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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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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스 거장들 대표곡 모음 CD 'THE BLUES' 출시
미국의 블루스 거장들 대표곡 모음 음반 '더 블루스(THE BLUES)'<사진>가 2장의 CD와 아트북으로 출시되었다. 블루스는 17세기부터 미국으로 끌려와 남부지방, 특히 미시시피 델타의 목화밭에서 노동하던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에 의해 탄생한 음악이다. 처음에는 목화밭에서 일하며 소리를 질러대는 필드 할러(Field holler)로 시작, 노예들 상호간에 주고 받으며 노래를 부르는 콜 앤드 리스판스(call and response)로 발전하고, 19세기 말에 혼자서 기타나 하모니카를 연주하며 노래하는 방식으로 진화했다.'더 블루스'는 20세기의 가장 극적이고 매혹적인 특별한 서사시다. 인종 차별에 시달리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집단적 천재성 덕분에 이 대중적인 시골 음악은 19세기 말에 미국 남부에서 자생후 북부 대도시의 빈민가로 퍼져나갔다. 블루스는 적대적인 환경에 처한 흑인 남성의 좌절, 분노, 혼란, 외침뿐만 아니라 그의 해방에 대한 꿈을 전달한다. 1950년대부터 지역 사회를 넘어 인정받기 시작하면서, 젊은 미국 가수들과 영국밴드는 로큰롤을 만들기 위해 블루스를 탐닉했다. 블루스는 미국의 대중음악의 모든 뿌리가 되었다. CD1 'THE ROOS / PRE-WAR GREAT SONGS'는 세계 2차대전 이전의 블루스 명인 23명이 부르는 24곡의 블루스가 수록되어있다 .'블루스의 아버지'로 불리는 W. C. 핸디, 델타 블루스 스타일을 완성시킨 로버트 존슨, 존 리 후커, 엘모어 제임스 등 블루스의 뿌리가 된 대표곡 24곡이 담겼다. CD2' THE HITS / THE GREAT DECADE'는 블루스의 전성기로 불리는 위대한 10년간의 히트곡을 망라한다. 비비 킹, 티본 워커, 존 리 후커, 레이 찰스, 척 베리 등 1950년대 블루스의 전성기를 이끈 24인의 명인들의 명곡이 담겨있다. 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김봉규 기자의 '지구촌 산책' .21] 중국 산시성 기산(岐山)...王이 성덕 베풀어 태평성세,봉황이 내려와 춤추고 노래
봉황은 전설 속의 새다. 이 봉황은 천자(왕)가 천하를 잘 다스려 태평성대를 구가할 때 나타나 운다. 그래서 성군(聖君)을 상징하기도 한다.당나라 문학가이자 정치가인 한유(韓愈)는 '송하견서(送何堅序)'에서 "내가 듣기로 새 중에 봉황이라는 것이 있는데, 항상 도(道)가 있는 나라에 출현한다(吾聞鳥有鳳者 恒出於有道之國)"라고 했다. '순자(荀子)' 애공편(哀公篇)에는 "옛날 왕의 정치가 삶을 사랑하고 죽임을 미워하면 봉이 나무에 줄지어 나타난다(古之王者 其政好生惡殺 鳳在列樹)"라고 했다.봉황이 상징하는 바는 우리나라의 경우도 이와 다르지 않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바뀌었다. 오는 5월10일 취임하는 새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기대 또한 클 수밖에 없다. 기대를 얼마나 충족시킬 수 있을까. 태평성대를 펼쳐 이 한반도에 봉황이 내려와 노래하기를 모두가 바라마지 않을 것이다. 초심을 잃지 않고 끝까지 겸손하고 열린 마음으로 모든 국민의 행복을 위해 사심 없이 일한다면, 봉황이 대통령 문장(紋章)에만 갇혀 있지 않고 거기서 날아올라 국민 모두의 마음속으로 스며들 것이다.봉황의 전설 시작된 산시성 봉황산中문화 뿌리·이상국가 周나라 발상지최고 성인 '원성'으로 추앙받는 주공인재 소중함을 알고 禮·정성 다해야봉황이 날아와 춤추는 태평성대 열려◆봉황 전설 서린 기산봉황의 전설이 시작된 곳 중 한 군데가 중국 산시(陝西)성 바오지(寶鷄)시에 있는 기산(岐山)이다. 기산은 봉황산(鳳凰山)이라고도 한다.기산은 중국 태평성세의 대표적 왕조이자 이상국가로 평가받는 주(周)나라의 발상지로 중국문화의 뿌리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주나라를 만든 주역이 주공(周公)이다. 그는 고대 중국의 최고 성인인 '원성(元聖)'으로 추앙받는 인물이다.주나라 문왕이 성덕(盛德)을 베풀자 봉황이 기산에 날아와 울었다고 한다. 중국 고대 시집 '시경'에 "봉황이 우네 저 높은 산언덕에서, 오동나무가 서 있네 저기 산 동쪽에(鳳凰鳴矣 于彼高岡 梧桐生矣 于彼朝陽)"라고 하고, 역사서인 '국어(國語)'에는 "주나라가 일어나니 봉황이 기산에서 울었다(周之興也 鳳凰鳴于岐山)"라고 기록하고 있다.기산에 가면 이런 주공과 봉황에 관련된 다양한 유적을 만날 수 있다.2013년 8월 기산의 주공묘(周公廟), 즉 주공사당을 찾았다. 주공사당은 기산 남쪽 아래에 있다. 이곳에는 주공상을 모신 주공전(周公殿)만 있는 것이 아니다. 주나라의 시조인 후직(后稷) 희기(姬棄)와 희기의 모친 강원(姜嫄), 주공과 더불어 주나라를 세운 주역인 강태공(姜太公: 본명 姜尙)과 소공(召公) 등도 함께 기리고 있다. 본명이 희석(姬奭)인 소공은 주공과 형제 간이다. 태공전(太公殿), 후직전(后稷殿), 강원전(姜嫄殿) 등이 그 사당이다. 팔괘정(八卦亭), 윤덕천(潤德泉) 등도 있다.윤덕천은 주공사당 옆에 있는 샘인데, 태평성대에는 물이 솟고 난세에는 물이 마른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팔괘정 천장에는 태극과 팔괘가 그려져 있다. 문왕과 주공이 완성했다는 팔괘다.이 건물들은 당나라 때 처음 건립됐다. 당나라 초기인 618년 고조 이연의 명으로 건립된 이후 보수를 거쳐 명나라 때 완성된 것이라고 한다.사당 뒤로 기산에 올라가면 근래 건립된 건물과 시설들이 펼쳐져 있다. 주공상을 모신 원성전(元聖殿), 주공과 관련된 글을 새긴 비석과 정자, 커다란 봉황모습을 설치해 놓은 봉황탑 등이 있다. 봉황탑 몸체에는 '봉명기산(鳳鳴岐山)'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원성전 뒤에는 잘 정비된 주공의 묘가 있고, 봉황이 이곳에 내려와 운 것을 기념한 표석인 '봉명강(鳳鳴岡)' 비석도 있다. 기산은 드넓은 평야에 10㎞ 정도 길게 담처럼 누워 있는, 그리 높지 않은 산이다. 이곳에 오르면 끝없이 펼쳐지는 평야가 눈에 들어온다.◆중국 최고 성인 주공(周公)기원전 1000여 년 전의 사람인 주공(周公)은 주나라 문왕의 아들이다. 성은 희(姬), 이름은 단(旦), 시호는 문공(文公)이다. 보통 주공(周公)이라고 불린다.주공은 공자가 평생 흠모한 대상이다. 또한 유가(儒家)에서는 고대 중국의 최고 성인인 원성(元聖)으로 추앙한 인물이다. 주공은 문왕의 넷째 아들이자 주나라를 개국한 무왕의 동생이다. 문왕은 정비(正妃)와의 사이에서 모두 열 명의 아들을 얻었다. 이 가운데 주공은 가장 탁월한 능력과 비범한 자질을 지니고 있었던 듯하다. 문왕이 강태공을 책사로 중용했던 것처럼 무왕은 동생인 주공을 책사로 중용함으로써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주나라를 세울 수 있었다. 주공은 이처럼 주나라 창업 초기에 나라의 기틀을 완성한 인물이다. 은나라를 멸한 주나라 무왕은 나라의 기틀이 채 완성되기도 전에 죽고 만다. 이때 어린 성왕(成王)을 보필하게 된 주공은 성실하게 그 임무를 완수, 7년 동안 주나라를 정치적으로 안정시켜 놓은 뒤 성왕에게 권력을 넘겨주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주공이 국정을 맡고 있을 때 그는 하루에 70명 이상의 사람들을 만났다고 한다. 국정에 임한 그의 성실함은 '일목삼악(一沐三握)'과 '일반삼토(一飯三吐)'라는 말로 상징되고 있다. 그가 자신에게 면담을 요청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머리를 감다가 세 번이나 머리카락을 붙들고 나왔으며, 또한 식사 도중에 세 번씩이나 먹던 밥을 뱉어내고 나왔다는 것이다.그를 찾은 사람이 먹던 밥을 내뱉고 나오는 주공을 대한다면 어떤 마음이 들까. 누구든지 이런 자세와 마음으로 일을 처리한다면 사람들의 마음을 얻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기산 위에 올라가면 주공의 이런 일화를 새긴 비석과 이를 기념해 세운 정자 토포정(吐哺亭) 등이 있다.주공은 주 왕조를 개창한 공을 인정받아 노(魯)나라 지역의 제후로 봉해졌다. 그러나 이후에도 봉지(封地)로 부임하지 않고 주나라 조정에 남아 무왕을 보좌했다. 대신 아들 백금(伯禽)을 대리 부임시켰다. 주공은 부임지로 향하는 아들에게 말했다."나는 한 번 씻을 때 세 번 머리를 거머쥐고(一沐三握髮), 한 번 먹을 때 세 번 음식을 뱉으면서(一飯三吐哺) 천하의 현명한 사람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했다"며 인재의 소중함을 잊지 말고 예를 다하고 정성을 다해 그들을 대하라고 강조했다.여기서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먹던 음식을 토해내며 인재를 얻다(握髮吐哺得賢士)'라는 뜻의 글귀가 생겨났다. 대통령이, 지도자가 반드시 실천해야 할 가르침이다. 국민 모두의 신뢰를 얻고 박수를 받기 위해 요구되는, 가장 중요한 덕목일 것이다. 훗날 후한(後漢) 말기 삼국시대의 조조(曹操·155~220)는 '단행가(短行歌)'에서 "산은 아무리 높아도 싫지 않고, 바다는 아무리 깊어도 싫지 않다. 주공이 먹던 밥을 뱉어내니 천하의 마음이 그에게로 돌아갔다(山不厭高 海不厭深 周公吐哺 天下歸心)"라고 읊었다. 여기서 '주공토포(周公吐哺)'라는 사자성어가 나왔다.기산 위에 있는 원성전 들어서는 입구 패방에 이 '천하귀심(天下歸心)'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성군의 덕치 상징하는 봉황봉황과 관련한 기록은 주나라 이전의 역사에도 있다. '죽서기년(竹書紀年)'에는 황제(皇帝) 57년에 봉황이 이르렀다는 기록이 있고, '백호통(白虎通)'에는 '황제시절에 봉황이 동원(東園)에 머물러 해를 가리었으며, 항상 죽실(竹實)을 먹고 오동(梧桐)에 깃들인다'라는 기록이 있다.황제시절뿐 아니라 요순 시절에도 봉황이 나타나서 춤을 추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처럼 중국 고대에는 성군의 덕치를 증명하는 징조로 봉황이 등장하고 있다. 중국 전한시대 가의(賈誼)가 지은, 굴원의 절개를 기린 '조굴원부(弔屈原賦)'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봉황새는 천 길 높이로 날면서 덕이 빛나는 곳을 보고 내리고, 덕이 없고 험악한 조짐을 보일 때면 날개를 거듭 쳐서 멀리 날아가 버린다(鳳凰翔于千兮 覽德輝而下之 見細德之險微兮 遙增擊而去之).'조선 시대에도 봉황은 성군의 덕치를 상징했다. 그런 의미로 노래나 춤에도 쓰였다. 조선 초기에 윤회(尹淮)가 개작했다는 '봉황음(鳳凰吟)'은 조선의 문물제도를 찬미하고 왕가의 태평을 기원한 노래였다. 또한 '세종실록' 악보(樂譜)에 수록된 '봉래의(鳳來儀)'는 궁중무용으로, 궁중에서 '용비어천가'를 부르며 추던 춤이었다. 이 무용은 당악과 향악을 섞어서 연주하는 음악에 맞춰 태평성세를 찬양하는 의미로 췄다. 옛날 순임금이 태평시대를 열고 '소소(簫韶)'라는 음악을 지어 연주할 때 봉황이 와서 놀았다는 고사에 따른 것이다.지옥 같은 우크라니아 전쟁이 한 달 넘게 계속되고 있고, 북한의 핵 문제도 갈수록 심각해지는 등 지구촌이 태평성대와는 점점 더 멀어지고 있다. 천하 모든 이의 마음을 얻는 지도자들이 나오고, 한반도를 포함한 이 지구촌 곳곳에 봉황이 내려와 노래하는 시대가 펼쳐지길 꿈꿔본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중국 산시성 기산에 있는 주공묘. 기산 능선 위에 있다. 뒤쪽에 근래 만들어 세운 봉황탑이 보인다.'봉명기산(鳳鳴岐山)'이라고 새겨진 기산의 봉황탑.기산에 세워져 있는 토포정(吐哺亭).기산 아래 주공사당의 주공전(周公殿). 바로 옆에 강태공상을 모신 태공전(太公殿)이 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히트곡 모음집 음반 출시
디즈니 애니메이션 히트곡 모음집 'The Essential Disney Collection'이 2LP<사진>로 출시되었다. 월트 디즈니사가 제작한 수많은 히트작 영화의 베스트 주제곡 모음집이다. 기존의 디즈니 히트곡들을 비롯해 2013년 겨울에 발표되어 전 세계의 어린이들 뿐만 아니라 모든 이를 열광시키고, 많은 가수들이 자신의 버전을 발표했던 '겨울 왕국'의 'Let It Go'도 수록되어있다. 앨범에는 인기 디즈니 영화 주제곡이 망라되었다. '라푼젤' '왕자와 개구리' '하이스쿨 뮤지컬' '뮬란' '토이 스토리' '알라딘' '미녀와 야수' '인어공주' '정글북' '메리 포핀스' '판타지아' '피노키오' 등 명곡들로 가득차 있다. 프라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런던 뮤직 웍스(London Music Works)가 오케스트라 연주를 맡았다. 영국 뮤지컬 가수 헬렌 홉슨, 케이트 페레이라, 리처드 파리스, 헬레나 블랙맨 등이 참여해 노래했다. 특히 영국 '뮤지컬의 여신'으로 불리는 루이즈 디어맨이 런던 뮤직 웍스와 함께한 '겨울왕국'의 'Let It Go'가 앨범을 빛나게 한다. 이번 2LP는 영국의 영화음악 전문회사 '실바 스크린(Silva Screen)'이 제작했다. 로얄 투명블루 컬러로 발매된 1천 장 한정판이다. 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김봉규의 수류화개] 봄버들(2)…아이들이 부는 '버들피리' 마을안녕 기원 '당산나무' 연인의 애틋한 '詩 소재'
버들(버드나무)은 전 세계적으로는 520여 종이 있고, 우리나라에는 40여 종이 있다고 한다. 왕버들, 수양버들(실버들), 능수버들, 갯버들 등 다양하다. 수백 년 된 크고 오래된 버들은 대부분 왕버들이다. 왕버들과는 달리 수양(垂楊)버들은 이름 그대로 가지를 실처럼 아래로 드리우며 자란다. 원산지가 중국인 수양버들은 고려수양(高麗垂楊)이라고도 불리는 능수버들과는 차이가 있으나 일반인이 구별하기는 쉽지 않다. 버들은 암수 딴 그루지만, 드물게는 한 그루에 암꽃과 수꽃이 함께 있는 경우도 있다 한다. 하천 제방이나 고수부지, 호숫가 같은 데서 잘 자란다. 버들은 잘 살고 성장도 빠르다. 봄버들의 정취를 가까이서 느껴보기 위해 10년쯤 전에 시골 밭에 수양버들 한 그루를 심었는데, 너무 잘 자라는 걸 확인하고는 그대로 둘 수가 없어서 재작년에 베어 버린 적도 있다.1970년대까지만 해도 봄버들은 시골 아이들의 즐거운 놀이 도구 중 하나인 버들피리의 재료였다. 물이 오른 버들가지는 양쪽을 잘라서 껍질만 통째로 남기고 나무 심지를 빼낼 수 있다. 그리고 입술이 닿을 한쪽을 얇게 다듬어 소리가 나게 하면 된다. 연주까지 해 보려면 적절히 몇 개 구멍을 뚫으면 된다. 시골에서 자란 사람들은 누구나 이런 추억이 있을 것이다.수양·능수·갯버들 등 국내 40여종 자생 하천제방·고수부지·호숫가서 잘 자라경산 반곡지·청송 주산지 왕버들 군락성주 성밖숲 수령 300~500년 고목 유혹흉사 막는 비보림…천연기념물로 지정조선 기생 홍랑이 연인 최경창과 이별애절한 마음 버들가지 꺾어 詩와 보내국내 문학사 중 가장 아름다운 사랑시◆대표적 왕버들봄버들은 이른 봄날 정취를 만끽하거나 멋진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의 발길을 유혹하기도 한다. 그 대표적인 버들 숲이 경산 반곡지 왕버들과 성주 성밖숲 왕버들, 청송 주산지 왕버들 등이다. 반곡지 둑에는 200년 정도 된 왕버들 20여 그루가 있고, 성밖숲에는 300~500년 된 왕버들 50여 그루가 하천 옆에 자라고 있다. 주산지에는 물이 차고 빠지는 못 바닥에 수령 300년 정도의 왕버들 20여 그루가 있다.이들 왕버들 군락지와 함께 의성 사곡 토현리 왕버들(수령 400년 추정), 안동 도산서원 왕버들(수령 400년 추정) 등 곳곳에 오래된 왕버들 고목이 자라고 있다. 왕버들은 느티나무처럼 옛날 마을에서 마을 안녕 기원 제사를 지내는 나무인 당산나무 역할을 하기도 했다.성주 성밖숲 왕버들은 보기 드문 왕버들 고목 군락으로, 1999년 천연기념물 제403호로 지정되었다. 성주읍 경산리 하천 변에 있는데, 1만5천㎡에 300~500년 된 왕버들 50여 그루가 숲을 이루고 있다. 큰 나무는 둘레가 6m, 높이가 16m나 된다.이 왕버들숲은 마을의 흉사를 막기 위한 비보림(裨補林)으로 조성됐다고 한다. 정확한 시기를 특정할 수는 없으나 당시 서문 밖 마을에서 아이들이 까닭 없이 죽는 등의 흉사가 이어졌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그 원인을 두고 '마을의 족두리바위와 탕건바위가 서로 마주 보고 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리고 두 바위 사이 중간 지점에 숲을 조성하면 재앙을 막을 수 있으리라는 한 지관의 말에 따라 성주읍성의 서문 밖 이천 옆에 밤나무숲을 만들게 되었다. 숲을 조성하자 우환이 사라졌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마을의 기강이 해이해지고 민심이 흉흉해지자 주민들은 이 숲의 밤나무를 베어내고 왕버들을 심어 새 숲을 조성했다. 그 이후 왕버들 숲은 지금까지 살아남아 다른 곳에서는 보기 어려운 장관을 보여준다. 이후로도 위기는 많았다. 잠업이 성행할 때는 왕버들을 베어내고 뽕나무밭을 만들자는 움직임도 있었지만, 숲을 살려야 한다는 여론이 우세해 왕버들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주민들이 대를 이어 가며 노력을 쏟은 덕분에 잘 보존돼 온 이 왕버들 노거수숲은 그 가치를 인정받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기에 이르렀다.◆홍랑과 묏버들버들과 관련한 여러 습속이 전한다. 그중 하나로 중국에서는 헤어지는 사람에게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주며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는 풍습이 있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이와 관련해 버들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멋진 한글 시가 있다. 조선 시대 기생 홍랑(洪娘)의 시조다.'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임에게/ 주무시는 창밖에 심어 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잎 나거든 나인가 여기소서'홍랑이 연인인 고죽(孤竹) 최경창(1539~1583)과 이별하며 지은 시다. 연인을 떠나보내는 애절한 마음을 버들가지를 빌려 표현한 이 작품은 우리나라 문학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 시로 꼽힌다. 당대의 대표적 문장가이자 선비인 최경창과 홍랑의 사랑 이야기는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사연을 담고 있다.뛰어난 시인이기도 한 최경창은 1568년 문과에 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거쳐 1573년 함경도 북평사(北評事·병마절도사의 문관 보좌관으로 함경도와 평안도에 파견된 병마평사의 약칭)로 부임하면서 함경도 홍원 태생의 기생인 홍랑과 인연을 맺게 된다.최경창은 1573년 가을, 서른넷의 나이로 북평사에 임명돼 함경도 경성에 부임했다. 경성은 국방의 요지였다. 이런 군사 요충지인 변방지역에 관리가 부임할 때는 처자식을 데려가지 않고 혼자 가는 것이 당시 원칙이었다. 그리고 관리가 부임하면 관청 소속 기생들을 소집해 점검하는 '점고(點考)'가 진행된다. 최경창도 부임 후 경성 관아의 기생들이 인사를 올리는 '점고'를 받게 되었다. 최경창은 이날 저녁 연회에서 홍랑과 운명적인 만남을 가지게 된다.전남 영암 출신인 최경창은 문장과 학문에서 뿐만 아니라 서화에도 뛰어나고, 악기에도 능했다. 어릴 적 영암에 왜구들이 쳐들어왔을 때 구슬픈 피리 소리로 왜구들의 마음을 움직여 물러가게 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였다. 또 약관의 나이 때 송강 정철, 구봉 송익필 등 당대의 대가 시인들과 시회(詩會)를 하면서 그의 실력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조선 팔문장(八文章)'의 한 사람이기도 했던 그는 시의 경우 당시(唐詩)에 특히 뛰어나 '조선 팔문장' 중 옥봉 백광훈, 손곡 이달과 함께 '삼당시인(三唐詩人)'으로도 꼽혔다.이날 기생 점고에 이어 최경창의 부임 축하 연회가 열렸다. 연회가 무르익어가는 가운데 기생으로서 재능과 미모에다 문학적 소양까지 겸비한 홍랑이 시 한 수를 음률에 맞춰 읊었다. 그런데 홍랑이 읊은 시는 놀랍게도 최경창의 작품이었다. 최경창은 시창을 다 듣고는 내심 놀라워하면서 홍랑에게 넌지시 읊은 시를 좋아하는지, 그리고 누구의 시를 좋아하는지 물었다. 홍랑은 "고죽 선생의 시인데 그분의 시를 제일 좋아한다"라고 대답했다.이렇게 두 사람의 각별한 인연이 시작되었다. 최경창과 홍랑은 서로 정신적으로 잘 맞는 도반이 될 수 있음을 알게 되고, 또 사랑도 나눌 수 있는 처지가 되었기에 날이 갈수록 두 사람의 사랑은 깊어갔다. 홍랑이 최경창의 군막에까지 드나들 정도로 두 사람은 잠시도 서로 떨어져 있으면 안 되는 존재가 되었다.그러나 이들의 행복한 시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6개월이 지난 이듬해 봄 두 사람에게 이별해야 하는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최경창이 조정의 부름을 받아 한양으로 돌아가야만 했기 때문이다.홍랑은 몸살을 앓을 정도로 마음을 다스리기가 어려웠다. 최경창이 한양으로 떠나던 날 홍랑은 최경창과 조금이라도 더 함께 있고 싶었다. 그래서 경성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쌍성(雙城)까지 따라갔다. 더 따라가고 싶었으나 멈춰서야 했다. 다른 지역으로 벗어날 수 없는 관기였기에 더 이상은 따라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기생은 관할 관아에 속해 있는 존재였기 때문에 해당 지역에서 벗어나 다른 지역으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도록 규제를 받았다.홍랑은 최경창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다 돌아서야만 했다. 최경창도 눈물을 삼키며 다음을 기약하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홍랑이 최경창을 보내고 돌아올 때 함흥으로부터 70리 밖에 있는 함관령(咸關嶺)에 이르자 날은 어두워지는데 비까지 내렸다. 그곳에 잠시 머물면서 애틋한 사랑의 마음을 담은 시조 '묏버들 가려 꺾어'를 지었다. 그리고 이 작품과 함께 길가의 버들을 꺾어 최경창에게 보냈다.최경창은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홍랑이 함관령에 이르렀을 때 날이 저물고 비가 내렸다. 이곳에서 홍랑이 내게 시를 지어 보냈다.' 최경창은 나중에 홍랑의 이 시조를 한문으로 번역하고 '번방곡(飜方曲)'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번방곡은 아래와 같다. '버들가지 꺾어 천 리 먼 곳 그대에게 보내니(折楊柳寄與千里人)/ 나를 위해 뜰 앞에 심어 두고 보기 바랍니다(爲我試向庭前種)/ 하룻밤 지나 새잎 돋아나면 알아주세요(須知一夜新生葉)/ 초췌하고 수심 어린 눈썹의 이 몸인 줄을(憔悴愁眉是妾身)'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안동 도산서원 앞 왕버들. 4월 하순의 모습이다.성주 성밖숲 왕버들의 늦가을 풍경.김홍도 작 '마상청앵도'(부분).
[김봉규의 수류화개] 봄버들(1)…이른 봄날에 천변·들판서 연둣빛 인사
지금 대구와 주변 지역에는 목련, 개나리, 살구꽃 등 다양한 봄꽃들이 다투어 피어나고 있다. 꽃들에 이어 온갖 초목들이 새싹과 새잎을 피워내며 완연한 봄 천지를 펼치고 있다. 이처럼 온갖 봄꽃들이 본격적으로 피어나며 산야를 본격적으로 수놓기 전, 연두색·녹황색 기운으로 하천 변과 들판 곳곳을 연둣빛으로 물들이는 나무가 있다. 버들이다. 이른 봄, 설레는 마음으로 '봄빛'을 기다릴 때, 매화 다음으로 꽃이 피기를 기다리는 나무다.봄기운이 돌기 시작하면 대체로 매화를 비롯해 노란 영춘화와 산수유 꽃이 거의 동시에 피어나 가장 먼저 봄소식을 전한다. 이때는 이런 꽃을 볼 수 없는 곳은 여전히 회색빛 천지다. 이런 시기에 야외에 나가면 어디서나 어렵지 않게 시각적으로 봄기운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버들이다. 버들이 피우는 꽃 덕분이다. 그 꽃이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많을지 모르지만, 버들도 매화처럼 꽃이 먼저 피고 나중에 잎이 난다. 봄버들은 이른 봄에 봄기운을 제대로 느껴보려는 사람들에게 매화와 더불어 가장 반가운 존재가 아닐까 생각한다. 온갖 봄꽃들이 본격적으로 피어나면서 화사한 봄천지를 펼치는 것을 한발 앞서 인도하기 때문이다.꽃을 피우기 시작하는 초기 봄버들은 관심을 갖지 않으면 그 기운을 잘 느낄 수 없다. 회색빛 천지 속에 안개 속처럼 흐릿하게 그 빛을 드러내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아주 옅은 연두색이나 녹황색으로 그 존재를 드러낸다. 어떤 색인지 말로 표현하기도 어렵다. 꽃봉오리들이 가지마다 촘촘히 맺혀 있어, 꽃이 피기 전이라도 그 봉오리들이 봄기운에 따라 점점 커지는 가운데 그 빛을 드러내면서 은은하게 빛난다. 꽃을 본격적으로 피우기 시작하면 그 빛이 점점 짙어진다.매화나 산수유 말고는 꽃을 볼 수 없는 이른 봄, 멀리서 황금빛·연둣빛으로 보이는 것은 모두 봄버들이라고 봐도 별로 틀리지 않을 것이다. 연둣빛 구름을 두르고 있는 듯하다. 봄버들은 이렇게 멀리서 보는 맛이 제격이다. 강아지풀 꽃처럼 생긴, 꽃 자체의 모습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 만큼 매력적이지는 않기 때문이다.대구는 3월 초순부터 버들이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지금은 여러 가지 봄꽃에 시선이 먼저 가겠지만, 금호강이나 신천 등에 가보면 곳곳에서 연둣빛 완연한 수양버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경산 반곡지 왕버들도 황홀한 자태로 많은 상춘객의 발길을 끌어들이고 있다.봄버들이 선사하는 봄의 정서를 기가 막히게 표현한 그림이 있다. 바로 단원(檀園) 김홍도(1475~?)의 걸작 '마상청앵도(馬上聽鶯圖)'다. 봄이 오면 언제나 떠오르는 그림이다. 이 작품은 제목이 말해 주듯이 말 위에서 꾀꼬리 소리를 듣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어느 봄날, 말을 타고 가던 한 선비가 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길 옆의 수양버들을 올려다보고 있다. 연둣빛 수양버들 가지 위에는 꾀꼬리 두 마리가 놀고 있다. 길옆에는 풀들이 새싹을 내밀고 있다. 이맘때의 수양버들 모습이다.부채를 들고 갓을 쓴 선비가 문득 들려오는 꾀꼬리 소리를 듣고는, 말을 멈춘 뒤 수양버들을 올려다보는 순간을 포착하고 있다. 반가운 정경에 반해 넋을 놓고 바라보는 선비의 모습을 너무나 잘 담아내고 있다. 이른 봄의 정취를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을까 싶다. 화면 왼쪽 위에는 화제(畵題)가 있다. '어여쁜 여인이 꽃 속에서 천 가지 가락으로 생황을 불고 있나(佳人花底簧千古)/ 운치 있는 선비의 술상 위에 올려진 한 쌍의 밀감인가(韻士樽前柑一雙)/ 수양버들 늘어진 언덕을 어지러이 오고 가는 금빛 베틀북이여(歷亂金梭楊柳崖)/ 봄 날 강가에 자욱한 비안개 끌어다가 고운 비단을 짜고 있구나(惹烟和雨織春江).' 화제의 내용도 멋지다. 이른 봄, 황량한 들판 곳곳에서 연둣빛을 띠기 시작하며 먼저 봄을 알리는 버들을 볼 때 이 그림을 떠올리곤 한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꽃이 한창 피어난 금호강 수양버들 가지. 버들도 꽃이 먼저 핀다. 여기에는 보이지 않지만 버들 꽃에도 벌과 나비들이 모여든다.대구 동촌 금호강변의 수양버들 풍경.
'첼로의 귀족' 피에르 푸르니에 첼로 전집 출시
'첼로의 귀족'으로 불리는 첼리스트 피에르 푸르니에(1906~1986)의 세 장짜리 CD 박스세트 첼로 전집이 나왔다. 첫째 음반에는 체코 출신 영국 지휘자 발터 수스킨트(1913~1980) 지휘·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연주의 생상스 '첼로협주곡 1번', 제랄드 무어(1899~1987)의 피아노가 함께하는 '동물의 사육제 중 백조', 장 후보(1917~1992)의 피아노가 함께한 슈베르트 '아르페지오네 소나타', 외젠 비고(1888-1965) 지휘·라무뢰 오케스트라 연주의 차이콥스키 '로코코 변주곡'이 수록되었다. 나머지 두 음반에는 희귀본으로 알려진 피에르 푸르니에의 베토벤 '첼로 소나타' 5곡 전곡이 담겼다. 푸르니에의 최초 베토벤 첼로 소나타 전곡녹음이다. 오스트리아 피아니스트 아트투르 쉬나벨(1882~1951)이 함께한다. 푸르니에가 들려주는 베토벤의 첼로 소나타는 '첼로의 귀족'이라는 그의 별명이 말해주듯, 귀족적인 기품과 높은 격조를 지녔다고 평가된다. 이 음반은 푸르니에가 40대 초반에 녹음한 앨범이다. 충만한 에너지로 베토벤의 음악에 섬세한 표정을 불어넣고 있다. 피에르 푸르니에는 12세에 파리음악원에 들어가 나중에는 교수가 되어 제자들을 길러내면서, 미국과 구소련을 비롯한 전세계 연주여행을 했다. 그는 음악으로 국경을 허물고 세계인이 서로 강한 유대감을 형성한다고 믿었다. 1978년 5월 9일 세종문화회관 개관예술제에 초청받아 내한공연을 하기도 했다.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2051 Pierre Fournier 3CD
경북향교재단, 서중호 아진산업 대표에 감사패
서중호 아진산업 대표(왼쪽 두번째)는 최근 경산 아진산업 본사에서 경상북도향교재단(이사장 박원갑)이 경북의 40개 향교 이름을 새겨 제작한 감사패를 전달받았다. 성균관부관장을 역임한 서중호 대표는 달성서씨 동고문중 종손으로, 10여 년 동안 경북 소재 40개 향교에 매년 두 차례씩 명절 선물을 보냈다. 한편 이 자리에서 경북향교전교협의회 조영철 회장(영천향교 전교)은 황금열쇠를 전달하면서 40개 향교를 대표해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경북향교재단 김달헌 수석 이사, 김상도 자인향교 전교도 참석했다. 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재즈 역사상 가장 감미로운 목소리' 사라 본 음반 출시
재즈 역사상 가장 감미로운 목소리로 칭송받는 사라 본(1924~1990)의 음반(2LP, 2CD)이 새로 나왔다. 사라 본은 과거 재즈 연주의 조연으로 취급받던 재즈 보컬의 위상을 한껏 드높인 인물이다. 폭넓은 음역과 오페라의 디바를 연상시키는 극적인 표현력은 재즈 보컬 연주의 즉흥성과 예술성을 한 차원 높였다. 빌리 홀리데이, 엘라 피츠제럴드와 함께 3대 여성 재즈 보컬리스트로 추앙받는 그의 목소리는 1940년대 비밥으로 대변되는 모던 재즈시대의 만개와 함께 '목소리로 연주하는 비밥'의 전형을 제시함으로써, 1930~40년대 스윙 보컬의 달콤함을 뛰어넘어 한층 세련되고 스케일이 있는 보컬을 창조해냈다. 특히 그가 부른 조지 거슈윈의 작품 'Summertime'은 최고로 꼽힌다. 1989년 '그래미 어워드 평생 공로상' 수상자이기도 하다. 프랑스 디거스 팩토리(Diggers Factory)가 내놓은 마스터 재즈 시리즈 '사라 본 에센셜 모음집(Sarah VAUGHAN Essential Works)' 2LP<사진>는 1천 장 한정판이다. 2장의 LP는 데뷔 이후 전성기 시절인 1944년에서 1962년 사이 발표한 그의 대표곡 24곡을 담고 있다. 이와 함께 28쪽 분량의 일러스트와 사라 본 바이오그라피 해설집 22쪽이 담긴 아트북이 포함된 '사라 본과 세라 & 아란텔(Sarah Vaughan Sera & Aranthell)' 2CD 양장본도 출시되었다. 첫 CD는 1944년에서 1957년 사이 뉴욕에서의 '사라 본과 올 스타즈' '사라본 트리오'가 함께한 76분 22초 분량의 20곡이 담겼다. 이 앨범은 1999년에 그래미 명예의 전당(Grammy Hall of Fame) 목록에 올랐다. 다른 CD는 1957년부터 1958년 사이 시카고에서 녹음한, '사라 본 트리오' '카운트 베이시 오케스트라' 등이 참여한 72분 58초 분량의 17곡이 수록되었다. 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흥미로운 명필이야기 .16] '해동 서성' 김생…옛 서법 잃지 않은 파격적 아름다움으로 독보적 위치 '조선 필법의 종주'
'해동서성(海東書聖)'이라 불리는 김생(711~791)은 우리나라 서예가를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거론되는 인물이다. 고려 사신이 중국 송나라에 갔을 때 김생의 글씨를 보이자 그들이 '왕희지 친필'이라고 말할 정도의 필력을 보였다. 김부식의 '삼국사기' 열전에 김생에 대한 내용이 실려 있다. 약소한 내용이지만 서예가로서의 명성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김생은 부모가 한미하여 그 세계(世系)를 알 수 없다. 711년에 태어나 어려서부터 글씨를 잘 썼으며 평생토록 다른 기예를 전공하지 않았다. 나이가 80이 넘어서도 붓을 잡고 쉬지 않았는데, 예서(隸書)와 행초(行草)가 모두 입신(入神)의 경지였다. 지금도 가끔 그의 진적이 있어 학자들이 서로 전하여 보배로 여긴다.숭녕 연간(1102~1106)에 고려 학사 홍관(洪灌)이 진봉사(進奉使)를 따라 송나라에 들어가 변경에 묵고 있었는데, 당시 한림대조(翰林待詔)였던 양구(楊球)와 이혁(李革)이 황제의 칙명을 받들고 숙소에 와서 글씨와 그림 족자를 구하였다. 홍관이 김생이 쓴 행초 한 권을 보여주자 두 사람이 크게 놀라며 말하기를 '뜻밖에 오늘 왕희지(왕우군)가 쓴 친필 글씨를 보는구나(不圖今日得見王右君手書)'라고 말했다. 이에 홍관이 '그게 아니라 이는 신라사람 김생이 쓴 것'이라고 하였으나, 두 사람은 웃으면서 말하기를 '천하에 왕희지를 빼놓고 어찌 이런 신묘한 글씨가 있겠소' 하면서 홍관이 여러 번 말하여도 끝내 믿지 않았다."고려 말의 이규보(1168~1241)는 우리나라 역대의 유명 서예가를 품평하면서 김생을 '신품제일(神品第一)'로 극찬했다. 이규보는 김생의 글씨를 평가해준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자신이 쓴 '동국이상국집'에서 그때까지의 우리나라 대표적 서예가 네 사람을 '신품사현(神品四賢)'으로 칭했는데, 신라의 김생과 고려의 유신·탄연·최우다. 그는 신품사현 가운데서도 김생의 글씨를 최고로 꼽고 이렇게 평했다.'아침이슬이 맺히고 저녁연기가 일어나며, 성낸 교룡이 뛰고 신령스러운 봉황이 난다. 마음과 손이 서로 응한 것은 천연의 신비가 붙은 것이다.'조선 때도 서거정, 이황, 허목, 홍양호 등의 호평이 이어졌다. 이처럼 고려·조선의 문인들로부터 찬사를 받으면서 김생은 마침내 우리나라 서예의 비조(鼻祖)로 자리 잡게 되었다. 조선 후기의 유명한 서예가 이광사는 '우리나라 필법은 신라 김생을 종주로 여기는데, 오늘날 그의 진적으로 전하는 예는 거의 없다. 그러나 탁본한 작품 역시 기위(奇偉)하고 법이 있어 고려시대 이후의 사람들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다'며 극찬했다. 김생이 이처럼 단연 독보적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무엇보다 그가 당시 유행했던 중국풍의 글씨를 외형적으로 답습하는 데 그치지 않고, 조화로운 구성과 활달한 운필로 자신만의 독창적 경지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김생의 대표작 '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太子寺朗空大師白月栖雲塔碑)'는 이러한 점을 잘 보여주는 예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글씨는 왕희지체에 근간을 두었으면서도 상투적인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짜임을 구사했다. 옛 서법을 잃지 않으면서도 파격적인 아름다움을 지니는 이유다. 특히 굵고 가는 획을 섞어 변화를 주고, 굽고 곧은 획을 섞어 조화의 묘를 살려낸 점이 두드러진다. 그의 필적으로 '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 '전유암산가서(田遊巖山家序)', '해동명적'의 '송하빈객귀월(送賀賓客歸越)', '대동서법'의 '망여산폭포시(望廬山瀑布詩)' 등이 있다. 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이백의 시 '망여산폭포(望廬山瀑布)'를 쓴 김생 글씨(부분).
[옛사람들의 행복콘서트] 팔여(八餘)거사… 행복은 욕심을 줄일수록 커지는 것, 만족할 줄 아는 마음의 힘 갖추는 것
행복한 삶을 살려면, 내가 행복하려면 어떤 게 가장 필요할까. 부자가 되고,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권력이나 명예를 누리면 행복할까.선현(先賢)들이 누누이 강조했듯이 행복은 욕심을 줄일수록, 만족할 줄 알수록 커진다. 노자는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 부자'라고 했고, 톨스토이 또한 '욕심이 작으면 작을수록 인생은 행복하다'라고 강조했다. 이와 관련한 옛사람들의 글이나 일화를 자주 접하며 마음에 새기는 것도 행복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먼저 '팔여(八餘)거사' 이야기를 소개한다. '자네가 쉬지 않고 집을 짓는다는 소문을 내가 서울에서 들었다네. 남들이 전하는 말이 정녕 사실이라면, 차라리 그런 짓을 그만두고 조용히 살면서 하늘의 뜻에 따르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70세를 산다면 가장 장수했다고 한다네. 가령 나와 자네가 그렇게 장수하는 복을 누린다고 해도, 남아있는 세월이라야 겨우 10여 년에 지나지 않네. 무엇 때문에 노심초사하며 말 많은 자들의 구설수에 오를 짓을 사서 한단 말인가? 내 이야기를 해보겠네. 나는 20년을 가난하게 살면서 집 몇 칸 장만하고 논밭 몇 이랑 경작하며, 겨울 솜옷과 여름 베옷 몇 벌을 갖고 있네. 잠자리에 누우면 남은 공간이 있고, 옷을 입었는데도 남은 옷이 있으며, 주발 바닥에는 먹다 남은 밥이 있다네. 이 여러 가지 남은 것을 자산으로 삼아 한세상을 으스대며 거리낌 없이 지낸다네.천 칸 되는 고대광실 집에다 온갖 쌀밥을 먹고, 비단옷 백 벌을 갖고 있다 해도 그따위 물건은 내게는 썩은 쥐나 다를 바 없네. 호쾌하게 이 한 몸뚱어리를 붙이고 사는데 넉넉하기만 하네.듣자니 그대는 옷과 음식과 집이 나보다 백배나 호사스럽다고 하던데, 어째서 조금도 그칠 줄 모르고 쓸데없는 물건을 모으는가? 없어서는 안 될 것이 있기는 하네. 책 한 시렁, 거문고 한 벌, 벗 한 사람, 신 한 켤레, 잠을 청할 베게 하나, 바람 통하는 창문 하나, 햇볕 쪼일 툇마루 하나, 차 달일 화로 한 개, 늙은 몸 부축할 지팡이 한 개, 봄 경치 즐길 나귀 한 마리가 그것이지.'사재(思齋) 김정국(1485~1541)이 친구인 황 아무개에게 보낸 편지(寄黃某書)의 일부다. 황 아무개가 늙어서도 계속 집을 짓는 등 호사스럽고 욕심 사납게 산다는 소문이 들리자 보낸 충고의 편지다.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인 김정국은 고양팔현(高揚八賢)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고양팔현은 경기도 고양에서 배출된 대표적 조선 선비 8명(남효온·김정국·기준·정지운·민순·홍이상·이신의·이유겸)을 말한다. 김정국은 대구(현풍) 도동서원에서 기리고 있는 한훤당 김굉필의 제자이기도 하다. 1509년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하다가 기묘사화로 삭탈관직을 당해 경기도 고양 망동리에 내려가 '팔여거사(八餘居士)'라 칭하고, 학문을 닦으며 저술과 후진 교육에 힘썼다. '팔여(八餘)' 라는 아호는 '여덟 가지 넉넉한 것'이라는 의미다.김정국은 위의 글 중 '잠자리에 누우면 남은 공간이 있고, 옷을 입었는데도 남은 옷이 있으며, 주발 바닥에는 먹다 남은 밥이 있다네(臥外有餘地, 身邊有餘衣, 鉢底有餘食)'란 대목에서 '세 가지 남은 것(三餘)'이란 말을 가져와 '삼여거사(三餘居士)'란 호를 짓기도 했다. 한 친구가 새 호 '팔여'의 뜻을 물었다. 이에 김정국은 이렇게 답했다.'토란국과 보리밥을 배불리 넉넉하게 먹고, 부들자리와 따뜻한 온돌에서 잠을 넉넉하게 자고, 땅에서 솟는 맑은 샘물을 넉넉하게 마시고, 서가에 가득한 책을 넉넉하게 보고, 봄날에는 꽃을 가을에는 달빛을 넉넉하게 감상하고, 새들의 지저귐과 솔바람 소리를 넉넉하게 듣고, 눈 속에 핀 매화와 서리 맞은 국화에서는 넉넉하게 향기를 맡는다네. 한 가지 더, 이 일곱 가지를 넉넉하게 즐기기에 팔여라고 했네.'그 말을 들은 친구는 한참을 곰곰이 생각하다 이런 말을 건넸다.'세상에는 자네와 반대로 사는 사람도 있더군. 진수성찬을 배불리 먹고도 부족하고, 휘황한 난간에 비단 병풍을 치고 잠을 자면서도 부족하고, 이름난 술을 실컷 마시고도 부족하다네. 울긋불긋한 그림을 실컷 보고도 부족하고, 아리따운 기생과 실컷 놀고도 부족하고, 좋은 음악을 다 듣고도 부족하고, 희귀한 향을 맡고도 부족하다고 여기지. 한 가지 더, 이 일곱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그 부족함을 걱정하더군. 내 자네를 따라서 여덟 가지를 넉넉하게 즐기는 사람이 되기를 바랄 뿐, 속물을 따라서 부족함을 걱정하는 인간은 되고 싶지 않네 그려.'김정국은 망동리에서 20여 년 동안 '팔여'를 누리며 청빈을 즐겼다. '삼여(三餘)' '팔여(八餘)'의 '여'는 '넉넉하다' '부족함이 없다'는 말이다. 사람들의 불만이나 불행은 대부분 남과 비교하는 데서 비롯된다. 살아가는데 무엇이 실질적으로 부족해서가 아니라, 자신보다 더 나은 이들과 비교해서 부족하다고 생각하면서 불만을 자초하는 것이다. 무엇이든지 넉넉하다고 여기는 마음을 갖느냐 여부가 관건이다. 김정국이 넉넉하다고 여기는 세 가지 '삼여'에 속하는 의식주를 비롯해 직장이든, 용모든, 건강이든, 자식이든 삶의 모든 환경을 넉넉하게, 만족스럽게 여기는 마음이 행복 여부를 좌우하지 않겠는가. 그렇지 않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그런 마음을 가지기란 쉽지는 않겠지만.그렇게 각박하게 살지 않아도 될 만한, 만족하며 살아도 될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 이들보다 오히려 넉넉한 마음을 잘 내지 못하는 경우를 자주 접한다. 과욕을 절제하고 만족할 줄 아는 마음의 힘을 기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 같다. 경제적이나 사회적으로 살 만해져도 만족할 줄 모른다면, 만족할 줄 아는 마음의 힘을 갖추지 못하면 행복은 여전히 자신과는 먼 일이 될 것이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매화가지를 화병에 꽂다가 떨어진 매화 봉오리를 물 몇 방울이 남아있는 찻잔에 놓아두었더니 이렇게 꽃봉오리를 터뜨렸다. 욕심 많은 사람처럼 물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꽃피우기를 포기했다면 꽃을 피우지 못했을 것이다.
[동추 금요단상] 만어산에서
한때는 내가 날아다니는 꿈을 많이 꾸었다.날개로 나는 것은 아니다. 팔과 다리를 움직여 난다. 두 다리를 굽힌 뒤 바닥을 구르며 하늘로 박차고 올라 허공을 날게 된다. 물속에서 수영을 하는 느낌과 비슷하지만, 그보다는 훨씬 자유롭고 빠르게도 움직일 수 있다.이런 꿈을 몇 년 전에는 한동안 종종 꾸었다. 날아다니는 곳은 아는 곳도 있지만 대부분 낯선 곳이었다. 그리고 항상 혼자였고 누구와 같이 날지는 않았다. 꿈을 꾸고 나면 기분이 좋았다. 요즘은 이런 꿈을 꾸지 않아 아쉬운 마음이다.얼마 전 밀양 만어산(萬魚山) 만어사(萬魚寺)에 다녀왔다. 따뜻한 날 이곳에 오르니 꿈속인 듯했다. 만어사는 꿈같은 이야기가 펼쳐져 있는 곳이기도 하다.만어산(해발 670m) 정상 아래에 만어사가 있고, 그 아래에 산비탈을 따라 '암괴류(巖塊流)', 말하자면 '돌강'이 넓게 펼쳐져 있다. 너비는 일정하지는 않지만 100m 정도, 길이는 700m 정도 된다. 면적은 축구장 16개 정도 넓이 되는 11만5천149㎡. 검은색의 크고 작은, 다양한 모양의 바위들이 펼쳐져 있다. '천연기념물 제528호 만어산 암괴류'다. 경사가 급하지 않아 바위 위를 건너다니기도 어렵지 않다.이 보기 드문 '돌강'은 동해의 용과 수많은 물고기들이 불법(佛法)의 감화를 받고 이곳으로 올라와 바위로 변한 것이라는 전설이 서려 있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이야기다.만어산은 옛날에는 자성산(慈成山)으로도 불렸다. 이 일대를 다스리던 가야 수로왕 때 일이다. 당시 옥지(玉池)라는 연못에 독룡(毒龍)이 살고, 자성산에는 악귀인 나찰녀(羅刹女) 다섯 명이 살고 있었다. 이들이 서로 왕래하고 교접하면서 때때로 번개가 치고 비가 쏟아져 4년 동안이나 농사를 망치게 되었다. 왕이 주술로 막아보려 했지만 효과가 없자 부처에게 설법을 청했다. 부처의 설법을 들은 이들이 오계(五戒)를 받게 되면서 폐해가 없어졌다. 이 소식을 들은 동해의 용과 물고기들이 떼를 지어 찾아와 돌로 변해 경쇠 소리를 내게 되었다.나중에는 이런 설화가 더해진다. '동국여지승람'과 '택리지'에 나온다.'옛날 동해 용왕의 아들이 죽을 때가 되자 신승(神僧)을 찾아가 새로 살 곳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다. 신승은 가다가 멈추는 곳이 바로 그곳이라고 말해주었다. 용왕의 아들이 길을 떠나자 수많은 고기떼가 그의 뒤를 따랐는데, 그들이 멈춘 곳이 만어사다. 이곳에서 용왕의 아들은 큰 미륵바위로 변했고, 그를 따르던 수많은 고기들 또한 크고 작은 돌로 변했다.'돌강 가장 위에 있는 미륵바위는 높이가 5m 정도인데, 고래가 물 위로 머리를 내민 모습이 연상된다. 이 미륵바위는 만어사 미륵전에 봉안돼 있다. 2층 전각을 지어 자연석인 이 미륵바위를 미륵불로 모시고 있는 것이다. 미륵전 앞마당에 서면 1만 마리의 물고기들이 미륵바위를 향해 돌로 변한 '만어석(萬魚石)' 돌강이 끝없이 펼쳐진다.이 만어석 중에는 두드려보면 쇳소리가 나는 바위가 곳곳에 있다. 조선 세종 때 이를 채굴해 악기를 만들었으나 음률이 맞지 않아서 폐지했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다. 동해의 수만 마리 물고기들이 용을 따라 낙동강을 지나 밀양 만어산으로 오르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오랜만에 꾸어본 기분 좋은 '백일몽(白日夢)'이다.과학기술이 빠르게 발전하면서 과학만능주의가 지배하고 있다. 우리의 정신적 삶을 풍요롭게 하던 신화와 전설은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 필요 없는 것으로 치부되고 있다. 과학만능·물질만능적 사고가 행복한 삶에 얼마나 도움이 될까. 오히려 우리의 삶을 각박하게 하고 정신적 허기를 더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인간은 밥만 먹고살 수는 없다. 배 부르고 필요한 물건을 다 갖추고 있다고 해서 행복하게 사는 것 같지도 않다. 신화나 설화가 오히려 더 필요한 시절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밀양 만어산 만어사 앞 산비탈에 펼쳐진 만어석(萬魚石). 동해 물고기들이 이곳으로 올라와 크고 작은 바위로 변했다는 설화가 전하는 암괴류(巖塊流)로, 축구장 넓이의 16배 정도 된다.만어사 미륵전에 모셔진 미륵바위.
홍사자원봉사단, 대구 구암서원서 문화재 주변 환경정비
홍사자원봉사단(회장 송원익) 회원 30명은 지난 5일 대구 북구 구암서원에서 문화재 주변의 환경정비 봉사활동을 펼쳤다.
[김봉규 기자의 '지구촌 산책' .20] 압록강 일보과(一步跨), 폭격으로 끊어진 전쟁의 상흔…지척 북녘땅에 드리워진 안개
1945년 한반도가 미국과 소련에 의해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분단되고, 북한의 남침으로 일어난 한국전쟁으로 인해 1953년 7월에는 다시 휴전선(군사분계선)이 그어졌다.이로 인한 한민족의 고통이 어떠했는가. 흐르는 세월 따라 그냥 잊어버려도 될 일인가. 분단으로 우리 민족이 입는 손해 또한 얼마나 큰가. 겸재 정선이나 단원 김홍도처럼 금강산을 올라 그 감흥을 신나게 그려보고 싶은 남쪽 화가들이 있어도 몽상으로 그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우리의 소원은 통일'. 이런 정서가 강한 남한 기성세대의 북한 산하에 대한 정서는 각별하지 않을 수가 없다. 비무장지대가 있는 휴전선 지역보다 중국과 북한의 접경지역, 특히 북한 땅이 지척인 곳에 가면 더욱 특별한 기분이 들 것이다. 그런 지역 중 한 군데가 중국 단둥(丹東) 호산촌(虎山村)의 일보과(一步跨)라는 곳이다.2006년 12월 중국 선양(瀋陽)에서 버스를 타고 단둥으로 갔다. 단둥에서 호산장성(虎山長城)으로 가서 먼저 일보과를 찾았다. 일보과에서 개울 건너편 북한 땅을 밟아본 뒤 호산장성을 둘러봤다. 그리고 다시 단둥으로 돌아와 한국전쟁 때 미군 폭격으로 끊어진 철교인 압록강 단교(斷橋)에 올라 전쟁 때 생겨난 총탄 자국 등을 살펴보았다. 배를 타고 압록강을 오르내리며 경계 근무 중인 북한 병사들을 보기도 했다. 일정한 거처 없이 먹을 것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가난한 북한인들을 지칭하는 '꽃제비' 아이를 시내에서 보기도 했다.◆북한과 지척인 일보과중국어로 '이뿌콰'로 부르는 일보과(一步跨)는 호산장성 관광지 안에 있다. 호산장성이 있는 호산촌은 단둥에서 압록강을 따라 상류로 15㎞쯤 떨어진 곳이다. 일보과는 호산장성 뒤 쪽 언덕 아래로 흐르는 압록강 물가의 한곳이다. 강변 언덕 위 작은 공터이자 나루터이기도 한 이곳은 압록강을 사이에 둔 중국과 북한의 국경인 중조변경(中朝邊境) 가운데서 가장 가까운 곳이라고 한다.호산장성 주차장을 지나 남쪽으로 난 언덕길을 올라서면 '중조변경 일보과(中朝邊境 一步跨)'라고 적힌 큼지막한 바위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그 옆에 '지척(咫尺)'이라고 새겨진 바위가 짝을 이뤄 서 있다. '과(跨)'는 넘는다는 뜻. 그러니 일보과는 한걸음에 넘는 국경이란 말이다. 표지석 바위 옆에는 맞은편 북한 땅을 조망할 수 있는 망원경 한 대가 설치돼 있었다.北·中의 국경중 가장 가까이 인접큰 바위에 '중조변경 일보과' 새겨압록강 샛강 건너편에 넓게 펼쳐진 서울 여의도 절반 크기 北 '우적도' 꽁꽁 언 강가서 얼음깨고 빨래 풍경고구려 박작성, 中 호산장성 탈바꿈 만리장성 동단기점 정한 동북공정파괴된 철교와 교역, 두 개의 철교일보과 둑 아래로는 작은 개울이 흐르고 있다. 압록강의 한 갈래로 샛강인 셈이다. 이 샛강 건너편에 넓게 펼쳐져 있는 땅이 바로 북한 땅으로, 압록강 하중도 우적도(于赤島)다. 북한의 의주군 방산리라고 한다. 우적도의 크기는 서울 여의도의 절반 정도. 이 샛강의 넓이는 10m도 안 되는 것 같았다. 샛강에는 얼음이 얼어있었다. 중국 쪽 물가에는 한 주민 여성이 얼음을 깨고 빨래를 하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강바닥으로 내려가 북한 쪽 둑 아래까지 가서 기념촬영을 하기도 했다. 국경이지만 당시에는 양쪽에 철조망이나 초병도 없어 그냥 시골의 작은 개울 풍경과 다름없이 평화로워 보였다.그 이후에 중국과 북한 양쪽에 철조망을 쳐놓은 모양이다.일보과는 호산장성이 관광지로 개발된 이후 특히 한국인 관광객이 점차 많이 찾게 된 국경 나루터다. ◆동북공정 산물 호산장성호산장성이 있는 호산은 애하와 압록강이 합쳐지는 곳이다. 호산장성은 중국의 '압록강 국가중점풍경구' 가운데 하나로, 중국은 이 성을 만리장성의 동쪽 출발점으로 내세우고 있다. 만리장성의 동쪽 출발점이 그동안 알려진 허베이(河北)성의 산해관(山海關)부터가 아니고, 동쪽으로 더 멀리 간 곳인 호산장성이 그 동쪽 기점(起點)이라는 주장이다. 호산장성 성루가 있는 곳 부근에 광장을 만들고 대형 기념조형물 등을 설치해놓았다. 동북공정의 일환이다.호산장성 터는 실제로는 고구려의 박작성(泊灼城)이 있던 곳이다. 당나라군이 압록강을 거슬러 침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고구려가 쌓은 성이다. 만리장성과는 관계없는 성의 흔적이 있었는데, 1990년대에 벽돌로 성을 새로 쌓고 만리장성의 동쪽 시작점이라고 표시해놓은 것이다. 호산장성박물관도 세우고, 진나라 시대 등의 복제유물과 그림 등을 전시하고 있다. 중국은 호산에서 만리장성의 석축을 발견했고 그 위에 새롭게 성을 쌓았다고 주장하나 학술적 증거는 없다. 1991년 호산 일대를 발굴한 중국 조사단은 쐐기돌로 쌓은 석축과 대형 우물을 발견했다고 기록하고, 이곳에 고구려의 대형 성벽 터가 있었다는 발굴 결과를 정리했다. 그리고 1994년 전 요녕성박물관장 왕면후가 집필한 '고구려 고성 연구'는 고구려의 박작성은 호산장성이라는 결론을 내리기도 했다.삼국사기의 박작성 관련 기록을 통해 보장왕 7년(648)에 당나라 1만의 병사와 고구려의 3만의 병사가 박작성에서 전투했음을 알 수 있다. 압록강 하구에 위치하여 압록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길목을 통제하는 중요한 산성이었다. 성에서 고구려 시기의 유물이 다량으로 출토된 것을 볼 때, 고구려가 단둥 지역을 차지하게 되는 4세기 이후에 건립된 주요 방어성으로 추정된다.하지만 고구려의 박작성은 이제 사라지고 없다. 박작성은 고구려의 옛 성이 아니라 '만리장성의 동단기점'으로 탈바꿈하고 그 이름도 '호산장성'으로 명명되었다.◆압록강 단교단둥 압록강에 가면 강을 가로지르는 철교가 두 개 놓여 있다. 하나는 온전하고, 다른 하나는 중간에 끊어져 있다. 끊어진 압록강 단교는 중화인민공화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이 압록강 국경에 일본 제국이 건설한 철교로, 한국 전쟁 당시 유엔군의 폭격으로 끊어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단교의 길이는 944m. 1908년 8월 일본 제국이 서울과 신의주를 연결하는 경의선을 이어 압록강을 건너 중국 단둥으로 연결하는 압록강 철교를 착공했다. 착공 후 3년 동안 연인원 5만명을 동원해 1911년 10월에 준공했다. 한반도에서 중국의 만주를 거쳐 유럽까지 이어지는 국제 철도 노선이 연결된 것이다. 강을 오르내리는 배를 통과시키기 위해 중간을 열고 닫을 수 있는 개폐식(開閉式)으로 만들었다.1932년 통계에 의하면 보도 통행자만도 연간 260만명이었다고 한다. 1934년 11월부터 교량 보존을 이유로 개폐를 중지했다. 1945년 8월15일 광복이 되자 그 기념으로 한 번 연 일이 있다. 한국전쟁 중 1950년 11월8일 유엔군의 폭격으로 교량의 중앙부에서 북한 쪽 땅까지가 파괴되어 단교가 되었다.이 다리의 바로 상류 쪽에 1943년 완공된 압록강의 두 번째 철교가 있다. 현재는 '조중우의교(朝中友誼橋)'라고 명명되어 이용되고 있다. 일제가 1937년 새로운 다리 건설에 착공, 1943년 4월 개통했다. 복선형 철교로 건설된 이 다리는 1990년 북한과 중국의 합의에 따라 '조중우의교'라 개칭했다. 이 철교는 북한과 중국 간 교역 물량의 80%가 처리되는, 북한경제를 지탱하는 핵심 교량 역할을 해왔다.압록강 단교는 관광지로 활용되고 있다. 일본이 건설하고 미국이 부순 이 단교는 한국인과 중국인에게 전혀 다르게 인식되는 역사의 현장이다. 중국인들은 대륙으로 들어오려는 침략자(미군)를 막아낸 구국 항쟁의 상징으로 본다. 중국은 한국전쟁을 미국의 침략에 맞서고 북한을 도왔다고 해서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으로 정의한다.단둥 압록강 근처에는 항미원조기념관이 있다. 중국 정부는 한국전쟁 당시 중국군의 참전을 기념하기 위해 1958년 단둥에 관련 기념시설들을 짓기 시작했고, 1993년 현 위치에 대규모 기념관을 개관했다. 2014년 말 내부 보수 및 확장을 위해 잠시 문을 닫았다가 2020년 9월 재개관했다. 재개관하기 전 항미원조기념관을 방문한 관람객 수는 1천200만명에 달했다고 한다. 2010년 7월 이곳에 방문했을 당시 수많은 중국 사람들이 줄을 서서 관람하고 있는 광경을 보고 놀라워했던 기억이 난다. 전시관 내에는 한국전쟁 참전 과정과 전사에 관한 다양한 기록과 사진, 깃발, 무기 등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기념관 앞에 1953년 한국전쟁이 종료되었음을 상징하는 높이 53m의 기념탑이 서 있다. 기념탑에는 '항미원조기념탑(抗美援朝紀念塔)'이라는 덩샤오핑(鄧小平)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한국전쟁 때 유엔군의 폭격으로 끊어진 압록강 단교. 왼쪽 철교는 1943년 완공돼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는 '조중우의교'. 철교 건너편이 북한 신의주.일보과의 중국 쪽 강가에 중국 여성이 얼음을 깨고 빨래를 하고 있고, 북한 쪽에는 한국 관광객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북한과 중국의 국경 중 가장 양쪽 땅이 가까이 인접해 있다는 중국 단둥의 일보과. 한 발만 건너면 넘을 수 있는 국경이라는 의미다. 건너편에 보이는 들판이 북한 땅인 압록강 하중도. 2006년 12월 모습.
[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 탐하다 봄의 전령사 매화(1)
코로나19가 더욱 기승을 부리는 가운데 겨울은 그 마지막 꼬리를 감추고 있다. 하루빨리 코로나19의 기세가 푹 꺾여 겨울과 동무해 썩 물러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봄이 되었지만 봄날 같지 않다는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는 말을 하지 않아도 되도록.완연한 봄날은 좀 더 기다려야 하지만, 이때쯤이면 오히려 더 설레는 마음으로 어느 때보다 행복하고 충만한 시간을 누린다. 매화 덕분이다. 필자뿐만 아닐 것이다. 2월로 접어들어 남녘에서부터 매화 개화 소식이 날아들기 시작하면, 매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설렐 수밖에 없다.대구 곳곳에서도 10여 일 전부터 봉오리를 터뜨리기 시작한 매화나무를 만날 수 있었다. 이런 매화나무는 따뜻한 기운에 힘을 받아 보다 일찍 몇 송이 봉오리를 터뜨렸다가 날씨가 추워지면 그 상태로 움츠린다. 따뜻한 날씨를 기다리다 때가 되면 다시 개화를 시작한다. 매화가 본격적으로 피기 전인 이 시기가 매화에 대한 마음이 특히 간절하다. 그래서 이 시기에는 봉오리가 맺힌 매화 가지를 잘라와 화병에 꽂아두고 매일 집안에서 마주하며 즐긴다. 2월에는 해마다 이렇게 꺾어온 매화 가지와 함께한다. 매화 가지를 한 번 꺾어와 꽂아두면 1주일 정도 황홀한 향기와 예쁜 꽃을 마음껏 즐길 수 있다. 매화 향기는 맑고 그윽하다. 밖에서 시간을 보내다 집안에 들어설 때 특히 그 향기를 강하게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늦은 밤이나 이른 아침에 홀로 매화와 함께하면 최고다. 이럴 때는 매화가 그 향기를 일정하게 뿜는 것이 아니라, 한 번씩 강하게 내뿜는 것임을 확실하게 느끼는 각별한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가까운 고향 매화밭에서 두어 가지를 꺾어와 곁에 두고 이렇게 달콤한 시간을 누리다 보면 어느새 야외의 매화들이 본격적으로 피어나 매화 천지가 된다. 그러면 보고 싶은 매화를 찾아 나선다.요즘은 어디나 주변에서 쉽게 매화를 즐길 수 있다. 대구에서는 중심가에 있는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에 가면 청매, 홍매, 백매, 그리고 가지를 수양버들처럼 늘어뜨린 수양매 등 다양한 매화들이 그 자태를 다투며 피어난다. 이곳에도 따뜻한 날씨가 며칠 계속되던 열흘 전부터 청매와 홍매 몇 그루가 꽃잎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10여 년 전 친구들과 매화가 한창 피어나던 이곳에서 '매화음(梅花飮)'을 즐겼던 기억이 새롭다.해마다 이른 봄이면 탐매객들의 발길을 끌어들이는 대표적 '고매(古梅)'가 전국 곳곳에 있다. 매화 애호가들의 많은 사랑을 받는 고매는 특히 산사에 많다. 구례 화엄사 각황전 앞 홍매, 승주 선암사 고매들(선암매), 양산 통도사 홍매(자장매), 장성 백양사 홍매(고불매) 등이 대표적이다.다른 많은 매화 애호가처럼 화엄사 각황전 앞 홍매를 그중에서 각별히 좋아한다. 진하면서도 맑은 붉은색 꽃을 피우는 이 홍매는 꽃도 홑꽃으로 아름답고 나무 모양도 준수하다. 그리고 주변의 오래된 한옥인 각황전이나 영산전 등과 어우러져 특별한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찾아 호젓하게 즐기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는 점이 아쉽기는 하다. 이 홍매는 현재의 각황전을 중건할 때(1702년) 심은 것으로, 수령은 300년이 훨씬 넘는다.화엄사 부속 암자인 길상암 앞에는 더 오래된 매화나무가 있다. 450년 정도 됐다는 이 백매는 울창한 숲속에 자라서인지, 소박하고 자연스러우며 꽃도 작고 드문드문 피운다. 그리고 위를 쳐다보지 않으면 매화나무인지도 모를 자태로 주변의 숲과 어우러져 각별한 분위기와 맛을 느낄 수 있다. 천연기념물 제485호로 지정됐으며, '화엄매'로 불린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 탐하다 봄의 전령사 매화(2)에서 계속됩니다.전남 승주 선암사의 선암매. 600년이 넘은 이 고매(천연기념물 제488호)는 보기 드물게 큰 고목인 데다 꽃이 작고 성글게 피어 더욱 고고한 맛을 선사한다.선암사 야매(夜梅).
[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 탐하다 봄의 전령사 매화 (2)…300년 사찰 곁에서 정갈하고 기품있는 자태…맑고 붉은빛에 한참을 취하다
선암사에는 오래된 고매들이 특히 많다. 원통전 앞 백매(천연기념물 제488호)는 600년 정도 된 고매로, 지금도 온전한 형태의 나무 전체가 건강한 모습을 자랑하고 있다. 보기 드물게 큰 이 매화나무는 꽃이 매우 성글게 피어 더욱 고귀하게 보인다. 그 옆 무우전 돌담을 따라 수백 년 된 홍매와 백매 20여 그루가 봄만 되면 진하고 맑은 향기를 뿜어낸다. 선암사의 한 스님은 선암사 매화나무들이 한창 꽃을 피우면 멀리 떨어진 선암사 입구에만 들어서도 그 향기를 맡을 수 있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고불매(古佛梅)'라 불리는 백양사 홍매는 수령이 350년 정도로 추정된다. 담홍색 꽃을 피운다. 1863년에 절을 현재의 위치로 옮겨 지을 때, 100m쯤 떨어진 옛 백양사 터에 있던 홍매와 백매 한 그루씩 같이 옮겨 심었다. 백매는 죽어 버리고 지금의 홍매만 살아남았다고 한다. 1947년에 백양사 고불총림(古佛叢林)을 결성하면서 '고불매'라는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통도사의 '자장매(慈藏梅)'는 수령 350년이 넘은 홍매다. 1650년을 전후한 시기에 통도사 스님들이 사찰을 창건한 자장율사의 큰 뜻을 기리기 위해 심은 나무라고 전한다. 이 자장매는 다른 산사의 고매보다 일찍 꽃을 피우기 때문에 매화 애호가들의 발길을 다른 매화보다 먼저 끌어들이는 주인공이 되고 있다. 통도사에도 자장매뿐만 아니라 매화나무가 곳곳에 있다.처음 피는 매화 찾아 나서는 '탐매'선암사 입구부터 향기뿜는 600년 백매백양사 '古佛梅'라 불리는 350년 홍매화엄사 검은빛 돌 정도로 붉은 흑매선비들의 최고급 취미 활동 탐매행이른봄 홀로 꽃 피우며 그윽한 향기가난한 김홍도 거금 들여 매화 구입퇴계 이황, 107수 달하는 매화시 남겨운명 전에 "매화분에 물 주라" 당부◆화엄사 탐매의 즐거움올해는 어느 고매를 찾아볼지 모르겠지만, 그동안 가장 많이 찾았던 고매는 화엄사 홍매와 선암사 매화다. 몇 해 전 화엄사 홍매를 찾았던 때의 감흥을 떠올려본다.화엄사 각황전 옆 홍매는 홍매화이지만 꽃의 빛깔이 검은빛이 돌 정도로 붉어 '흑매'라는 이름도 붙었다. 제때 맞춰 가서 그 자태와 향기를 온전히 만끽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매화였다.매화와 산수유 꽃만 보이는 이른 봄날, 화엄사를 찾았다. 화엄사에는 매화나무가 곳곳에 있다. 각황전 홍매에게 가기 전, 그 아래 청풍당(淸風堂) 담장 앞 홍매가 먼저 반갑게 맞았다. 한창 꽃을 피우고 있는 홍매는 맑고 청초한 연분홍빛이었다. 담장 밖 화단에 자연스럽게 자란 고목 매화나무에 꽃을 피운 모습이라, 소박하면서도 친근한 맛과 멋이 좋았다.각황전 홍매를 빨리 보고 싶은 마음에 발길을 돌려 각황전으로 향하는데, 맞은편에 백매화가 눈에 들어왔다. 만월당(滿月堂) 앞마당 한가운데 홀로 서 있는 매화에게 다가갔다. 나무 모양이 아름답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지만, 향기는 최고였다. 백매도 꽃이 한창이었다. 향기가 너무 좋아 한참 동안 향기를 즐기며, 한낮이었지만 보름달 뜬 밤 만월당 마루에 앉아 백매와 함께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각황전으로 다시 향했다. 보제루를 돌아 대웅전 앞마당에 올라서자, 멀리 각황전 홍매가 눈에 들어왔다. 300년이 넘은, 우리나라 최대·최고(最古) 사찰 목조 전각인 각황전 옆에 붉은 꽃을 피우고 있는 홍매의 모습을 멀리서 보니 연꽃봉오리가 연상되기도 했다. 각황전 앞 계단을 올라 홍매를 마주했다.각황전과 영산전 사이에 서 있는 이 홍매는 매화나무로서는 보기 드물게 아름다운 자태의 고목이다. 특히 꽃의 빛깔이 압권이었다. 꽃이 핏빛의 붉은 색이지만, 탁하지 않고 맑은 빛이었다. 이처럼 맑게 붉은 색의 홍매는 본 적이 없다. 거기다가 꽃잎도 다섯 개의 홑꽃이었다. 작으면서도 정갈하고 기품 있는 매화였다. 요즘 주위에서 많이 보는, 꽃잎이 많고 빛깔도 탁한 홍매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리고 단청 없는 목조건물인 각황전과도 너무나 잘 어울렸다. 나무 모양이나 생태도 다른 매화와 달랐다. 나뭇가지는 부드럽고 적당히 늘어져 매우 아름다웠다.매화를 보고 또 봤다. 각황전을 배경으로 해서 보고 뒷산의 동백숲에 겹쳐 보기도 했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보기도 하며 마음껏 감상했다. 다행히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아 탐매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었다. 만개할 때는 더 좋을 것 같아 약간의 아쉬움이 있었지만, 희열 넘치는 탐매의 시간을 가졌다.◆옛사람들의 매화 사랑가장 먼저 봄을 알리는 매화를 빨리 보고 싶은 마음은 옛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요즘 사람보다 더했던 모양이다. 특히 선비들 중에는 가장 일찍 피는 매화를 찾아 벅찬 감흥을 맛보려고 눈길을 헤치며 나서는 이들이 많았다. 이처럼 처음 피기 시작하는 매화를 찾아 나서는 것을 '탐매'라 했다. 매화가 본격적으로 피는 때 매화의 명소를 찾아 즐기는 것은 관매(觀梅)·상매(賞梅)라 했다. 탐매행은 선비들의 최고급 취미활동이었다.매화는 이른 봄 모든 초목이 움츠리고 있을 때 홀로 아름다운 꽃을 피워 맑고 그윽한 향기를 퍼뜨린다. 이런 매화의 성품은 지조와 절개, 맑음 등 군자가 추구하는 덕목과 상통하는 것이어서 선비들은 누구나 매화를 특히 좋아하고 그 성품을 닮고자 했다.매화를 지극히 사랑해 호까지 매월당(梅月堂)이라 지은 김시습은 이른 봄이면 언제나 매화를 찾아 산속을 헤맸다 한다. 그가 남긴, 탐매를 주제로 한 한시 중 한 수다.'크고 작은 가지마다 휘도록 눈이 쌓였건만(大枝小枝雪千堆)/ 따뜻함을 알아차려 차례대로 피어나네(溫暖應知次第開)/ 옥골의 곧은 혼은 비록 말이 없어도(玉骨貞魂雖不語)/ 남쪽 가지 봄뜻 따라 먼저 꽃망울을 틔우네(南條春意取先胚).'◆김홍도와 이황의 일화'단원 김홍도는 외모가 수려하고 풍채가 좋았으며, 또한 도량이 넓고 성격이 활달했다. 그는 술을 매우 좋아하였으며, 성격이 부드러운 가운데 소탈하여 사람들은 그를 신선 같은 인물이라 불렀다. 김홍도는 살림이 늘 가난해서 아침저녁으로 끼니 걱정을 하는 때가 많았다. 어느 날 좋은 매화 한 그루를 보고, 그것을 사고 싶어 하는 마음이 간절했지만 돈이 없어 살 수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때마침 그의 그림을 원하는 사람이 찾아와 그림값으로 3천 냥을 주고 갔다. 단원은 그중 2천 냥으로 매화를 사고 8백 냥으로 술 여러 말을 사다가 친구들을 불러 매화를 감상하며 술을 마시고 시를 읊었다. 그 술자리를 '매화음(梅花飮)'이라 했다. 그리고 남은 돈 200냥으로 쌀과 나무를 집에 들였으나 하루 지낼 것밖에 안 되었다.'문인화가인 우봉(又峯) 조희룡(1797~1859)이 남긴 '호산외사(壺山外史)' 등에 나오는 내용이다. 단원의 매화 사랑을 알 만한 이야기다. '매화서옥도(梅花書屋圖)' '홍매도' 등 매화 그림을 즐겨 그린 조희룡도 지독한 매화 애호가였다. 그는 이런 글을 남겼다.'나는 매화에 대한 편벽(偏僻)이 있다. 스스로 큰 매화 그림 병풍(梅花大屛)을 그려 침실에 두르고, 매화를 읊은 시가 새겨져 있는 벼루(梅花詩境硯)를 쓰고, 먹은 매화서옥장연(梅花書屋藏烟)을 쓴다. 매화를 읊은 시 100수를 짓고 내가 거처하는 곳에 매화백영루(梅花百詠樓)라는 편액을 단 것은 매화를 사랑하는 내 뜻에 마땅한 일이지 갑자기 이룬 것이 아니다. 시를 읊다가 목이 마르면 매화편차(梅花片茶)를 달여 마셨다.'퇴계 이황의 매화 사랑 또한 유명하다. 107수에 달하는 매화시를 지은 이황은 운명하기 몇 시간 전 시중을 드는 사람에게 "매화분에 물을 주도록 해라"고 했다. 음력 12월8일 오후 6시경에 별세했는데, 당시 그의 방 윗목에는 그가 애완하던 매화분이 놓여 있었고, 매화분에는 몇 개의 꽃망울이 금방 향기를 터뜨릴 듯이 부풀어 있었다.'내 평생 즐겨 하는 것이 많으나 매화를 지독하게 좋아한다(我生多癖酷好梅)'고 한 이황은 설사를 만나 방에 냄새가 나게 되자 "매형(梅兄)에게 미안하다"면서 매화 화분을 다른 곳으로 옮기게 한 뒤, 환기를 시키고 화분을 다시 정갈하게 씻도록 하기도 했다. 이황은 매화가 한창이면 밖에 나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매화를 완상했다. 그의 시 '도산월야영매(陶山月夜詠梅)'는 이런 자신의 모습을 읊고 있다.'나막신 신고 뜰을 거니노라니 달이 사람을 쫓아오네/ 매화꽃 언저리를 몇 번이나 돌았던고/ 밤 깊도록 오래 앉아 일어나기를 잊었더니/ 옷 가득 향기 스미고 달그림자 몸에 닿네.' 매화는 단순히 봄소식을 일찍 전해주는 향기로운 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수행자에게는 득도의 기연(奇緣)을 선사하는 꽃이기도 했다. 이것을 알게 하는 대표적인 시로 무명의 비구니가 지었다는 오도송 '심춘(尋春)'이라는 시가 있다. '하루 종일 봄을 찾아다녔지만 봄은 보지 못하고/ 짚신 발로 온 산을 헤매며 구름만 밟고 다녔네/ 돌아와 우연히 매화나무 밑을 지나는데/ 봄은 가지 끝에 이미 한창이더라.'매화를 소재로 한 선시 하나를 더 소개한다. 고려 후기 스님인 진각 혜심이 편찬한 '선문염송(禪門拈頌)'에 나오는 시다. 팔공산 파계사 성전암 주련 글귀이기도 하다.'서리 바람 땅을 휩싸며 마른 풀뿌리 쓸지만/ 봄이 벌써 온 걸 그 누가 알리요/ 고갯마루 매화만이 그 소식 알리려고/ 가지 하나 홀로 눈 속에서 피었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구례 화엄사의 각황전 옆 홍매(2017년 3월 31일). 지금의 각황전 건립 때(1702) 심은 홍매로 매화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는 대표적 고매다.화가 차규선 작 '매화초옥도'. 매화를 사랑하는 작가가 매화를 좋아하는 이에게 그려준 작품으로, 조선때 화가인 고람 전기의 유명한 작품 '매화초옥도'를 모티브로 그렸다.화엄사 암자인 연기암 마당에 있는 백매.(2019년 3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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