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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춘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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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生劇場 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한국첨성대연구소 박진수 소장(1) "첨성대에 아직 풀리지 않은 마지막 퍼즐, 청춘·신명을 다 바쳐 내 방식대로 풀다"
가끔 홀연한 길을 가는 사람이 있다. 어른이면 당연히 해야 될 밥벌이가 아니다. 남이 절대로 시도하지 않을, 남들이 '그것도 일이냐'면서 폄훼하고 무시하고 핀잔을 줄 만한 사명(使命) 같은 일, 그게 전혀 밥벌이와 상관이 없을 때, 그런 일에 목숨을 걸자면, 십중팔구 그 집안은 그런 사람 때문에 거덜이 날 확률이 높다. 동의보감과 대동여지도에 투신한 허준과 김정호도 그런 길을 걷지 않았겠는가. 고흐한테서 그림을 빼앗아 가버리면? 살아가야 할 이유가 있겠는가.나는 박진수. 예순다섯 해를 살아오는 동안 나는 솔직히 간이 배 밖에 나와 있었다. 남달리 감이 빠른 아내는 일찌감치 자기 남편이 곧이곧대로 살아갈 작자가 아니라는 걸 알아버렸다. 그녀도 배수진을 친다. '당신이 못 벌면 내가 벌면 된다'는 주의였다. 그렇다. 지금 우리 집 가장은 아내다. 지금도 궂은 식당일 해서 나를 먹여 살리고 있다. 그런 나를 아직 내다 버리지 않는 걸 보면 전생에서의 인연이 있었던 모양이다. 내 청춘은 일찌감치 윷과 성혈(性穴·Cup-mark)에 송두리째 헌납된다. 그리고 35세 무렵, 내 생애 최대 화두가 생겨난다. 전반기 윷과 성혈 연구에 힘입어 나름 쾌거를 이루는 과정에 우리 사학계는 물론 천문학계까지 난제 중 난제로 남겨진 경주 첨성대의 비밀을 내 방식대로 풀기로 결심한 것이다. 첨성대에는 아직 풀리지 않은 마지막 퍼즐 하나가 있다. 나는 내가 그걸 발견하고 싶었다.부귀공명과 무관한 첨성대 연구, 그게 박진수의 길이었다. 대체 누가 그 길을 자청하겠는가? 천지는 한 사람에게 막대한 신념을 주기 위해 무수히 많은 난관도 함께 선사한다. 그 흐름이 공적이면 공적일수록 그 난관의 강도도 배가된다. 무당을 만들기 위해 신병(神病)이란 고난의 행로가 필수조건으로 주어지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나도 '미스터 첨성대'가 되기까지 형언할 수 없는 극도의 궁핍, 고독 그리고 정상적인 길을 가지 않는 자에게 퍼붓는 빈정거림과 멸시, 모멸감 등을 감수하며 걸어왔다. 단 두 명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내 편이 되어주지 못했다. 첫번째는 놀랍게도 아내였고 두 번째는 예천 천문대 천문관을 지낸 나모 박사였다. 두 명의 도움이 없었다면 나는 벌써 북망산천으로 건너갔을 것이다.눈치가 빠른 사람은 감지했을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이 너무나 잘 아는 그 첨성대, 그것에 대한 고정관념을 일거에 파괴하고 가공할 만한 발견을 내 가슴에 비수처럼 감추고 있다는 사실을. 맞다. 내가 이 지면에 나온 것도 그것 때문이다.나의 연구는 전적으로 선덕여왕을 향한다고 말할 수 있다. 첨성대에 대한 비밀은 결국 선덕여왕과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첨성대는 국사 교과서에 적힌 그 천문관측대가 아니다. 그게 내 확신이다. 신라의 첫 여왕인 선덕여왕만이 감내해야만 했던 고뇌, 그것에 부합되는 상징물이 바로 첨성대였다. 세 남자를 남편으로 맞이했지만 후사를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초월적 힘을 불러올 수 있는 제의(祭儀)적 상징물이 필요했다. 그게 바로 첨성대였다.나는 경산시 하양읍에서 태어났다. 6남매의 둘째로 태어났다. 너무나 가난한 집안이라서 내 학력은 동구 해서초등 졸업이 전부다. 어떤 스님은 향후 닥칠 기구한 삶을 엿봤던지 날 스님으로 만들려고 공을 들이기도 했다. 나는 타고난 목공예가인 종형(석희)의 문하에 들어가서 나무 다루는 일을 조금 배웠다. 이후 건축업을 하는 자형(김찬규)을 만나 안목을 키웠고 이후 북구 침산동 성북건구사에서 창호 전문가로 전국을 돈다. 웬만한 물건은 다 나무로 만들 수 있었다. 숱한 목공품 중 나를 단숨에 사로잡은 게 있다. 바로 윷이었다. 윷은 성혈을 불러들였고 그걸 연구하면서 나는 천문대를 연구하는 귀신으로 젖어 들어갔다.글·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人生劇場 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한국첨성대연구소 박진수 소장(2)에서 계속됩니다.박진수 소장이 첨성대 맨 위에 올려진 백구정을 만들고 있다. 실제 첨성대 위에 백구정이 있었고 그 글씨를 설총이 적었다는 걸 입증하는 경주 순창 설씨 집안 문헌 기록도 있다.
[새날] 수묵화가 백천 서상언…모음·자음과 붉은 화점 '매화로 핀 한글' 수묵의 새 패러다임 제시
음악을 딛고 그림의 세계로 넘어온다는 것은 어떤 난관의 의미가 있을까? 10회 개인전, 매번 파격적 행보를 보이는 실험적 수묵화가 백천 서상언. 그가 한글날을 즈음해 제시한 10회 개인전 '한글 매화로 피다(대구은행 갤러리)'는 많은 걸 생각하게 만든다. 그가 전공영역인 음악을 버리고 그림으로 넘어온 15년 세월 중 낚아 올린 매우 의미 있는 전시로 평가받고 있다. 한글의 자음과 모음 그리고 매화. 이게 어떤 결구와 장법을 통해 융합된 목소리를 낼 건가. 그 기법이 내심 궁금했다.음악 교사 하다 빠지게 된 서예 매력가슴 벅차게 한 붓글씨…국전도 졸업전통 문인화와 접목 다양한 미학 시도심해·우주 공간까지 파고든 수묵 기운10회 개인전 한글 문자추상 해석매화 그림과 한글 조합…대담함·파격자음 14자·모음 10자 직선·곡선의 美매화도 다섯가지 묘법 '화매오요' 담아현대 수묵화 전대미문 사건 평하기도◆매회 변화였던 개인전백천은 모르긴 해도 국내 서화계에서 가장 빠르게 화풍을 변모시키는 작가로 보인다. 그는 왜 음악 교사에서 화가로 몸을 바꾸었을까? 2008년 생애 첫 전시회에 도록을 보니 그 속내의 일단이 피력돼 있었다. 계명대 음대를 졸업한 그는 시골 학교인 경남 창녕공고에서 교편을 잡는다. 고암중을 번갈아 가면서 학생들에게 음악을 가르쳤다. 그렇게 순탄하게 교사의 삶에 매진할 것 같았다. 그런 어느 날 장세진 국사 선생과의 만남이 그의 삶의 행로를 확 바꾸게 된다. 장 선생은 도서관 사서로도 일했는데 어느 날 백천은 그가 도서관 한쪽에서 수행자 같은 포스로 신문지 위에 부처 불(佛)자를 붓으로 적고 있는 광경을 목격한다. 그 모습이 너무도 평화롭고도 그윽해 보였다. 장 선생은 백천에게 "서예를 하면 심신 수양에 크게 도움이 된다"고 얘기했다. 순식간에 백천은 서예에 입문하고 싶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곧장 대구의 시내 필방에 들러 문방사우를 샀다. 내친김에 아호도 짓고 낙관까지 주문했다. 무서운 게 없던 애송이 시절이었다. 스스로 돌아보면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 몰랐던 시기'라 생각돼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린단다. 대륜고로 전근한 백천은 거기서 생의 두 번째 번뇌에 사로잡히게 된다. 나는 죽어서 무엇을 남길까? 그 자문에 그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밥만 축내고 있는 나날 같았다. 그때 '인생은 짧지만 예술은 길다'란 구절이 뇌리를 번개처럼 때리고 지나갔다. 예술에 대한 열망은 팽창하는데 일상과 일상에 매몰된 개인적 나날은 너무나 빈약해져만 갔다. 깊은 밤, 자기 삶을 세밀하게 반추한다. 그동안 나름 잘해 온 것이 음악이지만 훌륭한 음악가가 되거나 특출한 음반도 남기지 못할 것 같았다. '대체 난 무엇으로 나를 이 세상에 남길 것인가?' '붓글씨'란 화두가 가슴을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서예에 입문하기로 했다. 기본기 연마가 시작된다. 그렇게 백천은 동애 소효영의 가르침을 받게 된다. 동애가 입문자인 그에게 일침을 준다. "서 선생은 술도 좋아하고 운동도 좋아하고 음악까지 좋아하니 글을 쓸 겨를이 있겠냐"고 했다. '중도 포기'를 예감한 모양이다. "그렇지만 한번 지켜보겠다"고도 말했다. 백천의 가슴에 불을 지핀 것이다. 벌겋게 달아있는 난로 같은 기세의 백천은 공모전에 이어 국전도 졸업하게 된다. ◆스승의 그늘에서 벗어나자제자들의 모임인 동애 연서회와 태화 묵연전, 서협 회원전 등에 전시를 하게 된다. 하지만 자신의 작품을 보니 백천것이 아니었다. 아직 바다로 나가지 못한, 포구에 갇힌 배와 같았다. 이래 봐도 저래 봐도 스승의 색과 형상이었다. 어느 날 울먹이며 스승에게 그런 속내를 드러냈다. 당신으로부터 벗어나게 해달라고. 스승이 한 말씀을 전한다. "백천, 어찌 하루아침에 네 모습을 드러내려 하느냐. 공부가 더 충실해지고 창의성을 더 꾸준히 찾아봐. 그럼 언젠가 자네 진면목을 찾을 걸세."무엇이 처음이고 무엇이 끝인지 모르기만 했다. 사면초가의 나날이었다.서예에 문인화를 포개기 위해 동애 문하를 벗어나 계정 민이식 문하로 들어간다. 대구와 서울을 문지방 닳도록 들락거렸다. IMF 외환위기 때는 은행이자 때문에 어렵사리 샀던 아파트까지 날리게 된다. 수업료조차 감당하기 힘들었다. 스승은 그걸 알고 수업료를 모른척하기도 했다.2007년 대한민국서예대전에서 문인화 부분에 우수상을 받아 국전 초대작가로 등단하게 된다. ◆매번 새날인 작품들2008년 수성아트피아 호반갤러리 1회 개인전에서 최근 10회 개인전까지, 변혁적으로 출렁이는 그만의 화폭 스펙트럼을 보면, 순간 '이게 한 작가의 작품일까'란 의구심이 든다. 제1회는 전통 문인화에서 현대문인화를 건드렸다. 두 스승에 대한 예의였다. 첫 개인전 이후 다음 전시에 대한 해답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순간 고민 없이 다가온 먹의 질감과 깊이의 유희를 표현해 보고 싶었다. 제2회는 우리나라의 전통 서원, 고택, 유물 등을 소나무와 함께 해석한 작품전이었다. 대작인 '여명'은 가로 12m, 세로 2m 크기. 고송 옆에 경주 나원리 오층석탑, 옥산서원, 안동 만대루와 임청각, 경주 포석정, 심지어 계산성당도 앉혔다. 제3회는 통일을 염원하며 우리나라 산(백두산, 한라산, 북한산, 인왕산, 금강산)과 구룡폭포 등에 생뚱맞게 청와대를 갖고 와 슬쩍 얹었다. 제4회의 주제는 '고송(枯松)'이었다. 우리나라 고송의 아름다움을 전국을 다니며 본 것을 붓 가는 대로 그려냈다. '천년의 향기'는 가로 12m, 세로 1.5m 크기였다. 제5회는 고미(古美) 탐색의 과정이 담겨있다. 우리나라 국보의 아름다움과 소나무와 매화를 접목했다.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을 가슴에 안고 잠이 들었다. 소나무에 의탁한 작흥은 곧 신개념 불두(佛頭) 이미지로 건너왔다. 호흡을 다듬으면서 지난 역사의 시간을 뒤적거렸다. 그렇게 해서 찾은 가야의 미학을 주제로 제6회를 장식했다. 김해, 고령 외에 가야권 지방의 뿌리를 찾는 유물과 그 자신이 창의한 도예를 보여준다. 백천 버전의 금동관이 이때 태어난다. 시간을 거슬러 오르는 나그네. 그는 이제 우주로의 잠행을 시도한다. 노자와 장자의 동양정신을 장착했다. 제7회는 '우주 운석전'인데 우주로 향한 수묵의 기운을 뿜어낸다. 제8회는 우주 블랙홀과 바다 심해전, 제9회는 우주먼지와 우주공간을 파고든다. '빅뱅'이란 작품에서는 운석의 여백이 어떻게 음양·태극으로 연결되는가를 궁구한다. 동료 작가의 눈빛이 의아해지고 휘둥그레진다. 백천, 와도 너무 멀리 온 거 아닌가? 기존 문인화의 상도에 맞지 않을 것 같은, '해프닝 같은 그림'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 자신도 일순 조금 당황하고 난감했지만 '이제 달리 퇴로가 없다'면서 선을 그었다. 암담하고 갈 길이 보이지 않으면 울릉·제주도에 한 달가량 은거한다. 검푸른 바다와 심야 해풍의 서늘함 그리고 으스름 달무리, 그런 기척이 그의 근육 속으로 살금살금 녹아들었다. 아득한 깊이와 질감을 표현하고 싶었지만 기존 화방의 재료로는 한계가 있었다. 그런 재료로는 심원한 깊이의 우주를 담아낼 수 없어 새로운 재료를 찾아 나선다. 그렇게 해서 찾은 게 소금이다. 염분이 수묵 속으로 스며들어 가게 했다. 일종의 백천표 '염묵'(鹽墨)이랄까. ◆제10회 한글, 매화로 피다10회 개인전은 한글 문자추상을 독창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현대 수묵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달까. 지금껏 매화도에서 한 번도 시도된 바 없는, 한글 자모의 붉은 화점(花點)은 유니크한 매력을 준다. 발상의 전환이 빛난다. 법고의 아름다움이 창신의 새로움과 합치돼 심플한 미감(美感)을 불러일으킨다. 한글 자음 14자와 모음 10자의 직선과 곡선 미학은 초성과 중성 획의 무궁무진한 운용의 묘를 낳았다. 이응과 히읗의 곡선미는 문자추상의 절경을 이룬다. 한글 운필의 방향은 고정된 틀이 없다. 가로쓰기와 세로쓰기, 왼쪽과 오른쪽, 오른쪽과 왼쪽, 모든 필획은 공간 활용이 가능하다. 특히 대작 '한글, 매화로 피다'(140×300㎝)의 스펙터클한 구도가 볼만하다. 구불구불 뒤틀린 노매(老梅)의 풍상은, 매화를 그리는 다섯 가지 묘법인 화매오요(畵梅五要)가 다 들었다. 왼쪽 하단의 수백 년 묵은 밑동과 초묵의 몰골(沒骨) 번짐은 탐매선경(探梅仙境)이 따로 없다. 화폭을 양분한 구도의 멋과 여백미 또한 절묘하다. 오른쪽 곡선을 그리며 뻗어 내린 절매(折梅)의 의경(意境)이 돌올하다. 화폭마다 작게 그려 넣은 Fish(물고기)의 이니셜과 붉은 낙관 역시 멋을 더한다. 반면, 'ㅇ(이응)'은 모든 모음의 초성에 모셔져, 어미인 땅을 상징함과 동시에 불교의 공(空) 사상을 내포한다. 그는 "ㅇ(이응)이야말로, 직선과 곡선의 수묵 미학을 품은 한글 추상의 묘처"라고 말했다. 어떤 이들은 이번 백천의 한글매화전을 두고 '현대 수묵화의 전대미문의 사건'이라 평하기도 했다. 파격, 대담함, 변화, 그게 개인전 때마다 구현됐다. 그건 어쩜 아날로그가 아니라 백천만의 '새날로그'라고나 할까?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이응 매화''ㅎ 매화''ㅏ 매화''ㄹ 매화''ㅊ 매화'2008년 첫 개인전을 한 백천 서상언, 그는 그동안 모두 10번의 개인전에서 이전과 확연히 다른 화풍을 보여 화단을 놀라게 하고 있다. '한글 매화로 피다' 구불구불 뒤틀린 노매의 풍상은, 매화를 그리는 다섯 가지 묘법인 화매오요(畵梅五要)가 다 들었다. 왼쪽 하단의 수백 년 묵은 밑동과 초묵의 몰골(沒骨) 번짐은 탐매선경(探梅仙境)이 따로 없다.
[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김영복·이춘호 '한식 삼천리'] 불고기 이야기(2) 대구 갈비문화 연 '진갈비'…새로운 맛 몰고온 '연탄석쇠돼지불고기'
◆설야멱적조수삼이 쓴 세시기(歲時記)에서는 '설야멱을 일명 곶적(串炙)이라 하며 대나무 꼬챙이에 꿰어 굽는다'고 하였다. 조선 후기의 각종 놀이와 명절 풍속 등의 다양한 내용을 담은, 최영년이 지은 풍토세시기 해동죽지에 '설야적(雪夜炙)'이 나오는데, '개성부(開城府)의 명물로서, 소갈비나 염통을 기름과 훈채로 조미하여 굽다가 반쯤 익으면 찬물에 잠깐 담갔다가 센 숯불에 다시 굽는다. 눈 오는 겨울밤의 안주로 좋고 고기가 매우 연하여 맛이 좋다'고 하였다. 삼성판 한국어대사전에는 '설적(薛炙)'이 나온다. '송도 설씨(薛氏)가 시작한 데서 유래한 말로, 소고기나 소의 내장을 고명하여 꼬챙이에 꿰어 구운 음식'이라고 쓰여 있다. 설적을 만드는 방법이 세시기에 나오는 설야멱과 같은 것으로 미루어 설야멱(적)이란 말이 '설리적'을 거쳐 '설적'으로 변하면서 그럴듯한 유래가 생긴 것으로 보인다.설야멱은 '눈 내리는 밤에 찾는 고기'라는 뜻인데, 조선 순조 때 조재삼이 쓴 송남잡식(宋南雜識)에 의하면 '중국 송나라 태조가 눈 오는 밤에 진(晉)을 찾아가니 숯불 위에 고기를 굽고 있었다는 이야기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런데 1800년대 말 작가 미상의 시의전서(是議全書)에 '큰 잔치나 제사에는 일곱 가지 적을 쓰는데, 고기산적 외에 생선적·족적·닭적·꿩적·양서리목·간서리목'이라는 글이 있다. 여기서 '서리목'은 설야멱을 뜻하는 것으로 소의 밥통고기인 양이나 간을 넓게 썰어 잔칼집을 넣고 꼬챙이에 꿰어 석쇠에 구운 음식이다.그러면 우리말의 '-서리목'은 단순히 한자어 '雪夜覓⇒雪裏炙'에서 유래한 말일까? 옛글에서 '서리'는 '사이·가운데'를 뜻하고 '목'은 '몫·꿰미'를 뜻하던 순수한 우리말이었다. 현대어 '목돈'도 그 잔재다. 가운데가 구멍 뚫린 엽전을 꾸러미로 엮어 허리춤에 꿰어 차고 다니던 지난 시절에 얼마 안 되는 몇 푼의 돈이 '푼돈'이고, '목돈'은 엽전 꾸러미에 가득 꿴 한 몫의 돈에서 비롯된 말이다. 그러므로 '雪夜覓·雪裏炙·雪下炙·薛炙'은 한글을 천시하던 지난 시절에 양반들이 '고기를 사이사이 꿴 한 몫의 음식'이라는 뜻을 가진 우리말 '-서리목'을 비슷하게 소리 나는 한자어로 옮겨 표기한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된다. 옛 음식책에는 대부분 '고기를 꼬치에 꿰어 굽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석쇠나 번철이 널리 보급되면서 고기를 굳이 꼬치에 꿰어 구울 필요가 없게 되어 지금은 산적류만 꼬치에 꿰어 굽는다.불고기는 조리 방법에 따라 미리 양념에 재웠다가 굽는 '양념구이'와 생고기를 그대로 썰어 굽는 '소금구이'가 있고, 굽는 방법에 따라 숯불구이, 석쇠구이, 돌판구이, 철판구이 등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예천 용궁 매콤 달콤한 오징어 불고기고춧가루 없는 복불고기 개발로 화제1957년 불고기 전문 '계산땅집' 오픈 한방 가미한 돼지불고기 시대 열기도칠성시장 화근내 뿜는 연탄석쇠불고기10여곳 성업하다 단골·함남식당 명맥북성로 돼지불고기 포차촌 명성 이어옛 국제극장 골목과 불고기 문화 3인방◆너비아니와 방자구이시의전서에 정육을 얇게 저며 양념한 것을 '너비아니'라 하였다. 조선요리제법(1939년)에서는 우육구이(너비아니) 만드는 법이 나온다. '고기를 얇게 저며서 그릇에 담고 간장과 파 이긴 것·깨소금·후추·설탕을 넣고 잘 섞어서 굽는다'고 했다. 지금의 '양념구이'인 것이다. '너비아니'란 말은 소고기를 너붓너붓하게 썰어서 굽기 때문에 나온 것이라고 한다.옛날에는 소금구이를 '방자구이'라고 했다. 방자(房子)는 춘향전에 나오는 이몽룡의 하인 이름으로 알기 쉽지만 사실은 지난 시절에 고을 원님의 수발을 들던 남자 하인을 가리키는 보통명사다. 손님 안내와 공물 전달의 역할도 맡았던 방자는 등심이나 가슴살 등 원님의 밥상에 오르는 소고기 중에서도 가장 맛있는 부위를 이따금 몰래 떼어내어 제대로 씻지도 않은 채 소금만 뿌려서 재빨리 구워 먹는 특권(?)도 누렸다. '방자구이'란 말은 이래서 유래한 것이다. 방자구이에 대하여 1924년 위관(韋觀) 이용기(李用基)가 지은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朝鮮無雙新式料理製法)에서는 '연한 고기를 얇게 저며서 씻지 말고 그냥 석쇠에 놓고 구워 먹으면 고명(=양념)한 것보다 더 맛있고 영양가도 높다'고 했다. 소금구이를 할 때 등심을 재료로 쓰면 '생등심구이', 갈비를 재료로 쓰면 '생갈비구이'라고 한다. 소금구이로 쓸 고기는 양념에 재울 고기보다 육질이 더 부드러워야 한다.◆대구의 불고기 역사불고기는 갈비문화와 혼재돼 진화를 했다. 대구는 갈비와 불고기의 고장은 아니었다. 하지만 대구만큼 다양한 스타일의 불고기를 개발한 곳도 드물다.한국의 불고기는 정말 다양한 스타일로 진화를 한다. 주재료도 소와 돼지에서 벗어나 닭과 염소, 그리고 복어, 오징어 등도 불고기로 태어난다. 크게 보면 육수와 채소를 가미한 '전골 스타일', 서울시 마포구에 있는 역전회관은 물기가 없는 '바싹 불고기 스타일', 의성군 중앙시장 내 쇠머리국밥으로 유명한 남선옥은 '양념석쇠 스타일', 전남 담양시 덕인관은 '떡갈비 스타일', 예천군에 가면 오징어·복어불고기가 유명하다.1957년 대구시 중구 계산동 현재 대동면옥 바로 옆에 초강력 불고기 전문식당이 탄생한다. 바로 '계산땅집'이다. 일본 오사카에서 요리를 배우고 귀국한 대구 출신의 박복윤씨가 오픈한다. 한때 한강 이남에서 가장 많은 불고기를 팔았다. 이 특수 때문에 강산면옥, 황해집, 남포집 등 지역의 냉면집도 불고기를 취급한다.우리가 알고 있는 갈비구이와 불고기는 달달한 양념이 생명. 왜간장·설탕·미원의 합작품이다. 그중에서도 설탕이 가장 강력한 맛을 낸다. 설탕은 53년 6월 등장한다. 대구의 양조간장 본산 격인 삼화간장. 53년 11월 중구 남산동에서 태어난다. 대구의 갈비문화는 계산땅집보다 4년 늦은 대신동 '진갈비'에서 형성된다. 계산땅집과 진갈비를 벤치마킹하고 거기에 고춧가루와 마늘을 가미한 것이 '동인동찜갈비'다.아무튼 계산땅집 특수를 이어받아 종로땅집·북성로땅집이 생긴다. 연이어 대구은행 대신점 근처 삼성갈비, 향촌동 향미, 시청 근처 합승면옥 등이 가세한다. 60~70년대 대구는 불고기천국이었다. 맹렬한 기세의 소불고기는 80년대까지가 전성기였다. 불판에 구멍이 뚫린 벙거지 스타일의 불판은 이제 지역에서는 보기 힘들다. 1979년 오픈한 중구 교동시장 근처 원도매식당에 가야 추억의 불고기 맛을 느낄 수 있다. 솔직히 소불고기 전통은 새로운 시대를 이끌지 못하고 주저앉고 말았다.대신 신개념 불고기가 새로운 맛을 몰고 온다. 그게 바로 대구가 메카랄 수 있는 '연탄석쇠돼지불고기'다. 칠성시장, 북성로, 옛 국제극장 골목이 새로운 불고기 문화를 선도한다. 돼지불고기의 경우 70년대 중반 현재 노보텔 대구 뒤편에서 오픈한 '팔군식당'이 지대한 영향을 준다. 한때 계산땅집과 쌍벽을 이룬다. 삼겹살보다 저렴한 다리 살에 고추장·고춧가루를 버무려 불고기를 구워 팔았다. 대박이었다. 한때 '대구 돼지불고기의 대명사'로 군림한다. 이 흐름은 78년 남구 대명동에서 태어난 '대원돼지숯불갈비집'으로 이어진다. 대구의 첫 돼지갈비구이집이다. 이후 그 흐름은 남부정류장 근처의 미정이 '한방양념돼지갈비' 시대를 연다. 그 주역은 김태근한방돼지불고기 시대를 연 전 대구조리사협회장이었던 김태근 씨였다. 하지만 팔군도 비슷한 시기에 태동한 이들 3인방 연탄석쇠돼지불고기한테 주도권을 뺏기고 만다.◆칠성시장·북성로 불고기북성로 돼지불고기의 형님 격인 연탄석쇠불고기집이 칠성시장 내에 두 곳 있다. 바로 '단골식당'과 '함남식당'. 단골식당이 선배 격이다. 화구별로 아줌마가 붙어서 연신 석쇠를 화로에 내리친다. 기름이 연탄불에 떨어지자 순간 30~60㎝ 불꽃이 인다. 그 불기운이 석쇠 속 고기에 들러붙어 '화근내(탄 냄새)'를 낸다. 60년대 초 친구 간인 유말선·김분선 할매가 동시에 석쇠불고기를 선보였다. 그 집이 잘되자 순식간에 10여 군데로 불어났지만 나중에 두 곳만 남고 다 사라진다. 옛 전매청 네거리에서 옛 금호호텔 네거리로 가는 서성로에는 서쪽으로 빠지는 골목이 4개가 있다. 세 번째 골목이 바로 북성로 돼지불고기의 탄생지. 정모씨로 알려진 한 포장마차 주인이 대구은행 북성로 지점 근처에서 돼지불고기를 '가락국수'와 함께 팔았다. 이게 북성로 불고기 시대의 시작이다. 불고기는 칠성시장 석쇠불고기, 가락국수는 당시 대박을 터뜨렸던 분식점, 동성로 미성당의 가락국수를 벤치마킹한 것으로 보인다. 정씨는 불과 1년을 못 넘기고 박정만씨에게 바통을 넘긴다. 박씨도 대구은행 북성로 지점 주차장 자리에서 '대구은행 앞 돼지불고기'란 상호로 장사를 했다. 박씨도 비명횡사를 한다. 아무튼 그 무렵 6곳이 더 생겨난다. 그곳의 터주 격이었던 원조북성로불고기 최진수 사장도 2007년 뇌출혈로 타계한다. 북성로 불고기 개국공신은 다들 우울한 말로를 맞았다. 절정기에는 준호집, 북성로일번지, 부산갈매기, 달맞이, 불타는청춘, 디웅박, 신라의달밤, 태능집, 장작불, 오뚜기, 좋은날, 북성로포장마차 등 모두 13곳이 포진했다. 최근 인근이 아파트촌으로 개발되면서 더 이상 추억의 포차촌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게 돼 성장세를 잃어가고 있는 게 현실이다. 북성로는 초벌구이를 해뒀다가 주문받으면 재벌구이해서 내보낸다. 북성로는 젊은 단골이 많아서 자연스럽게 기름이 별로 없는 뒷다리(후지)를 사용하게 됐다. 미리 초벌한 탓에 맛이 좀 퍽퍽하다. 칠성시장은 목살, 삼겹살, 갈비 등 돼지의 온갖 부위를 사용하고 석쇠에서 딱 한 번 만에 구워내기 때문에 더 졸깃하고 향미도 강하다. 대담=김영복 식생활문화연구원장·이춘호 음식전문기자 정리·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예천군 용궁면에 가면 오징어불고기를 맛볼 수 있다.김태근한방돼지불고기예천읍에 있는 한국관은 고춧가루 없는 맵지 않은 복불고기를 개발해 화제가 됐다.대구의 북성로 불고기는 가락국수가 세트로 붙어 다닌다.칠성시장, 북성로와 함께 대구 연탄석쇠불고기의 3인방이 된 옛 국제극장 옆 불고기골목 전경.
[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김영복·이춘호 '한식 삼천리'] 불고기 이야기(1) 肉과 火의 향연
'불고기'라는 단어는 옛 문헌에서 그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다. '불(火)'과 '고기(肉)'는 한글 창제 초기와 그 뒤 여러 문헌에서 볼 수 있으나 불과 고기의 복합어인 불고기는 중세어, 근대어의 어느 문헌에서도 볼 수가 없다. 100여 년 전 한국에 온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펠릭스 클레르 리델에 의해 1880년 일본 요코하마에서 간행된 한불사전, 1911년 선교사 게일에 의해 출판된 한영사전은 물론 1938년에 간행된 문세영의 조선어사전에서도 불고기란 단어는 찾아볼 수가 없다. 불고기란 단어가 제시된 첫 사전은 1950년 한글학회의 큰 사전(제3권)이었다.김기림 시인이 1947년 잡지 학풍(2권 5호)에 발표한 '새말의 이모저모'란 글에 불고기의 전파력에 대한 글이 나온다. '물론 간혹 그중에는 대중의 필요와 입맛에 맞는 것이 있어서 국어 속에 채용될 적도 있으나 그것은 실로 어쩌다 있는 일이다. 초밥과 같이 비교적 잘 되어 보이는 순수주의자의 새말조차가 얼른 남을 성싶지도 않다. 거기에 대하여 불고기라는 말이 한번 평양에서 올라오자 얼마나 삽시간에 널리 퍼지고 말았는가'라는 대목이다. 북한의 3대 불고기. 평양의 순안 불고기·강원도의 송도원 불고기·황해도의 사리원 불고기를 꼽는다. 평양의 별미인 순안 불고기는 남한의 일반 불고기만큼 자극적인 맛은 아니다. 소 등심을 칼등으로 두드려 부드럽게 만든 후 파와 마늘은 다지고, 배는 갈아서 즙을 짜 간장에 다진 파, 마늘, 설탕, 식초, 배즙, 참기름, 후춧가루, 깨소금을 넣어 양념장을 만든다. 소 등심을 얇게 저미어 양념장에 30분간 재운 다음 육수를 자박하게 붓는다. 재운 고기는 석쇠에 펴놓고 숯불에 구워 간장과 식초를 섞은 초간장에 찍어 먹는다.송도원 불고기는 검은 돌판에 구워 먹고 사리원 불고기는 사리원 특산물인 포도주와 과일을 이용한 양념으로 재운 후 먹는 양념 불고기다. 달콤한 양념이 밴 불고기와 심심한 국물까지 함께 먹는 사리원 불고기는 구이보다는 전골에 가까운 느낌이다. 어쩌면 짐승의 고기를 불에 구워 먹는 불고기는 평안도 지방의 방언으로 시작되어 평양에 올라오자 평양의 인기 있는 음식이 되었고, 이 불고기가 광복과 함께 평안도 피란민들에 의해 서울 장안에 진출한 것이다.실제 1947년까지도 서울에는 불고기라는 음식명을 쓰지 않았다. 다만 남대문 시장 같은 데서 평안도 피란민들이 하는 허술한 음식점에서나 볼 수 있었을 뿐이다. 결국 1950년 큰 사전에 불고기라는 단어가 올라가게 된 것이다.그렇다면 '불고기'라는 단어가 1940년대에 등장한다고 해서 불에 고기를 구워 먹는 습속이 1900년 중반부터라고 단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선사시대의 원시인들은 짐승을 잡으면 날고기를 그냥 뜯어 먹다가, 점차 고기를 말려서 오래 두고 먹는 법을 알게 되었고 인류가 불을 이용하게 되면서 본격적인 요리의 역사가 시작되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고기를 꼬챙이에 꿰어 모닥불에 직접 굽다가, 돌판 위에 올려놓고 굽게 되었고, 석쇠에 올려놓고 굽는 과정을 거쳐 번철이나 불판을 이용하는 오늘날의 요리법이 나오게 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우리 민족의 고기를 구워 먹는 요리법은 오랜 세월 동안 수렵과 목축으로 생활해 오던 대륙의 북방민족에서 유래한 것이다. 고구려 고분벽화 안악 3호분을 보면 고기를 굽는 사람들을 묘사한 그림이 있는데, 중앙의 푸줏간에는 4개의 거대한 쇠스랑 고리에 노루, 돼지 등 짐승고기가 통째로 매달려 있다. 고구려는 사냥기술이 발달해 상대적으로 육식을 많이 했고, 특히 돼지고기를 즐겨 먹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고구려인은 사냥한 짐승고기를 된장, 간장 같은 저장음식으로 간을 한 뒤 훈제해 구워 먹었는데, 이것이 오늘날 한국식 불고기 문화로 이어졌다고 봐야 할 것이다.고려의 수도 개경에서는 멱적(覓炙)이 설하멱적(雪下覓炙)·설리적(雪裏炙)·설야적(雪夜炙) 등의 이름으로 되살아나서 이것이 지금의 불고기로 이어지고 있다.조선 중기 문신이며 시인인 이응희(1579~1651)가 쓴 옥담시집(玉潭詩集) 만물편(萬物篇) 음식류에 '적(炙)'이라는 불고기에 대한 시가 있다. 조선 숙종 때 문신이자 실학자 홍만선이 쓴 '산림경제'에 '우육(牛肉)을 썰어서 편(片)을 만들고 이것을 칼등으로 두들겨 연하게 편 것을 대나무 꼬챙이에 꿰어서 유염(油鹽·전통간장)으로 조미해 기름이 충분히 스며들게 한 다음 숯불에 굽는다'라고 불고기 굽는 법이 나온다. 거기서 설야멱적 이야기가 등장한다. 대담=김영복 식생활문화연구원장·이춘호 음식전문기자 정리·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김영복·이춘호 '한식 삼천리'] 불고기 이야기(2)에서 계속됩니다.고려의 수도 개경에서는 멱적(覓炙)이 설하멱적(雪下覓炙)· 설리적(雪裏炙)· 설야적(雪夜炙) 등의 이름으로 되살아나서 이것이 지금의 불고기로 이어지고 있다. 불고기란 단어가 제시된 첫 사전은 1950년 한글학회의 큰 사전(제3권)이었다. 사진은 대구 별미인 연탄석쇠돼지불고기.칠성시장 내 연탄석쇠돼지불고기의 양대 산맥인 함남과 단골식당 골목 전경.
[동대구로에서] 가을에 생각나는 고인들
올해 유독 색깔이 강한 사내들이 많이 죽었다. 시인 김지하, 소설가 이외수, 가수 이동원 그리고 양병집, 실내건축가 박재봉, 최근에는 '만다라'란 장편소설의 작가 김성동, 해박한 지성의 상징이었던 이어령 등이다.양병집은 김민기·한대수와 함께 유신정권으로부터 철저하게 부정된 진정한 한국 포크 1세대 리더. 70년간, 참으로 포크스럽게 살다 갔다. 부산 출신인 그는 음악의 꿈을 좇아 서라벌예대 음대 작곡과에 입학한다. 부친 반대로 음악학도의 길을 접고 증권사에 입사했지만 '끼'는 잠재울 수가 없었다. 1972년 한 포크 경연대회에 동생(양경집)의 이름으로 참가해 3위로 입상했다. 그때 부른 노래가 밥 딜런의 '돈트 싱크 트와이스 잇츠 올 라잇'에 직접 노랫말을 붙인 그의 대표곡 '역(逆)'이었다. '요지경 세상'을 풍자했다. 이 노래는 김광석이 1996년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로 리메이크하면서 크게 유행한다. 주최 측이 그의 이름을 '양병집'으로 잘못 불렀고 그게 예명이 된다. 1980년대 그가 운영한 음악 카페 '모노'는 밴드 들국화 결성의 모티프가 된다. 말년에 자전적 소설 '밥 딜런을 만난 사나이'도 출간했지만 말년은 우울하고 고독했다. 서울역 앞 지하도에서 혼자 노래 부르는 장면이 유튜브에 공개되기도 했다. 포크뮤지션의 길을 선택한 죗값일까.건축계의 '밥 딜런'? 그렇게 살다 간 건축쟁이가 바로 박재봉이다. 경북고·서라벌 예대 회화과를 졸업했다. 1970∼90년대, 실내건축(인테리어)의 한 흐름을 주도하며 핸디환경디자인연구소를 개소한다. 그 문하생이 바로 이용민(고인) 그리고 이병재 등이다. 이병재가 방천시장 안에 지은 유럽스러운 집에 국제적 인지도를 갖고 있는 클래식기타리스트인 이성우가 살고 있다. 이성우, 이병재, 이용민, 울산의 괴짜 시인 구광렬, 영화감독 이명세, 시인 채호기, 음유시인 이무하 등은 죽마고우다. 이성우는 이무하를 위해 올해 음악회를 열어줬다.아무튼 박재봉은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환경'이란 개념을 건축에 투입한다. 대봉동 전상진 패션, 카페 늘봄·가전·풀하우스, 뉴욕피자, 수성못 뉴욕뉴욕, 범어동 아트리움 레스토랑, 빈들교회 등이 그의 작품. 일본의 대표적 건축가인 이타미 준과는 절친이었다. 대충 건축은 용납하지 않았다. 자신이 원하는 건물이 될 때까지 장구하게 오랜 시간, 건축주를 기다리게 만들었다. 지독한 고집쟁이였던 그의 말년 역시 을씨년스러웠다. 앞산 보성맨션에서 빈방처럼 기거했다. 그를 기억하는 이들이 지난해 회고 사진전(신라 갤러리)을 열어주었다. 저들의 삶을 한 단어로 줄이면 내 갈 길대로 가니, 포크 라이프!'포크'란 꽃이 여기저기서 풍성하게 피고 있다. 대구 출신 싱어송라이터 박창근, 그는 올해 국민포크싱어로 등극, 지난달 30일 대구포크페스티벌 주 무대에 섰다. 오는 8일 광주에서는 제7회 달빛통맹(대구광주통기타동맹) 광주콘서트 그리고 9일에는 해인사가 달빛포크협회와 손을 잡고 제1회 달빛음악회를 연다. 신개념 산사음악회랄까. 대구 채의진·광주 기드온 밴드가 재즈가수 웅산, 최성수, 주현미, 국악인 남상일 등과 공연한다. 이 음악회는 대구와 광주를 잇게 될 달빛열차 중간 환승역(가칭 해인사역)을 기원하며 영호남 포크뮤지션과 동행하는 취지를 갖고 있다. 이 가을, 포크의 선율이 고인의 넋을 더 투명하게 빚어줄 것 같다.이춘호 주말섹션부장 겸 전문기자이춘호 주말섹션부장 겸 전문기자
[人生劇場 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화가 권기철(2) 내 예술의 두 축은 동양의 선의 율동과 서양의 색채감이다…붓이 그 둘을 이어주다
두 손 장애로 생긴 비범한 감각세월의 소리 형상화…이미지 차용진짜 내가 아닌 그림자 일 생각그런 날 최고의 위안은 '大醉'정신이 표상하는 것은 내적 깊이재료의 물성에서 자유롭고 싶다'길 밖'이 답이라 선문답하는 자들의 짓거리 또한 그 얼마나 유치찬란한 '수작(酬酌)'인가. 나는 서둘러 그걸 외면한다. 이것을 해도 서글프고 저것을 해도 푸르죽죽할 때, 죽지도 아니 살지도 못하는 절체절명의 동굴에 갇혔을 때, 이윽고 빛도 증발하고 대화도 절멸했으니 혀도 소용이 없어 빼 버린다. 귓구멍도 빼 버리고…. 그렇게, 도무지 세상일이 모두 시시해 보일 때, 나는 바다도 대륙도 허공도 밤하늘도 빗줄기도 바람도 눈발도 용암도 오로라도, 더 아득하게는 블랙홀이라도 묵주처럼 돌리고 싶은, 내 삶이 내 것도 아니고, 내 생명도 내 것이 아니고, 꾸역꾸역 떠올릴 생각과 사념이란 것 역시 무용지물이 되어버린, 그런 아득하고도 난감한 한 시절, 낚싯바늘에 걸려 초겨울 옥수수 이파리처럼 20대를 맞이하였다.내 생의 여명기에 필적할 수 있는 단 하나랄 수 있는 문장이 있다. 그 글의 주인공은 저세상으로 가버린 소설가 '박상륭'. 그의 출세작, 그러면서도 아직 완전한 해석이 이루어지지 않은 장편소설, '죽음의 한 연구'의 길디긴 구절이다. 나는 이 시대의 예술쟁이에게 그 찬연작작한 '혈문(血文)'을 헌정하고 싶다. '득의만면한 자에게는 참수 같고 실의낙담(失意落膽)한 이에게는 번개 같은 기운으로 다가설 것이다. 공문(空門)의 안뜰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바깥뜰에 있는 것도 아니어서, 수도도 정도에 들어선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세상살이의 정도에 들어선 것도 아니어서, 중도 아니고 그렇다고 속중(俗衆)도 아니어서, 그냥 걸사(乞士)라거나 돌팔이중이라고 해야 할 것들 중의 어떤 것들은, 그 영봉을 구름에 머리 감기는 동녘 운산으로나, 사철 눈에 덮여 천년 동정스러운 북녘 눈뫼로나, 미친년 오줌 누듯 여덟 달간이나 비가 내리지만 겨울 또한 혹독한 법 없는 서녘 비골로도 찾아가지만, 별로 찌는 듯한 더위는 아니라도 갈증이 계속되며 그늘도 또한 없고 해가 떠 있어도 그렇게 눈부신 법 없는 데다, 우계에는 안개비나 조금 오다 그친다는 남녘 유리로도 모인다.'◆묵률과 색률나는 세월의 소리를 그려내는 사내, 권기철이다. 내 몸의 양대 제약조건이 있다. '묵률(墨律)'과 '색률(色律)'이다. 묵률은 동양의 미학으로 대별될 것이다. 중국 진시황때 승상이었던 이사(李斯)를 시켜 중원의 문자를 '소전(小篆)'으로 통일하려고 했던 때부터 조선의 겸재 정선, 신윤복, 김홍도, 그리고 추사 김정희가 구현해나간 해동 문인화의 신지평, 색률은 선사시대 알타미라, 라스코의 동굴벽화가 중세의 성화, 그리고 르네상스기의 세 천재를 딛고 현대 추상미술의 시원이랄 수 있는 세잔, 그리고 고흐·마네·모네, 야수파의 마티스, 입체파의 피카소, 칸딘스키, 말레비치, 몬드리안의 색면분할 혁명,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던 1917년 변기를 샘이라 내밀었던 뒤샹, 그리고 미국발 액션페인팅의 삼대 산맥인 마크 로스코, 잭슨 폴록, 드 쿠닝, 마지막엔 예술 옆에 팩토리(Factory)를 부쳤던 앤디 워홀과 그 수하인 바스키아, 그리고 스스로를 황색재앙(Yellow peril)이라 선언한 비디오아트 창시자인 백남준….빌어먹을, 그럼 나는 어떻게 저 색채의 우주를 내 칼집에 넣지. 한없이 불콰해진 깊숙한 밤에 물끄러미 내 두 손을 내려다본다. 나는 두 손이 성치 않다. '병신'이다. 5세 때 작두에 내 오른손이 절단된다. 간신히 봉합했지만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다. 의족을 달고 있는 거나 진배없다. 그게 전화위복이 되었다. 맹인과 벙어리가 남다른 감각을 가진 것처럼 나도 그 장애 때문에 비범한 감각을 갖게 됐다. 그리고 2019년 11월23일 왼손 새끼손가락 한 마디를 또 잃었다. 그날 나는 어이가 없어 그냥 어이쿠 하며 실소를 터트렸다. 어느 날 밤, 그림이 나더러 그랬다. "너에게 열 개 손은 너무 많다"고 했다. 그렇게 내 손가락 하나는 세월이 내민 레드카드 때문에 퇴장되어버렸다. 해를 넘기자 나는 '신의 한 수'를 수긍할 수 있었다. 난 방금 내 예술의 기수역에 틈입했다. 지난 시절이 포구에 갇힌 시절이라면 지금은 용암보다 더 붉은 파도가 넘실거리는 바다에 있다. 강의 시절과 바다의 시절이 내 유전자 안에서 선과 악처럼 교직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난 제1기 권기철과 작별 하고 있다. 다음으로 가기 위해선 희생물이 필요하다. 예술가는 '무당'. 자신의 영혼에 방점을 찍어주는 그 어떤 초월적 존재를 위해 뭔가를 제단에 제물을 바쳐야 한다. ◆미학의 변곡점먹구름과 천둥, 비바람이 억수 같이 쏟아지던 하늘이 일순 구름 한 점 없는 가을하늘로 돌아서는 그 변곡점을 이제 이해할 수가 있을 것 같다. 내 일상은 늘 피 냄새가 스멀거리며 다가서는 축제와 전쟁의 나날이다. 그래서 나는 쪼잔하게 일출과 일몰 사이에 살지 않는다. 자전과 공전 사이에도 살고 싶지 않다. 그렇다고 전설과 신화를 큰형으로 모시고 싶지도 않다. 나는 당당히 그리고 온전하게 성스러운 나이고 싶다. 하지만 항상 진짜 내가 아니라 내 그림자인 경우가 많다. 그런 날 최고의 위안은 대취(大醉)다. 새벽녘 자리끼(머리맡 물)를 찾을 때 느끼는 비어 피어(Beer fear·술 취했을 때는 몰랐다가 깰 때 자각될 때 다가서는 일종의 자책감), 수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결국 아무도 만나지 않은 것과 같달까. 모든 인연이라지만 실은 무연(無緣) 아닌가? 캔버스! 그 놈도 우주다. 깊이도 넓이도 없다.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리는 자는 과연 나일까? 고도의 기술이 절정을 얻어 어떤 명성을 얻겠지만. 글쎄, 그건 고작 장인의 수준 아닐까? 그림이 예술이 되려면 내가 화가여서는 안 된다. 항상 화가보다 그림이 이겨야 된다. 늘 그림이 주인공이다. 그림이 화가에게 말을 걸어오기까지, 그 장구한 시간은 무엇으로 버텨야 하는가. 평생 붓만 들고 단 한 점도 그리지 못한 자는 누굴까? 어쩜 그자가 가장 고수인지도 알 수 없다. 기본이 근본이란 생각. 그 기본이라는 게 나를 지탱하면서도 일순 그 놈의 목을 댕강 잘라 버려야 된다. 상품과 작품의 경계란 너무나 난감하다.그동안 나름 괜찮게 색을 쓰며 살아왔다. 그림도 적잖게 팔아먹었다. 삼국지보다 더 다사다난한 해를 다다이즘, 앵포르멜처럼 허덕거리며 기어 온 것 같다. 올해 가을, 나는 비로소 맑은 하늘을 객관적으로, 그리고 비교적 무심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6번째 도록우여곡절 끝에 6번째 도록이 며칠전에 나왔다. 2001년 서울시립미술관, 2004년 베니스비엔날레, 200점이 넘는 작품을 걸었던 대구보건대 인당미술관전(2014년)을 딛고 나는 얼추 나를 찾게 된 것 같다. 내 예술의 두 축은 동양의 선의 율동, 그리고 서양의 색채감이다. 붓이 그 둘을 이어주고 있다. '음악에 색이 있고 소리에도 색이 있다'고 명징한 형태까지 읽게 한 작곡가는 무소르그스키다. 음악적 요소들이 미술에 적용된 예는 많다. 내 그림 역시 소리를 형상화함에 있어 구체적인 음악적 인자인 박자, 리듬, 화음, 멜로디, 하모니 등을 중요한 이미지로 차용한다.화면 위에 나타나는 박자나 멜로디는 선의 빠름과 느림으로, 리듬은 굵고 가늘기로, 또는 길고 짧음으로, 화음은 정적인 공간으로 처리되며, 불협화음은 이질적인 색으로 전체 화면에 나타난다. 색채(色彩)의 강약은 소리에 대한 음색으로 나타난다. 사람의 감정을 자극하는 효과가 있는 색채의 특성상, 그것은 흥분과 추스름, 딱딱함과 부드러움, 때로는 경쾌함과 장중한 무게를 드러내는 심리적 동인이 된다. ◆점의 정체성점(點)은 정체성 확인을 위한 하나의 시각적 과제로 본다. 선이 초월하고자 하는 욕망의 표현이라면, 점은 함축과 절제 속의 또 다른 나다. 망막에 고정된 묘사의 대상이 아니라 소리에 관한 청각의 시각적 표현이다. 그러므로 자연의 소리나 일상의 소리 등 모든 행위로 발화하는 소리는 나와 세상을 말해주는 점으로 표현된다. 현대 문명을 거부하기 어려운 내게 점은 어느 면에서 삶의 매혹적 분석과 관찰을 포함하는 내적인 의미, 내적 긴장, 침묵과 언어를 연결하는 삶의 현재성을 포함한다.나 또한 수묵의 깊이에 매료되어 있는 건 사실이지만 먹으로 충족되지 않는 표현 욕구는 다른 여러 재료를 접목함으로써 해소한다. 다양한 혼합 재료의 사용이 표현력을 왕성하게 한다. 그러나 여러 형태의 재료를 사용한다는 것이 곧 물질만 드러내고 정신은 빈약하게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때로는 갖는다. 나는 기본적으로 재료를 옷의 개념으로 파악한다. 정신이 표상하는 것은 내적 깊이이므로 재료의 물성에서 가능한 자유롭고 싶다. 예술도 여러 삶의 한 형태이다. 그렇다면 내 회화가 지닌 서술이 그리 거창하거나 지나친 삶의 형태로 비약되는 것은 원치 않는다.나는 단지 평면 신봉자일 뿐이다. 관찰자가 그림을 보는 순간 그림은 이미 추상적이 된다. 구상은 어떤 의미에서 물리적으로 재현된 것이고 추상은 시간과 공간의 비주얼을 오롯이 표현한 것이 다른 차이다. 그림이란 모두가 그렇지는 않지만 논리의 비약으로도 공감할 수 있는 추상적인 '느낌'이란 게 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의 예술작품은 애매모호함에 깃든다. 그래서 예술은 삶보다 장구한 것이고 그래서 인간은 예술 때문에 카타르시스 되는 것이다. 글·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사진작가 윤원근이 찍은 권기철.권기철 작업실 내부.'소리' 91x53㎝ 한지 위에 혼합재료, 2000.그가 올해 그린 자화상 드로잉.'어이쿠 봄 간다' 78x54㎝ 한지 위에 혼합재료, 2009.'도망중' 117x91㎝ 캔버스 위에 먹, 2003.
[人生劇場 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화가 권기철(1) 올해로 54번째 개인전…포구에 갇혀 있던 내 그림이 이제 大海로 나오려는 것 같다
이를테면, 말이다. 원(圓)으로 가는 '암울함'이 아니라, 수직으로 가는 '흥분'도 아니다. 수평으로 가는 '도도함'까지 모두 아니다. 그럼 그 모든 것도 전혀 아니란 말인가? 길을 '답'이라 여기는 자를 나는 인정할 수, 아니 상종할 수가 없다. 광장이 아니라 뒷골목, 허물어진 폐가의 우물이 있는 그 담 모퉁이에 폐병 환자처럼 종일 쪼그려 앉아 있는 몰골의 태생이니 그럴 수밖에 없다고 이해해주길 바란다.내 그림의 8할은 우연(무작위), 나머지 2할은 철두철미 계산(작위)이다. 그 작위는 무작위의 경계와 맞물려 있다. 무작위의 작위, 작위 같은 무작위를 위해 50년 이상 줄곧 그림에만 빠져 살고 있다. 나를 보니 그림으로 무장된 귀신 같다.내 어린 시절은 '선천성 가난뱅이'였다. 중1부터 고3까지 6년간 중앙일보 영주지국에서 생쥐처럼 먹고살았다. 부모는 하늘 아래에서 가장 슬픈 존재였다. 나는 고아의 가슴을 갖고 미술학원으로 피신했다. 화가의 꿈을 담은 닻을 내렸다. 거기서 키워낸 미학을 칼처럼 품고 경북대 동양화과에 자객처럼 스며들었다. 대학 시절 내 최대 무기는 인물 드로잉. 360도 모든 방향에서 인물의 특징을 단숨에 찾아낼 수 있었다. 학생을 가르치며 밥벌이를 했다. 그때 나의 단짝은 음악(팝송)이었다. 이후 나를 클래식의 세계로 이끌어준 첫 뮤즈가 나타난다. 소설가 장정일과 10년 정도 붙어 다녔다. 두 번째는 내 사부인 화가 김호득, 마지막은 동물적 감각을 일깨워준 진주알처럼 몰려들었던 천사들이었다. 그림 그리고, 음악 듣고 술에 취해 있었다. 가장 지옥 같았고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음악 소리는 새롭게 헤쳐 모여를 했다. 단숨에 내 그림의 원천이 되었다. 나의 모든 그림의 바닥에는 음악이 흥건하게 고여 있다. 그 소리의 미학에 디자인 감각을 뇌관처럼 장착했다. 비로소 나는 당당하게 화가 권기철로 태어날 수 있었다. 보란 듯이 수 없는 공모전에 도전했다. 10여 개를 석권했다. 그리하여 서태지와 아이들이 핵폭탄을 터트리던 1993년 나는 시내 봉성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소리)을 연다. 그 시절에는 현악기와 가장 동양적이면서도 서양적인 드로잉의 연장에 있는 인물이 짐처럼 박혔다. 그리고 이내 인물은 내 그림에서 사라진다. 완전한 추상의 세계를 터득한 셈이다. 가장 유현하고 암막(暗漠)한 먹빛 그리고 가장 찬란한 유채색의 향연이 절묘하게 섞였다.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비율, 그 섬뜩한 구도는 어린 시절 체득된 서예의 결구장법에서 기원한다. 나의 먹은 결국 한 일(一) 자로 요약된다.내 미학은 크게 3기로 나눠진다. 2006년까지는 암갈색 같은 중성색 시절, 이후 내 아틀리에가 가창으로 들어오면서 자연의 색깔(초록), 2017년 제주도 이중섭 미술관 전시 때부터는 색에서부터 자유로워진다. 그동안 21번 옮겨 다녔던 작업실. 2018년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우여곡절 끝에 팔조령 옛길 초입에 안착하게 된다. 작업실은 화가에겐 하나의 전쟁터의 진지 같다. 거기서 나는 먹고 그리고 잔다.그림과 그림 사이, 심신이 뭉툭해지고 칙칙해질 즈음, 나는 날 다시 예리하게 갈아야 한다. 여행은 하나의 숫돌이다. 여행은 내 영혼을 맑고 깊게 만드는 하나의 누룩이다. 일본은 수도 없이 찾았고 인도는 6번 그리고 터키, 그리스, 이집트, 아프리카 등지를 돌아다녔다. 새로운 감각의 선을 채굴했다.지금까지 억수처럼 개인전을 가졌다. 초창기에는 2년마다 전시를 하자고 다짐한다. 올해 54회 개인전(서울 앤 팩토리)을 갖고 있다. 이번 주제는 '무제(無題)'다. 그동안 소리는 둥글다·어이쿠 봄 간다·어이쿠 시리즈를 걸어왔다. 포구에 갇혀 있던 나의 그림이 이제 대해(大海)로 나오려는 것 같다. 글·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 ☞[人生劇場 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화가 권기철(2)에서 계속됩니다.21번 옮긴 끝에 2018년 팔조령 옛길 초입에 영구적으로 살게 될 작업실을 갖게 된 권기철. 올해로 54회 개인전을 가진 그는 비로소 자신의 그림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포부에서 벗어나 동서양 미술의 교점을 찾아 대양으로 항해를 시작하게 됐다. 올해 그의 그림이 거대한 변혁의 변곡점에 서 있다. 그런 그가 유채색으로 흐트러진 작업실 바닥에서 액션을 취하고 있다.
촬영스튜디오·베이커리 카페 '신개념 포토갤러리'…아내가 품은 프랑스 자수 공간도 마련
천고 8m, 396㎡(120평) 규모의 갤러리안나는 보기 드문 신개념 포토갤러리. 지역에서는 사진만을 축으로 한 갤러리는 시내 루모스(관장 석재현)와 안나가 전부다. 안나는 사진을 축으로 한 멀티플렉스 복합문화공간이라 보면 된다. 자잘하게 쪼개보면 여러 색깔(공간)이 공존하고 있다. 촬영 스튜디오의 물성에 카페 그리고 포토갤러리, 베이커리카페, 2층은 그의 아내의 프랑스 자수 공간이다. 아내는 쉼 없이 바늘을 품는다. 평면이 도드라진 동양자수와 달리 입체감이 강조된 서양자수(프랑스 자수) 전문가로 변신, 수강생까지 받는다. 이 밖에 카메라, 조명기, 프린트 등 그동안 그가 소유하고 있는 촬영 장비, 포토북, 벽에는 손수 구입 한 국내외 50여 작가의 작품과 아카이브가 수시로 교체되면서 상설전시 된다. 국내 최대 규모의 액자제작 시스템을 갖고 있는 경기도 여주에 있는 닥터 프린트 유병욱 대표의 사자 사진이 블랙홀처럼 방문객의 시선을 빨아당긴다. 김중만의 15명의 국내 유명 래퍼의 사진, 가상 현실 세계를 다룬 최상식, 개발시대를 맞아 급격하게 변모하는 대구 도심의 오지를 포착한 권상원, 특이한 인물사진의 신지평을 열고 있는 강영호, 일본 군함도 사진을 내민 이용환, 최상식의 신기루 게임, 재개발 지역의 다양한 오브제를 이용한 정크 포토리즘이 인상적인 한상권, 그래픽 디자이너 김시마, 발레리노 박귀섭 및 조세현, 김상길 등의 작품이 보석처럼 흩어져 있다.2017년 4월 오프닝 전시를 했다. 전업작가, 광고사진작가, 교사, 일반 동호인 등을 모두 불렀다. 프로와 아마의 구별을 두지 않았다. 2회는 조정숙 개인전, 3회는 익숙하지만 낯선 풍경(최금화, 이상선, 장석주 3인전), 4회는 아마추어 중 창의적인 친구들을 불러 모았다. 처음 의도와 달리 흘러갔다. 그가 보여주고 싶은 사진을 맘대로 보여주기 어려웠다. 가끔 이 공간과 전혀 동떨어진 대관 요청이 지인으로부터 쇄도했다. 그래서 내린 결정은 대관·기획전시를 멈췄다. 3년 전부터는 그냥 그가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준다. 한 켠에 그의 작품이 걸려 있다. 섬뜩한 선명함 그리고 귀뚜라미 울음에 수은을 버무린 듯한 풀들의 가녀림이 잘 교직돼 있다. 기와와 풀의 중첩된 이미지가 미니멀리즘의 빛을 발산한다. 1997년 발표한 '잡초에 대한 연민'의 작품들이다. 커피도 빵도 평범하다. 그걸 이대표가 직접 서빙한다. 가을로 내려앉은 거대한 통유리창이 더 비범하다. 홀은 텅 비어있는 듯하면서도 마치 '성간'(星間·Interstellar)에 들어온 것 같은 착각을 몰고 온다. 칠곡군 가산면 학산3길 86. 매주 월요일 휴무. 영업 오전 11시~ 오후 8시. (054)971-0386 글·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포토갤러리 안나의 내부.
한때 섬유 광고사진 신지평…'사진갤러리 복합문화공간' 선보이다
사람은 누구나 '변방의식'에 침잠할 때가 있다. 잘나가던 시절이 저무는 징조이기도 하고 터널에서 밖으로 나올 수 있는 변곡점이기도 하다. 무기력이거나 매너리즘이거나 혹은 골몰의 시간이 몰려오기도 한다. 하지만 그게 어디로 기울 건지는 속단할 수 없다. 조바심과 성찰 속에서도 뭔가 자신의 가슴을 뜨겁게 만드는 모티프가 가슴에 고여있다면 그 열망이 무슨 국면을 반드시 끌고 온다. 밥이 되든 죽이 되든 간에.충무로서 1년간 광고사진 동향 익혀칠곡서 지방 최대규모 스튜디오 오픈한강이남서 꽤 잘나가는 광고사진가中 시장 잠식…작가의 꿈 다시 생각제2의 삶 돌파구 공간 '갤러리 안나'그냥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주기로◆사진이란 오랜 대륙그는 '사진'이란 대륙을 오래 탐험해 왔다. 그가 만진 사진은 작품이라기보다 하나의 '상품' 같은 것이었다. 디자인 감각이 무척 많이 스며들었다. 절묘한 모양의 각도, 기막힌 색의 황금분할…. 그 기준과 원칙의 근육을 키우며 절정의 그림을 얻어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사실 그건 그의 것이 아니라 주문자의 몫이었다. 그가 찍고 싶은 것을 찍을 수가 없었다. 클라이언트의 주문이 '지상명령'이었다. 그는 그 명령의 그림자 위에 앉아서 새벽녘까지 사진을 찍었다. 밤의 조도를 점차 잊어만 갔다. 어쩜 그 사진은 '반쪽 완성품'인지도 모른다. 먹고 사는 일은 숭고했다. 그 일로 가족을 먹여 살리면 그는 '프로'이다. 그럼 프로 중 프로는 누굴까? 그건 당연히 작가(Artist)다. 자신도 작가라 우기고 싶을 때도 많았지만 주문생산한 그 사진 앞에 서면 왠지 모르게 기가 죽었다. 반대진영에 있는, 종일 작품에만 올인 하는 사진 혁명가들은 그가 가진 능숙한 감각을 '상업적'이라 이유로 폄훼하기 일쑤였다. 아무튼, 그는 한강 이남에선 꽤 잘 나가는 광고사진가였다. 어찌 된 셈인지 한국에서는 '광고'라는 단어가 따라붙으면 그 길을 걷는 이들은 늘 '미완의 작가'로 분류돼 버린다. 그럴 때마다 페루의 수도 리마에서 태어나 1976년 영국 런던에 정착해 패션사진의 신지평을 열었던 마리오 테스티노 같은 존재를 생각하며 자신을 다독였다. ◆중앙대 사진학과 졸업중앙대 사진학과를 졸업했다. 그때만 해도 사진작가로 삶을 마감할 듯했다. 작가를 꿈꾸었다. 그 무렵 다큐멘터리 사진에 푹 빠지게 된다. 풍경보다는 일상성이 피처럼 살아있는 현장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기념사진 속에 등장하는 그렇고 그런, 뭐랄까, '민방위 교육용' 같은 인물이 아니라 경계의 수위를 벗어난 도심의 사각지대에 피사체로 다가오는 이들을 노렸다. 동성로 뒷골목은 나의 사냥터였다. 일상과 초월 사이에서 방황하는 청춘의 실루엣을 낱낱이 포착해 나갔다. 그게 'in my memory'란 이름으로 졸업작품전에서 노출된다. 졸업 즈음, 다들 불안했다. 길 위의 삶, 아니면 길 밖의 인생. 둘을 저울질하며 그의 20대는 절충의 시간에 빠져든다. 초월보다 현실의 욕망이 한 수 위였다. 사진과 선배들의 행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진이 운명이면 그 길이 죽음이라도 그냥 묵묵히 간다. 하지만 이승에서 단련된 근육만으로는 현실의 불안을 막아낼 재간이 없다. 아닌데 아닌데 하면서 사회초년생이 되어간다. 선배들도 약속이나 한 것처럼 신문사, 방송사 등 언론계 사진기자가 되거나 그게 아니라면 대다수 광고기획사 등으로 내몰린다. 그래도 혈기는 있어 '나만은 순수 혈통의 작가로 남아 보자'고 다짐한다. 동성로에서 '워크숍'이란 복합문화공간 같은 카페를 오픈한다. 사장이 된 것이다. 공연과 전시가 잦았다. '직장'이란 참 대단하다. 한 사람의 꿈과 희망을 무지막지하게 내동댕이치는 속성을 갖고 있다. 그도 처음에는 나름 아방가르드 한 카페를 오픈한 것으로 많이 위안을 했다. 속으로 '일단 문화공간이잖아'라면서 틈이 나면 좋은 사진을 많이 찍어보겠노라고 다짐했다. 맘처럼 굴러가지 않았다. 갈수록 사진 찍을 시간이 폭감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해서 절충한 일이 바로 광고사진. 일단 서울 충무로에서 1년간 광고사진 업계의 동향을 익혔다. 그리고 대구로 와서 1990년 경북대병원 근처에 '포토제닉'이란 사진 스튜디오를 오픈한다. 당시 지역에는 서진, 거송 등 굵직한 광고기획사가 포진하고 있었다. 여기서는 사진의 창의성보다 트렌드를 반영한 감각이 승부처였다. 창작열에 대한 대가도 제대로 주어지지 않았다. 비슷비슷한 마케팅, 비슷한 접근의 사진라인들. 설상가상 시장도 영세했다. 그만큼 밥벌이는 더 어려웠다. ◆섬유사진의 신지평그는 자신만의 시장을 개척하고 싶었다. 대구가 섬유도시이니 섬유 관련 광고사진을 특화한다. 2000년 탈도심, 칠곡 동명에서 '스튜디오 2000'을 오픈한다. 전원 스튜디오의 신지평이었다. 바야흐로 디지털 세상. 촬영 시스템을 온라인 모드로 전환했다. 서울로 가서 잘나가는 스튜디오를 벤치마킹했다. 더욱 첨단적이고 모던한 CF촬영 장비를 대거 매입해 나갔다. 수천만 원의 독일 카메라, 원격조정 되는 최첨단 조명시스템까지. 모르긴 해도 지방에서는 최대 규모였다. 서울 못지않은 퀄리티의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몇 년 못 가 새로운 버전의 카메라가 등장했다. 안 질세라 그걸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구매해야만 했다. 번 돈이 신모델 구입비로 다 나가게 생겼다. 배보다 배꼽이 더 컸다. 중국 시장이 한반도를 압도하기 시작한다. 지방 광고주도 고사상태. 돈은 서울·경기권에서만 맴돈다. 일상이 너무 힘들었다. 조명이 꺼진 스튜디오에 혼자 앉아 넋을 잃고 지난 추억의 시간 속으로 자맥질을 했다. '그래, 작가 이만호를 꿈꾸었지' 오직 나만 바라보며 살아오던 아내한테도 미안함 맘이 들었다. 그녀를 위해, 그리고 나의 제2의 삶을 위해, 둘에게 도움이 되는 돌파구 공간이 필요했다. 그 고민의 결과가 2017년 꽃처럼 피어난다. 바로 '갤러리 안나(아내의 세례명)'. 동명에 있던 스튜디오는 현재 자리로 신축 이전을 한다. 거기서 2016년까지 스튜디오를 운영했다. 하지만 그 갤러리가 오픈되면서 26년간 지속된 광고기획사도 미련 없이 정리해버린다. '자발적 파산'이랄까. 그랬다. 새로운 이만호만의 창세기(?)를 그리기 위해서였다. 그는 향후 개인전을 할 수 있을지 없을지 확신을 하지 못한다. 나는 진정 무엇을 찍고 싶어 하는가? 그걸 알기 위해 사진책도 멀리한 채 그냥 사색하고 성찰하고 독서를 하고 산책을 한다. 의도되지 않은 저절로 흘러나오는 사진을 원하는데 아직 그게 뭔지 모른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클릭을 조정해 가며 내가 원하는 물성을 인위적으로 분재용 가지를 맘대로 절단하듯 그렇게 가공된 그럴듯한 사진을 건지고 싶지 않다. 그래서 지금은 저절로 봄이 오듯 자기 맘의 행로를 반추하고만 있다. 그게 잘되면 전시를 할 수도 있고 안 되면 평생 못할 수도 있다는 게 그의 지금 생각. 가식과 거짓에 자기 열정을 섞기 싫다는 경고로 들렸다. 글·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이 대표가 자신이 사용하던 스튜디오 추억 앞에서 웃음을 한 모금 머금는다.2017년 포토갤러리 안나를 오픈한 사진가 이만호. 그가 자신의 작품인 '잡초에 대한 연민'을 배경으로 무심하게 앉아 있다.흑백 톤의 표정, 컬러 톤에서 능숙하고 노회한 색을 다 빼고 싶어 한다.
[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김영복·이춘호 '한식 삼천리'] 젓갈과 식해(2)…서해~남해~전남 '젓갈문화권' 동해~경상도 쌀밥·엿기름 넣는 '식해문화권'
어류의 내장을 이용한 이 방법은 오늘날 내장젓갈 담그는 법과 다를 바가 없다. 송나라 양공(襄公)이 자기 부인을 장사 지내면서 무덤에 묻는 명기(明器)로 젓갈 100항아리를 썼다고 한다. 고려사절요 제4권에 보면 '봄부터 비가 오지 않으므로 왕이 정전을 피하고 조회를 폐지하며, 도살을 금하여 포와 젓갈만 쓰게 하고, 서울과 지방의 원통한 죄수를 심리하게 하였다'란 구절이 나온다. 이 당시 가뭄으로 흉년이 드니 도살을 금하게 하되 포와 젓갈 같은 저장 음식으로 육류 섭취를 대신하게 한 것이다. 특히 세종 때는 각종 제사에 젓갈이 제수로 올라갔으며 젓갈에서 벌레가 나오니 관계자를 파면시키기도 했다.조선 왕실에서 명나라 황제에게 제공한 물품 중에 송어해와 송어염해가 포함되어 있었다. 모두 송어를 소금으로 절여서 만든 젓갈이다. '음식디미방' 청어젓갈 담그기 기록 서해-새우젓·조기젓·황석어젓 유명 동해-명란젓·창난젓·대구아가미젓 전라도-게·전어·꼴뚜기 등 종류 다양 내륙에선 참게젓·토게젓 즐겨 먹어 벼농사지역서 발전된 발효식품 '식해' 조선시대 왕·백성까지 먹는 고급 음식 포항·영덕 추석음식 대구횟대밥식해 경상도 반가음식 '북어식해' '조기식해'◆예전 젓갈은 '념혀'조선 후기 학자인 김재로의 주석서 예기보주 12권 내칙 제12에 나해와 치갱(雉羹)이 나온다. 나해는 소라로 젓갈, 치갱은 꿩고기로 끓인 국을 의미한다.물론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해안을 가지고 있는 고온 다습한 동남아시아에도 염장법이 발달하였다. 말레이시아의 '벨라찬', 인도네시아의 '트라시', 필리핀의 '바고옹 알라망'과 '바고옹 이스다'는 모두 새우젓이다. 액젓으로는 인도네시아의 '케첩 이칸', 말레이시아의 '부두', 베트남의 '느억맘', 태국의 '남쁠라', 필리핀의 '파티스', 미얀마의 '응아피' 등이 있다. 일본은 어패류의 살이나 내장, 알 등을 소금에 절인 '시오가라(鹽辛)'라는 젓갈이 있다. 오징어로 만든 '이카노 시오가라'가 대표다. 주로 술안주로 먹는다. 일본 아키타 해안 지역의 도루묵과 정어리로 만든 '숏쓰루'라는 액젓도 있다.안동 출신 장계향이 한글로 쓴 음식디미방에는 청어젓갈 만드는 법이 나온다. 이 책에서는 염해를 '념혀'라고 적고, '청어념혀법'을 맛질방문의 하나로 소개했다. 생선을 물에 씻지 말고 가져온 채로 자연히 씻어 항아리에 담고 소금을 넣는다고 적었다. 특히 청어보다 큰 방어는 썰어서 소금에 절인다고도 했다. 우리의 염장법은 단순히 어패류에 국한하지 않고 육류와 조류 등으로 그 영역을 넓혀 나갔다. 조선 정조 24년에는 공인(貢人)의 '구유재'(舊遺在·호조에서 공인들에게 공가(貢價)를 미리 지급하고 공물을 납품 받은 뒤 회계 처리하는 과정) 1만 섬을 분배하여 탕감해 준 별단에 '해식중미'가 있는데, 이는 돼지고기로 젓갈을 담근 뒤 그 위에 쌀밥을 얹은 음식이다. 이로 미루어 보아 조선 시대에는 생선으로만 젓갈을 담근 것이 아니라 돼지고기로도 젓갈을 담갔다. 이렇듯 우리는 어패류를 이용한 어장(魚醬), 육류를 이용한 육장(肉醬), 어패류와 육류를 같이 넣고 담근 어육장(魚肉醬) 등으로 젓갈 종류가 나뉘는데, 그 가짓수가 무려 140여 가지가 넘는다고 한다. 세종실록 권 128 제향찬품(祭享饌品)에 보면 생선젓, 토끼젓, 사슴젓, 기러기젓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왕가 중심으로 어패류가 아니더라도 수조육류(獸鳥肉類)로 젓갈을 담가서 제사음식에 사용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지역별 젓갈지역에 따라서도 젓갈이 다르다. 서해안지역에는 새우젓, 조기젓, 황석어젓 등이 대표적이다. 동해안 지역에서는 명태의 알과 내장으로 담근 명란젓, 창난젓, 대구아가미젓 등이 유명하다. 밥·엿기름·무채·고춧가루 등을 넣어 담그는 가자미식해, 특히 동태식해는 강원도·경상도 지역 등을 중심으로 한 토속음식이다. 전라도 지역에서는 게, 전어, 볼락, 도마, 조개, 낙지, 꼴뚜기, 갈치, 소라, 병어, 토하 등으로 담근 젓갈 종류가 다양하다. 내륙지역에서는 참게젓, 토게젓을 담가 먹었다. 이 밖에도 천수만의 서산 어리굴젓, 제주도의 자리돔젓 등에서 지역 특색이 드러난다. 반찬용으로는 조개젓, 어리굴젓, 명란젓, 창난젓, 오징어젓, 낙지젓, 꼴뚜기젓, 성게알젓, 갈치속젓 등이 주종을 이룬다. 전국의 주요 젓갈시장으로는 충남 논산의 강경과 홍성의 광천 토하젓, 전북 부안의 곰소, 인천의 소래포구 등이 있다.◆식해한강이 소금과 염장 생선 및 젓갈을 내륙 구석구석으로 유통시켰다. 한강을 쫓아 올라가면 지금의 충주, 단양, 제천 심지어 영월까지도 물류 흐름이 수월했다. 염장 생선 및 젓갈은 오래 보관하며 먹을 수 있어 바닷길로도 먼 거리 항해를 가능케 했다.식해는 젓갈문화가 벼농사와 함께 발달된 고도의 식품이라 할 것이다. 엿기름이나 쌀밥의 유산균 발효와 소금에 의하여 저장 보존되는 식품이다. 주재료가 엿기름, 쌀밥, 생선, 그리고 소금이란 점에서 볼 때 식해는 '벼(禾)'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식해는 전분이 발효하면서 유산이 생기고, 신맛이 나면서 부패가 방지된다. 물론 10%가량의 소금이 숙성을 증폭시키게 된다. 이제 서해와 남해 전남 광양까지는 젓갈문화권이 형성되고, 동해에서 경남 하동까지는 식해문화권이 형성되어 있다. 조선 시대에는 왕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널리 즐겨 먹던 고급 음식이 바로 식해(食해·fermented fish)다. 감주로 알려진 식혜(食醯)도 엿질금을 삭혀 만든 거라서 식해의 연장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안동식혜'가 대표격이다.젓갈이 각종 어패류와 소금이 생산되는 해안지방에서 시작되었지만 이 젓갈이 쌀을 주식으로 하는 전통 벼농사문화권에서 상용되면서 발전된 발효식품이 식해다.식해를 만드는 사람은 먼저 고기를 포로 떠서 잘게 저미고, 기장, 쌀가루 및 소금으로 버무린 다음 좋은 술에 적셔 항아리 속에 넣고 흙을 발라 100일 동안 두면 숙성된다. 그렇다면 모든 식해에는 반드시 쌀가루를 섞는다. 따라서 지금의 식해는 바로 그것이 조금 변하여 이루어진 것이라 할 것이다. 명나라 사신들이 약 석 달 반을 머물고 7월19일 베이징으로 떠날 때 조선 조정에서는 이들에게 수조기식해 6통, 잉어식해 1통, 가리맛식해 9병을 황제의 선물로 보냈다. 우리나라에서 식해는 주로 동해권과 경상도 지방에 다양하게 분포되어 맛을 사로잡아 왔다. 어류로는 가자미, 갈치, 광어, 노가리, 대구, 도다리, 도루묵, 멸치, 명태, 뱅어, 우럭, 전어, 전갱이, 조기, 쥐치, 홀때기, 횟대식해 등 다양하다. 연체류로는 고둥, 낙지, 대합, 건오징어, 문어, 오징어, 한치식해 등이 있다. 어란 및 아가미로 만드는 명태아가미식해, 명태창자식해, 명란식해 등도 있다. 식해 중 대표적으로 알려진 함경도 가자미·도루묵식해, 경상도 포항·영덕의 추석날 해 먹는 대구횟대밥식해, 마른고기 식해인 진주의 명태(북어)와 조기식해 역시 별미다. ◆마른고기 식해경상도 마른고기 식해는 진주를 중심으로 합천, 산청, 함안, 의령, 창녕 등지의 반가 음식에 자주 등장하던 반찬이었다. '북어식해'는 북어에 엿기름과 곡물을 넣어 삭혀 고춧가루와 갖은 양념으로 조미해 붉고 맵게 만든 저장음식이다. '이사할 때 악귀를 쫓는다'는 유래가 있어 경남 창녕지방에서는 예부터 이사할 때 빠지지 않고 만들어 즐겨 먹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향토음식이었다. 북어 2마리, 무 300g, 파·마늘 각 50g, 엿기름가루 50g, 좁쌀 1컵, 고춧가루 1/2컵, 생강 1쪽, 소금 1/2컵을 준비한 후 북어는 두드려 소금물에 절여 하룻밤 정도 재우고 무는 씻어 소금물에 절이며 파·마늘·생강은 곱게 다진다. 좁쌀은 깨끗이 씻어 일어 밥을 되직하게 짓는다. 절인 무와 북어는 물기를 짠 후 큼직하게 자른다. 넓은 그릇에 무와 고춧가루를 함께 버무려 붉은색이 나면 조밥, 파, 마늘, 생강, 소금, 북어 등을 넣어 고루 섞으면서 엿기름물을 넣고 버무려 항아리에 꼭꼭 눌러 담아 3∼4일간 따뜻한 곳에서 삭히면 맛있는 북어식해가 된다. '조기식해'는 간조기 10마리, 쌀 1.5㎏, 엿기름 200g, 고춧가루 3/4컵, 마늘 50g, 생강 30g, 석이버섯 100g을 준비한 후 쌀로 밥을 지어 고아 엿기름과 고춧가루를 섞어 둔 후, 간조기는 배를 갈라 내장을 빼고 뼈를 발라낸 다음 소금으로 간을 한 후 채반에 널어 꾸덕꾸덕 말린다. 마늘·생강은 다지고 석이버섯은 밥을 엿기름과 고춧가루를 섞은 것과 버무려 간조기의 배에 차곡차곡 넣어 짚으로 묶은 후, 준비해 둔 양념을 고명으로 얹어 항아리에 담아 그늘진 곳에서 2∼3일 정도 삭히면 경상도 마른고기 일종인 맛있는 조기식해가 된다. 북어식해나 조기식해를 모두 '진주식해'라고 한 것으로 보아 이 음식은 아마 진주감영에서 비롯된 음식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일반 가정에서는 아직도 진주식해를 해 먹는 집이 있겠지만 대중음식점에서 맛볼 수 없는 것이기에 아쉽다. 대담=김영복 식생활문화연구원장·이춘호 음식전문기자정리·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순천에서 만난 토하젓.속초 아바이 순대마을에서 만난 동태식해가 고명으로 올려진 잔치국수.김에 싸 먹으면 밥도둑이 되는 진석화젓.전남 목포권의 밥상에 없어서는 안 될 젓갈 중 하나가 황석어젓이다.서해안권 토박이들에게 인기인 부새우젓.
[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김영복·이춘호 '한식 삼천리'] 젓갈과 식해(1)…빨간 밥 도둑
'곰삭는다' 이 말은 한국의 젓갈과 식해의 물성을 단적으로 지적한 표현이다. 원 물성이 산소와 당분의 침공을 역이용해 새로운 돌파구를 찾은 게 바로 삭은 음식인 젓갈과 식해랄 수 있다. 음식 고수들은 잘 안다. 서해는 젓갈, 그리고 동해는 식해문화권이라는 것을. 서해의 젓새우, 이것의 최대 공급처는 전남 신안군 전장포였다. 오월과 유월에 잡힌 새우를 갖고 오젓과 육젓을 담근다. 이게 논산 강경, 부안 곰소 등지에서 전국으로 널리 팔려나간다. 동해안의 속초와 영덕 등지는 가자미식해로 유명하다. 멸치젓갈은 경주 감포항이 유명한데 전라도에서는 젓갈이라고 하면 제1은 밤젓(전어 내장젓), 두 번째는 황석어젓, 세 번째는 토하젓이다. 이 삼종 젓갈이 남도밥상의 백미랄 수 있다. 경상도에서는 멸치, 꽁치젓갈을 운운하지만 전라도에서는 그걸 젓갈로 보지 않는다. 동해안은 역시 젓갈보다는 식해가 강하다.동해안 속초·영덕에서 유명한 가자미식해신안군 젓새우·경주 감포항은 멸치 젓갈남도밥상 백미 '밤젓' '황석어젓' '토하젓'젓갈(salted fermented food)은 물고기, 육류, 채소 등을 소금으로 절여 만드는 '염장법(鹽藏法)'의 하나로 태생된 음식이다. 소금을 이용한 염장법은 중국은 물론 일본, 인도, 태국,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방글라데시, 필리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 아시아 지역은 물론 유럽까지 즐겨 먹던 전통음식 중에 하나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양고기를 소금에 절여 먹었고, 로마에서는 생선을 소금에 절여 먹었다. 고대 서양 문명의 뿌리였던 로마인들은 항아리 안에 생선들을 넣고 소금을 뿌린 후에 두 달 정도 발효시켜서 '가룸(garum)'이라는 젓갈을 만들어 먹었다. 968년 신성로마제국(독일) 황제의 대사로 동로마에 파견된 주교인 리우트프란드는 동로마 황제 니케포루스한테 영접받는 자리에 나온 음식들마다 '역겨운 냄새가 나는 생선 소스'가 잔뜩 뿌려져 있어서 도저히 먹지 못했다고 기록을 남긴 바 있다. 1453년 동로마가 오스만 제국(터키)에 멸망 당하고 나서 가룸은 그 제조법이 끊겨 오랫동안 잊혔으나, 20세기에 들어서 로마 문화의 애호가들이 다시 가룸의 제조법을 연구하여 복원하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특히 고대 그리스의 주식은 죽 형태의 '브로스(broth)'인데, 생선으로 담근 젓갈을 조금씩 브로스에 넣어 먹으면 풍미가 좋아져서 당시 젓갈은 인기 있는 교역 상품이었고, 이 무역의 중심지가 바로 마르세유였다. 이탈리아는 지중해에서 잡은 멸치류의 생선을 소금에 절여 머리와 뼈를 제거하고 돌돌 말아 올리브유에 저장한 젓갈인 '앤초비(anchovy)'와 세계 최강의 악취음식 스웨덴의 청어 젓갈 '스루스트뢰밍'(surstromming·중국판 마파두부)을 만들어 먹고 알래스카에서는 연어 알이나 연어 머리를 따로 모아 젓갈 '스팅크 헤드(stink heads)'를 만든다.고조선 시대부터 소금 사용…젓갈 만들어어패류 살·알·창자 절여 2~3개월간 숙성6~12개월 뒤엔 형태가 분해된 '젓국' 얻어이렇듯 젓갈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국적을 불문하고 즐겨 먹던 전통음식 중에 하나이다. 삼면이 바다로 되어 있는 우리나라는 다양한 어류를 잡아 오래 저장해 두고 먹으려면 당연히 오래전부터 염장법의 하나인 젓갈을 만들어 먹었을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고조선 시대부터 소금을 사용했다. 고조선에는 지금의 랴오허(遼河) 강 서쪽 상류에 염수(鹽水)라는 소금강이 있었다. 이곳의 '소금우물(井鹽)'에서 퍼 올린 소금물을 이용해 소금을 생산했다. 한서지리지 기록에 따르면 '고조선은 생선과 소금, 대추, 밤 같은 것이 풍족히 났다'는 것으로 보아 해안가에서 어업과 제염이 같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젓갈은 소금의 예술이다. 주로 어패류의 살, 알, 창자를 소금 20%에 절여 만드는데, 상온에서 2~3개월 숙성시키면 생선의 형태가 남아 있는 젓갈을 얻을 수 있으며 6~12개월 숙성시키면 형태가 완전히 분해된 '젓국'을 얻을 수 있다.6세기 전반 중국 북위(北魏)의 가사협이 지은 농서인 '제민요술(齊民要術)'에 보면 한나라 무제가 동이족을 쫓아서 산둥반도에 이르렀을 때 어디서인지 코에 와 닿는 좋은 냄새가 있어 찾아보니 어부들이 항아리 속에 물고기 창자와 소금을 넣고 흙 속에 덮어 두었다가 향기가 생기면 조미료로 먹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에는 오랑캐를 쫓다가 얻은 음식이라 하여 '축이(逐夷)'라 했는데 지금의 잘 삭힌 젓국과 같은 것이다. 대담=김영복 식생활문화연구원장·이춘호 음식전문기자 정리=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 ☞[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김영복·이춘호 '한식 삼천리'] 젓갈과 식해(2)에서 계속됩니다.
"소멸 가능성 높은 108가지 음식 재현"…대구경북 슬로푸드 회원 책 발간
대구경북 슬로푸드 회원 겸 요리연구가 6명이 큰일을 해냈다. '대한민국 맛의 방주-향토편'(백산출판사)을 어렵사리 출간한 것이다. 그렇고 그런 요리책이 아니다.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멸종 가능성이 많은 팔도의 해묵은 음식 108가지(제주도 25, 전라도 27개, 경상도 20개, 충청도 10, 강원도 15, 경기도 11)를 책으로 묶은 것이다. 방주에 걸맞은 식재료를 구입해서 방주음식을 재현한 것이다. 자신들이 좋아서 시작한 일이라 지원 한 푼 받지 않았다.대한민국 조리장이며 한식대첩4 때 들안길 한식당 용지봉(변미자)과 손을 잡고 최종우승을 차지했고 현재 경산에서 한식당 '뜰안'을 운영하는 최정민, 푸드아트아카데미 조은미 대표, 한국자연음식협회장 겸 이지사찰음식학교 원장인 전효원, 세종 신라 외식전문학교 조리 부원장인 엄희순, 마음찬 도시락 대표 서경희, 대구경북음식문화발전소 수석연구원인 강나윤. 이들 중 전효원씨를 빼고 나머지는 대구가톨릭대 외식산업학과 출신. 당연히 출간을 가장 기쁘게 받아들인 사람은 이들의 스승이기도 한 임현철 교수. 임 교수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을 구현한 책"이라고 호평을 했다. "요리연구가에게 자극이 되고 일반인에게는 전통음식의 신지평을 느끼게 만드는 책"이라고 평가했다. 슬로푸드 한국협회 김종덕 회장도 이들이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빛나는 저작물을 내준 것에 박수를 보내기도 했다.이들은 방주 목록과 기타 한국 전통음식 중 국민과 반드시 호흡해야 될 음식을 중심으로 재현해 냈다. 사흘이 멀다 하고 푸드스튜디오에서 만나 레시피를 정리하고 관련 요리 과정에 꼭 필요한 팁도 소상하게 덧붙였다. 반찬과 양념, 소스 등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고수의 팁'을 삽입했다. '자연양념'의 선두에 꼽히는 채수도 5가지(기본·진한·칼칼한·달달한·구수한 맛)로 세분해 놓았다. 이 책을 보면서 요리를 따라 하려는 사람을 배려한 것이다.우리 식재료와 멸종위기에 처한 토종 씨앗이 사라져 간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공통분모가 생긴 셈. 연구자들은 마음을 모아, 요리의 전문분야는 다르지만, '맛의 방주'에 등재된 식자재를 널리 알리고 그것을 활용한 요리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는 취지에서 이 책을 기획하게 되었다. 하지만 방주에 등재된 식자재를 알아보는 중, 천연기념물로 등재된 것도 있고 구하기 어려운 것도 있었다. 오로지 맛의 방주에 등재된 재료를 구하기 위해 이른 새벽에 출발하여 전국 방방곡곡을 동분서주했다. 구하지 못한 식자재는 주위에서 구할 수 있는 것으로 대체했다. 또한 음식을 재해석하는 과정에서 오류도 많이 경험하면서 고민도 깊었다. 지방마다 개인마다 요리하는 스타일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들의 바람은 이렇다."이 책을 시발점으로 많은 분이 맛의 방주에 실린 귀하고 소중한 우리의 자원에 관심을 가지고 더 맛있고 더 유익한 레시피가 쏟아져 나오길 기대한다. 더 나아가 위기에 처한 우리의 토종 씨앗이나 음식이 사라지기 전에 '맛의 방주'에 승선시키는 노력도 쉼 없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방주 음식이 사라지면 한국의 맛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최근 출간된 '대한민국 맛의 방주'.
[이춘호 전문기자의 푸드 블로그] 사라져가는 향토음식 지키기 '맛의 방주' 프로젝트
일단 구약 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대홍수인 노아의 홍수 이야기부터 해보자. 하나님이 인간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을 보고 인류를 멸망시키기 위해 40일 밤낮 동안 세계를 물로 가득 차게 하였으나, 노아와 그의 가족과 지상의 동물 한 쌍씩만이 이를 피하였다고 한다. '방주(方舟)', 노아가 하나님의 계시로 만든 네모진 잣나무 배이다. 그의 가족과 짐승들을 이 배에 태워 모두 대홍수를 피할 수 있게 하였다고 한다.◆맛의 방주& 슬로푸드음식계에도 방주 프로젝트가 있다. '맛의 방주'(Ark of Taste·이하 방주)다. 1996년부터 시작된 국제슬로푸드협회 생물종다양성재단의 프로젝트로, 전 세계적으로 멸종위기에 처한 종자, 품목을 찾아서 기록한다. 주요 선정대상은 동물 종, 식물 종, 치즈 등 생산자들이 만든 식품들이다. 이 프로젝트는 지역 음식과 음식 문화자원을 재발견하고 가치를 부여해 지역경제를 지원하기 위한 것이다. 맛의 방주는 슬로푸드 운동에서 특정 식자재를 다루는 유일한 프로젝트이기에 소비자가 맛의 방주 등재 식품을 찾고 그것을 먹게 되면 소멸 위기에 처한 종자나 식재료를 지킬 수 있다. 방주 목록은 국제슬로푸드협회 홈페이지(www.slowfood.com)의 'Ark of Taste' 카테고리에서 나라별로 확인할 수 있다. 한국협회는 2013년 '제주푸른콩장'을 방주에 처음 등재했다. 우리나라는 슬로푸드 운동을 하는 160개국 중 방주 관련 100종 이상을 올린 11개 나라 중 하나다. 올해 등재된 국내 품목은 모두 105개, 이 중 지역은 9개로 울릉도가 6개(섬말나리, 칡소, 옥수수엿청주, 홍감자, 울릉 손꽁치, 물엉겅퀴)로 가장 많고 이 밖에 경북 전역에서 먹는 팥장, 울진의 갯방풍, 영덕의 가자미밥식해가 뽑혔다.슬로푸드가 잉태한 개념은 '슬로시티'. 슬로시티의 슬로푸드가 결국 맛의 방주가 되는 것이다. 슬로시티의 역사는 이탈리아다. 패스트푸드의 대명사인 맥도날드가 1986년 이탈리아 로마에 매장을 오픈했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는다. 지역 고유의 전통 음식을 지키려는 모임이 곳곳에서 생겨나기 시작한다. 슬로푸드 운동의 세가 확장되어 99년 10월, 이탈리아의 그레베 인 키안티 시장인 고(故)파올로 사투르니니가 주위 여러 시장을 불러 모아 의기투합을 한다. 음식에만 국한하지 말고, 도시의 삶 전체에 느림을 도입하자고 맘을 모은다. 이들이 내건 운동명칭이 이탈리아어로 '치따 렌타(Citta Lenta)'나 '치따슬로(Cittaslow)', 이게 '슬로시티 운동의 기원이 된다. 슬로시티는 한마디로 정체성 없는 획일적인 대도시를 반대하는 운동이다. '슬로(Slow)'는 상당히 인문학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단순히 패스트(Fast)의 반대 의미로 '느리다'는 의미라기보다는, 개인과 공동체의 소중한 가치에 대해 재인식하고, 여유와 균형 그리고 조화를 찾아보자는 의미다. 이는 결코 현대 문명을 부정하거나 반대하는 것이 아니며, 지역의 정체성을 찾고, 옛것과 새것의 조화를 위해 현대의 기술을 활용하는 것을 지향한다.◆맛의 방주 선택 기준은어떤 음식이 방주의 맛일까? 일단 지역 고유의 맛을 가진 식재료와 식품, 지역 고유 토종 또는 야생종, 지역생산물을 이용해 전통방식으로 만든 가공식품, 지역사회문화와 지식이 연관된 품목이어야 한다. 지역전통의 조리방법과 가공법 및 독창적인 맛과 특성을 가진 식품이어야 한다. 좋은 예로 안동식혜나 홍어를 들 수 있다.지역 토양(territory)의 특성과 지역사회의 기억, 정체성, 전통지식과 관련 있는 식품, 일정한 양만 생산되는 식품도 대상이다. 맛의 방주는 대량생산이 불가능한 품목을 찾는 데 관심이 있다. 맛의 방주에 있는 품목들은 특정 지역과 지역사회 지식과의 연관성이라는 두 가지 기준이 있다. 멸종위기에 처한 식품도 해당된다. 만약 이 품목을 생산하기 위한 지식과 기술을 보유한 생산자가 매우 적을 경우, 고령자 어르신일 때는 더더욱 그 품목은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고 볼 수 있다. 전통가공법은 장인의 기술이며 그 기술은 단기간에 습득되지 않는다. 또한 말이나 글로는 알 수 없는 특유의 감각을 길러야 하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가정에서 자가소비를 위해 생산하는 수준이라면 이 또한 멸종위기에 처했다는 신호다. 소비추세의 변화, 더 이상 진가를 알아주지 않는 품목을 소비하지 않는 시장, 지역인구 감소, 장인들의 생계를 위한 지역이주, 기술 대물림 중단, 지역생태계 변화, 국내외 농업정책지원자금 중단, 관계 당국의 관심 부족 등 소멸위기 원인은 여러 가지라 할 수 있다.현재 제주도가 맛의 방주 운동에 가장 적극적이다.현재 방주 품목에 등재된 것은 제주푸른콩장, 강술, 꿩엿, 댕유자, 순다리, 재래감, 재래돼지, 골감주, 산물, 다금바리, 오분자기, 자리돔, 우뭇가사리, 옥돔, 톳, 구억배추, 제주재래닭, 참몸, 제주전복, 제주 홍해삼, 제주고소리술, 붉바리 등 22개이다. 제주도는 옛 향토음식을 육성하기 위해 '2022년도 제주향토음식 육성 시행계획'이 수립된다. 시행계획에는 향토음식 도록(圖錄) 제작, 창업 및 요리교실 운영, 향토음식 품평회 및 경진대회, 향토음식 관광 콘텐츠화 지원, 향토음식점 표지판 제작 등 총 3개 분야에 12개 사업이 마련됐다. 이 과정에 제주의 7대 지정 향토음식이 태어난다. 자리물회, 갈치국, 구살국(성게국), 한치물회, 옥돔구이, 빙떡, 궤기국수(고기국수) 등이다. 남도 최초의 맛의 방주는 2013년 등재된 장흥돈차이다. 돈차는 서민과 상류층을 아우르며 이어져 온 우리의 전통차다. 고려 때에는 진상품으로 오르기도 했다.2014년에는 남양주시가 '맛의 방주 전시관'을 유기농테마파크 내에 개관했다. 전시관은 224㎡ 규모로, 전 세계의 사라져가는 204개 품목의 음식과 종자, 130여 종 사진이 전시되고 있다. ▨사진=김철성 사진작가글=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세상이 너무 가공식품으로 흘러넘치고 있다. 거기서 인간을 살려 낼 음식이 바로 맛의 방주다. 음식계에도 방주 프로젝트가 있다. '맛의 방주'(Ark of Taste·이하 방주)다. 1996년부터 시작된 국제슬로푸드협회 생물종다양성재단의 프로젝트로, 전 세계적으로 멸종위기에 처한 종자, 품목을 찾아서 기록한다. 주요 선정대상은 동물 종, 식물 종, 치즈 등 생산자들이 만든 식품들이다.최근 6명의 대구경북 슬로푸드 회원 겸 요리연구가가 한국의 토종 식재료를 찾아 어렵사리 '대한민국 맛의 방주 향토편'을 책으로 묶어내면서 108가지 가장 한국스러운 방주음식을 재현해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오른쪽 부터 최정민, 조은미, 서경희, 전효원, 엄희순, 강나윤.
[커버 스토리] '포토북 르네상스 시대'를 갈구하다(2) 사진과 작가와 책의 갈피…'세상의 컷'으로 편집하다
마르시안스토리 서민규 2005년 오픈 80여권 출간…아트북 같은 작품집 추구까칠하기보다 엄격…작가도 제작에 동행토록 유도아티스트와 다양한 공감·소통 '리트머스 LS' 발간사진가이기도 한 서민규 대표는 2005년 '마르시안스토리'를 오픈한다. 개인전도 4번 했다. 그동안 80여 권의 포토북(이하 북)을 출간했다. 경북대병원 근처에 있다가 2007년 대명동으로 신축 이전한다.서 대표는 작업자 관점에서 아트북 같은 작품집을 추구한다. 공정을 대하는 그의 성정은 엄청 까다롭다. 까칠한 게 아니라 엄격해지기 위해서다. 그래서 강력한 제안을 통해 원하는 라인의 북을 고집해 낸다. 그래서 그에게 일을 맡기는 사람들도 다들 작가정신에 충만해 있고, 그래서 마르시안의 고집에 상당히 위안을 받기도 한다. 그에게 책 만드는 과정은 일이 아니라 하나의 재미다. 그래서 출간 의뢰 작가도 그 북 제작에 동행하도록 유도한다. 작가와 출판쟁이가 서로 '밀당'을 많이 해야 서로 감동 받는 책이 잉태된다. 그에게 가장 걱정스러운 대목은 디지털 편집 시대로 넘어가다 보니 완벽에 가까운 염료 감각의 절정인 컬러 분판(Seperation) 전문가가 거의 전멸돼 가는 처지다. 현재 파주 헤이리에서 일하는 유화씨가 고수로 평가받는다.책에서 작가의 사진을 완벽하게 구현하는 건 불가능하다. 대신 작가도 자신의 작품에서 새로운 영감을 받을 수 있게 책에 아우라를 집어넣는 게 그의 소신이다. 기성작가도 중요하지만 이제 사진 세상에 첫발을 디디는 신진작가의 작품활동에도 포토북이 동행 되길 바란다. 제대로 만들려고 하면 할수록 적자다. 해외에 팔려고 하면 더 손해를 보는 구조다. 다행히 10년 전부터 독립서점(2021년 현재 485개), 독립출판이 힘을 받으면서 그도 동반 성장을 할 수 있게 된다.7년 전부터는 그의 장인 기질이 폭발한다. 사비로 '리트머스 LS'란 잡지를 만든 것이다. 지금까지 4권을 펴냈다. 그 잡지는 돈 때문이 아니라 자기를 찾아와 책을 만들어 달라고 하는 아티스트와 다양한 공감과 소통을 위한 수단이다. 심혈을 기울일 때는 한 작가와 15번 이상 미팅을 하기도 한다. 매달 반은 제주에서 반은 대구에 머문다. 제주의 속살 풍경을 포착 중이다. 디지털 세상이지만 여전히 흑백 필카의 기운을 믿는다.지난 6월 서울 코엑스 국제도서전에서도 성과가 좋았다. 대구미술관, 리안갤러리 등과도 손을 잡았다. 리안 전시장에 아트북코너를 깔게 만들었다. 가성비를 따지지 않는 명실상부한 포토북 시장이 봄날처럼 찾아왔으면 좋겠단다. 프린트하우스 권석진 세상에 내민 주제…여느 책이 아닌 분신같은 존재 표지와 속지 디자인 방식 고민…길게는 1년이상 제작국내 1급작가 숨결 봉헌 'ON KOREA' 가장 애착 우직한 눈빛. 그는 원래 사진가 되려고 했다. 계명문화대와 경일대 사진영상학과를 나왔다. 자신의 재능이 사진 촬영 보다 찍혀져 나온 사진을 절묘하게 편집해 사라지지 않는 아트북 같은 북을 만드는 데 있다고 확신한다. 북 출간 전문가 권석진이 더 그럴듯해 보였다.그에게 북은 여느 책이 아니라 자신의 '분신'이나 마찬가지다. 사진가를 만나, 그가 세상에 내밀고 싶은 사진을 하나로 묶어줄 수 있는 주제어 그리고 표지와 속지의 디자인 방식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한다. 이후 길게는 1년 이상 걸리는 제작 기간, 주문에서 발주까지, 그 모든 과정에 디테일을 살리기 위해 밤잠을 설친다. 그동안 100여 권의 북을 세상에 알렸다. 가장 애착이 가는 책은 뭘까? 단연 거의 10년에 걸쳐 시리즈처럼 묶여 나온 한국 시리즈였다. 2013년 경주세계문화엑스포가 그를 선택했다. '한국 대표작가 사진전 ON KOREA'를 펴낸다. 강운구, 서헌강, 육명심, 이갑철, 박종우, 오형근, 구본창, 김중만 등 국내 1급 작가의 숨결을 한 권의 책으로 봉헌했다. 2014년 '한국-터키 대표작가 사진전 BLOOMING SILK ROAD', 2016년에는 헝가리 한국문화원에서 주문이 들어와 '한국 대표작가 유럽순회사진전 IMAGING KOREA'를 책으로 엮어낸다. 마지막 한 권은 2020년 헝가리 한국문화원에서 주문이 들어온 'Korean Shamanism GUT'. 한국의 샤머니즘의 현장을 사진 연대기로 풀어냈다. 김수남은 '신들의 고향 제주', 김동희는 '굿판', 이규철은 '징소리', 안세홍은 '작두', 박찬호는 '신당', 이한구는 '청배(請陪)'란 주제를 잡았다. "이렇게 한국 굿의 사계를 종횡으로 다 보여준 기획 북은 이게 최초"라고 권 대표는 자부한다. 특히 굿 사진집에서는 최첨단 색채 공학의 노하우가 담긴 국제인쇄표준(G7)을 공유해 고감각 원색분해의 실재를 국내 사진출판업계에 보여주려 했다. 모리디자인 곽범서 2009년 '우토로 사람들 그이후' 작업후 20여권 펴내 '위대한 유산 페르시아' 계명대 2021 올해의 출판상 개인전도 5회…독자상상 방해하지 않는게 가장 중요울진 출신으로 한때 신부가 되기 위해 대구가톨릭대 신학과를 졸업한다. 하지만 그의 꿈은 사진으로 집약된다. 영남대 조형대학원에서 사진예술을 전공한다. 지금까지 5회 개인전을 했다. 그런 그가 2000년 한 선배를 통해 사진출판 일을 익히게 된다. 졸업전 도록도 직접 제작한다. 이거 재밌네, 싶었다. 그래서 2006년 독립출판사 '모리디자인'을 차리고 '보북스'와 손을 잡는다.그동안 20여 권을 펴냈다. 2009년 '우토로 사람들 그 이후'(임재현 사진집), 2018년 '기억·기록·기술'(사진기록연구소), 2019년 'FLORA'(이지선 사진집)·'부서지고 세워지고'(사진기록연구소)·'붉은 깃발 별이 되어'(양성철 사진집), 2020년에는 대구에서 사진가인 남편 밍창과 1개월 레지던시 작업을 하던 중 알게 된 대만 작가 왕샤오칭(汪曉靑)의 사진집 ' Reframing Motherhood'을 펴낸다. 20년간 자식의 성장기를 다룬 이 책은 아코디언을 모티프로 제작된다. 제작 기간이 1년 넘게 걸렸다. 이건 기계작업이 어렵다. 일일이 손품을 팔아야 된다. 고난도 스킬을 배우기 위해 일본 출판계도 살펴봤다. 이 밖에 노진규 사진집, 'Scrap and Build'(사진기록연구소), '한옥공소'(이지선 사진집), 2020년 나온 '위대한 유산 페르시아'(계명대출판부)는 계명대 선정 2021년 올해의 출판상도 받는다. 향후 장용근 사진집(37호 보고서)과 이주노동자의 일상을 담은 '빠이, 일상의 초대'도 나올 예정이다."비록 세월이 지나 종이가 서서히 노랗게 변색되어도 내가 좋아하는 북이라면 그 또한 아름답게 보일 것이다. 전시장에서 원본 사진을 마주하는 것도 좋지만, 작가의 많은 사진을 여러 페이지로 나열하면서 나오는 느낌은 우리를 또 다른 세계로 불러들인다. 편집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사진도 달라 보인다. 북을 마주할 때 내가 가장 중요한 게 생각하는 것은, 편집이나 디자인이 작가의 작업을 가리지 않고 또한 독자의 상상을 방해하지 않는 지점이다." 사월의 눈 전가경·정재완 아내는 디자인 저술가로 남편은 북 디자이너로 투합 주문자 작품에 버금가는 책 재창조·새로운 담론 제시 사진과 이미지, 전시와 책, 텍스트 사이 공간 탐색전가경·정재완 부부가 이끄는 '사월의 눈'. 아내는 디자인 저술가, 남편은 북 디자이너. 한국 북디자인의 효시로 불리는 정병규 사단에서 일을 배우다가 대구로 축을 이동한다. 2012년 봉덕동의 한 한옥을 꾸며 출판사를 차린다. 지금까지 17권을 출간했다. 주문자의 작품에 버금가는 책을 재창조하려 든다. 가장 반향을 불러일으킨 건 프랑스의 세계적인 북 디자이너 마생(Massin)을 다룬 '마생'이다. 제작 기간 만 2년. 올리비에 르그랑의 사진과 에세이스트 이화열의 글, 마생이 직접 쓴 저서까지 재편집해 수록했다. 한글·불어·영어별 색을 달리했다. 특히 녹색 하드커버는 그 자체가 예술이다. 그런데 정재완이 원하는 천은 국내에서 구할 수 없었다. 네덜란드에서 수입해야만 했다. 스승의 책은 무려 7년 걸려 어렵사리 출간돼 애정도 남다르다. 출간한 첫 책은 신진 작가 발굴 프로젝트로 기획한 강태영의 '사이에서'로 사진가의 데뷔가 전시나 공모전 수상이 아닌 책을 통해 이루어져 눈길을 끈다. '아파트 글자' 역시 부부가 수집한 아파트 외벽의 글자 사진을 담은 사진집이다. 아파트 네이밍과 타이포그래피를 통해 새로운 담론을 제시한다. 둘의 근성은 남다르다. 좀 부풀려 말해 대동여지도를 혼자 만든 김정호의 고집과 근성이 기획력에 녹아든다. '수집(collection)'의 의미가 강한 '사진집'보다 '사진+책'이라는 두 매체의 교차와 접점 그리고 간극에 대한 생각을 자극하는 '사진책'이라는 용어를 선호하고 사용한다. 프로와 아마추어, 사진과 이미지, 사진과 영상, 전시와 책, 사진과 텍스트의 사이 공간을 탐색하고자 하며, 이 틈새를 연결 짓는 행위로서 그래픽 디자인을 바라보고 있다. '사진'이라는 필터로 누락되는 이미지들을 사진책이라는 공간에 새롭게 재생하는 것이 둘의 과제란다. 향후 영화와 디자인, 영화와 사진과의 관계를 모색하는 포토 콜라주, 포토 몽타주 형식부터 일본 사진가 모리야마 다이도의 작품집까지 출간할 모양이다. 글·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마르시안 스토리 서민규 대표프린트하우스 권석진 대표모리디자인 곽범서 대표사월의 눈 전가경·정재완 대표
[커버 스토리] '포토북 르네상스 시대'를 갈구하다(1)
사진은 햇빛의 자손이다. 하지만 그림과는 사뭇 터치가 다르다. 중세시절, 황제와 왕, 성직자들은 그들의 권능에 맞는 그림을 궁중 화가에게 그리게 했다. 임금의 방과 대기실 사이의 긴 복도(갤러리)는 내가 이 정도로 대단한 존재라는 걸 암시하는 별별 성화(聖畵)가 걸렸다. 하지만 이내 그 무겁고 권능에 가득한 성화는 세잔, 고흐, 마네, 모네, 피카소 등에 의해 구현된 현대미술로 대체된다. 그 와중에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존재가 등장한다. 바로 '사진'이다. 그 존재는 '햇살로 그린 작은 그림(Sun Drawn Miniature)'으로도 불린다. 전쟁이나 다른 나라의 낭만적인 풍경을 그림으로 얻는 대신 사진을 통해 직접적인 시각적 표현으로 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사진은 하나의 예술이 되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인간이 사물의 순간을 포착한다는 게 불가능하다고 봤고 그 일 자체가 바로 신성모독이라 사진을 폄훼했다.카메라의 전신은 '카메라 옵스큐라'였다. '어두운 방(dark chamber)'을 의미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시대부터 작은 구멍을 통과한 빛이 상을 맺을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었다. 17세기 초부터 어떤 은의 화합물이 광선에 닿으면 검게 변한다는 사실을 발견했지만, 이미지가 영구적으로 검게 변하지 않도록 그 반응을 고정시키는 방법은 풀리지 않는 어려운 문제였다.최초의 사진을 만든 사람은 '조제프 니세포르 니엡스'. 니엡스는 세계 최초의 사진을 만들어낸다. 이 사진은 1826년경 그의 집 안뜰에 있는 건물 지붕에서 찍은 것이다.한국의 첫 사진은 뭘까? 2008년 2월 명지대 박주석 교수가 한국사진학회 학술지에 발표한 '사진과의 첫 만남-1863년 연행사 이의익 일행의 사진 발굴'이라는 논문에서 보면 연행사 일행이 중국 연경(현 북경)에서 찍은 사진 6점이 현재까지 확인된 것 중 한국인을 모델로 한 가장 오래된 사진이라고 한다. 대구의 사진문화는 최계복(1909~2002)에 의해 주도된다. 33년 '영선못의 봄'을 촬영한 그는 1934년 종로1가에서 최계복 사진기점(뒤에 대구사진관)을 오픈한다. 대구 첫 개인전은 1955년 10월 미국공보원에서 열린 김진욱 사진전이다. 이후 대구는 '한국 사진예술의 수도'로도 불린다. 이런 흐름은 자연스럽게 2006년부터 시작된 대구사진비엔날레로 연결된다. 이 흐름을 가장 아방가르드하게 수렴한 행사가 남구 이천동 아트 스페이스 루모스(Lumos)에서 열렸다. 행사명은 ‘The Paris Photo–Aperture Foundation PhotoBook Awards 대구에디션’: 일명 ‘2022 대구 포토북 쇼’이다. 이 상은 두 사진 전문단체인 Paris Photo와 Aperture Foundation이 협업하여 2012년부터 매년 3가지 부문에서 우수 포토북들을 선정해오고 있다. 후보로 선정된 작품집들은 파리 그랑 팔레에서 개최되는 Paris Photo 전시를 시작으로 전세계 주요 도시에서 순회 전시로 소개되고 있다. 2021년에는 출품된 800여권의 중 선정된 38권의 포토북지 전시는 아시아 투어 일환으로 서울 한미사진미술관, 대구 아트스페이스 루모스에서 차례로 열렸다. 두 기관의 의기투합으로 한국 사진계에 포토북의 바람을 일으킨 셈이다.특히 지난달 28일 끝난 대구 행사는 서울과 달리 인상적인 행사 하나가 더 추가된다. 지역의 대표적 포토북 전문 출판사가 출간한 포토북 전시다. 현재 대구에는 모두 5곳의 포토북 출판사가 있다. 루모스(석재현)·마르시안 스토리(서민규)·모리디자인 보북스(곽범서·장용근)·프린트하우스(권석진)·사월의 눈(전가경·정재완). 사진에 정통한 이들 출판사 대표들은 '포토북 르네상스 시대'를 갈구하는 전위 출판맨이다. 위클리포유가 그들을 만나봤다. 글·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커버 스토리] '포토북 르네상스 시대'를 갈구하다(2)에서 계속됩니다.프린트 하우스 권석진 대표가 무려 10년에 걸쳐 완간한 한국 인문학 4권. 이 책에는 한국의 정신, 한국의 문화재, 한국의 굿 등 가장 한국스러운 사진이 담겨 있고 터키, 헝가리 등 한국 작가의 유럽순회전과 맞물려 있다.대구 남구 이천동 아트 스페이스 루모스에서 열린 지역 5개 포토북 전문 출판사의 포토북 전시회 포스터. 지역에서 처음 열린 이 행사는 지난달 28일 막을 내렸다. '2021 Paris Aperture Foundation Photobook Awards 대구에디션' 해외순회전의 일환이다.
의료대란으로 번진 의대 증원
[의대 증원 집행정지 각하·기각] 정부, 대학 "2025학년도부터 의대 증원 속도"
"20일까지 전공의 복귀해야"…전문의 취득 늦어질 가능성 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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