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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크 人사이드 & 직터뷰]
[토크 人사이드] 대구 송원학원 이익구 원장의 '전국구 재수 종합학원' 성장 노하우
대구 송원학원은 '지방 학원'이라는 핸디캡을 극복하고 전국구 재수 종합학원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우수한 강사진과 교육 커리큘럼, 입시 정보 분석력 등에서 여타 학원들을 압도한다는 평을 받고 있다. 2023학년도 대입 실적은 눈에 띈다. 복수 합격자를 포함해 의·치·한의예과 182명, 서울대 17명, 연·고대 44명, 수도권 주요 대학 232명, 기타 수도권대·경북대·부산대 등 391명의 합격자를 냈다. 이익구 송원학원 원장은 "학생들의 성적은 진학지도 시스템으로 통합 관리된다"면서 "누적된 진학 지도 데이터와 상위권 학생들의 수많은 표본을 통해 정확한 진학 지도가 가능하다"고 자신했다. 지난 8일 이 원장을 만나 졸업생이 성적과 등급을 올릴 수 있는 노하우에 대해 들어봤다.학생 설문조사 통해 강사 평가에 의견 피드백대입·출제경향 반영 부교재로 수준별 맞춤수업누적된 진학 지도 데이터 활용 성적 통합관리30명 한 학급에 담임 1명…학생 건강체크까지▶송원학원은 재수를 결정한 성적 우수 학생들이 가장 먼저 문을 두드리는 곳이다. 서울 대형 재수학원 못잖은 대입 실적은 우수한 강사진에서 비롯된다는 입소문이 자자한데."송원학원 강사는 한 시간 수업을 위해 다섯 시간을 준비한다. 상위권 학생들이 밀집해 수준별 반 편성을 하더라도 맞춤 강의를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강사들은 수준별 맞춤형 수업을 위해 부교재를 직접 제작해 제공한다. 해마다 달라지는 대입제도와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출제 경향을 반영하는 것은 물론이다. 부교재를 직접 만드는 만큼 보다 효율적인 강의와 학습이 가능하다. 학생들이 재수 종합반 강의를 '단과 수업 같다'고 평가하는 이유다."▶실력 있는 강사를 검증하는 노하우가 궁금한데."인사기준 1번이 강의 평가다. '학생에게 보탬이 되는 수업을 하는가'가 가장 중요하다. 객관적으로 검증하는 게 관건이다. 우리 학원은 채용 후 매년 2회 강사 평가를 한다. 평가에는 학생들이 설문조사를 통해 참여한다. 학생들 의견이 거의 정확하다. 수업을 통해 실력이 향상됐는지, 강사가 반별 수준에 맞게 수업을 준비하는지는 물론, 얼마나 열정적으로 강의했는지 등을 묻는다. 원생의 피드백을 반영하는 강사 평가시스템은 학원의 노력 중 하나다. 과거 서울 유명 학원가에서 인기 강사를 영입했지만,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서울서 지방에 내려와 잠깐 소일하듯 수업을 하니 학생들이 단박에 알아챘다. 한번 기회를 놓친 재수생들에겐 100%를 쏟아붓는 선생님이 필요하다. 송원학원 강사는 총 70명 정도다. 재원생 수 대비 많은 편이다. 그만큼 세밀한 접근이 가능하다는 의미다."▶의학계열 실적 영향으로 송원학원 선호도가 높다는데."대구경북 상위권 학생들이 우리 학원을 선택한다. 지난해 수능 성적(국어·영어·수학)을 제출하거나 자체 시험을 치러야 한다. 시험을 치르는 경우 대입만큼 경쟁이 심해 학생들끼리 '정시모집 라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몇 년 전에는 재수학원 랭킹 1~2위를 다투는 서울 D학원의 신문 광고에 실린 대입 실적과 송원학원 대입 실적을 비교해 봤더니, 의학계열 합격자 수는 우리 학원이 월등히 더 많았다." ▶서울에서 재수해야 성공한다고 믿는 학생·학부모가 점점 늘고 있다."소비자가 많으면 공급자의 질이 높아지니까 서울로 가는 것 같다. 우수 강사 비율은 서울지역 학원가가 압도적으로 많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소위 '일타 강사'들은 이곳저곳 분산돼 있다. 찾아다니며 수업 듣는 것도 시간 투자가 필요한 것인데 무작정 서울을 선택하는 것은 아닌가 스스로 돌아봐야 한다. 원생 중엔 서울 갔다가 돌아오는 경우도 적잖다. 송원학원에는 강의 잘하는 강사들이 집결돼 있다. 또 한 가지 생각해 볼 점은 서울의 학원 비용이 지역보다 거의 2배 정도 높다는 것이다. 기타 경비까지 합하면 만만찮은 금액이다. 대입 실적만 보고 서울 대형 입시 학원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은데, 전국에서 우수 학생들이 몰려드니 당연히 따라오는 실적이라는 점을 인지해야 한다. '재수를 통해 성적이 얼마나 올랐냐'를 본다면 송원학원이 훨씬 낫다고 자신한다."▶'재수해도 성적 안 오른다'는 얘기도 주변에서 심심찮게 듣는다."의욕 있는 학생은 대부분 오른다. 실력이 상당히 오르는 경우도 적잖게 본다. 특히 비수성구 학생 중에 학생부는 좋은데 수능 점수가 못 따라가 재수를 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학생들은 도약의 폭이 크다. 역량이 있으니 잘 가르치는 강사가 붙으면 쉽게 성적이 오르더라. 나는 오히려 '재수해서 성적 안 오른 학생, 어디 한번 데리고 오라'고 되받아친다. 같은 내용을 반복하는데 왜 성적이 떨어지나."▶요즘 수험생들은 독학 재수학원처럼 자율적으로 공부하는 방식을 선호한다. 새로운 재수학원 방식인데."학생들이 자신의 독서대에서 원하는 인터넷 강의를 듣고, 모르는 것은 상주하는 강사에 물어 보면서 공부하는 방식을 점차 선호하는 추세다. 성적 향상 정도를 조사해보면 기존 수업방식이 월등하지만, 독학 재수학원의 소위 독서대 공부 시스템이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독서대에서 공부하다 피곤하면 휴게실에 가서 커피 마시며 '인강' 들으며 공부하는 등 자유로운 분위기도 좋지만, 아무래도 자기절제가 어려운 학생이라면 오히려 효율성이 떨어질 수 있다. 또 수준별 수업이 마련돼 있지 않은 인강의 경우 중·하위권 학생들에겐 강의 내용이 어렵거나 이해가 안 될 수도 있다. 그래도 통제받으며 공부하는 것을 원치 않는 학생들의 학습 스타일을 고려해 올해 모든 학원생들에게 독서대를 제공한다. 또 필수강좌는 4교시까지만 하고, 5교시부터 퇴실 때까지 학생 자율로 공부하도록 할 예정이다. 총 574석이며 전국에서 가장 큰 독서대가 될 것이다."▶반별 담임제로 학생들의 수험생활을 전체적으로 관리해 준다는데."대부분의 재수 종합학원들은 담임 없이 출결 체크만 한다. 30명 한 학급에 담임 교사가 1명 있다. 담임들이 학생들의 건강 체크는 물론, 수업 애로사항 청취, 진학 컨설팅 등을 도맡는다. 강의만 하면 되지 담임이 꼭 필요하냐고 묻는데 학교 졸업 후 소속이 없는 상황에서 담임과 함께 수험생활을 경험하는 것은 생각보다 중요한 부분이다. 송원학원의 담임수당은 200만원이다. 제대로 보상을 한다. 그만큼 담임 체제가 수험생활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고 보기 때문이다."▶재수를 고민하고 있는 학생들에게 한마디 한다면."요즘 학생들은 '실패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많은 것 같다. 100세 시대에 1년이란 시간은 결코 길지 않다. 힘들더라도 견디면서 공부하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2월에 개강하고 학생들을 맞으면 대부분 얼굴이 어둡다. 입시에 실패했다는 좌절감 때문이다. 하지만 3월 모의고사 이후부터 어둡던 안색이 점점 밝아지기 시작한다. 재수하면 무조건 성적이 오를 것이라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재수생 교실은 고3 교실보다 훨씬 수업에 대한 이해도가 높고, 역동적이라고 생각한다. 또 내신 성적을 관리하기 위해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 고3 때보다 자율학습을 할 수 있는 시간이 1.5배 이상 많다. 열심히 하면 등급이 오를 수밖에 없다." 이효설기자 hobak@yeongnam.com이익구 송원학원장이 8일 오후 대구 수성구 범어동 송원학원에서 인터뷰 질문에 답하고 있다. 박지현기자 lozpjh@yeongnam.com
2024.01.15
[토크 人사이드] 일본정부 상대 위안부 피해자 손배소송 승소한 이용수 할머니
"두 손을 하늘 위로 가리킨 것은 만세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먼저 가신 할머니들 생각이 나서였습니다."일본 정부가 지난해 12월9일 상고를 포기하면서 서울고등법원의 '일본 정부는 피해자들에게 1인당 2억원씩 지급하라'는 판결이 확정됐다. 2016년 12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11명과 숨진 피해자 유족 5명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 소송이 7년 만에 막을 내린 순간이었다. 앞서 서울중앙지법 1심 재판부는 2021년 4월 국가면제 원칙을 이유로 소송을 각하했지만, 항소심 재판부는 국가면제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다며 1심 판결을 취소했다. 역사적인 순간 소송을 제기했던 위안부 피해자 11명 중 유일한 생존자인 이용수 할머니는 먼저 세상을 떠난 할머니들을 떠올렸다. 항소심 승소 판결 후 재판장을 나올 당시 두 손을 번쩍 든 이유도 만세를 부른 것이 아닌 먼저 간 할머니들이 생각나서였다고 했다.지난달 日정부 상고 포기 2억씩 배상 확정판결 후 먼저 간 할머니 생각나 두손 번쩍위안부 문제 우리세대 끝내고 잘 지내야2015년 한일합의는 고노담화 훼손한 밀약정부, 위안부 할머니 죽기 기다리는 것 같아역사관 '희움' 국가·지자체서 지원 절실올해로 95세인 이용수 할머니는 33년간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싸워왔다. 1992년 첫 증언을 시작으로, 2007년엔 미국 하원 외교위에서 증언하는 등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지난해 국내 법원의 승소 판결은 이 할머니가 싸워온 33년의 세월에 대한 결실이었다.지난 9일 대구 동구 신천동 영남일보 본사에서 이 할머니와 단독 인터뷰를 가졌다. 이날 인터뷰 자리에는 1993년부터 이 할머니와 인연을 맺어온 최봉태 변호사가 함께했다. 이 할머니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한 분이라도 살아계실 때 이 문제를 끝내고 싶은 마음을 내비쳤다. 현재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생존자는 이 할머니를 포함해 9명이다. 이 할머니는 기나긴 싸움을 후대에 물려주고 싶지 않다면서도, 문제 해결을 위해 정부의 조속하고 책임 있는 태도를 강조했다.▶2016년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이 7년 만에 승소했는데."승소한 후 재판장을 나오면서 먼저 세상을 떠난 할머니들이 생각나 두 손을 들고 하늘을 쳐다봤다. 그동안 많은 할머니가 제대로 된 사과도 받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분들께 노여움을 푸시고 모든 사람의 건강과 행복을 빌어달라 말했다. 그리고 20일 뒤 일본이 상고를 포기해 판결이 확정됐을 때는 30년 묵은 한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돌아가신 할머니들께 '이제는 한일 양국 학생들이 올바른 역사 교육을 배우고,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같이 노력할 수 있도록 응원합시다'라고 말했다. 현재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아홉 분 살아계시는데 이분들이 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이 문제가 해결됐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갖고 있다. 나는 직접적인 피해자지만 여러분은 간접적인 피해자라 생각한다. 이 문제를 우리 세대에서 끝내고 우리 후손들, 특히 학생들이 일본의 학생들과 교류하면서 올바른 역사 교육을 받고 사이좋게 지냈으면 하는 바람이다."▶2021년 1차 손해배상 소송에서 승소해 "1인당 1억원씩 지급하라"는 판결에도 일본 정부는 침묵하고 있다. 이번 "1인당 2억원씩 배상하라"는 판결에 대해서도 일본 정부가 대응하지 않는다면."일본 정부는 우리 법원의 판결을 무시하고 있다. 일본 정부가 지금처럼 대응하지 않을 경우 우리 정부가 강제 집행을 할 수 있는데, 그렇게 되면 시간이 오래 걸리고 금전적인 부분은 받을 수 있겠지만 사과는 받기 힘들다. 또 양국 간 외교적 마찰이 생길 우려도 있다. 일본 정부는 1965년 한일 협정 당시 개인의 손해배상 청구권(이하 개인 청구권)이 소멸했다고 주장하며 우리 법원의 판결을 무시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 국회는 개인 청구권이 유효하다는 입장이어서 일본 내에서도 의견이 엇갈린다. 이럴 때 우리 정부가 일본에 개인 청구권이 유효한지 여부를 명확하게 가리자고 요구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있어 안타깝다." ▶지난해 윤석열 대통령 취임 1주년에 열린 정기 수요시위에서 윤 대통령에게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약속을 지켜달라'고 말했다. 윤 정부의 위안부 문제 해결 의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법원에서 승소 판결이 난 뒤로 나는 제 몫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줄 차례다. 윤석열 대통령이 대통령 후보 시절 당선이 안 돼도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약속했다. 윤 대통령은 위안부 할머니들뿐만 아니라 국민에게도 약속한 것이다. 그러나 아직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다. 지난 8일에는 조태열 외교부 장관 후보자의 사퇴를 요구하기 위해 국회에 다녀왔다. 조 후보자는 2015년 한일 합의 이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할머니들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지금 정부를 보면 꼭 할머니들이 다 죽기를 기다리는 것 같다. 조 후보자는 2015년 한일 합의 당시 외교부 2차관이었다. 당시 한일합의는 할머니들의 의사가 하나도 반영되지 않고 양국 정부가 밀어붙였다. 이는 1993년 일본이 사죄하고 제대로 된 역사 교육을 하겠다고 약속한 고노 담화 정신을 훼손하는 밀약이다. 당시 조 후보자는 할머니들을 찾아와 설득했지만 끝내 사과하지 않았다. 조 후보자가 사과 하나 없이 외교부 장관이 되려고 하니까 할머니들 입장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이다."▶향후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어떤 계획을 갖고 있는지."예전부터 일본이 계속 거짓말을 하고 있으니, 국제사법재판소(ICJ)에서 위안부 문제를 제소하자고 요구했다. 그런데, ICJ에 제소하기 위해선 양국이 합의해야 하는데 일본이 계속 내빼고 있다. 그래서 유엔 고문 방지위원회(CAT)에 단독으로라도 제기하자는 것이 제 바람이다. 또 아시아 다른 나라에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가 많다. 북한, 중국, 필리핀, 대만 등에 계시는 피해자분들도 다 구제를 해준다면 좋지 않겠나. 향후 아시아 인권재판소를 만들어 힘이 약한 나라의 피해자들도 보편적으로 구제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표다."▶대구에는 비수도권에선 유일하게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 '희움'이 있다. 하지만 지자체 지원이 적고, 관심도 전보다 저조하다는 지적이 나오는데."경북 성주에서 태어나 얼마 되지 않아 대구로 이사 왔다. 지금의 중구 태평로 인근에서 자랐다. 이후 달서구 상인동 비둘기아파트에서 30년을 살다 얼마 전 수성구로 이사했다. 제가 평생을 살아온 대구에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인 '희움'이 있다는 것은 저에게도 큰 의미가 있다. 이런 의미 있는 곳임에도 최근 비가 오면 밤새도록 물이 새는 등 지자체 지원을 못 받고 있어 안타깝다. 국가와 지자체에서 희움의 열악한 환경을 개선해 주길 바란다." 김태강기자 tk11633@yeongnam.com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가 지난 9일 영남일보 편집국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
2024.01.11
[논설위원의 직터뷰] 권도훈 '라일락뜨락1956' 대표 "獨 괴테하우스처럼 이상화생가터도 좋은 문화콘텐츠 될 수 있어"
이상화 시인(1901~1943)은 1926년 '개벽'(開闢)지 6월호에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란 시를 발표했다. 25세 때였다. 시에는 나라를 잃어버린 청년 시인의 비애와 저항의식, 민족애가 절절히 녹아 있다. 일제에 핍박받는 민초들의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그가 대구가 낳은 민족시인으로 불리는 이유다. 시만 쓴 것은 아니었다. 그는 1919년 대구3·8만세운동 때 백기만과 함께 학생 동원에 앞장섰다. 자택에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기도 했다. 시와 독립운동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던 시기에 그는 지금의 대구 중구 서문로 2가 11에서 거주했다. 그의 생가인 이곳에서 32세까지 살았다. 이후 여러 번 이사를 다니다가 1939년부터 4년간 중구 계산동 주택에서 살다가 운명했다. 대구에는 이상화가 태어난 생가와 죽음을 맞은 고택이 따로 있는 것이다. 이상화 고택은 대구 근대골목 투어의 필수코스가 됐을 정도로 잘 보존돼 있다. 하지만 이상화가 떠난 후 생가는 1956년에 허물허졌다. 그 집터에는 새집들이 들어섰다. 흔적도 없이 사라질 뻔했던 이상화 생가는 다행히 일부나마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생가터에 지어져 방치되던 빈집이 2018년 카페 겸 복합문화공간(라일락뜨락1956)으로 재탄생했다. 그곳 마당엔 청년 이상화에게 시심(詩心)을 심어준 수령 200년의 라일락 나무가 자리 잡고 있다. 이상화 생가터에서 '라일락뜨락1956'을 운영 중인 문화기획자 권도훈 대표를 만났다.◆이상화 생가와의 운명적 만남권 대표는 대학에서 시각디자인, 대학원에서 광고디자인을 전공했다. 대구디자인전람회 금상을 비롯해 30여 개의 크고 작은 상을 받은 실력파다. 광고디자인 회사를 운영하면서 <주>평화산업의 발렌키 브랜드 리뉴얼, 달서문화재단 CI 등도 개발했다. 영남이공대 겸임교수로 12년 동안 학생들에게 실무디자인을 가르쳤다. 디자인이 필요한 곳에 무료로 디자인 실무를 가르친 공로로 2008년 경북도지사 표창을 받았다. 그가 광고디자이너로서 한창 잘나가던 때에 큰 시련이 닥쳤다. 그건 어쩌면 이상화 시인과의 만남을 위한 운명이었다. "2016년에 광고회사를 동업하던 선배가 극단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그때 회사를 정리하고 강의도 그만두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에 막냇동생을 몹쓸 병으로 보냈습니다. 슬픔과 공허함이 너무 커 대인기피증까지 생기더군요. 2년 동안 사무실에서 식물을 키우고 책만 읽었습니다. 고통은 가시지 않았지만 그래도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새로운 삶의 공간을 물색하던 중 이곳을 발견하게 됐습니다." 권 대표는 6년 전 매입한 빈집이 이상화 시인의 생가터 중 안채 위치라는 걸 알게 됐다. 그 이후 자료들을 모아 대구시청에 생가에 대한 사실을 바로잡아달라는 청원을 했다. 그로 인해 중구청에서 고증을 거쳐 2019년에 이상화 생가터를 알리는 지주식 푯말을 세웠다. "하지만 시민들 대부분은 아직도 이상화 고택을 생가로 잘못 알고 있습니다. 이상화 시인에 대해 제대로 알리는 게 디자이너인 나의 사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개업 일 년 만에 닥친 코로나…위기를 기회로권 대표가 부푼 희망을 안고 이상화 생가터에 안착했지만 앞길은 순탄치 않았다. 하지만 좌절하지 않았다. 위기를 기회로 만들기 위해, 함께하는 삶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이곳을 오픈 한 지 일 년 만에 코로나19가 닥쳤습니다. 당시 대구의 모든 상점이 문을 닫다시피 했었죠. 그러던 어느 날 동산병원에 있는 지인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병원 근처 카페가 모두 문을 닫아 의료진과 자원봉사자들이 커피를 못 마신다고 하더군요. 그 말을 듣자마자 더치커피를 내려 동산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처음에는 혼자 시작했지만, SNS로 소식을 접한 사람들이 성금을 보내주더군요. 덕분에 10회에 걸쳐 100잔씩, 총 1천잔의 '커피폭탄'을 쏠 수 있었습니다. 또 지역 예술가들과 함께 8회에 걸쳐 무관객 콘서트를 열어 SNS를 통해 대구경북민에게 '힘든 상황을 극복하자'는 응원 영상을 보냈습니다. 모두가 함께한 봉사활동으로 대구시장 표창을 받았고 2020년에는 <사>여성과 도시·영남일보로부터 제1회 미터(美터)상 최우수상을 수상했습니다." ◆대구 문화예술 명소 라일락뜨락코로나19를 슬기롭게 견뎌낸 권 대표는 '라일락뜨락1956'을 대구의 문화예술 명소로 만들고 있다. 그곳에선 주민과 함께하는 노래자랑과 음악회, 연주회, 시 낭송회, 전시회 등이 열린다. 그의 열정과 다재다능이 빚어낸 결과물이다. "매일 새로운 일을 찾으려 애쓰고 있습니다. 바리스타로서 커피를 볶고 내리며, 시각디자이너로서 브랜드 개발 작업도 쉼 없이 하고 있습니다. 작년에는 이상화 시인을 주제로 한 곡의 노랫말과 뮤지컬 극본을 썼습니다. 북성로를 주제로 한 노래 5곡과 달성군 명소 4곳에 대한 노랫말을 쓰는 등 작사가로도 데뷔(?)했습니다. 음악인들과 협업해 여기서 '북성로 노래자랑'을 열기도 했습니다. 이곳은 열린 공간인 만큼 지역 예술인이면 누구나 자신의 재능을 알리고 주민과 소통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더 많은 문화예술 행사가 열리길 바랍니다. 특히 이상화 시인의 시와 민족정신을 계승하고 알리고 싶습니다. 매년 이상화 시인이 작고한 4월25일 지역의 문화예술인들과 추념식을 여는 것도 그런 소망에서입니다." 권 대표는 지역 청년이 꿈을 펼치는 일에도 도움을 주고 있다. "3년 연속 대구시 '청년응원카페'로 선정됐습니다. 2022년에는 제가 주최해 '청년응원 한마당, 멍석을 깔다'를 열었습니다. 여러 분야의 예술지망생을 추천 받아 지역 기업의 후원으로 장학금을 지급했던 게 뿌듯합니다."◆"대구는 가슴이 뜨거운 사람들의 고장" 권 대표는 이상화의 민족 정신뿐만 아니라 대구의 근현대 문화예술, 대구 정체성을 알리는 데도 앞장서고 있다. "2020년 가을부터 6개월 동안 대구가톨릭 평화방송에서 '문화예술 라일락뜨락'이란 코너를 통해 대구의 문화예술을 알렸습니다. 지금은 TBN 대구교통방송 '대구야사'(격주 목요일 오전)라는 생방송 코너를 통해 대구의 숨은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2022년 11월부터 방송해 오면서 저도 대구의 정체성을 알아가고 있습니다. 대구는 보수적이라는 이미지로 스스로 규정하고 가두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과 다릅니다. 대구는 정의감과 저항 의식이 강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입니다. 국채보상운동, 3·8만세운동, 2·28민주운동 등 대구에서 시작해서 전국으로 퍼져나간 역사적인 일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는 이타적인 마음이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대구의 정체성은 '가슴이 뜨거운 사람들의 고장'입니다."◆이상화를 K문화 콘텐츠로권 대표는 이상화와 그의 생가를 한국의 대표적인 문화 콘텐츠로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상화 시인은 대구를 넘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민족 저항 시인입니다. 그의 생가터 역시 대구 근대역사의 중요한 장소이자 훌륭한 문화 콘텐츠입니다. 우리나라 K팝, K컬처는 전 세계 문화를 이끌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콘텐츠의 힘'입니다. 독일에는 괴테하우스, 영국에는 셰익스피어 생가가 최고의 문화 관광지가 되고 있습니다. 조앤 K 롤링은 스코틀랜드 '엘리펀트하우스'란 카페에서 에든버러성을 바라보고 얻은 영감으로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을 썼습니다. 이상화 생가터 '라일락뜨락1956'에서도 한국판 조앤 K 롤링이 나오길 희망합니다."권 대표는 이상화 생가터를 전국에 알리고 관광명소로 만들려면 해결돼야 할 두 가지 과제가 있다고 했다. "이곳 마당에는 이상화가 보고 자랐을 수령 200살의 라일락 나무가 있습니다. 3년 전 광복회 대구지부와 함께 이상화 나무 2세목을 배양해 전국의 학교로 보내 '상화 정신'을 알리는 사업을 추진했으나 배양 실패로 중단된 상태입니다. 이 사업을 관청에서라도 재추진해주면 좋겠습니다. 또 대구문화예술진흥원은 2년 전 대구대표 인물 4명(이상화·이인성·이병철·박태준)을 선정해 도보여행 코스를 개발했습니다. 그러나 외지에서 온 관광객들 사이에선 이상화 생가터를 못 찾겠다는 불만이 많습니다. 구청 차원의 생가 체험 프로그램 및 홍보물 안내가 안 돼 있기 때문입니다. '라일락뜨락1956'은 민간 주도형 역사·문화를 기반으로 한 도시재생 창업 모델입니다. 청년들의 지역 이탈을 막고, 청년 창업을 이끄는 성공 모델을 확산하려면 지자체의 관심과 적극적 지원이 절실합니다." 허석윤 논설위원 hsyoon@yeongnam.com권도훈 '라일락뜨락 1956' 대표가 대구 중구 라일락뜨락 1956 내부의 이상화 나무 앞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권도훈 대표는 "라일락뜨락 1956은 이상화 시인의 생가터에 이상화 시인을 모티브로 세운 복합문화공간으로 청년들에게 창작의 영감을 심어주고 용기와 정의감 등의 상화정신을 알리고 있다"고 말했다. 박지현기자 lozpjh@yeongnam.com
2024.01.10
[출향 인사를 찾아서] '울진 출신' 한국 섬유예술 1세대 이신자 작가 "동해 일몰의 이글거리던 색채, 내 작업에 숨쉬며 살아있을 것"
국립현대미술관(관장 김성희)은 한국 섬유예술 1세대인 이신자(93) 작가의 대규모 회고전 '이신자, 실로 그리다'를 진행하고 있다. 오는 2월18일까지. 국내 '섬유예술' 분야의 개척자로 불리는 작가는 1970년대 '섬유예술'이라는 용어조차 없던 시절에 다양한 실험과 전위적인 시도를 통해 섬유 작업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경북 울진 월변의 작은 어촌마을에서 태어난 작가는 "어린 시절 집 문을 열고 나가면 울진의 바다가 햇살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때 보았던 동해의 투명한 햇살과 이글거리던 일몰의 색채가 내 작업 어딘가에서 숨 쉬며 살아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어린시절 집 문을 열고 나가면햇살 받은 울진 바다 반짝반짝'참 좋은 데 사는구나' 늘 생각한국 자수 다 망쳤다 혹평에도작업 고집하고 제 갈길 만들어젊은이들, 반대 두려워 말아야◆최초의 섬유예술 회고전 국립현대미술관의 이번 전시회는 섬유예술 분야에서는 처음으로 개최한 대규모 회고전이다. 반세기에 걸친 작가의 작품세계 형성과정과 한국 섬유 미술사의 발자취를 씨줄과 날줄로 직조하듯 구성했다. 예술에 대한 일반인의 관심이 부쩍 높아진 덕분에 평일에도 관람객의 발길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이번 전시회는 서울대 응용미술학과를 졸업하고, 30세에 국전 초대작가로 승승장구한 작가의 작품세계가 형성되는 과정을 4부로 나눠 구성했다. 거칠지만 자유롭고 대담한 시도를 엿볼 수 있는 초기작품부터 어릴 적 할머니의 베틀에서 익힌 직조의 과정을 토대로 최초의 '태피스트리(여러 색실로 그림을 짜 넣은 직물)'를 국내에 소개한 1970년대의 작업을 조명했다. 또 '한국섬유미술의 개화기'라 일컬을 만큼 국내 섬유 미술계가 새 국면을 맞이한 1980년대의 작업, 금속 프레임을 배치해 3차원 세계를 구성함으로써 자연에 대한 확장된 시각을 보여주는 2000년대 최근작까지 보여준다. 국립현대미술관 도화진 학예연구사는 "섬유미술이 국내 예술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제대로 조명받지 못한 측면이 크다. 일생 동안 예술 한길에만 묵묵히 정진해온 이신자 작가의 50년 작업 세계를 통찰하는 이번 대규모 회고전이 작가의 삶과 예술을 대중에게 알리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울진 바다가 키운 예술적 감수성이 작가의 작품에는 깊고 푸른 동해가 담겨 있다. 울진 앞바다의 고요한 침묵이 있고, 고기잡이에 나선 어부들의 건강한 에너지가 있고, 나른하고 한가한 오후의 풍경이 있다."어렸을 때 아버지를 따라 아침에 늘 산에 올랐어요. 그 언덕에 오르면 해돋이를 보게 돼요. 그 강렬한 햇빛, 동해에서 떠오르는 해를 보면 '아, 참 좋은 데 내가 사는구나'라는 생각을 늘 했었거든요. 산에서 보는 울진 바다는 아름다웠어요."초등학교부터 작가는 예술성을 뽐냈다. 당시 그린 그림이 신문에 게재될 정도로 일찌감치 두각을 드러냈다. 총명함이 남다른 아이가 대견스러웠던 일본인 교장은 "너는 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가서 재능을 마음껏 펼쳐 보여라"라며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고향에서 보낸 행복했던 기억이 많아서인지 떠나온 날들이 늘어날수록 그리움은 더욱 절실하다. "고교 진학을 위해 고향을 떠나온 뒤부터 제게 울진은 절절한 그리움의 대상이었어요. 하지만 마음만큼 쉽게 갈 수는 없는 곳이었죠. 그 시절 차편을 기다리며 여관에서 하룻밤, 또는 이틀 밤을 자기도 했어요. 그때는 전기가 귀했기 때문에 방 두 칸에 전구 하나만 밝히기도 했죠. 10대 여자애한테 고향으로 가는 길은 너무나 험난한 여정이었답니다." ◆"발로 작업했냐" 혹평 듣기도1950년대 중반 작가는 기존 예술계에 작은 파문을 던졌다. 그때까지 자수는 꼼꼼하게 면을 채우는 것이 대세였는데, 작가는 기발한 시도로 세상을 놀라게 했다. 작가는 실로 짜고, 감고, 뽑고, 엮는 다양한 방법으로 내면화된 자연의 정서와 정경들을 대담하게 단순화하여 짜임새 있는 구도를 선보였다. 또 누구도 생각지 못한 재료들을 활용했는데, 실과 천은 물론 밀짚, 밀포대, 방충망, 벽지, 장판 등 이질적인 재료들을 차용했다. 일부 예술인 사이에서 혹평과 뒷말이 나왔지만 작가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내친김에 1972년엔 대한민국미술전람회를 통해 전통자수를 현대화한 '태피스트리'를 국내에 최초로 소개했다. 그의 도전적 시도를 계기로 전통이라는 틀에 갇혀 있던 전통적 섬유예술 분야는 급격한 변화의 물꼬를 맞게 됐다. "그 시절 모 대학 교수들이 저에게 "발가락으로 작업했냐" "대한민국 자수 다 망쳤다"고 혹평했어요. 제 작업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거죠. 그들이 뭐라고 하든 개의치 않고, 제가 하고 싶은 대로 작업을 고집했어요. 왜냐면 제게는 선생이 없었으니까요. 저는 제가 길을 만들고, 걸어야 했어요."◆한국 '태피스트리' 선구자 1997년 덕성여대 교수를 은퇴한 작가는 한국야쿠르트가 운영하는 우덕 갤러리 관장으로 10여 년 이상 재직했다. 매년 평균 17회 이상 전시회를 개최하며, 전시회를 열기 어려운 화가들에게 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특히 홍보비, 대관비 등을 모두 무료로 진행해 젊은 화가들에게 도움을 줬다. 이 작가는 "갤러리들이 대중적 지명도를 높이기 위해 유명 작가를 끌어오는 것에 집중할 수도 있겠지만 갤러리 우덕은 더 많은 작가들에게 전시 기회를 줘 우수한 작가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라고 설명했다. 어느새 93세가 된 작가는 여전히 예술에 대한 열정을 놓지 못한다. 이제는 직접 작업을 하지는 못하지만 집 앞 미술관, 동료작가의 작업을 찾아 다니며 예술적 교류를 이어가고 있다. "1970년대에 처음으로 외국에 나갔어요. 국내와는 다른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아주 재미있어 보였어요. 그 작업을 국내에 소개한 것이 태피스트리였죠. 그때 국내에서 많은 반발과 혹평이 있었지만 제가 좋아서 했던 작업이기에 후회도, 원망도 없어요."작가는 예술가의 길을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보냈다. "되돌아보면 저는 항상 새롭고 획기적인 작업을 찾았던 것 같아요. 예술가를 꿈꾸는 젊은이들이 자기가 좋으면 하고 싶은 대로 했으면 좋겠어요. 중간에 안 좋으면 새로 하면 돼요. 길은 어디로든 열려 있고, 해법은 곳곳에 있어요. 젊은이들이 반대를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작업을 묵묵히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젊으니까요." 글·사진=김은경기자 enigma@yeongnam.com한국 섬유예술의 살아있는 역사 이신자 작가의 회고전이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다음 달 18일까지 열리고 있다. 이 작가는 어린시절 울진 앞바다를 보면서 키운 예술적 영감이 작업의 바탕이 됐다고 말했다.
2024.01.03
[토크 人사이드] 이남억 경북도 대구경북공항추진본부장 "대구경북공항을 세계 물류 허브공항 만들 효율적 인프라 구축에 만전"
"대구경북공항을 세계적인 물류 허브 공항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경북도의 목표이고, 제 사명입니다. 공항 개항 전 관련 인프라를 미리 구축해 국제 물류 경제권을 형성할 수 있도록 온 힘을 쏟겠습니다." 이남억 경북도 대구경북공항추진본부장의 머릿속은 2030년 개항을 목표로 추진 중인 대구경북공항의 물류 산업 구상으로 가득하다. 지난 19일 인터뷰를 위해 찾은 그의 사무실은 이를 보여주듯 대구경북공항 건설계획과 물류 인프라 구축, 공항 신도시 조감도로 둘러싸여 있었다.올해 초 경북도 대구경북공항추진본부장으로 취임한 이 본부장은 한국공항공사 사내 변호사를 시작으로 법제처에서 항공산업과 공항시설법 등을 두루 섭렵한 공항 전문가다. 지난 8월 국토교통부 사전타당성 검토 결과 발표를 기점으로 불거진 화물터미널 갈등을 완만하게 풀어간 경북의 공항 실무자로도 손꼽힌다. 이날 기자를 보자마자 이 본부장은 열정적으로 대구경북공항 발전 계획부터 설명했다.▶변호사로 활동하다 대구경북공항추진본부장으로 임명됐다."로펌 변호사와 공직자는 아무래도 사명감이나 보람에서 차이가 있는 듯하다. 민간에선 주로 기업자문이나 해외투자 역할을 수행했다면 경북에선 지역 주민, 기업인들과 향후 10년, 50년을 대비한 먹거리를 준비하고 있다. 지역의 미래를 함께 그려나가는 것에 굉장한 보람을 느낀다. 밖에서 보는 공직 사회는 보수적이고 수동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로 함께한 공직자들은 투철한 사명감과 책임 의식으로 가득했다. 특히 위기상황에서의 희생정신은 기대 이상으로 높았다."▶올해 이슈로 대구경북공항 화물터미널 복수 설치를 빼놓을 수 없는데."대구경북공항이 물류 공항으로 성장하기 위해선 화물기 전용 화물터미널 설치가 필수다. 지난 8월 국토부의 민간공항 사전 타당성 조사 발표 이후 촉발된 갈등은 이철우 경북도지사의 화물터미널 복수 설치 제안과 홍준표 대구시장의 공감대 형성으로 실마리를 찾았다. 이후 경북도는 화물기 전용 화물터미널 설치를 대통령과 국토부 장관에 연이어 건의하는 등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성공적인 물류 공항 건설을 위해 앞으로도 관계 기관 실무진과 성실히 협의해 나갈 것이다."한국공항公 사내 변호사를 시작으로법제처 항공산업 등 섭렵 공항전문가화물터미널 갈등 해소 실무자이기도가볍고 작은 항공화물 특화물류시스템바이오·농산물 특화 콜드체인 등 구축4차산업기술로 低물류비 실현 구상도"공항·지역 발전전략간 시너지 위해선공항경제권 지자체의 운영 참여 필수"▶화물터미널 복수 설치에 대한 협의의 진행 상황이 궁금하다."지난달 이철우 도지사가 원희룡 국토부 장관에게 의성군 화물기 전용 터미널 설치를 건의한 후 국토부, 국방부 등 관계기관 실무자 간 협의가 이어지고 있다. 국토부는 현재 민간공항 건설사업 기본계획 수립 용역에서 화물기 전용 터미널에 대한 기술·경제적 타당성을 검토 중이다. 국방부와 대구시도 화물기 전용 터미널 건설에 대해 긍정적인 의견을 피력한 만큼 향후 예정된 민간공항 기본계획 수립을 위한 관계기관 협의 회의를 기대하고 있다."▶경북도가 그리는 대구경북공항 청사진은."대한민국 중심부에 위치한 대구경북공항을 물류거점 공항으로 육성하는 게 경북도의 목표다. 지리적 이점을 활용해 현재 인천공항에서 처리되는 대구와 경북의 화물뿐만 아니라 충청과 대전 등 인접 지역의 화물까지 확보하는 전략을 구상하고 있다. 이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효율적인 물류 인프라 구축이다. 가볍고 작은 경박단소(輕薄短小)형의 항공화물에 특화된 물류 시스템은 물론 바이오와 백신, 농산물에 특화된 콜드체인 등을 구축하고 저렴한 물류비용 실현을 위해 4차 산업 기술을 적극 활용할 계획이다. 나아가 글로벌 전자상거래 기업과 글로벌 권역배송센터(GDC), 특송장 등 해외 물류 창출을 위한 준비도 차근차근 진행하고 있다."▶대구경북공항이 완공되면 지역에 예상되는 파급 효과는."지난 8월 사전타당성 용역 결과를 발표한 국토부는 대구공항 민간공항 이전으로 전국에 5조1천억원의 생산 유발효과와 3만7천여 명의 고용효과가 발생할 것으로 전망했다. 그러나 대구경북공항 건설사업은 단순히 공항 이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닌 지역의 산업과 경제를 완전히 새롭게 바꿀 전환점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항공 물류와 관련성이 높은 반도체, 무선통신기기, 자동차부품 등 지역 주력산업은 물론 전자상거래, 2차전지, 바이오 등 고부가가치산업이 발전해 전 세계로 뻗어 나갈 전망이다. 또한 항공산업클러스터와 공항 신도시 조성까지 생각하면 지역 내 파급효과는 실로 어마어마할 것이다."▶지난 11·12일 영남대에서 '대구경북공항 국제물류포럼'을 열었다. 포럼의 성과라면."올해 처음 개최한 대구경북공항 국제물류 포럼은 공항 건설에 따른 경북의 항공 물류 창출과 국내외 물류 전문가의 물류 경쟁력 향상 방안을 수렴하기 위해 기획됐다. 포럼을 통해 라자다와 같은 해외 주요 물류 기업이 경북 화주 기업이나 관계기관과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등 물류 산업 활성화에 초석을 마련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내년에는 지역 기업인이 더욱 많이 참여할 수 있도록 내실을 다질 계획이다. 요즘은 전자상거래 플랫폼이 발전해 굳이 바이어를 상대하지 않아도 세계 어디서나 회사 제품을 판매할 수 있다. 알리바바와 같은 플랫폼에 물건을 올리면 중국 등 해외시장에 진출한 것과 마찬가지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대구경북공항의 물류산업 활성화를 위해 시급히 해결해야 할 것은."공항 개항 전 물류 산업이 지역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하는 게 시급한 당면과제다. 이를 위해선 지방 공항의 운영에 해당 지방자치단체가 참여할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 벨기에 리에주 공항 등 해외의 이름 있는 공항들의 성장 배경을 살펴보면 지자체가 직접 운영에 관여해 공항과 지역 발전전략 간 시너지 효과를 낸 경우가 대부분이다. 진정한 지방시대를 위해서라도 지자체의 공항 운영 참여는 필수적이다. 아울러 공항 경제권 구축을 촉진할 물류 펀드 조성과 국내 항공 물류 정책을 전문적으로 추진할 컨트롤 타워가 조속히 마련되길 바란다."▶내년도 사업 추진 계획은."올해가 대구경북공항 건설의 초석을 다진 시간이었다면, 내년부터는 본격적인 속도전에 돌입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지난 10월 기획재정부가 대구경북공항 건설 사업의 예비타당성 조사 면제를 확정한 이후 현재 사업계획 적정성 검토 및 기본계획 수립을 위한 용역이 추진 중이다. 국토부도 내년 말까지 민간공항 기본계획을 수립할 예정이다. 이에 발맞춰 경북도 역시 내년에 스마트도시 지정 및 사업시행자 선정을 시작으로 공항 특화 도시 조성에 속도를 높일 계획이다. 대구경북공항이 대한민국 중남부권을 넘어 동아시아의 물류 허브 공항으로 발돋움할 수 있도록 앞으로 더욱 노력하겠다." 오주석기자 farbrother@yeongnam.com이남억 경북도 대구경북공항추진본부장이 "대구경북공항을 세계적인 물류 허브 공항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경북도의 목표"라며 공항발전 계획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2023.12.27
[논설위원의 직터뷰] 김이진 대구염색산업단지 관리공단 이사장, 특허까지 보유한 박사 경영인…취임후 550억원 이상 원가절감 성과
국내는 물론,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시설이 대구에 있다. 지금은 조금 빛이 바래긴 했으나 '섬유도시' 대구의 상징이자 자존심 같은 존재, 대구염색산업단지가 그렇다. 1조원대의 매출을 올리는 지역경제의 한 축이지만, 한때는 악취나 분진 등 대표적인 공해시설로 지목돼 곱지 않은 시선을 받기도 했다. 입주업체의 다양한 자구노력과 대구시의 지원 등에 힘입어 소관부처인 환경부도 만족감을 표시할 수준으로 각종 지표가 개선됐음에도 불구, 아직 '인식의 벽'은 넘어서지는 못하고 있다. 120여 개 입주업체를 이끌고 있는 김이진(66·명지특수가공 대표) 대구염색산업단지관리공단 이사장은 이에 대해 "부족하다면 시설개선이든, 검증이든, 홍보든 더해야 한다"는 소신을 밝혔다. 그간의 노력을 몰라줘서 아쉽고 안타까울 법도 한데 의외로 담담하다. 40년 정도를 '섬유인'으로 살아온 김 이사장의 스타일은 전형적인 직진형. 시쳇말로 '빠꾸'가 거의 없다. 핑계나 변명보다는 다짐과 실천이 우선이다. # '직진의 힘'은 자립심에서 비롯됐다김 이사장을 좀 아는 사람들은 그를 '작은 거인'이라고 부른다. 덩치는 작아도 배짱과 추진력이 남다르기 때문이다. 고민과 판단까지는 신중하나, 일단 결정되면 강하게 드라이브를 건다. 그는 포항시 남구 장기면에서 3남2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경상도 말로 기마이가 좋아, 주위 사람 상당수는 그가 금수저여서 고생을 별로 모르고 살아왔을 것으로 지레짐작한다. 정미소집 아들이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하지만 어릴 적 어느 순간 급격히 가세가 기울면서 청소년기 무렵부터 자의 반 타의 반 스스로를 챙겨야 했다. 어른이 되기도 전에 선택에 따른 책임을 오롯이 자신이 져야 하는 고달픈 상황을 일찍 마주하게 된 것이다.예나 지금이나 자립의 길은 만만치 않다. 봉산초등·장기중을 졸업한 뒤, 인문계를 고사하고 동지상고를 다닐 때부터 사실상 학업과 생계를 병행해야 했다. 힘든 나날이 계속됐지만 가슴 한쪽에서 꿈틀대는 야망과 욕심은 포기를 모르는 강인함을 심어줬다. 질곡의 세월을 견뎌낸 그는 우여곡절 끝에 영남대 대학원 섬유공학과에서 공학박사를 취득하며 공부와 연구의 일단락을 맺는 집념과 열정을 과시하기에 이른다. 특허를 갖고 있는 박사 경영인은 업계에서 매우 드물다. 대학과 대학원에서 섬유 및 화공을 공부했고 직장생활도 20대 중후반 무렵 섬유회사에서 시작했으니 절반 정도는 직장인으로, 나머지는 경영인으로 '섬유짬밥'을 먹은 지 40년 세월이 흘렀다. 당연히 공정이나 업계 사정에 밝을 수밖에 없었다. 40을 훌쩍 넘긴 나이에 회사를 꾸려가면서 공단운영에 대한 궁금증이 하나둘씩 생겨났다. '이건 아니지 싶은데?' '저건 뭔가 잘못된 계산 같은 데?' 등과 같은 의문부호는 이사장직 도전의 직접적인 계기로 작용하기에 이른다. 공적인 자리는 사익보다 공익을 앞세우는 게 당연하다는 것이 그의 소신이자 지론이다. 지난 7일 수상한 2023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섬유패션인 대상(경영혁신 부문)을 비롯, 임기 내 받은 각종 상은 김 이사장의 판단과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을 군말 없이 증명했다.상·하수도 요금감면 관철시키고국비·시비 480억원 지원받아 악취 방지시설 투입…오염저감경쟁입찰 등 통해 발생한 재원업체별 증기·폐수 요금 감면 등 전부 입주업체 지원에 사용인근 주민 대상 공단 개방 행사소통·화합 이미지 개선 큰 역할그의 오늘 뒤엔 한눈에 반한 부인특유의 뚝심 섬유업계 '작은 거인''대한민국 섬유패션인' 대상 수상# 모범답안은 항상 현장에 있다김 이사장은 3수 끝에 2018년 제14대 이사장으로 당선됐고 2021년 재선에 성공했다. 초선 때 박빙의 승부를 펼쳤던 그는 임기 초반 견고한 관행 및 기득권과의 싸움에 엄청난 에너지를 소비했다. 역설적으로는 그의 존재감을 드러낸 기회이기도 했다. 외부에서 비롯된 감사요구가 잇따르면서 공단에는 한바탕 소용돌이가 몰아쳤다. 오해와 억측, 음해와 시기가 난무하는 거친 분위기 속에서 그를 지탱한 것은 원리원칙과 정도경영이었다. 김 이사장이 주력한 분야는 원가절감 및 국·시비 지원과 환경 부문. 관행을 바로 잡고 경쟁입찰 등을 통해 발생한 재원은 업체별 증기·폐수 요금 감면 등 전부 입주업체 지원에 사용하면서 선순환 구조를 만드는 데 무던히 애를 썼다. 재임 기간 동안 발전 분야를 비롯, 폐수처리 분야·유연탄 분야·보험 분야에서 총 550억원 이상의 원가를 절감하는 성과를 일궈냈다는 것이 공단 측의 설명이다. 부조리나 독점에 따른 폐해 등 직·간접적으로 얽힌 사안이 상당수를 차지했기 때문에 거센 저항과 반발은 당연했다. 해외출장을 포함, 현장에서 확인하고 자문회의 등을 거치면서 합리성과 효율성, 그리고 정직함으로 승부를 걸었고 공익을 실현하는 결과를 얻어냈다. 국·시비 지원에서도 그의 역량은 빛을 발휘했다. 코로나 사태 이후 입주업체의 경영난이 심화되자, 그는 대구시와 국회의원 연석회의나 대구상공회의소 경제동향보고회 등 기회가 될 때마다 업계의 어려움을 호소하면서 줄기차게 지원을 요구, 상·하수도 요금 감면을 관철시켰다. 또 국·시비 480억원을 받아 악취 방지시설에 투입, 먼지나 질소산화물 등 대기오염물질 82%를 저감하는 데 앞장서기도 했다. 체감이 가능할 정도로 개선된 공단의 실상을 제대로 알리기 위해 김 이사장은 인근 주민 등을 대상으로 공단 개방행사를 수차례 가졌다. 소통과 화합을 위한 행사는 이미지 개선에 큰 역할을 했다.# 혼자가 아니라 다 같이 웃어야 한다좀처럼 웃지 못했고 웃을 수도 없었던 홀로서기는 20대 후반 부인 강숙기(65)씨를 만나면서부터 조금씩 달라졌다. 단숨에 풍요로울 수는 없었으나 안정감과 함께 심적 여유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한눈에 반했다"고 했다. 눈빛이 살아있고 사람이 바르더라는 것이 이유였다. '일하고 결혼했고 술하고 사랑했다'는 그의 단골 레퍼토리가 비극적이지 않은 것은 강씨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올 들어 부인이 좀 많이 아팠을 때 가슴이 철렁했다고 고백했다. 돌이켜보니 잘해준 기억이 별로 없더라는 것이다. '앞으로 잘 해야겠다'고 다짐을 했건만, 여전히 서툴기만 하다. 40여 년 전 대구시 북구 침산동의 한 전셋집에서 신접살림을 시작한 이후 앞만 보며 달려왔다. 직장생활과 수학과외를 병행하며 생활비를 벌었고 부부가 같이 꿈을 키웠다. 슬하에 큰딸과 띠동갑인 셋째딸까지 딸만 셋을 둔 김 이사장은 자칭 '딸바보'다. 딸들뿐 아니라 사위들과도 각별하다. 함께 웃어야 진짜로 웃는 것이기에 그런 환경을 만드는 것이 꽤 오래전부터 삶의 목표였다. 가족은 물론, 회사와 공단 관계자 모두가 그랬으면 좋겠다는 것이 그의 소망이다.김 이사장이 운영 중인 명지특수가공은 직물, 편조 원단 및 의복류 염색가공업체다. 그에게는 분신과도 같은 회사다. 회사원에서 대표가 된 전환점이자, 친구들의 정성과 응원이 집약돼 있어서 더욱 그렇다. 창업자금이 빠듯했을 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흔쾌히 부족함을 메꿔준 친구들의 고마움은 지금도 감동이라고 했다. 경영이 본궤도에 오른 뒤 이자까지 쳐서 갚으려 했지만 원금 이외는 받지도 않아 마음의 빚은 여전하다. 그는 가족·회사·공단 가운데 회사를 1순위로 꼽았다. 다소 의외였고 이기적으로 보일 수도 있으나 논리에는 어느 정도 수긍을 했다. 몸담고 있는 회사가 잘돼야 가족 및 구성원들의 걱정과 근심이 줄어들고, 각각의 회사가 잘 돌아가야 공단 전체의 발전을 담보할 수 있다는 취지였다.김 이사장은 "치열하게 살아왔기 때문에 별다른 후회는 없다. 자식들도 앞가림을 할 수 있을 만큼 장성했기 때문에 이제 집사람 건강만 챙기면 큰 걱정은 없다. 회사도 안정적이다. 공단은 이전이라는 대역사를 앞두고 있어 차질이 없도록 준비해야 하는 숙제가 남아있다. 임기 동안 열심히 일했다고 자부하기에 염색공단 역사에 부끄럽지 않은 성과를 낸 이사장으로 기억되고 싶다"고 말했다. 장준영 논설위원 changcy@yeongnam.com김이진 대구염색산업단지관리공단 이사장이 재임기간 동안 실천한 경비절감과 국·시비 지원내용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
2023.12.20
[토크 人사이드] 정장수 대구시 경제부시장 "대기업 오게 하려면 항공물류가 필수…경제회복, 신공항에 달려있어"
"제가 일을 하면서 아는 모든 것은 1부터 100까지 홍준표 시장에게 배운 겁니다."대구 경제는 수십 년째 1인당 지역내총생산(GRDP) 전국 최하위에서 '꼴찌 탈출'을 못하고 있다. 그런 대구가 꿈틀거린다. 대구경북(TK)신공항 건설과 K2(대구 군 공항) 후적지 개발 사업, 달빛철도 건설 추진을 필두로 산업구조 대개편, 신산업 분야 앵커기업 투자유치 등을 통해 부활의 신호탄을 쏘면서다. 이처럼 속도감 있고 선이 굵은 정책으로 대구에 변화를 이끌어 내는 홍준표 대구시장의 곁에는 정장수 경제부시장이 있다. 12년 동안 그림자 보좌를 이어온 정 부시장은 누구보다도 홍 시장의 시정 철학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정치적 동반자로 정평이 나 있다. 그래서일까. 그는 경제부시장의 첫째 책무로 '홍 시장을 잘 보좌하는 것'이라고 단언했다. 지난달 17일 취임한 그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면서도, 2주 만에 대구 경제 사정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었다. 대구 경제를 부활시키겠다는 의지도, 철학도 분명했다.12년간 洪시장 곁 '그림자 보좌'취임 2주만에 대구경제 꿰뚫고미래 50년 위한 기둥세우기 착수5대 신산업 대개편도 속도 더해신공항 '계획대로 진행' 틀 마련대학도시다운 산학연 성과 관리신설 대학정책국에 기능 넣을 것'달빛鐵특별법' 小委서 발목 실망▶민선 8기 '홍준표 시정'의 두 번째 경제부시장으로 임명됐다. 어떤 각오로 임할 것인가."어깨가 무겁다. 민선 8기 들어서 1년 반이 지났는데, 그동안은 대구 미래 50년을 위한 주춧돌을 놓는 시간이었다면, 남은 2년 반은 그 위에 기둥과 대들보를 세우는 실행 역할이기 때문에 책임이 무겁다."▶경제가 어렵다. 대구시도 비상 재정체제를 가동하는 등 허리띠를 졸라맸는데, 향후 지역 경제 회복을 위한 복안이 있나."지역 경제를 단기간에 살려낼 수 있는 처방을 내놓기에는 경제 정책의 한계가 있다. 지방정부의 경제 정책을 사실상 중앙 정부가 주도하는 게 우리나라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국세하고 지방세 비율이 7대 3이라고 하지 않나. 이게 지방 자주 재정이 되려면 지방세 6, 국세 4 정도의 비율이 돼야 한다. 그래야만 지방정부의 경제가 어려울 때 발동할 수 있는 정책 수단이 있는데, 그게 불가능하기 때문에 우리가 단기적 처방을 내는 데는 한계가 있다. 다만, 제한된 재원을 가지고라도 우선순위를 어떻게 잡을 것인지. 효과가 서민들의 실물 경제에 가장 직접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분야에 재정을 우선 투입해야 한다. 우리(대구시)가 재정을 어떻게 운용할 것인지에 초점을 맞추는 건 단기적인 처방이다. 장기적으로는 민선 8기 들어 우리가 해오고 있는 5대 미래 신산업(로봇·ABB·비메모리 반도체·첨단 헬스케어·미래모빌리티)을 중심으로 한 산업구조 대개편의 틀이 잡히고 있다. 이를 조기에 경제적 효과로 이어질 수 있게 정책을 구체화하고 속도감 있게 추진하는 게 가장 집중해야 할 부분이다."▶대구 경제가 수십 년째 1인당 지역내총생산(GRDP) 전국 꼴찌를 이어오고 있다. 이렇게 오랜 기간 경기 침체가 이어지는 원인을 진단한다면."가장 큰 원인은 대구가 섬유 산업으로 먹고살고, 성장해 왔다는 것이다. 섬유 산업이라는 게 앞으로도 주력 산업이 될 수 없다는 걸 알고도 선제적으로 산업구조 재편을 하지 못했다. 영원히 섬유 산업으로 먹고살 것처럼 하다 보니 앞으로 무엇으로 먹고살지에 대한 준비가 전혀 안 된 게 문제였다. 두 번째는 1990년대 중반에 삼성 상용차와 제일모직이 떠나고 대구에 대기업이 없다. 이미 30년 전에 대기업이 떠난 원인이 나와야 하는데, 그런 게 없었다. 대기업 유치를 이야기하면서 정작 대기업이 왜 안 오는지, 못 오는지에 대한 원인을 살피지 않고 그냥 와달라고만 했다. 대기업이 대구에 안 오는 건 물류 때문이다. 지금은 대기업이 투자하는 신성장 동력 산업은 대부분 첨단 산업이다. 따라서 항공 물류가 필수적이다. 그런데 대구는 항공 물류가 없다. 대기업이 대구에 오게 하려면, 내려올 수 있게끔 환경을 만들어 줘야 하는 데 그 필수 조건이 공항이다. 2030년에 대구경북(TK)신공항이 개항하면 군위에 첨단 배후 산업단지를 준비하지 않나. 그렇게 되면 대기업들은 오지 말라고 해도 오게 돼 있다. 대구에서 기업을 하면 같은 환경이라도 수도권보다 원가가 훨씬 덜 들기 때문에 대구에 올 수밖에 없다. 지역 경제 회복의 핵심은 신공항에 있다."▶경제부시장으로서 '이것만은 꼭 해내겠다'는 정책이 있다면 소개해달라."많다(웃음). 경제부시장으로서 해야 할 역할은 대구시의 경제 정책들이 서민들에게 잘 연결되게 할 수 있는 역할도 있지만, 과거부터 경제부시장은 정무적 임무도 많이 있다. 그런 역할도 해야 하고, TK신공항 특별법은 통과됐지만, 구체적으로 특수목적법인(SPC) 구성 등 해야 할 것들이 굉장히 많다. 2025년 착공이 목표인데, 적어도 민선 8기 임기 내에는 다음에 어떤 시장이 오더라도 신공항 건설이 계획대로 진행될 수 있게끔 틀을 잡아놓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또 개인적으로 애착을 갖고 있는 건 대구가 '대학의 도시'라고 불릴 만큼 좋은 대학이 많다는 점이다. 또 대학의 연구 능력과 인재들을 산업에 연결하는 산·학·연 프로그램을 많이 하고 있지만, 문제는 성과물에 대한 추적관리가 안 되고 있다는 것이다. 내년에 대구시에 대학정책국이 신설되는데, 이를 관리하는 기능을 넣고 싶다. 산·학·연 연계를 하면 그 아웃풋이 기업에 바로 적용되는지, 연구 인력들이 졸업하면 바로 기업에 취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프로젝트가 있다면 대구시 재정을 아낌없이 투자할 것이다."▶홍준표 시장이 달빛철도 특별법의 연내 처리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라고 주문한 것으로 안다. 그런데 최근 국토교통위 교통법안 심사소위 문턱을 넘지 못한 상황인데."경제부시장에 취임하고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 가리지 않고 전방위적으로 국회의원들을 만나 설득하고 있다. 앞서 홍준표 시장과 강기정 광주시장이 건의문을 통해 고속철도는 포기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고속화 일반철도로 해서 국가 재정 부담을 최소화하되, 선로 운영 효율성이나 안전성을 위해 복선화를 추진하고 있다. 달빛철도 특별법은 헌정사상 최다인 261명이 공동발의한 법안이다. 국회가 만든 법을 국회가 통과시키지 못하는 건 국회 스스로 무능하다는 걸 인정하는 셈이다. 기재부가 반대해서 어렵다고 하는데, 행정부가 반대하면 입법부가 법을 못 만드는 것인가. 그렇다면, 행정부가 시행령으로 나라를 운영하면 되지, 입법부가 무슨 필요가 있겠나."▶홍준표 시장의 측근이라는 이유로 경제부시장으로 임명되고 야당과 일부 시민사회 단체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어떻게 생각하나."홍준표 시장을 12년 동안 보좌해 왔기 때문에 측근이 맞다. 그런데 제가 측근이라는 이유로 비판하는 건 수용하기 어렵다. 저의 능력이나 자질, 그동안의 경력을 봤을 때 적합하지 못하다고 비판한다면 받아들이겠다. 측근을 임명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같이 일을 하면서 '이 사람이면 경제부시장을 맡아서 잘하겠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쓰는 것 아니겠나. 일을 시켜보고 검증이 됐기 때문에 쓰는 것이다. 생판 모르는 사람을 어떻게 경제부시장으로 임명하겠나. 비판을 하려면 능력이나 자질, 경력이 부적절한지를 검증해야지 그런 식으로 비판하는 건 받아들일 수 없다. 인사권자가 믿으니까 임명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민경석기자 mean@yeongnam.com정장수 대구시 경제부시장이 지난달 29일 시 산격청사 집무실에서 가진 영남일보와의 '토크 인 사이드' 인터뷰에서 대구 경제 회복을 위한 복안을 밝히고 있다. 이윤호기자 yoonhohi@yeongnam.com
2023.12.07
[토크 人사이드] 취임 100일 맞은 한인국 대구창조경제혁신센터장 "창업 아이템은 감출 게 아냐…수많은 조언 자양분 삼아 고도화해야"
한인국 대구창조경제혁신센터장은 취임한 지 100일이 지났다. 그는 삼성전자에서 35년간 근무했다. 임원만 12년을 지냈다. 전형적인 대기업 엘리트 샐러리맨을 상상했다. 멀끔한 정장 차림에 교과서적인 발언을 쏟아낼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최근 대구창조경제혁신센터장실에서 직접 만난 그는 머릿속에서 그려본 모습과 사뭇 달랐다. 큰 격자무늬의 체크 패턴 정장 재킷을 입고 환하게 웃었다. 그는 자신을 "자유로운 영혼"이라고 표현했다. 취임과 함께 주소지를 서울에서 대구로 옮긴 지는 석 달이 넘었다. 주변에선 굳이 주소지를 옮길 필요까지 있느냐고 만류했다. 하지만 그는 단호했다. 마음은 서울에 두고 몸만 대구에 있는 사람이 되는 게 싫었다고 했다. 그는 대구에서 보낸 생활에 대한 불만이 있느냐고 묻자, 주저 없이 한 가지를 꼽았다. "너무 더웠어요. 대구의 더위를 체감했어요. 대구사람들이 왜 화끈한지 실제 와보니 알겠어요." 대구창경센터 태동 시기부터 관여지역연고 없지만 친근하게 느껴져몸담았던 삼성전자 벤처 투자·협력로컬 스타트업 기회 얻을지 기대도美 실리콘밸리서 급성장한 수재들글로벌 인큐베이팅 통해 역량 닦아국내 아닌 세계무대로 시야 넓혀야▶연고도 전혀 없는 대구에 내려오게 됐다. 대구창경센터장을 맡게 된 계기는."센터장 면접을 볼 때 심사위원 중 한 분도 똑같은 질문을 했다. 개인적으론 대구와 인연이 없었다. 2014년 대구창경센터를 설립할 때 인연을 맺게 됐다. 기공식 때도 참석하고 당연직 이사로 이사회에도 배석한 적이 있다. 대구창경센터의 태동 때부터 관여해와서 무척 친근하게 느껴진다. 사실 대구창경센터장에 지원하기까지 닷새간 절치부심했다. 한 직장에서 35년이나 근무한 탓에 지난해 퇴임한 뒤로는 유유자적(悠悠自適)한 삶을 꿈꿨다. 무작정 자전거여행을 떠났다가 강원도 속초에서 한 달간 살았다. 당시 바다를 바라보면서 휴식을 취했다. 하지만 대구창경센터장으로 일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연거푸 받았다. 무조건 안 된다고 거절할 수만은 없었다. 나도 모르게 자유로운 영혼생활에 너무 얽매이고 있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변화가 필요했다. 대구로 오게 된 계기는 퇴임 전까지 4년간 삼성전자 사내 벤처 육성 프로그램(C-Lab)을 총괄하면서 창업 생태계에 대한 흥미가 솟아났기 때문이다. 30년 넘게 기획 업무만 보다가 스타트업을 직접 발굴하는 일이 너무 재미있었다. 아이디어를 선별하고 과제화시키는 과정인데, 이를 4년간 신나게 즐겼다. 대구창경센터장을 맡으면 사실상 스타트업 생태계 지원업무를 연장하게 되는 것이다. 쉬는 건 나중에도 쉴 수 있으니 지금은 제가 잘 알고 또 신나게 일해볼 수 있는 일을 마음껏 해보기로 마음먹었다."▶C-Lab에서 모티브를 얻어 대구창경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시스템이 있는가."C-Lab과 대구 창업 생태계는 환경과 목적, 취지가 너무 다르다. 삼성전자에서 벤처를 권장한 건 직원들의 창의적 욕구를 채우고 조직문화를 젊게 바꿔보자는 목적이었다. 사내에서 조직 만족도 평가 때 창의혁신성을 묻는 문항에서 실망스러운 점수가 매겨져 충격을 받았다. 경영진이 아이디어를 지닌 청년의 욕구를 해소시킬 수 있는 방안이 필요했다. 1988년까지만 해도 삼성전자의 사내 문화는 구식이었다. 하지만 젊은 직원들이 입사하면서 조금씩 조직 문화도 바뀌어 갔다. 삼성전자 사내 혁신에는 C-Lab의 영향이 컸다. 청년들의 혁신적 아이디어를 선별해 과제화시킨 뒤 실제 창업으로도 이어지게 되자 사내 환경도 급속도로 변했다. 나중엔 삼성전자 사업에 도움 될 만한 아이템 발굴에도 신경을 썼다. 하지만 원래 사내 창의혁신적 분위기 확산에 초점을 맞춘 거라서 C-Lab을 그대로 창경센터 시스템에 그대로 녹여내는 건 무리가 있다. 추가로 덧붙이면 삼성전자 자체적으로도 스타트업과 사업적 연계에 거리를 뒀다. 그래서 스타트업을 육성할 때는 애지중지하다가 성장 궤도에 들면 자립하도록 내버려뒀다. 나중엔 그것도 진전돼 협력이나 투자, 인수합병(M&A) 하는 단계로 넘어갔다. 대구의 로컬 스타트업을 삼성전자에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크다. 쉽지 않겠지만 대구에서 발굴·육성한 스타트업들이 어떤 식으로 기회를 얻게 될지 나 스스로도 기대된다."▶열풍처럼 불던 창년창업의 성과가 아직 보이지 않는다. 청년창업에 대해 평가한다면."가장 안타까운 건 창업을 쉽게 인지하는 것이다. 창업 공모에서 사업계획서를 살펴보면 절반 이상은 얕은 수준의 아이디어에 불과하다. 물론 논문 수준의 아이디어도 있다. 이런 다양한 아이디어를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얼마나 발전시키느냐가 관건이다. 창업 아이템을 복권처럼 여기고, 드러내지 않고 감추면 안 된다. 일례로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급성장한 스타트업의 공통점은 세계적인 수재들이 전공 분야나 관심 분야로 창업했다. 글로벌 인큐베이팅 과정을 거치면서 다양한 조언을 얻으면서 쉼없이 역량을 갈고 닦았다. 그런데 전문성 없는 아이디어로 창업하게 되면 얼마나 성공할 가능성이 있겠느냐? 일단 남다른 아이디어가 생성되면 경쟁력 있게 구현해야 한다. 수많은 조언을 자양분 삼아 초기 아이디어에서 고도화해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아이디어의 착안자가 전문성을 갖춰야 한다. 그리고 창업의 결과물로 유니콘 기업(기업가치 1조원 이상 비상장사)을 얼마나 많이 만들어내느냐에 집중하는 것보다는 국가 재산으로 창업 풀(Pool)을 키우는 것에 초점을 맞췄으면 좋겠다. 빨리 성공해 상장(IPO·기업공개)하는 게 중요하진 않다. 사업 역량이 들불처럼 번지도록 산업생태계를 만드는 게 가장 중요하다."▶창업을 꿈꾸는 청년들에게 조언을 해 준다면."메타인지력을 키워야 한다. 메타인지란 자신의 인지능력에 대해 알고 이를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다시 말해, 내가 무엇을 모르고 무엇을 아는가를 파악하는 인지능력이다. 메타인지는 창업 성과와도 직결된다. 창업 과정에서 무엇이 문제인지를 알지 못하면 시행착오를 더 많이, 오래 겪을 수밖에 없다. 무작정 좋은 기술, 좋은 방법을 찾기 전에 내가 아집(我執)에 빠져 있는 건 아닌지를 먼저 들여다봐야 한다. 이를 위해선 젊을 때 자기계발을 게을리해선 안 된다.정답은 방법론이 아니다. 운명론에 가깝다. 사명감과 소명의식이 필요하다. 큰돈을 벌 수 있다는 기대로 창업하면 초기 목적에서 변질되기 쉽고, 고난과 역경을 이겨낼 수 없다. 내 기술과 경험을 녹여낸 창업 아이템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꿈을 품을 줄 알아야 한다. 이 문제를 해결한다면 누군가 편해질 수 있겠구나, 이런 목적의식이 있다면 사업적으로도 안정되고 유효한 솔루션을 제공할 수 있다. 어떤 어려움을 마주해도 고유의 방향성을 유지할 수 있다. 또 국내가 아닌 세계로 시야를 넓혀야 한다. 좁은 내수시장에서 경쟁에 치이지 말고 가능성을 전 세계에 보여주길 바란다. 그리고 나서 글로벌 인큐베이터들이 볼 수 있는 국제적인 커뮤니티나 사이트를 활용해야 한다." 손선우기자 sunwoo@yeongnam.com지난달 30일 만난 한인국 대구창조경제혁신센터장은 창업에 대한 사명감과 소명의식을 갖추면 고난과 역경을 마주해도 방향성을 유지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윤호기자 yoonhohi@yeongnam.com
2023.12.06
[논설위원의 직터뷰] 서원만 화가 "성당 스케치화가 사회에 온기를 전하는 매개체가 되면 좋겠어요"
인터뷰를 하기 전만 해도 그와 일면식이 있는 줄 몰랐다. 수소문 끝에 만난 인터뷰이는 대구에서 활동 중인 중견 서양화가 서원만(63·대건인쇄출판사 대표)씨다. 보자마자 낯이 익었다. 30여 년 전 문화부 기자 초년병 때였다. 대중음악을 맡아 대구 동아문화센터를 출입했다. 당시 문화센터에 있던 그와는 몇 차례 눈인사만 나눈 게 전부였다. 기자의 취재원은 아니었다. 그가 문화센터 미술관에서 큐레이터로 있었다는 것을 인터뷰에서 알게 됐다. 아무튼 서로는 얼굴을 기억했다. 반가운 해후다. 서 화백은 3년째 한 주도 빠짐없이 천주교대구대교구 주간 소식지인 '대구주보' 표지에 성당 스케치화를 연재하고 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싶어 만나자고 했다. 붓 잡은 지 37년째…개인전도 13차례젊은 시절 큐레이터로 미술관 5곳 총괄신문 삽화 연재까지 눈코뜰새 없는 시간신부님 제의에 信者 사명감으로 시작천주교대구대교구 '대구주보' 표지에2021년부터 매주 성당 스케치화 연재매달 네 작품 함께 그리며 밤샘 일쑤내년 2월 대구경북 183곳 모습 '대미'이후엔 공소순례하며 모두 담을 계획▶주관적 느낌을 토해낸다는 추상화가가 팩트가 생명인 풍경 스케치화에 빠져 있습니다. "얼핏 별개처럼 보여도 추상화와 스케치화는 밀접한 관계이지요. 다양한 풍경에서 받은 색의 느낌이나 빛, 선(線)을 추상화에 녹여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스케치화를 그릴 때 여러 색과 빛, 소리를 접하잖아요. 그 재료들, 하나도 버릴 게 없다는 뜻이죠. 10년 전쯤인가, 누가 제 스케치화를 보더니만 '스케치화에 승부를 걸 생각이 없느냐'고 하더라고요. 순간 '이거다' 했죠. 작품을 모았죠. 내친김에 첫 채색 스케치화전을 열었습니다. 반응이 너무 좋았어요. 작품도 잘 팔렸고요. 그 뒤론 작품 가격도 좀 낮췄습니다. '화가 서원만'을 좀 더 널리 알릴 요량이었죠."▶스케치화의 매력은 무엇입니까. "다른 어느 그림보다 감상객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이죠. 소통(공감대 형성)이 빠르다는 게 스케치화의 가장 큰 힘인 것 같아요."▶천주교 신자 사이에서 '성당 스케치화'에 대한 관심이 많더라고요. 서 화백의 시그니처가 됐습니다. 어쩌다 그리게 됐는지. "현 가톨릭신문사 사장으로 있는 최성준 신부님이 제의해 주셨습니다. 천주교 신자로서 예전부터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 온 터였죠. 두말 않고 시작했습니다. 2021년 1월1일부터 매주 연재해 오고 있죠. 내년 2월이면 대구경북지역 성당 183곳을 모두 그리게 됩니다. 이젠 사명감까지 들어요. 가톨릭사를 넘어 대구경북 역사에도 오래도록 남겨질 그림을 그린다는…."▶성당 스케치화를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가요. "신자는 물론 일반 시민에게도 '편안한 마음'을 안겨주려 합니다. '인생의 쉼터'와 같은 느낌을 선물하고 싶은…. 그렇다고 과장하지는 않아요. 스케치화의 생명은 있는 그대로 표현하되 감동을 전하는 것 아니겠어요."▶한 주도 거르지 않고 성당 그림을 그린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성당 스케치화는 사진을 토대로 그립니다. 사진을 최대한 많이 수집해야 해요. 해당 성당의 히스토리도 숙지해야 하고, 성당에 대한 사제·신자들의 생각도 미리 파악해 놓고요. 한 성당을 그리는 데 최소 한 달가량 걸립니다. 사실 그림 채색은 어렵지 않아요. 어떤 느낌을 담아내야 할지가 늘 고민이죠. 사진과 그림은 엄연히 다른데, 사진 속에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그 무엇'을 뽑아내는 일,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죠. 우선, 연필로 스케치한 그림을 제 동선(動線) 가까이에 놓아둡니다. 일주일 정도 뚫어지게 쳐다봐요. 밥 먹다가도, 화장실 볼일 보러 가다가도. 스스로 '오케이'라는 판단이 들 때까지 째려 봅니다. 그러고 나서 볼펜으로 다시 스케치합니다. 채색한 뒤에도 또 1~2주는 그림과 '신경전'을 벌여야 해요. 그런 과정을 거치다 보면 어느 순간 최종 영감이 떠오릅니다. 매주 연재를 위해선 한 달에 네 작품을 함께 그려야 해요. 다른 화가도 마찬가지겠지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로 찢어 버립니다. 밤샘 작업도 일쑤이고요." ▶가장 인상에 남는 성당 풍경을 꼽으라면."단연코 칠곡 가실성당이지요. 지어진 지 128년 된 곳입니다. 여름이면 성당을 휘감는 울창한 숲이 끝내줘요. 누구나 어릴 때 한 번쯤 성당에서 놀았던 기억이 있잖습니까. 그런 추억을 안겨다 주는 성당이랄까요. 어머니 품과도 같은 포근한 느낌을 줍니다. 이 성당은 '대한민국 3대 아름다운 성당'에 포함돼 있기도 해요."▶성당 말고 사찰 등 다른 풍경 스케치화는 그리지 않나요."뜻맞는 미술 친구들과 함께 종종 스케치 여행을 떠납니다. 동화사·파계사 등 명승지 절도 자주 들릅니다. 계곡물에 발을 담근 채 사찰 본전도 그리고 주변 숲도 그리지요. 훗날 대구경북 사찰 순례 스케치화에도 도전해 볼 생각입니다."서 화백은 영남대 미대에서 공부했다. 붓을 잡은 지 올해로 37년째다. 1996년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모두 13차례 열었다. 지난 7~8월엔 '서원만 스케치 이야기' 전을 열었다. 해외 전시회 50여 차례, 국내 그룹전만도 3천여 차례 출품했다. 지난해엔 '아름다운 대구 스케치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았다. 대구가톨릭미술가회 회장을 지냈으며, 현재 추상미술 동인 단체인 신조미술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모친이 이화여대 미대를 나왔다고 들었습니다. 어릴 때 영향을 많이 받았겠습니다. "DNA야 확실히 물려받았겠죠. 근데 제가 미술하는 걸 제일 말린 분이 어머니였죠. 집안 웃대 어른 가운데 화가가 계셨는데, 재산 다 털어먹고 마흔도 안 돼 요절하셨대요. 비극적인 가족사 때문에 반대한 것이죠. 어릴 때 용돈을 모아 물감·스케치북을 몰래 사서 숨겨 놨어요. 근데 모친이 용케도 찾아내 변소 통에 버렸지 뭡니까.(웃음) 자식 이기는 부모 없잖아요. 결국 사고(미대 입학)를 치자 별말씀이 없으시더라고요. 아버지가 출장 다녀오는 길에 물감을 사다 주셨어요. 이왕 미대 들어간 거 성공하라는 뜻이었겠죠."▶1990년대 영남일보 등 지역 신문에 삽화를 그렸다고요."동아문화센터 미술관에서 큐레이터로 있을 때죠. 자그마치 5곳의 미술관 업무를 총괄했어요. 거기에다 신문 연재 소설 삽화까지 그렸으니 눈코 뜰 새 없었습니다. 그땐 e메일도 없던 시절이었죠. 매일 식전 댓바람부터 신문사에 들러 삽화를 마감하느라 혼을 뺐어요. 그러고 보니 젊었을 땐 신문 삽화 마감 시간, 지금은 성당 스케치화 마감 시간과의 싸움이네요. '마감'은 제 인생에서 숙명과도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기자님도 늘 겪겠지만 '마감 스트레스' 솔직히 울고 싶어요.(웃음)"▶성당 스케치화 연재를 마치고 난 뒤엔."공소(公所)라는 게 있어요. 본당보다는 작은, 사제가 상주하지 않는 성당이죠. 에너지를 충전한 뒤 공소를 순례하며 그려볼 생각입니다. 그러면 대구경북지역 천주교 관련 건물을 모두 기록하게 되는 셈이죠."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은."성당 스케치화 작품이 사회에 온기를 전할 수 있는 매개체가 되면 좋겠어요. 소외된 이웃을 돕기 위한 전시회 등을 통해서 말이죠. 아울러 형편이 여의치 않은 성당을 위해서도 쓰이면 좋겠어요. 저작권은 제게 있지만, 성당은 물론 다른 어느 곳에서도 공익적 활용을 원한다면 기꺼이 도움을 주고 싶습니다. 저로서는 큰 영광 아니겠습니까." 이창호 논설위원 leech@yeongnam.com서원만 화가가 자신의 작업실에서 '성당 스케치화' 작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는 "한 성당을 그리는 데 한 달가량 공을 들여야 한다"고 했다. 박지현기자 lozpjh@yeongnam.com
2023.11.29
[토크 人사이드] 렘브란트순회재단 얍 멀더스 대표 "렘브란트 동판화 대표 작품 대구서 가장 아름다운 전시 열어 기뻐"
지난달 31일 대구미술관에서 개막한 '렘브란트, 17세기의 사진가' 전시가 첫날부터 '오픈런'이 이어지며 인기를 얻고 있다. 내년 3월17일까지 열리는 이번 전시에서는 서양미술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화가이자 '빛의 화가'로 불리는 렘브란트 판 레인(Rembrandt van Rijn, 1606~1669)의 동판화 120여 점을 감상할 수 있다. 전시작들은 네덜란드 렘브란트순회재단(Stichting Rembrandt op Reis)이 소장하고 있는 작품이다. 전시 개막과 함께 대구를 찾은 렘브란트순회재단의 얍 멀더스(Jaap Mulders) 대표와 이번 전시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네덜란드 위대한 화가, 동판화史 독보적 인물 벨기에展서 훌륭한 대구미술관 소개 받아 인연 '병자를 고치는 예수' 등 탁월한 작품 120점 선봬 대구 시민, 작품 진지하게 감상해 좋은 인상 큰 규모로 열린만큼 걸작 감상 좋은 기회 될것 ▶렘브란트의 동판화 작품을 대구에서 선보이는데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자신에 대한 소개를 부탁한다. "오랫동안 기업을 운영하다 네덜란드 국립발레단의 사업이사로 공직에 있었다. 현재는 네덜란드의 노르트홀란트주에 렘브란트순회재단을 설립해 대표직을 맡고 있다. 20여 년 전 우연히 렘브란트의 동판 한 점을 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 동판을 구입한 것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그의 동판화를 계속해서 수집해 오고 있다. 현재는 세상에 남아 전하는 렘브란트 동판화 300여 종류 중 220여 점을 소장하고 있는데, 컬렉션의 규모가 커지면서 렘브란트의 동판화를 감상하는 기쁨을 많은 이들과 나누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렘브란트순회재단을 설립했고, 실제로 여러 나라와 도시들에서 전시 중이다."▶국내 도시 중 전시장소로 대구를 선택한 이유는."올해 초 벨기에의 앤트워프에 있는 판화전문 미술관 뮤지엄드리드(Museum De Reede)에서 제가 소장하고 있는 렘브란트 동판화 80여 점으로 '사진가 이전의 사진가(Fotograaf Avant la Lettre)'라는 제목의 전시를 4개월간 열었다. 뮤지엄드리드는 생긴 지 얼마 안 되는 비교적 작은 미술관이지만, 대표인 하리 루텐씨의 예술에 대한 열정으로 매우 좋은 전시들을 선보이는 훌륭한 미술관이다. 우리의 예상을 넘어선 호응 덕분에 훌륭한 전시를 선보일 수 있었고, 이렇게 좋은 전시를 이대로 끝내기가 아쉽다는 생각을 했다. 이때 하리 루텐 대표가 자신과 매우 오랜 인연이 있는 한국에서 이 작품들을 전시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제 소장품은 유럽을 벗어나 전시된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대구미술관을 방문한 적 있는 하리 루텐 대표가 (대구미술관에 대해) 매우 훌륭한 미술관이라고 이야기하며 전시를 제안해 흔쾌히 동의했다. 결과적으로는 지금까지 제 소장품으로 기획한 모든 전시들 가운데 가장 훌륭하고 아름다운 전시를 한국의 대구에서 하게 되어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렘브란트는 네덜란드가 세계의 바다를 지배하던 최전성기 때 활동한 화가다. 네덜란드인과 세계인에게 렘브란트는 어떤 예술가로 기억되고 있나. "미술의 역사를 연구하는 전문가는 아니지만 예술을 사랑하고, 렘브란트를 사랑하는 네덜란드 사람으로서 렘브란트는 그가 남긴 위대한 예술로 말미암아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세계미술은 물론 인류의 역사에 영원히 거인으로 남을 인물로 믿는다. 위대한 화가로 길이 남을 작가는 렘브란트 외에도 물론 여럿 있지만, 판화, 특히 동판화의 역사에 있어서 렘브란트는 독보적인 인물이다." ▶렘브란트의 동판화를 수집한 계기는 무엇인가. 컬렉션의 규모와 대구에 전시된 주요 작품에 대한 설명을 부탁한다. "오래전 우연히 렘브란트의 동판을 보게 되었는데, 그 동판을 본 순간 거기에 오래전 위대한 예술가의 손길이 머물렀었다는 사실에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그 뒤로 30년 가까운 시간 동안 기회가 될 때마다 렘브란트의 동판화를 계속해서 수집했고, 지금은 세상에 남아 있는 그의 동판화 중 상당 부분인 220여 점을 소장 중이다. 지금 대구미술관에 전시되고 있는 작품들은 뮤지엄드리드에서 전시된 80여 점에 40점 정도를 더한 120점인데, 저와 대구미술관이 여러 차례 의견을 나누며 렘브란트의 동판화 중 중요하고 대표적인 작품들을 선택했다. 렘브란트의 작품은 모두 훌륭하지만 대구미술관 전시의 '성경 이야기' 파트에 소개되고 있는 '병자를 고치는 예수'는 매우 인상적이다. 이 작품은 마태복음의 전체 이야기를 한 화면에 담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야기를 전달하는 렘브란트의 능력과 다양한 인물들의 표현 등이 매우 탁월한 작품이다. 또 '눈이 멀게 된 토빗'에서 보이는 아버지의 혼란스러운 감정을 전달하는 표현도 놀랍다.'선한 사마리아인'에 보이는 '사진가'와 같은 면모는 렘브란트의 동판화에서 제가 가장 주목하고, 매력적으로 느끼는 부분이다. 그는 가능한 한 납득할 수 있는 '진짜' 현실을 그려냈는데, 저는 렘브란트가 보여주는 '이야기를 담은 이미지의 순간적인 표현'을 매우 매력적으로 생각한다."▶'렘브란트, 17세기의 사진가' 전시에서 관람객들이 눈여겨봐야 할 점은 무엇인가."렘브란트의 동판화를 수십 년간 감상하고 사랑해 온 수집가로서, 저는 기회가 될 때마다 '렘브란트가 현대에 태어났다면 화가도, 판화가도 아닌 사진가가 되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동판화에 나타나는 그의 경이로운 장인정신과 더불어 당시 사람들과 생활상, 세상의 모습 등 여러 가지 폭넓은 주제들을 매우 사실적으로 담아낸 그의 시선에 주목해 전시를 감상하길 바란다. 렘브란트의 동판화를 오랜 세월 감상해 온 저 역시 종종 그의 판화에서 새로운 부분들을 발견하게 되고, 놀라고 감탄하곤 한다. 작품들을 천천히 깊이 들여다보길 기대한다."▶대구는 대한민국 근현대미술 발상지다. 대구시민과 대구에 대한 인상은 어땠나."이번 방문은 저의 첫 번째 한국 방문이고, 당연히 대구도 처음이다. 아쉽게도 여행의 스케줄상 대구미술관의 전시 개막행사에 참석하고 그 다음 날 관람객을 대상으로 특별강의를 한 후 바로 대구를 떠나야 했기 때문에 대구와 대구사람들을 자세히 알 기회는 없었다. 하지만 전시 개막날 미술관을 찾은 많은 대구시민이 작품을 매우 진지하게 감상하고, 저의 강의를 경청하는 모습에서 매우 좋은 인상을 받았다."▶끝으로 대한민국의 렘브란트 애호가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렘브란트의 동판화를 이렇게 훌륭한 전시를 통해 한국에 소개하게 되어 무척 기쁘다는 말을 다시 드리고 싶다. 현재 남아 있는 렘브란트의 동판화는 세계의 여러 미술관과 개인 소장자들이 나누어 소장하고 있고, 렘브란트하우스뮤지엄이나 암스테르담국립미술관(라익스뮤지엄) 등에서 상당히 많은 수의 동판화를 소장하고 있지만, 이번 대구미술관 전시만큼 잘 선택된 작품목록과 큰 규모로 렘브란트의 동판화를 다시 감상하는 것은 앞으로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한국에 렘브란트를 사랑하는 미술 애호가들이 많을 것으로 생각한다. 렘브란트의 걸작 동판화를 한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말고 많은 분들이 이 전시를 보게 되기를 바란다." 임훈기자 hoony@yeongnam.com얍 멀더스(Jaap Mulders) 렘브란트순회재단(Stichting Rembrandt op Reis) 대표가 지난달 31일 대구미술관에서 특별강의를 펼치고 있다. 〈대구미술관 제공〉렘브란트 '병자를 고치는 예수'. 이야기를 전달하는 렘브란트의 능력과 다양한 인물들의 표현 등이 매우 인상적인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대구미술관 제공〉'렘브란트, 17세기의 사진가' 전시가 열리고 있는 대구미술관 내부 전경. 〈대구미술관 제공〉
2023.11.15
[논설위원의 직터뷰] 박창원 계명대 타불라라사 칼리지 교수 "대구경북 해방공간 민중의 삶은 지금 우리와 맞닿아 있죠"
'일요일은 쉽니다.' 영남일보 1947년 10월18일자에 보도된 기사다. 대구 달성동의 어느 기와집에 붙어 있는 글귀였다. 누가 무슨 이유로 이런 글을 써서 붙였을까. 해방 이태 뒤인 그해 5월 경북에는 콜레라가 번졌다. 그해 말까지 4천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졸지에 가족과 이웃을 잃은 사람들은 망연자실했다. 해방 직후부터 '삼순구식(한 달 동안 아홉 번 밥을 먹는다)'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민중의 삶은 비참했다. 식량난으로 촉발된 대구 10월항쟁은 더 깊은 상처를 남겼다. 해방의 기쁨은 온데간데없었다. 사람들은 하루하루를 넘기기가 숨찼다. 일없이 빈둥거리는 사람도 한둘이 아니었다. 희망은 희미했고 삶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했다. 그래도 살아야겠기에 사람들은 지푸라기라도 부여잡으려 했다. 달성동의 그 집은 지푸라기를 잡으려는 사람들로 꼭두새벽부터 문전성시를 이뤘다. 장봉사가 주인인 점집이었다. 사람들이 너무 몰려와 하루도 쉴 틈이 없자 '일요일은 쉽니다'라는 안내문을 붙였던 것이다. 휴일 개념조차 흐릿했던 빈한한 시절이었는데도 말이다. 사람들은 장봉사가 건넨 부적으로 위안을 삼았다. 아이의 저고리에 이름을 써서 세 번 절하면 돈을 벌고 병이 낫는다는 식의 기이한 처방에 감지덕지했다. 없는 살림에 적지 않은 복채를 내고 받은 대가였다. 해방공간의 신문 기사를 인용한 장봉사 이야기는 박창원 계명대 타불라라사 칼리지 교수가 펴낸 책 '조금 지난 뉴-쓰'(2019)에 '달성동 장봉사'라는 제목으로 실려있다. 이 책은 할머니 무릎베개로 옛이야기를 듣듯 '멀미 나는 부영뻐스' '70년 전의 스카이캐슬' 등 다양한 테마로 구성되어 있다. 대구경북의 시간여행은 '오늘 보는 그제 뉴-쓰'(2023)로 이어졌다. 그는 앞서 '내가 네게 묻다'라는 인물 에세이를 내기도 했다. 박 교수는 신문 지면 위를 누비며 대구경북 해방공간에서 펼쳐진 숱한 이야기들을 되살려 맛깔나게 풀어낸다. 그의 글은 2017년 연재된 '영남일보로 보는 시간 여행'을 통해 소개되기도 했다. 박 교수의 흥미로운 시간여행 얘기를 들어봤다. 2017년 '영남일보로 보는 시간여행' 연재 2019년 '조금 지난 뉴-쓰' 책 시리즈 시작 올 4년 만에 후속여행 '오늘 보는 그제…''지금의 우리는 어디서 왔을까'란 궁금증 1945~50년 지면 누비며 숱한 얘기로 풀어 내년 달서아트센터 예술아카데미 특강 ▶해방 후 삶이 힘들었던 탓에 사람들이 점집을 많이 찾았네요. "대구경북에는 당시 점쟁이가 많았습니다. 오죽했으면 '대구경북의 명물'이라는 말이 나돌았을까요. 불안한 삶의 탈출구로 점쟁이를 찾는 수요가 많으니 공급 역시 늘어난 것이지요. 아이러니하게도 불안한 현실의 또 다른 돌파구는 교육열로 나타났습니다. 중학교의 입학 문이 좁다 보니 초등학교 때부터 과외수업이 성행했습니다. 음악·미술 같은 예능과목은 정규 수업에서 배제될 정도였습니다. 곧 수능이 치러지는데요, 그때도 다들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진학하려 했습니다. 1950년 대구지역 남자중학교의 졸업생은 750여 명이었는데 졸업생 열 중에 아홉은 서울의 대학을 선호했습니다. 당시 중학교는 고등학교 기간을 합친 6년제였습니다. 같은 해 여중 졸업생인 70여 명도 엇비슷했습니다. 다만 부모들의 반응이 달랐는데요. 대학 진학을 말리는 분위기였죠. 여학생들은 중학 졸업 나이가 대개 20세를 넘었습니다. 대학 4년을 지나면 나이가 너무 많아 혼기를 놓칠 수 있다는 걱정을 했죠."▶지금 우리가 사는 모습과 흡사한 부분이 적지 않습니다. 해방공간 대구경북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뭡니까."시작은 단순했습니다. '지금의 우리는 어디서 왔을까'였습니다. '우리'는 대구와 경북 사람이니까 굳이 사족을 달 필요가 없겠지요. '어디'는 해방공간이었습니다. 해방은 우리가 지금 발 딛고 살아가는 노정의 첫 단추를 끼운 시기입니다. 가장 가까운 과거죠. 명망가나 위정자의 삶보다는 민중들의 일상에 눈이 먼저 갔죠. 지금의 시민들 삶과 비슷할 테니까요. 새로이 입은 옷의 첫 단추가 어찌 끼워졌는지도 궁금했습니다. 해방과 미군정기, 6·25전쟁으로 이어지는 억압과 전환의 시기에 대구경북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그렇다고 거창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과거는 현재를 비추고 미래는 현재를 기반으로 나아간다잖아요."▶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모형이라는 점에서 해방공간을 선택한 의미가 있군요. 그렇더라도 굳이 신문 기사로 그 시기를 조명하려는 이유는."1949년 대구의 집값이 내린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사람들은 민생고를 견디다 못해 집을 담보로 고리대금업자와 은행으로부터 돈을 빌렸습니다. 대구부내 열 중에 여덟 집은 빚에 쪼들렸습니다. 빚 독촉에 시달리다 매물로 내놓는 집이 많았습니다. 매물은 늘어도 거래는 절벽이었습니다. 한 번 오른 집값이 내리지 않았던 탓이죠. 다수의 무주택자에게는 그림의 떡이었습니다. 해방 후 일본인이 살던 빈 적산가옥은 모리배나 배경이 있는 사람들이 이미 여러 채를 소유한 상태였습니다. 이 같은 실상을 신문 기사는 낱낱이 전하고 있었습니다. 씨줄과 날줄로 엮인 기사 속에는 당시 사람들의 민낯이 고스란히 담겨 있죠. 대구는 신문의 도시였습니다. 해방된 그해 9월 진보 색채의 민성일보를 시작으로 영남일보, 대구시보, 부녀일보, 남선경제신문 등이 잇따라 창간했습니다. 신문은 사람들 일상을 담는 또 하나의 '광장' 역할을 했죠. 신문 기사를 징검다리 삼아 시간여행을 떠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저도 '오늘 보는 그제 뉴-쓰'를 단숨에 읽었는데 '가을바람에 사라진 순정' '극장 관객 실종사건' 등 내용이 기억에 남네요. 특히 서문에 "시간은 뒤로도 흐른다"는 말이 인상적이었습니다."'오늘 보는 그제 뉴-쓰'는 '조금 지난 뉴-쓰'에 이은 후속 여행이었는데요. 여행 시기는 1945~1950년입니다. '가을바람에 사라진 순정'처럼 신문에 연재했거나 기사를 다듬어 정담(情談)으로 엮었습니다. 정담은 주로 과거를 묻는 이야기에 어울립니다. 이런 작업에는 늘 아쉬움이 따르는데요. 해방공간 대구경북에서 발행됐던 신문은 검색할 수 없습니다. 기사를 보려면 하나하나 찾아 눈이 아플 정도로 확인해야 합니다. 판독 자체가 어려운 경우도 꽤 있고요. 여러 시기의 신문을 숙독해야 하나의 스토리 구성이 됩니다. 예상 외로 해방공간 민중의 일상 자료는 빈약한 편입니다. 정치적 격변기와 전쟁, 주류세력의 교체와도 연관이 있겠지요. 검색을 통한 신문 기사의 정보 활용은 지역의 역사 찾기와 다를 바 없습니다. 관심이 필요한 대목이죠. 첨단시대에 과거로의 시간여행이 웬 말이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요. 이런 해명은 어떨까요. 사람들은 십중팔구 과거가 있는 도시로 여행을 갑니다. 스마트폰을 들고 말이죠. 과거와의 동행은 즐거움과 충전, 성찰을 한꺼번에 가져다주기도 하죠."▶신문을 매개로 그 시절 민중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연구를 하고 있는데요. 그 시절의 언론에서 특별히 눈에 띄는 점이 있는지요."1947년 3월25일 한밤중에 만경관 앞에서 영남일보 방수복 기자가 경찰로부터 폭행을 당했어요. 대구신문기자회는 5관구경찰청(경북경찰청)에 항의문을 전달하고 출입을 중단했죠. 그런데 며칠 뒤 부녀일보 최석채 편집국장이 경북경찰청에 구속됩니다. 이 사건을 권력이 저지른 테러로 규정해 연이틀 경찰 폭행을 비판하는 기사를 대서특필하자 보복이 뒤따른 것이죠. 경찰의 영남일보 기자 구타 사건 보도로 다른 신문의 편집국장이 구속된 것입니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죠. 언론의 본질적 기능인 권력 비판이 침해당할 때는 언론자유 수호를 위해 기자들이 이른바 동업자 정신으로 뭉쳐 저항했습니다. 이 사건은 지금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뉴-쓰'시리즈 3편도 나오나요. "내년에 '시리즈3' 준비를 시작하려 합니다. 대구경북의 진보성이나 역동성을 제대로 전달할지 고민은 됩니다. '과거를 묻지 마세요'는 노래 제목으로는 그만이죠. 하지만 현실은 과거를 물어야 삶이 오만하지 않고 풍부해지지 않을까요. 미래 세대라고 다를까요. 과거의 대구 이야기와 친해지도록 SNS 활용을 권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최근 책 속 '대구의 연인 금달네'에 관심을 보인 젊은 기획자가 있었는데 아직 연락이 없네요.(웃음) 아, 중요한 얘기를 빠뜨릴 뻔했네요. 2024년 대구경북 시간여행 스타트는 달서아트센터 예술아카데미 봄학기 특강입니다."박 교수 고향은 대구가 아니다. 대구 사람도 아닌데 대구경북 해방공간 연구에 천착하고 있다. 특히 옛 신문을 일일이 찾아 당시 시대상과 지역민의 삶을 재조명하는 건 박 교수가 유일하다. 굳이 그 이유를 물었다가 핀잔 같은 농담을 들었다. "이게 돈 되는 일이 아니라서 그렇지 않을까요~" 허석윤 논설위원 hsyoon@yeongnam.com박창원 계명대 타불라라사 칼리지 교수는 옛 지역 신문을 교재 삼아 대구경북 해방공간에서 펼쳐진 민중들의 삶을 연구하고 있다. 책과 신문, 시민 특강을 통해 박 교수가 들려주는 당시 이야기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아련한 추억과 함께 성찰의 시간을 갖게 한다.
2023.11.08
[토크 人사이드] 조명래 팔공산연구소·팔공산문화포럼 회장
"팔공산이 곧 국립공원 승격기념식을 개최하고 올 연말(12월 31일)을 시작으로 23번째 국립공원이 됩니다. 팔공산의 찬란한 유산을 잘 보존해서 우리나라에서 제일가는 명품 국립공원이 되도록 영남일보 독자를 포함한 시민들께서 모두 힘을 모아주시길 바랍니다." 조명래 팔공산연구소 회장은 팔공산을 아끼고 사랑하며 연구하는 '향토사학자'다. 그는 팔공산을 사랑하는 이유로 "논어에 '아는 자는 좋아하는 자만 못 하고, 좋아하는 자는 즐기는 자만 못하다(知之者不如 好之者好之者不如 樂之者)'라는 말처럼 팔공산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하나씩 알면 알수록 그냥 기쁘고 즐거운 마음이 든다"고 밝혔다. 경북 청송에서 태어난 조 회장은 학창 시절을 서울에서 보내고 1981년 3사관학교 18기로 군 생활을 시작했다. 1987년 대위로 전역한 뒤 이듬해 개원한 운수연구원(現 대구시 교통연수원) 창립 멤버로 입직해 2018년 정년 퇴임했다. 그는 2009년 팔공산연구소 창립 멤버로 시작해 2013년부터 지금까지 회장직을 맡고 있다. 이후 지난해부터는 팔공산문화포럼의 회장도 겸임하고 있다. 포럼은 명산 팔공산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지역 산촌의 산림과 문화자원의 발굴 및 보전 육성을 목표로 한 민간단체다. 회원으로는 조 회장을 비롯해 홍종흠 전 대구시문화예술회관장, 국민의힘 조명희 의원(비례) 등이 소속돼 있다. 조 회장은 2011년 영남일보 특집 '팔공산자락 걷기 좋은 길'을 자문했고, 3년 뒤인 2014년 대구경북연구원의 '팔공산 둘레길' 코스 개발에 참여했다. 2018년 '팔공산. 그 짙은 역사와 경승의 향기'와 2021년 '팔공산 지명유래' 책을 간행했으며 팔공산에 관련된 여러 논문을 발표했다. 팔공산은 신라 시대 5대 산(山)으로 꼽히던 '오악(五岳)' 중 하나였지만 국립공원으로 승격하지 못하고 있다가, 팔공산의 이번 승격으로 오악(지리·태백·토함·계룡·팔공산) 모두 '국립공원' 타이틀을 달게 됐다. ▶팔공산 연구를 시작한 계기는."2003년부터 경주 불국사 안내 자원봉사를 해왔는데, 2007년 7월 점심도 거르고 5시간 연속으로 안내하다 보니 체력의 한계를 느끼고, 건강을 챙겨야겠다는 생각으로 팔공산 산행을 자주 했다. 그때 팔공산에는 그동안 우리가 몰랐던 오랜 역사와 풍부한 문화유산이 널려 있어 관련 자료를 찾아보고 현장을 답사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팔공산에 빠져 있게 됐다." ▶팔공산 연구의 현주소는."신라 '중사오악'에서 '중악'인 팔공산의 오랜 역사와 풍부한 문화유산에도 불구하고 제가 가장 많이 연구한 사람에 포함될 정도로 연구 및 저술 활동이 부족한 실정이다. 2023년 10월 현재, 국회도서관에 소장된 팔공산 자료는 모두 281건으로 무등산 자료 496건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특히 2010년 12월 광주시가 환경부에 무등산 국립공원 지정을 건의한 이후에 발간한 자료가 288건인데 반해, 같은 기간 팔공산은 156건에 불과한 것은 지역사회의 관심과 열정, 지방자치단체 지원 여부에서 차이가 나는 것이라 생각한다. '무등산국립공원' 지정을 위해 광주·전남지역 76개 단체와 기업 등이 참여했지만, '팔공산 국립공원' 지정을 위한 단체는 소수에 불과하다. 팔공산 연구소와 <사>팔공산문화포럼은 두 단체 모두 회원들의 정성 어린 회비로 운영하고 있다. 팔공산연구소는 스터디 모임, 포럼은 공식 단체의 성격이다." ▶'팔공산 지명유래'를 집필하게 된 동기는."2005년 대구의 한 신문사에서 간행한 '팔공산하'는 산악인의 관점에서 팔공산 등산로와 지명을 정리한 새로운 시도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지만, 지명을 채록하는 르포형식이다 보니 '카더라'라는 말만 있고 그 유래에 대한 설명이 없어 아쉬움이 많았다. 그러다 2013년 유방선(柳方善)의 '태제집(泰齋集)'에서 '등천왕봉(登天王峯)-영천공산봉명(永川公山峯名)' 시와 조형도(趙亨道)의 '동계집(東溪集)'에서 '천왕봉(天王峯)' 시가 팔공산 지명연구의 시발점이 됐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등의 정통 사서(史書)와 세종실록지리지, 경상도지리지, 경상도속찬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등의 지리지(地理書), 대구, 칠곡, 군위, 의흥, 신녕, 영천, 하양, 경산 등 읍지(邑誌)를 비롯한 고문헌과 팔공산에서 수행했던 고승과 팔공산을 유람했던 조선 선비들의 문집과 일기, 그리고 조선지지자료, 한국지명총람 등 근현대 자료를 수집하여 샅샅이 살펴보고 조사·분석해 '팔공산하'와 비교하면서 봉명 118개소, 고개 61개소, 명소 51개소 등 모두 230개소의 지명을 인문학 관점에서 그 유래를 밝혀 고증한다고는 했지만 부족한 점이 하나둘이 아니다. 다행히 팔공산연구소 회원과 대구경북연구원 오창균 전 원장이 적극적으로 도와준 덕분에 '팔공산 지명유래'를 출간할 수 있었다. 이 자리를 빌려 깊이 감사드린다." ▶국립공원이 될 팔공산의 가장 핵심 가치는 무엇인가. "신라 시대 중사오악에서 중악이라는 오랜 역사와 풍부한 문화유산, 불교와 유교, 천주교가 어우러져 있는 화합과 공존의 공간이다. 그리고 멸종 위기종을 포함한 야생생물 5천300여 종이 서식하는 생태자원의 보고라고도 할 수 있다." "팔공산 연구의 핵심은 신라 시대 중사오악(中祀五岳)에서 중악(中岳)이라는 역사적 정체성을 되살려 팔공산의 가치를 드높이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신라 시대 팔공산을 중사오악에서 중악으로 정했던 이유는, 신문왕이 통일신라의 발전동력을 삼기 위해 달구벌 천도의 사전 정지작업의 하나로 보고 있다. 신라는 팔공산을 통일 전쟁의 전진기지로 삼아 삼국을 통일했다. 또 팔공산은 6·25전쟁 당시 1950년 낙동강 방어선에서 팔공산을 동서로 연하는 다부동-가산-신녕-영천 전투에서 승리해 우리 대한민국을 지켜냈던 호국의 성지로, 우리 민족의 진취적 기상과 도전정신이 팔공산에 어려있다고 생각한다. 흔히 악(岳)자가 들어가는 산은 대체로 험하다고 하는데, 본래는 중국 고대에 산을 관리하던 관직이다. 악자가 들어가면 나라에서 관리하는 산을 의미한다." ▶국립공원 팔공산의 시작을 위해서 지자체와 시민들이 할 일은."팔공산이 드디어 국립공원으로 지정됐다. 2013년 무등산 국립공원 지정 때와 2016년 북악(北岳) 태백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됐을 때 오악(五岳)에서 팔공산만 국립공원이 되지 못했음에도 누구 하나 이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먼 산 바라보듯 무관심했던 것에 대해 깊이 반성해야 한다. '팔공산국립공원준비단'에는 여러 단체가 찾아와 많은 요구 또는 건의를 하고 있다. 국립공원에 속하는 사항은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맡겠지만, 바깥 지역의 일들은 지자체가 수용해 적극적으로 해결 의지를 보여야 한다. 팔공산 정상에 봉우리가 몇 개 있고, 그 봉우리 이름이 무엇인지 제대로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지자체에서도 팔공산을 제대로 알리려는 노력을 소홀히 했지만, 시민들도 제대로 공부하지 않았고, 공부할 기회도 많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팔공산연구소와 팔공산문화포럼에서 지난 9월 팔공산국립공원준비단을 방문해 '팔공산시민대학' 교육을 연 2회 이상 실시하고, 시민대학 수료자를 팔공산자연관광해설사로 활동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또 팔공산 역사·문화유적, 유산에 대한 아카이빙(Archiving)을 구축해 연구의 구심점으로 삼고, 자료를 활용해 다양한 콘텐츠 개발과 스토리텔링을 활성화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팔공산 연구에 대한 지자체의 대대적인 지원이 필요하고 지역민에 대한 홍보도 강화해야 한다. 지역 주민들도 팔공산 국립공원 지정이 브랜드 가치 상승과 더불어 대구경북 자긍심 함양과 지역 경제 활성화에 크게 이바지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모두 힘을 모아야 한다." 이동현기자 shineast@yeongnam.com조명래 팔공산연구소 회장이 팔공산 국립공원 승격에 대해 인터뷰하고 있다. 박지현 수습기자 lozpjh@yeongnam.com팔공산의 봉우리와 능선이 한눈에 보인다. 수태지에서 바라본 팔공산 정상부 모습. 경북 칠곡군 가산부터 이어지는 팔공산 능선의 모습. 조명래 팔공산연구소 회장이 팔공산 국립공원 승격에 대해 인터뷰하고 있다. 박지현 수습기자 lozpjh@yeongnam.com응해산에서 바라본 중대동 지구와 팔공산 능선. 팔공산연구소 제공
2023.10.24
[논설위원의 직터뷰] 김진영 한국판촉선물제조협회장 "판촉업계 최고가치는 신뢰…'후회없는 하루경영'으로 신용 쌓았죠"
판촉물(販促物). 고객의 수요를 불러일으키거나 자극해서 판매가 늘도록 유도하는 데 쓰이는 물건을 뜻한다. 지금은 고전적인 의미 외에 각급 기관이나 단체의 이미지 제고를 비롯, 정책 및 사업홍보 등을 위한 수단으로 적극 활용되고 있다. 물티슈나 볼펜·장바구니 등은 누구나 받아본 경험이 있을 정도로 무척 흔해졌다. 판촉물이 너무나 친숙한 대상으로 자리매김하면서 관련업계의 생존경쟁 역시 치열해졌다. '도대체 이런 물건은 누가 어떻게 생각하고 만들어낼까' 싶은 기발한 아이디어로 흐름을 선도해야 하고 고객의 니즈에도 부합해야 발전을 기약할 수 있다. 특히 코로나를 겪으면서 위기를 기회로 승화시킨 곳이 있는가 하면, 속절없이 무너진 경우도 숱하다. 김진영 한국판촉선물제조협회장(60·그린기프트 회장)도 30년 업력과 신용을 발판삼아 사업영역 다각화로 승부수를 던졌고 성장을 위한 기틀을 다지는데 성공했다. 또 전국 200여 개 업체가 회원으로 가입돼 있는 한국판촉선물제조협회 사상 첫 지방출신 회장을 맡아 지방업체의 위상 강화에도 상당한 공을 들이고 있다.◆어떤 경험도 무의미한 것은 없다좀 오래된 이야기지만 '입대하는 바람에 기차를 처음 타 봤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었다. 그냥 웃자고 한 말일 수도 있으나 50대 이상이라면 실제 그런 사례를 겪거나 전해 들은 경험이 있을 법하다. 김진영 회장은 문경 동로 출신이다. 자칭 '촌놈'이다. 동로초등·동로중을 거쳐 상주 상산고를 졸업한 김 회장이 대구를 처음 와 본 것은 고 3 때. 대학진학을 앞두고 학력고사를 치르기 위해 고사장으로 향하는 대구행 단체버스에 올랐다. 난생 처음 대구땅을 밟게 된 계기였다. 그는 영남대 지역개발학과 82학번이다. 금수저까지는 아니더라도 비교적 넉넉한 형편이었음에도 장학금과 공무원 특채 등에 끌려 원서를 냈다. 한때 공무원이 꿈이었으나 다양한 메리트가 줄거나 사라지면서 1년 만에 휴학을 하고 잠시 방황을 하기도 했다.복학 후 남들처럼 기업체 취업준비를 했고 <주>농심에 입사했다. 대리점 관리 및 마케팅부서에서 일한 2년간의 경험이 훗날 김 회장의 인생에 적잖은 영향을 미칠지는 그 당시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영남대 경영대학원 석사(마케팅 전공)이기도 한 그는 농심 근무 시절 경영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됐고 이는 판촉물 및 쇼핑몰 기업을 설립, 운영하는데 큰 자양분이 됐다. 퇴사 후 시대를 너무 앞선 아이템과 무모한 도전으로 2~3차례 실패를 겪기도 했지만 김 회장은 이를 경험으로 축적했다. 요즘의 '당근'과 같은 형태의 중고물품 거래연결업을 1990년대 초반에 기획, 과감하게 뛰어들었다가 쓴맛을 봤다. 중고거래라는 개념조차 정립되지 않았던 시절이었고, 무엇보다 홍보부족이 결정적 패인으로 작용했다. 또 영화이야기와 광고를 믹스한 영화관련 무가지를, 자동차 영업사원들의 고객관리에 도움이 되는 잡지를 각각 발행 및 배포했지만 기대치를 밑돌며 한계에 봉착했다. 이 과정에서 김 회장은 홍보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꼈고 수요자와 공급자 양측의 입장을 두루 체험하면서 돌파구를 직접 찾기 시작했다. 당시 대세였던 스티커 부착이라는 1차원적 방법으로는 미래를 담보할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1992년 인쇄업계와의 인연으로 판촉물업계에 뛰어들게 된다.대기업 경험서 배운 것들 농심 2년간 근무하며 경영에 관심 중고품 연결업·무가지 사업 '쓴맛'홍보서 한계 느끼고 판촉 뛰어들어 고객만족·사회봉사 30년 국제행사·관공서 정시 납품 100% 협회 첫 지방 출신 회장 '고군분투'장학회 운영·봉사 활동에도 '진심'◆신용과 신뢰가 최상위 비즈니스다김 회장의 사무실에 큼지막하게 걸려있는 사훈(社訓)은 좀 독특하다. '하루경영'. 판촉물 벤처기업 <주>팔공엠앤씨와 쇼핑몰 그린기프트·소확행 등을 경영하며 지난해 100억원대의 매출을 기록한 그는 '누구에게나 주어진 하루, 24시간을 후회 없이 효율적으로 쓰자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사훈 옆에 걸려 있는 회사비전에는 '업계 최고의 대우와 복지를 실현하겠다'는 다짐도 보인다. 임직원들은 매일 사훈과 비전을 외치면서 하루경영을 시작한다. 최선을 다하는 만큼 신용이 생기고 신뢰가 탄탄해지는 만큼 개인은 물론 회사가 발전한다는 사실을 구성원들은 경험칙으로 알고 있다. 판촉물업계에서 지상명령은 좋은 물건을 제때 납품하는 납기일 준수다. 고객이 원하는 날짜에 제품을 인도하지 못하면 존재가치가 없다. 클레임으로 인한 업체의 손해와도 직결되는 문제지만, 그보다 고객의 신용과 신뢰를 무너뜨리는 일이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지킨다는 불문율이 있다. 김 회장은 그동안 대구·경북을 기반으로 2002월드컵·2003대구하계유니버시아드·2011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경주문화엑스포·세계물포럼 등 굵직한 국제행사와 대학 및 관공서와의 비즈니스를 통해 신뢰를 구축했다. 지금껏 납기를 어겨 문제가 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이 그의 가장 큰 자랑이다. 실제로 2011대구세계육상선수권 프레대회 때 시상메달 납품 하루 전 검수과정에서 오·탈자를 발견, 제작업체와 밤새워 다시 만들어 행사를 무사히 치렀던 기억은 가슴이 철렁하면서도 불문율을 깨지 않은 뿌듯함을 동시에 느끼게 해준 사건이었다. 또 저가 수입제품이나 부품의 품질검수는 힘이 들고 돌발변수가 많은 데다, 품질에도 적잖은 영향을 주기 때문에 가능한 한 국산화율을 높이는 게 업계의 추세라고 설명했다. 2천여 개의 제품을 취급하는 김 회장은 코로나19 때 손소독제나 항균타월 등이 주목을 받은 것처럼 시장의 흐름을 잘 파악하고 발주처의 의도와 기대에 부응하는 제품을 선점하는 것이 경영상 매우 중요한 부분이 됐다고 들려줬다.◆고객만족과 봉사활동은 기업의 책무다김 회장의 든든한 지원군은 부인 김효정(59)씨다. 김 회장은 농심 재직 당시 쉬는 날이 한 달에 한 번 꼴일 정도로 빡세게 근무했다. 어느 휴식일 때 교사인 친구를 만나는데 김씨가 동석을 했고, 자신과는 달리 적극적이고 외향적인 성격에 매료됐다는 김 회장은 90년 12월 김씨와 부부의 연을 맺었다. 슬하에 서울대 수의학과 출신 수의사인 큰딸과 영남대 후배가 된 아들을 두고 있다. 제주가 고향으로 청주 사범대를 나와, 당시 별다른 연고도 없는 대구에서 교편생활을 시작한 김씨와 김 회장의 인연도 예사롭지 않다. 각각 기업활동과 교직생활에 충실했던 이들 부부의 공통관심사는 다름 아닌 봉사였다. 김 회장은 태백로타리 창립회원으로 20년 이상 로타리안으로서의 삶을 실천하고 있다. 김씨 역시 2000년 자신이 근무 중인 고등학교에서 지도교사로 대구태백 인터렉트클럽을 창립, 20년 넘게 매년 2차례 장학금 지급과 봉사활동을 이어오고 있다.김 회장이 설립했거나 직·간접적으로 관여하는 장학회와 봉사회는 꽤 많다. 그린기프트봉사단을 비롯, 영남새마을장학회·영남대 석사장학회·한국판촉선물제조협회봉사단·로타리자원봉사단 등 줄잡아 10개가 넘는다. 그가 장학금을 전달할 때 학생들에게 강조하는 것이 있다. 훌륭한 사회 구성원으로 성장한 뒤 오늘 받은 정성을 다른 사람에게 꼭 전달해달라는 당부를 한다. 와타나베 가즈코 수녀의 저서 '당신이 선 자리에서 꽃을 피우세요'에는 '일생을 마친 뒤 남는 것은 당신이 모은 것이 아니라 당신이 뿌린 것'이라는 내용이 있다. 김 회장은 이 문구를 인생의 모토로 삼고 있다고 고백처럼 들려줬다. 그의 남은 꿈은 모친 이름을 딴 '보배장학재단' 설립이다. 김 회장이 한국판촉선물제조협회장직에 도전한 이유는 간단하고 분명했다. 서울과 지역의 교류가 가장 컸다. 서로 간의 어려움을 알아야 상호 배려와 공감이 가능하다고 판단했고, 결국 첫 지방출신 회장이 됐다. 지난해 3월 이사회를 10년 만에 서울이 아닌 대구에서 개최하면서 공감대 확산에 나선 그는 전국의 지부를 돌아다니며 현안과 애로사항을 듣고 해결책을 찾는 데 힘을 보태고 있다. 판촉에 종사하는 제조사와 딜러사의 만남의 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판촉인의 날'을 개최하는 등 다양한 협회활동을 통해 회원사 권익 신장 및 상생에 최선을 다하면서 임기를 마무리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기업이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사회적 책임을 외면하지 않아야 지속적인 성장이 가능해집니다. 회사가 발전할수록 제 형편에 맞는 가치 있는 일들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는 다짐도 어찌 보면 '하루경영'에 포함돼 있습니다. 미력하나마 선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장준영 논설위원 changcy@yeongnam.com김진영 한국판촉선물제조협회장(그린기프트 회장)이 자신의 사무실에서 오랜 기간 사업을 하며 겪은 다양한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현덕기자 lhd@yeongnam.com
2023.10.18
[논설위원의 직터뷰] 개그맨 겸 대학교수 김홍식씨 "만만하지 않은 직업 '김샘'…폰게임보다 더 흥미 있는 수업 다짐"
"너그 아부지 뭐하시노?" 선생님들이 대놓고 이렇게 말한 시절이 있었다. 영화 '친구'에서 담임교사를 연기한 배우 김광규의 명대사도 있지만, 개인적으론 오래전 KBS TV '폭소클럽'의 '떴다 김샘'에 출연한 개그맨 김홍식의 이 대사가 귀에 더 익다. 얼마 전 TV 토크 프로그램에 나온 그를 봤다. 재담(才談)이 여전했다. 하 수상한 작금의 세상, 당최 웃을 일이 없다. 문득, 개그맨인 그는 웃으며 살고 있는지, 웃으며 사는 방법은 무엇인지 얘길 듣고 싶었다. 그의 인생 스토리도 함께. 틀에 박힌 '인터뷰어와 인터뷰이' 관계가 아닌 오랜 개인적 인연으로서. 그를 만났다. '떴다 김샘'에 나올 때가 서른다섯, 지금은 쉰넷이다. 트레이드 마크인 '헌팅 캡'은 그대로였다. 이젠 턱수염 말고도 콧수염도 있다. 또 어엿한 대학교수가 돼 강단에 서고 있다. 근데 표정이 그다지 밝지 않았다. 인생의 등불과도 같았던 어머니가 얼마 전 돌아가신 후여서다. 그는 상을 치른 뒤 한 달간 매일 어머니 묘소에 들렀다고 한다. "약속엔 10분 일찍 나가 기다리고, 남한테 뭔가를 받으면 꼭 배로 돌려줘래이." 생전 어머니가 늘 강조하신 말이라고 한다. 그렇게 숙연한 분위기에서 첫 질문을 던졌다.▶대학에선 무역학도, 사회 첫발은 이벤트 MC. 흔치 않은 진로였습니다. "글쎄요. 천상 '마이크 체질'이랄까. 어릴 때 소풍·운동회 장기자랑 사회를 도맡았죠. 무역학과(영남대 87학번)는 그냥 취직 잘된다 해서…. 입학 후 첫 신입생 환영회에서 사회자를 본 순간 '히어로'처럼 느껴졌어요. 강렬한 그 첫인상이 절 이벤트 MC로 이끌었죠. 초·중·고 때 했던 가락도 있어서. 몇 가지 스킬을 익혀 MC 알바를 뛰었죠. 학과·동문회 페스티벌…. 열심히 쫓아 다녔습니다. 마냥 대학 등 젊은 층 행사를 할 순 없었죠. 졸업 후엔 '무대'를 바꿨어요. 회갑·칠순·팔순 잔치 등으로. 그렇게 제 첫 명함을 파게 된 겁니다. 개인적 친분은 없지만 트로트 가수 이찬원도 같은 영남대 상대 출신인데, 재학 중 이벤트 MC로 이름을 날렸다네요. '동종업계 선후배' 사이인데, 언젠간 한번 만나겠죠.(웃음)"▶'김홍식' 하면 '폭소클럽'의 '떴다 김샘'이죠. 인생의 큰 전환점이었는데."'궁하면 통한다' 옛말 틀린 게 없어요. 2004년, 그때가 제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시기였죠. 지인에게 큰돈을 빌려주는 바람에…. 걱정하는 아내에게 '1년 안에 답을 낼게'라고 큰소리쳤죠. 믿는 구석도 없이. 정 안되면 쪽지('성공해서 돌아올게, 미안해') 써놓고 떠날 생각도 했어요. 그러던 중 '폭소클럽'에 평소 존경하는 MC 선배 한 분이 나오게 됐어요. 근데 무대에서 진땀을 흘리는 선배 모습이 너무 안쓰러웠어요. '내가 만약 저 무대에 선다면…' 평소 운전 중 엉뚱한 생각을 많이 해요. '김샘' 캐릭터도 운전 중에 나온 것입니다. 학창시절 별의별 선생님이 다 있었잖아요. 영화 '선생 김봉두'처럼 돈 밝히는 선생님도 있었고, 영화 '친구'의 단순무식한 선생님도 있었고. '두 캐릭터를 짬뽕해 보면 어떨까.' 폭소클럽 담당 작가에게 제안했죠. 결국 'OK' 사인을 받아 코너를 따냈어요. 결과는 대박이었죠. 불현듯 떠오른 아이디어가 내 인생의 큰 재산이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떴다! 김샘' 인기에 힘입어 '투사부일체' 등 영화에도 나왔죠. 큰물에서 계속 놀 수 있었는데, 왜 대구에 남았는지."제가 전국구 스타가 된다고 쳐요. 대구를 떠나 서울에 살아야 하고, 친한 친구도 자주 만나기 어렵고. 많은 걸 포기해야겠죠. '가늘고 길게 살자'고 다짐했죠. '팔자를 고쳤어도 난 변한 게 없다.' 그런 모습을 주위에 보여주고도 싶었어요. 저보다 앞서 방송에 진출해 변한 사람을 많이 봐 온 터라, 나는 그러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었죠." ▶대학교수로서 인생 3라운드를 펼쳐가고 있습니다. 학교 생활은 재미있는지."2009년 개그맨 남희석씨 추천으로 강의(대경대 초빙교수)를 시작했죠. 지금은 사학연금을 받을 수 있는 전임교수가 됐고요. '공동체 질서와 삶' '대인관계' '리더십'을 가르쳐요. 어때요, 어울리나요? '짝퉁 샘'에서 진짜 선생이 됐지요.(웃음) 처음엔 직업병인지, 과거 '김샘' 이미지로 학생들을 웃겨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연차가 쌓일수록 '재미'가 다가 아니더라고요. 짧은 한 시간이라도 메시지를 전달하는 게 중요하다는…. 그래서 학생들에게 의견을 물어요. 수업 내용 중 뭐가 좋고 안 좋은지를. 수업 중 휴대폰 게임 하는 친구를 꾸짖을 순 없어요. '내 수업이 지루하다'는 방증 아니겠어요. 게임보다 더 흥미를 주는 교수가 되겠다고 스스로 다짐하지요. 아무튼 선생이라는 직업, 결코 만만치 않아요. 그렇지만 다양한 분야에 있는 졸업생들을 보면 큰 보람을 느껴요."▶요즘 '일타강사 김샘'으로도 유명하던데요. "다 '김샘' 캐릭터 덕분이죠. 강연 활동의 피크 시절은 지났죠. 지금은 '하향 안정화'에 있지만 여전히 소중한 밥벌이 가운데 하나입니다. 제 강의의 특징은 '주문식'이라는 점입니다. 의뢰 기관에 '원하는 주제'를 먼저 물어 보지요. 이래야 강연 요청이 많이 들어 오거든요. '입맛'을 맞춰 주니까. 청중이 청소년이라면 미리 아이돌 가수 등 그들의 최애 관심사도 함께 공부해 놓고요. 강연 집중도가 확 달라져요. 과거 정보통신부에서 한 강연이 변곡점이 됐어요. 신문 기사에 '김샘, 정보통신부 최고 강사로 등극하다'라는 제목이 뽑혔어요. 강의 평점이 무려 96점. 직전 강연이 황우석 박사였는데 85점을 받았거든요. 강연가로 클 수 있는 기폭제가 됐죠. 이후 관공서 강연 의뢰가 줄을 잇기 시작했어요. 역시 '인생은 타이밍'입디다."▶코로나 팬데믹 땐 강연이 없어 답답했겠습니다."직격탄을 맞았죠. 사람들이 모이지 못하니. 매출 감소 '100%'. 미치겠더라고요. 학교 말고 내가 뭐라도 일을 더하고 있다는 걸 가족에게 보여주고 싶었어요. 당장 수입도 급감했고요. 이만하면 'N잡러 강박증'이죠? 결국 큰 딸과 함께 밤에 택배 알바를 했답니다. 몸은 고됐지만 저는 물론 딸에게도 '돈보다 값진 그 무엇'을 몸소 느끼게 해 준 일이었죠. 우리, 더 늙기 전에 뭐라도 해야 합니데이.(웃음)"▶교육자로서 최근 이슈인 '교권 추락'에 대해서도 생각이 많겠네요."오래전부터 학부모들을 직접 만나 얘기하고 싶었어요. 모든 게 가정교육인 것 같아요. 좀 야박한 얘기 같지만, '학부모 과잉 민원'도 그 학부모 윗대로부터의 가정교육 문제에서 비롯됐다고 봐요. 과거 사립 중고교 교장 모임에서 '공교육과 학부모' 주제의 강의를 제안한 적이 있어요. 교장들이 좋은 생각이라며 동석한 교육계 윗분에게 건의를 했죠. 근데 그분이 저를 힐끗 보더니 '내가 얘기를 해도 안 듣는데…'라며 말끝을 흐리더라고요. '하물며 니가 뭐라고'라는 말이 생략된 뉘앙스였죠. 솔직히 자존심 상했죠. 교권이든, 학생 인권이든 과유불급(過猶不及)을 새겨야 합니다. 임시처방격으로 어느 한쪽을 옹호하면 다른 한쪽에서 문제가 불거질 수 있잖아요. 양자 관계가 '풍선'은 아니잖아요. 함께 존중돼야 하니까. 서로가 지키지 않으면 안될 강력한 '교육 시스템'을 마련하는 게 중요합니다. 나랏일 하는 사람들 몫이겠지요"▶과거 영남일보 칼럼에서 '인생 뭐 있나'라는 화두를 던졌지요. 김샘표 '웃으며 사는 법'은 무엇인지. "'그럴 때도 있고, 그럴 수도 있다.' 제 카카오톡 대문에 적힌 글입니다. 인생 좌우명이죠. 제 행복감의 원천이기도 하죠. 타인들 때문에 상처받아 화나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럴 때마다 이 글을 떠올려요. 귀신같이 그런 감정이 사라진답니다. 습관적으로 제 자신에게 최면을 걸다시피 하니 남들보다 스트레스를 덜 받고 사는 것 같아요. 기자님도 한 번 실천해 보세요. 인생 뭐 있나요."인터뷰를 마치며 그에게 "팬들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냐"고 물었다. 그는 "식당 등에서 가끔씩 저를 알아보는 분들에게 물어 봐요. 제가 어떤 이미지였냐고. '촐랑촐랑 까불지 않고도 대중을 즐겁게 해줬다'고 덕담을 해주더라고요. 기분이 너무 좋았어요. 언젠간 잊히겠지만 '골치 아픈 일도 쉽게 풀어주는 선생이었다'라고 기억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글·사진=이창호 논설위원 leech@yeongnam.com김홍식씨가 화이트보드에 적은 인생 좌우명 글귀 '그럴 때도 있고, 그럴 수도 있다'를 가리키며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씨는 "아무리 화가 나는 일이 있어도 이 글만 떠올리면 웃고 넘어갈 수 있다"고 말했다.
2023.09.27
[토크 人사이드] 유철균 경북연구원장 "지방화시대 핵심은 기술 균형발전…'챗경북' 개발에 나서는 이유"
"지방화시대의 성공은 과학기술이 지역별로 고르게 발전되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정책연구기관인 경북연구원이 '챗경북'과 경북도 자체 특화 AI 모델 개발에 나서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유철균 경북연구원장은 "과학기술의 혁신이 오히려 지방화시대를 가로막고 있다"며 이같이 강조했다.유 원장은 "지난 30세기 동안 동아시아인들이 가장 행복하고 평화로웠던 시대는 주나라 때다. 중국이 130개 국가로 분할된 완전 지방화시대로, 주나라 무왕은 중앙정부 종법체계와 상제에 대한 제사의식 참여 정도만 요구했을 뿐 나머지는 모두 지방정부에 맡겼다"며 "청동기시대에서 철기시대로 넘어오면서 당시 최첨단기술이 접목된 '쟁기'가 등장한 이후 지역 간 불균형은 심화됐다"고 전했다.그는 "이전까지 농사를 짓지 못하던 땅에서도 쟁기로 농사가 가능해져 농사 방식에 일대 혁신이 왔다. 쟁기가 빨리 보급되는 지역과 보급되지 못한 지역의 불균형은 갈수록 심화될 수밖에 없었다"면서 "지금의 첨단과학기술을 주나라 때 쟁기라 보면 된다"고 설명했다.지난 5일 경북연구원에서 유 원장을 만나 지방화시대를 위한 전략과 연구원 핵심사업 등에 대해 들어봤다. AI·빅데이터 등 사업 수주로 젊은 인재에 일자리 나눠주는'디지털 새마을운동' 펼칠 시대챗경북 축적 데이터 기반으로언어모델 '기름' 개발 진행 중오픈소스 AI 문제점 해소될 것창작교육 객관성 등 고민하다한국형 '스토리 헬퍼' 만들어작가 호평 힘입어 AI 더 연구▶대구경북연구원이 분리된 지 8개월이 지났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분리되면서 대구와 경북이 함께 하면서 누렸던 규모의 장점이 사라진 것이 아쉽다. 회의·영상 시설, 콜로키엄, 포럼 등 조직 축소가 불가피하고 예산 압박도 있다. 한편으론 좋은 점도 있다. 대구경북연구원이 출범했던 1991년 당시 국가의 전략예산은 7조6천억원이었다. 경북연구원이 분리된 2023년 국가 전략예산은 135조원이나 된다. 지금은 각 지역이 전략예산을 놓고 경쟁하면서 기획력을 발휘해야 하는 4차 산업혁명 시대다. 이런 시대에는 한 연구원이 한 지자체의 정책 수요를 전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연구원이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많은 사업을 하고 있다."연구원의 사업은 모두 '4차 산업혁명의 경북 이식을 통한 인구 소멸 대응'이라는 전략 목표 아래 움직인다. 제조업 기반이 강한 경북은 지식정보화, 지능화의 수용이 필요하다. 이제 산업단지에서는 일자리가 생기지 않는다. 전 세계의 공장들이 테슬라의 스마트 팩토리처럼 무인화되고 있다. 로봇과 AI로 무인화하지 않으면 원가를 맞출 수 없는 시대가 된 것이다. 첫째 경북은 AI, 사물인터넷, 빅데이터, 메타버스와 관련된 사업들을 수주해서 그것을 디딤돌로 인재를 데려오고 지역에 4차 산업혁명 기반을 마련하는 게 중요하다. 전 세계의 재능 있는 젊은이들이 젊은 시절 적어도 몇 년은 한국에서 일하고 싶어서 줄을 서는 시대다."▶역점을 두는 부분은."한국생산기술연구원의 '한·러 혁신센터', 현대경제연구원의 '유라시아 청년아카데미' 같은 사업들을 경북도 해야 한다. 수도권은 이미 AI 개발의 핵심능력인 수학과 물리학에 뛰어난 개도국 핵심인재, 즉 '전 세계에서 우영우 동생 찾기'에 뛰어들었다. 경북도 국내가 아닌 세계에서 해답을 찾아야 한다. 경북연구원은 개도국 핵심인재 유치를 위한 △경북 광역비자법 추진 △CIS(옛 소련연방국가연합) 핵심인재 특채 등을 진행해 지역에 인재 영입의 통로를 마련하고 전파하려 한다. 또 하나는 지역에 일자리를 만드는 '디지털 새마을운동'이다. 충남 부여의 전통문화대는 룩소르박물관 등 이집트 6개 박물관을 디지털화하는 600억원 규모의 이집트 문화유산 디지털화 사업을 수행 중이다. 이 작업을 위해 3D 디지털 오브젝트를 만드는 젊은이를 고용하고 있다. 이 사례는 지방 소멸에 대응하는 중요한 방향성을 보여준다. 지역(로컬)은 글로벌과 직접 연결돼야 살길이 열린다. 그 살길은 우리보다 디지털 전환이 더 늦은 국가의 디지털 전환 사업에 있다. 지역에 이런 사업을 수행할 디지털 일자리 교육이 아르메니아의 투모센터처럼 혁신적으로 진행돼야 한다. 1970년대에 수도권 산업화에서 소외된 지역의 부흥을 위해 철근과 콘크리트를 나눠주는 새마을운동이 있었다. 이제는 지방에 이집트 문화유산 복원 같은 일자리를 나눠주는 디지털 새마을운동이 필요하다."▶최근 경북 자체 특화 AI 언어모델 개발에 나섰다."연구원은 이미 올해 3월9일 챗GPT 기반의 경북 정책개발 지원 인공지능 '챗경북'을 개발해 베타 테스트를 진행한 바 있다. 그 결과 8월23일 현재까지 5만4천여 건의 질의-응답 데이터 셋을 만들었고, AI 학습에 사용할 수 있도록 처리한 경북 행정 데이터 1억2천만 어절을 구축했다. 이런 데이터 기반을 마련한 결과 경북도 자체 특화 AI 모델 개발에 나설 수 있었는데, 그것이 경북연구원 초거대 언어모델(Gyoungbok-Institute Large scale Language Model)의 줄인 말 '기름(GI-LLM)'이다".▶'챗경북'과 '기름'은 어떻게 다른가."현재 전 세계의 생성형 AI 산업은 마이크로소프트, 구글처럼 자신의 파운데이션 모델을 공개하지 않는 클로즈드 소스 진영과 라마(LLaMa)의 소스 코드를 공개한 메타처럼 자신의 모델을 공개하는 오픈 소스 진영으로 양분된다. 기름은 서울대 국문과 출신의 AI 개발자 박규병 튜닙 대표가 만든 오픈소스 폴리 그랏 코(Polyglot_ko)를 기반으로 돌아가는 언어모델이다. '챗경북'과 '기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기름'은 '챗경북'의 개선된 버전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언어모델이다. 챗경북이 챗GPT를 파운데이션 모델로 했을 때 두 가지의 문제가 제기됐다. 첫째는 경북의 데이터가 미국에 서버가 있는 오픈 AI로 넘어감으로써 보안문제가 제기됐고, 둘째는 오픈 AI의 정책 때문에 모델 자체를 경북에 맞게 미세조정(파인 튜닝)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작한 게 '기름'이다."▶필명 이인화로 소설 '영원한 제국' 등을 집필한 국문학도 출신인데, 디지털 분야에 관심 갖게 된 동기는."23년간 이화여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서사 창작, 스토리텔링을 가르쳤다. 그러면서 서사 창작 교육이 객관성이 없고 교수의 경험치 내지 주관적 확신에 많이 의존하는 게 안타까웠다. 미국에 영화 시나리오를 쓰는 컴퓨터 프로그램 '드라마티카 프로'가 있다는 것을 알고 기계(컴퓨터)가 스토리를 어떻게 만드는지 알면, 사람이 스토리를 어떻게 만드는지 알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해서 만든 것이 한국형 서사 창작 도구 '스토리헬퍼'였다. 스토리헬퍼는 많은 드라마 작가, 웹툰 작가, 웹소설가에게 호평받았다. 그래서 용기를 얻어 AI를 더 연구하다가 오늘에 이르렀다. 국문과 출신 중에 AI 개발자로 활약하는 사람이 많다. 국문과는 언어를 다루는 학문이고, AI도 결국은 자연어 처리를 하는 언어모델이기 때문이다."▶앞으로의 계획은."정책을 지원하는 기관이 아니라 남들이 모르는 예산과 법령의 빈틈을 찾아서 정책을 선도하는 것이 경북연구원의 역할이자 의무라고 생각한다. 원장으로서 초기에 의도했던 소기의 성과는 어느 정도 거두었다고 본다. 앞으로는 경북도의회를 비롯한 도내 기관들과 더 많이 소통하면서 다양한 의견을 경청할 생각이다." 임성수기자 s018@yeongnam.com
2023.09.13
의료대란으로 번진 의대 증원
[의대 증원 집행정지 각하·기각] 정부, 대학 "2025학년도부터 의대 증원 속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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