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사 김룡사 학승 주도 만세운동 조명 '호국불교' 뜻 기려
'역사는 기록하지 않으면 기억되지 않고 기억되지 못하면 후대에 잊혀 사실을 알릴 수도,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을 수도 없다.'
그동안 회고와 일부 논문으로만 전해지던 경북 지역 사찰의 독립운동을 세상에 알리기 위한 첫 번째 학술대회가 지난 10일 경북 구미시 해평면 도리사 설선당에서 열렸다.
제79주년 광복절을 앞두고 영남일보와 신라불교 발상지인 도리사가 공동 주최·주관한 학술대회는 '경북 중·서부 사찰의 3·1 운동'을 재조명했다. 특히 주제발표에 이어 이에 대한 논평도 함께 진행돼 역사적 사실 알리기에 주력했다.
1919년 3·1운동 당시 불교계 역시 전국 각지 승려들이 만세운동에 참여했지만, 지방 사찰의 만세운동 주역에 대한 발표는 거의 없는 상황이다.
학술대회에서는 도리사 출신으로 해인사 독립 만세 운동 중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다 일본 경찰에 붙잡혀 옥살이했고 이후 만주로 건너가 대한독립단으로 활동한 김경환 스님을 중심으로 선산 김씨로 신흥무관학교에 입교해 청산리 전투에 참여한 김봉률 스님과 문경 김룡사 독립 만세 운동 결행을 알렸다.
묘인 도리사 주지 스님은 "후손들이 그동안 독립운동에 헌신한 선배들을 잊고 있었다"며 "이러한 스님들의 정신을 계승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이승익 영남일보 사장은 "대구·경북이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본산이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사찰의 독립운동은 우리가 몰랐거나 알고도 조명하지 못했던 부분"이라며 "학술대회를 계기로 스님들의 독립운동 노력이 재조명돼 호국불교 전통을 이어가는 경북 지역 여러 사찰에 큰 힘이 되었으면 한다"고 했다.
도리사 회주 법등 스님은 "학술대회가 우리에게 많은 숙제와 의미를 전달한 만큼 앞으로 저부터 더 노력하겠으며 많은 관심을 가져준 모든 분들에게 감사하다"고 밝혔다.◆일제강점기 도리사 학승 김경환의 독립운동-김일수 경운대 교수
도리사 승려 김경환은 1894년 5월 2일 경북 상주군에서 태어나 10대에 선산의 도리사로 출가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김경환은 승려 생활을 위해 본사(당시)인 해인사가 운영하던 불교 중등 과정 지방학림에 들어갔다.
김경환은 함께 공부하던 백성원·홍태현 등과 함께 1919년 3월 31일 저녁 연극공연을 관람하고 돌아오는 도중 군중들을 선동해 만세 독립운동을 전개할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이보다 앞서 오전 11시와 오후 1시, 200여 명의 학생과 군중들이 해인사 홍하문 밖과 해인사 주재소에서 만세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김경환과 승려들은 저녁 11시 무렵 해인사 앞 도로에서 백 수십 명의 군중과 함께 재차 조선독립 만세를 외치며 만세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을 선고받은 김경환은 복역을 마친 후 한족회의 독립운동 자금 모금 운동을 벌이기로 하고 경북도 사찰을 대상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했다. 이로 인해 종로경찰서에 체포돼 징역 1년 6개월의 형을 선고받았다. 학술대회가 김경환 스님의 독립운동가로의 명예를 회복하고 서훈을 신청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논평-김경집 동국대 불교학술원 연구 초빙교수승려 김경환에 대해 도리사 출신으로 보고 있는데 이에 대한 확실한 자료 제시가 필요하다. 김경환이 해인사 지방학림에서 수학한 일 역시 정확한 자료제시가 없다.◆일제강점기 김룡사 지방학림의 3·1운동-권대웅 전 대경대 교수김룡사는 문경지역 전통사찰로 1919년 4월 13일 김룡사 부설 지방학림 학생 18명은 수업을 마친 후, 태극기 4매를 몰래 감추고 헌병 경찰 주재소가 있는 대하리에 가서 만세를 부르기로 논의했다. 이들이 이곡리 석문 안에 다다랐을 때, 김룡사의 주지인 혜옹 스님이 나타나 이를 저지해 학생들은 결국 도중에 돌아왔다. 다음 날 주동자 18명이 일본 헌병에 체포돼 김룡사 학생들의 만세운동은 좌절되고 말았다.
만세운동 계획은 비록 좌절됐지만, 학생들이 집단으로 거사를 계획하여 실행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으며 독자적으로 만세 시위를 계획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논평-한상길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지금까지 불교계가 주동한 지방 사찰의 만세운동은 도리사를 비롯해 김룡사, 범어사, 해인사, 봉선사, 신륵사, 통도사, 표충사, 동화사, 청암사, 대흥사, 화엄사, 법주사, 석왕사 등 14건으로 파악되며 이 중 범어사와 동화사, 통도사, 표충사, 해인사, 김룡사 등 6곳 사례만이 연구됐다.김룡사는 의병투쟁의 거점으로서 일제에 의해 식량과 재물이 압수되는 고난을 여러 차례 겪었다. 이러한 김룡사의 민족의식은 근대교육을 시행하는 지방학림과 보통 학교의 설립으로 이어져 새로운 학문과 사상에 눈뜬 청년들은 독립의 의지를 결집해 만세운동을 결행했다.◆김봉률의 삶과 독립운동-김광식 동국대 특임교수1897년 6월 23일, 경남 거창군에서 태어난 김봉률은 해인사 보통 학교를 졸업한 후 해인사 지방학림에 입학했다. 그는 지방학림의 리더 혹은 독립정신이 투철한 대상으로 이해된다.
1919년 3월 7일 해인사 30여 명의 학인은 해인사뿐만 아니라 경상남·북도와 그 이외의 지방에서 만세운동을 추진하기로 했다. 이처럼 광범위한 지역을 대상으로 만세운동을 추진한 것은 다른 사찰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다음 날 김봉률은 통도사, 범어사 등의 부산, 김해 방면에서 만세운동을 추진했다.
이후 만주로 망명한 김봉률은 1920년 1월 만주 신흥무관학교에 입교했다. 그와 동행한 박달준 회고에 따르면 박달준은 1920년 3월 이후 교관을 거쳐, 청산리 전투에 투입됐다. 이는 당시 함께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한 박영희의 회고와 유사하다. 따라서 김봉률도 청산리 전투에 투입된 것으로 파악된다. 이후 독립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하다 일제에 체포, 징역 1년 형을 받은 김봉률은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됐다.
1931년 10월부터 1937년 6월까지 현 구미시 무을면에 있는 수다사 주지에 이어 1945년 해방까지 직지사 주지로 근무했다. 그의 비석이 직지사에 있다.
◆논평-박진관 영남일보 중부본부장불교계의 독립운동에 관한 연구가 미진한 가운데 김봉률 스님 등 해인사 학승과 보통 학교 학인들의 독립운동에 관한 연구가 큰 진전을 이루게 된 점은 대단한 의의가 있다고 본다.
이번 학술대회를 계기로 전국적으로 불교계의 독립운동에 관한 연구 분위기가 진작되고 활성화될 것을 확신한다.박용기기자 ygpark@yeongnam.com영남일보와 대한불교조계종 도리사가 공동주최한 '경상북도 사찰의 3·1운동 학술대회'가 10일 경북 구미 도리사 설선당에서 열렸다. 권대웅 전 대경대 교수가 '일제강점기 김룡사 지방학림의 3·1운동'을 주제로 발표하고 있다.'경상북도 사찰의 3·1운동 학술대회'에서 김광식 동국대 특임교수가 '김봉률의 삶과 독립운동'을 주제로 발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