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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춘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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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춘호기자의 행간을 찍다] 晩秋…바람이 분다
바람이 분다. 움직임이 곧 바람인가? 그럼 움직임이란 곧 '균형'인가? 균형은 그럼 '우주 에너지의 총합'이라고 하면 안 될까? 하루에도 몇번씩 내면에 이는 바람의 골을 감지한다. 순행도 있지만 대다수 '악행(惡行)'을 일삼는다. 시기와 질투, 그리고 자만과 오만, 그리고 거만, 이 범주를 넘어 어떤 대상을 저주하게 될 때도 있다. 눈물에 피가 섞이게 된다. '피눈물'이 삶의 정점이자 절정일까. 그걸 찍으면 신기하게 모든 게 이해 된다. 피눈물은 여름을 겨울로 만들기도 하지만 눈을 꽃으로 빚기도 한다.당신은 그런 피눈물, 몇 번 겪어 봤는가. 우리 현생 인류는 '빙하기적 몰살기'를 딛고 나서 '원시 사회적 생존기' '중세 종교적 암흑기' '식민지'란 이름의 '제국주의적 침략기', 두 번의 세계대전을 거쳐 미국과 소련의 '살육'에 가까운 '이념적 냉전기'를 딛고 지금은 유대인을 축으로 좌우에 미국과 중국이 주도하는 '자본주의적 배타적 독점기'의 긴 터널을 지나가고 있다. 그런데 2007년 어름부터 '구글'이 2대 조물주로 취임한다. 1대 조물주는 성경과 불경, 각종 경전이 주도했던 수천 년, 그리고 그 앞선 250억 광년의 우주 탄생기와 맞물린 49억년의 지구 형성기를 관장했다. 하지만 신임 2대 조물주는 친히 세상을 요리한다. 보이지 않던 신이 친히 '신물질'이란 이름으로 강림하신 것이다. 유튜브는 가히 '천지창조'다. 가히 인류사 최강 '블랙홀'이라 명멸해줄 만하다. 누군 '개뿔 구글'이라고 투덜댄다. 다시 바람이 분다. 내 맘이 분다. 그 바람에 가을이 누룩처럼 번진다. 허공도 발효된다. 가을바람도 한 자락의 알코올. 하절기 건너느라 고단해진 세상의 모든 이파리들이 떼로 모여 앉아 '낮술 삼매경'에 드는 시절이다. 꼭지가 돌아버린 잎은 서둘러 헤벌쭉 벌어진 걸음으로 비틀비틀 도로를 맘대로 질주한다. 그들에겐 신호등도 필요 없다. 태현의 '구월이 가기전에'를 들어본다. 1970년대 가을 정서를 저격한다. 다시 난분분 낙엽이다. 나는 대구발 끝물 낙엽의 폐업 신고일을 '11월13일'이라고 믿는다. 수십 년 만추의 끄트머리를 추적해온 결과다. 가을은 정면으로 오지 않는다. 뒤로도 오지 않고 옆으로 엇각으로 비스듬히 온다. 가을엔 표정이 지워지고 없다. 뒤태에 무게 중심이 실린다. 머플러 깃도 뒤로 넘어가야 된다.남자의 뒤태는 허세, 여자의 뒤태는 허영의 산물. 그래서 망한 놈이 흥하고 흥한 놈이 완전 폐가망신한다. 너무나 통쾌한 욕망의 순행이다.가족을 위해 올인할 때 뒤태 근육은 날이 서 있다. 뉴요커의 뒤태를 보라. 불퇴전,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다. 반듯한 보법, 꼿꼿한 척추, 최대한 부풀어 있는 엉덩이, 그리고 정면을 향하고 있는 머리·팔은 시계추처럼 일정한 각도를 유지한다. 거기에 멋진 슈트와 잘 가위질 된 머릿결. 하지만 이 스타일은 유통기한이 있다. 원하던 부를 소유하고 가족도 잘 키워내고 그 결과 오순도순 캠핑장 바비큐 파티와 같은 넉넉하고 풍족한 시절을 지날 때쯤 전사 같던 그 뒤태는 이윽고 무장해제 되고 촛농처럼 흘러내린다. 묶었던 머리를 풀어버렸을 때처럼. 더 원만한 경지에 들어가면 모든 보법이 바람결 혹은 물결 같다. 아차차, 요즘 이 나라 여자의 뒤태는 남자와 달리 가을을 맞으면서 생기를 찾는 모양이다. 중년 남성의 가을은 '우울표'란 등식도 옛말이다. 오히려 청년백수의 가을이 '우수수표'랄까? 내가 남보다 더 나을 게 없다는 생각을 할 때, 해를 등진 어떤 가을은 곁을 지나가는 바람을 더 야위게 할 만큼 싱싱하다. 그런 정서 한 자락을 수성못 호반 레스토랑에서 한 컷 스캐닝해 봤다. 아무튼 잔나비 노래 같은 가을날이다.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
[이춘호기자의 카페로드] 온 더 레일(On the rail)..."칙칙폭폭~ 주문하신 커피 나왔습니다" 사람 대신 기차가 서빙
대구 달성군 가창면은 최정산이 있어 단위면적당 상당히 깊숙한 계곡을 품을 수 있게 됐다. 대구텍 정문 앞 삼거리에서 팔조령으로 뻗는 국도. 용계동을 지나 냉천, 그리고 대일리 방면으로 가면 좌우는 의외로 산세가 우뚝하다. 대일리에서 좌회전해 상원리로 접어들면 단산지 언저리 들판에서 잠시 멈추게 된다. 사방을 둘러보면 알겠지만 숨겨진 비경의 한 조각을 발견한 듯한 기분이 든다. 기자는 봄철 그 언저리에서 봄나물 무침을 위해 소루쟁이를 채취하거나 잠시 캠핑 의자에 앉아 멍 때리기를 즐긴다. 이 비경을 무척 좋아한 5명의 화가가 있다. 불이 들지 않는다는 깊고 깊은 상원리 계곡에 처음 입곡한 화가 김일환, 그는 대일리~단산리~상원리로 연결된 익숙하면서도 생경한 풍경의 힘을 일찌감치 발견했다. 그 다음은 우록리에 진을 친 박중식, 뒤에는 권기철(현재는 팔조령 옛길 초입으로 이전), 이태현, 남춘모 등이 가세한다. 가창면 명물 식당도 다양한 스펙트럼을 유지하고 있다. 닭 요리가 지배적이다. 닭백숙의 양대 산맥은 단연 '큰나무집'과 '토담집'. 큰나무집은 한강 이남 최강 궁중닭백숙 전문점으로 자릴 잡았고, 토담집은 옻닭 하나로 미식가의 입을 사로잡았다. 한때 한강 이남에서 가장 파워풀한 닭백숙 촌으로 불렸던 냉천유원지 상가는 성주식당 하나만 남겨두고 모두 사라져버렸다. 전성기에는 쌍바위, 성주식당, 버들집, 찬샘집, 높은집, 청수장, 냉천장 등 7곳이 운집해 있었다. 스파밸리 상권과 맞물려 냉천 푸드타운이 형성되면서 닭백숙 촌은 지역민의 뇌리에서 사라져버렸다. 이밖에 '묵쳐 먹고 가는 집'의 별난 묵, 유자 먹인 장어, 지방도를 라이딩하는 자전거족에게 잊을 수 없는 맛을 선사해주는 '세명식당'의 묵은지 곁들인 돼지국밥. 용계리 '올드로드'는 LP 비어레스토랑스타일인데 '더치오븐치킨'으로 입소문이 났다. 블록·피규어·미니어처 좋아하던 남자백숙집을 전망 좋은 통유리 카페로 개조모형기차 직구…40초 서빙시스템 구축커피 직접 로스팅하고 빵도 구워내◆기차로 서빙하는 이색 카페언젠가부터 밥을 먹고 나면 어김없이 커피를 불러내야 직성이 풀린다. 가창면에도 3년 새 이런저런 핫플 카페가 피어났다. 최정산 주변 최강 핫플 카페는 단연 문 닫은 오리농원 가든을 베이커리카페로 리모델링 해서 초대박을 낸 '오퐁 드 부아'다. 그리고 근처 최정산 군부대 옆 목장 카페 같은 '대새목장'도 다크호스. 주리 계곡 방면으로 우회전해서 산길을 올라간다. 군부대 가는 길, 주리 먹거리 타운 가는 길로 잘 알려져 있다. 그 산길 초입 오른편에 '온 더 레일(On the rail)'이라 적힌 간판이 보인다. 오늘의 목적지는 바로 이 카페. 전희재(34). 계명대 식품가공학과를 나온 그는 2000년 그 언저리에 '시골농부'란 백숙과 불고기 전문 식당을 차린 부모를 위해 2019년 8월 신개념 카페를 오픈한다. 그는 어릴 때 블록, 피규어, 모형 장난감, 미니어처 등에 엄청난 호기심을 가졌다. 덕분에 각종 기계와 기구를 조작하는 감각을 익힐 수 있었다. 부모를 도우면서 요리에 대한 감각, 신재료 갈무리 하는 법 등도 체득하게 된다.일반 식당 업무는 카페와 비교해 몇 배 노동강도를 갖고 있다. 부모가 감당하기 어려웠다. 부모도 아들이 가업을 이어받아 새로운 형태의 가게를 차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대학 시절 외식업 전문 사업가의 꿈을 꾼다. 첫 아이템도 미리 구상한다. 기차가 직접 커피와 빵을 직접 서빙해주는 신개념 서비스다. 모형 기차를 국내에선 구입하기가 어려웠다. 7년 전 1년 일정으로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갔을 때 친해진 독일 친구한테 도움을 많이 받는다. 유럽에선 꽤 많이 유통되는 모형 기차, 그걸 구동하는 법, 수리에 필요한 부품 등도 스스로 알아낸다. 일단 해외 직구를 통해 모두 10대의 모형 기차를 구입했다. 홀 중앙에 최연장 10곒 미니 레일을 가설하고 좌우에 테이블 8개를 놓았다. 기차 위에 주문한 메뉴를 탑재하고 버튼을 눌러준다. 기차는 로봇처럼 지정된 번호의 테이블에 도착한다. 메뉴를 내리면 자동으로 출발선으로 되돌아 온다. 걸리는 시간은 총 40초. 개업 초기에는 20초, 이어 30초, 급한 것 같아 결국 40초로 설정하게 된다. 모형 기차라 하지만 꽤 고가다. 기차 서빙은 우리와 달리 유럽과 일본에서는 이미 유행하고 있는데 그는 그걸 재빨리 사업으로 벤치마킹한 것이다. 기존 백숙집 면적은 99㎡(30평) 남짓, 이를 카페로 리모델링하면 그림이 제대로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일단 모두 부수고 신축한다. 사방이 최정산 자락, 그 동쪽에 늘 풍광이 변하는 주동지가 있다. 하절기 부레옥잠 머금은 돌확 같은 이미지다. 계곡 사이를 파고드는 근교 시골길의 호젓함도 실시간으로 만끽할 수 있게 하려면 층고는 꽤 높게 설정해야 된다. 3면 벽체는 모두 장방형 통유리창으로 장착했다.기차를 주제로 한 카페, 당연히 카페 입구에도 기존 레일과 같은 규모로 가설해야 된다. 하지만 철도청 재산이었다가 일반에 엄청나게 팔려나간 레일과 침목은 과수요 때문에 이젠 구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다행히 경남 모처에서 15곒 분량의 레일을 확보할 수 있었다. 커피는 직접 로스팅룸에서 볶아 낸다. 볶은 콩은 보름 내 소진시키는 걸 원칙으로 한다. 아메리카노(4천800원)는 브라질·과테말라·에티오피아를 혼합해 사용한다. 매대에 깔리는 빵 종류는 대왕크루와상(4천300원), 몽블랑(4천300원), 갈릭버터바게트(5천800원) 등 20여 종. 그는 빵 만드는 것도 혼자 감당한다. 한눈에도 용암 같은 열정을 가진 청년 같다. 곁에서 이를 지켜보는 부모의 미소는 커피향보다 더 진했다. 가창로 93길 52. 휴무는 수요일. 글·사진=이춘호 음식·대중문화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부모가 운영하던 기존 닭백숙집을 과감하게 부수고 모형 기차가 직접 서빙을 해주는 기차를 주제로 한 베이커리카페 '온더레일'. 기차는 주방을 출발해 주문한 테이블에 메뉴를 실어주고 본 역으로 되돌아온다. 걸리는 시간은 모두 40초.대왕 크루와상과 몽블랑, 아인슈페너.
[위클리포유 커버스토리-이춘호기자의 카페로드] 해브 갤러리·펀 앤 락
패션디자이너 최복호 오빠(그는 모든 남자를 '오빠'라 부른다). 그를 화가로 변신케 한 복합문화공간 '펀 앤 락', 얼추 13년의 역사가 됐다. 그는 평생 가슴에만 담아 왔던 화가 꿈을 올해 성사시킨다. 대백프라자 갤러리에서 1회 개인전을 했다. 원색을 정말 잘 사용한다. 마티스·모네·샤갈 풍의 색감, 거기에 뉴욕의 광기를 한 몸에 안은 바스키야풍의 덧선이 잘 중첩돼 있다. 작업실 곳곳에 송판이 수북하다. 꼭두를 닮은 별별 나무 인간을 조각하고 있다. 최백호, 정훈희, 양희은, 노사연 등 쎄시봉 시대를 추억하는 포크 뮤지션을 대거 불러 내려 공연을 벌였던 잔디광장 한쪽 사과나무는 수양매처럼 가지가 아래로 드리워져 있다. 근처에 또 다른 복합문화공간 스타일의 카페 '해브(HAVE)'가 있다. 그 공간의 터줏대감은 사진작가 류태열. 그의 친구인 이강(치과의사)이 7년 전 아내(김효선)를 위해 지은 공간이란다. 불교사진에 심취해 있는 그는 해브 갤러리 큐레이트 겸 손님을 위해 포토카페에서 커피까지 내리는 바리스타. 봄철~하절기, 여긴 유럽의 정원 같다. 곳곳에 다양한 스타일의 테이블을 마련해 뒀다. 여름에는 수국이 압도한다. 맞은편 길 건너에 한옥 카페 '아자방'이 있다. 글·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사진작가 류태열의 작업실과 공존하는 복합문화공간 갤러리 카페 '해브'.패션디자이너 최복호가 청도군 각북면에 마련한 복합문화공간 '펀 앤 락'. 올해 첫 개인전을 열며 화가를 선언한 최복호의 작품이 가득하다.
[위클리포유 커버스토리-이춘호기자의 카페로드] 각북면 오리 '월든'
902번 도로에서 만난 세 번째 물성은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명저 '월든(Walden)'. 이 책과 맞물린 두 사내의 드림랜드가 이 구간에서 만날 수 있다. 1988년 8월8일 대구시 달성군 가창면 정대리의 한 비슬산 자락. 대구산업정보대(현 수성대) 교육학과 교수 김동일은 정대숲 맞은편 산길로 들어선다. 산과 한 몸이 되기로 맘을 먹는다. 맨손으로 흙을 파고 돌을 져 나른다. 2005년 9월10일 '루소의 숲'이 피어난다. 소리소문없이 이 공간이 알려진다. 산길로 100여m 올라가면 버드나무에 입구 팻말이 보인다. 왼쪽으로 조금 걸어 올라가면 처음 방문객을 맞이하는 '바람터'가 있다. 개여울을 건너 1분쯤 걸어 올라가면 왼편에 2평(6.6㎡) 남짓한 공연장인 '소리샘'이 있다. 김 교수의 클라리넷 소리가 피어나기도 한다. 여기는 비상업적이다. 탐방로 끝에 숨어 있는 호숫가에 앉아 보면 소로의 맘을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보온병에 담아 온 커피도 금상첨화. 갈 때는 왔을 때처럼 주변 정리해줄 것.각북면 오리에 '월든'이란 통나무 카페가 있다. 2019년 4월 오픈했는데 주인 부부는 전문직의 삶을 살아왔다. 남편은 월든의 정신에 푹 빠졌고 7년 전 도시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이 자리에 있던 레스토랑 허브캐슬을 인수해 북유럽 카페 버전으로 숙성시킨다. 10그루의 왕벚나무, 영국 장미, 각종 허브류 등 얼추 80여 종의 초화류를 감상할 수 있다. 잔디밭에는 5개의 벤치가 있다. 거기 앉으면 비슬산 정상인 조화봉이 한눈에 들어온다. 커피는 케냐 AA·브라질·콜롬비아 수프리모를 혼합해 사용한다. 화장실에 가면 잠시 남편의 생각이 '월든 생각'으로 적혀 있다. 부부는 이 공간이 '가족 전문 전원카페'로 사랑받았으면 좋겠단다.글·사진=이춘호 음식·대중문화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청도군 각북면 오리에 들어선 패밀리 가든 같은 힐링 카페 '월든'의 밤 전경. 친환경 마인드가 출중한 주인 부부의 삶의 철학이 깃든 층고 높은 통나무 카페다.
[위클리포유 커버스토리-이춘호기자의 카페로드] 각북면 남산리 '로카커피'
지역 첫 관광농원으로 주목을 받았던 각북면 남산리 '군불로'에 명물 카페 '로카 커피'가 들어섰다. 그 농원에는 우직한 꿈을 가진 남자가 있다. 경남 합천 출신으로 지역에서는 빠르게 휴대폰 사업 선두주자로 나섰던 이진환. 그의 가업은 두 아들에게로 이어진다.21년 전이었다. 이진환은 자신이 그동안 번 돈의 상당 부분을 장사가 안돼 방치된 임마뉴엘(일명 별천지) 농원 매입을 위해 쾌척한다. 무려 9만9천㎡(3만평), 상당히 넓은 공간이었다. 농사만 짓고 농작물만 생산되는 과거의 농원이 아니었다. 레스토랑·카페의 기운이 스며간 신개념 농원이었다. 그런 소리를 들으려면 도시보다 몇 배 끈기와 안목이 있어야 한다. 숯가마가 있는 찜질방, 숯불바비큐를 즐길 수 있는 식당 공간, 세미나실 등을 갖추었다. 각종 연수, MT, 동창회, 가족 모임 등에 초점이 맞춰진다. 구릉지에 서서 사방을 돌아보면 일망무제(一望無際)의 무릉도원에 온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그 풍광에 반한 화가가 있었다. 계명대 미대 교수였던 화가 김전이다. 그는 서둘러 퇴임을 하고 군불로 상류 계곡 언저리에 자기만의 아틀리에를 마련했다. 오크밸리 등 근처에 이런저런 펜션이 많이 들어섰지만 당시에는 별다른 개발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이기철 시인도 대구를 벗어나 전원으로 들어와 마련한 시 사랑방 격인 '여향예원', 작고한 소리꾼 이명희는 제자 양성을 위해 근처에 전수관을 마련한 바 있다. 야심차게 시작된 군불로. 초창기와 달리 갈수록 트렌드를 실시간으로 따라가기 힘들었다. 2010년부터 경영이 많이 어려워지기 시작한다. 형제는 관광농원의 내구연한이 다 됐다고 분석한다. 새로운 피를 수혈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닌다. 하절기를 겨냥, 멋진 풀장을 가동한다. 비수기인 동절기를 위해 절벽 공간에 폭포와 눈썰매장을 조성했다. 아이들이 좋아하고 사진 찍기도 좋으니 가족 모임이 늘어나기 시작한다.점차 가족을 겨냥한 패밀리마케팅전략에 집중한다. 숙박, 식사, 찜질방, 체험 등을 패키지로 묶어 예약을 유도했다. 체험도 중요하다 싶어 근처 농가와 계약을 했다. 봄가을에 딸기, 감나무, 사과 수확 체험을 병행했다. 또한 계절별 포토존을 확충하기 위해 핑크뮬리, 백일홍, 메밀밭 등을 꾸몄다. 장남은 팔공산의 대표적 베이커리카페인 헤이마를 벤치마킹한다. 특히 코로나 정국이라서 넓은 야외, 자기만의 느긋한 테이블 타임이 차세대 신가치로 정착될 것 같았다. 헤이마를 인테리어한 임경묵 인타이틀 디자인그룹 대표와 손을 잡는다. 임 대표는 카페 '빌리 웍스(BILLY WORKS)', 청도 운문댐 하류보 유원지가 내려다보이는 낡은 식당을 리모델링한 '밀톤(MILLTON)', 대구 대명동 앞산에 위치한 '더 웨스틴 대구'를 디자인했다. 그렇게 태어난 카페 '로카커피'. 로카는 '바위에 올라간 사슴'이란 뜻을 갖고 있다. 실내 어느 곳에서도 폭포가 보이게 넓은 통유리창을 사용했다. 노출콘크리트 바닥에 실개천 같은 홈을 파고 거기에 돌을 집어넣었다. 3개의 돌멩이를 철근에 꼬치처럼 매달아 놓았다. 자연스럽게 포토존이 된다. 건물의 주조 색은 노랑. 소파도 그 색에 맞췄다. 폭포와 어울릴 수 있게 건물 앞에도 스톤 존을 그려놓았다. 길쭉한 송판 테이블에 앉아 휴대폰도 잠시 옆에 두고 망연히 폭포를 감상하는 손님들. 로카가 안겨주는 '호사스러움'이다.글·사진=이춘호 음식·대중문화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벽천에서 떨어지는 물줄기가 커피향을 더 로맨틱하게 만들어주는 로카커피.
[위클리포유 커버스토리-이춘호기자의 카페로드] 가창댐 갤러리카페 '동제미술관'
가창면사무소 앞에 도열한 모락모락 찐빵 거리. 그게 끝나는 가창댐 삼거리에서 우회전하면 왼쪽에 빈티지 카페 '센스컵'이 보인다. 빨간 문을 열고 지하로 내려가면 거울, 촛대, 초, 접시, 컵, 의자, 침대, 전등갓 등 아기자기하고 알록달록한 유럽풍의 다양한 소품이 홀 곳곳에 포진해 있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혹은 '신데렐라·피터팬스러움'이 전해진다.◆동제미술관 카페 & 파노라마 풍경가창댐 상류에서 좌회전, 운흥사 계곡으로 향하면 초입에 스몰 웨딩으로 유명한 '스위치 온'이 나타난다. 나무와 나무 사이에 커튼이 드리워져 있고 주말이면 가족과 친척 정도만 참석하는 쉼표가 있는 느긋하고 풍족하고 이야기가 푸짐해지는 야외결혼식이 이어진다.20년간 무려 4번이나 크고 작은 리모델링을 거쳐 나름 가창댐 권에서 가장 좋은 뷰를 자랑하는 동제미술관. 가창댐과 최정산, 그리고 앞산권의 접점에 위치해 있다. 풍광을 해치는 고압전선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알프스 어느 산록의 홍차 전문 로즈가든에 온 듯 하달까. 2002년 모습을 드러낸 이 공간은 지역에서는 탈도심 갤러리카페의 신지평을 연다. 팔공산 언저리에 파종된 경북 민간정원 1호 정원 카페인 '시크릿가든'과 궤를 같이한다고 보면 된다.동제미술관이 들어설 무렵 패션디자이너 변상일이 남구 대명9동 카페거리 중심부에서 패션 카페를 오픈해 반향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동제미술관 초창기, 대구 1세대 사진작가 강상규의 작업실이 2층에 있었다. 그는 떠나고 새로운 화가가 입주했다. 올해 제11회 한국미술평론가협회 작가상을 수상한 김길후.햇살 좋은 날 그 카페 테라스 의자에 앉아 보라. 산세는 혀에 담기고 커피 향은 귀로 스며든다. 김 작가가 손수 꾸며놓은 조각공원과 야생화 로드의 디테일, 그리고 멀리 최정산의 시시각각 달라지는 산색(山色)의 파노라마의 하모니, 이것도 대구의 문화자산 아닐까.글·사진=이춘호 음식·대중문화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20여 년 전 대구의 첫 탈도심 갤러리형 카페로 태어난 가창댐 상류 동제미술관 카페. 최근 화가 김길후의 작업실과 병행되며 그의 작품이 전시된 미술관 카페로 사랑을 받고 있다.
[위클리포유 커버스토리-이춘호기자의 카페로드] 902번 지방도 따라 카페투어...산바람 쐬며 커피 한 잔, 붙잡고 싶다 이 가을…
가창댐에서 헐티재로 향한다. 초행인 사람들은 최정산과 앞산 사이에 형성된 가창댐의 물빛, 그리고 상당한 높이를 자랑하는 산세, 깊이가 느껴지는 싱그러운 바람, 댐을 품으며 가설된 둘레길을 걷는 도보족, 물찬 제비처럼 날렵하게 라이딩하는 바이크·사이클족의 활기찬 종아리 근육을 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연신 '굿, 모든 게 좋군!'을 연발하게 된다. 대구 달성군 가창면 가창댐 삼거리에서 우회전. 갑자기 이쪽 세계에서 저쪽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든다. 감이 빠른 사람들은 왠지 모를 섬뜩한 기분을 느낄 것이다. 6·25전쟁 때 이 언저리에서 끔찍한 학살이 자행된다. 보도연맹에 연루된 상당한 수의 인사들이 총살당한다. 당시 '학살장으로 끌려간다'란 말을 세인들은 '골로 간다'로 풍자했다. 뒤늦게 시월문학회가 생겨 나 유족을 위로하고 매년 죽은 영령을 위해 진혼제와 병행해 문학제를 연다.달성군 가창면과 경북 청도군 각북면의 경계에 우뚝 선 헐티재. 팔조령과는 물성이 다르다. 헐티재가 더 고즈넉하다. 그 재가 두 팔을 좍 벌린다. 가창댐 삼거리~가창댐 상류~정대숲~루소의 숲~각북면~풍각면으로 이어지는 17㎞ 남짓한 902번 지방도. 그 좌우 계곡에 혈맥처럼 들어 앉은 이런저런 반짝거리는 아트 포인트를 다 체험하려면 족히 한 달은 소요될 것이다. 좌우로 전개되는 풍광에선 으스스 할 정도의 '야성(野性)'이 느껴진다. 봄철에는 '벚꽃길', 가을에는 '단풍길'로 사랑받는다. 한겨울에는 잎 하나 허락지 않는다. 너무나 앙상한 활엽수 군락이 하절기엔 숨겨놓았던 민낯을 그대로 보여준다. 멀리서 보면 동면 중인 거대한 짐승 같다. 2000년을 넘어서면서부터 환상의 드라이브 코스로 입소문이 날 수밖에 없었다. 가창댐 삼거리~정대숲~각북면~풍각면 17㎞ 구간봄에는 벚꽃, 가을엔 단풍 '환상의 드라이브 코스'갤러리·카페·문화촌…곳곳에 화가·문인들 아지트건축가 남편의 흔적 담긴 게스트하우스도 입소문대구 시민의 식수원이기도 한 가창댐 상수도보호구역과 맞물려 그린벨트로 보호받고 있다. 그래서 환경이 덜 망가졌고 다른 곳보다 더 좋은 풍광을 유지할 수 있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이 구간은 비포장길이었다. 화전민 근기라야 제대로 살 것 같은 오지라서 세인들의 관심권에서 멀어져 있었다. 각 계곡의 막다른 지점에는 영험한 기운이 도사리고 있다. 산신각, 상여집, 무당집, 말기암 환자 등이 의지할 만한 공간이었다. 1980년을 거쳐 90년대로 접어들면서 탈도심 전원파로부터 제2의 인생 거점 공간으로 인기를 끈다. 덩달아 감이 빠른 기획부동산 업자들이 발 빠르게 곳곳에 포진된 허름한 시골집을 사들였다. 평당 가격은 날로 치솟고…. 형편이 괜찮은 이들은 서둘러 거기에 새로운 전원주택을 짓기 시작한다. 소설가 김원일도 잠시 정대숲 맞은 편 야산의 까무룩한 풍광이 좋아 거기에 집필실을 마련하기도 했다. 바로 옆에는 지역 서각계의 리더 중 한 명인 이주강의 집도 있었다. 덩달아 화가와 시인의 집, 갤러리, 카페, 문화촌, 식물원, 조경원, 별장 등이 가세했다. 1990년대 후반쯤 청도군 각북면 오산리 중턱에 깃을 튼 복합문화공간은 '비슬문화촌'이었다. 정인표 촌장과 김영자 소장(도예가) 부부는 2000년부터 10년 이상 신개념 게릴라 콘서트를 펼쳐갔다. 한때 '바람의 뜰'이란 카페도 운영했다. 도예가 이복규, 일본인 아키야마 준도 각북면에 들어와 산다. 마지막 행렬에 가세한 예인은 건축가 이용민이다. 그는 오래 암 투병을 했다. 그러다가 여기다 싶은 곳을 발견한다. 여생을 재밌게 보낼 수 있는 게스트하우스 버전의 '송내헌(松內軒)'을 짓는다. 유달리 소나무가 수북한 청도군 각북면 금천리 마을회관 언저리에 있다. 올해 고인이 된 그는 공간을 아내에게 남기고 훌쩍 세상을 떠난다. 덕분에 아내는 핫플 하우스테이 '유유자적〈작은 사진〉'의 주인이 된다. 그 공간은 심플하면서도 상당히 유니크하다. 건축 관련 책, 솔 향기 머문 수다, 거기에 커피 향이 매칭된 신개념 공간. 그 하우스테이가 20대들로부터 입소문이 난 모양이다. 밤 10시가 넘으면 주위 어르신의 잠자리를 생각해 달빛 정도로 대화 농도를 조절해야 되는 게 이 공간의 불문율이다. 심야의 '달빛커피' 한 잔이 어울리려나. 글·사진=이춘호 음식·대중문화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경북 청도군 각북면 관광농원 군불로가 새롭게 마련한 '로카커피'. 한때 군불로는 찜질방·세미나실 등을 갖춰 탈도심 가든형 관광농원으로 단체 손님한테 큰 인기를 얻는다. 2010년을 넘어서면서 새로운 트렌드를 따라잡지 못해 영업이 부진했는데 로카커피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오픈한 공간이다. 커피 한 잔을 품고 쾌적한 야외 테이블에 앉으면 벽천형 폭포와 앙상블을 이루는 메밀밭과 백일홍이 깊어가는 가을날의 정취를 돋워준다.
김원길 안동 지례예술촌장 "묘비문, 후손이 읽을 수 있어야" 안동서 한글 가로쓰기로 파격 전환
시월 상달, 이 무렵 전국의 각 문중에선 일제히 선영에서 조상을 뵙는 묘사를 봉행한다. 특히 정신문화의 수도 안동에서는 이 기간을 각별한 맘으로 보낼 수밖에 없다. 상례~기제사~묘사는 오직 한자 전용을 불문율로 삼는다. 그런데 거기에 반기를 든 분이 나타났다. 안동 지례예술촌 촌장 겸 시인인 김원길(79·사진)이다. 그는 조선 숙종 때 대사성을 지내고 한때 영남 남인의 종장 격으로 불렸던 의성김씨 지촌 김방걸의 13세손으로 종택을 지키며 종가문화 및 전통문화 현대화에 앞장서고 있다.그런 그가 지난 9일 한국 유림사에서 사례를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일을 저질렀다. 한글날을 맞아 지촌 종택이랄 수 있는 지례예술촌 문중 비림에서 자신의 부모 묘석 비문을 직접 짓고 그걸 한글 가로쓰기로 새겨넣고 일가친척을 모신 가운데 묘비 제막식까지 한 것이다. 묘비의 앞뒤에 아버지와 어머니 제문을 한 돌에 새겨넣은 건 무슨 이유일까? 그가 답을 보내왔다. 원래 묘비는 묘 앞에 세우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시제의 편리를 위해 만들어 놓은 '합동제단소'에 비를 세웠다. 보통 제단소에는 표석만 세우는 것이 상례인데 그가 비를 세운 것은 이미 역대 조상의 묘비를 산에서 옮겨와서 '비림(碑林)'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높고 험한 산속에 흩어져 있는 묘소를 둘러볼 수 없고 거기 비석들의 문장과 글씨와 내용이 귀중한 것이어서 이를 옮겨와서 제단의 표석을 대신하고 여기에 자손들이 모여서 시제를 올려 왔던 것이다. 이번 비석은 갓석이 없는 오석(烏石)에 한글을 가로로 쓴 것이다. 앞면에는 아버지의 비문, 뒷면에는 어머니의 비문을 띄어 쓰지 않고 합각(合刻) 했다. 한글 가로쓰기를 시도한 것은 누구나 읽기 쉽게 함이다. 또한 뒷면에 어머니 비문을 새긴 것은 따로 세우는 데에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이며 양성 평등시대에 어머니의 신분과 행적도 드러내 드리는 게 옳다고 여겼다. 띄어쓰기를 않은 것은 좁은 비면에 많은 글자를 넣기 위함과 빈자리를 없애고 비면 구도를 살리기 위함이다. 글자꼴도 시대에 맞게 컴퓨터체로 새겼다. 행사는 의례를 간소화하기 위해 고유제와 제막식을 겸했으며 부대행사로 사진가이기도 했던 고(故) 김구직 선생의 '옛날사진 전시회'도 가졌다. 수몰로 사라진 옛 마을 풍경과 고향 사람들의 얼굴이 담긴 사진들이 행사를 더욱 빛나게 했다."선생님이 너무 앞서 나가는 건 아닌지?""앞으로 백 년 후면 지금 쓰는 한글도 못 읽을 거예요. 우리가 백 년 전 한글을 못 읽어 내듯이. 급변하는 세태를 따라잡지도 못하면서 도리어 옛날로 돌아가려는 사람이 많아요. 저 비석들도 지금은 제사용이지만 언젠가는 박물관용이 될 거예요. 부모의 비문도 이젠 자식이 쓸 수밖에 없는 시대가 되었어요."안동은 정신수도이니 한문 전용을 해야 하고 그래서 안동역을 한글 대신 한자로 적어놓은 걸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 "안동은 한국 내방가사의 1번지고 특히 훈민정음 해례본도 안동 광흥사에서 발견됐고 퇴계 이황의 도산십이곡 또한 한글이죠. '안동=한자' 운운하는 건 시대착오적이라고 생각해요."전통문화 운동가이기도 한 그는 1975년 서울에서의 출세를 버리고 임하댐에 수몰될 세거지를 새로운 방향으로 살리기 위해 서둘러 귀향한다. 그가 그렇게 해서 만든 지례예술촌은 관의 도움을 일절 받지 않고 오직 개인의 힘으로 만든 것이기에 자부심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글=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 사진=김원길 지례예술촌장 제공김원길 안동 지례예술촌장이 지난 9일 한글날 기념 문중 비석을 한데 모아놓은 비림에서 한글 가로쓰기로 제작한 부모 묘비 제막식을 거행했다. 김 촌장은 "후손들이 알아보기 좋아야 그게 시대에 부응하는 비석"이라면서 한글 가로쓰기 이유를 밝혔다. 김 촌장의 친손자가 비석 앞에서 증조부모의 지난 행적을 찬찬히 읽어보고 있는 광경이 많은 걸 시사한다.의성김씨 지촌 김방걸의 13세손인 김원길 안동 지례예술촌장이 지난 9일 의성김씨 문중 비림에서 일가친척을 모신 가운데 한글 가로쓰기로 제작한 부모 묘비 제막식을 하고 있다.
두 번째 수필집 펴낸 류경자…"풍산류씨 가문의 만능 재주꾼, 나는 지금도 반란을 꿈꾼다"
서애 류성룡의 얼이 깃든 안동 하회마을. 풍산류씨의 시조인 류종혜가 고려 말에 풍산에서 하회마을로 옮겨와 터를 잡았다. 문화재급 고가인 북촌댁, 양진당, 충효당 등이 이 문중이 얼마나 유서 깊은지를 암시해준다. 류씨 문중 관계자가 본관 확인을 할 때 반드시 치르는 통과의례가 있다. 자신의 성을 자꾸 '유'로 적는 걸 지적해 주는 절차다. 그리고 유명 시인 류안진이 풍산류씨로 잘 못 알려진 것도 '전주류씨'로 바로 잡아준다. 사정이 이러하니 그 마을의 혈통을 가진 자손들은 대처에 나가서도 조상한테 누가 될까 싶어 항상 행신을 각별하게 할 수밖에 없었다.류경자. 쟁쟁한 문중이 그를 에워싼다. 영광이면서 큰 부담이기도 하다. 서애의 15세손이고 외가는 정승 열셋, 왕비 셋을 낳고 청송 심부자로 알려진 송소고택, 시댁은 취금헌 박팽년을 낳은 순천박씨 가문이다. 그런 그가 서예를 딛고 10여 년 전 수필·민화가로 건너와 최근 두 번째 수필집 '내 마음의 바지랑대'를 출간했다. 이 책은 남존여비가 기조 문화였던 전통사회에서 아녀자로 살아낸다는 것의 신산스러움, 차마 친정과 시댁 어른은 물론 자식한테까지도 쉽게 말할 수 없는 행간에 감춰진 삶의 후미진 얘기를 오롯하게 쏟아냈다. 6·25 때 부모를 여의고 하회마을로 피란 온다. 안동여고를 졸업한 뒤 서울에서 결혼한 뒤 23세부터 대구에서 터를 잡는다. 1976년 서예계로 다가선다. 당시 서예계는 남성 독점 시대였다. 심제 정계조, 혜정 류영희 연사 이영순 등과 함께 대구 여성서예계 1세대로 자릴 잡는다. 서단에 들어갔을 때 남석 이성조가 대구서예가협회 회장을 맡고 있었다. 그녀는 한글서예 대신 더 어려운 한문 서예에 도전했다. 갈 길이 험난할 수밖에. 처음으로 정암 이원식을 사부로 모신다. 그로부터 '소림(沼林)'이란 아호를 얻는다. 이후 남편 전근 때문에 서울, 광주, 청주 등지를 10년 정도 떠돌았지만 서예는 계속되었다. 서울에서는 초민 박용설, 광주에서는 전남대 장석원 교수로부터 미술사와 문인화 등을 배운다. 서예 5체를 섭렵하면서 국전에 세 번 입선한다. 2008년 동아쇼핑 내 동아미술관에서 '자서전 출판 기념전'이란 부제를 달고 생애 첫 개인전을 가졌다. 서예 기본 5체를 비롯 육조체와 한글까지 7가지 서체를 전시했다. 서애 류성룡의 누정시를 여러 체로 표현했다. 첫 수필집은 '연필로 그린 자화상', 자전적 수필이다. 연필로 삽화를 그려 책에 삽입했다. 이번 수필집에는 민화를 삽입했다. 서예를 하다가 어떻게 민화로 건너왔을까? 그건 전통서예의 한계 혹은 지루함 같은 것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다. 현대서예에 잠시 고개를 돌렸다가 수필가로 변신했고 2009년부터 민화의 세계로 들어선다. 그녀는 재능이 무궁무진하다. 풍산류씨 가문의 정서와 사뭇 다르다. 책에서 '나는 지금도 반란을 꿈꾼다'고 했다. 하지만 급격히 나빠지는 시력, 최근 몸이 안 좋아 병원 신세도 졌다. 삶보다 죽음의 날이 더 구체적으로 다가서는 것 같았다. 그 심사가 책에 담겨 있다. 유품 정리는 유족의 몫이 아니라 본인의 권리라는 것, 그리고 사람은 사람을 떠나면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구절이 긴 여운으로 다가선다. 2남1녀의 자식이 그에게 6명의 손자를 안겨주었다. 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타고난 예술적 재능을 발휘하며 살아오면서 안동 하회마을 풍산류씨 명문가 딸로 산다는 것의 보람과 남모르는 신산스러움 등 그만의 삶의 뒤안길 스토리를 담은 두 번째 수필집 '내 마음의 바지랑대'를 펴낸 소림 류경자. 그녀는 1976년 서예가로 입문했고 최근 수필과 민화에 올인하면서 살고 있다.
[위클리포유 커버스토리] 산불인문학기행, 안동 찾은 문인들 (2)… 새 잎 올라온 고사리·잔대·쑥부쟁이·구절초…黑死된 나무 위로하는 듯
축구장 434개 넓이인 307㏊의 산림을 새카맣게 집어 삼킨 안동 산불은 20시간 만에 1차 진화된다. 이를 위해 각종 진화용 헬기 38대, 소방차 49대, 진화차 23대, 진화인력 2천250명이 투입된다. 산불재난특수진화대, 산불예방전문진화대, 소방대원, 경찰, 의용소방대, 지자체 공무원, 이장 등 산불이 나면 현장으로 달려와야만 되는 관계자들이 산불현장통합지휘본부 근처로 일사불란하게 모여들었다. 2013년 포항 산불도 살벌했다. 대구~포항고속도를 빠져나와 영덕으로 가다 보면 시커멓게 변한 국도변 구릉지가 산불의 상처로 오래 남아 있다. 지난 2년 연거푸 안동이 대형산불 위기 지역으로 지목된다. 2020년에는 안동~예천~영주가 벨트식으로 산불이 났다. 그동안 '한국 대형 산불 1번지 벨트'는 강원도 고성~속초~강릉~삼척~동해~묵호권이었다. 그런데 안동이 이를 비웃으며 새로운 산불 다크호스 존으로 급부상한 것이다. 연어처럼 회귀한 안도현 시인 40년 객지생활하다 예천으로 귀향 지역협동조합 만들고 잡지도 발간 안동서 2년연속 대형산불 발생하자 문인들 모아 산불인문학기행 기획"말의 씨 있으면 나무 자라고 숲 돼" 숯덩이 된 나무 위로·새 생명 응원◆산불 현장에 모인 유명 문인들지난 2월 안동 산불이 진화된 지 수개월이 지났다. 검게 불타 흑사(黑死) 된 나무들은 지금쯤 어떻게 되어 있을까? 그걸 가장 궁금해 한 시인이 있다. 바로 안도현이다. 대구 대건고 출신인 그는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라는 시 '너에게 묻는다'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지난 40년 전라도권에서 생활을 하다가 자기 고향인 예천군 호평면 황지리로 귀향한다. 그건 1996년 100만부 판매량을 올린 어른 동화 '연어'의 길을 따랐다. 고향은 모천(母川)이었고 그는 원류로 거슬러 올라온 한 마리 연어였다. 거기서 예천의 산천과 인물, 식문화, 문학정신 등을 총망라하는 예천 신택리지 같은 작업을 하기 위해 예천산천이란 잡지도 발간했다. 1년에 인연 있는 시인 수십 명을 고향 움집에 초대해 '예천시회'를 벌이고 이를 지역 사회와 연대하기 위해 '모천사회적협동조합'도 만들었다. 그런 그가 산불 관련 신선한 기획을 했다. 남부산림청과 함께 '산불인문학 문학기행'이란 프로그램이다. 그는 산불한테 목숨을 빼앗긴 나무를 위한 '씻김굿' 같은 고유제(告由祭)를 올리고 싶었다. 이하석, 송재학, 송찬호, 안상학, 장석남, 손택수, 김성규 시인, 소설가 황현진과 이주란, 문화에디터 하응백. 그들이 안동 망천리 산불 현장을 찾았다. 기자도 동행을 했다. 사방을 둘러봐도 모두 불탄 나무뿐이었다. 불타지 않은 곳은 녹색, 불탄 곳은 검정색. 이승과 저승을 한눈에 보는 것 같았다. 대다수 수종은 소나무와 참나무. 소나무는 산불에 치명적이다. 송진 때문에 불이 붙으면 정말 잘 탄다. 현재 전국 산에 심겨진 나무 중 30%가 소나무다. 생태계가 예전과 똑같게 복원되는 데는 100여 년이 소요된다고 한다. 숯덩이로 직립한 나무의 군락, 그사이로 잿더미를 딛고 올라서는 뭇초화류가 드문드문 보였다. 생사일여(生死一如)인 모양이다. 모두 말이 없다. 하지만 대지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별별 식물이 새로운 생명을 피워올리고 있었다. 죽은 나무가 산 나무를 몰고 오는 것 같았다. 문인들은 생과 사의 절묘한 대비에서 자신만의 문학적 모티프를 메모하기 시작한다. 불탄 나무는 목재로서 가치가 없단다. 베어낸 뒤 화력발전용 펄프칩 등으로 활용된다. 베어진 자리에는 적당한 수종이 심어질 것이다. 바닥에는 의외로 다양한 식물이 보였다. 이하석·안상학 시인은 야생초에 대한 식견이 남달랐다. 모르는 식물 이름을 전해 듣는 재미도 솔솔 했다. 단연 고사리들이 전면 배치돼 있다. 이밖에 잔대, 박하, 국화, 쑥부쟁이, 구절초, 산부추, 취나물, 오이풀, 야관문, 산초, 속새, 김의털, 용담…. 푸른 고고지성이 불탄 나무를 위로한다.하응백 문화에디터는 "탐방한 문인 중 대부분은 그 숲을 보지 못한다. 말의 씨만 뿌린다. 그래도 그게 희망이다. 말의 씨가 있으면 나무가 자라고 숲이 된다"고 말했다. 산불 진화 최전방에 선 산림청 드론으로 실시간 화마 정보 파악 기상·지형정보 입력해 진로 분석 현장침투 산림청 특수진화대원 10㎏ 방진복 입고, 물주머니 메고 뜨거운 불·한밤 추위 견디며 진격 산불 80%는 실화…예방이 최선◆산불은 산림청이 끈다산불 진화, 이제 IT 기술의 도움이 없이는 제압하기 힘들다. 산림재난 드론 대응팀은 열화상 카메라가 장착된 드론에서 보내온 실시간 산불 영상 정보, 그리고 기상청으로부터 받는 안동권의 풍향과 풍속, 기온, 산의 가파르기 등 각종 변수를 컴퓨터에 입력해 '몸불(本火)이 어느 방향으로 전개될지 시간대별 예상 진로를 분석해 그 정보를 관계자와 공유한다. 산불이 거칠어진 만큼 '진화 공학'도 날로 진화될 수밖에 없다. 오프라인 버전의 한국 산불 진화 인프라는 최근 몇 년 새 온라인 버전으로 기술발전을 한다. 덩달아 비상이 걸린 관청이 있다. 대구, 부산, 울산, 그리고 경북과 경남 동부 등 모두 29개 시군의 28만2천㏊ 산림 구역 내 산불 진화 의무를 가진 안동 남부산림청이다. 직원 142명은 이맘때면 내년 봄 수관이 수액으로 가득 찰 때까지 비상 근무 체계로 돌입하게 된다.다들 산불은 소방대원이 진화하는 줄 잘못 알고 있다. 지난 30년간 일반인의 인식은 '산불도 소방서의 몫'이라는데 멈춰 서 있었다. 산불 진화 주무 관서는 산림청이다. 현재 전국에는 모두 5개의 지방산림청이 있다. 중부산림청은 공주, 동부는 강릉, 서부는 남원, 북부는 원주에 본청이 있다. 이들이 모두 27개 국유림관리소까지 거느리고 있다. 하지만 국립공원은 산림청이 아니라 환경부가 관할권을 갖고 있다.전국에 6대밖에 없는 미국제 S-64E는 40초 만에 8천ℓ물을 집중적으로 퍼붓는데 그 헬기도 소방청 소속이 아니다. 산림청 예하 산림항공본부 소속 산불 진화용 헬기다. 물론 소방대원도 옆에서 지원사격을 해준다. 그들은 산불보다 농가 등 일반 가옥 화재 진화에 더 치중한다. ◆산불 최전선 산불재해특수진화대산림청은 초봄 새싹이 돋아날 때쯤(5월 15일 어름) 한숨을 돌린다. 10월 초·중순 낙엽이 우수수 지기 시작하면 관계자들은 '5분대기조'로 돌변한다. 11월1일부터 이듬해 5월15일까지 얼추 6개월 정도 고강도 근무를 감내해야 된다. 산불의 최전선에 서 있는 관계자는 누굴까? 2016년부터 현장에 투입되기 시작한 '산불재해 특수진화대원'이다. 아직 일반인에겐 다소 생소한 그들은 산불에 최적화된 '산불 현장 침투조'다. 그들의 공력은 좀 부풀려 말해 공수특전단, 해군 UDT, 경찰 특공대과 비슷한 수준이다. 한국의 산지는 보기와 달리 산불 진화에는 정말 악조건이다. 수풀이 우거져 화선까지 접근하기가 정말 까다롭다. 아직 한국은 산불에 대비한 임도가 아니라 간벌한 목재를 운반하기 위한 기반도로라 보면 된다. 유럽의 경우 고산 지형은 암석이 많아 산불이 잘 나지 않고 산불이 발생해도 대다수 평평한 구릉에서 발생한다. 그래서 등장한 게 진화용 헬기다. 아직 대수가 그렇게 많지는 않다. 모두 47대. 안동산림항공관리소에는 4대를 보유하고 있다.현재 산림청에 소속된 진화대는 모두 435명이다. 이밖에 경북도에서 1천명이 넘는 진화대 요원이 있다. 산불이 나면 이들에겐 전투가 개시된다. 10㎏ 이상의 경량 방진·방염복과 방독면, 그리고 진화차(진화수 1천500ℓ)로부터 공급되는 진화수를 받을 수 있는 개인용 등짐펌퍼(20ℓ)를 지고 현장으로 달려간다. 13㎜ 호수는 다중 연결을 통해 최대 1~2㎞까지 연결할 수 있다. 아무리 험지라도 대원들은 호스를 몰고 화선 앞에서 물을 쏠 수 있다. 근처 계곡에 물이 있으면 즉석에서 펌핑해 사용할 수 있는 중형 펌퍼도 전진 배치시킨다.진화대와 지휘본부, 드론 영상팀은 산불 정보를 실시간으로 공유한다. 산불 진화는 화미에서 화두를 향해 진격해 나가야 안전하다. 소방대원이 현장에 온다고 하지만 산불 최전선까지 오지 않는다. 진화대원은 갈수록 열기에 취약하다고 한다. 현재 기능성 방화복은 여러 번 세척 하면 기능성이 떨어진다. 상당수 방화복이 그런 처지다. 겉으로 보이는 몸불을 와전 진화한다고 해도 바로 철수하지 못한다. 1~2일 노천에서 숙식을 하면서 갈퀴질을 하며 잔불 정리를 해야 된다. 산불이 동절기에 집중돼 추위와도 싸워야 된다. 산불을 너무 뜨겁고 한밤에 몰아치는 설한풍은 동사를 부추긴다. 차가움과 뜨거움을 동시에 견뎌내야 된다. 풍족한 음식물이 공급되지 않는다. 한 대원은 "방화복의 기능을 더 제고해야 된다"고 고충을 토로한다. 대기업 등이 더욱 경량화되고 기능성이 강화된 방화복을 생산해 주어야 되는데 예산 부족으로 제대로 처리되지 못하고 있다. 특수진화대원들에게 산불은 '적군'이다. 산불은 절대 사전에 선전포고하지 않는다. 기습공급만 한다. 기습의 빌미는 우리가 제공한다. 현재 한국 산불의 80%는 자연적으로 일어난 게 아니다. 일반인의 부주의로 인한 실화다. ◆이젠 산불친화적 삶을 살아야 하나산림(山林).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조선조에는 덕망과 인품, 충절까지 겸비한 최고의 권위를 가진 사대부(선비)를 지칭했다. 그 산림이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우리의 국토, 산하의 상징어를 겸하게 된다. 그 산림이 매년 수난을 당하고 있다. 산불 때문이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의 화마는 도심만을 노렸다. 그도 그럴 것이 산에 있는 나무를 땔감으로 난벌했고 그 결과 우리 산하는 민둥산 일색이었다. 불이 나고 싶어도 불붙을 나무가 없었다. 하지만 전국민적인 나무심기에 힘입어 1980년대로 접어들면 민둥산은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연탄을 넘어 프로판가스 시대가 되면서 굳이 나무를 땔 필요도 없어졌다. 산으로 나무하러 가는 사람들도 없었다. 낙엽의 계절이 도래했다. 국내 공무원 중 가장 피말리는 부서는 단연 산림청 공무원이다. 갈수록 입산 통제 구역도 확대되고 있다. 이제 산불은 진화요원만의 문제가 아니다. 귀농, 귀산, 귀촌하는 인구가 늘어나면서 숲을 전제로 삶을 영위하는 인구 또한 급증추세를 보이고 있다. 잦아지고 대형화되는 산불은 곧바로 이들의 집은 물론 생명까지 위협하고 있다. 산불진화가 관건이 아니라 산불예방이 최근 들어 새로운 화두로 급부상할 수밖에 없다. 글=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 사진=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10월2~3일 1박2일 일정으로 남부산림청이 주최하고 모천사회적협동조합이 주관한 산불인문학기행을 위해 이하석·안도현·송재학 등 전국의 유명 문인 등이 빈소 같은 안동 산불 현장을 찾았다. 산불 예방 홍보를 위한 이 행사는 '새롭고 낯설고 놀라운 풍경과의 동행'이란 부제를 갖고 문인의 눈으로 산불을 재해석하기 위해 기획됐다.지난 2월21일부터 22일까지 발생한 산불로 검게 변한 안동시 임동면 일대 야산. 〈영남일보 DB〉산불의 주무관청은 '산림청'이다. 체계적인 훈련을 받지 않은 이가 산불을 진화하기란 어렵다. 이를 위해 2016년부터 화선 최전선으로 나서는 산림청 예속 공무직인 '산불재해 특수진화대'를 가동시켰다. 〈산림청 제공〉
[위클리포유 커버스토리] 산불인문학기행, 안동 찾은 문인들 (1)…生死기로 8개월…잿더미 딛고 희망이 싹텄다
"불 탄 나무들의 신음 소리가 귓가에 닿아요 얼마나 뛰쳐나오고 싶었을까요 발목이 까맣게 그을려 죽은 나무들에게 미안했어요"안동 망천리 산불 현장에서 안도현의 단상 낙엽이 하나둘 발에 차인다. 그 낙엽이 모든 사람에게 낭만의 상징일까? 다른 누구에게는 하나의 '재앙'으로 다가선다. 나뭇잎과 낙엽. 둘의 존재감은 사뭇 다르다. 나뭇잎이 푸르게 나뭇가지에 달려 있을 때는 산불이 날 염려가 상대적으로 적다. 하지만 그 잎이 낙엽으로 변하는 순간, 그 낙엽은 '불쏘시개' 구실을 하게 된다. '낙엽=산불'이라고 생각하는 그들. 바로 국내 산불 진화의 최전선에 서 있는 '산림청'이다. 어느 날부터 산불은 하절기 태풍처럼 동절기가 되면 어김없이 감내해야만 하는 악성 통과의례가 돼 버렸다. 고만고만한 과거 한국형 산불은 20년 전부터 대형화 구도를 보인다. 탄소 중립 신드롬이 급증할수록 힐링의 마지막 공간이 될 수 있는 산의 중요성도 더욱 치솟을 수밖에. '나는 자연인이다'란 종합편성 TV MBN 대박 프로그램에 힘입어 귀향·귀농·귀촌보다 한 수 위의 유니크한 말년의 삶을 '귀산(歸山)'으로 마감하려는 중년이 급증하고 있다. 백두대간 종주족은 물론 주말이면 신선형으로 변신하는 캠핑·오지족도 '현대판 산사람'으로 등극했다. 뿐만 아니라 심마니, 야생초 동호인들의 '탐산 투어'도 더욱 대중화되고 있다. 예전에는 등산이 일반화됐다면 그게 2000년 들면서 트레킹 개념으로 확산되고, 최근에는 영혼과 동행하는 산책 같은 산행, 그리고 자기만의 호주머니 만한 신개념 주말농장형 별장을 신축하는 이들도 파생되고 있다. 덩달아 애산인(愛山人)들의 사소한 부주의로 인한 산불 가능성은 더 늘어나고 있다. 산을 사랑하는 맘이 되레 산불을 조장할 수도 있다. 산으로 러시하는 사람들, 그게 하나의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이 기회에 산에도 임도 이외의 신개념 도로망이 가설해야 된다'는 여론도 일고 있다. 한국 산불의 역사는 그렇게 유서 깊지 못하다. 피해 면적이 100㏊를 넘어서는 대형 산불은 2000년 이후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한다. 이전 산불은 헬기까지 동원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소규모였다. 대형 산불로 번지게 만드는 광활한 숲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이젠 산림이 너무 우거졌다. 전인미답의 숲이 무진장하게 깔려 있다. 산불은 매년 이맘때면 거기를 호시탐탐한다.전 국민에게 산불 경각심을 불러일으킨 건 단연 낙산사를 전소시킨 양양 산불이다. 2005년 4월4일. 그날 양양 산불의 화두(火頭)가 설악산 입구까지 뻗친다. 경찰 2천여 명이 동원되고 물대포까지 투입하기도 했지만 이를 비웃는 순간 최대풍속 32m/s '양간지풍(襄杆之風)'이 불었다. 불새처럼 산 하나 정도를 우습게 훌쩍 넘어가는 난생처음 직면하는 화염의 엄청난 기세에 기가 질려버렸다. 양간지풍은 태풍보다 더 거센 포스였다. 그 바람은 산림청에게는 '저승사자' 같은 존재다. 양은 '양양', 간은 고성군 '간성'을 의미하는데 그 바람은 두 고장 사이로 부는 초강력 서풍이다. 양양 지역에서는 '불을 몰고 온다'해서 '화풍(火風)'이라고도 한다. 오마이뉴스 이무완 기자의 조사에 따르면 조선왕조실록(sillok.history.go.kr)에서 '산불'을 검색어로 찾아보면 모두 예순두 건이 나온다. 이 가운데 동해안에서 일어난 산불을 다룬 기사가 열두 건. 그 산불은 대개 음력 2~4월 사이에 발생한다. 봄철 한반도 남쪽에 이동성 고기압이 위치하고 북쪽에 저기압이 위치한다. 그럼 강원도 지역으로 따뜻한 서풍이 분다. 이때 강원도 지방의 차가운 공기와 만나게 된다. 이때 아래에 위치한 차가운 공기가 위의 따뜻한 공기와 태백산맥 사이의 좁은 공간을 압축해 지나면서 빠른 풍속의 바람으로 변한다. 차가운 공기가 가파른 태백산맥을 내려가면서 풍속은 빨라지고, 기온은 올라가고 습도는 낮아진다.지난 2월21일 오후 3시20분쯤 안동시 임동면 망천리 야산. 바로 옆에는 경북소방학교, 그리고 발치에는 거대한 임하호가 버티고 서 있었다. 설마 이런 곳에서 산불이 날 리 있겠는가? 허를 찔리고 말았다. 근처 야산에서 발생한 산불은 초속 13.4곒 강풍에 편승, 근처 중평리까지 화세(火勢)를 수 ㎞ 넓혀 나갔다. 화선(火線)은 너무나 길었다. 통제관은 도대체 어느 포인트를 공격해 산불의 숨통을 끊어 놓아야 할지 고심할 수밖에 없었다. 중구난방 산불인 탓이다. 산불이 꺼진 자리는 끔찍했다. 산불은 녹색을 집어삼키고 검정으로 변한 지옥도를 남겨놓고 사라져 버렸다. 생명 한 톨 보이지 않았다. 8개월이 지났다. 지난 2일 오후 그 산불 현장에 '산불인문학기행'을 위한 전국 유명 문인들이 빈소 같은 불탄 산 속에 문상객처럼 모여들었다. 글=이춘호 음식·대중문화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 사진=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위클리포유 커버스토리] 산불인문학기행, 안동 찾은 문인들 (2)에서 계속됩니다.지난 2월21일 오후 3시20분쯤 안동시 임동면 망천리 야산. 바로 옆에는 경북소방학교, 그리고 발치에는 거대한 임하호가 버티고 서 있었다. 설마 이런 곳에서 산불이 날 리 있겠는가? 허를 찔리고 말았다. 근처 야산에서 발생한 산불은 초속 13.4곒 강풍에 편승, 근처 중평리까지 화세(火勢)를 수 ㎞ 넓혀 나갔다. 봄·여름을 지나고 가을이 왔다. 그리고 한 해도 안 돼 거기에 새로운 생명이 돋아나고 있었다. 불탄 나무가 그 죽음의 땅에서 생명의 파종을 시작한 것일까?
[人生劇場 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도시의 야경 그리는 드러머 김도엽' (2)... "니 그림 꿈에 나올까 무섭다"는 母親 말에 충격받아 다 불태우니 빛이 보였다
경북 영일군 신광면 출신인 나는 농사꾼 부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국민학교 4학년 무렵 포항으로 이사를 간다. 대동고 시절에는 교내 미술부장이 될 정도로 주목을 받았다. 그때 내 잠재력을 눈여겨 본 미술선생이 있었다. 그가 바로 현재 대구상공회의소 회장인 이재하. 이후 평생의 사부가 되는 화가 윤석균을 만났다. 두 분이 내게 미학적 안목을 심어준다. 누가 알았으랴. 내가 드럼 스틱과 캔버스 붓을 동시에 품게 될 줄을. 1982년 입학해 무려 10여 년 만에 졸업하게 되는 동국대 경주캠퍼스 미술학과 시절은 질풍노도의 나날이었다.수업보다 술에 더욱 매진했다. 그러다가 욱하고 창작열이 다가오면 45일간 쉼 없이 50호짜리 그림을 50개를 쏟아내기도 했다. 지도교수였던 화가 최영조도 나를 안타깝게 지켜봤다. 나는 사부의 영향 탓인지 '공모전 무용론'을 주창했다. 공모전에 그림을 일절 출품하지 않았다. 제도권에 들어갈 여지를 싹둑 잘라버렸다. 내가 잘나서 그랬는지 못나서 그랬는지 아직 모르겠다.부산·대구 나이트클럽에서 연주북과 드럼 결합한 '삼북장' 개발결혼 후 포항서 미술학원 운영도이상과 현실사이 왔다갔다 하다어머니 뼈아픈 지적에 심기일전그림과 음악, 화폭에서 동기감응가산 수피아미술관에서 전시 중◆그림은 이상 음악은 현실1985년부터 부산의 나이트클럽에서 연주생활을 한다. 7인조 '상류사회'(리더 김대환) 드러머였다. 조방 앞 국제호텔 나이트클럽이었는데 조용필, 나훈아 등의 공연도 옆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4년간의 연주생활, 하지만 이 와중에도 학업을 병행하기 위해 동국대 미술대학 수업에도 열중한다. 클럽 일이 끝나면 집에 와서 한두 시간 잠시 눈을 부치고 바로 경주로 갔다. 오랜 시간 내게 그림은 하나의 '이상'이었고 음악은 한갓 '현실'이었다. 하지만 그림은 웅비하지 못하고 자꾸 음악한테 밀려난다.1990년 결혼을 했다. 포항에 살림집을 차린다. 생계를 위해 해도동에서 시각미술학원을 운영하기도 했다. 개인전 준비 중 교통사고를 당해 집안이 쑥대밭이 된다. 학원도 가정도 모두 파산이었다. 다시 음악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한국 트로트계의 다크호스로 급부상한 장윤정의 주요 히트곡을 작곡했던 작곡가 임강현, 그는 내 친구였다. 나의 음악적 잠재력을 알고 있었던 그가 나를 대전EXPO 홍보유치단원으로 초대한다. 단원은 크게 사물놀이팀 두레패, 그리고 6인조 재즈밴드가 축을 이루고 있었다. 나는 거기서 재즈밴드 드러머로 활동했다. 일본으로 수차례 홍보 공연을 다녔다. 이후 전국적 명성을 가지고 있던 '두레패'가 내게 러브콜을 한다. 당시 이 사물놀이패는 김덕수 팀과 함께 국내 사물놀이계의 투 톱으로 평가받을 정도였다. 이후 김성녀, 윤문식 등이 리드했던 마당놀이, 나훈아의 빅쇼에도 참여했다. 나는 김영삼 대통령이 관람하는 가운데 명인전 멤버로 초대된 두레패 연주를 위해 새로운 타악기를 직접 제작하기도 했다. 국악의 북, 양악의 드럼의 장점을 결합한 '삼북장'이란 신개념 드럼을 개발해 국악계의 주목을 받는다. 그게 있어 판에 박힌 국악이 아니라 퓨전적이고 실험적인 리듬을 개척해나갈 수 있었다.◆그림도 음악도 다 잃을 고비도2000년은 최악의 해였다. 그림도 음악도 모두 나를 떠나가고 있었다. 남은 건 몸뚱아리 하나뿐이었다. 생활은 사면초가. 그 모두 자업자득이라고 하기엔 이 놈의 세월이 너무도 무정했다. 입에 풀칠을 하기위해 대구의 모 나이트클럽에서 '안전지대'(리더 감규환) 드러머로 활동했지만 그건 음악이랄 수도 없는 것이었다. 음악도 그림도 모두 '불가항력'이었다.심기일전이 필요했다. 2002년 용기를 냈다. 대구예술대 실용예술과에 편입한다. 이때 '애플재즈빅밴드'를 창단한 백진우 교수를 만나면서 재즈 드러머의 삶이 시작된다. 당시 대한민국 연주인의 삶은 극도로 불안정했다. 엘프란 놀랄만한 반주기 때문에 나이트클럽 연주인들의 밥줄이 동시다발적으로 끊긴다. 그리고 '미디'란 컴퓨터뮤직 프로그램 때문에 작곡자의 삶도 더욱 힘들어진다. 막 부상하기 시작한 잘생기고 끼로 무장된 쭉쭉 빵빵 아이돌 걸그룹 때문에 기성 구닥다리 연주인은 일제히 '사망선고'를 받는다.연주인으로서의 지난 시절이 너무 허망했다. '이 기회에 업그레이드 된 음악 공부를 하자'고 자신을 다그친다. 사람도 만나지 않고 두문불출 연습만 했다. 연습하지 않으면 막막한 일상이 날 잡아먹을 것 같았다.◆기사회생과 신의 한 수하지만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 2016년 몸이 완전 망가지기 시작한다. 어깨 석회화 근염, 그리고 심각한 고관절로 인해 옴짝달싹하지 못한다. 하지만 나는 그것에 낙담하지 않고 늘 '신의 한수란 바로 김도엽'이라며 모든 걸 낙천적으로 받아들였다. '비 온 뒤 땅이 더 굳건해진다'고 믿었다. 예술 유전자를 가진 자만이 품게 되는 유유자적 마인드였던 것 같다. 그런데 그림이 슬금슬금 징글맞은 날 뒤늦게 찾아왔다. 남구 대명동 영선시장 근처에 있는 화가 황성규의 작업실 한 편을 공유할 수 있었다.지난해 돌아가신 모친이 죽기 전 내게 뼈아픈 고백을 했다. "도엽아, 너 그림을 보면 꿈에 나타날까 무섭다." 그 말은 내게 너무나 충격이었다. 평생 그려놓았던 수백 점을 모두 태워버렸다. 불효의 세월을 가리고 싶었다. 그림까지도 모친 가슴을 멍들게 하다니…. 잿더미로 만든 과거의 그림 위에서 새로운 풀이 피어났다. 그게 바로 '김도엽 표 야경 시리즈'다. 그 그림을 본 모친이 활짝 웃었다. 생애 첫 효도의 순간이었다.가장 처음 그린 건 부산항 야경이다. 그리고 수성교~상동까지 품은 신천 야경, 뒤이어 서울의 야경이 연이어 탄생한다. 눅진한 나이트클럽의 조명, 그리고 밴드 음악의 율동, 그게 내 화폭에서 야경으로 피어났다. 그림과 음악이 '동기감응(同氣感應)'하기 시작한 셈이랄까.2006년부터 비로소 나의 밴드를 만들고 싶었다. 이렇게 해서 12인조 김도엽 탑 밴드가 탄생한다. 그리고 최근에는 리더 보컬 임배원, 기타리스트 김종만, 건반주자 루미, 베이스 송성훈 등으로 구성된 5인조 크로스오버 밴드 '더 펠로스'의 드러머로도 활동 중이다.내 야경시리즈는 지난달 18일부터 10월 초까지 칠곡 가산 수피아 미술관에서 전시 중이다. 글·사진=이춘호 음식·대중문화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김도엽의 그림에서는 음률이 느껴진다. 가산 수피아미술관에서 전시 중인 '서울의 야경'.대구국제재즈페스티벌에서 공연 중인 애플재즈빅밴드 드러머 김도엽.
대구 북구 '팔방보리떡'…아무 맛도 안나는데? 그 맛에 자꾸생각나!
우린 예전 그걸 못생긴 '빵떡'이라 했다. 떡인지 빵인지 궁금한 그 떡. 바로 추억의 보리떡. 그 옆에 설 만한 간식거리는 요즘 교외 도로변 길목을 점령한 옥수수 술빵이다. 기자도 보리떡을 무척 좋아해 이런저런 가게를 자주 찾는다. 하지만 뭔가 1% 부족한 맛이다. 보릿가루를 너무 사용해도 원가가 부담되고 이윤을 위해 밀가루 등을 첨가하면 촉촉한 맛이 사라지고 물먹은 건빵 같은 질감이다.◆어쩌다 보리떡 장수최근 북구 유통단지 근처에 있는 '팔방보리떡'을 발견하게 됐다. 김현조(54) 사장은 성주군 출신으로 전문대 전산학과를 나와 지역의 모 무역회사 전산실에서 5년 머물다가 덜컥 '보리떡 인생'의 주인공이 된다. 그의 부친은 위암에 걸려 3년간 식사 관리하는 과정에 평소 좋아하시는 보리떡을 많이 먹게 된다. 나중엔 이 집 '내림음식'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회사냐 사업이냐를 놓고 방황하던 시절, 호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아 제대로 된 식사가 어려웠다. 그럴 때마다 눈여겨 둔 보리떡 가게에서 허기를 채웠다. 그 집이 바로 현재 그가 운영하는 가게다. 팔방보리떡의 전 주인은 떡보다 목공예에 심취해 있었다. 그도 거기서 목공 레슨을 받다가 주인의 권유로 가게를 인수하게 된다. 2015년 3월이었다. 주인이 가르쳐 준 레시피는 빛 좋은 개살구랄까…. 시행착오를 거칠 수밖에 없었다. 먹을 땐 쉬운 것 같았는데 막상 만들려고 하니 모든 과정이 걸림돌이었다. 보릿가루와 막걸리, 거기에 밀가루를 적당량 섞어 넣고 쪄내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만드는 과정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여름과 겨울철의 배합 비율이 다를 뿐만 아니라 떡을 만드는 날 습도와 온도를 감안해 황금비율의 배합률을 적용해야만 했다. ◆최적의 막걸리를 찾아라보리떡에 최적화된 막걸리부터 찾아야만 했다. 지역의 모 막걸리를 사용했다. 하지만 반죽이 제대로 부풀지 않았다. 문제는 제대로 된 발효균이 부족했던 것이다. 답답한 나머지 직접 담가 사용해 보기도 했는데 비효율적이었다. 직접 공장에 전화를 걸어 담당 연구원에게 '왜 이 막걸리로는 보리떡 반죽이 잘 부풀지 않는지' 질문을 했다. 알고 보니 예전 막걸리와 달리 현재 소비자의 입맛에 맞춰진 공장표 막걸리에는 효모균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그래서 잘 부풀지 않았다. 그날부터 일반 슈퍼에 유통되는 여러 막걸리를 갖고 일일이 실험을 했다. 그렇게 해서 찾은 게 부산의 모 막걸리였다.가급적 외국산에 의존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보릿가루도 고향에 있는 계정정미소 것만 사용한다. 한때 국산 보리쌀을 갖고 와 직접 분쇄해서 사용하기도 했다. 보릿가루만 사용하면 식감이 떨어질까 싶어 통보리에 통밀과 현미도 조금 섞었다. 그는 시중 보리떡은 건강한 사람을 겨냥한 것이지만 자기는 '웰빙 보리떡'이라 홍보했다. 당뇨병 등 성인병에 노출된 사람들에게 최적화된, 단맛이 거의 없는 신개념 보리떡을 만들어 보고 싶었다. 그래서 막걸리 발효력을 증강시키는 소다도 다른 곳보다 5분의 1 정도만 사용한다. 단맛도 최소로 설정했다. 설탕 대용제로 등장한 사탕수수 원당이 가미된 스테비아를 선택했다. 단맛 비율은 거의 1% 정도. 일반인에겐 거의 단맛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밍밍하게 조정했다. 항상 '환자 전용 보리떡'이란 생각을 잊지 않았다. 콩도 병아리콩을 사용했다. 솔직히 특별한 맛이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씹는 과정에 특유의 맛을 감지하게 된다.◆거친 밀가루가 좋아시루도 스테인리스스틸보다 소나무 시루를 사용해 떡을 쪄낸다. 밀가루도 시중에 유통되는 걸 사용하지 않는다. 일반 농가에서 도정한 껍질이 살아 있는 거친 밀가루를 사용한다. 모친은 남편 때문에 보리떡 장인이나 진배없었다. 이젠 자식이 새로 시작한 떡 작업을 뒤에서 도와준다. 모친은 그에게 최강의 사업 파트너인 셈. 지금도 작업장 2층에 모친이 기거한다. 7남매 중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제2인생을 위한 보리떡, 모친의 맘이 얼마나 짠하겠는가. 모친은 평생 단맛에 길들여 있었다. 아들이 만든 건강 보리떡은 '당최 싱거워' 못 먹겠단다. 그럼 아들은 모친에게 넌지시 '이젠 맛있는 것보다 건강한 빵이 최고'라며 모친을 놀린다. 생각잖은 단골도 생겨났다. 이민 간 자식이 고향 부모 드리려고 그가 최근 가동하기 시작한 온라인 사이트에 들어와 배송 주문을 한다. 전남 고흥군 나로 우주센터연구실 연구원, 의사, 교사 등은 물론 수행 중인 스님들도 이 떡을 자주 주문해 사 먹는단다.◆상품 다각화현장 판매대만 믿고 손님을 무한정 기다려선 밥 먹고 살기 어려운 게 보리떡이다. 아직 어느 정도 연세가 있는 분들한테 더 익숙하다. 그래서 온라인판매망을 강구했고 제품도 다각화했다. 한때 인근 병원 앞에 좌판을 깔기도 했다. 하지만 별 소득이 없었다. 대백프라자, 롯데백화점 대구점 등에도 진출해 봤지만 비효율적이었다.2016년 새로운 판매망을 찾는다. 바로 '인터넷 판매'다. 병원 방문할 때 알맞은 선물용, 농가 새참용, 환자 간식용 등으로 팔려나갔다. 이밖에 돼지감자현미가래떡, 돼지감자 현미떡국떡, 귀리에 쪄낸 현미를 건조한 뒤 롤러로 압축해 만든 오트밀은 국내 첫 유통상품이었다. '뽕잎밥알찹쌀떡'도 연구의 산물이다. 뽕잎을 소금물에 삶아 건조한 뒤 분쇄하고 거기에 찹쌀을 섞어 외피를 만들고 병아리콩에 흰 강낭콩을 1대 1로 섞어 삶아 소로 사용한다. 지난 8월부터는 병아리콩에 땅콩을 20% 짓이겨 넣은 다이어트 콩국까지 만들었다. 글·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투병 중이던 아버지가 즐기던 보리떡. 아들이 시행착오 끝에 보릿가루와 막걸리의 황금 배합비율을 알아냈다. 코로나 정국을 타개하기 위해 최근 인터넷 판매에 집중하고 있다. 보리떡 옆 현미가래떡과 뽕잎밥알찹쌀떡도 추억의 포스로 앉아 있다.
[人生劇場 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도시의 야경 그리는 드러머 김도엽 (1)…내 그림은 라이브 연주…밤의 빛이 춤을 춘다
나는 음악인 듯 그림인 듯하게 사는 김도엽이다. '악화동원(樂畵同原)'의 기운을 타고났는지도 알 수 없다. 환갑을 눈앞에 둔 김도엽. 도시의 야경을 드럼 연주하듯 그리는 숨은 '환쟁이 드러머'. 나의 몸매는 가냘프지만 눈빛은 무척 도발적이다. 나는 의외로 덜 알려진 나 자신의 현재 위상에 대해 별로 아쉬워하지도 의식하지도 않는다. 그냥 내 잠재력 속에 은거 중인 예술의 그 어떤 가능성, 그 끝을 따라가는 열정이 아직 나한테 남아 있다는 사실에 감사한다.수성구 범어동 1980년대식 한 주택의 뒤칸방을 아틀리에로 사용하고 있다. 곰팡이와 습기, 그게 물감 냄새와 뒤섞여 묘한 향취를 뿜어낸다. 오전부터 내리기 시작한 가을장마의 눅눅한 기운이 초라한 아틀리에를 더 스잔하게 만들고 있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다. 맞은편 방 정면 벽에 세워져 있는 200호 크기의 큼지막한 '서울의 야경'이 있다. 강렬하고 투박한 마티에르(두꺼운 결). 만만치 않은 구력이 느껴지는 터치다. 내가 왜 이런 조촐한 공간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지. 나는 잘 나가는 작가도 아니다. 그럴수록 입지를 쌓기 위해 시류를 따라갈 것도 같은데 나는 절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단색화, 팝아트, 설치, 개념미술 등으로 내달리는 현대미술과는 사뭇 거리가 있다. 우린 이미 프로와 아마추어의 구별이 사라진 탈 현대미술의 세상을 살고 있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20세기의 전통화풍 속을 거닐고 있다. 내가 숨을 방은 두 칸, 한 곳에는 서울 야경, 옆 방에는 대구 도심을 흐르는 신천의 야경 그림이 걸려 있다. 예전 미술학도들이 선호했던 강렬한 터치의 인상·야수파 계열이랄까. 고흐와 이중섭의 화풍에 많이 빚을 지고 있다. 신천 야경을 그릴 때는 구상적이었다. 그런데 뭔가 부족한 것 같았다. 화폭의 질감을 대폭 수정해나갔다. 형태보다 깊이가 담긴 느낌을 좇았다. 흔적 정도만 남기고 나머지 익숙한 라인은 모두 뭉갰다. 경계의 파괴 과정이었다. 허물고 다시 그 위에 두껍게 물감을 올렸다. 밤의 색깔이 아니라 밤의 느낌이 필요했다. 대구, 서울, 부산 등 주요 도시 야경과 유명 재즈뮤지션 시리즈를 근간에 속속 완성 중이다. 나는 두 개의 서로 다른 물성의 예술과 동거한다. 음악과 그림이다. 두 손에 붓과 드럼용 스틱을 잡고 때로는 칠하고 때로는 두드린다. 한때 알코올에도 중독돼 생활이 거덜 났을 때 지난 삶의 흔적을 하나둘 정리했다. 술과 담배, 그리운 친구까지. 이후 그림자처럼 말없이 살았다. 뭐가 되어야겠다는 야심도 없이 그냥 하루 몫의 예술을 살아냈다.대구국제재즈페스티벌, 나훈아 빅쇼 백밴드 멤버로 초대받을 정도로 살아왔던 그럭저럭한 실력의 드러머. 그러면서도 질기게도 화가로 살아간다. 나는 밤의 사나이. 훤할 때는 자고 어두워지면 일상이 시작된다. 밤무대 드러머의 후유증이랄까. 드럼의 리듬감은 그림과 따로 놀지 않는다. 그림 그리는 과정도 하나의 라이브공연. '화폭이 곧 공연무대'라는 것. 그래서 그런지 내 야경 시리즈에는 너울너울~ 음률이 느껴진다. 2019년 수십 년 잠자고 있던 내 그림이 수면 위로 나온다. 생애 첫 개인전을 대백프라자 갤러리에서 열었다. 글·사진=이춘호 음식·대중문화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人生劇場 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도시의 야경 그리는 드러머 김도엽 (2)에서 계속됩니다환쟁이 유전자를 가진 드러머. 그는 제도권 화가로의 명성을 뒤로하고 나이트클럽 드러머로 전국을 주유하며 한 시절을 풍미했다. 한때 그림과 음악을 모두 품기 위해 대입 미술학원까지 운영했지만 그 모든 시도가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심각한 교통사고, 관절염 등으로 절망의 나날을 보내면서 모친에게조차 사랑 받지 못한 지난 시절의 그림을 모두 불태우고 은둔의 시간을 대구예술대 실용예술과 학생으로 돌파했다. 몇년 전부터 자신의 밤무대 밴드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들어간 야경시리즈로 새로운 화가의 삶을 시작한 김도엽. 그가 신천 야경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동대구로에서] 악의 평범성
낮에 주물리던 일(노동)을 놓고 잠을 청한다. 일과 잠 사이엔 시름에 가까운 상념이 서식하고 있다. 그 상념의 시간이 주색잡기와 협업을 벌이기도 한다. 가슴에 밀장 돼 있는, 자기한테 너무나 불리한 비망록. 고백하거나 자백하기 전에는 우리 모두는 그걸 알 수가 없다. 공유될 수 없는 그 부담스러운 상처를 성경, 불경, 코란, 경전 등으로 가린다. 하지만 그게 답일까. '합리화'란 방식으로 간직할 수밖에 없는 별별 악마의 연대기, 그게 '악령'처럼 인간을 몰아간다. 성격이 인격으로 숙성되려면 그 악령을 잘 승화시켜야 된다. 결과에 따라 인간은 소인과 대인으로 나뉜다.일할 땐 악령은 뒤로 물러난다. 하지만 잠잘 때면 그가 주인이 된다. 나중에는 그가 이승과 저승의 경계까지 그리게 된다. '카르마'란 이름의 '업(業)'도 바로 그런 태생이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고 외친다. 그 말은 '모든 인간은 치료 불가능한 악령의 존재라는 측면에서 모두 평등하다'란 의미랄 수 있다. 세상·시대·일상과 불화를 겪고 있는 자들은 '불면'이란 감옥에 갇힌다. 파산 선고를 당한 자, 사망 선고를 받은 자, 배신·모욕·수모·망신을 당한 자…. 그런 자는 피가 뇌 쪽으로만 몰린다. 눈을 감아도 눈앞이 대낮처럼 훤하다. 전전반측, 불면의 시간이다. 그때 악마보다 더 저주스러운 자들이 등장해 잠으로 향하는 길을 봉쇄시킨다. 악령에 감금된 마음, 그 맘의 고삐는 쉬 움켜쥐기 어렵다. 내가 맘의 주인인 것 같은데 그 악마가 늘 내 맘을 독점한다. 그가 날 역 통제한다. 가슴은 응어리지고 끝내 돌처럼 굳어진다. 그 어떤 폭약으로도 깨지지 않을 만큼 견고해진다. 절정에 달한 슬픔은 비로소 '한(恨)'으로 승화된다. 한은 역설의 공간. 슬픔이 궁극에 달할 때, 마치 비명이 절정에 달할 때 소리를 잃게 되듯, 그 슬픔은 고요의 단계로 승압 된다. 별별 상처 다 딛고 자수성가한 뒤 전 재산을 사회에 내놓을 수 있는 자들만이 풍겨내는, 그 어떤 무덤덤한 경지 같은 거랄까. 싫음은 미움, 그 미움은 증오, 그 증오는 저주로 독을 쌓아 나간다. 그 저주가 양심을 장악할 때, 인간이 완성되는 건가? 우린 지금 '착함을 빙자한 악령의 세상'을 맞고 있다. 그러니 '양심은 순진무구하다'고 장담하지 마시라. 지금 별이 그 자리 별이 아니듯 양심이 그 어떤 악령일 수도 있다. 좋음이 결국 나쁨이었음을 깨닫게 해주는 요지경 세상. 그러니 부디 '저 사람, 정말 착하다'란 말을 쉽게 하지 마시라. 차라리 '모두 나쁜 사람의 출발선에 서 있다' 하시라. 그러니 누굴 더 유익하게 배려하는 삶이 얼마나 숭고한가를 반드시 기록하시라. 어떤 이는 '양심의 가책'을 도덕과 윤리의 마지막 보고라 여긴다. 과연 그럴까? 슬픔은 일상이고 악은 삶의 전제 아닐까. 대지 속에 빙하가 바늘처럼 박혀 있듯, 생명체가 호모사피엔스로 진화하면서 구축된, 자기를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그 의지라는 것, 그게 악령에 물든 양심의 다른 모습일까.얼마 전 필리핀 근해 마리아나 해연, 수심 1만m가 넘는 그 바닥에서 어이없게도 비닐봉지가 발견됐다. 놀라지 마시라! 양심의 심연에 스며든 악령인가. 인간과 동행하는 양심이란 이 변형 바이러스. 어쩜 악은 특별한 게 아니다. 이미 하나의 '평범성'을 획득한 건지도 모른다. 그 속뜻이 궁금하신 분이라면 올해 이육사 문학상을 수상한 이산하 시인의 '악의 평범성'(창작과 비평사 간)이란 시집을 일독해 보시길.이춘호 주말섹션부 전문기자이춘호 주말섹션부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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