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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춘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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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生劇場 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음유시인 이무하 2…전인권이 상경하던 날 부른 노래 입소문…하덕규 찾아와 첫 앨범 탄생
그는 6·25전쟁이 끝난 직후인 1956년 남구 대명동에서 태어났다. 명덕국민학교, 대구중, 대건고를 나왔다. 시장 경기는 잘 굴러갔지만 청년들의 '영혼 경기'는 꽝꽝 얼어붙어 있었다. 가장 퇴폐적이고 저항적이고 낭만적이고 초월적인 흐름이 동시다발적으로 대학가를 관통한다. 정의를 가장한 회색인들이 득세하던 시절이었다. 그가 설 곳은 그 어느 곳도 아닌 자신의 깊은 내면의 광야밖에 없었던 것 같다. 극단적 우울과 염세, 그리고 인간을 소외시키는 자본주의의 굴레에서 빠져나오고 싶었다. 그 유일한 돌파구이자 위로는 오로지 술과 노래였다.70년대 유신헌법이 조스의 아가리처럼 청년 정신을 난자할 때, 그는 필자의 관찰자적 시점에서 볼 때 김성동의 소설 '만다라', 정태춘의 '시인의 마을', 조동진의 '겨울비', 박상륭의 소설, 헤르만 헤세의 '유리알 유희',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처럼 살고 싶었는지모른다.◆그의 도반들1980년 해병대 제대 후 사회 부적응자였던 자식의 한심한 모습을 보다 못한 부친이 그를 직업전선으로 강제로 밀어 넣으려 했다. 그가 선택한 가장 유효한 도피처는 대학이었다. 그는 시간을 벌기(위기 탈출) 위해 불과 3개월을 앞두고 경북대 음악학과(1회)에 지원, 기적적으로 입학한다. 그에게 석 달 동안 피아노와 화성악을 레슨해 주었던 이는 전인권의 사촌 형인 이철웅 교수(서울예대)이다.어쩌다 들어선 대학시절 학교 북문에 '마루'(누구나 와서 쉬어가는)라는 이름의 카페를 오픈했다. 그 반지하 공간은 누구든 자유롭게 와서 '세기말 앓이'를 공유했다. 조기현 시인을 비롯한 경북대 복현 문우회를 주축으로 대구의 일단의 시와 그림 동인 모임과 초 소극장, 운동권 학생들의 스터디 장소가 되기도 했다. 당시 안기부에서 내사가 들어와 학교 측에서 폐쇄 권고가 있었으나 불응하자 건물주를 압박한 끝에 2년여 만에 쫓겨나게 된다. 아마도 당국에서 재학생들보다 일곱 살이 많아 그를 그 그룹의 보스라 여겼던 모양. 기실 그에게 대학시절은 하나의 일탈(?)이자 별책 부록 같은 무엇이었는지 모른다. 그의 인생을 관통하는 통렬한 벗이 몇 있다. 첫 손에 꼽히는 사내가 바로 지금은 고인이 된 '천하의 문무상'이다. 워낙 기가 세고 확고한 자기 메시지를 갖고 있어 누군가 '천하'란 수식어를 붙였다고 한다. 당시 대구 포크의 아이콘이자 히피답게 송죽극장 뒷골목의 한 여관에 장기투숙하고 있었다. 그의 음색은 정말 특별했다. 무어라 규정할 수 없는 굳이 말하자면 밥 딜런과 조 카커의 음색을 섞어놓은 듯한, 근원적 감성 아니 존재를 뒤흔드는 듯한, 아쉽게도 지금 그의 목소리가 담긴 음반을 찾을 수가 없다. 그렇게 그는 전설로 남았다. 당시 코리아음악감상실에서의 그의 노래와의 첫 조우는 사람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압도된 설명할 수 없는 강렬한 울림이었다고 절친 이무하는 회고한다. 이후 한 지인의 소개로 문무상이 묵고 있던 여관방에서 자신(무하)의 노래를 그(무상)에게 들려 주었을 때 매일 소주를 대접할 테니 놀러 오라는 그의 말대로 둘은 거의 붙어 다니다시피 했고 술이 고프면 만경관 뒤에 있었던 카페 '처용'에서 대구의 히피들과 노상 어울렸고 문무상은 군 제대 후 그의 음악의 열렬한 마니아였던 한 여인과 결혼하고 삼덕성당 옆 적산가옥을 리모델링해 오픈한 레스토랑 '엑스트라'(1982~86년)에 닻을 내렸다. 엑스트라는 당시 처용, 올림프스 등과 함께 대구 히피들의 성지였다. 훗날 들국화 대구 공연 때도 뒤풀이 장소는 언제나 엑스트라였다. 이때 함춘호, 하덕규 등도 함께했다.이무하가 작사·작곡한 김광석의 '끊어진 길'높푸른 하늘 희고운 구름먼 산허리 휘돌아 흐르는 강물아무 말 없어도 이젠 알 수 있지저 부는 바람이 어디서 오는지그 길 끊어진 너머로손짓하며 부르네 음 음이 아름다운 세상 참 주인 된 삶을이제 우리 모두 손잡고 살아가야 해(하략)◆정태춘·조동진·김민기와의 인연1975년 문무상이 코리아에서 노래할 때 그의 소개로 함께 노래했던 전인권과 만나게 된다. 전인권이 대구에 머문 시간은 도합 1년6개월 남짓. 그가 상경하기 전날 밤 문무상의 집 옥상에서 통기타를 치며 석별의 정을 나누던 중 '두 무(무상·무하)'의 노래를 카세트 테이프로 녹음, '참새를 태운 잠수함'이라는 노래 모임에서 가요평론가 이백천, 작곡가 이주원, 가수 강인원에게 들려주었다고 한다. 그 후 이주원과 강인원이 처용으로 찾아오기도 했다. 수년 후 하덕규는 엑스트라로 찾아와 만남이 이루어졌다.다음에 만난 인물은 우리 시대 대표적 포크 뮤지션 정태춘이다. 1977년 즈음 군(해병) 휴가 중에 한 후배가 찾아와 도넛 앨범에 수록된 두 곡의 노래를 들려 주었는데 김민기, 문무상 이후로 또 다른 형태의 큰 울림이었다. 동시대 한국적 시대 정신과 정서를 담은 토속적 보이스였다. 이후 다음 휴가 때 그 후배의 소개로 (가끔 무대에 서곤 했던 )무아음악감상실로 정태춘이 찾아와 첫 만남이 있었고 역시 가깝게 지내기 시작하면서 지금은 40년 막역지우이다.매해 여름 휴가를 아내 박은옥과 외 딸 새난슬과 함께했고 자주 잠실에 있던 그의 집에서 어느 땐 보름씩 머물기도 했다. 그와 정태춘은 서로 사상적 음악적 영향을 주고받으며 두 사람 모두 어려웠던 시절을 지나왔고 1980년 중반 전교조 지원 공연 '누렁 송아지'에 참여하고 그의 앨범 '무진 새노래'에서 '고향집 가세'란 곡에 피처링하기도 했다. 1987년 이무하는 기독신앙으로, 정태춘은 운동권의 핵심으로 각자의 길을 가다가 한 사람은 주류 제도권 교회에 실망하고 초대교회로의 회복과 또 한 사람은 민주화 이후 산업자본주의의 모순과 폐해에 대한 통렬한 문제 제기와 함께 40주년 기념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세 번째 인물은 지금은 고인이 된 한국 포크 음악의 원조이자 큰 산 조동진이다. 들국화 대구 공연 때 처음 만났고 정태춘의 주선으로 그의 첫 앨범 '고향'이 한국음반을 통해 제작됐으나 조동진이 그때 하나뮤직을 만들면서 그와 함께할 것을 권하여 하나음악 로고로 재인쇄, 세상에 나오게 된다.그 음반이 나온 날 하나뮤직 식구들과 함께 사무실 겸 스튜디오에서 합평회를 열었다. 그때 그의 생에 가장 극적인 만남의 하나로 스튜디오에서는 한국 포크음악의 심장이자 상징과도 같은 김민기가 기타리스트 이병우와 함께 1993년 출시된 역사적인 김민기 전집을 만들고 있었다. 그날 김민기도 이무하의 음반에 수록된 노래들을 모두 듣고는 '내 혈액형에 맞는 음악이네. 음반 하나 주시오. 조만간 연락할 일이 있을거요'라고 후배의 음악을 지지해 주었고 며칠 후 학전소극장에서 단독 콘서트를 하자고 제의를 해왔다. 만년 지하에서 암약하다 처음 온 그라운드를 밟은 그는 심히 부담이 된 나머지 1집 앨범의 프로듀서였던 하덕규와 상의 끝에 하덕규, 신형원, CCM 가수 송정미 등 4명이 함께 하게 된다. 이후 김민기는 그에게 자신이 제작 연출하는 뮤지컬의 음악감독을 제안했으나 당시는 신앙에 과몰입해 있던 때라 정중히 사양했다는….그 외 다른 뮤지션들과의 인연은 그가 써 두었던 노래 중 장필순과 먼저 세상을 떠난 김광석이 각각 '길'과 '끊어진 길'을 그들의 앨범에 수록한 바 있다.음악은 돌파구이자 위로 내면의 광야에 빠져있던 청년기 대구 히피 성지서 문무상과 노래 전인권이 녹음해 가서 유명해져 제대 후 부친이 취직시키려 하자 전인권 사촌형에게 화성악 배워 경북대 음악학과 석달만에 입학 포크 거장과의 인연 1집 두고 음반사 2곳 '줄다리기' 조동진 요청에 하나음악에서 발매 '우상' 김민기, 단독콘서트 제안도 김광석·장필순, 그의 곡 앨범 수록 정태춘과는 40년지기 프로젝트중 한손엔 기타, 다른손엔 성경 기독음악 앨범도 두차례 발매"나는 누구이며 어디로 가는가" 생에 대한 근원적 질문 탐구◆나의 영성투어1987년 뜻하지 않게 기독 신앙을 갖게 되면서 대구 집에서 어렵사리 숨은 신자로 지내다 하덕규의 권유로 1992년 서울에서 첫 음반 '고향'을 낸다. 대상은 이전의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이들을 포함한 세상이다. 주제는 다름 아닌 잃어버린 고향과 어린 시절을 비롯한 지난날에 대한 그리움과 회한 그리고 신앙 안에서의 새로운 세상과의 조우와 돌아가야 할 본향으로서의 새하늘 새땅에 대한 소망을 노래한다.1997년부터 2003년 초반까지 다수의 기독음악 사역자들과 '부흥'이라는 이름의 노래를 통한 예배 운동에 함께 해 전국 순회공연과 해외공연에 참여한 바 있다. 더불어 솔로로 1996년, 2007년 두 장의 가스펠 앨범을 내고 2014년 다시 세상을 향한 노래 '그리움'을 노래한다. 이 앨범에는 이른바 CCM(동시대적 기독교음악)계의 조동진이라 불리는 뛰어난 또 한 사람의 뮤지션 최성규가 공동 프로듀서로 참여했다. 주제는 역시 잠시 이 땅에 머무는 나그네로서의 삶과 마침내 돌아가야 할 언젠가 떠나온 그곳에 대한 그리움에 대한 것이다.거듭 말하지만 그의 노래의 본령은 요즈음 찾아보기 힘든 생에 대한 근원적 물음, 나는 누구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탐구이며 누군가 또한 어디선가로부터 떠나온 자로서의 그 무엇에 관한 것이다. 글·사진=이춘호 음식·대중문화 전문가 leekh@yeongnam.com지인들은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내 얼굴에서 '구도', 또 누군 '허무'와 '관조'를 읽고 갔다. 나는 그 어느 것도 아니다. 내가 나를 주장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걸 나는 이제 조금 안다. 내 일거수 일투족을 그 어떤 아득한 자리에서 지켜보고 있을, 그를 감히 '하나님'이라고 말할 자격조차 내게 있을까 싶다. 나는 유교에서 멀어지기 위해 불교로 틈입하려 했다가 결국에는 기독교에 귀의했다. 내 젊음은 종교의 경계를 걷는 나날이었다.이무하가 만든 곡 '끊어진 길'은 분단의 아픔뿐 아니라 하늘(창조주)과 땅(피조물)의 단절, 사람과 사람·사람과 자연의 깨어진 관계를 말한다.이무하의 1집 '고향'(위)과 4집 '그리움'의 앨범 표지. 1집은 한국음반에서 발매준비를 거의 마친 상태였으나 조동진의 간곡한 요청으로 하나음악에서 내게 됐다.
[人生劇場 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음유시인 이무하 1…무성한 여름, 그 끝엔 生에 대한 답이 있을까
그의 이름에는 '무하(茂夏)'가 얼음처럼 박혀 있다. 무성한 여름. 이무하! 인천이씨 가문에 없는 무국적·무정부주의적 심장을 갖고 태어난 사내. 지인들은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의 얼굴에서 '구도' 혹은 '허무'와 '관조'를 읽고 갔다. 하나 그는 그 어느 쪽도 아닐는지 모른다. 그는 자신이 자기 존재에 대해 주장할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걸 안다. 그는 유교와 불교적 전통이 매우 강한 집안에서 장성했으며 어둡고 암울했던 청년 시절 허무의 강을 건너 불가에 입문 직전 그의 의지와 무관한 어떤 계기(불가항력적인)로 마침내 불제자 대신 예수의 제자가 된다.존재 근원 찾으려 명상·철학 몰입허무주의에 빠져들었던 청년시절 출가하려다 우연히 CCM 가수로…내 음악의 근원은 그리움과 求道이전의 그의 젊은 날은 민족·종교·명상·철학 등 다양한 정신 편력과 종교의 경계를 걷는 나날이었다.타협의 여지가 없는 시대와 세상과의 불화가 깊어진 어느 날 해인사 원당암에 주석하고 있던 '혜암' 문하로 출가하기로 결심한다. 군부독재 종식의 서막이랄 수 있는 6·29선언(1987년) 즈음이었다. 가족과 고향 대구의 주변 친구들에게 이별을 고하고 당시 서울에서 활동하던 전인권, 하덕규 등과 작별하고 서울에서의 마지막 밤을 40년 막역지우인 정태춘의 집에서 하루를 묵게 된다. 그 와중에 전혀 만날 계획이나 이유가 없었던 한 친구(당시 그다지 친하지 않았으니 이후 믿음 안에서 가장 절친한 친구 이근수)와의 우연한 전화 통화 끝에 그 친구를 만나게 되고 그와의 만남을 통해 그간 가졌던 생의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가진 한 존재를 만나고 결국 세상에 남아 다시 노래해야 할 이유를 갖게 되었다.그는 말한다. 내 노래의 본령은 돌아가고자 아니 돌아가야만 하는 그 어떤 무엇에 관한 것이며 그에 대한 애틋한 생각과 그 정조를 '그리움'이라 한다면 무릇 모든 예술의 근저에 이 그리움의 정서가 새벽 강 안개처럼 자욱이 깔려 있다. 우리 일상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의 연속이고 그 일상을 구성하는 욕망이란 이름의 해가 떠오르면 이내 사라지고 마는. 우리 모두는 어디론가 또 누군가로부터 떠나온 자들이고 내 노래는 떠나온 자로서의 노래다. 내게 있어 그 귀착지는 궁극적 존재의 시작점이며 거긴 모든 것을 낳고 거두는 하늘 아버지의 품이다.그의 노래의 여정의 시작은 중학교 2학년 무렵 그의 전 존재를 뒤흔들었던 양희은의 '아침이슬'을 통한 김민기와의 조우에서 시작된다. '아침이슬' 가사엔 그의 젊은 날의 아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고 한낮의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일지라', 그 더위는 1970~80년대 대한민국 청년들을 사정없이 뒤흔들어 버린다. 다들 군부독재와 싸우다가 사회인이 됐지만 그는 존재의 근원과 싸움을 벌였다. '몽상가'의 나날….그는 지금까지 생계를 위한 직업을 갖지 않았다. 온전히 예수의 제자의 길을 가기 위해 사도 바울의 독처하는 것이 좋다는 권고를 따라 결혼 또한 포기했다가 마흔일곱에 이르러서야 한 후배의 소개로 한 기독 출판사에서 기고와 편집일을 하고 있던 여성과 늦깎이 결혼을 하고 49세에 외동딸(이한)을 얻는다. 지금 그는 딸이 한동 기독 대안학교에 입학하면서 아내와 함께 2017년부터 포항에 와서 살고 있다. 글·사진=이춘호 음식·대중문화 전문가 leekh@yeongnam.com청년 시절 그의 삶을 지탱해 주었던 무엇은 단연 술과 노래였다. 1975년 김민기 이후 그를 전율시켰던 독특한 창법의 싱어송라이터 문무상, 그와 함께 대구에서 노래했던 전인권·정태춘·조동진·김민기 등과 교유하면서 그만의 뮤직로드를 개척해 왔다. 그동안 1집 고향, 4집 그리움 등 모두 4권의 앨범을 만들었다. 한 손엔 성경, 또 한 손엔 음악을 품고 이 세기말 같은 수상한 시절을 초기교회의 근본적 신앙 정신으로 살아가고 있다.
[위클리포유 커버스토리-이춘호기자의 카페로드] 핫플과 베이커리 카페(3)…한때 말이 뛰놀던 곳…멍 때리며 힐링
카페지앵은 그 희망과 절망 사이에 힐링스러운 다리를 놓는다. 베카 사장이 되려면? 원시인의 수렵 정신만큼이나 치열한 프로 근성이 요구된다. 그런 의뭉스러운 단상을 취재수첩에 적어가면서 서늘한 가을바람이 일렁이는 최정산 정상부에 진을 친 '대새목장'으로 차를 몰았다. ◆스산한 그렇지만 야릇한20일 오전 10시30분. 요즘 달성군 핫플 베카로 알려지기 시작한 '대새목장'(해발 760m) 입구에 도착했다. 입구 정경은 한마디로 스산하지만 무척 야릇하다. '여기 사장, 트렌드를 제대로 읽고 계시네'란 독백이 절로 흘러나왔다. 2018년 봄 최정산 자락에 오픈해 평일에도 줄 서게 할 정도로 대박을 친 인근 핫플 베카인 '오 퐁드 부아'도 조금 긴장할 것도 같다.여긴 말 대신 커피와 빵, 그리고 힐링을 키우는 목장이다. 대새? '대구의 새로운 목장'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음악이 바람보다 먼저 아는 척한다. 에디 히긴스 재즈 트리오 톤의 여리면서도 깊이가 느껴지는 아주 느릿한 피아노 연주가 발목을 슬금슬금 긁고 지나간다. 목장 입구의 표정만으로 봐선 영업을 하는지 쉽게 가늠하기 힘들다. 번듯한 건물이 하나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입구 마굿간 건물은 뻥 뚫린 지붕, 허물어져 앙상해진 벽체를 그대로 방치, 아니 살려뒀다. 내부를 힐끔 들여다보니 전등도 달려 있고, 앉을 수 있는 자리만 깨끗하게 정리해주고 나머지는 손을 안 댔다. 그게 요즘 통하는 감각이다. 여긴 빈티지 중 빈티지 라인을 자랑한다. 벽을 타오르는 한삼 덩굴, 풀 한 포기의 물성도 인테리어 소품이 된다.입구 안내판에 '커피 한 잔이 포함된 입장료가 8천원'이란 문구가 적혀 있다. 그 문구가 없었을 때는 무례한 경우를 많이 당했다. 얌체처럼 무단으로 들어와 놀다 사라진 사람들이 적잖았다.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입장료를 받았다. 짠, 효과가 단번에 나타났다. 역시 값을 치러야 '품격'이 나오는 모양이다.오전 11시 오픈이다. 여긴 최정산 정상부(해발 905m) 바로 아래 평평한 초지 구역. 한여름에도 선선한 가을바람이 인다. 정상부는 군사지역이라서 오랫동안 민간인이 들어갈 수 없었다. 미군 미사일 기지 때문이다. 그게 철수하자 그 언저리에 '포니목장'이 들어선다. 5년쯤 있다가 2017년 산 아래로 내려가 재오픈했다. 현재 30마리 정도의 말을 보유하고 있다. 지금은 경산에서 옮겨 온 통신부대가 근처 정상부로 이전해 와 있다. 하늘 뷰 '대새목장'달성군 최정산 폐허된 목장터앙상한 지붕과 벽 그대로두고목장분위기 살린 빈티지 카페못 둘레 나무그늘따라 테이블하늘 그대로 내려앉는 포토존◆포니목장은 대새목장으로 변하고대관령 양떼목장 같은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그 자리에 2000년 초 오리불고기 식당이 있었다. 그 식당은 이후 가창면 주리산 아래로 내려가 '취경'으로 자릴 잡는다. 오리불고기 카페로 유명해졌다. 정상부에 유명한 포토존이 있다. 외로이 서 있는 버드나무 한 그루다. 운무가 자욱할 때 기막힌 사진을 낚을 수 있어 사진작가들이 좋아들 했다. 목장 시절 그 옆으로 말을 위한 산책 울타리도 쳐져 있었다. 포니목장이 사라진 뒤 황량하게 방치돼 있었다. 정상부로 향하는 길 입구도 막아 놓았다. 목장 폐허 자리를 마케터의 입장에서 유심히 살펴본 우직한 사내가 있었다. 모 지역신문 사진기자 출신인 엄익삼(37). 1년 남짓 신문사 생활을 미련 없이 청산하고 새로운 인생을 빚어냈다. 부모가 운영하던 현풍읍 원교리 포산고 근처 장길산가든 자리를 대뜸 베카로 바꾸자고 부모를 설득했다. 아버지는 속으로 '그건 아니다' 싶었지만 자식 이길 부모가 누가 있겠는가. 아버지는 나름 탄탄한 삶을 살아오셨다. 읍내에서 뉴스타 사진관과 신화 예식장을 운영했고 나중에는 식당까지 차렸다. 그렇게 해서 이 식당은 2017년 현풍에서 가장 이색적인 핫플 베카로 탄생된다. 바로 '161커피스튜디오'다. 일단 식당 앞 광활하게 펼쳐진 논을 주시했다. 이게 물건이 될 것 같았다. 식당 앞 논을 갈아엎어 잔디광장으로 둔갑시켰다. 광장 너머는 축구장 몇 개 넓이의 논이 해변처럼 널려 있다. 멀리 비슬산, 디지스트와 테크노폴리스에 드문드문 지어진 아파트촌도 점점이 보인다. 시야를 가리는 장애물이 전혀 없다. 다들 바다, 산, 강, 계곡 등을 끌고 들어오는데 그는 논을 오브제로 활용해 성공한 것이다. 일부 젊은이들은 논도 잔디광장인 줄 안다. 논 뷰 '161커피스튜디오'현풍읍 식당을 카페로 개조광활한 논을 풍경으로 활용비슬산·아파트촌도 한눈에핑크뮬리 심어 이색 포토존아이들 위한 모래밭도 있어◆가능한 한 손대지 말자평소 사용하던 이런저런 카메라 20여 개를 소품으로 전시했다. 인천·부산 등지를 뒤져 해묵은 산업용품까지 구입해왔다. 미싱 상판도 테이블로 활용했다. 들어갈 땐 1층이지만 테라스에서 보면 2층이다. 커피는 2013년 월드커피로스팅챔피언십 챔피언인 일본 커피광 고토 나오키의 커피를 선택했다. 시그니처 커피로 조금 특별한 '소금커피'를 골랐다. 그리고 라테 거품 표면을 인화지로 생각해 그 위에 분말을 정교하게 분사해 사진 속 이미지를 재현해낸다. 자기 얼굴이 새겨진 라테, 자연 입소문이 날 수밖에 없었다. 다음으로 시도한 건 포토존 강화다.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핑크뮬리 포토존을 만든다. 여기저기도 괜찮다 싶어 핑크뮬리를 벤치마킹해갔다.엄익삼은 프랜차이즈 유전자를 갖고 있다. 전국의 핫플 베카 순례를 하면서 이 업만의 특성을 분석해 나갔다. 그렇게 해서 2호 베카를 준비했다. 대새목장 자리도 평소 눈여겨둔 곳 중 하나다. 최근 경산 영대 캠퍼스 근처에 '월화수(月花水)' 베카도 열었다. 그는 아이들과 함께 하는 키즈 베카를 염두에 뒀다. 아이의 맘이 가는 곳에 부모의 맘이 가고, 그래야만 베카도 롱런할 수 있다고 봤다. 161카페부터 아이와 반려견을 허용한다. 대새목장에서 성공한 키즈존 모래밭도 161광장에 적용해 호평을 받는다.◆거울이 된 대새못대새목장의 기본 콘셉트는 목장 분위기를 살리는 것. 대형 우유 통을 합판을 이용해 직접 만들어 드문드문 설치 했다. 200여m 길이의 대새못은 거울이다. 주변의 나무 그늘에 테이블을 10곳 정도 조성했다. 맑은 날 하늘이 그대로 내려앉는다. 연인은 연인대로 가족은 가족대로 편히 쉴 수 있게 존을 잘 구분했다. 두 동의 마굿간은 모던하다. 항상 재즈뮤직이 곰돌이 인형처럼 손님한테 안긴다. 꼭 논산훈련소 시절 내무반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손님도 보이지 않고 해서 재즈뮤직을 베개 삼아 잠시 눈을 감았다. 실내는 어둑했다. 동굴에 들어온 것 같았다. 16개의 녹색 철제 기둥, 7개의 큰 통유리창을 통해 목장의 전경이 중세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처럼 다가선다. 무채색 공간인데 기분은 너무나 유채색. 대새못 주변에는 수종이 다양하지 못하다. 해발이 높기 때문이다. 태풍이 밀려오면 골바람이 이 언저리를 초토화시켜 버린다. 여러 수종이 죽었다 살았다를 반복했다. 지금 보이는 저 수종들이 이 땅에 적응한 질긴 놈들이다. 대새못 옆 한 나무. 그 그늘이 자못 인상적이다. 그 테이블은 손님들이 가장 혹하는 포토존. 한 팀이 떠나니 다른 손님이 부리나케 달려와 거기에 앉는다. 소곤소곤~ 재잘재잘~. 스트레스가 중화되는 소리로 들렸다. 상단부 테라스 자리에 앉아 커피 홀짝 거리며 그 광경을 소금쟁이 움직임처럼 음미해 본다. 멀리 비슬산 연봉과 라테 거품 같은 구름이 대새못 수면에 양떼처럼 얼비치는 맑고 홀가분한 가을날 오후랄까! 글·사진=이춘호 음식·대중문화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한때 미군 기지가 들어서 일반인이 출입하지 못했던 가창면 최정산 정상부. 부대가 나가자 포니목장이 들어서고 그 목장이 나가자 연이어 베이커리 카페 대새목장이 새로운 쉼터로 다가선다. 대새못 옆 나무그늘 아래 테이블은 멋진 포토존이다.대새? '대구의 새로운 목장'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말 대신 커피와 빵, 힐링을 방목하는 곳이라 여기면 된다.대새목장의 기본 콘셉트는 목장 분위기를 살리는 것. 폭격 맞은 듯한 마굿간을 원형 그대로 활용했다.현대인에게 커피 한 잔과 빵 한 접시는 하나의 경전과 같이 숭고한 기운을 내뿜는다. 현풍읍 포산고 네거리 근처에 있는 '161커피스튜디오' 옥상에서 내려다 보이는 잔디광장, 아이와 깔깔대며 평화롭게 놀고 있는 부모들의 일상이 가을바람 못지않게 싱그럽다. 멀리 대형 축구장 몇 개를 연결해 놓은 듯한 광활한 논이 이 카페의 앞뜰이나 진배없다.
[위클리포유 커버스토리-이춘호기자의 카페로드] 핫플과 베이커리 카페(2)...이미지에 중독된 'SNS 문화', 핫플은 영원히 정복될 수 없다
아이들이 늘 문제였는데 이젠 걱정 안 해도 된다. 수천 평 크기의 전원 베카로 가면 아이들 잠시 방목시켜 놓고 동행한 지인들과 '수다 타임'을 편하게 만끽할 수 있다. 유럽에서나 가능했던 야외에서의 행복한 시간이 대한민국에서도 가능해진 것이다. 전국 237개 시·군·구, 거기에 족히 10여개씩 멋진 베카가 있을 것 같다. 그 수가 3천 개에 육박한다. 이제 베카 세태의 이면 속으로 들어가 보자. 슬픈 풍속도인지는 몰라도 가장이 아버지였던 시대는 이미 저물었다. 반세기 전만 해도 엄존했던 '아버지 밥 한 그릇'이란 문화도 '구습'으로 폐기처분됐다. 식사 때 메뉴 선택권도 아버지에게 없다. '친구 같은 가부장 시대'가 개막된 탓이다. 대신 요즘 아버지는 고교 동창회에 부쩍 목숨을 걸고 등산 아니면 걷기, 자전거 타는 데 공을 들인다. 대신 '엄마의 밥상'은 더욱 화려하게 비상하고 있다. '가사(家事)'란 말도 설 자리를 잃고 있다. 집밥보다 더 진지한 착한 식당, 그게 도처에 널렸다. 굳이 집에서 식재료 낭비하고 생고생해가며 요리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정량의 식재료, 그리고 레시피까지 첨부돼 제시간에 배송되는 밀키트. 그것 때문에 굳이 요리학원에 다닐 필요도 없다. 그래서 그런지 아파트 공간에서 차지하는 부엌 면적은 점점 줄고 있다. 대신 커피 마시고 와인 파티하기 좋은 '바텐룸'이 인기다. 덩달아 아침 식사도 사라지고 있다. 밥 문화가 빵 문화로 대체되는 것 같다. 아침과 점심을 겸한 브런치(BRUNCH) 카페가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2000년대 초반쯤이다. 그 무렵부터 빅 브랜드가 독식했던 대로(大路) 상권도 거리와 골목 상권한테 조금씩 밀리기 시작한다. 대신 홍대 앞, 가로수길, 경리단길, 송리단길, 황리단길, 봉리단길, 기장 바닷길 등과 같은 이면 핫플 상권이 새로운 강자로 등장 중이다. 죽었던 공간이 해바라기처럼 웃기 시작한다. 조선소, 철공소, 목욕탕, 정미소, 막걸리 공장, 섬유공장, 농협 창고, 제주도 감귤창고…. 이들 공간에 청년장사꾼이 입주하고 있다. 빛나는 틈새로 테마 베카도 동반 성장하고 있다. 세상의 새로운 규칙댓글·구독·조회수가 여론 선도핫플 상권, 대로 상권 뛰어넘어핫플에 목매지만 충성하진 않아대기업 회장님도 SNS 마케팅◆스마트폰과 베카 그게 가능한 건 2007~2008년 출시되기 시작한 스마트폰 때문인 것 같다. 이놈은 '천하무적'. 현대판 영웅이자 슈퍼스타. 미국과 중국의 최강 권력도 조만간 넘어설 것이다. 다국적기업 CEO, 세계 각국 정상들도 그들 앞에선 한없이 약해진다. 그걸 활용하고 역이용해서 롱런하려 한다. 몸값 10조원, 올해 상반기 연봉 19여억 원, 그런 신세계 부회장 정용진도 세상의 권력이 스마트폰(이하 폰)에서 나온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트위터와 인스타그램을 통해 굳이 체면 구기는 걸 자청하면서까지 사진을 난사한다. 마트에서 카트를 끄는 장면, 요리하거나 자식의 근황도 공유한다. 며칠 전엔 '방탄소년단 아미(팬)가 되어 보련다'고 고백했다. 바로 요즘 잘나가는 회장님들의 에지 가득한 신개념 마케팅 전략이다.폰은 무소불능의 영역이다. 조물주를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다. 폰이 바로 '갓(GOD)'이다. 지구 반대편 외국인의 일상도 실시간으로 공유할 수 있다. 앱을 클릭하면 지구 정지 궤도(지상 3만6천㎞)에서 지구의 현재 모습도 볼 수 있다. 폰은 금세기 최고의 망원·현미경이다. 그 폰 때문에 시골과 도시의 욕구 구분도 사라진다. 폰에서 멀어지면 거기가 시골(?) 아닌가. 그래서 그런지 국가·민족 간 문화 차이도 조금씩 깎여나간다. 지금 모두가 폰을 들고 있다. 수십 억명이 하나의 몸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얼마나 혁명적 상황인가. 세상의 돈과 권력이 온라인에서 창조된다는 것. 그걸 알아버린 차세대 비즈니스 천재들. 그들이 세계적 부호가 됐다.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 애플의 스티브 잡스, 페이스북의 저커버그, 아마존의 베 조스, 알리바바의 마윈, 카카오 왕국의 김범수, 배달의 민족을 만든 김봉진…. 자잘한 일상이 폰을 통해 초 단위로 공유된다. 이 난감한 흐름을 기존 일간지 정보망이 제대로 포착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신문 기사보다 더 막강해진 댓글·구독·조회수가 새로운 여론을 선도하고 있는 것 같다. 이제 식당을 넘어서고 있다. 내가 카페문화를 주시하는 이유도 폰의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카페는 새로운 대륙이다. 중세·근대·현대를 넘어선 영역이다. 그것에 필요한 욕망을 베카가 증식해나가고 있다.욕망 간파한 카페지앵아침식사보다 브런치에 커피호텔 레스토랑도 카페에 밀려철공소·목욕탕·정미소·창고…죽은 공간을 베이커리 카페로◆이젠 카페 권하는 사회한때는 '성공 권하는 사회'였지만 감이 좋은 사람들은 '성공의 덫'을 눈치챈 것 같다. 될 수 있는 일과 될 수 없는 일의 한계를 간파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면서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인 '소확행' '지금 이 순간의 즐거움에 집중하자' '욜로 마인드'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란 일과 쉼의 황금분할 등을 성찰하기 시작한 것 같다. 물론 아직 '방콕'으로 몰리는 청년백수, 생계의 절벽으로 내몰린 배달족도 있지만 그들도 그들만의 일상을 즐기는 방법을 곧 강구할 것이다. 방탄소년단이 세계 팝 시장의 왕자로 부상하고 국악계의 다크호스인 이날치 밴드가 세계적 뮤지션 콜드플레이의 앨범 작업에 피처링을 했다. 엄청난 사건이다. 우린 경제적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문화적으로도 선진국으로도 진입 중이다. 개발도상국이 아니다. 최정예 폰족들이 '브라보 마이 코리아'를 연호하고 있다. 지난 세기 한강의 기적. 그 과정에 '묻지 마 학살'이 관계자들에 의해 자행되었다. 전화 한 통이면 모든 민원이 해결되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세상, 가히 권세가들의 세상이었다. 하지만 이제 끼리끼리 해 먹는 게 점점 어려지는 세상으로 진화하고 있다. 30대 야당 대표가 태어났다. 찌질하게 살기 싫어 자연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간 자연인, 그리고 육지 생활을 미련 없이 정리하고 제주도로 내려가 '소낭' 같은 게스트하우스를 차린 미래파 인생들이 전국 뷰 포인트를 특화시켜 주고 있다. 이게 폰으로 실시간 중계되고 있다. 그 매개체도 단연 베카다. 인스타그램, 유튜브, 페이스북, 블로그, 트위터, 카카오…. 이 영토는 기존 오프라인 아날로그 종족이 잉태했던 삶의 문화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남의 체면을 존중하지만 결코 자기 의견, 그리고 자신의 자존감은 철저하게 지키려 한다. 그리고 예전 밥상머리 앞에서 형성시켰던 가족문화를 카페 테라스로 옮겨 놓는다. 기자는 그동안 푸드 로드를 통해 제주도와 울릉도를 포함한 동·서·남해 주요 도시를 돌면서 대를 잇는 장수식당, 별미식당, 식재료 연구가, 식객, 제철 식재료 1번지 등을 추적했다. 이 흐름은 탤런트 최불암을 '국민식객'으로 만든 KBS1 푸드인문학 프로그램이랄 수 있는 '한국인의 밥상'과 궤를 같이했다고 생각한다. ◆맛집 신드롬 급랭이제 고만고만한 일반 식당의 진기는 거의 소진됐다. 맛있는 식당 정보가 점점 영양가를 잃고 있는 것이다. 그런 사이 코로나19가 발악하기 시작했고 그 여세와 함께 되레 '국민 수다방·국민사랑방'으로 등극한 베카 신드롬과 무관하지 않다. 우중충하고 칙칙한 포스의 예전 식당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베카 스타일과 공유되려 한다. 김밥집도 '김밥카페'라 해야 더 어필되고 한식당도 '한식카페'라 해야 더 주목받는다. 커피는 커피숍보다 카페에서 먹어야 제격이란다. 일반 식당도 커피를 후식으로 내고 있다. 편의점에 가도 1천~2천원대 가성비 좋은 커피를 살 수 있다. 커피는 '국민의 숭늉'으로 사랑받는 중이다. 그 옆으로 다가선 빵은 밥을 압도한다. 호텔 레스토랑도 베카한테 밀려났다. 전국의 족보 있는 유명 식당도 카페 스타일로 디자인되고 있다. 대를 이은 2·3세들에 의해 레시피는 더욱 현대화되고 그 과정에 레시피조차 대폭 수정된다. 야수떼처럼 발호(?)하는 숱한 먹방·쿡방의 난립, 스스로 권위를 잃고 말았다. '자중지란'이랄 수 있다. 기자도 마찬가지다. 취재를 위해 전화를 걸어 먼저 신분을 밝혀도 그들은 시큰둥하게 반응한다. 광고영업사원인 줄 알고 단번에 '우린 그런 것 안 한다'면서 퉁명스럽게 전화를 끊어버린다. 식당 취재가 하나의 '민폐'로 간주 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도 겨우 권위를 가진 프로그램이 있다면 KBS의 '전국은 지금'과 '생생 정보통', SBS '생활의 달인' 정도.푸드로드 이후 후속 시리즈물을 고민했다. 그렇게 해서 '오너 셰프를 찾아서'란 코너를 꾸렸고 이번 여름에 생각해 낸 게 바로 '카페로드(CAFEROAD)'이다. 올해 5회를 맞고 있는 영남일보 주최 커피 & 베이커리 축제 활성화를 위한 일환이기도 하다. ◆카페지앵의 등장디지털 세상, 새로운 '식문화 탐험가'가 등장했다. 바로 베카를 사수하는 '카페지앵(카페 주인)'이다. 그들은 새로운 세상의 욕망을 사업으로 연결하려 한다. 식당이 지고 카페가 대세라는 걸 눈치챈 것이다. 카페가 식당을 통폐합하고 있다. 물론 잘나가는 베카지만 경쟁이 워낙 치열해 어디 가나 비슷한 천편일률의 매대 위 빵만으로 승산이 없다는 것도 잘 안다. 베카는 점차 빵과 밥을 합친 브런치 전문 베카로 발전해 나갈 것이다. 그런 곳 중 하나가 서울 잠실권과 맞물린 송리단길 핫플 베카로 등극한 '라라브레드 송파점'. 베카의 상투적 흐름에 매몰된 지역 업주라면 그 영업전략을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거기는 빵이 주가 아니다. 요기가 될 만한 브런치를 메인 메뉴로 주문하게 만들고 그것과 연결해 매대에 진열된 빵과 디저트를 부 메뉴로 선택하게 만든다. 폰족의 성향을 간파해야 된다. 이들은 절대 한 가게에 충성하지 않는다. 조금 슬픈 사실이지만 그들은 자기에게조차 충성할 줄 모른다. 오히려 빅 데이터에 충성하고 셀카의 셔터 음에 충성한다. 이게 바로 영웅본색이 아니라 'SNS 본색'이다. 폰족은 어쩜 '현대판 미아'인지도 모른다. 그 본성을 카페지앵이 사업적으로 잘 이용하는 중이다. 집에서는 대화가 없는데 희한하게 베카에 오면 다들 말문이 열린다. 하지만 이내 자신의 폰 속으로 자맥질한다. 이건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아니다. 그냥 하나의 '문화'로 이해해야 된다. 전화 통화보다 그들은 문자와 이미지를 더 믿는다. 빵맛보다 더 자극적인 문자와 이미지 맛에 중독되어가고 있다. '아직 거기 몰라' '거기는 반드시 가 봐야 된다'고 하는 신상 핫플에 목을 맨다. 하지만 그 핫플의 문을 열고 나올 때쯤이면 새로운 핫플이 그들을 유혹한다. 하루에 하나씩 핫플 투어를 해도 핫플은 영원히 정복되지 못할 것이다. 이게 핫플 시대의 희망과 절망이랄까? 이춘호 음식·대중문화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위클리포유 커버스토리-이춘호기자의 카페로드] 핫플과 베이커리 카페(3)에서 계속됩니다스마트폰은 금세기 최고의 망원·현미경이다. 자잘한 일상이 인스타그램·유튜브·페이스북 등을 통해 초 단위로 공유되며 댓글·구독·조회수가 새로운 여론을 선도하고 있다. 핫플레이스의 맛보다는 이미지에 중독, 그것은 하나의 문화다. 베이커리 카페가 그 욕망을 증식해 나가고 있다.멀리 아스라이 보이는 자연의 한 풍경, 그걸 캔버스로 걸어놓은 듯한 통유리창 앞에 커피를 들고 서면 한없이 바쁘기만 한 일상도 잠시 평화롭게 내려앉는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핫플 카페는 너도나도 대형 통유리창을 경쟁적으로 달고 있다. 동굴 같은 카페 실내에서 바라 보는 자연 풍광은 그냥 보는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빼어난 시각적 효과를 드러낸다.
[위클리포유 커버스토리-이춘호기자의 카페로드] 핫플과 베이커리 카페(1)...핫플의 조건, 맛보다는 뷰
◆대한민국 식문화 랩소디스카이 뷰, 오션 뷰, 리버 뷰, 레이크 뷰, 마운틴 뷰, 팜 뷰…. 다들 '뷰(VIEW)' 때문에 난리도 아니다. 현재 핫플 카페들이 그 뷰를 독점하고 있는 중이다. 산과 바다, 강, 호수, 벌판, 논과 밭, 과수원, 하늘 등 뭔가 한 방이 있다 싶으면 그걸 품고 카페를 짓는다. '카페 춘추전국시대'가 맹렬하게 들끓고 있다. 그로 인해 대한민국이 '카페 공화국'으로 팽창하고 있다. 이들 카페의 승부처도 뷰가 될 수밖에 없다. 물론 시그니처 메뉴도 중요하지만 아무튼 SNS를 주름잡는 핫플 대형 카페들은 하나같이 양손에 커피와 빵(디저트와 브런치 포함)을 거머쥐고 있다. 다방, 커피숍, 레스토랑, 베이커리숍, 갤러리, 문화센터 등을 하나로 묶어 놓은 듯한 '베이커리 카페'(이하 베카) 시대가 절정기를 맞고 있다. 최근 새로운 기획 시리즈인 '카페로드(CAFEROAD)' 현지 조사차 전국의 핫플 베카를 모니터링해봤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몇 곳이 있다. 도담삼봉과 고수동굴을 품은 충북 단양군 가곡면 사평리 두산마을 산 정상부 단양 패러글라이딩장 바로 옆에 2016년 문을 연 '카페 산(SANN)', 여수시 돌산읍 바닷가에 있는 예술랜드 리조트 내 '라피끄'와 바로 옆 리조트 '핀란드의 아침' 옆에 있는 '모이핀'(핀란드어로 '안녕 핀란드'란 의미), 제주도 서귀포시 안덕면 창천리 '휴일로'와 서귀포시 성산읍 신산리 '쉬어갓(She a GOD)', 청도군 매전면 운문산 해발 600m 고지에 들어선 '아미꼬뜨', 달성군 최정산 정상부 '대새목장', 팔공산 '시크릿가든'과 '헤이마', 청도 유등연지 근처 '오브제토'와 '덕남', 2015년 동구 신천동에서 1호점을 내고 이후 수성못점, 아산점, 부산 기장점, 경산점, 서울 익선동점 등 전국에 10여 개의 가맹점을 낸 '우즈(WOO'Z)', 이밖에 25년 전 탈도심 갤러리 카페 시대를 연 가창댐 옆 '동제미술관 카페' 등이다. 기자는 그동안 전국의 식문화를 향토사와 연계한 '푸드로드(FOODROAD)' 기획시리즈에 20여 년 집중했다. 일종의 '팔도 한식 기행'이랄까. 덕분에 대구의 맛과 멋, 대구음식견문록, 대구 빵 이야기, 경북의 산채를 찾아서, 국밥 등 몇 권의 푸드 관련 저작물을 펴낼 수 있었다. 수십 년 내공이 쌓인 유명 식객, 식문화 연구가들과 손을 잡고 한국음식문화를 연구하는 모임체도 만들었다. 제주도권의 양용진, 통영·남해권의 이상희, 호남권의 김준, 부산·경남권의 최원준, 음식 유래 연구가인 박정배와 김성윤 조선일보 음식전문기자도 가세했다. 그 기행을 하는 동안 나는 이 나라의 식문화가 얼마나 많이 변화 중인가를 실감할 수 있었다. 세상의 욕망은 더 반듯하고 배려심 깊고 더 냉철해지고 있었다. 국가보다 국민이, 지자체보다 시민이 더 성숙해지고 있었다. '내가 누군지 알아'란 시대착오적 특권 의식도 점차 퇴출되고 있었다. 회장·총장·대장이라 해서 부하를 함부로 대할 수 없게 됐다. 살림은 여자의 몫이란 말도 옛말이다. 요리는 남녀 공유물. 한때 결혼한 여자를 지칭하던 '출가외인(出嫁外人·시집간 딸은 친정 사람이 아니고 남이나 마찬가지란 의미)'도 죽은 말이다. 반려견이 가축이 아니라 '가족'에 편승했다. 상속에 있어 장남에 대한 배려도 없다. 남녀 구분 없이 N분의 1이다. 여성은 더 이상 '어머니'가 아니다. 하나의 '소비 트렌드'로 등극했다. 6~7년 전쯤 그 여전사를 향해 영혼의 쉼터 같은 '세컨드 하우스'가 다가선다. 바로 멋진 뷰를 품은 베카다. 그들에겐 또 다른 '성소(聖所)'다. 머슴처럼 졸졸 따라다니는 커피를 '경전' 대하듯 한다. 평일 오후 웬만한 핫플 베카는 여성들에 의해 독점된다. 쓰담 쓰담한 분위기, 가끔 남편과 영상통화도 하고 아이와 동행한 이들은 풀밭 테이블 위에 놓인 빵과 커피를 품고 앉아 소소한 얘기를 푼다. 커피 한 잔과 한 접시의 빵, 그게 그들의 '소우주'다. W2면에 계속 글·사진=이춘호 음식·대중문화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위클리포유 커버스토리-이춘호기자의 카페로드] 핫플과 베이커리 카페(2)에서 계속됩니다최근 최강 뷰를 자랑하고 있는 청도군 매전면 운문산 해발 600m 고지에 자리한 베이커리 카페 '아미꼬뜨'. 그린벨트도 피하고 넓은 임도까지…, 어찌 이런 곳에 카페를 차릴 생각을 했을까, 주인 부부의 열정이 놀랍기만 하다. 알프스 산록에 여행을 온 듯 멍 때리는 손님들이 수북하다. 별로 알려지지 않은 비경의 산중 카페다.여수시 돌산읍 외딴 섬에 들어선 여수 예술랜드 리조트, 그 바닷가에 성채처럼 오픈한 대형 베이커리 카페 '라피끄', 포토존 천국의 계단은 입소문을 탔고, 올 화이트 톤 때문에 손님은 잠시 그리스 산토리니섬에 온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충북 단양군 가곡면 단양패러글라이딩장 바로 옆에 2016년 오픈한 '카페 산'. 국내 첫 산정상에 세운 베이커리 카페로 불린다. 루프톱에 서면 일망무제, 해발 600m 고지 아래로 점핑하는 패러글라이더의 역동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카페 산 제공〉2015년 대구 도심에서 베이커리 카페 시대를 선도했던 '우즈'가 경산 시내 한 야산 솔숲을 품은 프리미엄 스페이스를 오픈했다. 우즈는 현재 기장점, 아산점, 서울 익선동점 등 10여개의 가맹점을 열었다.
[이춘호기자의 행간을 찍다] 가을도 배송됩니다
열대야가 이슥한 밤 자리로 접어들 무렵, 그 가장자리에 귀뚜라미 울음이 서성거린다. 저절로 뱃가죽 위를 덮는 얇은 이불. 한때는 그렇게 밀어냈는데 이젠 내 곁으로 끌고 온다니. 변덕, 그게 인간의 최강 덕목아닌가.일진광풍으로 내달리던 저 하절기의 열기, 전국 에어컨을 다 가동해도 열기 앞에선 조족지혈. 그런데 며칠 만에 그 열기 속을 바늘처럼 파고드는 냉기(冷氣). 도대체 그것의 발송자는 누구인가? 아마존과 배달의 민족이 옮겨준 걸까? '계절도 무한리필되고 배송됩니까'. 신호탄처럼 번지는 어떤 써늘함. 그건 겨울의 추위와 물성이 다른 것이다. 생명의 관성, 그자가 제 호흡의 끝을 더 길게 연장할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저 허공은 마구 달려왔던 저 활활 타던 기세를 어느 날부터 북북서로 회항하기 시작한 것인가. 항공모함의 선미 자락에 매달린 U자로 굽어진 수적처럼. 녹색 기운이 꽝광 했던 저 숲들. 이제 더 이상 초록의 에너지를 생산하지 않을 모양이다. 베어내자마자 부리나케 머리를 치켜들기 시작하던 지난 여름날 저 무시무시한 잡초들. 제 무성지기(茂盛之氣)를 칼집에 꽂고 있다. 허공이 하나의 시선이라면? 그게 하늘의 기운과 기세 사이에 연골처럼 박혀 있다. 기운은 거짓말을 못 하지만 기세는 거짓의 포스를 연출한다. 선풍기와 에어컨은 모두 기세의 연장이다. 하지만 여름의 몸에 가을을 주입시키는 선선한 바람은 바로 진짜 가을의 기운인 것이다. 정상을 밟고 하산하고 있는 자의 눈빛, 그 곁을 스쳐 지나가는 정상을 향하는 자들의 눈빛, 같은 눈빛이건만 지옥과 천국만큼이나 차이가 있다. 이미 출세한 자의 가슴과 출세를 향해 달리는 자의 가슴. 그걸 '인권'이란 이름으로 동일시(포장)한다면. 챙겨야 하고 배려해야 될 걸 놓치게 된다. 자연과 자연인을 동일시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안목이다. 초월·해탈 같은 게 걸림돌이 될 때가 많다. 없는 자에겐 '주문(呪文)', 있는 자에겐 '주술(呪術)'이 될 것이다. '열심히 살아'란 말과 '견뎌'란 말 중 당신은 어느 게 더 맘에 드는가. 된 자의 기쁨과 올인해도 되지 못한 자의 슬픔. 그걸 '희망 모드'로 최면 걸면 곤란하다. 가끔 전국의 사찰·성당·교회에 있는 성직자를 다 집으로 돌려 보내고 그 공간을 신혼부부의 공공주택으로 전환하면 어떨까. 성직자는 설교와 법문 대신 커피나 대접하는 바리스타로 전직시키고. 그럼 지구가 당장 망할까? 산하의 이파리. 그 복판으로 조락(凋落)의 기운이 진군하고 있다. 중년의 머리카락에 섞여드는 새치처럼 번진다. 한숨과 맞물린 헛기침, 웅변보다는 중얼거림에 가깝다. 스잔함도 아니고 애잔함도 아닌 우수의 정조가 입추를 스쳐 지나갔다. 십 리 이상 치솟든 뭉게구름도 수평으로 눕고 있다. 입춘지경은 다짐이지만 입추지경은 고백인 것 같다. 내년부터 전국 부동산 완전 허가제. 충격, 아파트 가격 50분의 1로 폭락. 전국 부동산 중개업소 동시 폐업. 남아 도는 아파트에 노숙자 입주 이어져…. 그런 구운몽 같은 상상을 해보는 가을 커피 즈음, 동대구역 입구에 달린 CCTV 너머 2021년 햇가을 하늘을 행찍 해봤다. 음식·대중문화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이춘호 (음식·대중문화 전문기자)
[人生劇場 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서예가 석용진 2…'서예 망치는 놈' 소리들었지만…추사를 뛰어넘으려 나는 오늘도 전진한다
10대 때 처음 붓을 만난다. 집안의 한 어른이 내겐 자극제가 되었다. 이후 1981년 영남대 미술대 회화과를 졸업하기 전 서예반 한묵연(翰墨緣) 시절에도 나의 붓·먹·종이는 접점이 없었다. 항상 따로 놀았다. 점은 획으로, 획은 글자로, 글자는 문장으로 연결되지 않았다. 모든 게 다 분절돼 있었다. 마치 신경망도 혈관도 근육도 망가진 몸과 같았다. 그게 회통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나는 취할 수 있는 모든 전략을 다 구사했다. 붓을 발가락에 끼워 보기도 하고 모필장이 만든 붓이 맘에 들지 않아 털을 맘에 드는 부피로 만들기 위해 가위로 잘라 보기도 했다. 서예 속에 서예가 보이지 않는 것 같아 외유(술)를 많이 했다. 2003년부터는 자연석과의 밀애, 1984년부터 20년간은 난초와 씨름을 했고 1977년부터 지금까지는 전각 삼매경을 더듬는다. 드릴, 정, 톱 등 별별 연장이 쌓여만 갔다. 온갖 나뭇가지와 여러 종류의 낙엽 등도 붓의 대용이 되었다. 하지만 서예의 본령은 보일 듯 보일 듯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건 내 부족함이 만든 고정관념이었다. 모양(형상) 너머를 나는 볼 수가 없었다. 당연히 필력(筆力)·필세(筆勢)·필의(筆意)의 상호관계도 알 도리가 없었다.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서법여러 종류의 굵기를 가진 붓은 좀처럼 함락되지 않는 '철옹성'이다. 붓은 연필·볼펜이 아니다. 맘대로 갖고 놀려면 혹독한 연마를 해야 된다. 입문하면 곧바로 종일 기마자세를 취해야 되는 소림사 승려의 기본기처럼. 서예 입문자면 누구나 습득해야 하는 그 유명한 '영(永)자 필법'. 하지만 균형 맞추기가 죽을 맛이다. 이게 맞으면 저게 안 맞고. 위가 맞으면 아래가 무너진다. 사방은 맞는데 중앙은 허전하다. 그렇다고 길이를 같게 균분시키면 컴퓨터 글꼴로 죽어버린다. 붓을 누르는 힘과 필속(筆速)에 따라 글 모양은 천변만화다. 낱낱의 글자는 결구적으로는 멋진데 그게 다 모인 전체의 장법(章法)은 형편없는 하품(下品)으로 추락한다. 이와 반대로 낱낱은 볼품없어 보이는데 전체는 천품(天品)으로 우뚝하기도 한다. 서예는 균형과 절제 보름달 보다는 그믐달의 깊은 기운공식처럼 되지 않아 닮기 어렵지만 나중에는 벗어나기도 어려운 경지 서예는 공식으로 풀리지는 않는다. 기본기란 것도 서예의 본령으로 들어가기 위한 필요조건이지 충분한 건 아니다. 그래서 기술적인 글과 어떤 경지를 보여주는 예술적 글씨는 품격이 달라지게 될 수밖에. 예술적 붓글씨를 쓰려면? 300여 명에 육박하는 고래의 명필 법첩을 품어야 한다. 그게 끝이 아니다. 사군자와 문인화, 게다가 자기 낙관을 전각 해야만 하고 한시와 한학에도 능해야 된다. 그래야 진정한 서예가랄 수 있다. 하지만 달라진 세상, 과연 그게 가능한 서예가가 몇이나 될까.지금 팔공산 자락에 기거하는 남석 이성조는 내 사부다. 그로부터 1984년 아호인 일사(一思·一史)를 받았다. 2000년 무렵 고인이 된 석도륜 선생이 일사(逸史)를 권했다. 보통 석일사(石逸史), 지난해 중반부터는 성과 호를 합친 '석사(石史)'를 사용하고 있다. 서예를 한 이상 난공불락의 추사 한테 갇히지 말고 그를 자유롭고 뛰어 넘어서야 한다고 다짐했다. 추사정신이란 무엇인가, 기존의 서예를 그 너머의 서예로 옮겨놓는 것이 아닌가. 저승의 추사도 훗날 한국 서단이 너무 자신을 존숭하고 있는 게 심히 불편했을 것이다. 그를 존경하고 흠모하기에 당연히 나는 그가 죽어야 한다고 믿었다. 추사는 섬김의 대상이 아니라 극복의 대상이다. 그래야 한국 서예가 명실상부해지는 것이다. 나는 그 각오로 내 아호에 박힌 그 사(史)를 화두처럼 품고 진군 중이다. ◆대한민국 서예 대상1989년 제1회 대한민국 서예대전에서 대상을 받았다. 강희맹 시인의 시를 목간체 기운이 감도는 예서체로 쓴 작품이다. 1991년 4월25일 동아쇼핑 갤러리에서 생애 첫 전시회를 할 때 나는 그 작품을 걸지 않았다. 서단으로부터 인정을 받았으니 이전의 작품은 다 버리고 싶었다. 전통서예와의 결별이었다. 전시장에 건 작품은 글씨도 그림도 아니었다. 글씨가 궁극을 만나면 그림이 되고 그림이 궁극에 달하면 글씨로 변용된다고 믿었다. 그러니 서화는 동근(同根)이다. 하지만 나는 궁극에 달한 글씨의 세계에 더 방점을 찍었다. 광복 이후 1세대 서양화가로 한 시절을 풍미했던 이응노, 남관 등이 문자추상의 신지평을 열었다고 하지만 나는 그건 여전히 그림이지 글씨는 아니라고 믿었다. 나는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처음부터 현대 서예를 염두에 둔 게 아니다. 서예의 본질을 파다가 만난 것일 뿐이다. 내 작품은 기존 서예의 확장일 뿐'이라고 강조했다.전통과의 결별추사 흠모하기에 '극복의 대상'기존의 서예 그 너머를 꿈꿔와제1회 서예대전 대상 수상한 후궁극에 달한 글씨의 세계 천착1960년대 일본에서 전위적인 서예운동을 전개한 이노우에 유이치 등을 견제하며 산정 서세옥, 원곡 김기승 등이 새로운 서예를 시작했지만 명실상부한 서예 현대화는 얼마 전 작고한 도곡 김태정으로부터 본격화한 게 아닌가 싶다. 1990년 한국 현대조형서예협회가 생겨나고 물파 운동도 이어지지만 결국 지지부진해지고 말았다. 내가 첫 개인전을 했을 때 지역 서예계 어른들은 '전통서예를 망치는 놈'이라고 노발대발하셨다. 난 지역 서예계의 이단아, 불한당으로 폄훼된다. 하지만 서양화 진영에선 신선한 충격이란 반응을 보여주었다. 몇 년 전부터 시작된 '모호한 약속' 시리즈에 등장하는 떨어진 대나무 잎 같은 나의 수(水)·불(佛)·중(中)의 작품 필획은 우연의 일치랄까 추사가 71세로 돌아가기 며칠 전 서울시 강남구 봉은사에 남긴 '판전(板殿)'의 졸박(拙樸)한 획을 닮고 있었다.내가 서예에 본격적으로 입문했을 때 남석 선생으로부터 '수졸회적(守拙晦跡)'이란 말을 전해 들었다. 그 말은 남석의 스승인 청남 오제봉한테서 발원된 것이다. 붓글씨를 하되 너무 반듯하지 말고 조금 졸박하고 보름달빛보다는 그믐달의 유현(幽玄)한 기분을 작품에 깃들게 해야 된다는 주문이었다. 이는 노자의 경지를 암시하는 대교약졸(大巧若拙·매우 공교한 솜씨는 서투른 것같이 보인다는 뜻), 난득호도(難得糊塗·멍청하게 보이는 명석함을 얻기 힘들다)의 경지와 흡사한 것이다. 그것은 결국 청고고아(淸高古雅)의 경지고 결국 논어에 등장하는 '사야(史野)'에 이르게 된다. 사야는 올곧은 군자의 모습을 의미하며 서예로는 정법을 품은 신법의 경지를 암시한다. 서예 5체(전서, 예서, 해서, 행서, 초서)의 정법이란? 입문하는 길은 있는데 거기서 졸업하기란 실로 불가능하다. 그게 바로 '수파리(守破離)'다. '처음에는 닮기가 어렵고 나중에는 벗어나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일사의 쓴소리글씨를 처음 배우는 초보자들은 모양에 가장 신경을 많이 쓰는 것 같다. 그럴 때마다 나는 '걱정하지 말고 호흡을 끊고 필획에 정신을 집중하면 절로 필획이 자신을 이끄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당부한다. 생명의 근원인 획이 살아나지 않고는 어떠한 아름다운 조립도 가치가 없다. 그것은 서예가 아니라 문자 디자인일 뿐이다. 현재의 서예는 오랜 역사의 전통과 많은 수의 서예 인구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낙후되고 침체되어 일반 미술애호가와 화랑으로부터 외면받고 있는 실정이다. 과거와는 다른 가옥구조와 벽면처리는 기존의 서예작품이 가진 규격이나 액자, 족자 양식으로는 더 이상 새로운 공간에 어울릴 수가 없게 되었다. 컬러TV의 보급 이후 혁신적으로 변한 현대인의 색조 감각과 디자인 선택의 안목에는 서예인들이 주장하는 개성 있는 작품들이 모두 비슷하게 보일 것이다. 특히 매년 열리는 100개가 넘는 공모전의 동일한 규격과 비슷한 작품체제는 서예 전체의 이미지에 치명적이다. 서예의 현실소수 전문가 주도 비슷한 공모전현대 공간에 어울리지 않는 규격미술애호가·화랑이 외면하게 돼영광을 다른 장르에 빼앗겼지만미학이 궁극에 달하면 회귀할 것나는 그시대를 대비하는 '서태공' 서예 현실은 소수 전문가에 의해 주도되고 대다수는 공모전을 위주로 하는 취미생들로 이루어졌다. 소수의 전문가 서예가조차 서숙이나 서예학원의 경영, 공모전 지도로 인한 시간 낭비, 잦은 행사, 예술가로서의 전문의식 미흡으로 인해 '판박이 서예'로 추락 중이다. 따라서 미래의 서예는 전문성을 갖춘 신세대 서예가들에게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예와 상업디자인이 캘리그래피란 형식으로 묶이고 있다. 영화, 광고, 상품디자인의 표제, 북디자인과의 결합 등으로 변용된다. 구태의연한 전통액자 양식이나 족자 형식으로는 나날이 눈높이를 더해가는 현대인의 기호와 욕구를 충족시키기가 어려울 것이다. 지금 서예는 '리어왕' 같다. 모든 영광을 다른 예술 장르에 뺏기고 광야를 헤매는 것 같다. 하지만 호락호락한 서예가 아니다. 결국 모든 예술적 미학이 궁극에 달하면 다시 서예로 회귀할 것이다. 나는 그 시대를 미리 맞기 위해 변방의 달빛을 미끼로 낚시를 하고 있다. 강태공이 아니라 '서태공'이랄까! 일사 50회 개인전. 8월20일~9월25일 달성군 가창면 '아트 도서관'(가창면 우록길 131). 글·사진=이춘호 음식·대중문화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 일사 석용진1958년 대구 출생1981년 영남대 미술대학 회화과 졸업1989년 제1회 대한민국 서예대전 대상2005년 제1회 서울서예비엔날레 특별상작품집 '석용진' '석일사 전각선' '問道' '心銘' '夢緣' '한 생각 만 갈래' 등을 펴냈다인생은 결국 끝없는 전진이다. 나아갈 수도 물러날 수도 있지만 멈추어서는 안된다. 석용진 작 '행보(行步)'석용진 서예가가 자신의 작업실 문에 부착해 놓은 당호 '일사단간'.석용진 작 '중(中)'부식 동판에 '신은 죽었다'라는 니체의 말을 새겨놓은 작품.석용진 작 '수(水)'수정에 붓글씨를 올려놓은 작품.
[人生劇場 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서예가 석용진 1…생각이 천 갈래, 만 갈래…붓이 춤춘다
여기 한 장의 종이가 있다. 그 옆에 칠흑의 어둠을 머금은 거대한 붓이 또 놓여 있다. 맘은 일순간 붓이 되어 종이 위로 올라간다. '필무(筆舞)'의 시간. 혼신은 어떤 극치를 향해 피어오른다. 그게 '일필휘지(一筆揮之)'의 양대 필력이랄 수 있는 용사비등(龍蛇飛騰·용의 기세와 같은 힘찬 필력)과 평사낙안(平沙落雁·모래사장에 기러기가 내려앉는 듯한 한없이 가볍고 날렵한 필력)이랄까. 기원전 108년 한무제 시절, 한자가 한반도로 건너온다. 해동 서예의 신기원이 열리게 된다. 때맞춰 후한의 환관 채륜(蔡倫)이 인류 최초의 종이를 발명하게 된다. 이후 2천년 넘게 왕희지, 구양순, 안진경, 조맹부, 동기창, 왕탁, 등완백, 김농, 조지겸, 오창석, 하소기, 추사 김정희 등 불후의 명필이 줄을 잇는다. 청나라 서예가 양헌은 '평서첩'에서 중국 서예사의 흐름을 간단하게 요약한 바 있다. 진나라(왕희지)는 '신운(神韻)', 당나라(구양순)는 '법도', 송나라(소동파)는 '의취(意趣)', 원(조맹부)·명나라(동기창)는 '자태(姿態)'를 숭상하였다. 그러나 청나라는 요란하고 화려하게 번지기는 했지만 신기원이 될만한 서체는 나오지 않았다. 그냥 한 개인의 경지만 보여주는 서풍(書風)만이 피어났다. 하지만 성과도 있었다. '양주팔괴(揚州八怪·청나라 때 장쑤성 양주에 모인 금농, 정섭, 나빙 등 8명의 개성파 서화가)'가 나타나 법고창신(法古創新)에 기반한 전통서예 현대화에 불을 붙인다. 20세기 현대미술의 바탕이랄 수 있을 수작이 피어난다. 그 흐름에 편승한 불세출의 한국 서예가가 바로 추사 김정희다. 나는 그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하고 서예계로 들어왔다. 어느 날 선이면서도 동시에 악의 존재가 바로 추사란 사실도 절감하게 된다. 그를 닮는 건 가능했어도 그를 넘어서는 건 불가했다. 붓을 움직이는 건 과연 누구인가?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경지를 완성체라고 가정한다면 전략적으로 교묘하게 억지로 끌고 가는 얄팍한 창작열은 쉬 바닥이 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당연히 열정을 딛고 신명(神明)으로 비상해야 된다. 그러하니 맘에 드는 작품이 탄생하는 순간은 분명 이승이 아니라 저승의 한 수가 개입되어야 될 것 같다. 그 기운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찰나적으로 나타나는 번개 같은 것이리라. 서예는 기(技)와 술(術)이 아니고 하나의 예(藝)이고 도(道)이고 법(法)이다. 붓은 물성이지만 붓글씨는 신성(神性)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다. 이 몸이 어찌 거기로 흘러갈 것인가? 나의 지난 삶은 오직 그 화두와의 싸움이었다. 지독한 더위가 엄습하던 이번 여름, 난 내겐 기념비적이랄 수밖에 없는 한 권의 서예론을 출간했다. '한 생각 만 갈래'란 제목의 서예 묵시록 같은 책이다. 모두 77개의 작품에 어울릴 단상(斷想)을 병기했다. 내 작업의 주제는 존재와 삶에 대한 물음이다. 그 물음은 선배 성현들의 관점을 들여다보는 데서 출발한다. 물론 이러한 30여 년의 여정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생각도 바뀌고 그것을 시각화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조형언어와 기법들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큰 관점에서 본다면 내 작업의 근간을 이루는 조형 언어는 서예이며 이것을 현대화하는 과정에서 기호학적인 해석과 해체주의적인 경향과 더불어 문인화적인 어법을 바탕으로 한 서양화와 서예의 조화, 나아가 전각기법을 화면에 끌어온 것 등이 주류를 이룬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들을 나는 '오래된 약속'이라고 명명했다. 가급적 문자의 자형이 가진 사회적 약속을 깨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 하지만 지극한 것은 다 '불립문자(不立文字)' 아닌가. 경계와 변방의 물성이 짙을 수밖에 없는 것. 하여 2019년부터 시작된 내 작업의 주제는 '모호한 약속'이란 명칭을 갖게 된다. 고딕체로 된 영어, 그리고 그것과 상응하는 한자, 거기에 어울릴 그림이 포개졌다. 그걸 받쳐주는 재료도 무진장하게 변화됐다. 나무, 돌, 쇠, 유리, 심지어 빙렬(氷裂·도자기 표면에 형성되는 잔금) 효과를 위해 작품 위에 에폭시, 폴리코트, 황산, 부식동 등 같은 도료와 화공약품까지 동원했다. 그건 수직의 영광이 아니라 '수평적 미학의 막장'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글·사진=이춘호 음식·대중문화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人生劇場 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서예가 석용진 2에서 계속됩니다붓을 움직이는 건 과연 누구인가?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경지를 완성체라고 가정한다면 전략적으로 교묘하게 억지로 끌고 가는 얄팍한 창작열은 쉬 바닥이 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당연히 열정을 딛고 신명(神明)으로 건너가야 된다. 그러하니 맘에 드는 작품이 탄생하는 순간은 분명 이승이 아니라 저승의 한 수가 개입되어야 될 것 같다. 그 기운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찰나적으로 나타나는 번개 같은 것이리라.대부분의 작업 주제는 존재와 삶에 대한 물음이다. 작업의 근간을 이루는 조형언어는 서예이며 이것을 현대화하는 과정에서 문인화·서양화·전각기법 등을 끌어왔다. 돌에 각을 하고 있는 일사 석용진.
[이춘호 전문기자의 푸드 블로그] 대구권 마지막 조청명가 경일식품...한과명인들이 찜한 진짜 糖…프랜차이즈 치킨 소스에도 들어갑니다
농경사회 때만 해도 '쓴맛의 미학'이 건재했다. 하지만 산업사회로 접어들면서 국면이 달라진다. 쓴맛은 약(藥)의 영역으로 밀려나고 대다수 식단은 단맛한테 지배된다. 단맛이 단연 현대인에게 황홀한 존재로 군림하게 된다. 근대로 접어들면서 사람의 혀를 녹여낼 만한 여러 가지 감미료가 등장한다. 대표적인 게 '설탕'이다. 현재 식품공학자들이 분류한 바에 따르면 무려 50여 종의 각종 감미료가 유통되고 있다. 가히 '단맛 인플레이션 시대'가 개막된 것 같다. 조청이란 설탕·물엿처럼 정제糖 아닌 식혜 전통방식 졸인 농축액 대기업의 단맛에 밀렸다가 힐링식품으로 새롭게 조명우린 오래 '물 엿 권하는 사회'에 길들여졌다. 그런데 물엿에 지친 소비자 사이에서 '조청(造淸)'이 힐링식품으로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조청은 고두밥과 엿기름을 같이 넣고 삭힌 뒤 따뜻한 곳에 두면 식혜가 되는데 이때 건더기를 제거하고 당화된 물만 졸여 내면 된다. 수분을 더 제거하면 엿이 된다. 조청의 '청(淸)'자가 의미심장하게 다가선다. 왜 '맑은 청'일까? '곡물(녹말)의 물성을 불길로 다스려 앙금처럼 순수한 형태로 추출한 천연의 단맛'이란 의미를 담고 있는 건 아닐까.아무튼 조청은 설탕과 꿀과 물엿의 접점에서 태어난 것 같다. 조청은 이전 농경사회에선 절대적인 천연 감미료였다. 식혜(감주)에서 발원된 조청을 더 굳히면 '갱엿'이 되고 그걸 더 늘리면 흰엿이 된다. 갱엿은 워낙 붉은 기운이 감돌아 일명 '핏엿'으로도 불렸다.1970년대까지만 해도 조청은 한국인에겐 최강의 당원(糖源)이었다. 대표 한과였던 강정을 만들 땐 어김없이 물엿 대신 조청을 사용했다. 하지만 1980년대로 접어들면서 대기업이 가성비 좋고 빠른 시간 내 단맛의 효과를 내는 물엿(초창기에는 '이온 물엿'이란 이름으로 출시됨)의 시대를 연다. 마치 다듬잇돌이 다리미로 대체되는 것과 비슷한 정황이었다.최고로 손꼽힌 까닭1980년대 가짜 조청 판치자조합만들어 성분 분석·공개'경일조청 엄지척' 평가받아쌀가공품 품평회서 장관상강릉·봉화·의령·서산·보은…전국 한과명인들의 '원픽'◆대구권 마지막 조청공장그 많던 조청 공장은 모두 어디로 가고 없을까? 현재 대구에는 조청 만드는 공장이 하나도 없다. 오뚜기 등 대기업 식품회사가 가내수공업 형태로 이뤄지던 조청 공장을 고사시켰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전국적으로 남아 있는 건 스무 곳 남짓. 경북에는 의성, 안동, 점촌, 김천 등 7곳 정도만 남아 있다. 반면 농가에서 가마솥을 이용해 전통방식으로 조청을 손수 제조하는 형태는 되레 증가하고 있다. 농식품부에서 지원하고 있는 마을기업·농업인 대상 소규모 창업기술시범 사업 덕분이다. 다행히 절벽으로 내몰리던 국내 전통 조청 산업이 새롭게 기지개를 켜고 있다. 봉화 고산협곡 산사에 사는 지욱 스님은 홍도라지 조청을 만드는 게 유명해져 지난해 KBS 인간극장에서 '금쪽같은 우리 스님'이란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도 했다. 현재 한국에서 주목받는 두 명의 남성 한과 명인이 있다. 바로 김규흔과 최봉석이다. 김규흔은 국가 지정 전통 한과 제조 기능 명인 겸 대한민국 한과 명장 1호(약과 분야)다. 그는 '한가원'을 개관했다. 한가원은 국내에서 유일한 한과문화박물관. 최봉석은 국내에서 가장 핫한 곳으로 평가받는 강릉시 사천면 모래네 한과 마을에서 '갈골한과'를 운영하고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이 두 한과 명인이 지역의 한 조청 공장을 통해 재료를 매입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명인도 안심하고 사용할 정도로 믿을 만한 조청이란 의미였다.경북 경산시 자인면 읍천리 경일식품. 창업자 김규섭(76)이 만들고 있는 예청 조청이다. '예청(藝淸)'은 2013년 만든 경일식품의 식품 브랜드 명칭이다. 현재 두 명의 한과 명인을 비롯해 봉화 닭실한과, 의령 조청한과, 서산 생강한과, 보은 대추한과, 순창 문옥례 식품, 비비큐 치킨 등 전국 20여 군데에서 예청을 사용한다.◆우여곡절 한국 조청산업현재 대기업 조청이 중소기업 조청을 쫓아낸 상태다. 화학적 가공을 통해 저렴하면서도 단맛은 강하게 낼 수 있는 액상과당·가공감미료 등으로 불리는 물엿의 독점적 지배로 인해 영세한 조청업자는 설 자리를 잃어버렸다. 1950~60년대까지만 해도 조청 업자들은 호경기를 누렸다. 대기업이 지방으로 내려올 도로망이 제대로 갖춰지지 못했던 탓도 있다. 특히 설 명절이 가져다주는 2개월의 조청 특수는 엄청났다. 이로 인해 관계자들은 즐거운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대구의 경우 1975~80년에 30여 업체가 난립했다. 명덕네거리 근처에만 5곳, 태평로에는 3곳, 비산동에 3곳, 계대 앞, 수도산, 동촌, 칠성동 등지에 산재해 있었다. 이들 중 충남·남문·남부식품 등 3인방이 지역 조청 산업을 선도했다. 그 시절 조청 수요는 그만큼 대단했다. 조청이 흥할 때 국수 공장도 호경기였다. 이와 연장해 참기름, 방앗간, 떡집 등도 1천500여 개도 흥청거렸다. 시장 다각화 노력 대구 조청공장 한곳도 없고 전국 스무곳·경북 7곳 명맥 金 대표 두 아들 가업 승계 브랜드 개발·선물용 디자인 간편한 소포장 제품도 출시하지만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된 직후 물량을 앞세운 기업형 사슴·공작·닭표 조청 등이 선제공격을 했다. 뒤이어 대기업 물엿 군단이 재래식 조청 공장을 압도해 버린다. 2010년 기준 대구에는 딱 한 개의 조청 공장만 남게 된다. 이제 고인이 된 김원도 사장이 운영했던 '신일식품'이다. 한국 조청산업도 우여곡절의 세월을 보낸다. 흥미로운 사실은 업자들이 오랫동안 쌀을 사용할 수가 없었다는 점이다. 늘 쌀이 부족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설상가상 정부미 가격도 너무 들쭉날쭉했다. 연간 3번 정도의 파동을 겪어야만 했다. 그러니 맘 놓고 쌀을 사용할 수가 없었다. 업자들은 옥수수 혹은 쌀 싸래기 등을 이용해 조청을 제조해야만 했다. 경일식품도 2002년부터 겨우 쌀조청을 만들 수 있었다.그런데 2008년 7월11일 한국 조청 업계에도 희망이 찾아든다. 그날 금강산 관광을 하던 박왕자씨가 북한군에 의해 피격돼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로 인해 남북관계는 경색되고 북으로 맘대로 흘러가던 쌀이 일제히 스톱된다. 그로 인해 전국 쌀창고마다 쌀이 남아돌게 된다. 덕분에 업자들은 광복 이후 처음으로 마음껏 쌀로 조청을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명문거유 집안 조청장수반세기 조청 외길을 걸어온 김규섭 대표. 그는 명문 거유 집안 출신이다. 그의 13대조 방조 할배가 바로 학봉 김성일이다. 하지만 생계만은 누가 책임질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안동시 길안면 배방리에서 정미소를 운영했다. 지인과 동업을 했는데 기술이 없어 7년 만에 빈손이 되고 만다. 청송에서 태어난 그는 23세 때인 1968년 먹고살기 위해 맨손으로 대구로 온다. 그 어름부터 결혼하던 31세까지 일정한 직종 없이 날품팔이 신세를 면치 못한다. 철공소에도 들어갔고 길거리에서 소금, 사과, 병아리 등 별별걸 다 팔았다. 지인이 수성구 범어동 현재 범어 대성당 근처에서 '제일 제이소'란 조청공장을 괜찮게 운영하고 있었다. 덕분에 그 공장에 취직할 수 있었다. 부산물로 나온 조청 찌꺼기를 근처 목장·양계장 등에 팔러 다녔다. 그때는 수공업 형태로 조청을 만들었다. 지름 1.5m 정도의 무쇠솥을 무연탄으로 가열해 조청을 만들었다. 그때는 직접 열이었지만 지금은 150~170℃의 보일러의 열기를 간접열로 활용한다. 그는 계명대 대명동 캠퍼스 근처 미도극장 옆 화신 엿 공장에서 5년 더 경험을 쌓는다.그 이전 대구 시절에는 자기 브랜드도 독자적인 자본도 없었다. 남의 시설에서 임차경영을 하던 때였다. 1985년 9월 자신만의 조청을 만들기 위해 대구를 떠나 경산으로 거처를 옮긴다. 이후 경산 중산동, 다음엔 경산 2공단, 6년 전 청도 운문댐 수원과 맞물린 현재 자리로 이전한다. 그 시절에는 정체불명의 비위생적인 짝퉁 조청이 상당히 유통됐다. 당시 암갈색 조청은 탄 것이란 인식 때문에 잘 어필되지 못했다. 조금 노르스름한 빛깔이 더 잘 팔렸다. 그래서 악덕업자들은 아황산나트륨 등을 투입해 짝퉁 조청을 몰래 팔았다. 1980년대 중반, 보다 못한 지역의 조청 업자들이 모여 조합을 만들었다. 희망로 옆에 사무실도 개소했다. 가짜를 근절하기 위해 조합원의 조청부터 성분을 분석해 공개했다. 뚜껑을 열고 보니 '경일 조청이 짱'이란 평가를 받게 된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비록 공장에서 대량으로 생산되지만 조청의 질감만은 수제방식으로 관리하고 있다. 그래서 한과 명인들이 이 조청을 찜한 건지도 모른다. 2014년에는 농식품부가 주최한 쌀가공품 품평회에서 '톱10'에 선정돼 장관상을 받는다. 김 대표의 가업은 아날로그 방식이었다. 세상은 디지털 세상으로 돌변했다. 조청산업도 특화시킬 필요가 있었는데 김 대표의 힘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두 아들(기홍·시홍)이 자신의 직장을 버리고 가업을 승계한다. 홈페이지도 만들고 예청이란 브랜드도 개발하고 걸맞은 선물용 포장지도 디자인했다. 조청 다각화를 위해 '떡볶이데이'를 겨냥해 30g짜리 '꼬마조청'도 출시하기도 했다. 경일식품은 현재 조청 재료로 연간 2천t의 쌀, 1천t의 옥수수를 사용하고 있다. 쌀조청 이외에도 기능성을 보강하기 위해 생강 조청, 도라지 조청 등도 선물용으로 개발했다. 경산시 자인면 읍천리 300. (053)856-6724 글·사진=이춘호 음식·대중문화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조청은 고두밥과 엿기름을 같이 넣고 삭힌 뒤 따뜻한 곳에 두면 식혜가 되는데 이때 건더기를 제거하고 당화된 물만 졸여 내면 된다. 수분을 더 제거하면 엿이 된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조청은 한국인들에겐 최강의 당원(糖源)이었다. 대표 한과였던 강정을 만들 땐 어김없이 물엿 대신 조청을 사용했다. 하지만 80년대로 접어들면서 대기업이 가성비 좋고 빠른 시간 내 단맛의 효과를 내는 물엿의 시대를 연다. 마치 다듬잇돌이 다리미로 대체되는 것과 비슷한 정황이었다.조청 외길 인생을 걸어 온 '경일식품' 김규섭 대표. 그가 경산시 자인면에서 운영하는 이 공장은 대구권 마지막 공장표 조청으로, 전국의 한과 명인으로부터 러브콜을 받고 있다.
[동대구로에서] 탄소제로 민주주의
7월이 8월로 기울고 있다. 열대야를 품은 삼복 근처. 이 무렵, 햇살은 푸대접을 받고 그늘은 퍽 환대를 받는다. 이 계절, 그늘을 편애하는 것도 어쩜 도시인(자본)의 이중성이랄 수 있다. 그늘이란 농부한테는 하나의 '재앙'이다. 말벌처럼, 칼날처럼 여름 햇볕이 기세등등해야 '제대로 된 여름'이라 믿었다. 농부의 살갗은 대지(자연)를 닮는다. 그들의 생각은 책이 아니라 땅의 몫이다. 그들은 똑똑하지는 못해도 지극히 현명하고 분수를 안다. 지식은 그래서 논두렁·밭두렁 위에선 무용지물이다. 조선조 양반들은 농부를 을의 범주에 가둬놓았다. '농사는 천하의 근본'이라 했지만 농업은 항상 빈곤선상에 방치되었다. 천대받는 세월이 너무도 오래 지속됐다. 광복 이후 농부의 자식들이 출세를 위해 상경했다. 하지만 출세한 그들이 제 고향을 더 엉망진창으로 만든다. 정치적 야욕과 부동산투기가 농심을 짓밟는다. 농작물보다 평당 가격에 올인 하기 시작하는 욕심이 농심을 밀어낸다. 투자처를 잃은 자본이 농촌을 새로운 투자처로 주목했다. 멋진 풍광은 어느새 거대자본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제주도는 물론 동·서·남해의 유명 섬마을도 예외가 아니다.짠하게 달리는 배달족. 그들이 현대판 농부 같다. 햇볕은 피할 수 없는 하나의 운명. 편의점 의자 위에 도사린 그늘, 그게 그들에게 잠시 위안이 된다. 헬멧 쓴 채 우유와 빵을 먹으며 이젠 갈 수 없는 고향 하늘을 바라보는 배달족(현재 전국에 12만여 명). 다들 무표정하다. 비문이 없는 비석 같달까. 초(秒)와 초 사이를 질주하는 그들, 적진을 파고드는 창의 기세로 도로를 종횡무진 한다. 신호등도 이들에겐 '장애물'이다. 절박한 생계 앞에선 생명도 대수롭지 않아 보인다. 경찰관도 그들을 애써 적발하려 들지 않는다. 생계의 절벽 앞에 선 자들의 비장함을 역지사지하는 거다.대지가 용광로만큼 뜨거워진다면 생명도 몰살하겠지. 초고온에서도 살아남는 박테리아도 있으니 너무 속단은 말자. 36.5℃란 피의 뜨거움, 살인적 더위라고 하지만 실은 그게 정상체온 수준 아닌가.적당한 거리의 온기, 이게 생명에겐 희망이다. 태양의 저 가공할만한 뜨거움과 절묘하게 궁합이 맞는 태양과 지구 사이. 그래서 지구는 문명을 피울 수 있었다. 그런데 신이 허락해준 적당한 그 거리가 금세기에 파괴됐다. 대멸종의 거리로 추락 중이다. 인류세는 그간 다양한 싸움을 극복했다. 원시인들은 '생존', 고대 농경사회는 '생산력', 중세시대는 '신성(神聖)'과의 싸움을 벌였다. 20세기에는 자본이 낳은 빈익빈 부익부, 그것으로 인한 제국주의와 민족주의가 부딪쳐 두 번의 세계대전을 겪고, 급기야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에 냉전이 벌어진다. 하지만 결국 자본주의의 승리로 끝났다. 그 승리는 탄소를 폭증시켰다. 자본이 키워낸 지구온난화, 그 좀비가 인류 멸망의 시한폭탄의 버튼을 눌러버렸다. 각국 지도자들이 경악하기 시작했다. 그런 연유로 탄생한 범인류 어젠다, 그게 바로 '2050 탄소중립 선언'이다. 2050년까지 탄소 배출량을 '제로'로 만들자.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무시하면 빙하기 공룡처럼 우리도 멸종될 것이다. 다음 세기가 아니라 바로 금세기에 그 재앙이 예고된 것이다.인간의 편리함, 그게 자연에는 하나의 '선전포고'로 받아들여졌다. 환경을 파괴한 자본이 초래한 자업자득이랄까. 이젠 다들 불편해질 각오로 살자. 조만간 나는 차를 처분할 생각이다. 가능하면 걷고 조금 멀면 자전거, 더 멀면 대중교통을 이용할 거다. 그게 지구와 동행하는 '탄소제로 민주주의'의 승부처가 될 것 같아서다.이춘호 주말섹션부 전문기자이춘호 주말섹션부 전문기자
[위클리포유 커버스토리] 비틀즈 트리뷰트 밴드 '시틀즈' (2) "B다음은 C니까 '시틀즈'…리버풀처럼 대구서 비틀즈축제, 멋지지 않나요"
서영교가 비틀즈를 처음 접하게 된 건 중학교 2학년 시절. 어느 버스정류장 앞 레코드 가게에서 유령회사 카세트 테이프를 산다. 제일 마지막 곡이 압권이었다. 비틀즈가 미국을 침공할 때 내밀었던 'I want to hold your hand'였다. 순간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때부터 비틀즈 마니아가 된다. 팝송 관련 책에 나오는 사진이나 기사를 닥치는 대로 스크랩했다. 중고책방에서 구입한 비틀즈 전기는 삼국지처럼 엄청 많이 읽었다. 이후 대학교 그룹사운드 동아리에서 밴드 생활을 했지만 비틀즈 음악을 연주하자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이후 직장을 다닐 때도 다들 비틀즈 음악에 대한 관심은 많이 떨어졌다. 그래도 그는 생각날 때마다 관련 책과 레코드 등을 사 모으는 걸 위안으로 삼았다. 마흔이 됐을 무렵부터 직장인밴드 붐이 일어 다시 밴드 활동을 했지만 만족할 수 없었다. 비틀즈와 상관없는 가요나 팝 음악 위주라 흥미를 잃어가고 있었다. 지난해 봄, 올 것이 오고 말았다. 비틀즈 초창기 메인 무대가 있었던 캐번클럽의 분위기를 닮아 단골로 자주 찾는 시카고클럽에서 현재 시틀즈 매니저가 되는 김태훈을 처음 만난다. 시틀즈의 시작이다. 그는 비틀즈에 대한 상당한 지식과 열정 그리고 전국의 비틀즈 팬들과 교류를 하고 있는 걸 알았다. 준비된 비틀즈 마니아였다. '이상도시건축'이란 건축설계 사무소장이기도 한 그는 1980년대 중반 한국 첫 비틀즈 마니아들의 모임이랄 수 있는 B·F·C(비틀즈팬클럽)에도 가입한다. 덕분에 서영교는 현재 폴의 역할을 맡고 있는 이준을 소개 받는다. 비틀즈 마니아 중의 마니아들존 레논 한정판 기타도 갖고있어대중이 잘 모르는 초기곡에 천착절묘한 화음 구현, 밴드의 승부처시카고클럽 캠프삼아 4차례 공연언론사 주최 톱밴드대회 수상도"존 레논 맡아줄 정식 멤버 모집"◆대구의 엡스타인 김태훈 매니저김태훈은 비틀즈 매니저였던 엡스타인의 근성과 열성을 빼닮았다. 그는 어릴 때 삼촌으로부터 비틀즈를 알게 된 이후 쉰이 넘도록 비틀즈가 그의 삶의 화두가 돼버렸다. 그에겐 소중한 꿈이 하나 있다. 영국의 리버풀이 비틀즈 고향인 것처럼 대구가 시틀즈의 고향이니 언젠가 대구에서 비틀즈 축제를 한 번 해보는 거다. 이준도 만만치 않은 친구다. 중3 때 세뱃돈으로 기타를 처음 구입했고 이후 20년째 자신이 다니는 성당의 밴드, 6년째 직장인밴드, 3년째 어쿠스틱 밴드에서 활동 중이고 38세 때 시틀즈 베이시스트가 된다. 특히 그는 비틀즈가 사용했던 기타와 동일한 5가지 모델을 모두 소장하고 있다. 'Epiphone John Lennon Limited Edition'(1965)은 존 레논이 1965년 이후 메인 기타로 사용한 모델을 전 세계 1천965대 한정 생산해 복각한 모델로 이후 폴과 조지도 사용한다. 'Hofner 63 relic'은 일명 '바이올린 베이스'로 불리는 독일 호프너사에서 생산된 일렉트릭 베이스로 폴이 이걸 사용함에 따라 호프너사는 바이올린 베이스로 유명한 회사가 된다. 'Gretsch 6128 George Harrison'은 조지가 초창기 캐번클럽과 독일 함부르크 시절, 그리고 정규앨범 1·2집에 사용한 기타로 일본에서 생산된 모델이다. 이밖에 독일 리켄베커사(Rickenbacker)로부터 협찬받아 사용한 두 종류의 기타도 갖고 있다.서영교는 이준과 자주 시틀즈의 방향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한다. 서울의 다른 트리뷰트 밴드처럼 예스터데이, 렛잇비, 헤이쥬드 등과 같은 인기곡에만 매달리지 말자고 다짐한다. 그보다는 비틀즈의 사각지대를 파고들고 싶었다. 비틀즈 데뷔 앨범과 무명시절 클럽에서 연주했던 곡부터 시작해보자는데 합의한다. 앤솔로지에 담겨 있는 이들의 초기 곡인 'Cry for shadow' 'Like dreamers do' 'Ain't she sweet' 'The sheik of araby' 등을 집중적으로 파고든다. 특히 정식 앨범으로 발매되지 않았던 1960년 초 곡들에 더 관심 갖는다. 이건 마니아들도 잘 알지 못하는 곡들이고 국내외 카피 밴드들도 잘 연주하지 않는 곡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걸 건드려야 최고란 소릴 들을 수 있다고 봤다. ◆우여곡절 데뷔공연팀명을 정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처음에는 서영교가 'Tax man'를 고민했다가 아니다 싶어 버린다. 다음에는 시카고 오준승 사장이 '대구비틀즈(DGB)'란 의미로 '대틀즈'를 생각했는데 그게 하필 대구은행을 연상시켜 또 폐기한다. 그러다가 비(B)틀즈 다음은 시(C)틀즈, 그게 괜찮을 것 같았다. 시카고 클럽을 캠프로 하는 비틀즈란 의미도 되니 시틀즈로 결정한다.비틀즈의 곡을 연주하려면 기본적으로 거의 비슷하게 연주를 해야 된다. 존·폴·조지의 절묘하고 극도로 유니크한 화음 연습이 밴드의 승부처였다. 그들의 화성은 그룹 퀸의 화성보다 한 수 위인 것 같았다. 이를 완성시키려면 반복해서 곡을 들으며 자신이 책임져야 할 화음 파트를 완전히 외우고 있어야만 됐다. 대충 했다간 불협화음이 되거나 다른 사람의 화음에 딸려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음악성이 있다는 친구도 비틀즈 화성 대목에선 다들 포기를 하게 된다. 많은 밴드들이 합주를 통해 곡을 완성해 가는 형태지만 비틀즈 밴드는 각자의 연주와 노래를 완전히 익혀서 합주하는 날 한두 번 만에 완성시켜 버려야 한다. 비틀즈의 과거 공연 영상, 해외의 유명 트리뷰트 밴드(Fab four, 부트렉 비틀즈, Them beatles 등) 공연 영상을 보고 참고해야만 한다.연주의 톤도 자기 방식으로 풀어나가선 곤란하다. 비틀즈에 최적화해야 된다. 이게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 비틀즈 곡을 연주하는 것과 흡사하게 연주하는 건 별개의 차원. 전자는 되레 쉬울 수 있다. 트리뷰트 밴드에 도전하는 연주자 대부분 비틀즈 활동 시기인 1960년대의 음악에 정통하지 못하다. 그 이후의 하드록, 헤비메탈, 펑크뮤직 등에 더 익숙해져 있다. 막상 합주를 해보면 비틀즈 특유의 사운드를 제대로 못 그려내고 다들 자기 스타일에 매몰되기 십상이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작년 3월쯤 매니저와 서영교, 그리고 이준 등 4명을 모아 합주를 시작한다. 이준을 제외한 2명은 시틀즈를 너무 쉽게 생각하고 덤벼들었다가 데뷔 공연을 1주일 앞두고는 순차적으로 그만둔다. 그 바람에 공연이 취소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조바심의 나날이었다. 문제는 존 레논을 커버할 마땅한 연주자를 대구 지역에서 찾아내기가 너무 어려웠다. 보다 못한 매니저가 지원사격을 한다. 오랫동안 알고 지내오던 경기도 의정부에 거주하는 김준홍에게 러브콜을 날린다. 그는 30년 이상 비틀즈 음악만 연주해온 나름 대한민국 비틀즈의 레전드다. 불 한 개는 껐지만 골치 아픈 문제가 하나 더 남았다. 링고 스타 커버 연주자를 찾지 못한 상태였다. 그래서 드럼 없이 공연하려고도 했다. 그 와중에 행운이 찾아왔다. 이준이 과거에 함께 밴드를 했던 드러머 박용환과 조우하게 된 것. 박용환은 고교 1학년 때 우연히 친구 따라서 밴드합주실에 갔다가 드럼이란 악기를 만난다. 20대 때는 하드록을 하면서 음반 한 장을 냈지만 실패하고 팀은 해체된다. 방황하다가 나이트클럽에서 연주 생활을 한다. 일본 오사카에서 오디션에 합격해 1년간 일본에서 연주를 한다. 귀국 후 음악을 접고 사업을 하던 중 후배 부탁으로 시틀즈 드러머로 활동을 재개한다. 레퍼토리 15곡의 드럼 파트를 챙긴다. 연습 시간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공연 하루 전날 처음으로 4명이 모여서 합주해보고 다음날 시틀즈라는 이름으로 공연을 했다. 지난해 5월이었다.공연은 이번 1주년 공연을 포함에서 4번을 했다. 대구지역 신문사 주최 톱 밴드 대회에도 참가해 동상을 받는다. 하지만 코로나로 인해 모든 행사가 취소돼 다양한 무대에 설 기회가 없다. 작년 가을 대구 동구 율하동에서 록밴드와 합동 공연을 할 때 이준은 저녁도 먹지 않고 자신의 차 안에서 그날 부를 노래를 연습하고 있었다. 한 곡을 100번 이상 연습하는 이준, 그런 멤버가 있어 시틀즈는 전도양양하다. 비틀즈가 발표한 곡은 240곡이 넘는다. 시틀즈는 이제 겨우 40여 곡을 건드린 상태. 향후 5년 정도를 계속해야만 발표곡 90%를 재현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급한 건 존 레논 파트를 맡아줄 숨은 고수를 찾는 일. 그 일도 조만간 성사가 될 것이다. 010-3266-1285. 비틀즈에 관한 소문, 사실인가요?Q: 마이클 잭슨이 비틀즈 음악의 저작권을 가지고 있다는데?A: 마이클 잭슨은 1980년대 중반 비틀즈 음악의 저작권을 가지고 있던 'ATV Music'이라는 회사를 인수해 대부분의 레논-매카트니 작품의 저작권을 소유하게 됐다. 하지만 1995년 지분의 50%를 소니 퍼블리싱에 매각했고 잭슨 사망 후 2016년에 나머지 지분을 Sony/ATV가 매입했다.Q: '폴이 죽었다'는 이야기는 뭔가? A: 1960년대 중반 폴은 가벼운 교통사고를 당한 적이 있다. 훗날 이 사고가 과장돼 폴이 사고당시 죽었으며 현재의 폴은 진짜 폴의 대역일 뿐이라는 루머가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에 의해 유포되며 적지 않은 사람이 이러한 이야기를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루머는 말 그대로 헛소문일 뿐이며 전혀 근거가 없다.글·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시틀즈의 베이시스트 이준이 소장하고 있는, 비틀즈가 사용한 기타 모델들. 특히 맨 왼쪽 'Epiphone John Lennon Limited Edition'(1965)은 존 레논이 1965년 이후 메인 기타로 사용한 모델을 전 세계 1천965대 한정 생산해 복각한 것이다. 가운데 제품 'Gretsch 6128 George Harrison'은 조지가 초창기 캐번클럽과 독일 함부르크 시절, 그리고 정규앨범 1·2집에 사용한 기타로 일본에서 생산된 모델이다.시틀즈의 객원 멤버 '존 레논' 김준홍(기타).시틀즈의 '폴 매카트니' 이준(베이스).시틀즈의 '링고 스타' 박용환(드럼).시틀즈의 '조지 해리슨' 서영교(기타). 〈채종찬씨 제공〉
[위클리포유 커버스토리] 비틀즈 트리뷰트 밴드 '시틀즈' (1) 음악을 넘어 전설이 된 英밴드 '비틀즈'…해체 50년 후, 대구에서 결성한 트리뷰트 밴드가 그들과 '접선'을 꿈꾼다
비틀즈(The Beatles)! 폴 매카트니·존 레논·조지 해리슨·링고 스타가 의기투합해 만든 영국 출신의 역사적인 록그룹이다. 문화 아이콘이 된 비틀즈, 그들은 해체되어도 그 영향력은 '마침표'를 찍지 않았다. 음악을 넘어 하나의 '종교'로 추앙받고 있다. '비틀즈 인문학'까지 탄생된다.1964년 2월7일 뉴욕에 도착한 비틀즈. 음악 평론가들은 이날을 특히 주목한다. 영국의 팝(브리티시 팝)이 미국의 팝(재즈 앤 록 앤 롤)을 압도하게 되는 시발점이 됐다는 의미로 '브리티시 인베이전(British invasion)'이란 표현을 사용했다. 비틀즈와 밥 딜런은 환상적인 물물교환을 했다. 비틀즈는 전자기타, 밥 딜런은 마약을 소개한 것이다.1960년 첫 앨범 'Please please me'을 낸 그들은 10년 뒤 그 유명한 마지막 곡 'Let it be'를 발표한다. 비틀즈 이별의 전주곡이었다. 음악적으로도 기질적으로도 안 맞았던 폴과 존, 둘의 골 깊은 불화는 결국 팀 해체로 이어진다. 1970년 4월10일 폴이 비장한 어조로 공식 해체를 선언한다. 비틀즈는 모두 12장의 앨범을 출시한다. 발표하지 않은 것까지 합치면 모두 260곡을 만들었다. 모든 곡이 '명곡'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비틀즈는 물성이 다른 두 세계를 오르내려야만 했다. 공연장에선 연예인으로 전락했던 비틀즈, 녹음을 위해 스튜디오 안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자신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었다. 당시 열악한 콘서트장 음향 시스템은 악몽이었다. 비명에 가까운 관중의 함성을 치고 나갈 수가 없었다. 모니터 스피커 사운드조차 들을 수가 없었다. 마네킹 같은 공연, '이건 음악 행위가 아니다'라고 탄식한다. 1966년 8월29일 샌프란시스코 캔들스틱 파크에서 열린 공연이 마지막이었다. 반전·반핵의 상징이었던 존은 1980년 12월8일 한 광팬에 의해 피살되고 조지는 2001년 11월 폐암으로 사망한다. 이후 비틀즈는 전설이 되어 세계를 쥐락펴락하고 있다. 비틀즈는 '사화산'이 아니었다. 그들은 음악평론가 임진모의 표현처럼 하나의 '인류문화유산'이었다.비틀즈 마케팅은 21세기에도 계속됐다. 1980년대는 비틀즈 CD가 포문을 연다. 1984년 '비틀즈 팬 클럽(BFC)'이 생기고 이걸 모태로 2004년 '네이버 한국 비틀즈 팬 카페'가 생겨난다. 이후 대구비틀즈모임도 생겨난다. 2013년 11월18일 서울 이태원의 한 카페에서는 비틀즈 앨범 '온 에어 라이브 앳 더 비비시 볼륨 2(On Air Live At The BBC Volume 2)' 발매 기념 청음회가 열린다. 2014년 5월28일에는 폴 매카트니의 내한 공연이 있었다. 이와 관련 이기일 등 작가들이 2013년 서울 롯데백화점에서 비틀즈 작품전을 오픈한다. 존 레논이 착용했던 선글라스도 경매에서 고가에 팔렸다. 2019년 12월 영국 런던에서 열린 소더비 경매에서 존 레논의 선글라스가 13만7천500파운드(2억2천여만원)에 낙찰된 것. 이 선글라스는 둥근 금테에 연한 녹색 렌즈가 끼워진 형태로, 비틀즈의 운전기사 겸 수행비서인 앨런 헤링이 존한테 선물 받아 간직하던 것이다. 비틀즈를 흉내내는 국내 밴드도 줄을 잇는다. 1964년 한국 첫 록그룹으로 기록된 키보이스와 애드포, 둘 모두 비틀즈를 카피하며 그들의 명성을 역이용했다. 1965년 결성된 그룹사운드 '김치스'도 비틀즈 커버 밴드로 활동했다. 그런데 2018년 5월 키보이스 멤버 차도균이 이를 문제 삼아 김치스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한다. 2000년 초 '디 애플즈(the Apples)'가 국내 첫 비틀즈 트리뷰트 밴드로 등장한다. 2000년 MBC 문화방송 시트콤 '세 친구'에서 정신과 의학 자문을 담당했던 표진인씨 때문에 이 밴드가 유명해지는데, 그는 이 밴드의 베이스 기타리스트 겸 보컬리스트. 이후 2008년 디 애플즈 멤버 김준홍이 독립해 '멘틀즈(Mentles)'를 만든다. 그리고 홍대 앞 20대 젊은 인디 뮤지션으로 구성된 '타틀즈(Tatles·리더 전상규)'도 태어난다. 그리고 1년 전 대구에서도 트리뷰트 밴드가 결성된다. 바로 '시틀즈(Ceatles)'다. 지난달 대구 수성구 블루스 전문 라이브클럽(대표 오준승) 시카고 무대에서 밴드 결성 1주년 기념 공연을 했다. 서영교(조지 해리슨·기타), 이준(폴 매카트니·베이스), 김준홍(존 레논·기타), 박용환(링고 스타·드럼)가 사이먼 가펑클 못지 않은 비틀즈만의 오묘한 화음을 봄날 햇살처럼 뿌려댔다. 글·사진=이춘호 음식·대중문화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올해 초 열린 비틀즈 사진전 포스터. 〈세종문화회관 제공〉비틀즈! 1970년 4월 해체됐지만 그 영향력은 '마침표'를 찍지 않았다. 1964년 한국 첫 록그룹으로 기록된 키보이스와 애드포, 둘 모두 비틀즈를 카피하며 그들의 명성을 역이용했다. 2000년 초 '디 애플즈(the Apples)'가 국내 첫 비틀즈 트리뷰트 밴드로 등장한다. 2008년 디 애플즈 멤버 김준홍이 독립해 '멘틀즈(Mentles)'를 만든다. 그리고 1년 전 대구에서도 트리뷰트 밴드가 결성된다. 바로 '시틀즈(Ceatles)'다. 지난달 대구 수성구 블루스 전문 라이브클럽(대표 오준승) 시카고 무대에서 밴드 결성 1주년 기념 공연을 했다. 서영교(조지 해리슨), 이준(폴 매카트니), 김준홍(존 레논), 박용환(링고 스타)가 오묘한 화음을 봄날 햇살처럼 뿌려대고 있다.
[언택트 바캉스] 한적한 시간, 한적한 곳으로…슬기로운 휴가 생활
7월과 8월 사이. 방학과 휴가 사이랄까. 벗어난다는 것! 그것도 일상에서 벗어난다는 것, 이때는 사실 목적지가 없어도 좋다. 일단 집을 벗어난다는 것, 그것 자체가 충전의 시작이다. 일상 그것은 '수직적'이지만 휴식은 '수평적' 물성을 지니고 있다. 여가를 즐기는 것과 휴가를 떠난다는 것, 둘의 질감은 좀 다르다. 관광은 여가, 여행은 휴가와 더 잘 어울린다. 관광은 소비적이라 수직적 울림을 갖고 있다. 하지만 문화적이랄 수 있는 여행은 소비보다는 힐링이 더 어울린다. 관광이 남길 수밖에 없는 숱한 피곤함, 여행은 그걸 '성찰'이란 아우라로 다져준다.한낮 기온이 35℃를 오르내린다. 성층권을 희롱하는 새하얀 뭉게구름은 끝을 모르게 부풀어 오른다. 그걸 배경으로 논두렁 밭두렁에 학처럼 서 있는 키다리 미루나무. 그놈은 외로울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그리움'이란 중화제를 선사한다. 그 미루나무 도로변 백일홍은 5월 장미의 붉은색보다 더 고혹한 자태를 지니며 초가을 어귀까지 뻗치며 '객수감(客愁感)'이 뭔가를 보여줄 것이다.땅바닥이 지글지글 달아오를 때 양지와 음지 사이에 상당한 온도 차가 발생한다. 이맘때 한옥의 대청마루도 멋진 '부채'가 된다. 더워질수록 되레 더 차가워지는 지점이 있다. 우리의 배도 그렇고 고향 집 우물도 그렇다. 우리의 장기는 한여름 더 차가워진다. 그래서 이열치열(以熱治熱) 보양식의 대명사, 옻닭 혹은 삼계탕, 닭개장 등으로 복달임했는지도 모르겠다. 더불어 텃밭의 오이와 고추는 날된장과 잘 어울리는 물에 만 꽁보리밥과 환상적 궁합이다. 열대야, '죽부인'만 한 시원한 이불도 없을 것이다. 아내는 장롱 깊숙이 넣어둔 삼베옷을 남편에게 내민다. 어머니는 요철이 있어 더 까끌까끌한 인견 지지미 이불을 아이들 방에 깔아주신다. 모깃불이 바이올린 선율처럼 은은하게 흘러가는 평상 위, 거기에 누워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심우주의 속살을 살짝 들여다본다. 눈앞의 뭇별이 실은 알집 버전으로 오랜 세월 전에 저 먼 우주가 자신에게 보내준 또 다른 우주라는 걸 유년 시절에는 다들 몰랐다.블루와 화이트의 완벽한 조화. 해안선은 수련의 잎사귀처럼 잠시도 멈추지 않고 너울댄다. 그 곁에 가수 윤종신의 서머 송으로 잘 알려진 '해변 무드 송'을 포개놓으면 금상첨화!여름이 바캉스 버전으로 부풀어 오를 때는 청춘의 가슴에는 어김없이 추억이 알알이 박힌다. 야자수 사이에 걸어놓은 해먹에 누워 우쿨렐레를 치면서 뭉실거리는 구름에 올라타 보기도 한다.세월은 흘러 이제 해외여행은커녕 바캉스조차 실종될 위기에 처해 있다. 전대미문의 대재앙, 바로 '코로나19'라는 불청객 때문이다. 그가 지구촌의 바캉스를 유괴해 버렸다. 이젠 코로나를 전제로 한 바캉스. 그렇다. '코캉스'에 적응해야 될 것 같다. 어느 순간부터 마스크는 신종 '국경'이 돼 버렸다. 집단은 개체로 흩어진다. 옹기종기·오순도순은 멀뚱멀뚱·우두커니로 교체된다. 대화 대신 혼자만의 상념의 시간이 우리 인식을 인문학적으로 주물러주고 있다. 휴가와 맞물려 돌아가는 독서와 산책, 그리고 넷플릭스 속 영화. 이건 코로나19도 틈입할 수 없는 '금균(禁菌)의 영역' 아닌가. 우린 어쩜 이번 코캉스를 통해 기존 관광과 여행에서 건져 올리지 못한 삶의 지혜를 더 채굴할 것이다. 그 시절 바캉스족 사이에 배낭에 꼭 넣어 가고 싶은 명품 산문집 1순위였던 '이방인'의 저자 카뮈의 스승이었던 장 그르니에의 '섬'을 이번에도 추천하고 싶다. 문학청년의 감성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면 작고한 소설가 박상륭의 난해하기 이를 데 없는 장편소설 '죽음의 한 연구'를 바늘 끝처럼 정독해보시길. 아무튼 Don't Worry Be Happy, 지금 우리는 코캉스 입구에 서 있네요. 이춘호 음식·대중문화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코로나19와 함께하는 두 번째 여름. 잠시 일상을 떠나 재충전하고 싶지만 마음이 편치 않다. 사람들이 몰리지 않는 공간과 시간에 가볍게 산책을 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일 듯하다. 경북 성주군 초전면 뒷미지 연꽃공원에서 한 가족이 사진촬영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국립청옥산자연휴양림. 백두대간 해발 800m에 자리잡은 7성급 캠핑장이다. 파도의 질이 좋아 '전국 3대 서핑 성지'로 꼽히는 포항시 북구 흥해읍 용한리에서 서핑 동호인이 서핑을 즐기고 있다. 보드에 누워 내가 감당할 수 있는 파도를 기다리는 것,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지혜가 아닐까.
[위클리포유 커버스토리] 적두병·흥국쌀찐빵·왕건사과빵…알 만한 사람은 다 알죠
경주 황남빵이 대구빵과 충돌해 만들어진 게 있다. 아는 사람만 아는 달성공원 앞 작은 빵집 '적두병(赤頭餠)'. 적두병? '붉은 콩으로 만든 팥빵'이다. 이 작은 가게는 이학철 사장이 빵을 굽고 커피까지 만든다. 이 사장은 IMF 때 제과제빵 분야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3~4년 일하면 공장장이 될 수 있다고 했지만 무려 10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 비로소 공장장이 된다. 2011대구커피문화박람회에서 우수 로스터상도 수상한다. 제과기능장인 윤환섭은 홍국쌀찐빵을 개발했다. 이현공단 내에 '대붕베이커리카페창업솔루션'이란 제빵 인큐베이터를 운영하는 그는 2016년 '강정보찐빵'을 론칭한다. 최근 달성군 화원읍 설화명곡역 7번 출구 앞에서 '사문진가마솥홍국쌀찐빵' 창업을 도왔다. 홍국쌀은 일반쌀에 '모나스쿠스'로 불리는 곰팡이균을 입혀 15~30일 발효시킨 분홍색쌀이다. 이와 견줄 별미빵이 또 첨가됐다. 동구 율하동 카페 '손수'에 가면 먹을 수 있는 '왕건사과빵'. 사회적기업 <주>지웍스가 지난해 3월 출시한 것이다. 동구 평광동 왕건사과마을의 사과를 활용해 만든 것이다.글·사진=이춘호 음식·대중문화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홍국쌀찐빵을 개발한 제과기능장 윤환섭.달성공원 앞 별미빵 가게로 알려지기 시작한 '적두병'.대구의 한 사회적기업이 선보인 '왕건사과빵'.
[위클리포유 커버스토리] '빵은 대구'로 보는 대구빵의 어제와 오늘 (2)...제빵계 주름잡던 3인방, 80년대 갑자기 사라진 까닭은?
고사 직전 '마약빵'으로 부활한 대구 중구 동성로 3가 삼송빵집. 광복 직후 서모 사장이 세운 삼송빵집의 상호를 계승했다. 지금은 '삼송'이란 상호가 하나밖에 없지만 20년 전만 해도 서구 등 변두리에 몇 개 있었다. 삼송이 그만큼 유명한 탓이었다. 삼송의 주인은 여러 번 바뀐다. 중구 공평동 스텔라 베이커리 김호상 사장, 옛 송죽극장 옆 뉴델제과 최종수 사장도 삼송 간판을 걸기도 했다. 삼송은 1960년대 중반 대형 화재를 당한다. 이 화재는 1973년 6월6일 송죽극장 옆 뉴델제과 화재와 함께 대구의 대표적 빵집 화제로 기록된다. 삼송은 신축된 뒤 종업원이 한 번 맡았다가 1973년쯤 역시 삼송의 기술자였던 박명호·정옥희씨 부부한테 넘어온다. 이들이 삼송의 마지막 사장이 된다. 박 사장은 '탈(脫)대신동'을 결심하고 1987년 2월 제일극장 맞은편으로 이전한다. 하지만 대구도시철도 1호선 공사, 그리고 파리바게트의 공세에 휘청거리기 시작한다. 그런 어느 날 대반전이 일어난다. '마약빵 신드롬'이 발생한 것. 친구 사이인 밀밭베이커리(1982년 개업) 이정부 사장이 아이디어를 건넸고 그걸 토대로 대박을 친다. 밀밭도 특허권을 가진 '메론빵'으로 대구빵의 위력을 더욱 증강시켰다.두개의 고려당대구 최초 윈도 베이커리 연 하경봉 63년 月 전화통화 수 1천여통 '핫플'잘 나가다 빗나간 풍류 행각에 몰락마요네즈 식빵으로 유명한 강대건 향촌동 고려당 열고 우레볼 선보여◆고려당을 아시나요대구 고려당은 두 라인이 있었다. 선두주자는 하경봉, 후발주자는 강대건. 하경봉 고려당은 1955년 중구 화전동 옛 대구극장 입구 오른편 모퉁이에서 개점된다. '대구 첫 윈도 베이커리'로도 평가된다. 1963년 2월22일 영남일보에 소개된 고려당 전경 사진을 본다. 철봉으로 만든 출입문 손잡이가 눈길을 끈다. 경영은 아내 이민두가 전담한다. 경남 의령 출신인 그녀는 광복 직후 대구로 와 중구 봉산동에서 살다가 고려당을 경영한다. 분위기를 위해 저출력 전축도 갖추었다. LP판을 바꿔주는 '판돌이'까지 있었다. 1963년 2월 고려당 전화통화 수는 무려 1천484통, 대구시 접객업소 중 최다 통화수였다. 하지만 주인 하씨의 '빗나간 풍류 행각'으로 인해 고려당은 몰락(1969년)한다. 아내가 1970년 대구를 떠나 서울 명동에서 명성을 재현해보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강대건의 고려당도 있다. 1990년대 후반까지 수성구 수성동2가 수성시장 남측 길 모퉁이에 있었던 고려당. 상당수 지역민은 1969년 사라진 하경봉 고려당으로 착각한다. 충북 옥천에서 태어난 강대건은 18세부터 빵과 인연을 맺어왔다. 광복 직후 부산으로 내려간 그는 부산시 보수동1가 백천당에서 제빵 기술을 배웠다. 이후 한일극장 맞은편 뉴욕제과 강신영 사장으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는다. 그는 뉴욕제과 수준을 한 단계 올려놓는다. 다른 집에선 선보이지 않았던 '마요네즈 식빵'도 개발한다. 고려당이 사라진 뒤 뉴욕제과는 대구 최고의 제과점으로 등극한다. 하지만 그는 고려당 사장이 되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1972년쯤 향촌동 초입 상업은행 대구지점 북측에 '강대건 고려당'이 등장한다. 히트작은 껍질을 벗긴 팥을 앙금처럼 응고시켜 구운 밤처럼 생긴 '우레볼'이었다. 하지만 1990년대 초 지하철 1호선 공사로 인해 심각한 타격을 받는다. 버티지 못하고 도심을 벗어나 1994년 수성시장 근처로 이전하지만 이내 문 닫고 만다.소리없이 사라진 3인방사라다빵으로 대박났던 뉴욕제과즉석 제빵 시스템 도입한 황제당하절기 빙설 선보였던 런던제과제빵계 주름잡다 80년대 문닫아수익감소·정치압력…뒷말 무성◆대구빵의 골드러시 1970년대 대구 제빵계를 주름잡던 3인방이 있었다. 바로 뉴욕의 강신영·이점석, 뉴델의 최종수, 런던의 조원길 사장이다. 그땐 여건이 좋았다. 섬유경기가 호황이었고 패스트푸드가 대구에 본격 상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동시장 초입 오른쪽 모퉁이 보래옥을 인수한 강신영은 '뉴욕제과'로 상호를 바꿨고 훗날 한일극장 근처로 이전해 대구 최고의 제과점으로 성공시킨다. 강 사장은 1970년대 대구 상권이 남동진한다는 사실을 알고 한일극장 근처로 자릴 옮긴다. 강 사장은 직원 복이 많았다. 대구에선 처음으로 모닝식빵을 개발한 중구 포정동 풍차베이커리 사장 권영오, 수성구 시지에서 뉴욕제과를 오픈한 김정환, 고려당 베이커리 사장 강대건 등이 그곳을 거쳤고, 그때마다 신제품을 개발해줬다. 그런 연유로 뉴욕의 '사라다빵'이 불티나게 팔린다. 하지만 집안 사정으로 뉴욕은 도중하차하고 옛 동원예식장 지하 동원제과점을 운영한 상주 출신의 이점석(전 대구경북제과협회 지회장)이 뉴욕을 인수해 더욱 발전시킨다. 뉴욕의 아성에 도전한 게 바로 옛 송죽극장 동편에 있었던 '뉴델제과'. 최종수는 처음엔 과자 도매점도 하면서 기반을 다진다. 그는 런던제과와 뉴욕제과 사이에서 고사 직전이던 킹뉴델을 '황제당'으로 상호를 바꾸어 런던과 팽팽한 접전을 펼친다. 황제당 '즉석 제빵 시스템'은 이후 전국적으로 선풍을 일으켰고 후에 지역 제빵사들은 너도나도 그 모델을 도입하게 된다.1970년대 초 동성로 동아백화점 네거리 근처에 있었던 옛 원호청 자리에 또 하나의 무시무시한 저력을 가진 제과점이 들어온다. 바로 '런던제과'였다. 특히 하절기엔 빙설이 강했다. 하지만 뉴욕·뉴델·런던은 전두환 정권 말기쯤 갑자기 사라진다. 3인방은 나름대로 부동산 자본을 확보하고 있었고, 또한 제빵 영업이 갈수록 마진율이 줄어든다는 걸 알고 있었다. 부가가치세(1977년 도입)로 인해 수익률까지 날로 감소했다. 1980년대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각종 패스트푸드가 대구를 공략하기 시작한다. 제빵산업이 한계에 도달했다는 걸 안 것이다. 또한 지역자본가로 성장한 그들을 겨냥한 정부 당국의 정치자금 압력도 달갑지 않았다. 그런 연유로 86아시안게임·88서울올림픽 특수를 누려보지도 못하고 한꺼번에 문을 닫아버린다. 그 흐름을 역이용한 게 '공주당'이다. 성주군 월항면 출신으로 맨손으로 대구로 와 공주당 브랜드를 만든 박건서 사장. 그는 1970년대 초 동아백화점 맞은편 석탑베이커리 옆 골목에서 허름한 간판의 도넛 전문점을 차렸다. 공주당은 1997년 박 사장의 조카 찬홍씨가 인수해 명맥을 이었고 10년 전부터 시내 여러 카페에 빵을 납품하면서 저변을 확대했다. ◆오복빵북구 침산동 1015번지, 3산단에 자리 잡은 오복빵은 오복건빵과 함께 1970년대 구멍가게를 주름잡았던 인기 브랜드. 그때 대구의 대량 생산업체로는 수형당이 선두였고 오복빵이 그 뒤를 따랐다. 광복과 함께 서울 을지로에서 태어난 삼립도 1970년쯤 지역을 공략하기 위해 북구 칠성동1가에 대구센터를 설립한다.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오복빵이 선두권이었지만 결국 부산에서 생겨난 <주>기린한테 1979년쯤 잡아 먹힌다. 1982년 기린 산하에 '밀탑사업부'가 생긴다. 파리바게뜨가 등장하기 전 10여 년 밀탑은 대구시장을 공략하기 쉬웠다. 전국에선 처음으로 셀프서비스란 걸 도입한다. 그 전만 해도 직원이 빵을 골라줬는데 밀탑은 손님이 직접 고르도록 했다. 인기 절정이었던 밀탑도 2002년 대구에서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기억해야 할 빵집들전국 첫 셀프서비스 도입한 밀탑일본식 제빵 문화 뒤집은 스텔라동아백화점 옆 도넛 맛집 공주당삼송의 마약빵과 밀밭의 메론빵대구가 사랑한 '잊을 수 없는 맛'◆기억하자 스텔라베이커리1980~90년대 초 대구 사람치고 대구 중구 공평동 '스텔라 제과점'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광복 직후 형성된 일본식 제과제빵 문화를 대구 정서에 맞게 발전시킨 제과점 중 하나가 바로 스텔라다. 김호상(본명 김태성) 사장은 아직도 대구 제빵인에겐 입지전적 인물로 추앙받는다. 안동 출신의 김 사장은 '빵을 위해 태어난 사람'이었다. 그의 기술은 대구에 머물지 않았다. 국제적이었다. 사업은 '희극'이었지만 그의 삶은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다. 1990년대 말 어느 날 밤, 김 사장 내외가 자신의 아파트에 침입한 괴한에게 피살된 것이다. 이후 대구빵은 침체기를 거쳐 서구 동네 맛빵 시대를 딛고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케이크전문점(최가네케이크) 등이 베이커리카페 시대를 개척한다. 글·사진=이춘호 음식·대중문화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고사 직전 삼송빵집을 기사회생 시킨 마약빵.박기태 단팥빵과 함께 단팥빵 붐을 일으킨 약전골목 입구에 있는 근대골목단팥빵.한 자리에 모인 3인의 대구빵 산증인, 좌로부터 최가네 케이크의 최무갑, 풍차베이커리의 권영오, 공주당 시대를 이끈 윤문식
의료대란으로 번진 의대 증원
[의대 증원 집행정지 각하·기각] 정부, 대학 "2025학년도부터 의대 증원 속도"
"20일까지 전공의 복귀해야"…전문의 취득 늦어질 가능성 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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