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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춘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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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구로에서] 그러려니 전쟁!
우크라이나 출신으로 현재 한국에서 트로트 가수로 활동 중인 한 레오(본명 레오니드 두켈스키). 그가 지난 4일 대구 두류공원 야외음악당에서 열리는 '대구 톱 밴드 콘테스트'에 참가해 자국 국기를 흔들며 신곡 'No War'를 불렀다. 이쪽에서는 전쟁인데 반대쪽에서는 '공연'. 요즈음 전쟁이 갑자기 '특수 비즈니스'로 보였다. 펠로시의 대만방문으로 인한 중국의 무력시위, 북한의 습관성 핵실험, 우주 만한 유정(油井)을 공깃돌처럼 갖고 노는 산유국, 유대인의 곡물시장 주무르기, IT강국이 리더하는 新제국주의…. 사람들은 SNS로 중계되는 각종 전쟁을 대충 '그거려니' 하고 받아넘긴다. 사실 사이코패스적 범죄행위가 금세기 전쟁의 잔학상보다 몇 차원 더 섬뜩한 수위를 보인다. 핵폭탄을 전제로 한 선전포고. 정치적 액션, 아니면 엄포용? 자본이 '자살'보다 수위가 높으니 폭탄도 자본의 서자 아닌가. 21세기 전쟁은 삼국지 적벽대전처럼 명운을 건 전면전을 원치 않는다. 이념이 시시해졌기 때문이다. 지난 제국주의 시대 때 이미 세계 각국의 지하자원을 다 분석해 버렸다. 민족주의에 자본주의를 장착(제국주의)해 땅따먹기를 오지게 벌였다. 한때 영국은 세계 영토의 4분의 1, 60개 이상의 영연방을 형성했다.그런데 스마트폰이 등장하면서 오프라인을 전제로 벌이던 지상최대·절체절명의 전쟁이란 게 한물간 유행상품이 되고 만다. '몰살'을 전제로 한 지난 시절의 '악다구니 표 전쟁'도 수명을 다한 것 같다. 이념형 전쟁의 종언! 말하자면 후쿠야마식 역사의 종언 아닐까. 자본이 최고 승자가 된 거다. 타국을 학살하기보다 자국 상품을 사주는 소비자로 굴복시키면 끝이다. 경제 독점, 그게 '현대판 학살'이다. 물론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은 좀 다른 비극이겠지만.아무튼, 이제 한국은 엄청난 나라다. 한국이 곧 세계랄 수 있다. 먹이사슬로 다 연결된 탓이다. 세계 9위권 무역대국인 한국이 초토화된다면? 지구촌 무역망이 치명상을 입게 된다. 그러니 북한이 한국을 막가파식으로 치기 어렵다. 한국을 침공? 1950년대 한국 경제라면 망해도 그만이다. 그런데 미국과 견원지간인 중국과 소련 때문에 안 망했다고 볼 수 있다. 지금 한국의 수출·수입품은 열강과 생사고락을 함께한다. 한국 문제가 곧 열강의 문제다. 그게 한국의 행(幸)이자 곧 불행이다.예전 전쟁은 너무나 아비규환, 그리고 암울했다. 비장·장렬했다. 비분강개였다. 하지만 지금 전쟁은 군인보다 화력의 각축장이다. 그래서 전쟁은 목적적이지 않고 다분히 '수단적'이다. 전쟁이 '장식품', 하나의 '핑계' '제스처' '마케팅' 같다. 라이브공연 같은 전쟁도 다반사다. 관계망에서 조금 멀어진 시민들은 쇼핑도 하고 파티도 벌인다. 일촉즉발, 권토중래, 와신상담…. 그런 버전의 지난 세기의 전쟁을 소환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면? 최전선 돌격대보다 더 강렬한 절벽정신으로 주야 불문, 신호등까지 무시하며 초 단위로 거리를 종횡무진 중인 저 배달족에게 이런 질문을 해보라. "북한이 쳐내려오면 어떻게 하죠?" 그들은 "저희야 감쏴하죠. 싹 다 망하면 어쩜 이 짓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도 있으니…." 여름휴가의 말미, 잠시 더위 먹은 전쟁 이야기를 소환해 봤다.이춘호 주말섹션부장 겸 전문기자이춘호 주말섹션부장 겸 전문기자
[人生劇場 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죽궁 명인 월재 김병연(2)...나전칠기와 죽궁 조합 '나전죽궁' 개발…국제적 반향도 일으켜
그 무렵, 난 10년째 대구에서 죽궁이란 장르를 갖고 청소년 인성교육 및 관광 체험 관련 일을 하고 있었다. 사부는 자신이 젊은 시절 갖게 된 한국 전통 활 중 하나인 '죽궁'을 보여주었다. 양궁과는 확연히 다른 모양이었다. 현재 카본 소재의 양궁이 대세여서 각궁의 존재를 아는 이는 극히 드물다. 다들 양궁을 각궁으로 착각하기도 하는 게 현실이다. 지금 내가 취급하는 죽궁은 각궁의 변형태다. 각궁을 위한 재료 수급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각궁은 습기에 너무 약하다. 물에 들어가면 2시간 내 해체돼 활의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재료 확보가 너무 어렵다. 소뿔은 동남아, 힘줄은 중국에서 수입된다. 국내에서는 제대로 된 소의 힘줄을 찾기 어렵다. 식용으로 한우가 해체되기 때문에 30㎝ 이상 되는 게 없다. 사부는 머잖아 중국에서 생산되는 힘줄도 사라질 거라고 경고했다. 사실 각궁은 한국만의 것도 아니다. 전 세계에 퍼져 있다. 3천년 전 이집트 벽화에도 각궁이 등장한다.대구는 조선시대부터 '활' 제작 기록궁장 결심…'판로 막막' 주변서 만류화살촉이 왼손 관통하는 불상사도첫눈 온 뒤 1월 대나무가 가장 단단완성품 나오기까지 2년간 힘든 여정모든 것 쌓은 공방 화재, 다시 시작내년 피렌체 엑스포서 참여 초대장◆끼는 타고났다사부를 만날 때 좀 어설프지만 내가 만든 죽궁도 보여주었다. 자신은 활을 잘 쏘지만 만드는 능력은 내가 더 낫다고 칭찬했다. 그때 내 나이 마흔 초반. 갈 길이 분명해지는 것 같았다. 신토불이 각궁을 재현해 보고 싶었다. 우리나라는 활의 민족인데 현실은 그게 아니었다. 죽궁을 체계적으로 만들 사람이 없었다. 유럽조차 활의 전통이 사라졌다고 한다. 시대성과 상품성이 없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급식사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업보다 활이란 사명이 더 절실했다. 그런데 내가 활 인생으로 갈 수밖에 없게 쐐기를 박는 얘기를 사부한테 듣게 된다. '대구가 조선 시대부터 활을 만들었던 도시'라는 정보였다. 그건 내게 적잖은 충격의 정보였다. 결정적인 사료가 필요했다. 실증적 기록을 찾아 대구를 국제적인 활의 도시로 알리고 싶었다. 막상 찾으려고 하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모든 게 불분명했다. 무작정 지역의 여러 고서점 등을 훑고 다녔다. 그러다가 한국 고전 DB를 알게 된다. 검색창에 '대구 죽궁'을 치니 조선왕조실록에 해당 구절이 산신령처럼 나타났다. 효종실록 6년(1655) 2월6일에 내가 그토록 목말라하던 구절이 보였다. '특명으로 대구부사 이정을 통정계(通政階)로 높였다. 본 도의 병마절도사가 본 읍의 군기를 검열하고서 새로 만든 죽궁의 제도를 계문하니 특별히 칭찬하는 명이 있었다.'◆궁장, 그 힘든 결심결심하기까지 2년이 걸렸다. 주위 모든 사람이 만류했다. '활의 판로가 막막하다'는 걸 경계하는 것이었다. 일단 전통활쏘기 청소년 인성교실을 만들고 싶었다. 당시 중고생들의 연이은 자살·왕따 뉴스가 흘러넘쳤다. 활을 통해 아이들의 맘을 치유해 주고 싶었다. 교육청, 학교 등을 직접 외판원처럼 순회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퇴짜의 연속이었다. 북구 칠곡 매천고에서 관심을 보였다. 그렇게 해서 2009년 대구 첫 죽궁 학생동아리가 결성된다. 그해 10월 천안에서 세계 민족궁 활쏘기대회가 열렸다. 3명을 뽑아 6개월간 강훈련을 시켰다. 놀랍게도 손양업군이 2위를 차지한다. 이 사실이 언론에 대서특필된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아리랑 사법'을 개발했다. 나는 모든 동작을 매뉴얼로 만들기 위해 국악부터 파고들었다. 그 일환으로 단소도 배우고 내친김에 제작까지 했다. 국악 연주곡 '토로'(홍경림 작곡)란 곡에서 큰 영감을 받았다. 그 곡에 5천년 한민족의 활의 정신을 담아내고 싶었다. 전체 20개 동작을 5분20초에 공연할 수 있게 치밀하게 안무를 했다. 그게 한국 활의 세계화, 그 일환이라 여겼다.◆최종 병기 화살, 편전의 세계이 과정에 '편전'이란 가공할 만한 위력의 전통 화살에 대해서도 알게 된다. 이건 다른 것보다 짧다. 30~40㎝. 그 시절, 아무나 사용할 수 없었다. 궁사 중에서도 엄선된 자만 쏠 수 있었다. 우리 각궁 중에서 가장 멀리(200m 이상) 날아가고 살상력 또한 엄청 높다. 말하자면 '저격용 화살'이랄 수 있다. 13년 전 충주에 살고 계신 화살 장인 양태현을 통해서 편전을 알게 된다. 그에게 만드는 법을 가르쳐달라고 간청했다. 그도 내 열의에 공감, 기꺼이 가르쳐 주었다. 나는 북구 칠곡 3지구 벌판에서 맹연습에 돌입했다. 하지만 불상사가 생겼다. 화살촉이 내 왼손을 관통하고 말았다. 하지만 지역에서 내가 처음 편전을 잡았다는 자부심 때문에 아픈 것도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 이후 편전 사법을 현재 공군 부사관으로 있는 내 딸 등 모두 6명에게 가르쳐주었다. ◆죽궁을 관광상품으로 개발팔공산에 나만의 죽궁공방을 차렸다. 권영진 전 대구 시장에게 '대구가 활의 도시임'을 알려주었다. 직접 권 시장이 내 공방을 찾아 죽궁 제작과정을 지켜보기도 했다. 이후 대구시 자매도시 일본 히로시마에 죽궁을 기증하게 된다. 내 활이 세계 무대로 나가는 순간이었다.이후 21개국 주한대사 등 외국인을 대상으로 아리랑 사법 시연과 향사례(鄕射禮) 전통활쏘기 체험을 진행했다. 중국의 향사례는 주나라 향태부가 3년마다 어질고 재능있는 사람을 왕에게 천거할 때 행해졌던 활쏘기 의식인데 춘추전국시대 때 사라졌다. 당시 한국관광공사 김용재 대구·경북권 협력단장이 '관광상품용 죽궁'을 개발해달라고 했다. 그래서 2014년 나전칠기죽궁에 도전한다. 이건 너무나 어려운 기법이다. 활에 나전을 붙여놓으면 금세 떨어지기 때문이다. 어렵사리 수성구의 한 옻칠 장인을 만나게 됐다. 기념비적인 나의 첫 나전죽궁은 대구시에 기증된다. 그 뉴스를 접한 홍콩의 한 IT회사 CEO가 2개를 주문했다. 유레카, 그리고 오호쾌재의 날이었다.◆척박한 땅의 대나무를 찾아라활을 위한 대나무는 조직이 치밀해야 한다. 1년 중 첫눈 온 뒤 1월 중 대나무가 가장 단단해진다. 밑에서 3m까지 부위만 사용한다. 모두 100여 공정이 있다. 대나무는 4~6 등분하고 그걸 60~70㎝, 30~35㎝, 14~15㎝ 크기로 잘라준다. 그걸 잘 잇대야 한다. 활대의 중심부는 엄청난 내구성이 요구되기 때문에 40㎝ 대나무, 그 위에 마디가 있는 대나무(13~15㎝), 맨 위에 물푸레나무(20㎝), 그렇게 3단으로 붙여야 한다. 완성품이 나오려면 얼추 2년이 넘어야 한다. 유통이 잘 될 리 없다. 그냥 사명감으로 버티기에는 한 가장으로선 너무 힘든 과정이다. 미치거나 운명이어야 장인의 길을 감내할 수 있다.◆2018년 공방 소실아아, 어쩌란 말이냐~. 세계 첫 나전죽궁으로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전통활쏘기에 대한 강연은 물론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 문의 요청이 쇄도했다. 쥐구멍에 볕이 드는 줄 알았다. 웬걸! 2018년 4월 어느 날 오전 1시, 팔공산 내 공방에 화재가 발생한다. 내 옆집의 한 뜸집에서 발생한 불이 공방으로 옮겨붙은 것이다. 주문을 받아놓은 250여 개의 활이 전소된다. 나전죽궁까지, 시연할 때 입는 전통의복까지 잿더미로 변한다. 현장에 도착한 나는 불 속으로 뛰어들 심산이었다. 내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이니까. 아들과 소방관이 격하게 만류했다. 나는 그 현실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몽유병 환자처럼 가산산성까지 걸어갔다. 3일간 식음을 전폐했다. 얼빠진 김병연이었다. 3일 뒤에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주저앉는 날 보고 형이 분노했다. 여기서 무너져선 안 된다고.나는 무에서 다시 시작해야만 했다. 그래, 죽으란 법은 없었다. 당시 북구청 고모 과장이 자기 일처럼 안타까워했다. '당신은 대구가 아니라 한국의 보물이다. 조금만 참아라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고 했다. 그가 재기의 발판을 만들어주었다. 각 동장에게 수소문해서 공방이 들어갈 만한 공간을 찾아다녔다. 북구 관음동의 한 창고가 나왔다. 거기서 2년 정도 있다가 최근 북구 연암 서당골문화센터에 내 공방을 마련할 수 있었다. 토요일에는 활을 배울 수 있다. 죽궁전시실에 오면 나전죽궁도 볼 수 있다.올해 '파워풀 대구페스티벌' 때 죽궁 진상행렬을 재현했다. 그리고 올해 너무 감격스러운 러브콜이 들어왔다. 이탈리아 피렌체시에서 죽궁에 관심을 보이며 '2023 피렌체 국제 엑스포'에 참여할 수 있는 초대장을 보내왔다. 내년 2월6일 출국, 9일간 대구여성국궁시범단을 대동하고 현지에 가서 대구가 활의 도시임을 알리고 아리랑사법 시연 및 죽궁에 관련된 모든 내용을 알릴 것이다. 글·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 궁장 김병연은15년 전 죽궁에 입문했다. 2009년 대구 첫 죽궁 학생동아리가 결성. 2015년 '나전칠기죽궁'을 개발해 국제적 반향, 이 때문에 KBS '한국의 창조적인 장인'으로 선정, 11개 국어로 방송. 2021년 대한민국 공예대전 특선. 한국 활 장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내년 2월 이탈리아 피렌체시 초청으로 '2023 피렌체 국제 엑스포'에 참여, 죽궁 시연 및 제작과정을 소개할 예정. 올해 '파워풀 대구페스티벌' 때 죽궁 진상 행렬을 재현했다. 현재 향사례 대구시범단과 대구 여성국궁시범단 단장.김병연 궁장이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나전죽궁을 흐뭇한 표정으로 보여주고 있다.대구와 죽궁과의 관계를 입증해 주는 조선왕조 효종실록 1655년 2월6일자 기록 중 일부.올해 거행된 파워풀 페스티벌에서 재현된 죽궁 진상행렬.현재 그의 작업실은 북구 연암 서당골문화센터 공방에 있다.
[人生劇場 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죽궁 명인 월재 김병연(1)..."내 제2삶의 화두는 '죽궁의 도시 대구' 만드는 것"
활(弓). 펼치면 하나(一)로 화평하게 열리지만 힘과 힘이 갈등을 빚어 서로의 명줄을 겨누기 시작하면 생사(生死)를 가를 수 있는 변화난측한 파워를 뿜어내게 된다. 대나무, 물푸레나무, 소의 뿔과 힘줄 그리고 민어의 부레풀 등이 햇살과 바람 그리고 화기(火氣)가 한데 뭉쳐져 가공할 만한 장력을 얻게 된다. 아주 오래전, 활은 단순한 무기가 아니었다. '수신(修身)'의 수단으로 진화를 하게 된다. 궁사는 단순히 물리력만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체력으로는 '무관', 맘으로는 '문관'의 혜안을 겸비해야만 했다. 활은 문무(文武)를 하나로 묶어 주었다. 활은 그 시절, 최첨단 미사일이었다. 칼보다 더 치명적이었다. 모든 장수에게는 필살기 무기였다. 이성계, 이순신…. 누대에 걸쳐 명궁과 신궁이 속출하고 그 용담(勇談)은 인구에 회자된다. 세종실록에도 '열 살 이상의 남자들은 항상 활을 가까이하여라'란 구절이 있다. 활을 잘 쏘는 민족, 우리 한민족은 '동이족(東夷族)'으로 불렸다.총이 등장하면서 활의 용처도 급락할 수밖에 없었다. 총이 활의 기세를 압도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활의 위상이 크게 변한 건 아니었다. 활과 총은 핵폭탄과 각종 폭탄이 등장하면서 역사의 후면으로 사라지고 이제는 하나의 스포츠 종목으로 진화를 했다. 어느 날부터 활이라 하면 '묻지 마 양궁'이었다. 양궁이 대한민국의 모든 활의 역사를 대변하는 건 아니다. 우리는 양궁만으로 다 설명할 수 없는 활의 유구한 전통과 비술(秘術)을 간직한 나라였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를 넘어오면서 그 명맥은 거의 사라져버린다.나는 달구벌의 죽궁 명인인 월재(越才) 김병연이다. 방랑시인 김삿갓과 동명이다. 그래서 그런지 내 인생은 늘 '유빙(流氷)'처럼 떠돌았다. 뭔가 될 듯한 대사(大事)도 한순간에 폭락해 버렸다. '한숨 반, 눈물 반'으로 얼룩졌다. 어머니는 히로시마 원폭 피해자였다. 46세 때 나를 낳았다. 한 작명가가 병연이란 이름이 별로라고 귀띔했다. 그가 내민 이름은 김병수였다. 모친이 돌아갈 때까지 난 김병수로 살았다. 14년 전 법원에 가서 개명 절차를 거쳤다.내 몸속에는 상당한 수준의 기계공학 기술을 갖고 있었던 아버지의 유전자가 스며들어 가 있다. 1940년대 후반, 대구에서는 처음으로 선반 등 기계를 전문적으로 제작하는 '신생공업사' 공장장이 된다. 호경기 때는 거느린 직원만 800여 명. 아버지는 쇳덩어리로 못 만드는 게 없었다. '미다스의 손'이었다. 일본에서 귀국할 때 일본 현지에서 자신이 사용하던 고급 연장을 갖고 들어왔다. 그 무렵 한국은 농업사회였다. 2차 산업 인프라는 전무한 상태였다. 아버지의 탁월한 기술력은 자연 타인의 부러움을 살 수밖에 없었다. 국내 선반 기술자 1호랄 수 있는 아버지는 60년대 이미 자동화 시스템을 생각했다. 최강 공구 거리인 북성로의 오늘을 있게 한 재원이었다. 공업사 한쪽에 용광로까지 구비 해 놓았다. 그걸 이용해 선철, 단조, 철판 등 다양한 철물을 만들 수 있었다. 아버지는 거기서 파생된 침산동 대광공업사, 원대동 고려산업사 등에도 간여를 한다. 그 기술력 때문에 자동 볏짚 절단기, 심지어 국내 첫 냉동탑까지 제작하게 된다.아버지는 틈틈이 나를 위해 활을 만들어주었다. 그 활은 내겐 최고의 장난감이었다. 툭하면 골목에서 활쏘기 놀이를 했다. 하지만 나는 생업 때문에 오래 활을 잊고 살았다. 그런데 2006년 시작된 MBC 인기드라마 '주몽'이 날 일깨운다. 골목마다 '내가 주몽'이라고 외쳐대는 개구쟁이들이 폭증한다. 하루는 아들이 나더러 활을 만들어 달라고 했다. 갑자기 예전 내게 활을 만들어 주던 그 아버지가 생각났다. 갑자기 식은땀이 흘렀다. 한 방 얻어맞은 것 같았다. 누군가가 내게 '병연아, 너 지금 뭘 하느냐'고 선몽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활 명인을 수소문했다. 달서구에서 주모 명인을 어렵게 만날 수 있었다. 글·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달구벌 죽궁 명장인 김병연. 그는 한국 고유의 활이랄 수 있는 각궁의 기능을 전승한 나전칠기를 이용한 나전죽궁을 국제 무대에 선보여 '한국의 창조적인 장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2006년부터 죽궁 제작자의 삶을 살기로 한 그는 한때 팔공산 죽궁 공방 전소로 망연자실했지만 주위의 도움으로 재기를 했다.
[시대별 변화하는 선어골목] 좌판형→포차→초밥집→전문점 진화…대형선어로 부위별 저며 낸 모둠형태 인기
선어집도 진화를 거듭한다. 어시장에서 태어난 '회무침선어집', 다음은 규모를 가진 횟집에서 전문적으로 선어만 파는 형태, 이어 부산국제영화제 등으로 관광객이 몰려들자 이들을 겨냥한 다양한 바닷가 '선어포장마차', 일본 영향을 받은 '초밥집 선어', 그리고 고급스러운 대형 선어 전문점, 이젠 선어와 활어를 절충한 신개념 선어집도 생겨나고 있다. 생선회 전문강좌를 만든 조영제 부경대 교수는 활어와 선어회의 절충식인 '생생회'란 개념을 제시한다. 활어는 식감은 좋은 반면 감칠맛이 부족하고 대신 선어회는 감칠맛은 좋은 데 씹힘성이 부족한 걸 감안, 둘의 장점을 고루 맛보게 만든 것이다. 보통 활어를 그날 6~8시간 숙성시켜 내는 형태이다.요즘 가장 비싸고 핫한 충무동 '선어마을'은 돗돔 같은 대형 선어만 부위별로 저며 모둠 선어회 형태로 낸다. 제대로 먹으려면 한 접시 10만원을 내야 한다. 그리고 부산 서구청 근처 '용광횟집'도 부산의 대표적 선어집이다. 거기서 '오징어통찜'이 개발됐다고 한다. 밤에 그 집을 찾았다. 흰살 생선인 도다리·농어·광어가 나왔다. 그날 충분히 숙성시킨 탓인지 즉석 활어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풍미가 전달됐다. '이래서 다들 선어 선어 하는구나'라고 독백했다. 자갈치 시장 여인숙 골목도 선어골목으로 유명하다. 20~30년 전 원양어선 등 장기 출항을 하던 선원들이 임시로 머물던 여인숙이 지금도 옹기종기 모여 있다. 그들의 까다로운 식성을 알아서 잘 챙겨주는 선어집이 하나둘 생겨난다. 거제선어, 남이네, 포항, 삼천포, 김해, 순자네 등이 지금까지 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영도 '달뜨네'는 후발주자로 시메사바(고등어초회) 전문점으로 유명해졌다. 이밖에 자갈치시장 내 '명물횟집' 등도 핫하다. 글·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부산 선어문화의 원형을 보여주는 충무동 새벽시장 내 어물전 중심부. 거기에 동환할매집 등 몇몇 선어집이 이마를 맞대고 앉아 있다.
[이춘호 전문기자의 푸드 블로그] 선어 이야기, 숙성한 감칠맛 즐기는 선어회…대구는 미주구리 무침회가 별미 술안주 인기
세계에서 가장 회(膾)를 좋아하는 두 국가가 있다. 단연 한국과 일본이다. 중국은 그걸 좋아할 것 같은데 전혀 반응이 없다. 한국은 활어권, 일본은 선어권이다. 일반인은 활어와 선어의 차이를 잘 모른다. 수족관에서 살아 있는 건 '활어', 그 대척점에 있는 죽은 상태의 생선이 바로 '선어(鮮魚)' 다. 어종 크기 따라 숙성 일수도 차이 여수 선어문화 부산 생선가게 영향초장으로 버무린 회무침·회국수 먼 항해 지친 선원 입맛 사로잡아식감보다 특유의 풍미·꼬린내 선호 부산서 40년 구력의 '동환할매집'단골 입맛 꿰고있는 1세대 선어집낮술 한잔에 선어 한 접시로 발길활어와 선어 사이에 놓인 게 '빙장어(氷藏魚)'이다. 선어와 빙장어를 혼동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선어는 잡는 즉시 죽여 피를 완전하게 제거한 뒤 냉장숙성한 것이다. 빙장어는 죽은 상태에서 유통되는 것이라서 쉬 부패할 가능성이 높다. 선어는 당일치기의 경우 즉석에서 피를 제거해야 된다. 한국에서는 아가미 중앙(심장)을 찔러 흐르는 물에 씻거나 해수에 담가놓는다. 일본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이케시메'라고 해서 생선의 양미간에 송곳을 깊숙하게 찔러 넣고 그 구멍 속에 철사를 넣어 사방으로 돌려 척수를 관통해 신경을 마비시키면서 핏물을 제거한다. 당연히 일본에는 활어를 위해 수족관을 운영할 필요가 없다. 선어회는 숙성이 핵심이다. 숙성 일수가 어종마다 차이가 많이 난다. 삼치, 병어, 다랑어 등 푸른 생선과 몸집이 작은 생선은 숙성기간이 상대적으로 짧다. 광어, 다금바리, 돗돔 등 흰살 생선과 대형 어종은 기간이 길다. 삼치와 병어 등은 대략 반나절, 심해어인 돗돔은 열흘까지도 숙성시킨다.◆선어, 제2의 풍미지금 우리나라는 죽은 생선은 똥값이다. 하지만 일본의 국민 횟감인 참치는 오직 선어로만 존재한다. 4~10일 저온 숙성을 시킨다. 싱싱한 생선은 즉살해 잘 숙성시켜 제2의 풍미를 만들어낸다. 그래서 일본의 스시 집에는 수족관이 필요 없다. 우리나라 같으면 필수인 장거리 이동하는 수조차도 사용할 기회가 거의 없다. 얼음과 냉장고, 수족관, 수조차 등이 없었던 시절에는 살아 있는 생선을 즉석에서 먹는다는 건 선원 이외의 사람에겐 언감생심. 대구, 조기, 갈치, 삼치, 꽁치, 청어, 명태, 돔배기, 홍어, 고래고기, 고등어, 문어, 아귀, 참돔…. 70년대만 해도 대다수 생선은 선어류였다. 묵나물처럼 죽은 생선을 좀 더 오래 두고 먹기 위해서 별별 아이디어를 다 동원했다. 그중 하나가 소금 간독에 생선을 묵혀놓는 것이다. 소금·된장·고추장·간장독은 그 시절 괜찮은 냉장고였다. 그 과정에 염장 된 다양한 젓갈과 자반 생선류가 태어난다. 당화되는 쌀 등의 전분류를 이용해 식해류도 해 먹었다. 대표적인 게 가자미식해, 영덕 강구항의 밥식해(홍치 식해) 등이다. 그런 식해의 연장에서 태어난 게 일본 '후나(붕어)스시'다. 내장과 피를 말끔히 제거한 뒤 해풍에 말려 건어물로 판매하기도 했다.전남 여수에도 진남루 바로 인근 골목에 선어회 골목이 있다. '희망선어'가 터줏대감 격이랄 수 있다. 이 문화가 부산 선어회에 영향을 미친다. 부산의 웬만한 생선 가게마다 사각형 유리함에 얼음과 생선을 채워놨다. 대구의 경우 미주구리(물가자미)가 선어회 형태로 강구항부터 대구권으로 확산했다. 불로동과 반고개 무침회 그리고 도심 곳곳에 있는 미주구리 무침회가 별미 술안주로 인기를 얻고 있다. 목포~신안권은 민어와 병어 그리고 흑산도~나주권은 단연 홍어가 대표적인 선어다.◆수족관이 변곡점이었다세상 참 많이 좋아졌다. 최첨단 냉동 운반기술 덕분에 활어를 원거리로 이동할 수도 있었고 횟집 수족관에 풀어놓고 활어 회로 팔 수도 있게 된다. 우리나라의 경우 1990년 초부터 '선어시대'에서 활어 시대로 건너온다. 선어시대 때는 항상 식중독이 문제였다. 꾼들 사이에 나돌던 그 '아다리'에 잘못 걸리면 목숨을 잃기도 한다. 특히 요즘 같은 하절기에는 비브리오 패혈증 등이 생선 마니아를 노린다. 부둣가 뒷골목 식당가. 초입에 들어서면 초장 냄새가 진동을 한다. 주인들은 상비약처럼 식초에 고추장을 섞은 초장을 갖고 당일 어판장에서 헐값에 사 온 선어로 회무침을 해준다. 여느 포구의 식당가에는 초장문화가 짙게 스며들어 가 있다. 가장 활성화된 항구는 부산이다. 자갈치시장 속을 파고들면 올망졸망 따개비처럼 박혀 있는 묵은지 같은 선어식당 군을 만나게 된다. 먼 항해에 지친 선원들의 입맛을 사로잡는 술안주 같은, 때론 한 끼 반찬이 되는 선어가 메인 메뉴로 등장한다. 광복동 회국수의 명가로 발돋움한 '할매집'의 유명 고명인 가오리도 부산 선어문화의 한 흐름을 장식한다. 그 회국수 때문에 비빔당면도 파생된다. ◆저마다 창법이 다른 선어들목포, 여수, 통영, 삼천포, 부산, 포항 등 국내 큰 항구마다 선창 토박이들은 저마다 선어를 맛있고 안전하게 먹는 비법을 지니고 있다. 선어의 경우 된장과 초장을 적절하게 잘 섞을 줄 안다. 하지만 왜간장과 고추냉이 등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본바닥의 기운이 아니라 일반 소비자를 겨냥한 양념이라 여기는 것이다. 그들은 특이하게 당일 잡은 싱싱한 활어회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씹힘성이 중요하지 않다. 선어 특유의 풍미, 그리고 '꼬린내'를 갈구한다. 기자는 지난주 부산 자갈치시장 주변 '선어문화벨트'를 살펴보고 왔다. 부산 전역은 밀려드는 관광객으로 인해 점차 활어문화권으로 건너가고 있지만 여전히 심층부에는 선어꾼들의 이야기가 맥동 치고 있다. 지하철 자갈치역 2번 출구로 나오면 연결되는 충무동 해안시장, 새벽시장, 그리고 여인숙 골목, 그 심장부에 도열해 있는 별별 생선가게, 다 냉동된 걸 해동 시켜 선어 상태로 판다. 바로 거기에 40년 구력의 '동환할매집'이 있다. 동환집 좌우로 수야집과 할매손맛이 있다. 올해 86세의 김영자 사장. 손자 이름을 가게 상호로 정했다. 그날 빙장 되고 있는 어종은 딱 하나, 병어였다. 한창때는 수십 가지 그날 선어를 초장에 무쳐 냈다. 얼음 위에 올린 이 선어를 이 바닥에서는 '빙장회'로 부른다. 어떤 경우는 경매사, 선원 등이 가져온 생선을 바로 장만해 그들이 원하는 형태로 안주를 만들어낸다. 주문자 생산방식의 선어집이었다. 이게 초창기 회무침 형태의 선어시절이었다.그런 집이 하나둘 늘어났다. 관광객은 그런 데를 알 수 없었다. 설령 온다 해도 분위기가 너무 꼬릿하고 폐쇄적이고 우중충해서 다들 기겁하고 핫플 횟집으로 갈 것이다. 오직 뱃사람만의 '선어공동체'였다. 가게 주인들은 단골의 입맛을 훤하게 꿰고 있다.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에 나오는 바로 그 선창의 분위기였다. 이젠 새로운 스타일의 선어집이 많이 생겼다. 겨우 자리만 지키고 있는 정도다. 동환 할매도 돈이 목적이 아니다. 그냥, 소일 삼아 여기로 나온다. 그래도 아직 이 바닥 뱃사람들에게는 '낮술 한잔에 선어 한 접시'로 유명한 1세대 선어집이다. 글·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충무동 '선어마을'과 함께 부산의 선어문화를 지켜나가고 있는 수족관 없는 서구 보수동 '용광횟집'의 선어.동환할매집의 대표 메뉴인 병어 선어.40여 년간 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동환할매집의 김영자 사장.부산 만의 고등어 선어문화의 결정판인 시메사바(고등어초회). 영도의 '달뜨네'가 대표주자.
[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김영복·이춘호 '한식 삼천리'] 민어(2)...부위별 다른 소스·양념, 12가지 맛 '즐거운 음미'
목포에는 민어 전문점이 여럿 있다. 삼화, 포도원, 하당 옥정, 골목, 민어나라, 대성, 용당골, 청자, 풍어관, 중앙, 영란 등이 눈길을 끈다. 홍어는 그래도 전국으로 많이 흩어졌는데 아직 민어만은 목포권에 와야 제맛을 느낄 수 있다. 대구도 최근 슬금슬금 민어타령을 읊으려 하는 것 같다. 사실 대구에서는 민어란 어종을 제대로 아는 식도락가를 찾기조차 어렵다. 그런데 달서구 죽전동 '만덕횟집'은 특이하게 선어가 아니라 현지에서 활어 상태의 민어를 공수해 와 팔고 있다. 아무튼 목포의 웬만한 식당에서도 미리 주문하면 맛있게 먹도록 민어를 잘 장만해준다. 50년간 영업 딸이 가업, 목포 영란횟집 비법 담긴 막걸리초장에 푹 찍어 먹어 별미 반찬 한상…토박이 찾는 용당골 일제강점기 시대 최대 어장 임자도'부욱~' 짝 부르는 소리내는 큰 부레 내장-젓갈, 알-어란·찜, 부레-횟감 밥 싸먹다 논 팔았다는 맛 민어 껍질 남은 뼈는 푹 고아 맑은 탕으로 끓여◆목포는 민어다관광객에게 가장 많이 노출된 식당은 '영란횟집'. 기자는 이번 민어기행 전, 5년 전에 숨은 미식가 중 한 명인 최기동 목포시의원의 안내를 받아 그 가게에서 민어회를 맛본 적이 있다. 물컹한 영남권 활어회에 길든 내게 졸깃하면서도 떡 져 보이는 민어 육질은 매년 하절기만 되면 내 미뢰를 사정없이 강타하곤 했다. 영란횟집은 1969년 문을 열었다. 2014년 작고한 1대 여사장 김은초에 이어 맏딸 박씨가 가업을 이었다. 여기 오면 민어 요리의 기승전결을 다 맛보게 해준다. 민어 살은 쑴벙쑴벙 투박하게 썰어 양배추 위에 얹어 낸다. 세 종류의 장(된장·간장·초장)이 회를 에워싼다. 회는 이 집만의 비법이 담긴 막걸리초장에 푹 찍어 먹어야 된다. 하지만 워낙 전국구 맛집이다 보니 관광객으로 흘러넘친다. 토박이는 요즘 덜 붐비는 '용당골' 등으로 간다. 우리도 거기로 갔다. 메뉴판을 봤다. 민어 코스 요리가 10만원이다. 회, 초무침, 전이 세트로 나온다. 이밖에 병어회와 병어찜 그리고 병어와 비슷하게 생긴 '덕자'도 회와 찜으로 맛볼 수 있다. 더 감동은 게미가 진동하는 별미 반찬이다. 이건 대구에서는 절대 맛볼 수 없는 포스다. 젓갈에 절인 생새우무침, 이게 이날 밤 내게는 단연 최고였다. 부레 한 점을 그것과 함께 씹었다. 비로소 게미가 어떤 식감인지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황석어젓은 목포의 젓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가사리, 톳 등 별별 해초가 각기 다른 맛을 보이며 접시에 누워 있다. 민어의 각기 다른 부위, 그걸 간장과 초장에 찍어 먹는다는 건 반칙이다. 부위별로 소스를 달리해서 먹는 즐거움을 어떻게 필설로 다할 수 있을까? 특히 병어는 토종 된장으로 먹어야 된다. 그래서 '병어는 된장빵'이라는 말도 파생됐단다. 민어요리는 장만해 테이블에 내주는 요리사보다 그걸 특정 소스와 양념과 결부해 새로운 미각을 발견하는 미식가의 감각에 더 무게중심이 실린다. 주인이 시키는 대로 먹지 않는다. 자기만의 먹는 법이 있다. 그게 토박이와 관광객의 차이다. 여느 도시의 뻔할 뻔 자인 초장~고추냉이~간장의 케미, 민어회 앞에서는 왠지 기가 죽을 것 같다. 나는 다시 해초류를 곁들여 껍질을 먹었다. 마지막에 나오는 민어탕, 뽀얀 국물 속에 담긴 민어 통뼈가 언뜻 닭백숙을 연상시킨다. ◆민어의 추억한국 수산지에 따르면 목포 근해 태이도, 금강, 군산 근해, 압록강 입구가 주요 어장이었다. 그런데 수온이 변해 지금은 임자도 근해에서 가장 많이 잡힌다. 특히 태이도는 민어 파시가 섰던 임자면 하우리 앞 섬이다. 인천 굴업도와 덕적도 인근에도 민어 어장이 형성돼 파시가 형성됐다. 임자도 해역은 수심 10~20m에 먹이 생물로 가득한 모래바닥이 마치 울진 왕돌잠처럼 깔려 있어 민어에게 최적의 산란지다. 민어는 새우를 가장 좋아하는데 임자도 바다는 새우도 풍부하다. 식물 플랑크톤이 서식하는 신안 갯벌은 민어를 대표 특산물로 만든 일등공신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한국 갯벌 가운데 신안 면적은 전체의 85.5%(1100.86㎢)를 차지한다. 요즘 임자도가 민어 때문에 난리다. 코로나 때문에 3년 쉬었던 섬 민어 축제가 오는 29~30일 열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민어섬으로 불린다. 잡히기는 임자도 근처, 팔리는 데는 바로 옆 지도읍 송도위판장이다. 잡히고 팔리고 소비되는 게 한 포인트에서 다 이뤄진다. 대광해수욕장 입구에 도착하니 은빛 민어를 본뜬 5m 민어상을 세워놓았다. 지난해 3월 임자대교가 개통돼 임자도는 육지로 둔갑했다. 대광해수욕장 백사장에서 서쪽으로 차로 5분 달리면 전라도 3대 파시(波市·생선 시장)로 명성을 날렸던 하우리항이 나온다. 1930년대부터 바다 위나 모래밭에서 열리는 생선 시장이 성행했다.일제강점기 민어가 많이 잡혔던 어장으로는 신안군 임자도 어장과 옹진군의 굴업도 어장을 꼽는다. 굴업도는 일찍 민어가 사라졌지만 신안군 임자도는 지금도 주민들의 민어잡이가 이어지고 있다. 김 위원은 이 내막을 소상히 정리한 적이 있다. 임자면 하우리에서 작은 배를 타면 태이도에 도착한다. 주민들이 '타리섬'이라 부르는 곳이다. 특히 '뭍타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해수욕장으로 알려진 신안군 임자도의 대광해수욕장과 이어진다. 타리섬은 섬타리와 뭍타리로 나누어져 있다. 모두 임자도 남쪽 하우리에 속했던 섬이다. 한때 섬타리는 8가구가 살았고 초등학교 분교가 있기도 했다. 그리고 뭍타리에도 1가구가 살았었다. 마지막까지 섬타리를 지키던 주민이 하우리로 이사를 하면서 무인도로 바뀌었다. 광복 후 임자도에서 민어를 가져가던 일본인이 사라졌다. 그 후 민어도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하우리와 섬타리에 가득했던 사막 같은 모래를 유리회사에서 가져가면서 사라졌다.김준 위원이 민어의 본질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 준다. 민어는 큰 부레를 가지고 있다. 부욱~ 부욱~ 소리를 내는 것은 짝을 부르는 소리라고 한다. 부레를 이용해 바닥으로 또는 수면 가까이 오르내린다. 산 채로 배 안 물칸에 넣어두어도 뒤집혀 오래 버티질 못한다. 해서 잡자마자 아가미에 칼을 꽂아 피를 빼낸 다음 얼음에 묻어 보관한다. 선도가 좋을 때 피를 빼야 선어를 내놓을 때 깨끗하고 숙성이 되어 식감도 좋다. 민어잡이 배 냉장고는 민어숙성창고다. 그물로 잡은 것보다 낚시로 잡은 것이 더 비싸다.민어는 크게 12가지 맛을 갖고 있다고 한다. 내장은 젓갈, 알은 어란이나 찜, 쫄깃하고 고소한 부레는 횟감으로 사용한다. 그리고 등살, 꼬리살, 뱃살, 늑간살 등 부위별로 해체한다. 무엇보다 담백하고 고소한 뱃살과 다져서 나오는 갈빗살이 먼저 안주로 나온다. 물론 큰 민어일 때 가능하다. 이때 꼭 챙겨야 할 것이 붉은 살을 살살 걷어내고 나면 남는 껍질이다. 껍질에 밥 싸먹다 논을 팔았다는 민어껍질이다. 남은 뼈는 푹푹 고아서 맑은 탕을 끓인다. 탕 중 으뜸이라는 민어탕에 부레가 생명이다. 경상도에서는 보신탕으로 복달임(복날에 그해의 더위를 물리친다는 뜻으로 고기로 국을 끓여 먹는 풍습)을 했다면 목포권에서는 민어로 한다. 홍어애국에 애가 들어가지 않으면 맛이 없듯 민어탕에도 부레가 들어가야 한다. 비늘 말고 버릴 게 없다.옛 개성 양반이 복달임으로 임자수탕을 즐겼다면 서울 양반은 민어 요리에 탐닉했다. 큼직한 민어 한 마리를 올려 놓고 회를 뜨거나 찜·탕을 끓여 푸짐하게 먹었다. 지금도 '복더위엔 민어찜은 일품, 도미찜은 이품, 보신탕은 삼품'이란 말이 전해진다. 조선조 궁중에서는 '민어감정'이라 하여 민어로 고추장찌개를 끓여 그 감칠맛을 즐겼다. ◆고서 속 민어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민어(民魚)'라 기록돼 있다. 전라도에서는 민어보다 '민애'라 해야 친숙하다. 지역에 따라 부르는 이름도 다양하다. 법성포는 '홍치', 완도는 '불둥거리'라 했다. 서울 상인은 크기에 따라 민어, 상민어, 어스래기, 가리, 보굴치 등으로 구분했다. 민어의 고장 임자도에서는 큰 놈은 '돗돔', 중간은 '민어', 작은 것은 '통치'라 불렀다. 전남지방에서는 큰 놈을 '개우치' 소금에 절여 만든 특대 민어의 수컷을 '수치', 암컷을 '암치'라 했다.어장은 완도·진도·태이도(苔耳島)·칠산탄(七山灘)·격음열도·인천·진남포·연평열도·압록강이고, 가장 주요한 어장은 목포 근해 태이도, 금강과 군산 근해 및 압록강 기수욕이다. 태이도는 고래로 민어의 산지로서 유명하였고 우리나라 사람은 각종 재래식 어구로써 어획하고 있었는데, 1906년에 일본 어민이 태이도에서 안강망을 사용하여 큰 성과를 거둔 뒤 이를 전하여 들은 안강망 업자들이 속속 들어와서 그 어선 수가 40여 척에 달하였다고 하였다.특히 조기와 민어는 비슷하다. 중국의 고문서에서는 민어를 석수어, 즉 큰 조기로 본 경우가 많았다. '승정원일기(承宣院日記)' 영조 4년 무신(1728) 7월13일자를 보면 '선혜청을 주관할 때 이러한 폐단을 자세히 알고서 바꾸어 바치는 규례로 아뢰어 변통하고자 하였으나 미처 하지 못하였습니다. 민어와 조기로 말하면, 조기가 부족하면 민어로 바꾸고 민어가 부족하면 조기로 바꾸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중국 광둥성에서는 민어 부레를 만두피로 이용한 만두가 유명하다. 대담=김영복 식생활문화연구원장·이춘호 음식전문기자 정리·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 도움말 = 김준 광주전남연구원 책임 연구위원민어는 활어보다 얼음으로 잘 빙장해 질 좋은 선어 상태가 됐을 때, 부레·껍질·뱃살·꼬리·몸통별로 먹어야 하는 데 가장 중요한 건 된장, 그리고 그 옆에 천일염이 스며든 참기름, 이밖에 생새우(물걸이)무침, 황석어젓, 각종 해초류, 마지막엔 무안산 자색양파 등이 가세해야 제대로 된 민어 맛을 음미할 수 있다. 토박이들은 그중 민어의 공기주머니인 부레를 제일로 친다.민어껍질.송도위판장 입구에 들어선 민어 코스 전문 식당들.일제강점기 민어 파시 광경. 임자면 타리섬 앞 현재 대광해수욕장 인근.신안군 지도읍 송도위판장 앞 포구. 민어잡이 배들이 정박해 있는 곳이다. 제철에는 남해안권에서도 원정을 온다.
[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김영복·이춘호 '한식 삼천리'] 민어(1) ...삼복 더위에 남도서 올라온 절정의 맛
남도의 진미를 '게미'라 한다면 게미의 대미를 장식하는 어종 중 하나가 바로 삼복 철, 지금이 제일 맛있을 때인 민어다. 민어는 겨울철 홍어, 그리고 병어, 조기, 황석어, 젓새우, 밤젓, 토하젓, 세발낙지, 꼬막 등을 거느리고 서해안 뻘물이 만들어 낸 남도의 맛의 방점을 찍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현재 신안군 지도읍 송도수협위판장이 전국 최대 민어 공급처이다.민어(民魚). 너무 깊고 넓다. 그러면서 너무나 평범해 보인다. 잡초 같은 고기? 삼베·무명·모시 적삼 같은 질감이랄까. 웅장한 것 같은데 그 행간에 서러움 같은 뭔가가 숨어 있다. 한 세기 전 무서리에 녹아내린 배추밭 형용의 남도의 황톳빛 굶주림, 그 아사의 단말마와 비명이 저 민어의 이빨에 각인돼 있다. 삼복 철만 되면 바다 깊숙한 곳에서 어더덕~소리를 낸다. 어부들은 그 소리를 대나무로 만든 청음통을 통해 감지하며 그물을 푼다. 잡기가 어렵다. 감으로 잡는다. 표층에 모여 있는 고기가 아니다. 바다 밑바닥에 산다. 어군탐지기에도 잘 포착되지 않는다. 입질의 대가들은 고흥 나로도, 완도, 해남, 군산 등지에서 바닥까지 추를 내려 고패질로 민어를 유인한다.무엇이 이 생선을 '백성의 물고기'로 만들었는가. 문어를 위해 접두어로 글월 '문(文)' 자를 넣은 것까지는 이해하겠는데 감히 생선 주제에 백성 '민' 자라니. 민어에 얽힌 곡직한 사연을 알기 위해서는 이 삼복 철, 동·남해는 아니고 서·남해안권으로 가 봐야 한다. 가마솥더위가 본격화될 때 민어의 맛은 절정으로 치닫는다. 미식가는 차를 몰고 목포로 가서 찜해 둔 민어 전문점으로 향한다. 홍어는 다소 전국구인데 아직 민어만은 목포가 최대 소비처. 민어가 상종가를 치면 영덕에서는 미주구리(물가자미)가 맞장구를 친다. 둘 다 자연산밖에 없다. 민어는 가을바람이 불기 시작해 전어가 맹위를 떨칠 때쯤 저 남양군도 쪽으로 남행해 버린다. 그래서 민어는 하절기 전령사, 그리고 겨울날에는 홍어, 그렇게 민어는 홍어와 짝을 이뤄 남도의 맛을 일선에서 진두지휘한다. 그리고 둘은 방계에 몇몇 어종을 거느린다. 봄~여름의 젓새우·조기·병어, 가을의 꽃게, 그리고 세발낙지, 꼬막, 백합 등을 좌우에 거느리고 서해안 뻘물이 길어 올린 남도의 진미랄 수 있는 '게미'를 완성 시킨다. 타계한 남도의 시인, 송수권은 타지방에서는 쉽게 이해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는 남도 '게미의 전도사'였다. 그건 갯벌의 기운에서 발원된다. 바로 젓갈의 곰삭은 맛인데 그걸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젓갈이 바로 황석어(강다리)·밤(전어내장)·토하(민물새우)젓이다. 그 맛은 이내 전라도 서편제 판소리와 육자배기, 그리고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과 같은 남도판 유행가까지 품는다. 그 연장에 남도 문인화의 맥이 발화한다. 그 맛을 눈높이로 받을 만한 고장은 전국에선 단연 제주도뿐이다. 식초와 된장을 베이스로 한 제주도 자리물회의 독특한 맛을 제주에서는 '베지근한 맛'이라 한다. 그건 감치는 맛도 아니고 대구식 얼큰함과도 차이가 난다. 다른 나라 말로 번역할 수도 없다. 언어 이상의 맛이다. 유전자의 맛이다. 뭐랄까, 미국 뉴올리언스 흑인 블루스 뮤지션만의 음조를 다른 나라가 제대로 이해하기 힘든 것과 비슷하다.초복을 하루 앞둔 금요일. 나는 부산의 식객 최원준 시인과 함께 민어 탐방에 나섰다. 본지에서 '바다 인문학'이란 제목의 기획연재를 한 김준 광주전남연구원 책임연구위원의 안내를 받았다.자색 양파 수확이 한창인 백련의 고향, 무안을 거쳐 연육교로 연결된 신안군 지도읍에 있는 대한민국 최대 민어 집결지인 송도수협위판장, 일제강점기 민어 파시가 섰던 임자도 대광해수욕장 주변, 그리고 한국에서 가장 민어 식도락가가 많이 포진한 목포의 민어 전문점 '용당골', 그리고 병어찜을 잘하는 '초원음식점' 등을 둘러봤다. 정오 조금 넘어 도착했는데 위판은 다 끝나버렸다. 위판 중매사는 27명, 그들이 경매한 생선을 파는 가게는 24곳, 바로 어판장 2층에 자신이 찜한 민어를 먹을 수 있는 회타운이 있다. 진열된 민어 대다수는 서둘러 비늘 커버가 씌워져 있었다. 건조 방지용인 것 같았다. 수족관에 살아 있는 활민어도 있지만 꾼들은 빙장해 숙성한 선(선어)민어를 선호한다. 민어 붐이 불면서 관광객을 겨냥해 7년 전 위판장 옆에 회타운이 생겨났다. 위판장 초입에 병어 조형물, 그리고 인근 임자도에는 민어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이 권역에선 요즘 민어·병어를 제외하곤 다른 어종은 잡어로 분류될 정도다. 5월에 시작된 병어는 이제 끝물이다. 그 빈자리를 민어가 파고들었다. 전국 젓새우 어획량의 60%를 차지하는 임자도, 그중 한국 젓새우 1번지로 알려진 전장포, 곽재구 시인의 전장포 시비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멀리 보니 영광·무안·신안·함평 4개 군이 사이좋게 스크럼을 짜고 있다. 이 해역이 바로 젓새우~민어~병어~조기의 고향. 하지만 기후 온난화로 인해 조기가 서둘러 증발해 버렸다. 법성포 옆 칠산바다에서 잡혔던 참조기는 제주 더 남쪽 바다에서 잡힌다. 우리는 민어 맛을 보기 위해 군침을 흘리면서 목포로 갔다. 대담=김영복 식생활문화연구원장·이춘호 음식전문기자정리·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김영복·이춘호 '한식 삼천리'] 민어(2)에서 계속됩니다.임자도 대광해수욕장 입구에 세워진 민어 조형물.
[이춘호기자의 뮤직로드] 싱어송라이터 채의진
남미 살사의 피가 섞여 있는 듯한 유쾌발랄한 보이스. 그의 노래에는 청량감이 가득하다. 눅눅하고 덜 익은 발라드라인은 노 생큐! 요즘 각종 행사에 초대 1순위 지역 통기타 가수 중 한 명인 채의진(46). 그의 오늘이 있기까지 많은 시달림과 우여곡절의 세월이 누룩 역할을 했다.청송 출신이고 중3 때 대구로 왔다. 갑자기 한 운동에 깊게 빠지게 된다. 바로 검도였다. 고2 때까지는 고등부에서 이름을 날릴 정도로 유망주였다. 대구대·세종대 검도 코치로부터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 올 정도였다.고향 선배 밴드에 합류 '제임스' 결성지옥의 연습…대구MBC가 선정한 팀日서 록1집 데뷔, 지역언론 대서특필전국구 한계…'더 옐로우'로 재도약모던·심플하게…각자 사생활도 존중음악으로 소통 하는 곳엔 늘 뛸 준비◆고2 때 가수의 꿈어느 날 가수의 꿈을 갖게 된다. 고2 겨울방학 때였다. 크리스마스날 성당 다니는 단짝 친구가 초대해서 갔다. 그 음악회에서 친구가 일렉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보고 뭔가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당장 운동을 그만둔다. 음악의 유혹은 가공할 만했다. 장르는 지금의 포크 스타일이 아니었다. '록(Rock)'이었다. 테이프가 늘어질 정도로 듣고 또 들었다. 자기만의 '독공'의 시간이었다. 대학 시절 대학동아리 밴드 모집 공고를 보고 무작정 혼자 오디션을 보러 간다. 강산에의 '넌 할 수 있어'와 B612의 '나만의 그대 모습'을 무반주로 불러 합격된다. 생애 첫 밴드 보컬로 활동 개시. 그냥 추억으로 끝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제대 후 우연히 청송 고향 선배가 하는 밴드에 들어가게 되었다. 새로운 팀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밴드명은 프로언더 밴드 '제임스(JEIMS)'였다. 웃기는 이름이다. 프로언더라니. 더 웃기는 것은 보컬 기타는 베이스 빼고는 다 경북 북부 오지 촌놈들이었다.바로 지옥의 연습구간을 통과한다. 밤 9시부터 다음날 오전 5시까지, 그렇게 매일 7~8년을 죽어라 연습했다. 근육이 음조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단계로 끌어올렸다. 당시 시내 클럽 헤비 등을 누볐다.어느 날 아는 형님(전충훈)이 그들을 지목했다. '우리 음악이 너무 좋다면서 자기가 기획할 테니 함께 해보자'고 제의를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엄청난 기획력을 가진 내공의 소유자였다. 현재 세종시에 있는 행정부의 문화기획자로 인정돼 별정직 공무원이 돼 있다.제임스는 이내 급부상을 하게 된다. 2집의 정규앨범과 몇 장의 싱글앨범을 발매했다. 우리 팀의 대표가 된 형님은 대구에서 시작해서 전국구로 발을 넓혔다. KTX가 처음 개통되었을 때 그해 여름 코레일의 지원을 받아 40여 개 역 투어 버스킹을 하게 되었다. 드럼, 엠프 등을 가득 싣고 유랑악극단처럼 전국 역을 돌아다니면서 공연을 했다. 덕분에 대구를 대표하는 팀으로 주목받는다. 당시 대구MBC에서 발표한 '대구를 빛낼 44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리고 내한한 일본 밴드 관계자들이 너무 좋게 봐줘서 일본에 진출하게 된다. 지역 뉴스에도 '대구 촌놈들 일냈다'라며 대서특필을 했다. 서울을 거치지 않고 바로 일본에서 록 1집으로 데뷔한다.◆제임스에서 '더 옐로우'로성공할 줄 알았다. 하지만 대구만의 인지도로 전국구로 발돋움하는 건 한계가 있었다. 7년의 제임스밴드 생활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2011년 나머지 팀 구성으로 기타를 영입하고 '더 옐로우'를 새로 결성한다. 조금 더 심플·모던하게 나갔다. 지금도 연주를 하고 있다.마흔을 넘어서고 있었다. 조금씩 힘에 부딪힌다. 멤버와 약속했다. '우리 크게 욕심내지 말고 70·80세가 되어도 더 옐로우라는 팀으로 가끔 음반 내면서 오래오래 음악을 하자'고. 다들 결혼을 하고 아기도 생기고 어느덧 마흔 중반. 지금 더 옐로우는 '유부남 아빠밴드'. 각자 사생활을 서로 존중해 준다. 그는 제임스 때부터 통기타 라이브 카페를 다니며 생계를 유지했다. 지금은 버스킹 또는 지역 행사와 공연 등에 많이 초청받는다. 베이스 치는 최영원과 '애플트리'라는 통기타 듀오 팀을 만들어 요즘 한창 잘 나가고 있다.현재 세종대 융합예술대학원 뮤직퍼포먼스학과 석사과정을 밟고 있으며 계명문화대 공연음악학부 겸임교수로도 활동하고 있다. 가수 겸 교육자다. 그의 가창력은 공연 기획자들이 먼저 알아본다. 농담 조금 더 보태 '통기타 들고 공연하는 행사는 메이저 유명 가수 빼고 전국 톱'이라고 엄지척 해준다. 그는 소통을 강조한다. 유치원부터 경로당까지, 늘 뛸 준비가 되어 있다. 미리 곡을 선정하지 않는다. 그 자리에 가서 분위기 보고 바로 곡을 선정한다. 늘 행복하고 해피한 무대를 선사한다. 희망과 행복. 그게 그의 목소리에 뇌관처럼 박혀 있다. 글·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한때 제임스 밴드 리더보컬로 일본 무대에서도 큰 반향을 일으켰던 채의진. 지금은 마흔 중반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4인조 포크록밴드 '더 옐로우' 리더를 맡으면서 출세와 돈보다는 죽을 때까지 멤버와 오순도순 좋아하는 노래하며 행복한 삶을 살고 싶단다.더 옐로우의 공연 모습.2011 결성된 더 옐로우 밴드. 주 멤버는 보컬 채의진, 베이시스트 최영원, 드러머 임범규, 그리고 기타는 객원 멤버로 짜여진다.
[첫 / 날] 詩 퍼포먼스 문화공간 '라 포엠'
지난 2일 달서구 도원동 월광수변공원 내 지역 첫 시 퍼포먼스를 위한 문화공간인 '라 포엠(La poem)'. 무려 45일간 준비했던 류인서 시인을 위한 시퍼포먼스가 열연됐다. 류 시인의 시적 연대기가 11꼭지, 모두 2시간으로 압축됐다. 입추의 여지 없이 모여든 관객 80여 명은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전체 흐름이 매우 디테일하고 감각적이고 아방가르드했기 때문이다. 여느 시낭송회와는 확연히 구별되는 에너지가 느껴졌다. 이날 압권은 행사의 얼개를 혼자서 총기획·연출했던 시인이자 시행위예술가 그리고 현재 대구시낭송협회 회장으로 있는 이유선씨였다. 20여 분 걸려 '병'이란 시를 자기 방식으로 독창적으로 풀어냈다. 오브제는 달랑 종이컵·알약·작은 병이 전부. 그는 귀를 종이컵이라 생각했다. 그걸 일제강점기 전화 수화기로 만들어 연기했다. 듣는 것과 듣지 못하는 방향, 시대와 일상의 불통, 그게 질병을 만들고, 그걸 낫게 하려고 약(藥)이 병의 심장 안으로 뛰어든다. 류 시인의 마지막 구절, '한순간 고요한 폭발음, 소용돌이치며 팽창하는 소리의 우주가 병 속에 그의 귓속에 있다'를 절묘하게 마임연기를 하듯이 풀어 젖혔다. 시적 울림을 위해 직접 알약을 먹기도 했다. 밋밋하게 그냥 시만 터치하지 않았다. 인접 예술을 많이 끌고 들어왔다. 이를 위해 무용가(최상열 대구시립무용단 차석단원), 시동요(문시온), 시연주(플루티스트 전미경·김은주), 시가곡(테너 현동현, 메조소프라노 정소민) 등이다.라 포엠은 복합문화공간격이다. 여기 대표로 있는 이 회장은 시퍼포먼스 전문 공간을 오래전부터 꿈꿔 왔다. 이를 위해 그동안 박정남, 송재학, 박지영, 정숙, 김상환, 류인서, 노태맹 등 15명의 지역 시인을 초대해 행사를 치러왔다. 여느 낭송회와 확연히 구별되는 긴장미. 그걸 위해 직접 스튜디오를 찾아 배경음악을 녹음하고 시장에 가서 알맞은 오브제를 구매해 와 두 달여 숙성을 시켰다. 행사를 위해 너무 많은 전화를 해서 귓병까지 얻기도 했다. 그녀는 시퍼포먼스를 시낭송으로 착각할 때 속이 상한다. 시낭송은 '곧이곧대로'라면 시퍼포먼스는 '변화무쌍 변화난측'이란다. 낭독과 낭송, 시 퍼포먼스의 차이를 설명해 준다."낭독회는 그냥 운치 있게 시를 봐가면서 읽는 수준이다. 낭독회보다 한 차원 발전한 형태는 낭송회. 이때는 완벽하게 암기해야 한다. 시퍼포먼스는 시낭송에 연극적 기법 그리고 온갖 예술 장르를 특정 시에 맞도록 재연출한다는 것에 무게를 둔다."행사를 위해서는 한 달 이상을 꼬박 몰입해야 된다. 적당한 시를 엄선하는 게 최대난관. 시인이 아무리 자기가 좋아하는 시를 내밀어도 원하는 방향이 아니면 수용 못 한다. 선별 기준은 뭘까. "저는 한물간 생선을 다시 잡지 않습니다. 시대의 트렌드를 반영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전통의 울림도 중시하죠. 지금 같으면 팬데믹과 엔데믹 그리고 비트코인(가상화폐) 등에 관한 시도 필요하죠."그는 리허설도 절대 하지 않는다. 재즈의 즉흥연주처럼 순간, 신탁 같은 흐름을 잡아챈다. "사전 준비는 철저해야 한다. 하지만 리허설을 해 버리면 김이 빠져버리기 때문에 그냥 올라간다. 그렇게 해야 새로운 뭔가를 감지할 수 있다."라 포엠은 1년에 6차례 특정 시인을 위한 시퍼포먼스 행사를 진행한다. 그 사이에 문학평론가 등을 초대해 시퍼포먼스를 위한 토크쇼도 병행할 예정이다. 조만간 시퍼포먼스에 대한 이론과 실제에 대한 전문서도 출간할 예정이다. 달서구 수밭길 43. 글·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대구 첫 시퍼포먼스 전문 문화공간인 라 포엠 입구 전경. 2개월마다 한 번씩 특정 시인을 위한 시퍼포먼스를 연다.
장작불 위에 걸린 200인분 대형가마솥 고기 끓이는 화력 비율이 최대 승부처
최근 기자는 달성군 유가면 달창저수지 바로 옆에 있는 '금산곰탕'을 발견했다. 비교적 장작불 곰탕의 원형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가게였다. 충남 금산군 추부면 마전리에서 태어난 오선아(68) 사장. 젊었을 때는 가수가 꿈이었지만 생업 때문에 접었다. 30대 때는 동성로에서 '녹향'이라는 뭉티기 전문집도 경영했고 현풍으로 건너와 본격적으로 곰탕집을 연다. 기본기는 충분했다. 모친이 고향에서 충남식당이란 곰탕집을 운영했다. 15년 전 '산속 곰탕집'을 꿈꾸며 현재 자리로 왔다. 200인분 대형 가마솥부터 걸었다. 장작불로 고아내는 전통방식의 곰탕집이 탄생했다. 불 담당은 황해도 출신 화부인 김씨, 오픈 때부터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다. 초창기에는 고향의 명품인 인삼을 곰탕에 넣었지만 호불호가 갈렸다. 생각해 보니 답은 간단했다. 기본에 충실. 곰탕은 좋은 한우, 제대로 된 육수의 점도, 나쁜 굳기름 제거, 곰탕 맛과 병행된 묵은지와 깍두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삶아져 나온 각 부위 고기를 미리 잘 저며두는 것, 최대 승부처는 소머리·소양·우족·사골·꼬리, 이 다섯 부위를 어떤 비율로 어떤 화력으로 고아내는가에 있었다. 그녀는 숱한 시행착오를 통해 자기만의 비법을 터득하게 됐다. 지난해 꿈에도 그리던 가수로 데뷔했다. 더없이 팍팍했던 지난 인생을 노래한 '수채화 인생'(박태국 작사·최상찬 작곡)을 내밀었다. 하지만 노래보다 곰탕이 우선이란다. 물론 노래나 곰탕이나 곰삭아야 제맛이 나오는 건 같다. 6년 전 고맙게도 아들(박재원·46)이 가업을 잇겠다고 나섰다. 금산댁, 이제 쪼끔 사는 맛이 나는 모양이다. 글·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설렁탕과 곰탕의 접점에 서 있는 듯한 달성군 유가면 달창저수지 옆 금산곰탕. 최근 미식가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김영복·이춘호 '한식 삼천리'] 곰탕·설렁탕 '진국 열전'(2) 소고기 부위별 고아내는 국물이 맛 좌우…고기가 무르면 건져내 먹기 좋게 잘라
◆고음과 미음 이 고음(膏飮)과 상대적인 우리 음식이 바로 '미음(米飮)'이다. 고기 대신 쌀을 조금 넣고 푹 끓여서 체에 받치면 '쌀국'인 미음이 된다. 미음을 '밈'이라고도 한다. 대한제국 의친왕 궁 부속 이왕직 촉탁을 지내다가 경기여고 교사를 지낸 손정규(1896~1955)가 1940년에 간행한 '조선요리(朝鮮料理)'에는 곰국을 '탕즙(湯汁)'이라고 표기했다. 1800년대 후반인 고종과 순종 재위 당시 수라상은 조석 2차례 올렸다. 12첩 반상 차림으로 수라와 탕 2가지와 기본 찬품과 쟁첩에 담는 12가지 찬물로 구성되었다. 수라는 백반(白飯)과 팥 삶은 물로 지은 찹쌀밥인 붉은 빛의 홍반(紅飯) 두 가지를 수라상에 담고, 탕은 미역국(藿湯)과 곰탕 두 가지를 모두 탕기에 담아 올리어 그날에 따라 좋아하는 것을 골라서 드시도록 준비하였다.곰탕은 소고기의 특정 부위만을 써서 '꼬리곰탕이나 소머리곰탕, 도가니탕을 만들기도 하는데, 갈비탕·족탕·우랑탕·양탕도 결국 소고기의 부위만을 달리 한 곰탕의 일종인 셈이다. 곰탕을 끓일 때는 옆에 지켜 서서 수시로 거품을 걷어내고 간장으로 간을 맞춘다. 고기가 무르면 건져내서 납작납작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 맑은 간장과 소금, 다진 파, 마늘, 참기름으로 무쳐 놓는다. 모든 고깃국물이 마찬가지지만 곰국을 끓일 때는 사골이나 고기에 붙은 기름을 떼어내지 말고 끓여야 국물맛이 한결 좋다. 다 넣어서 끓였다가 국물을 식힌 후 굳은 기름을 걷어내면 된다. 지난날 서울 종로의 고급 곰탕집 문간에는 둥그런 사등롱(紗燈籠)과 울긋불긋한 종이쪽을 나풀거리도록 길게 달아놓았다. 곰탕은 '고깃국'이므로 '육탕(肉湯)'이라고도 하는데, 남녀가 오직 도색에만 심취하는 육체의 향연을 '육탕질'이라고 한다. 지난 시절 종로 바닥의 부상(富商)들은 낮에는 장사에 몰두하다가도 날이 어두워지면 기생방에 찾아들어 진탕만탕 육탕질을 하고는 근처의 음식점에 가서 '진탕만탕(眞湯滿湯)'의 곰탕을 먹으며 원기를 보충했다고 한다.◆닭곰과 닭죽 이야기한국의 닭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서진 시대에 작성된 중국의 정사 삼국지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한(韓)나라에 꼬리가 가는 닭(細尾鷄)이 있는데, 그 길이가 모두 다섯 자라는 기록이 있다. 이 길이는 지금으로 따지면 115㎝ 정도가 된다. 덧붙여 이후 남북조 시대에 작성된 후한서에는 이것을 꼬리가 긴 닭(長尾鷄)으로 고쳐놓았다. 삼국유사(三國遺事) 4권에 따르면 인도에서는 신라를 '구구탁예설라(矩矩托禮說羅)'라고 불렀다는데, 구구탁은 '닭'이고 예설라는 '귀하다'는 말이라고 한다. 즉 닭을 귀히 여기는 나라. 이어서 신라는 닭신을 공경하여 높이기 때문에 관에 깃을 올려서 장식한다고 하는데, 이것은 절풍에 새 깃을 꽂아 장식하는 조우관(鳥羽冠)이나 조미관(鳥尾冠)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1925년에 '해동죽지(海東竹枝)'를 쓴 최영년은 닭도리탕을 '계학'이라고 했다. 그러나 계학은 닭볶음탕이 아니라 푹 고아 국물이 진한 닭곰국을 말한다.닭곰탕은 닭을 손질하여 찬물에 넣고 완전히 무르도록 익힌 후 닭고기의 살만 발라 파, 다진 마늘, 소금, 참기름, 후춧가루로 무쳐서 닭 육수에 다시 넣고 한소끔 끓여서 간이 어울렸으면 후춧가루를 뿌리고 지단을 올린 음식이다.그러나 닭죽은 조리할 때 닭을 다리, 날개, 등, 가슴 등으로 나누어 중닭(약 700g 정도) 한 마리에 물을 2ℓ 정도 붓고 처음에는 센 불에서 끓여 한소끔 끓어오르면 불을 줄여서 한 시간에서 한 시간 반 정도 계속 곤다. 닭의 살이 뭉그러지고 국물이 뽀얗게 우러나면 국물을 식혀 기름이 윗면에 떠서 굳도록 한다. 기름이 떠올라 모여 굳으면 기름은 제거하고 국물은 솥이나 냄비에 옮겨 담아 가라앉은 찌꺼기를 제거한다. 이렇게 준비한 국물에 쌀을 넣고 죽을 쑤는데, 국물과 쌀의 비율은 4대 1 정도로 한다. 결국 닭곰탕과 닭죽의 차이는 닭을 고음한 후 곡물을 넣었느냐 아니냐로 나뉘어 음식 이름과 맛, 영양이 달라진다. 고문헌을 살펴보면 닭곰과 비슷한 계고(鷄膏), 고성(膏腥), 계고성(鷄膏腥) 등의 용어가 나온다. 닭죽을 의미하는 계죽(鷄粥), 계서(鷄黍), 계즙죽(鷄汁粥) 등이 있었다. 1950년대 친일파 안용백(安龍伯·1901~1977)이라는 인물은 닭죽에 수면제를 타서 투표 참관인들에게 먹이고, 개표함을 연 다음 표를 바꿔치기했다. 원래 야식으로 나올 예정이던 닭죽인지라 참관인들은 별 의심 없이 넙죽 받아먹고 잠들었고, 그사이 투표함을 바꿔치기한 것이다. 그래서 1위로 당선되었으나 빨리 들통나 재판 끝에 당선이 무효가 되었다. 이 사건은 닭죽사건으로 회자되고 있다.평안도에서는 냇가나 강가에 나가서 물고기를 잡아 어죽을 쑤어 먹는 요리가 유명한데, 이때 물고기 대신 닭을 가지고 나가서 죽을 끓여 먹으며 즐기는 풍습도 있었다. 닭죽은 여름철 보신음식으로 좋고 병후나 노인의 보양식으로도 적합하다. 죽이 다 되었을 때 달걀을 풀어 줄알이 지도록 하거나 반숙 정도로 연하게 익혀 가미할 수 있는데, 이때 곱게 다진 마늘을 약간 가미하면 맛이 잘 어울린다. 또는 닭고기를 가늘게 찢어서 조금만 가미하여 끓여도 무방하다.◆남한산성 닭죽거리경기도 성남시 은행동 남한산성 등산로 입구에 1970년대부터 닭죽을 파는 집이 많았다. 19세기에도 양반가 속풀이 해장국으로 아침 일찍 배달됐던 '효종갱(曉鐘羹)'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남한산성 정비 사업으로 이 일대가 개발되면서 1998년에 단대동 논골로 집단 이주하였다. 닭죽촌의 전통을 유지해온 논골 민속마을에 위치한 30여 곳의 음식점이 함께 논골 민속마을 닭죽축제를 개최하고 있다.전남 화순군에서는 상갓집에서 출상 전날 밤 마을 사람들이 상가에 모여 상여 놀이를 하면서 밤을 새우는데 이때 상여꾼을 위해 닭죽이나 팥죽을 쑤어 접대한다. 제주도에서는 참기름을 넣기도 하며, 닭죽이라고 한다.이탈리아 전통요리 중에도 닭죽과 같은 음식이 있다. 이 음식은 이탈리아 밀라노 지방의 '리소토 알라 밀라네세(Risotto alla milanese)'라는 사프란(saffraan)을 넣은 닭 육수에 쌀을 익혀서 노란빛이 도는 이탈리아 전통요리 리소토이다. 미국에서도 닭죽과 비슷한 음식이 있는데 바로 '닭고기 수프'다. 닭요리를 먹고 남은 뼈를 푹 고아 국물(chicken stock)을 내어 수프로 만들어 먹는 것인데, 뼈 한 조각이라도 그냥 버리지 않고 알뜰하게 이용하는 지혜가 깃든 음식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의 일반 가정에서 아이가 감기 몸살 등을 앓고 있으면 엄마가 이 닭고기 수프를 많이 해 주기 때문에 미국인에게는 '어렸을 때 어머니가 해주시던 추억의 음식' 같은 이미지라고 한다. 대담=김영복 식생활문화연구원장·이춘호 음식전문기자 정리·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전남 나주의 하얀집 곰탕. 언뜻 갈비탕처럼 보이는 게 특징이다.달성군 박소선현풍할매곰탕. 참기름에 잘 저민 우족과 소양이 맛의 중심을 잡고 있는 게 특징이다.1952년 6·25 전쟁 당시 서울의 한 건물 앞 간판에 설렁탕과 곰탕이 같이 적혀 있다. 설렁탕 글자가 큰 것만 봐도 서울이 얼마나 설렁탕에 특화돼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김영복·이춘호 '한식 삼천리'] 곰탕·설렁탕 '진국 열전'(1)
미식가 사이에 가장 논란이 많은 음식 중 하나가 곰탕과 설렁탕이다. 서울은 단연코 설렁탕이 강세이고 곰탕은 전국에 흩어져 있다. 곰탕의 경우 서울 '하동관', 나주의 '하얀집', 그리고 달성군의 '박소선현풍할매곰탕'이 전국구로 발돋움했다. 곰탕과 설렁탕, 이 둘의 어원은 전문가 사이에도 항상 차이를 보인다. 세월이 흐르다 보니 설렁탕이나 곰탕이나 별반 차이가 없어지고 있다. 설렁탕집에서 설렁탕을 팔고 곰탕집에서 곰탕을 파니 그러려니 하고 먹는다. 어쩌면 설렁탕·곰탕집 주인들도 설렁탕과 곰탕의 차이를 제대로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이제 옛 문헌 속으로 잠입해 보자.조선 숙종 때 실학자 홍만선이 엮은 '산림경제'에 쇠고깃국(牛羹)과 쇠고기곰(煮牛肉)이 나온다. 쇠고깃국은 '국 끓이는 법이 사슴고깃국과 같되, 다만 염통·간은 반드시 중탕할 필요는 없고 솥에 고아 흐늘흐늘하게 익은 뒤에 먹는다. 다만 콩팥은 따서 안팎의 피막을 긁어 버리고 소금과 술은 좀 낫게, 초는 조금 부어 잠시 담갔다가 참기름 양념을 넣어 고루 섞어 끓는 물을 넣고 볶아 먹는다'고 했다.반면 쇠고기곰은 '팔팔 끓는 물에 넣고 뚜껑을 덮지 말고 뭉근한 불로 오래 익힌다'라고 했다. 조리학적으로 보면 중탕할 필요까지 없는 쇠고깃국이 오늘날 '설렁탕'과 유사하고 뭉근한 불로 오래 익힌 '쇠고기곰'이 오늘날 곰탕이라 할 것이다. 설렁탕과 곰국의 차이는 조리학적으로 쇠고기를 끓인 것과 은근한 불로 오래 곤 것에 대한 차이로 구별된다.조선 순조 9년(1809) 여성 실학자 빙허각(憑虛閣) 이씨(1759~1824)가 쓴 '규합총서' 중 '충주 검부 앞 셜넝탕' 대목이 보인다. 당시 셜넝탕, 셜렁탕, 설넝탕, 설녕탕, 농탕 등 1950년대까지 설렁탕 표기가 통일되지 않았다. 탕반 하면 대구가 따라붙는 것처럼 설렁탕 하면 서울(경성)이 따라붙는다. 이만큼 설렁탕은 서울의 명물이다. '설렁탕 팔지 않는 음식점은 껄넝껄넝한 음식점이다'라고 할 정도다. 1920년 경성 내외에 25군데 정도였던 설렁탕집은 1924년에 100군데로 급격하게 늘어난다. 1920년대 중반이 되자 '민중의 요구가 답지하고 조선사람의 식성에 적합한 설렁탕은 실로 조선 음식계의 패왕'으로 등극한다. 전통적으로 뼈나 고기 등을 오래 끓여서 진액을 추출하는 방식의 국을 '곰국'이나 '곰탕'이라고 한다. 곰탕은 1489년(성종 20)에 윤호·임원준·허종이 편찬 간행한 의학서 '구급간이방언해'에 나온 것처럼 '고은 국·곰국'에서 유래된 것이다. 1768년에 몽학훈장 이억성이 엮어서 간행한 조선 시대 어학서 '몽어유해'에 '몽골에서는 맹물에 고기를 넣고 끓인 것을 '공탕(空湯)'이라 하고 여기서 공탕이 곰탕으로 변화된 것으로 본다'라고 썼다. 그러나 아무리 음운변화라고 해도 조리학적으로 보거나 우리나라 육류 변천사로 볼 때 근거 없는 이억성의 주장에 불과할 뿐이다. 1800년대 말엽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저자 미상의 조리서 '시의전서'에는 '고음은 소의 다리뼈, 사태, 도가니, 홀떼기( 소 살코기의 한 부위), 꼬리, 양, 곤자소니(소의 창자 끝에 달린 기름기가 많은 부분), 전복, 해삼 등을 물을 많이 붓고 약한 불로 푹 고아 맛이 진하고 국물이 뽀얗다'라고 오늘날의 곰탕을 설명하고 있다. 이 책에서 나오는 '고음'이 지금의 곰탕인데, '고음'과 '곰탕'의 '곰'은 무슨 뜻일까. 우리 국어사전에서는 '고기나 생선을 푹 삶은 국'을 '곰'이라 하고, '고다'는 '뭉그러지도록 푹 삶다, 진액만 남도록 푹 끓이다'라고 풀이하고 있다. 우리말 고다의 어근 고는 한자어 '膏(기름 고, 기름질 고)'에서 왔고, 고음(膏飮)이 한 마디로 줄어서 '곰'이 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곰은 오다가 옴, 가다가 감으로 된 것처럼 '고다'의 이름씨로 쓰이면서 여기에 '국'이 덧붙어서 '곰⇒곰국⇒곰탕'으로 바뀌었다. 다시 말해 곰(고음)은 '기름진(膏·고) 음식(飮·음)'이란 의미다. 고기가 귀하던 농경민족은 큰 명절을 맞이하면 웃어른에 대한 고마움을 선물에 담아 표시했다. 이때 최고의 선물로 여기던 것이 소고기여서 한자어의 '선물(膳物)'은 '기름진 고기(月)로 선(善)을 베풀고 이러한 선물은 소(牛)의 고기가 물론(勿) 제일'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 것이다. 대담=김영복 식생활문화연구원장·이춘호 음식전문기자 정리·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김영복·이춘호 '한식 삼천리'] 곰탕·설렁탕 '진국 열전'(2)에서 계속됩니다.설렁탕과 곰국의 차이는 조리학적으로 쇠고기를 끓인 것과 은근한 불로 오래 곤 것에 대한 차이로 구별된다. 설렁탕과 곰탕의 접점에 있는 것 같은 달성군 유가면 금산곰탕.
"치맥페스티벌, 독일 맥주축제 옥토버 능가"...돌아온 대구 3대 축제 코로나 뚫고 역대급 비상
대구의 여름 페스티벌이 코로나를 뚫고 역대급으로 비상했다. 3년만의 축제로 지난 주말과 휴일 대구 도심은 인파로 들썩였다. 특히 치맥페스티벌은 독일이 자랑하는 세계 최대맥주 축제인 뮌헨 '옥토버 페스티벌' 규모를 능가한다는 찬사를 받았다. 대구의 대표적 축제로 자리잡은 '대구치맥페스티벌'은 10년의 관록을 한껏 발산했다. 지난 6일 개막해 5일간의 일정을 마무리하고 10일 폐막한 대구치맥페스티벌은 대구 두류공원 일대에서 진행됐다. 참가인원의 집계가 불가능할 정도였다. 총 100만명이 다녀갔을 것이란 관측까지 나왔다. 96개 업체 231개 부스가 개설됐고, 맥주와 치킨에 더해 다채로운 프로그램이 가미돼 맛과 시선을 사로잡았다. 고소한 치킨에 냉장된 맥주로 곳곳에서 '건배'를 외치며 코로나19의 한켠에서 모처럼 찾아온 자유를 즐겼다. '치맥'의 매력에 빠진 외국인들도 감탄에 인색치 않았다. 치맥페스티벌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시아 최대 거리 퍼레이드 축제인 '파워풀 대구페스티벌'이 지난 8일 전야제를 시작으로 9일과 10일 대구 중구 국채보상로(중앙네거리~종각네거리) 일원에서 펼쳐졌다. '다시 축제로! Festival is back'이란 슬로건 아래, 참가 단체 퍼레이드, 도심 스트리트 콘서트, 거리 예술제 등의 콘텐츠가 선보였다. 페스티벌 첫날이었던 지난 9일 국채보상로 왕복 4~6차로 일원은 퍼레이드와 버스킹 공연장으로 변신했다. 폭염에도 불구하고 시민과 관광객들은 3년 만에 복원된 해방구를 만끽했다. 제16회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이하 DIMF)도 코로나19 이전의 열기를 되찾았다. DIMF 사무국에 따르면 20여만 명이 축제를 즐긴 것으로 집계됐다. 미국·영국·일본 등 해외 주요 프로듀서들도 축제장을 찾아 대구가 보유한 DIMF의 위상을 높였다. 올해 DIMF에서는 공식 초청작 5개, 창작지원작 5개, 대학생 뮤지컬 페스티벌 8개, 특별공연 3개, 온라인 상영작 1개 등 국내외 뮤지컬 22개 작품이 무대에 올랐다. 특히 코로나를 뚫고 돌아온 해외공연 초청작은 뮤지컬 갈증을 느낀 메니아들을 열광시켰다. 제16회 DIMF는 11일 오후 7시30분 대구오페라하우스에서 'DIMF 어워즈'를 끝으로 막을 내린다.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정지윤기자 yooni@yeongnam.com이남영기자 lny0104@yeongnam.com인파로 가득한 대구치맥페스티벌. 이춘호기자
외국인 "대구치맥페슨티벌은 마치 삼바축제 현장처럼 뜨겁다"
주말이던 지난 9일 밤 9시 '대구치맥페스티벌'(이하 치맥) 주 행사장인 대구 달서구 두류야구장에 마련된 프리미엄 치맥 클럽. 메인 스폰서인 카스의 로고가 새겨진 4천석 규모의 에어돔 잔디광장은 물론 관람석까지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인산인해였다. 무슨 록스타 콘서트장 같았다. 지난 6일 개막해 이날까지 나흘간 몰려든 인파만 족히 100여만명은 될 것이라고 페스티벌 주관사 측이 전했다. 순간 여기는 대구가 아니라 매년 10월 열리는 세계 최대 맥주페스티벌인 독일 뮌헨 '옥토버페스티벌' 현장 같았다. 2·28민주운동기념탑 주차장은 '수상 카페', 대구관광정보센터 주차장은 '치맥 포차촌', 잔디광장에 누워 포크 뮤직을 들을 수 있는 코오롱야외음악당은 '치맥 라이브 파크'로 변신했다. 한 손에는 치킨, 다른 손에는 맥주, 사람들은 작렬하는 태양 같은 미소와 웃음을 꽃처럼 피워냈다. 공식 캐릭터인 '치킹'과 '치야' 앞에서 인증샷도 날렸다. 몰려드는 인파, 그 자체가 사실 최고의 볼거리였다. 2014년 국내 첫 치맥축제의 신기원이 된 치맥페스티벌, 하지만 코로나19로 3년간 행사를 열지 못했다. 몸이 건질건질했던 시민은 그동안 짓눌렸던 마음을 치맥으로 뚫으려 한 것 같았다. 두류야구장~2·28민주운동기념탑주차장~야외음악당으로 이어지는 길은 제대로 교행하기조차 힘들 정도로 인파의 도가니였다. 이번 행사의 메인 캐치프레이즈인 '고생 끝에 치맥 온다'란 말이 실감 났다. 행사장 곳곳에 북소리처럼 울려 퍼지는 강렬한 EDM(전자댄스뮤직)과 디제잉, 힙합, 포크, 재즈, 군악대, 댄스 등 다양한 장르의 공연도 이어졌다. 치맥은 각종 공연과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며 돌아갔다. 개막식 축사를 한 홍준표 대구시장은 엄청난 인파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치맥페스티벌과 관련해 앞으로 대대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도 약속했다. 행사장에서 만난 미국인 제임스 테일러는 "이런저런 축제에 참석했지만 오늘처럼 분위기가 뜨겁기는 처음인 것 같다. 마치 삼바축제 현장 같다"며 "치맥 페스티벌 파이팅"을 외쳤다. 로컬 수제맥주 소비운동을 벌이고 있는 <주>대경맥주 문준기 대표는 "대구로선 황금알 낳는 대박 축제 하나를 건진 셈"이라며 "향후 치맥을 축으로 관광, 레저 그리고 공연기획산업 등을 융복합한 신개념 축제산업 비즈니스로 치맥을 활용했으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축제 참여자들은 행사장에서 멀게는 1㎞ 떨어진 곳에 차를 주차시켜 놓고 걸어서 축제장에 접근하는 성숙한 시민의식을 보여 주었다. 특히 '그린 페스티벌'을 위해 축제 주관사는 생수 브랜드 아임에코와 협업해 행사장에서 사용할 수 있는 플라스틱컵을 모두 생분해성(PLA)으로 제작·제공해 눈길을 끌었다. 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대구 달서구 두류공원 일원에서 열린 '2022대구치맥페스티벌' 메인 행사장인 프리미엄 치맥 클럽은 마치 독일 뮌헨 '옥토버 페스티벌' 현장을 방불케 할 정도로 인파가 가득했다.
[대구 가볼 만한 곳 - 힐링 여행 ] 리조트 스파밸리…숲속 동물 친구와 교감·방역지침 속 가족과 안전하게 즐기는 버블파티 짜릿
달성군 가창면 냉천리 스파밸리. 보이는 듯 안 보이는 듯 꾸준하게 성장해 왔다. 밖에서 보면 1개밖에 안 보이지만 실제 들어와 보면 99개를 더 챙길 수 있는 곳이다. 한때 물놀이 공간으로 한 시절을 쥐락펴락했다. 그런데 점차 힐링 리조트급으로 진화를 하기 시작한다. 동물원 옆에 수목원을 방불케 할 정도의 그린로드급 식물원과 테마숲이 조성된다. 그리고 평소 읽고 싶은 책을 탁자 위에 놓고 커피 한 잔의 여유를 가능케 해주는 숲속의 한옥호텔이 지어졌다. 어느 날 이런 것들이 기어처럼 하나로 연결되면서 리조트 스파밸리 워터파크로 우뚝서게 된 것.리조트 스파밸리는 숲속호텔 '호텔드포레', 교감형 생태동물원 '네이처파크', 건강한 물놀이를 즐길 수 있는 '워터파크'로 구성돼 있다. 2022년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공동 주관하는 웰니스 관광지에 선정되었다. 네이처파크는 호랑이, 사자, 흑표범, 하이에나 그리고 공작새 등을 볼 수 있고 이밖에 350여 종의 각종 수목을 볼 수 있다. 입구에는 당산목처럼 500년 된 느티나무가 신령스럽게 서 있다. 평일 기준 성인은 1만8천원(소인은 1만6천원). 호젓한 산책의 매력이 뭔가를 깨닫게 해 준다. 그 위쪽에는 편백나무 향이 가득한 한옥호텔 같은 호텔드포레가 있다. 하루 숙박료는 24만~28만원(조식 포함).물론 여름 시즌은 역시 워터파크가 강세. 한꺼번에 5천여 명을 수용할 수 있다. 지난 25일 개장한 리조트 스파밸리 워터파크. 이를 24시간 사수하는 스태프들은 마치 자신이 터미네이터가 된 것처럼 '스파밸리 이즈 백(Spavalley Is Back)'이라며 파이팅을 외쳤다.6월부터 서둘러 시작된 폭염. 그래서 서둘러 개장을 하고 더 안전하고 짜릿한 물놀이 인프라를 장착했다. 코로나 확산세가 주춤하긴 해도 더 안심하고 안전하게 즐길 수 있는 물놀이를 위해 기본적인 방역지침을 준수할 수밖에 없다. 실내 워터파크는 상시 환기 및 클린 타임을 수시로 시행하여 전 시설 소독을 진행하고, 워터파크 내 휴게 공간 및 슬라이드 대기 라인 등 물 밖에서의 밀집 활동공간은 모두 마스크 착용을 권장한다. 스파밸리 워터파크 실내시설 2층 펀펀존은 아이들을 위한 어린이풀과 워터마사지 시스템의 바테풀 등의 시설이 완비되어 있다. 야외시설은 동양 최대 26m 높이의 스피드 슬라이드와 트위스트 슬라이드, 부메랑&슈퍼볼 등의 다양한 슬라이드류 그리고 바다를 담은 듯한 파도풀은 스릴 만점의 아찔함을 선사한다. 파도풀은 10분마다 그리고 이벤트로 주말 오후 1~3시, 10~15분 간격으로 비누 방울을 퍼부어 버블파티를 즐길 수 있게 해준다. 이때 DJ가 율동적인 EDM 음악을 선사한다. 한때 라틴댄스팀이 원색적이고 고혹한 춤사위를 선사했는데 올해는 선보이지 않는다. 이밖에 파도풀 주변에 가설된 250m 길이의 유수풀, 25m 대형수영장, 노천 오행탕(약알칼리 온천수)에도 몸을 담글 수 있다. 워터파크 입장료는 성인 4만2천원(주말은 4만8천원), 골든타임인 오는 23~8월15일은 5만8천원. 하지만 다양한 할인 혜택이 있다. 자세한 워터파크 입장료, 운영시간 및 이용시설 내용은 홈페이지 참조. 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리조트 스파밸리 파도풀. 〈스파밸리 제공〉스파밸리 전경. 〈영남일보 DB〉
의료대란으로 번진 의대 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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