의 꼬리한 저염도 멸치액젓은 특히 경상도 사람들이 좋아한다. 염도 14. 비린내가 거의 나지 않는 멸치액젓은 한국인이 가장 선호한다.김명수젓갈은 브랜드 파워를 가지려고 한다. 그래서 생각해낸 명칭이 바로 '감포앤초비'. 세계적인 멸치가공식품 중에 이탈리아, 노르웨이의 앤초비와 태국의 피시소스가 있다. 태국의 피시소스는 아미노산질소 2 이상이 되면 최고의 품질로 인정을 받는다. 우리나라에서는 1이 넘으면 멸치액젓으로는 합격을 받을 수 있는데 김명수의 멸치액젓은 2.2~2.3. 특히 뻑뻑이액젓은 2.4가 나오는데 국내 최고의 수치로 평가받는다.이렇게 치열하게 염도 관리를 하는 이유는 뭘까? 사건이 있었다. 어느 해 문제가 생겨 5t이나 되는 멸치젓갈을 다 버렸다. 염도 측정 시스템이 탄생한 계기가 된다. 감이 없으면 멸치 장사를 못 한다. 그래서 부친 성격은 유달리 까탈스럽고 치밀하다. 탱크에 젓갈과 소금을 넣는 일을 손수 감내한다. 로스터가 매일 로스팅 포인트를 체크 하는 것과 같다.젓갈 농사는 가장 맛있는 멸치가 잡히는 겨울철에 이뤄진다. 3년 이상 숙성이 원칙이다. 숙성과 발효의 과정을 거치면 자연스레 멸치에서 액이 나오는데, 살과 뼈를 분리해서 액젓을 생산하게 된다. ◆액젓 국제화를 향해제품을 다양화했다. 분말젓갈, 다시마어간장, 미역어간장, 뻑뻑이액젓, 고등어액적, 갈치뻑뻑이액젓….히트작은 '뻑뻑이액젓'. 멸치 40 꽁치 20 소금 20의 황금비율. 생선의 머리부터 뼈까지 통째로 갈아 만들었다.이젠 액젓 세계화를 위한 다양한 액션을 취하고 있다. 그들이 그려낸 브랜드는 'K-피시소스 감포앤초비'."이탈리아, 네덜란드 등을 여행하면서 올리브오일에 절인 서양식 멸치젓갈인 앤초비를 빵에 올려 먹거나 샐러드와 함께 먹는 것을 보는 순간, 유레카, 바로 이거라면서 탄성을 질렀어요."빵에 올려 먹거나, 스테이크와 함께 먹어도 맛있는 앤초비, 올리브 절임을 다진 올리브빠데 등 글로벌 테이블에 어울리는 근사한 멸치젓갈을 활용한 상품을 곧 출시할 모양이다. 글·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지난 20년간 해양수산명인은 모두 10명, 경북도 수산 명인은 단 한 명. 반세기 가업을 잇고 있는 김명수(84)·김헌목(49) 부자이다. 2020년 해양수산 신지식인 대상을 수상했고 최근 '젓갈 명인'에 선정된다. 김경영-김종호-김명수-김헌목으로 이어지는 이들 젓갈 명가는 한때 한국 멸치젓갈의 본산격인 감포읍 전촌리에서 경상도 젓갈의 자존심을 지켜내고 있다. 〈사진=김명수 젓갈 제공〉헌목씨가 천북공장 젓갈 숙성조에 담긴 액젓을 떠 보이고 있다.액젓용 대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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