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윤 칼럼] 盜聽(도청)
모스크바 주재 미 대사관 신축 공사는 2005년 완공되기까지 무려 20여 년 걸렸다. 1979년 시작된 공사가 85년 돌연 중단됐다. 도청 장치 때문이었다. 공사 과정에 기상천외한 도청 장치가 끊임없이 발견됐다. 미국은 보통의 엑스레이로는 탐지 불가능한 도청 장치, 안테나 역할을 하는 철근, 100년 이상 지속하는 첨단전력원 같은 것이 건물 곳곳에 가득 찬 사실을 확인하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결국 건물을 부수고 모든 자재를 미국에서 직접 가져와 5년 만에 다시 시공했다. 물론 100% 미국 사람 손으로…. IT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기 전인 30~40년 전의 일이다. 지금의 도청 기술은? 뭘 상상하든 상상 이상의 단계로 진입했을 터이다.경고가 있었다. 지난해 5월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여야 의원 공히 자재가 널브러져 어수선한 국방부 대통령 집무실 공사 현장을 지적하며 "내가 만약 외국의 정보기관원이면 저기다가 도청 장치를 설치했을 것"이라고 했다. 당시 "저기에 도청 장치를 설치하는 순간 모든 정보는 (외국)정보기관의 손바닥 안에 있는 것"이란 경고가 있었지만, 주목받지 못했다. 2013년 에드워드 스노든의 폭로로 드러난 미 NSA의 주미 한국대사관 도청 의혹 후 10년 만에 또 도청 의혹 사태가 불거졌다. 이번엔 대통령실발(發)이다.외교적 해법이 어떻게 진행되든, 명백한 주권 침해이자 대형 보안사고다. 악의 없는 도청?(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 '꾸밈말'과 '꾸밈 받는 말' 사이의 연관성이 전혀 없는 듣보잡 레토릭으로 국민의 지적 수준을 희롱해선 안 된다. 미국의 도·감청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 않은가. 우리만의 일도 아니다. 사실 미국만 했을까. 총 칼만 들지 않았을 뿐 소리 없는 전쟁, 첩보전은 상상 초월의 기술로 땅과 바다, 하늘과 우주를 휘젓고 있다. 영일이 없는 '제5의 전장'이다. '미국이 (도·감청을)하겠다고 마음만 먹으면 못 할 것이 없다'는 건 보안전문가들의 상식이다. 한국만 예외일 리 없다. 핵 도발을 일삼는 북한과 맞닿아 있고, 냉전의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는 한국이야말로 첩보전의 최전선이지 않겠는가.문제는 '들켰다'라는 데 있다. 들키면 문제가 되고 안 들키면 문제가 안 된다.(홍준표 대구시장) 도·감청이 관행이라 할지라도 드러난 것에 대해서는 적어도 불쾌하다는 의사표현은 확실히 해야 한다는 게 다수 국민의 감정이다. 우리나라가 몇 마디 한다고 하던 일을 멈추진 않을 터이지만.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는 우리 전문가들의 고백은 탄식에 가깝다. '철통 보안'을 되뇌는 대통령실의 호언장담보다 "도청당한 줄도 몰랐을 거다"라는 '프로'들의 냉정한 분석이 더 설득력 있다.국민 대부분 난처한 이 상황을 백번 이해하지만, 작금 정부의 지나친 저자세에는 불편함을 느낀다. 느닷없는 김성환(전 국가안보실장)·이문희(전 국가안보실 외교비서관)의 경질, 뜬금없는 블랙핑크·레이디가가 운운에 의구심이 일었는데, 이제야 퍼즐이 조금 풀린다. 이 역시 불편한 진실이다. 사후 대응이 중요하다. 대통령실이 다루는 정보의 유출은 치명적 결과로 이어진다. 비단 외교·안보 사안만이 아니다. 해외 수주와 첨단 기술을 놓고 국가 간 피 마르는 경쟁을 벌이는 데는 우방도 없다. 흥분하고 과잉 대응하는 것은 유익하지 않지만, 대통령실의 보안 체계에 흠결이 없는지는 반드시 들여다봐야 한다.논설위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