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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춘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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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복·이춘호 '한식 삼천리'] 대구식 헛제삿밥 같이 드실래요? (2)
제사상이 그렇듯 나물 가짓수도 반드시 홀수여야 하고 한번 무치고 나면 절대로 다시 무치지 않았으며 간장·깨소금·참기름 외에 다른 조미료를 넣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또 마른 찬으로는 민물고기나 조기 등을 약간 말려서 쪄냈다. 탕국은 생선 대가리 남은 것을 전유어(부침개)와 함께 끓여서 냈다. 고춧가루가 들어간 찬은 내놓지 않는 데 비해 헛제삿밥에는 배추김치라든가 고춧가루가 들어간 찬이 올려진다. 헛제삿밥은 차려 놓은 그대로 먹기도 하지만 놋대접에 삼채 나물과 탕국, 고소한 참기름을 넣고 비벼 조상과 자손이 함께하는 '신인공식(神人共食)'의 의미가 있다.잔칫날·명절·제사때 돔배기 재료찜으로 만들거나 산적으로 요리모양 따라 '바대산적' '써래산적'조리법과 맛 차별화 돔배기탕국문어숙회·청어찜·닭찜·김치 세팅차세대 힐링푸드 전도사 김영은씨지역정서 맞는 대구 헛제삿밥 재현탕국·돔배기·간장이 맛 좌우 핵심 추가 메뉴 개발 일반에 공개키로 ◆복잡다단한 제상 차리기탕은 오늘날의 찌개라고 할 수 있다. 소고기·생선·닭고기 중 한 가지만을 택하여 조리한다. 양념에 파, 마늘, 고추 등을 쓰지 않는다. 예전에는 탕의 수를 1, 3, 5의 홀수로 하였고 탕의 재료로 고기, 생선, 닭 등을 사용하였다. 3탕일 경우는 육탕·어탕·계탕을 준비하였는데 모두 건더기만 탕기에 담았다. 그러나 지역에 따라 국물과 같이 올리는 일도 있으므로 편리한 대로 한다.헛제삿밥은 국물 그대로 올리는데, 육·어·소를 함께 넣어 한 그릇에 끓이기도 한다. 기름에 튀기거나 부친 것으로 육전, 어전, 소전(두부전) 등 세 종류를 준비한다. 옛날에는 적과 함께 계산하여 그릇 수를 홀수로 만들고자 전은 반드시 짝수로 만들었다. 전과 적을 합하여 홀수가 되어야 하는 것은 재료가 고기, 생선 등 '천산(天産)'이기 때문에 양수인 홀수에 맞춘 것이다. 육전은 소고기를 잘게 썰거나 다져서 둥글게 만들어 계란을 묻혀 기름에 부친다. 어전은 생선을 저며 계란에 담가 기름에 부친다. 소전은 두부를 직사각형으로 썰어 번철에 지진다.적은 구이로서 제수 중 특별식에 속한다. 옛날에는 육적·어적·계적, 이렇게 세 적을 세 번의 술잔을 올릴 때 바꾸어 구워서 올렸으나 오늘날에는 한 가지만 준비하도록 하고 올리는 것도 처음 진수 때 함께하고 잔을 올릴 때마다 따로 하지 않는다. 육적은 소고기를 2~3등분 하여 길게 썰어 소금구이하듯 익혀 사각 접시에 담는다. 어적은 생선 2~3마리를 고춧가루를 쓰지 않고 익혀서 사각의 접시에 담는다. 이때 머리는 동쪽으로 하고 배는 신위 쪽으로 가게 담는다. 지방에 따라 반대로 하기도 한다. 계적은 닭의 머리·다리·내장을 제거하고 구운 것으로 등이 위로 가게 하여 사각의 접시에 담는다. 적을 올릴 때는 '적염(炙鹽)'이라 하여 찍어 먹을 소금을 접시나 종지에 담아 한 그릇만 준비한다.숙채는 익은 채소. 한 접시에 고사리, 도라지, 배추 나물 등 3색 나물을 곁들여 담는다. 또는 각기 한 접시씩 담기도 한다. 추석 때는 배추·박·오이·호박도 푸른색 나물로 쓰는데 역시 마늘·고춧가루는 양념으로 쓰지 않는다. 김치(침채)는 희게 담은 나박김치를 보시기에 담아서 쓴다. 고춧가루는 쓰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간장(청장)은 맑은 간장을 놋 종지에 담는다. 전통적으로 제사에 쓰는 과일은 대추·밤·감·배였으므로 이것들을 꼭 준비하고 그밖에 계절에 따라 사과, 수박, 참외, 석류, 귤 등의 과일을 1~2종 준비하면 충분하다. 바나나, 파인애플, 키위 등 생소한 수입 과일은 일절 사용하지 않도록 한다. 옛날에는 과일이 '지산(地産)'이라 하여 그릇 수를 음수인 짝수로 하였다. ◆대구 헛제삿밥의 차림헛제삿밥의 메뉴는 대구경북 지방의 제수 음식을 기본으로 한다. 기본적인 상차림으로 3적(육적, 어적, 소적(두부적)), 봉적(닭찜)과 3탕(명태, 건홍합, 피문어), 3색 나물(숙주, 고사리, 시금치), 문어숙회, 김치, 상어 돔배기, 밥, 국 등이 올라간다.구한말까지 대구 헛제삿밥이 유명할 수밖에 없는 특별한 이유는 대구경북의 제례 음식문화를 잘 살펴봐야 할 것이다. 대구의 헛제삿밥에는 조기가 올라가고, 청어 철에는 청어가 올라가지만 반드시 올리는 게 '상어 돔배기'다. 지금도 경상도 사람들은 귀한 손님이 오셨을 때나 잔칫날, 그리고 명절과 제사 때에는 꼭 돔배기를 상에 올린다. 특히 대구의 제사상에 올리는 돔배기를 만드는 상어는 '양지'라 해서 귀상어를 제일로 친다. 돔배기를 쪄 올리기도 하지만 보통 돔배기 산적으로 만들어 올리기도 한다. 돔배기를 꼬치에 가지런히 꿰어 식용유를 두른 팬에 굽는다. 경상도 사람들에게는 어릴 때부터 먹어온 익숙한 맛으로 타 지역에선 맛보기 어려운 '솔 푸드(soul food)'다.돔배기 산적도 모양에 따라 '바대산적'과 '써래산적'이 있다. 아이 손바닥에서 어른 손바닥 크기로 형편에 따라 썬 돔배기를 세 개에서 다섯 개씩 꼬챙이에 나란히 꿴 '바대산적'은 일반적인 제사상에 올린다. 산적으로 쓰기에 애매한 뱃살은 수육으로 하거나 전을 부치기도 한다. 써래산적은 조상의 묘를 찾아 가 지내는 묘제 때 올린다. 써래산적은 폭 5㎝, 길이 25㎝ 정도로 길게 썬 돔배기를 각각 하나씩 꼬챙이에 꿴 것이다. 골동반에는 이 써래산적을 반드시 올린다. 헛제삿밥이나 골동반 모두 음료로는 감주(甘酒), 즉 식혜를 올리면 될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게 '돔배기탕국'이다. 이건 조리법과 맛이 타 지역과 차별화되어 있다. 돔배기탕국은 우선 돔배기 뼈를 푹 끓여 국물을 낸 다음 소고기를 참기름에 볶다가 깍둑 썰기한 무를 넣고 미리 준비한 국물을 부어 끓이다가 '두치(돔배기 껍질)'와 두부를 넣고 다시 끓여 낸다. 정리하자면 대구 헛제삿밥의 기본 상차림은 밥과 돔배기탕국, 돔배기찜, 문어숙회, 조기나 청어찜, 바대산적, 써래산적, 봉적(닭찜)·소적(두부적), 삼색나물, 김치 등으로 세팅하면 된다.◆대구 헛제삿밥 재현 아직 영남 지역은 유학의 후습이 두터워 고인을 기리는 기제사를 지내는 가정이 상당하다. 제사 후 음복을 하면서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있다. 다들 엄지 척 하면서 일반 식당에 가선 이런 맛을 절대 접할 수 없다고 탄성을 자아낸다. 그런데 여느 한식당에서는 왜 헛제삿밥을 팔지 않을까? 제사음식이란 선입견 때문일까? 대구와 달리 안동에서는 여전히 헛제삿밥 전문점이 힘을 받는다. 안동국수·간고등어·안동식혜가 헛제삿밥과 함께 세트로 움직인다. 안동이 단연 헛제삿밥 총사령부 같다.대구에서도 제대로 된 헛제삿밥 시대를 열어보자. 그렇게 의기투합한 두 사람이 있다. 김영복 식생활문화연구소장, 그로부터 대구 헛제삿밥 레시피를 전수 중인 차세대 힐링푸드 전도사인 김영은(37)씨다. 그녀는 성균관대 생활과학대학원을 졸업했고 현재 푸드블로거(양생수까락)로 활동 중이다. 한식·양식·중식·일식 조리·제과제빵기능사, 국제약선사, 한국차감정사 등 팔색조 셰프 같다. 그녀는 몸과 맘이 동시에 망가지는 코로나 시국을 딛고 자신만의 '힐링푸드촌'을 짓는 게 꿈이다. 둘은 몇 달에 걸쳐 지역 정서에 맞는 대구식 헛제삿밥을 재현했다. 지난달 21일 남구 이천동의 한 너와집에서 만난 두 사람은 사진 촬영 겸 시식을 위해 미리 요리해 온 음식을 법식에 맞게 상에 옮겨 담았다. 써래·바대 돔배기 산적, 조기, 삼색 나물(고사리, 시금치, 무), 두부전, 소고기 산적, 탕국, 백김치, 식혜, 그리고 복판에 지렁(집간장)을 담아 놓았다.김 소장이 김씨에게 수저 놓는 법을 가르쳐준다. "일반 식당처럼 수저를 놓으면 곤란해요. 앉은 사람의 오른쪽 귀퉁이에 가로 방향으로 그것도 가장자리에서 2.5인치 정도 밖으로 나오도록 세팅을 해야 된다"고 강조하자 김씨가 고개를 주억거린다. 탕국과 돔배기, 그리고 간장이 맛을 좌우한다고 했다. 밥을 비며 먹을 때도 '고추장, 그리고 계란 프라이는 맛을 망치니 절대 사용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안동은 간고등어이지만 대구 정서는 아직 조기라고 했다. 둘은 헛제삿밥 전문점 오픈을 위한 음식값, 추가 메뉴, 곁들임 반찬 등을 개발해 일반에 공개할 예정이다. 더불어 대구시도 헛제삿밥에 관심을 많이 가져달라고 당부한다. 대구 헛제삿밥~대구 골동반. 산해진미에 길들여진 사람들에게 과연 진검 같은 이 힐링푸드가 얼마나 먹힐지 귀추가 자못 궁금해진다. 정리·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김영복(오른쪽)식생활문화연구소장과 요리연구가 김영은씨가 대구식 헛제삿밥 재현을 위해 남구 이천동 한 너와집에서 재현된 상을 앞에 두고 헛제삿밥의 미래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있다.진주시 금산면에 있는 진주 유일의 헛제삿밥 한 상 차림. 여긴 안동과 달리 돔배기·고등어 등을 사용하지 않는다.
[김영복·이춘호 '한식 삼천리'] 대구 헛제삿밥의 유래… 제사 남은 음식 골동반 모방, 시장서 맛 낸 '허제반' 판매
대구 헛제삿밥도 진주·안동 헛제삿밥처럼 유생들이 즐겨 먹던 음식이다. 조선말 문신이자 서예가 최영년(1856~1935)이 지은 '해동죽지(海東竹枝)' 중편(中篇) 음식명물(飮食名物)에 보면 대구(大邱)의 별미로 감주(甘酒·단술)와 함께 '허제반(虛祭飯)'이라고 하는 '대구 헛제삿밥'이 나온다. '우리나라 민간의 제사에서 음식이 남으면 골동반을 만들었는데 대구부(大邱府)안에서 이를 모방하여 맛을 내어 시장의 가게에서 판매하면서 이름을 허제반이라고 했다'라고 쓰여 있다. 이 문구에서 보듯 대구에서는 헛제삿밥이 일찍이 외식상품으로 판매됐다는 것을 미뤄 짐작하기도 한다.대구 헛제삿밥은 두 유형의 차림을 들 수 있다. 하나는 한상차림의 유형이고 또 하나는 비빔밥이라는 일품요리형태다.한상 차림의 헛제삿밥은 제사상을 기본으로 하고 골동반(骨董飯)은 밥과 나물이 올라가고 간장으로 비빔을 하는 비빔밥과 돔배기 써래산적, 탕국을 기본으로 한다.
[김영복·이춘호 '한식 삼천리'] 대구식 헛제삿밥 같이 드실래요? (1)
헛제삿밥(虛祭飯)? 이건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제삿밥은 알겠는데, '헛'이라니! 헛제삿밥은 한식 중 아주 독특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기제사 때 먹는 음복용 음식이 시중 음식으로 발전해 왔기 때문이다. 현재 상업화된 곳은 안동과 진주 두 곳뿐이다. 인프라로 본다면 안동이 단연 리더 격이다. 현재 까치구멍집, 맛 50년 헛제삿밥, 예미정(종가비빔밥), 하회식당, 이화식당, 청기와식당 등 7~8집이 있다. 가장 성공적인 곳은 까치구멍집이다. 대구의 경우 20여 년 전 팔공산 자락과 10여 년 전 대구수목원 근처 '제비원'이란 두 곳에서 헛제삿밥을 팔았지만 모두 문을 닫았다. 현재 옛 대구MBC 근처에 있는 한식당 대연정에서 파는 헛제삿밥은 원형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것 같다. 50여 년 역사의 개정식당도 언뜻 전주비빔밥과 헛제삿밥을 조금 융복합한 것 같다. 진주는 광복 이후 서너 곳이 영업을 했는데 60년대에 자취를 감춘다. 현재 금산면 갈전리 '진주헛제삿밥'이 유일하다. 초대 여사장 이명덕(75)씨는 합천 출신인 친정 어머니(이달순)가 음식을 팔 때 잠시 헛제삿밥(1982년 '강나루 헛제사밥' 오픈)을 취급했지만 찾는 이가 별로 없어 취급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2000년 김영복 식생활문화연구소장의 권유로 헛제삿밥 전문점 시대를 연다. 이 무렵 안동시는 안동 헛제삿밥을 진주비빔밥처럼, 그리고 진주시청은 헛제삿밥과 냉면을 특화한다. 김 소장은 당시 부산방송(PBS)을 통해 진주 헛제삿밥을 재현해 반향을 일으킨다. 이명덕은 이후 <사>대한명인협회로부터 '진주 헛제삿밥 명인'으로 선정된다. 현재 이명덕은 아들 내외(김창우·양은영)와 함께 일한다. 진주 헛제삿밥은 안동 헛제삿밥과 다른 점이 몇 가지 있다. 일단 비늘이 없는 돔배기와 간고등어는 사용하지 않는다. 여긴 조기, 민어, 돔 등이 메인 생선이다. 안동에서 즐겨 보이는 배추전과 명태전도 여기선 보이지 않는다. 안동권에서는 나물을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내지만 진주 헛제삿밥에선 나물에 칼질하는 걸 그다지 반기지 않는다. 보통 비빔밥은 젓가락을 사용해 비비는 줄로 알고 있었는데 진주 헛제삿밥은 숟가락으로 비빌 것을 주문한다. 진주 헛제삿밥은 6가지 모둠전(육전, 어전, 버섯전, 부추전, 산적 등), 그리고 마지막엔 생선찌개 같은 일명 '진주식 거지탕'이 특식으로 나온다. 조기 등 말려 놓은 갖은 생선을 넣고 신선로처럼 푹 끓여낸 것이다. 헛제삿밥은 경상도 안동과 대구 그리고 경남 진주에만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한마디로 영남 성리학(사림파)의 양대 산맥이랄 수 있는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을 태두로 한 영남 사림파의 기제사 문화 때문에 태어난다. 경상도는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산악이 많고 평지가 적어 논농사보다 밭농사가 중심이다. 지주 계급이 적었지만 걸출한 인재들이 많이 배출됐다. 조선 후기인 1751년(영조 27) 실학자 청담(淸潭) 이중환(1690~1756)이 쓴 조선 역사 지리서인 '택리지(擇里志)'에는 '조정의 인재 반이 영남인'이라고 적을 정도다. 영남 사림파는 16세기 이후 중앙 정계에 본격 진출했다. 이들이 관직에서 떠나 낙향 후 서원을 짓고 후학들을 길러냈다. 이 과정에서 탄생된 음식이 바로 헛제삿밥이다. 양반들이 춘궁기에 드러내놓고 쌀밥을 먹기가 미안스러워 제사 음식을 차려 놓고 가짜로 제사를 지낸 후 제사 음식을 먹은 데서 유래되었다는 설과 제사를 지낼 수 없는 천민들이 한이 맺혀 제사도 지내지 않고 제삿밥을 만들어 먹은 데서 시작됐다는 설도 있다. 제사 지낼 때 차려내는 음식을 '제수' 또는 '제찬'이라고도 한다. 기본 제수는 메(기제사 때는 밥, 설에는 떡국, 추석에는 송편), 삼탕(소, 어, 육), 삼적(소, 어, 육), 숙채(시금치, 고사리, 도라지의 삼색 나물), 침채(동치미), 청장(간장), 포(북어, 건대구, 육포 등), 갱(국), 유과(약과, 흰색 산자, 검은깨 강정), 과실(대추, 밤, 감, 배), 제주(청주), 경수(숭늉) 등이다. 지체가 높거나 살림이 넉넉한 집안에서는 삼탕·삼적·삼채를 더해 오탕·오적·오채를 올리기도 하고 지방·학파·가문에 따라 제수가 달라지기도 한다.헛제삿밥도 위 제수를 중심으로 간략하게 차려내는데, 주재료는 나물·탕국·생선 자반 중심이다. 제사를 지낼 때 향불을 피워 향이 나물에 배어들게 해 제사 음식의 분위기를 더욱 돋운다. 그래서 낮에는 절대로 음식을 만들지 않았다. 낮에 무친 나물은 손맛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대담=김영복 식생활문화연구소장·이춘호 음식전문기자정리·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 [김영복·이춘호 '한식 삼천리'] 대구식 헛제삿밥 같이 드실래요? (2)에서 계속됩니다.헛제삿밥은 안동·진주 등 경상도에만 몰려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한마디로 영남 성리학(사림파)의 양대 산맥이랄 수 있는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을 태두로 한 영남 사림파의 기제사 문화 때문에 태어난다. 재현된 대구 헛제삿밥.탕국.갖은 헛제삿밥 재료로 비벼진 대구 골동반. 이번에는 특이하게 소고기를 대구 보푸라기처럼 가늘게 갈아 풍미 재료로 올려놓았다.삼색 나물(무, 시금치, 고사리).
[첫/날] 홍순백 첫 개인전
경남 마산에서 태어났고 초등학교 1학년 때 대구로 왔다. 초등학교 때 미술 교과서 에서 밀레의 '만종', 그리고 중학교 때는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들을 보면서 '어찌하면 화가가 될 수 있을까'라는 막연한 생각을 했다. 영신고 때 미술대학에 가면 화가가 될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창원대 미술학과에서 조소를 전공한다. 졸업 후 진로를 놓고 고민하던 중 생계를 위해 취직의 길로 들어선다. IMF 외환위기 직전 109개 회사에 자필 이력서 및 자기소개서를 제출했으나 모두 서류 전형에서 탈락한다. 마지막 109번째, 354년의 역사의 독일계 회사에 취직해 20여 년 직장생활 및 개인사업 등을 했다.하지만 전업화가의 꿈은 결코 버릴 수 없었다. 쉰 전후 작가로 변신할 작정이었다. 연필스케치, 에스키스, 드로잉 등은 손 놓지 않았다. 그리고 그림으로 그릴 소재는 틈틈히 정리해뒀다. 대략 만 개 정도의 그림 소재는 미리 정해뒀다.지난해 6월 결전의 날이 왔다. '나는 화가'라고 주위 사람에게 선언한 것이다. 하지만 이내 공포가 밀려든다. 나는 누구인가, 내 그림의 독특한 매력이 무엇인가, 화가, 과연 내 목숨을 받칠 정도로 소중한 일인가, 세계 미술 시장에서 내가 들어갈 공간이 있는가…. 맘 고생 끝인 지난 14일 달서구 상인동 월곡역사공원 근처에 있는 이태활 갤러리에서 생애 첫 개인전을 오픈했다. '시간과 공간을 너머'란 주제. 치열하게 준비했다. 월 28~29일 정도는 오전 2~3시에 작업을 시작, 오후 8~9시에 종료했다. 그리다가 피곤하면 야전 침대에서 잤다. 그렇게 7개월 동안 개인전 준비에 올인 했다.내 그림의 소재는 일상에서 오지만 궁극적으로는 '너머(Beyond)'를 풍자적으로 비유적으로 포착하고 있다. 일종의 만화풍의 패러디다. 청색과 녹색 계열을 즐겨 사용한다. 언뜻 수채화·파스텔화·만화 같다. 색을 과하게 칠하지 않는다. 늘 유머가 흐르게 한다. 김수환 추기경이 '삶은 달걀'이라고 한 말씀이 생각났다. 라이프 잡지 로고에 달걀 그림을 합쳐 보았다. 그냥 있는 그대로 그리지 않는다. 미적 메타포를 위해 한 번 더 의미를 비틀어준다. 마냥 미학적인 그림 말고 뭔가 생각하게 만드는 그림 말이다. 구상, 반구상, 추상 등도 따지지 않는다. '밀림 속 코끼리'란 작품은 눈을 감고 자동기술적으로 붓 가는 대로 무의식적으로 그렸다. 그리고 나니 엉뚱하게 '코끼리' 한 마리가 나타났다.대표작이랄 수 있는 '파란하늘 (Blue sky)'. 나만의 에피소드가 담겨 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이 한창일 때 나는 경기 관람보다 영업에 미쳐 있었다. 어느 날 발바닥이 아파서 구두를 벗어서 확인을 했더니 구두 밑창에 구멍이 나 있었다. 구두 밑창을 들었다. 그 구멍을 통해서 본 파란 하늘은 감동과 전율이었다.지친 일상을 지탱해준 구두 밑창, 내 젊은 날의 치열함이었다. 거기서 피어난 찬란하고 아름다운 구멍 하나, 내 생계의 최전선에서 발굴했던 그 구멍, 갤러리에 꿈처럼 걸어놓았다. 010-8549-5964 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홍순백 '파란하늘'
[이춘호 전문기자의 푸드 블로그] 부산 자갈치시장 연탄 별미 (상)…자갈치 뒷골목 해안길 점포마다 내뿜는 꼼장어 구이 불내음
연탄꼼장어 골목오랜 세월 식문화가 반죽한 감성 풍광수족관서 꺼내 껍질 벗긴 후 석쇠 초벌화근내로 피어오르는 육즙, 침샘 자극양념과 로스구이 반반 불판으로 옮겨져소주 한잔 곁든 고소한 맛에 폭풍 흡입내게 부산은 '제2의 고향' 이다. 젊은 시절, 세상의 끝이 잘 보이지 않으면 훌쩍 대구역으로 가서 부산행 완행열차를 탔다. 최백호의 노래 '부산에 가면'과 같은 느릿한 템포로 부산역 근처 선창에 우두커니 앉아 종일 선창의 비린내의 지문을 화두처럼 품길 좋아했다. 하지만 그때는 부산의 식문화가 한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40년이 지나자 조금씩 부산의 속살이 보이기 시작했다. 임인년 봄기운이 스멀거렸던 지난 주말, 문득 부산 자갈치시장의 식문화를 탐구하고 싶어 동대구역으로 가서 무궁화 열차를 탔다. 부산의 식문화는 대구와 비슷한 구석이 많다. '국수광'이 많다는 사실, 그리고 돼지국밥의 메카, 또한 '연탄이 키워낸 별미'로 불리는 꼼장어와 양곱창 거리가 대구 칠성시장과 북성로 연탄석쇠돼지불고기와 안지랑시장 양념곱창거리와 비슷한 포스를 유지하고 있다. 부산경남권 음식연구가로 유명한 푸드칼럼니스트 최원준 시인을 불러내 밤이 이슥하도록 자갈치시장을 돌며 두 컷의 연탄불을 베이스로 한 별미기행을 챙겼다. 꼼장어와 양곱창.◆양파 속 같은 자갈치시장부산보다 더 유명한 건 자갈치시장. 그 시장보다 더 유명한 랜드마크는 '억척 인생'의 대명사로 불리는 '자갈치 아지매'. 대구 자갈마당처럼 유달리 자갈이 많았던 자갈치시장. 10개 이상의 존이 군웅할거하고 있다. 빌딩형 시장, 점포형 시장, 포장마차형 시장, 좌판 난전 등이 뒤엉켜 있다. 떼어내 분류할 수 없는 해묵은 실뭉치 같다. 보통 자갈치시장이라면 건물 내에 상인이 들어가 있는 빌딩형 시장을 지칭한다. 종합수산물센터 구실을 하는 신동아시장과 갈매기 비상을 형상화한 통유리창 건물에 들어선 수산시장이 센터라고 할수 있다. 이를 축으로 남항 좌우로 긴 구역이 도열한다. 영도다리 옆 점바치 골목과 맞물린 남포동 건어물종합상가, 온갖 회를 먹을 수 있는 빌딩형 신동아시장 인근 해산물 난전 구역, 그 옆 좁다란 수백미터 해안길 좌우로 200~300개 간이 점포가 도열한 곳이 바로 '연탄꼼장어골목'이다. 바로 옆 블록 신천지상가아파트 골목에 형성된 양곱창골목도 얼추 70여 년 한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것과 맞물려 해산물과 채소류·선어 등을 함께 파는 해안시장, 충무로 새벽시장, 그 마지막 지점에 국내에서 가장 많이 고등어를 위판하는 부산공동어시장이 연결돼 있다. 그 시장통로는 칙칙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오래 청소하지 않은 연통 내부 같다. 왕창 삭아 내린 기름 범벅의 중식당 환풍기 몰골이다. 그렇다고 그건 '흉터'가 아니다. 일종의 부산만의 추억이다. 물성이 아니라 '감성'인 탓이다. 시간이 키워낸 풍광이 아니라 부산만의 식문화가 반죽해낸 자갈치만의 '울림' 아닐까. 우중충하고 비위생적이고 북적대고 소란스러우니 더 반듯하고 현대풍으로 깔끔하게 정비한다면? 왠지 득보다 실이 더 많을 것 같다. ◆송림식당에서 만난 꼼장어오전 11시30분쯤 1세대 자갈치아지매가 터전을 일군 '송림식당'을 찾았다. 건장한 청년 두 명만 앉아도 꽉 찰 것 같은 포장마차 스타일의 점포다. 남항 바로 옆에 몰려 있는 꼼장어집, 대다수 이 점포의 반은 중구청, 나머지는 항만청이 소유권을 갖고 있다. 1년에 30만원 정도 임차료를 낸다. 여기는 누구의 공간도 아니다. 생계의 최전선에서 목숨 걸고 점령(?)한 아지매의 생때 같은 공간이다. 무허가, 무면허 공간, 하지만 몰아내지 못한다. 천막 너머 남항 상공을 나는 갈매기, 정박 중인 배가 보인다. 투박한 목로의자의 발판은 뼈만 앙상한 것 같다. 숱한 발길이 부피의 반을 앗아가 버렸다. 벌겋게 달아 오른 연탄, 그 위에 놓인 불판. 너무 오래 사용해 구멍이 나버렸다. 연탄 불길을 다 이겨내지 못한 것이다. 올해 68세의 여주인. 그는 39년 경력의 2대 사장이다. 1대는 꼼장어에 일생을 바친 어머니다. 처음에는 '할매집'이란 상호를 가졌다. 현재 삼성프라자 자리에 있던 동명극장 골목에서 난전을 꾸려갔다. 무허가 점포라 늘 단속반을 피해 다녔다. 전두환 대통령이 부산 순시 때 이 장터 상인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준 것이다. 그때부터 쫓기지 않으며 장사할 수 있었다. 초창기에는 1인분 1천500원선. 그런데 이젠 꼼장어가 금장어. 4만원(소)·5만원(중)·6만원(대)으로 가격이 수십 배 폭등해 버렸다. 그 시절에는 소주 반 병, 잔술, 담배도 낱개로 팔렸다.최 시인이 부산 꼼장어 연대기를 소상하게 설명해준다. 부산 꼼장어의 1번지는 미역과 멸치 등으로 유명한 기장이었다. 기장으로 모인 꼼장어는 부산 도심 깊숙하게 스며든 동해남부선 열차가 없었다면 거대한 '부산꼼장어벨트'가 형성될 수 없었다. 거기서 잡힌 꼼장어는 동해남부선을 타고 해운대, 동래, 온천장, 부전역, 부산역전, 마지막 코스인 자갈치시장까지 번졌다. 역 주변 시장이 주요 유통경로였다. 한창 때는 부산진역~부산역~자갈치가 꼼장어루트였다. 지금은 자갈치에 집중돼 있다. 일제강점기만 해도 꼼장어는 존재감이 없었다. 피혁제품을 만들기 위한 껍질만 부산물로 인기였다. 식용이 아니라 '산업용'이었다. 버린 몸통을 가져가 구이로 변주한 게 부산꼼장어 요리의 출발이다.장어는 크게 민물과 바다 스타일로 나뉜다. 그 명칭이 참 헷갈린다. 정리하자면 꼼장어는 '먹장어'로 불린다. 일본에선 민물장어를 '우나기', 갯장어는 '하모', 붕장어는 '아나고' 로 부른다.부산 꼼장어는 크게 자갈치시장과 기장을 축으로 한 '짚불스타일'이 있다. 자갈치는 양념이 주종을 이룬다. 기장 선창에서 가장 흔한 것 중 하나가 꼼장어였다. 우연찮게 꼼장어가 짚불에 들어가면서 기장짚불꼼장어의 역사가 시작된다. 그 음식은 기장지역의 보릿고개 때 즐기던 구황음식 중 하나였다.양념과 로스구이를 반반 시켜 먹었다. 반반으로 분리된 꼼장어가 저기압과 고기압으로 굽히고 있다. 일차적으로 가게 앞 화덕에서 석쇠로 초벌을 한다. 껍질을 벗겨놓았지만 꼼장어의 생명력은 놀랍다. 거의 10시간 정도 살아 있다고 한다. 연탄불과 한몸이 되면서 꼼장어의 육즙이 화근내로 피어오른다. 시장통을 오가는 행인의 침샘을 마구 강타하기 시작한다. 나도 모르게 폭풍흡입. 그리고 소주 한 잔. 탄력적이고 고소한 육질의 씹힘성! 엄지척! 대구에서 먹던 '냉동 꼼장어' 맛은 당분간 좀 반성을 해야만 했다. 수족관에서 바로 잡아 껍질 벗겨 불판에 올린 꼼장어 구이. 이래서 다들 '부산 꼼장어~'를 연호하는 모양이다. 글·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자갈치 뒷골목은 선원들이 배에서 내려 술로 목을 축이던 맥줏집과 작붓집으로 흥청대던 곳이었다. 많은 선원이 지금의 양곱창 골목에 있던 작붓집에서 돈을 탕진했다. 그러던 것이 1980년대 전후 수산업 경기가 안 좋아지자 이 골목은 양곱창집으로 하나둘 업종을 변경해 오늘에 이른다. 90년대 들어 엔고(円高) 시대가 무르익자 일본인의 '기생관광' 때 빠지지 않고 들르던 곳이 양곱창집이었고 꼼장어골목은 기장에서 잡힌 꼼장어가 동해남부선 철로를 따라 도심 깊숙하게 파고들었다. 사진은 꼼장어골목 전경.초벌 구이 중인 꼼장어.불판에 옮겨져 굽히고 있는 양념꼼장어와 로스구이.
[김영복·이춘호 '한식 삼천리'] 간장(艮醬) 이야기…장맛의 '발효과학'(2)...메주덩이가 떠오를 때 간수 뺀 천일염 '간'이 승부처…용기·온도관리도 관건
재료·달이는 방법 따라 '갱장' '마른새우장' '굴간장' 등 다양한 용도와 맛일제강점기 후 왜간장·진간장 혼용 표기, 일본 잔재 '조선간장' 명칭 고집어육장 주재료 꿩·토종닭·조기·전복은 비린내 제거 위해 건조 후 장 빚어포항 '과메기 맛간장'·1천일간 숙성 거친 '죽장연' 신개념 장류문화 개척'관자(管子)'란 책을 보면 서기전 7세기 초엽 중국 제(齊)나라 환공(桓公)이 지금의 만주 남부인 산융(山戎)을 제압한다. 거기서 가져온 콩을 '융숙(戎菽)'이라 하였다고 한다. 숙이란 '콩'을 의미한다. '삼국지위지 동이전' 고구려조에 따르면 '고구려인이 발효식품을 잘 만든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어떤 종류의 발효식품인지 분명하지는 않다. 서기전 4세기경의 황해도 안악3호고분의 벽화에 우물가에 놓인 발효식품을 갈무리한 듯한 독이 보인다. '해동역사(海東繹史)'에 따르면 발해의 명산물로 메주를 꼽고 있었다. 간장(艮醬)의 경우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8에 보면' '신문왕3년(683년) 2월조에 폐백 품목 중 간장·된장도 포함된 것'으로 보아 신라 초기에 된장과 함께 간장이 따로 나오는 것으로 보아 간장을 담아 식용했다고 봐야 할 것 같다.간장의 명칭도 여럿이다. 수장(水醬), 청장(淸醬), 감장(甘醬), 진간장(陣艮醬)으로 구분된다. 간장은 한국의 고유어 '간'에 한자 장(醬)이 결합한 말이다. 간은 '간간하다'라는 말의 어근으로 짠맛을 뜻한다. 그러므로 간은 우리의 고유어이고, 장(醬)은 한자에서 온 말이다. 고문헌에는 간장이 '한문(艮醬)'으로 표기되기도 한다. 훈몽자회에는 '간쟝'으로 표기돼 있다.간장을 서울에서는 '지럼'이라 부르며 '규합총서(閨閤叢書)'에서는 '지렁'이라 하는데 그 어근은 '질'로서 역시 '짜다'는 말과 '소금'의 뜻도 지녔다. 충청도 지방에서는 '지랑'이라고도 한다.간장의 종류는 재료나 어떻게 달이느냐에 따라 그 이름과 용도, 맛이 사뭇 달라진다.그 종류를 열거하면 갱장(羹醬·장국), 건대소하장(乾大小蝦醬·마른새우장), 기화청장(其火淸醬·밀기울장), 단지령(단간장), 례장(醴醬·맛 좋은 간장), 석화혜장(石花醯醬·굴간장), 자장(炙醬 ·달인간장), 준순장(浚巡醬·속성간장), 진장(眞醬·달인간장), 진장(陳醬·묵은간장), 천리장(千里醬·소고기간장조림) 등이다.◆수장 만드는 법수장(水醬)은 주로 구이나 두부 찬품을 위한 조미료로 사용하기도 하고 음료로 마시기도 했다. 안동 출신 김수가 지은 '수운잡방(需雲雜方)'과 1923년에 나온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朝鮮無雙新式料理製法)' 에는 간장 만드는 방법으로 수장법(水醬法)과 무장법을 소개한다. 수운잡방에는 "20말들이 독에 메주 1말가량을 독 바닥에 먼저 깔고, 독 중간쯤에 다리를 걸고 발을 편 다음 메주 7말을 발 위에 얹는다. 물 8동이를 끓여서 소금을 섞어 붓는데, 물 1동이 당 소금 8되 비율이다. 익으면 발 위의 장, 메주 7말을 걷어 내고 수장은 항아리에 옮겨 넣어 두고 사용한다. 이를 담수장(淡水醬)·담장(淡醬)·물장·무장이라고도 한다.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는 '석달 안에 잘 띄운 바싹 마른 작은 메주 4~5개를 잘 씻어서 채반에 건져 다시 햇볕에 바싹 돌덩이같이 말린다. 이것을 다시 한번 씻어 좋은 물과 합하여 항아리에 담는다. 대략 물 1사발에 작은 주먹만 한 크기의 메주 2/3분량 정도를 넣는다. 항아리에 다 담으면 꼭지와 씨를 없앤 붉은 통고추를 넣는데, 물 1사발에 고추 2개 정도를 넣는다. 뚜껑을 꼭 닫고 차게 익힌다. 겨울은 7일, 여름은 3~4일이면 익는다. 뚜껑을 열어 보아 메주 덩이가 떠올라오면 익은 것이다. 그때 비로소 소금을 넣어 슴슴하게 간을 맞춘다. 떠서 먹을 때에는 고춧가루를 쳐서 먹는다. 두부를 집어넣었다가 수일 후에 메주 덩이와 함께 떠서 먹으면 고소한 맛이 이루 말할 수 없다. 채로 썬 파와 초를 조금 넣고 먹는다'고 하였다. 영조실록 1737년 8월10일자에 따르면 '영조는 정신이 어지러워 마치 안개 속에 있는 것 같다. 그러므로 아침에 수장을 권하셨으나 끝내 입에 넣지 않았다' 고 기록한다.◆진간장의 뒷이야기추사 김정희는 진장(陳醬)을 즐겼다. 그게 바로 '진간장(陳艮醬)'을 말한다. 그러나 오늘날 진간장이라면 바로 일본식으로 만든 공장 간장을 말한다. 1889년 발간된 부산부사에 의하면 1886년 일본은 우리나라에 최초의 공장이랄 수 있는 간장공장을 부산 신창동에 세웠다. 그 이후 일본 사람들은 마산 등지에도 간장공장을 세웠다.우리 간장은 콩만을 원료로 하고 전분질을 사용하지 않는다. 주로 세균에 의해서 발효시킨다. 하지만 일본간장은 콩과 전분질의 원료로서 혼합 사용하며 발효균도 곰팡이를 사용한다.요즘 유통되는 건 양조간장·혼합간장·산분해간장 등이 있는데, 대두 탈지대두 또는 곡류 등을 제국하여 식염수 등을 섞어 발효 숙성시킨 후 그 여액을 가공한 것이 양조간장이다. 이때 탈지대두 7% 이상을 사용하고 대두 또는 탈지대두를 혼합하여 사용하는 경우에는 9%를 사용한다.혼합간장은 우리 재래간장 또는 양조간장에 산분해간장 또는 효소분해 간장을 적정비율로 혼합하여 가공한 것이나 산분해 간장 원액에 단백질 또는 탄수화물 원료를 가하여 발효 숙성시킨 여액을 가공한 것, 또는 이의 원액에 양조간장 원액이나 산분해 간장 원액 등을 적정 비율로 혼합하여 가공한 것을 말한다. 그리고 산분해 간장은 단백질 또는 탄수화물을 함유한 원료를 산으로 가수분해한 후 그 여액을 가공한 것을 말한다. 일제강점기 이후 왜간장(倭艮醬)과 진간장은 동의어가 되어간 것 같다. 1936년 부임한 제7대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郞)는 장유(醬油), 즉 일식 간장이 조선의 간장을 통섭함으로써 '선일융화(鮮日融和)'를 이루고 곧 조선 사람의 일본인화가 실현됐다는 봤다. 이 선일융화를 뒤이은 통치 구호가 바로 '내선일체(內鮮一體)'.이러한 영향 탓인지 광복된 지 77년이 됐는데도 아직도 우리 주변에는 일본어 잔재가 많다. 우리 간장이란 의미로 사용하는 '조선간장'이란 표현도 어쩜 일본 잔재랄 수 있다. 학계·언론은 물론 모든 인터넷에서도 우리 간장을 그냥 '간장'이라 하면 될 것을 복합명사인 조선간장을 고집한다. 이는 언어부터 우리의 고유한 전통 간장의 가치를 폄훼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산분해간장을 '왜간장'이라고 부르는 건 모르겠지만 우리 간장을 굳이 '조선간장'이라고 부르는 것은 삼가야 할 것 같다.◆별별 간장들 충북 옥천 금강 근처 산골, 옻특구에 사는 박기영 시인은 옻된장 특히 어육장(魚肉醬) 현대화를 위해 엄청 골머리를 앓고 있다. 올해 18년 차 옻된장 구력을 자랑한다. 그는 해마다 어육장을 빚는다. 지난 7일 가족이 먹을 두 항아리 분량의 어육장을 담아 땅에 묻었다. 주재료는 옻된장, 양지머리, 꿩, 전복 등이다. 예전에는 조기도 사용했는데 비린내 때문에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다.후숙 과정이 정말 중요하다. 특히 온도관리에 실패하면 어육장도 자연스럽게 망칠 수밖에 없다. 기온이 15℃ 이상 상승하면 안 되기 때문에 냉장고가 없던 그 시절에는 반드시 땅에 파묻어야 된다. 항아리 높이보다 30㎝ 더 깊게 파야 된다. 박 시인은 "어육장은 생선이 가미된 '어장'과 소고기 등이 가미된 '육장', 그리고 콩으로 담근 '두장'의 복합체"라고 주장했다. 궁중의 별미로 전승됐던 조미간장의 백미랄 수 있는 어육장이 현대로 제대로 전해지지 못했다고 그는 안타까워한다.어육장을 제대로 담으려면 몇 가지 제약조건을 전수해야 된다. 생선과 고기를 사용해야 되기 때문에 비린내 제거가 매우 힘들다. 얼치기 전문가들은 어육을 살짝 꾸덕꾸덕하게 건조해서 바로 사용한다. 게다가 오래 숙성하지 않고 바로 유통시키고 있는 게 현실이다. 어육장 만들기의 최대 승부처는 어딜까. 그는 "어육에 숨어든 핏기를 완벽하게 제거하기 위해 북어처럼 잘 건조 시켜 장 속에 집어넣어야 된다"고 강조했다. 달성군 다사읍에 있는 정강희 두부마을의 정강희 대표도 2012년부터 고조리서에 입각한 어육장 만들기에 올인한다. 그녀는 규합총서와 증보산림경제에 나오는 스타일을 절충해서 만든다. 꿩 , 토종닭, 조기, 전복, 소고기 우둔살 등이 동원된다.<사>한국장류발효인협회는 한국의 농사절기와 해학이 어우러진 절묘한 날인 매년 2월2일(콩이콩이)을 '콩의날' 로 제정해 콩재배농가·콩 가공농업인·장류 발효인들과 관련 행사를 치른다. 경북 포항에서는 특산물인 과메기로 만든 '과메기맛간장'까지 크라우드펀딩에 나섰다. 충북 보령시 성주면 심원계곡 심원마을은 고로쇠 장류 마을로 변신했다. 이밖에 포항시 북구 죽장면 상사리 산골에 들어온 '죽장연'도 신개념 장류문화 개척자 중 한 곳. 2009년 창업된 죽장연은 마을 어르신과 동행하기로 맘을 먹는다. 200일간 콩 재배, 24시간 보관, 24시간 동안 불린 콩은 6시간 동안 삶고, 2시간 동안 뜸을 들여 메주를 만든다. 완성한 메주는 시렁에서 50일 동안 건조, 20일 동안 발효 과정, 이후 간수를 뺀 천일염과 만난다. 60일을 더 기다려 장을 가른 뒤 2년 이상 긴 시간을 장독대에서 숙성. 그렇게 1천일을 기다려야 전통장이 된다. 글·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한식의 원류를 찾아 올라가면 어김없이 만나는 게 '장(醬)'이다. 크게 된장과 간장으로 양분되고 거기서 고추장도 파생돼 나온다. 고래로 절정의 음식, 그 승부처는 '간'이다. 간장의 간, 그게 '간'을 의미할까? 간장의 출발은 좋은 메주만들기, 그리고 그걸 갈무리할 수 있는 좋은 용기다. 그걸 잘 구비해놓은 곳 중 한 군데가 순창 고추장마을이다.한국된장고추장문화원과 〈사〉한국장류발효인협회는 지난 2일 '콩의 날' 행사를 전국 20개 지부에서 일제히 거행했다. 〈한국장류발효인협회 제공〉신개념 전통 장류문화를 개척하고 있는 포항 죽장연. 〈영남일보 DB〉
[김영복·이춘호 '한식 삼천리'] 간장(艮醬) 이야기…장맛의 '발효과학'(1)
한식의 원류를 찾아 올라가면 어김없이 만나는 게 '장(醬)'이다. 크게 된장과 간장으로 양분되고 거기서 고추장도 파생돼 나온다. 고래로 절정의 음식, 그 승부처는 '간'이다. 간장의 간, 그게 '간'을 의미할까? 김영복 식생활문화연구소장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아무튼 '간'은 일차적으로는 소금 맛, 결국 '장맛'으로 귀결된다. 좋은 소금을 향한 선조들의 열정은 상상을 초월했다. 궁궐에 진상해야 될 천일염은 최소 3년 이상 간수를 제거해야 된다. 간수는 뜨거운 콩물을 만나면 응고 현상을 빚어 모 두부를 만들지만 일반 음식에 스며들면 간을 망치게 된다. 그래서 음식에 유별난 애정을 가진 남도의 요리연구가는 자나 깨나 간수가 완전하게 제거된 천일염을 갈구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등장하기 전까지 국내의 염전에서 생산된 굵은 소금은 식품에 사용될 수 없는 '광물류'로 분류됐다. 그 소금이 사용될 수 있는 용처는 김장용 통배추를 숨죽일 때 뿐이었다. 그래서 식품공전상 온갖 식품 제조에는 화학적으로 만들어진 '재제염(일명 꽃소금)'만을 사용토록 했다. 일부 천일염을 왕대나무통 속에 넣고 아홉 번 구워 만들어낸 죽염의 기능성이 과대선전되고 있지만 '몸에 좋은 소금'이란 표현은 현행 식품의약품법상 위법이란 사실은 일부 관계자만 아는 불편한 진실이다.우리나라에만 발효식품이 있는건 아니다. 냉장기술이 발명되기 전 모든 민족은 실온에서 음식이 부패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별별 발효 스킬을 다 동원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의 스시도 한국의 가자미·명태 식해를 벤치마킹해서 탄생됐다는 게 유력한 학설이다. 유럽과 히말리야 고산족의 치즈, 돼지생육의 발효미학이 스며든 프로슈토와 하몽, 가다랑어를 베이스로 빚어낸 일본 가쓰오부시 등도 발효미학의 정점을 찍고 있다. 우리나라의 장 문화는 같은 두장(豆醬) 문화권에 있는 중국·일본과도 구별된다. 메주를 띄운 다음 된장과 간장이라는 두 종류 장을 만든다는 것, 그리고 씨간장을 이용해 '겹장'의 형식을 거친다는 점이 다르다. 시중에는 조선식 간장(집간장)보다 달짝지근한 왜식 간장이 더 많이 유통된다. 이를 '양조간장'이라 하고 우리나라 간장과 구별하기도 한다. 이태호 부산대 명예교수는 "왜간장은 콩과 밀을 동일하게 사용하여 개량식으로 메주를 만들고 철저하게 관리하여 숙성시킨다. 밀전분이 들어가기 때문에 포도당이 많이 생겨 단맛을 띤다. 이때는 고형분을 된장으로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메주를 우량 균주로 철저하게 분해하여 찌꺼기를 최소량으로 줄인다"고 강조했다. 한국에서는 간장을 빼고 나머지 부분을 된장으로 먹는다. 왜식의 경우는 된장(미소 된장)과 간장을 따로 담는다. 왜식 된장은 콩과 밀가루를 섞어 만들기 때문에 단맛이 난다. 일본에도 관서지방에 가면 밀을 전혀 넣지 않는 '타마리 간장'이라는 한국식 간장이 있다. 조선조 명문거유 종부의 삶은 거의 접빈객 봉제사에 집중된다. 그걸 위해 매년 제대로 된 장을 빚는데 올인했다.2017년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방한 때 청와대 국빈 만찬에는 '350년 된 씨간장'으로 만든 한우갈비구이가 제공됐다. 외신들은 '미국 역사보다 오래된 간장'이라고 소개했다. 우리 것임에도 불구하고 다소 낯설은 이 '씨간장' 개념은 전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한국 장문화의 백미랄 수 있는 '겹장'의 스킬, 장의 발효과학을 우리 선조들이 멋지게 역이용했던 것이다.간장은 발효 기간에 따라 다양한 이름이 있다. 2018년부터 청와대 관저의 전통 장을 담당하고 있는 고은정 한국간장협회 이사는 막 담근 새 간장은 '햇간장', 1~2년 정도 숙성시킨 간장은 '청간장', 3~4년 된 간장은 '중간장', 5년 이상 묵힌 간장은 '진간장'이라 명명한다. 진간장 중에서도 가장 맛이 좋은 것을 골라 오랫동안 유지해온 간장이 바로 '씨간장'이다. '하이브리드 펜티엄급 간장'인 셈이다. 이제 한식의 기운이 물씬 풍기는 '간장인문학' 속으로 잠행해 보자. 대담=김영복 식생활문화연구소장·이춘호 음식전문기자 정리·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김영복·이춘호 '한식 삼천리'] 간장(艮醬) 이야기…장맛의 '발효과학'(2)에서 계속됩니다.올해 18년 차 옻된장 전문가로 활동 중인 박기영 시인이 특화 중인 어육장.
[동대구로에서] '자식보험'의 두 얼굴
'자식'이란 어떤 물건인가? 자식은 해가 뜨는 곳이자 동시에 해가 지는 곳. 예전에는 '하늘의 선물'이라 여겼다. 부모한테 자식은 존재 이유였고 그래서 '금지옥엽(金枝玉葉)'. 구한말까지만 해도 가장 확실한 방편은 '자식보험'이었다. 연금 개념도 없으니 믿을 건 문중과 동행했던 자식뿐이었다. 부모의 삶이란 결국 '자식이란 종착역에 무사히 도착하는 것'. 효는 천륜이 뇌관으로 박힌 독특한 '상품'이다. 부모는 핏덩이를 부여안고 출사(出仕·선비가 벼슬아치가 되어 세상에 나감)할 때까지 별별 짓을 다 감내하고 감수한다. 어느 날 부모가 병이 들어 몸져 눕는다. 그걸 본 자식은 평생의 빚을 비슷한 형세로 갚아 나간다. 부모는 자식을 양육하고 그렇게 양육 받은 자식은 제 부모를 위해 '봉양(奉養)' 한다. 양육과 봉양 사이, 그 넓이가 바로 세월이다. 효도가 꼭 자식만의 몫이 아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그 자식도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 이것보다 더 완벽한 공생관계도 없을 터. 옛 사람들은 이를 '부효자효(父孝子孝)'라 했다. 조선조 영남 사대부들은 제사보다 효행을 더 높게 여겼다. 돌아가신 부모를 위한 3년상, 이건 제 부모가 자식이 두 발로 설 수 있게 양육했던 절대적 갚음의 시간이다. 윗대와 아랫대가 문중과 혈족이란 방식으로 위기에 대처해나갔다. 효자 이정간. 세종 때 강원도관찰사를 지냈던 그는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관직에서 물러난다. 여든이 다 된 그가 100세의 어머니 앞에서는 색동옷을 입고 재롱을 부리는 등 '출천지효(出天之孝)'를 행한다. 세종이 이를 알고 그를 자헌대부 중추원사로 승진시킨 후 궤장(임금이 나라에 공이 많은 70세 이상의 늙은 대신에게 하사하던 궤와 지팡이)을 내린다. 이때 세종이 효행을 표창하면서 친히 글씨를 써서 내려준 '가전충효세수인경(家傳忠孝 世守仁敬)', 현재 남아 있는 세종대왕의 유일한 친필이자 전의이씨 집안의 가훈이다. 대가족·농경사회의 법도가 이제는 거의 허물어졌다. 자본이 주인이 됐고 세상은 너무나 야박하다. '조건부 천륜' 세상이다. 부모자식도 천륜 사이가 아니라 '거래지간(去來之間)'이다. 이젠 효자는 없고 그 자리에 간병사·복지사가 있다. 남자는 '돌덩이', 여자는 '금덩이'다. 잘난 아들은 나라의 소유, 빚진 아들만 내 아들이다. 딸 둘 아들 하나면 금메달, 딸만 둘이면 은메달, 딸 하나 아들 하나면 동메달, 아들만 둘이면 '목메달'이란다. 아들 둘 둔 엄마는 이 집 저 집 떠밀려 다니다가 노상에서 죽고, 딸 둘 둔 엄마는 해외여행 중 외국에서 죽고, 딸 하나 둔 엄마는 딸의 집 싱크대에서 죽고, 아들 하나 둔 엄마는 요양원에서 죽는단다. 재산 안 주면 맞아 죽고 반만 주면 졸려 죽고 다 주면 굶어 죽는다고 한다. 이게 현실이다.한 자녀 시대. 그러면서 청년백수 시대. 그 자식은 점차 가족도 사회도 모두 거부할 태세다. 자식도 필요 없고 그냥 독신으로 부모 재산 갖고 마냥 룰루랄라 놀다가 갈 눈치다. 부모의 효만 있고 자식의 효는 없다. 자식을 애달파 하는 부모만 존재할 뿐 숯검정이 돼 버린 부모의 가슴을 헤아리는 자식의 길은 '사망선고' 됐다. 그런 대한민국이다. 단군 이래 처음으로 원금을 돌려받지 못하는 자식보험 피해자로 기록될 숱한 7080세대의 노후가 자못 걱정이다. 자식보험, 어찌하오리까?이춘호 <주말섹션부장 겸 전문기자>이춘호 주말섹션부장 겸 전문기자
[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래퍼 '탐쓴'(2), 가장 촌스러운 에너지와 핫한 뮤직트렌드 믹싱…'대구 랩소디' 탄생
그는 올해 쉰이다. 래퍼 사이에선 경이로운 케이스로 본다. 1998년 '가리온'으로 데뷔해 2006년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힙합 싱글상, 2011년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힙합 노래와 음반 부문 싹쓸이 등, 아무튼 실력파 래퍼다.대구출신 실력파 래퍼 MC메타 등 협업사라진 트로트 '대구역 밤 11시' 재해석새 비트와 유니크한 메탈 사운드 첨가향토색 물씬한 로컬랩 '역전포차' 탄생틈 날때마다 라임노트에 가사 만들어 동성로·달서구 등 지명, 소재로도 활용클럽 파샤의 라우더 무대통해 첫 데뷔軍 복무중 쓴 가사 토대, 첫 앨범 발매어릴적 우상 화나 제안으로 서울서 무대내 이름으로 된 정규앨범 3장 발매 이뤄BTS 소속사 연락 와 작사가로도 참여음악시장 변화, 랩 순수성 지키고 싶어 ◆사투리 랩의 신기원 '역전포차'그와 해리빅버튼의 리더 이성수, 그리고 작곡가로 참여한 캐시 노트(Cash note)가 참여한 가운데 3개월 걸려 새로운 곡을 지난 1월18일에 싱글 음원으로 발표했다. 내게는 자못 기념비적인 작업이었다. 1966년 김영하가 작곡했고 오기택이 불렀지만 세인들의 기억에서는 사라진 트로트 '대구역 밤 11시'. 일단 원작자들에게 연락해 샘플 클리어를 받았다. 그러고 난 뒤 힙합음악으로 재해석하여 메탈과도 결합해 새롭고 '나만 할 수 있는' 그런 트랙을 제작하겠노라 마음먹었다. 캐시노트와 MC 메타 형의 도움이 정말 컸다. 특히 캐시노트는 이성수 형을 섭외해 주었고 나로서는 너무나도 영광이었기 때문에 흔쾌히 동의하여 감사함을 표했다. 대구 사투리로만 이루어진 랩트랙으로 두 래퍼 역시 대구 출신이다. '로컬 래퍼' '대구를 대표하는'이라는 과분한 타이틀이 자주 붙기 시작했던 때였다. 정말 내가 대구 래퍼로서 보여줄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이 작업은 그것에 대한 대답 같은 트랙이다.가장 촌스러운 에너지와 가장 핫한 뮤직트렌드를 믹싱해 본 거다. 그 곡을 대구 사투리를 동원해 랩으로 재탄생시킨 것이다. 잘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물성을 핫하게 혼성교배하는 것, 그건 엄청난 창의력을 요구하는 절차였다. 가사는 나와 MC메타가 빚었고 랩은 나와 이성수가 맡았다. 넷이 각자한테 주어진 창의력을 최대한 고양시키면서 하나의 랩을 출산시킨 것이다. 이 곡은 대전블루스와 비슷한 '대구블루스' 혹은 '대구랩소디'라 해도 좋을 것 같은데 우린 원곡의 가사를 그대로 사용하지 않고 대구 생 사투리로 반죽했다. 그리고 제목도 '역전포차'로 고쳤다. 남녀 간 사랑타령에서 벗어나 빅 브라더로 승화해 버린 '서울공화국'에 대한 불편한 심기 등도 풍자해봤다. '기차표도 끊깃다 아이가/ 서울을 거닐다 파이다 싶어 가지고/ 내 결국 다시 대구로 와뿟네/ 개 쩌는 낙원 코 베뿟네/ 나중에 보제이 내꿈의 서울아 빠이/ 빠이져 이빠이 빡 뿌사진 이빨/ 삐까뻔쩍 빛나는 년놈들 한가득한 저 턱별시/ 대한민국 진짜 지방시는 죽나/ 그거 요새 메이커 이름이다 카더라(하략)'그 시절에나 어울렸을 법한 B급 가사의 정서를 아방가르드하게 개사하는 것도 무척 버거운 작업이다. 하지만 난 원곡의 느낌을 완전히 혁파시켜 버렸다. 새로운 비트와 박자, 그리고 유니크한 메탈 사운드까지 끼워넣었다. 역전포차는 '모던'을 생명으로 하는 국내 랩 문화에서는 매우 희귀한 사례였다. 나는 역전포차를 향토색이 물씬 풍기는 한국 '로컬랩'의 신기원이라 자부한다. 수개월간 우리는 형제가 된 것처럼 서로의 감각을 최고조로 증폭시키기 위해 응원하고 열광했다.역전포차를 비롯해 동대구역·성당못역 등 대구색이 물씬 풍기는 곡에 많이 집중하려 했다. 동성로·달서구·반월당 등 대구와 관련된 지명도 많이 소재로 활용한다. '053리믹서'를 만들 때는 MC메타와 마이노스와 의기투합했다. 랩이 탄생하려면 '팀워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나는 주로 '가사만들기'에 주력한다. 그리고 그 가사를 공유할 만한 지인에게 전송하면 그는 그것에 맞는 비트와 랩라인을 작곡해 파일링을 해준다. 다른 친구가 만든 비트라인 샘플이 괜찮다 싶으면 즉시 그것에 맞는 가사를 붙여 보내준다. 그게 진정한 '크루(CREW) 스피릿' 아닌가. ◆동성로 파샤에서 데뷔래퍼가 되기까지 내 삶을 한번 조망해 보고 싶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누나가 들려주었던 에미넴과 닥터드레의 음악을 들었다. 영어로 빠르게 말하는 그들의 소리가 당시에는 낯설기만 하고 마냥 멋있게만 보였었다. 한국에도 이렇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랩 음악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때 알게 된 래퍼가 바로 '가리온'과 소울컴퍼니 레이블의 래퍼들인 '화나' '더 콰이엇' '매드클라운' 등이었다. 중2 때 난 뻔하기만 한 비트박스가 식상해지기 시작했다. 늘 듣는 힙합 랩 음악을 직접 작곡해보고 싶었다. 집이든 학교든 장소를 가리지 않고 무작정 가사를 적었고 소위 말하는 '라임 노트'라는 것을 만들어 들고 다녔다. 힙합 플레야 2008 디지×더 뉴올리언스의 더 뮤지엄 컴퍼티션에 참가해서 수상하기도 했다. 의외의 결과에 고무돼 나를 더 풀무질한다. '정글라디오'와 '힙합플레야 자작녹음게시판' 등에 내 결과물을 올리며 인터넷을 통해 나만의 커리어를 구축해나간다. 성인이 될 때쯤에는 길고 짧은 습작이 200개는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21세 때 중구 동성로에 있던 클럽 파샤의 인기 코너인 '라우더'라는 무대를 통해 생애 첫 데뷔를 했다. 당시 게스트로 왔던 '화지'와 '레디'한테 엄청난 자극을 받았다. 음악으로만 알고 있던 유명한 래퍼를 눈앞에서 보고 함께 공연한다는 사실에 큰 감명을 받았다. 하지만 군대라는 새로운 벽이 나를 가로막았다. 내 보직은 K200 장갑차 조종수. 군에서는 포상휴가를 미친 듯 따냈다. 휴가 때는 병영 내에서 쓴 가사를 토대로 스튜디오를 대관해 EP앨범인 'BLOND'를 만들었다. 전역 후 그걸 바로 발매하고 생애 첫 정식 앨범을 갖게 된다. 지금 그 음원이 유실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발매까지 됐던 나만의 야심작이었다. 서울에서 '어글리정션'이라는 공연이 있었다. 이때 래퍼 화나가 나의 믹스테이프 'Versday vol.1'을 좋게 평가했다. '무대에 서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메일로 보내왔다. 내 어린 시절 우상인 화나의 메일이라니! 난 기뻐 날뛰었다. 그러고 바로 상경, '발아'라는 공연에 참여했다. 운이 좋았다. 공연 경험도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던 내가 1등이란 타이틀을 거머쥔다. 재차 '발아 장원전'에 나가게 된다. 거기서 보았던 래퍼가 쿤디판다, 브레이, 매드클라운, 아날로그소년 등과의 어울림. 부족한 실력이었지만 그걸 계기로 정규앨범 제작을 결심한다.◆탐쓴 시대 개막정규앨범을 3부작으로 대하드라마스럽게 기획했다. 2017~2021년 무려 3장의 정규 앨범을 '탐쓴'이란 이름으로 발매하는 것에 성공한다. 인지도도 관계망도 얇은 나에겐 많은 위기와 어려움이 도사리고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 이 3부작을 완성해 보이겠노라는 일념 하에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무수히 많은 아티스트를 만나 볼 수 있었다. 월 2번 이상 서울로 올라갔다. 3번째 앨범인 'NON-FICTION'을 낼 즈음 난 생각도 못 한 복병을 만나게 된다. 코로나라는 바이러스가 창궐하기 시작한 것이다. 계획이 전면 중지되었다. 남은 것은 빚밖에 없었다. 청천벽력이었다.빚도 남았지만 얻은 것도 많았다. 어린 시절 내 우상들과 작업을 많이 할 수 있었다. 대구의 대표적 래퍼인 마이노스와 MC 메타, 그리고 화나, 이밖에 퀸와사비, 바이스벌사 …. 재밌는 일도 있었다. '아이유 - IN TO THE I-LAND'라는 곡에 작사가로 참여하기도 했다. 빅히트에서 연락이 와서 너무 신기했고 내 곡 'DA DA LAND'와 2집을 듣고 발굴해 준 모양이다. '지방의 랩도 중앙에 알려질 수 있구나'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난 쇼미나 랩 관련 대회에 참가한 이력이 전무후무하다. 앨범을 내느라 워낙 바빴기 때문이다. 단지 그 이유가 전부다. 예전에는 '멋이 없어서 내가 안 나가는 건가' 하고 자문했지만 알고 봤더니 나는 그냥 바쁜 것뿐이었다. 이제서야 그런 외부 미디어를 통한 다른 활동에도 눈이 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전태일힙합음악제'에 출전해 제2회 우승을 했고 동구 평화시장 '닭똥집 명물거리 로고송'도 1등을 차지한다.지금 나는 임인년을 위한 정규앨범을 준비 중이다. 부채도 해결했고 다시 한번 달려봐야겠다. 글·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탐쓴 프로필대구 출신으로 상원고를 졸업했고 현재 대구가톨릭대 대학원 상담심리학과 재학 중이다. 현재 한국음악저작권협회에 등록된 가사가 103개가량 있다.2008년 힙합플레야 뉴올리언스 ×디지 더 뮤지엄 컴피티션 수상/ 2013년 대구힙합 공연 LOUDER VOL.1 데뷔/ 2015년 BLOND [EP]/ 2017년 정규1집 PULP FICTION [LP]/ 2019년 싱글 053 REMIX (Feat. MINOS, MC META)/2020년 대구시 공식 코로나 예방송 '동성로에 나갈 때까지' 발매/ 2020년 '아이유 - IN TO THE I-LAND' 작사 참여/2021년 대구시 청소년 정책 홍보영상 보컬 참여 및 편집 (대구시 청소년과)/2021년 TBS 제2회 전태일힙합음악제 우승/2022년 싱글 '역전포차 (Feat. MC 메타, 이성수 Of 해리빅버튼)'2년 전 대구에서 열린 '라이트 업 온 스테이지' 무대에서 탐쓴이 공연하는 모습. 〈사진제공=탐쓴〉온라인에 싱글 음원으로 공개된 '역전포차'.2016년 서울 광흥창역 근처 '어글리정션'에서 열린 '발아장원전'에서 자신의 기량을 유감없이 표출해 주목을 받았다.
[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래퍼 '탐쓴'(1), 사투리 랩으로 세상을 향해 쏘아대다
나는 래퍼 '탐쓴(Tomsson·박정빈)'이다. 탐쓴, 영화 '대부'에 등장해 화제가 된 총이다. 세상을 향해 랩을 총처럼 쏘아대고 싶다는 내 열망을 담은 닉네임이다. 랩, 청춘의 심벌이라고도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26세 즈음에 한계가 찾아왔고 문득 '이 바닥을 떠버릴까' 하고 고민을 참 많이 했다. 이제 서른, 아직도 난 래퍼다. 아직 미혼이다. 죽을 때까지 랩만 하다 갈 것 같다. 유명해지고 안 유명해지고에 상관없이 말이다. 내가 태어났을 때 '서태지와 아이들'이란 희대의 뮤지션이 한국음악계의 체 게바라가 된 양 '난 알아요'로 세상을 향해 선전포고를 했다. 닭장 같은 공교육에 대해 한마디로 '엿 먹어라'를 선언한 것이다. 10~20대는 열광했다. 2000년대로 넘어오면서 세상을 하나로 연결하게 해주는 휴대폰을 '유일신'으로 섬기기 시작하는 신인류가 등장한다. 팝은 점점 올드해지고 랩의 시대가 급부상한다. 그 한 가닥이 BTS(방탄소년단)가 아닐까 싶다.팝은 올드해지고 랩의 시대 급부상삐딱하고 야수적이면서도 냉철한 삶닉네임은 영화 '대부'서 화제가 된 총내 자신이 세상을 바꾸는 마지막 뇌관볼품없는 일상 속, 전국구 래퍼로 삶자본주의 이면에 던진 욕설·풍자·조롱무너진 자들을 위해 최고 위안 안겨줘부적처럼 지니고 있는 랩은 나의 '신앙'. 랩(Rap)? 이 음조는 도대체 무엇을 겨냥하는가? 말하는 것도 신음하는 것도 외치는 것도 타이르는 것도 주문을 외우는 것도 독백하는 것도 탄식하는 것도 아닌 것, 그게 랩인 것 같다. 모두 '이게 정답'이라고 말할 때 랩은 '바보야 그건 오답'이라고 질러 버린다.난 엇각으로 세상을 본다. 지구의 축처럼 일상보다 23.5도 정도 기울어져 돈다. 래퍼는 다들 그렇게 삐딱하게 야수적으로 그러면서도 누구보다 냉철하게 산다. 자신이 세상을 바꾸는 '마지막 뇌관'이라 믿는다. 주위에 래퍼가 정말 많아진 것 같은데 막상 평생 이 짓을 하고 살만한 프로 래퍼는 지역에서도 손으로 꼽을 정도다. 괜찮다 싶은 친구들도 어느 순간 휘리릭~ 다른 직종으로 가고 없다. 대구 출신으로 명성을 날리고 있는 MC메타, 이센스, 마이노스, 이 세 선배는 아직 현역이니 정말 대단하다.아슬아슬 전국구 래퍼로 산다. 그래도 내 일상은 볼품없다. 대구 남구 대명동 계명대 문화거리에 있는 월 27만원짜리 쪽방 스튜디오에서 보낸다. 교도소 독방 같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탐쓴 버전의 유토피아를 파종하고 있다. 랩, 그대는 이게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1970~80년대 미국 흑인문화의 정수랄 수 있는 힙합의 4대 장르(랩, 비보이, 디제이, 그라피티) 중 하나다. 댄스와 음악의 경계를 닌자처럼 파고든다. 자신만의 메시지와 비트를 갖고 승자독식의 자본주의의 이면에 칼을 들이밀고 있다. 때론 욕설과 때론 풍자, 때론 조롱…. 무너진 자를 위해 최고의 위안을 안겨주고 있다.지금 나는 유튜브란 새로운 문명의 이기가 몰고 온 새로운 음악시장의 생존법칙을 매의 눈으로 분석하고 있다. 어느 순간 이 나라의 음악이 오디션 프로그램에 점차 잠식되어가는 것 같다. 강태공처럼 유유자적, 자신만의 영토를 구축해나가는 무림의 고수 같은 건 점점 더 기대하기 힘들다. 일단 유명 오디션 프로에 명함을 내밀어야 최소한의 인지도가 생긴다. 그래야 밥 벌어 먹고 살수 있으니…. '인지도가 없으면 끝'이란 불안감이 래퍼를 엄습한다.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오디션 왕국에 머릴 디밀어야 생존할 수 있는 뮤직마켓.한국 래퍼의 최강 등용문이랄 수 있는 '쇼미더머니(Show me the money)'. 음악 전문 채널 엠넷에서 2012년부터 매년 방영하는 힙합 서바이벌 프로그램이다. 보통 '쇼미'라는 약어가 자주 사용되고 영어 약칭으로는 'SMTM'이라 한다. 지난해 10월1일부터 시즌10이 방영됐는데 나는 그걸 정독했다.빈지노, 사이먼도미닉, 이센스, 창모, 박재범 등 과거에 비해 래퍼들의 이름값이 대폭 오르면서 AONG, 하이라이트, 저스트 뮤직, 데이토나 등 힙합 전문 기획사도 치열한 경쟁을 하게 된다. 쇼미 때문에 한국 힙합 신의 뿌리를 이루고 있던 클럽 문화가 초토화되는 작용이 우려된다. '힙합 장르의 플랫폼 종속'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크다. 래퍼의 축제가 아니라 방송사의 축제랄 수 있다는 지적도 인정하지만 쇼미로 인해 한국 래퍼의 신지평이 확충된 것도 동시에 인정돼야 한다. 짜잔~, 이 대목에서 한국 래퍼의 신기원이랄 수 있는 대구 출신 MC메타를 소개해야 될 것 같다. 글·사진= 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래퍼 '탐쓴'(2)에서 계속됩니다.아슬아슬 전국구 래퍼로 산다. 그래도 내 일상은 볼품 없다. 대구 남구 대명동 계명대 문화거리에 있는 월 27만원짜리 쪽방 스튜디오에서 보낸다. 교도소 독방 같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탐쓴 버전의 유토피아를 파종하고 있다.
[이춘호기자의 행간을 찍다] 나 속의 나
요즘 난 무척 늦게 잔다. 오전 2~3시. 내가 꼭 빙판에 뿌리를 내린 겨울나무 같다. 밤이 이슥해지면 관계망이 모두 끊어진다. 하지만 그건 20세기의 말. 이젠 24시간 관계망은 지속된다. 밤새 돌아가는 냉장고, 그리고 폰. 전자기는 이미 지구를 몇 겹으로 둘러싸 버렸다. 카르만선(지상 100㎞)을 총알 속도로 날아다니는 각종 위성들. 광통신망처럼 골목을 누비는 배달족들. 달빛의 기세로 밤의 야경꾼으로 암약하는 편의점들.심해 같은 심야(深夜). 잠재의식 속 나를 소환한다. '진짜 나'와 '가짜 나'. 정녕 나를 나이게 하는 건 뭔가? 그걸 알려고 수행자는 자기를 적막으로 내몬다. 나와 또 다른 나, 그걸 연결해주는 건 잡념에 가까운 온갖 상념(분별심). 그게 이성, 때론 망상과 환상, 상상, 추억과 궁리 등 실로 다양한 모습으로 전면에 나타났다가 이내 사라져 버린다. 그것들이 평소 머무는 격납고는 어딘가? 현대의학은 놀랍다. 1차세계대전 즈음에 인간의 온갖 감정이 어디에서 발원되는지를 알게 해주는 '뇌지도'를 작성해낸다. 인간의 오욕칠정의 출처가 뇌의 어느 부위에서 형성되는가를 하나둘 캐치해 낸 것이다. 새로운 조물주의 탄생에 필적한다. 2013년 플랑크 우주망원경이 이룩한 쾌거에 필적한다. 그놈은 138억년 전 빅뱅 때 발생된 빛의 입자(복사열)를 포착, 우주 창조의 순간을 인류한테 선사한 것이다. 하여 나는 승려들이 '도량석(道場釋)' 의식을 봉행하는 시각에 잠을 청한다. 한밤중 가장 큰 운치는 골목 전주 옆에 놓인 빈 페트병을 뒤흔들고 지나가는 설한풍의 혓바닥의 질감을 음미하는 거다. 바람의 혓바닥은 밤의 정적을 더 깊숙하게 다져놓는다. 모든 존재의 회귀점 같은 '부처', 그 깨달음의 자리에 들어간 고타마 싯다르타. 그는 마음(나)의 실체가 없다고 선언했다. 모든 게 연결(12연기)돼 있으니 본질이란 파고들어도 볼 수 없다는 거다. 제행무상과 제법 무아, 그게 결국 공(空)의 요체 아닌가. 비어있다는 게 아니라 '본질이라고 할 만한 게 없다'는 말 아닌가.무한 과거, 무한 미래? 공연한 생각질을 말자. 전생을 '부모', 저승을 '자식'이라 여기자. 내가 비록 개체적(몸)으로는 죽어도 자식을 상정하면 결국 나는 계통적으로는 영원불멸하는 거니깐. 그러니 어떻게 완전한 죽음이 있겠는가. 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이춘호 전문기자
[이춘호기자의 카페로드] 동구 능성동 '블루마운틴'...빼곡한 송림 속 '글램핑 카페'…힐링랜드서 즐기는 문화예술은 '덤'
지난주 금요일 오후 팔공산 자락에서 처음으로 글램핑 카페의 신기원을 연 동구 능성동 '블루마운틴'을 찾았다. 글램핑은 '화려하다'는 뜻인 영단어 '글래머러스(Glamorous)'와 '캠핑(Camping)'을 혼합해 만든 신조어. 2015년부터 국내에서 붐을 일으킨다.서쪽엔 송림, 그 옆에 있는 유럽형 펜션 같은 카페가 시대를 초월해 다정스레 대화를 나누고 있다. 송림 안은 동굴처럼 어둑하다. 햇살이 빼곡한 송림 안으로 쉬 틈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간신히 송림 안으로 용암처럼 스며들어온 햇볕은 더욱 고혹해 보인다. 송림 곳곳에 포진한 8동의 글램핑 전용 대형 캠핑용 텐트는 삼삼오오 모여 서로의 안부를 묻고 있다. 너무 상업적인 글램핑장은 텐트 사이가 너무 촘촘해 답답한데 여긴 널찍한 게 너무 좋다.카페 진입로 초입에 간판이 놓여 있다. 블루 바탕에 흰색 고딕체 글씨로 꾸며진 아크릴 통이다. 꼭 '현대판 성황당'같다. 블루마운틴. 세계적 명성을 날리는 커피 브랜드 중에 자메이카 블루마운틴이 있다. 그걸 염두에 둔 모양이다. ◆대구 첫 글램핑 카페 블루마운틴 '주인은 상록수'예순을 바라보는 윤갑용 대표와 인사를 나눴다. 닉네임은 '능성동의 상록수'. 허물어질 듯한 마을회관을 새로 짓고 어르신을 위해 위안잔치를 벌여준다. 좁은 마을안길도 넓혔다. 능성동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 타향인과 안면트기를 '문화운동'으로 승화시키려고 노력했다. 덕분에 그는 2년째 공산동 통장(46명) 협의회장을 맡으며 '팔공산문화역사포럼' 등을 돕고 있다.그의 지난 삶은 참 고단했다. 해태제과 하양공장 기술자에서 독립해 진량공단 근처에서 일식당을 연다. 하지만 주방장과의 갈등의 골은 깊고 신산스러웠다. 이후 수소보일러업체, 심지어 돼지농장을 위해 필리핀으로 가기도 했다. 중국에선 골프장 사업, 마지막엔 경산에서 고깃집까지. 이 와중에 모 국회의원 비서관 생활도 병행. '마당발 윤갑용 시절'이었지만 그 어느 것도 자기 것이 되지 못했다. 설상가상 우울증까지 덮친다. 700여그루 소나무향 가득한 문중 땅대구 첫 글램핑 카페로 '인생 제2막'詩낭송·국악·포크 뮤직·블루스 등 계절별 맞춤 공연·캠프파이어 축제어느 날 고개를 돌리니 그동안 안중에 없었던 고향(능성동)이 보이기 시작했다. 종손이었고 400년 전 파종된 파평윤씨 능성동 입향조의 피가 흐른 탓이리라. 그동안 카페 옆 송림은 동민들에겐 공동묘역으로만 보인 것도 사실이다. 그는 역발상을 했다. 여기는 대구 첫 글램핑 카페, 그리고 새로운 힐링랜드!. 문중 땅은 1만3천200㎡(4천평). 거기에 조상의 묘소가 32기 흩어져 있었다. 문중회의를 통해 선영을 혁파한다. 봉제사 대상 묘만 남겨놓고 나머지는 파묘. 8년 전 인생 2막의 시작을 '글램핑카페'로 결정한다. 문중 땅의 일부를 공유하게 됐다. 길이 150곒, 폭 70곒. 그 안에 700여 그루의 소나무가 있다. 1년간 직접 인테리어를 주도하면서 건물을 짓는다. 하지만 제대로 된 글램핑용 텐트 제작업체가 국내에는 없었다. 서울의 모 회사를 통해 주문제작을 했다. 데크도 만들고 전기패널도 깔고 TV까지 설치했다. 매일 캠프파이어 축제도 연출했다. 계절에 맞는 공연도 유치했다. 대구 로열오케스트라와도 손을 잡았고 서울 미사리 라이브 가수 박희수, 대구KBS 문화창고 녹화 때 장미여관이 공연도 했다. 지금까지 15번 정도 공연을 했다. 점차 송림은 시낭송, 국악, 포크뮤직, 블루스 등 여러 공연 장르가 넘나드는 힐링·문화·예술의 숲으로 업그레이드 되었다. 최근에는 우천 시 고기를 편하게 구워 먹을 수 있게 그릴링룸, 쿠킹룸, 샤워실 등도 구비해놓았다. 그는 2016년 늦깎이로 경북대 농대를 졸업한다. '레저문화 활성화 방안'이란 학사논문도 작성한다. 내친김에 임업후계자 수업도 받았고 그 결과 대구에선 서식하기 힘든 울릉도 명물 명이나물을 송림 한 편에 식재하는 데 성공한다. 매년 3월 말 골수 단골과 명이파티도 벌인다. ◆여긴 가족경영그는 글램핑, 아내(권영수)는 브런치, 아들(원탁)은 커피, 며느리(고은미)는 커피와 빵, 딸(서경)은 베이커리에 올인한다. 원탁씨는 승부사 기질이 다분하다. 아버지가 고향으로 돌아온 결정에 박수를 보내며 자신도 고향행을 결심한다. 일본 도요타 협력사에서 엔지니어로 일을 하다가 커피 로스터로 급선회. 2017년 2월 경남 양산에 '플랫컴퍼니'란 로스팅 공장을 오픈하기 전 그는 하루 서너 시간만 잠을 자며 커피의 모든 것을 독학했다. 머신을 직접 분해·결합하기도 했다. 직접 원두를 싣고 서울, 부산, 거제도, 양산, 울산 등의 카페 주인을 만나 직판 공세를 펼친다. 많을 때는 12개 카페를 찾아다녔다. 그 공력이 고스란히 지금 여기 블루마운틴에 녹아든다. 이곳 원두는 자메이카 블루마운틴 종자를 갖고 파생시킨 파푸아뉴기니 마라와카 종만 사용해 아메리카노를 빚는다. 브런치 메뉴 중 1만5천원짜리 베이컨 크림 파스타와 필라프의 맛이 인상적이다. 글램핑 이용 가격은 크기에 따라 10만(2인 기준)~15만원(6인 기준). 조식으로 모닝빵과 커피가 제공된다.글램핑 담당 주인장, 아내는 브런치 아들은 커피, 며느리·딸은 베이커리파푸아뉴기니 마라와카 원두만 사용베이컨 크림파스타·필라프 인기메뉴기자의 눈엔 여기가 비즈니스가 아니라 한 가족의 꿈이 자라는 드림랜드 같았다. 가족 모두 카페 옆 별채에서 산다. 손자가 태어나면 3대가 함께 옹기종기 모여 살 거란다. 극도의 핵가족 시대, 많이 얻는 것 같은데 실은 많은 걸 상실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블루마운틴에서 새로운 희망의 길을 잠시 생각해 봤다. 조만간 인근 대구와 경북의 경계에서 경계음악회를 벌여도 좋을 것 같다. 동구 팔공로 1505-1. 매주 수요일 휴무. 오전 10시 오픈. (053)853-8888 글·사진=이춘호 음식전문기자 leekh@yeongnam.com그동안 15번 정도 각종 공연을 열었다. 블루마운틴은 송림을 문화와 예술이 있는 힐링숲으로 만드는 게 꿈이란다.화기애애한 캠프파이어 토크를 즐기는 가족단위 손님들.소나무 향기와 글램핑 문화가 공존하는 캠핑카페 블루마운틴 초입 전경. 소나무 700여 그루가 성성하게 캠핑장을 감싸주고 있다.설경을 품은 블루마운틴 글램핑 텐트.인기 브런치 메뉴인 베이컨크림파스타와 필라프.통유리창 너머로 겨울바람을 안은 글램핑장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이곳 원두는 자메이카 블루마운틴 종자를 갖고 파생시킨 파푸아뉴기니 마라와카 종만 사용해 아메리카노를 빚는다.
[김영복·이춘호 '한식 삼천리'] 국민 간식 "만두 예찬" (2)...대구 납작만두 3인방 버전→서문시장 삼각만두→송현동 잎새만두 진화
이북 지방과 서울을 비롯한 중부 지역에서 많이 먹었던 만두는 지역에 따라 소와 모양이 다양하다. 평양만두가 가장 크고 개성만두가 그다음, 서울만두가 가장 작다. 서울 사람들은 원래 밀가루로 만두피를 빚는 것이 아니라 메밀가루로 만두피를 한 메밀만두를 만들어 먹었다. 메밀 만두피는 밀가루 만두피와 달리 점성이 약해 조심해 다뤄야 할 정도로 솜씨가 능숙하지 않으면 만두피가 터지기 일쑤였다. 만둣국을 먹는데도 조용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떠먹지 않으면 만두피가 터져 소가 밖으로 나와 국물에 퍼졌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는 서울 양반네들은 만두 먹는 것을 보고 그 사람의 교양 정도를 알아봤다고 한다.규아상~동아만두여름철 궁중 수라상 오르는 '미만두'허균 팔도탐식기행 소개 '동아만두'대파 쪼개 소 넣는 전라도 '파만두'한편 궁중에서 여름에 즐겨 먹는 '규아상'이라는 만두가 있는데 이를 '미만두'라고도 한다. 수라상에 오르는 음식이다. 밀가루를 반죽해 얇게 밀어 지름 8㎝ 크기로 둥글게 떠서 만두 껍질을 만들고 오이는 속을 남기고 껍질을 얇게 떠서 가늘게 채 썰고 소금에 잠깐 절였다가 꼭 짜서 살짝 볶는다. 소고기는 곱게 다져서 표고버섯 채 썬 것과 섞고 갖은 양념을 한 후 볶는다. 오이와 소고기 볶은 것을 섞고 잣은 몇 개로 쪼개 넣어 소를 만든다.만두 껍질에 소를 넣고 해삼 모양으로 주름을 많이 넣어 빚는다. 찜통에 담쟁이 잎을 깔아 만두를 넣어 쪄낸 다음 접시에 새 담쟁이 잎을 깔고 만두를 담아 초장을 곁들여낸다. 담쟁이 잎을 까는 이유는 향기가 좋으며 만두를 붙지 않게 해 한꺼번에 많이 찔 수 있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꿩만두는 서울과 충북의 향토음식으로 먼저 밀가루를 물로 반죽해 잘 치댄 후 밀대로 얇게 밀어 만두피를 만든다. 꿩의 가슴살·다리살 등은 잘게 다지고 무채, 숙주, 양파를 삶아 다져서 물기를 꼭 짠 다음 다진 고기와 섞어 파, 마늘, 소금, 후추로 간해 만두소를 만든다. 만두피에 소를 넣어 달걀을 발라가며 예쁘게 오므려 만두를 빚고 김이 오르는 찜통에 젖은 베를 깔고 20분간 쪄낸다. 찐 만두와 함께 초간장을 곁들인다. 충청도 지역에서 먹는 오색만두는 배추김치·두부·소고기·당면을 넣은 소를 각각 노란색-치자, 분홍색-지초, 갈색-도토리, 초록색-부추를 넣고 반죽한 만두피에 넣어 만든다. 만두피 색깔에 따라 다른 맛과 알록달록 다채로운 색을 보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천하의 미식가인 허균의 팔도탐식 기행기랄 수 있는 '도문대작(屠門大嚼)'에 '동아만두'가 소개된다. 동아는 껍질을 벗기고 얇게 저며 썰어서 소금에 절였다가 끓는 물에 살짝 데친다. 숙주는 깨끗이 다듬어 끓는 물에 데쳐서 송송 썰고, 소고기를 곱게 채 썰어 진간장, 다진 파, 다진 마늘, 참기름, 깨소금, 후춧가루, 설탕 등을 넣고 양념해 볶는다. 달걀로 황백 지단을 부쳐 곱게 채 썰어 놓는다. 표고버섯과 석이버섯은 물에 불려서 손질한 후에 채 썰어 양념해 볶는다. 마른 행주로 동아의 물기를 닦고 한 조각씩 펴서 준비한 소를 넣고 마주 접어 송편처럼 만든 후에 녹두 녹말을 씌워 김이 오른 찜통에 찐 다음 초간장과 함께 곁들여낸다. 전라도의 '파만두'는 대파를 반으로 쪼개 가운데에 소를 넣고 밀가루를 묻힌 다음 달걀 푼 것을 입혀서 옥잠화처럼 만들어낸 것이다. 이후 중국식 만두문화가 한국에 유입해 가장 독특한 형태로 자릴 잡은 게 대구 납작만두, 명동 교자, 그리고 부산 완당 등이 있다. 대구 납작만두 등장당면·부추로 간단하게 만드는 소가장 오래된 교동시장 묵자집 할매숙성 비법과 얇은피로 남다른 식감1963년 대구에서 한국만두사의 한 획을 긋는 새로운 버전의 만두가 탄생한다. 다른 지방에선 듣지도 보지도 못한 '납작만두'다. 대구에서는 '납작만두'라고 하지 않고 '납딱만두'라 불러야 제맛이다. 납작만두는 '대구 분식의 해결사'다. 동물성 만두소 시대에서 식물성 만두소 시대를 연 기념비적 만두로 받아들여진다. 좀 더 작아지면 '대구판 라비올리'(만두처럼 생긴 이탈리아 파스타의 일종)로 홍보해도 좋을 듯 싶다. 대구발 납작만두는 둥그렇고 달걀만 한 만두를 밀쌈전병 같은 납작한 반달 모양으로 '편곡'했다. 대구 납작만두 3인방부터 찾아보자. 미성당파, 교동시장파, 남문시장파로 삼분된다. 이 셋은 한결같이 만두소에 돼지비계를 넣지 않고 당면·부추 등으로 소를 빚는다. 국내에서 가장 간단한 만두소다. 셋의 차이는 만두피의 두께. 가장 두꺼운 곳은 남문시장 안에 있는 남문 납작만두, 가장 얇은 곳은 교동시장 납작만두. 셋 중 미성당이 납작만두의 맏형격. 초창기에는 돼지기름을 사용해 지금보다 더 구수한 맛이었지만 돈지 파동을 겪으면서 지금은 식품위생법상 식용유만 사용하게 돼 있다. 납작만두도 진화했다. 서문시장 1지구 초입 계단 아래 포장마차 같은 '허둘순 삼각만두집'은 납작만두에 도전장을 내 푸드블로거 팬을 많이 확보하고 있다. 반달형 대구식 납작만두를 또 한 번 '삼각형'으로 변주했다. 방송인 박철씨가 SBS 음식코너 전국 맛투어를 할 때 이 집을 전격 소개하면서 대박이 난다. 현재 근처에 삼각만두 거리가 생길 정도로 활성화됐다. 삼각만두는 달서구 송현동으로 넘어가 잎새만두로 태어난다. 서문시장에 그걸 파는 노점 주인이 있다.동아백화점이 폐점 되고 교동시장 골목도 새롭게 단장되었다. 골목 중앙을 점유하던 할매들도 점포로 들어가야 했다. 그래서 하나둘 사라지고 있다. 납작만두도 그 추억의 맛을 잃어가고 있다. 가장 오래 납작만두를 굽고 있는 할매는 '묵자집 할매'다. 현재 교동납작만두는 칠성시장 내 '경남식품'에서 만든 것이다. 피가 유난히 얇고 밀가루 숙성 비법 때문에 식감도 여느 곳과 다르다. 원래 서구 평리동의 한 할매가 손반죽으로 만들었는데 그 기술이 칠성시장 쪽으로 건너갔다고 할매가 증언해 준다.북한 지역인 황해도와 개성에서는 보자기를 싸듯 네 귀퉁이를 접는 방식의 '편수만두'를 즐긴다. 1931년 발간된 '조선총독부농업 년기념지'에 의하면, 조선의 재래종 밀은 황해도·평안남도·강원도에서 주로 많이 생산된다고 했다. 특히 황해도에서 그 생산량이 가장 많았다. 재래종 밀 중에서 그 품종이 가장 좋은 것 역시 황해도에서 재배되는 것이었다. 이런 사정으로 인해 개성 사람들은 밀가루 피로 편수를 만들 수 있었다. 2008년 북한의 근로단체출판사에서 발행한 '우리 민족료리'에서도 편수를 개성음식으로 꼽았다. 그러면서 편수라는 이름은 물에 삶아 건져낸 것이라는 뜻에서 생겼다고 밝혔다. 평안도 '굴림만두'는 평안도에서 많이 먹는데, 굴림만두는 모양이 둥글둥글해 굴림만두라고 부른다. 일반 만두소처럼 소를 만든 후 지름 2.5㎝ 정도의 완자로 만들어 달걀 물과 밀가루를 묻혀 완자처럼 먹는다. 함경도와 강원도 양강도에서 즐겨 먹는 '막가리 만두'. 막가리란 '막갈'이라고도 부르며, '감자를 거칠게 막 갈아서 만들었다'는 뜻에서 유래됐다.알쏭달쏭 만두소 빼고 밀가루 발효 시켜 만든 찐빵그믐날 밤 만들어 새해에 먹는 교자은덩이 화폐 모양 빚어 돈벌이 기원중국에 가서 만두를 달라면 찐빵을 먹게 된다. 이는 중국 용어가 잘못 전해진 탓이다. 중국에는 만두류로 만터우(饅頭)·지아오쯔(餃子)·빠오쯔(包子)·딤섬(点心)이 있다. 소가 들어가는 것과 소가 들어가지 않는 것으로 나뉜다. 만터우는 소를 넣지 않고 밀가루만 발효시켜 만든 큰 찐빵. 빠오쯔는 고기와 채소가 들어 있는 수증기로 찐 것이다. 지아오쯔(교자)는 생만두피를 사용하고 물에 끓이거나 쪄 먹는다. 광둥성 쪽에는 지아오쯔가 다양한 딤섬 형태로 발전했다. 여기서 딤섬은 '점심'을 뜻하는 광둥어다.지아오쯔는 그믐날 밤부터 빚어 새해가 밝는 자정 12시에 먹어야 한다고 한다. 교자라는 명칭은 밤 11시부터 새벽 1시까지의 시간을 가리키는 '자시(子時)'가 된다 '교(交)'는 교자(交子)와 발음이 같은 데서 연유한다. 더 정확히는 '경세교자(更歲交子)'라고 하는데 '해가 바뀌고 자시가 된다'는 뜻이다. 만두피를 만들기 위해 밀가루 반죽하는 것을 '화면(和麵)'이라 하는데, 이것은 가족의 화목을 기원하는 의미를 갖고 있다. 지아오쯔는 은덩이 화폐인 원보(元寶) 모양으로 빚어 길조 또는 돈벌이를 기원하는 의미를 지닌다. 교자의 모양에 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중국에는 종이돈, 설탕, 제비꽃 줄기, 땅콩, 대추와 밤 등 다양한 소를 넣는다. 일본의 만두 기원은 이렇다. 에도시대 초기 중국에 파병되었던 일본 군인 도쿠가와 미츠쿠니가 중국에서 먹던 만두가 먹고 싶어 고향에 돌아와 중국식 만두를 만든 게 일본 교자로 정착하게 된다. 정리·사진=이춘호 음식전문기자 leekh@yeongnam.com충주에서 만난 감자만두.교동시장 납작만두 골목 전경. 이곳 만두피는 5대 납작만두 중 가장 얇다.서문시장 허둘순 할매표 삼각만두.서문시장 잎새만두 부부.남문시장 납작만두서문시장 삼각만두인천 중식당 거리에서 만난 탄두리(TANDOOR·북부 인도와 아프가니스탄에 걸친 지역에서 사용되는 원통형 점토 항아리 가마) 과자. 흡사 공갈빵, 월병을 연상시킨다.만두의 한 연장선상에 놓인 공갈빵.
[김영복·이춘호 '한식 삼천리'] 국민 간식 "만두 예찬" (1)
만두(饅頭). 떡, 수제비, 국수, 때론 구절판 밀쌈 전병 같기도 하다. 중국에서 발흥한 만두가 일본과 한국에 상륙한 연대기는 너무나 흥미진진하다. 이번 회는 한·중·일 만두 연대기의 속내를 알아본다.만두의 유래 하나. 제갈공명이 남만을 치고 돌아오는 길에 여수(濾水)에 이르자 심한 풍랑을 만나게 되었다. 사람 머리 49두를 수신(水神)에게 제물로 바쳐야 했다. 그러나 공명은 사람 대신 양의 고기로 소를 넣고 밀가루 반죽으로 머리 모양을 만들어 진설한다. 여기서 남만인의 머리란 의미의 '만두(蠻頭)'란 명칭이 생기고 훗날 지금의 만두로 바뀌게 된다.중국에는 만두 비슷한 게 많다. 손바닥만 한 큰 고기만두는 '교자(餃子)', 현재와 같이 조그만 것은 '천진교자'라고 한다. 철판에 올려놓고 뚜껑을 덮어 바닥은 구워지고 위는 훈제(燻製)가 된 군만두는 '전교자(煎餃子)', 기름에 튀긴 것은 군만두가 아니라 '튀김만두'다. 그리고 물만두는 '수교자(水餃子)', 찐만두는 '증교자(蒸餃子)'다. 中, 소가 있는 것은 '교자' 없는 것은 '만두'한편 교자를 우리나라에서는 '만두(饅頭)'라 하는데, 중국에서는 소가 있는 것은 교자, 만두 속이 없는 것은 만두로 구분해서 부른다. 역사상 최초의 만두 이름은 '교이(嬌耳)'다. 중국 동한 말기 의성(醫聖) 장중경(張仲景)이 300년간의 임상경험을 바탕으로 양고기, 고추와 일부 한기를 몰아내는 약재를 솥에 넣고 잘 끓인 후에는 다시 이것들을 건져내서 잘게 자른 다음에 면으로 만든 피로 귀모양으로 싸며 교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것을 솥에 넣고 익힌 다음에 병자들에게 나눠줘 먹게 했다. 한 사람당 2개의 교이와 한 그릇의 탕을 나눠 주었는데 사람들은 이 '거한교이탕(去寒嬌耳湯)'을 먹고 나면 온몸에서 열이 나고, 혈액이 잘 순환되었으며 두 귀가 따뜻하게 바뀌었다. 동지 때부터 설날까지 먹었다. 이를 통해 장중경이 약을 나눠주고 병자를 치료해준 날을 기념한 것이다. 탕으로 먹다가 당나라 때 건져내서 먹어교자가 세상에 나타난 것은 지금으로부터 이미 1800년 전의 일이다. 그때 교자는 익힌 후에 건져내서 단독으로 먹는 것이 아니라 탕과 함께 그릇에 담아서 같이 먹었다. 당나라 때가 되어서야 현재의 교자와 거의 같아져 건져내서 접시에 담아 단독으로 먹었다. 당나라 때의 교자는 '뇌환(牢丸)', 수교(水餃·물만두)는 '탕중뇌환(湯中牢丸)', 증교(蒸餃·찐만두)는 '농상뇌환(籠上牢丸)'이라 했다. 그런데 송나라 이후 부르는 명칭이 어지러워진다. '분각(粉角)' '편식(扁食)' '수각(水角)' '교아(餃兒)' '수점심(水點心)' 등으로 불린다. 이러한 음식을 통칭해 교자라고 부르게 된 것은 청나라 말기쯤이다.고려사 충혜왕 조에 '내주(內廚)에 들어가서 만두를 훔쳐먹는 자를 처벌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뤄 고려 때 이미 전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시대 중국어 발음과 뜻을 한글로 옮긴 어휘 사전 '역어유해(譯語類解)'에는 '만두는 우리 나라 풍속의 상화병(霜花餠)이다'고 하였다. 한자 뜻을 풀어보면 '상 위에 놓인 꽃, 하얀 서리꽃 같은 떡'. 음식디미방, 메밀 만두피에 꿩고기 넣고 빚어고려 때 유행한 '쌍화점(雙花店)'이라는 노래가 있다. 충렬왕 때 가요로 알려졌는데 노래 1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쌍화점에 쌍화를 사러 갔더니만, 회회아비가 내 손목을 잡더이다.' 쌍화점의 쌍화가 만두나 떡을 뜻하고, 회회아비는 서역 출신의 무슬림을 말한다.훈몽자회(訓蒙字會)와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등에서는 만두를 '상화'라 했다. 가장 오래된 한글 음식 서적인 '음식디미방'(1670)에서는 메밀가루로 풀을 쑤어서 반죽하고 삶은 무와 다진 꿩고기를 볶아서 소를 넣고 빚었다고 한다. 1800년대의 '주찬(酒饌)'이란 책에는 소 내장인 양과 처녑 그리고 숭어 살을 얇게 저며 소를 넣은 만두가 나온다. 한국에서 만두란 말이 처음 기록된 것은 1643년 '영접도감(迎接都監)'. 조선 전기 문신 서거정(1420∼1488)은 김자고가 만두를 보내 오자 시(詩)로 사례한다.조선 후기 학자 윤기(1741~1826)의 '무명자집(無名子集)' 제3책 주(註)에 '변씨만두(卞氏饅頭)'가 등장한다. 밀가루 반죽을 얇게 밀어서 만두소를 넣고 네 귀로 싸서 닭 국물에 삶은 만두를 말한다. 이 만두는 '편수'와 비슷하다. 대담=김영복 식생활문화연구소장·이춘호 음식전문기자정리·사진=이춘호 음식전문기자 leekh@yeongnam.com[김영복·이춘호 '한식 삼천리'] 국민 간식 "만두 예찬" (2)에서 계속됩니다.만두의 발원지는 중국이다. 그런데 중국에는 만두 비슷한 게 많다. 손바닥만 한 큰 고기만두는 '교자(餃子)', 현재와 같이 조그만 것은 '천진교자'라고 한다
[人牲劇場 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예재창 소극장 '달과 함께 걷다' 대표(2) 주민이 직접 만들고 주민이 주체가 되는 문화축제로 일상에 활력 더하다
◆사분오열 소리타래제대하고 돌아와 보니 소리타래는 사분오열 직전이었다. 처음에는 20명 가까이 모여 함께 웃고 울던 사람들이 불과 2년 남짓한 시기에 모두 흩어지고 없었다. 1993년 10월이었다. 3년을 못 넘기고 말았다. 허망했다.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라고 했던가?'그렇게 무너질 것 같던 소리타래를 살려보겠다고 팔을 걷어붙인 자가 바로 이종일과 나였다. 제대한 지 얼마 안 된 두 사람만 소리타래에 딸랑 남은 것이다. 이종일은 당시 지역 민중예술 바닥에 '형 모르면 간첩'이란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그의 활동·실천력은 대단했다. 다시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희망이 싹 트기 시작했다. 소리타래의 최고 시기는 오히려 1997년 이후였다. 그해 소리타래 2집 발표 이후 '푸른 웃음 담긴 우리의 신명으로'라는 곡이 전국에 알려진다. 공연이 많았을 때는 연 180회 이상 무대에 올랐다. 이후 3집, 4집, 5집이 나왔다. '채송화' '이런 내가 되어야 한다' '다 바쳐 치열하게' 등 많은 곡들이 생각난다. 소리타래의 저력은 우리만의 '공동체생활'에서 나왔다. 우린 작정을 하고 사생활을 미련 없이 포기했다. 겨울에 바람 숭숭 들어오는 신암동 월세방에서부터 비밀결사 같은 공동체 공간을 가꾸어 나갔다. 먹고 자고 아프고 울고 웃는 모든 걸 공유했다. 출연비도 나누지 않고 공금으로 활용했다. 주위에선 우리를 "공산당 같다"고 부러워했다.나는 1995년부터 지금까지 소리타래 대표를 맡고 있다. 다른 사람이 언뜻 보면 '장기독재'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속내를 모르는 사람들의 얘기다. 우리는 함께 공동체 생활을 꿈꿨으며 함께 살기를 바랐고 모든 결정은 만장일치제였다. 소수정예 인원들이었던 우리는 아무도 불만이 없었다. 우리에겐 수직적 상하개념이 아예 없기 때문이다.생사를 함께해 온 조원주, 김학수 이 두 명의 식구에게 정말 감사한 마음 가득하다. 그리고 늘 우리에게 음악으로 큰 힘이 되어 준 최고의 드러머인 석경관 형, 까칠하지만 애정 가득한 가락스튜디오 최고의 기타리스트 이동우 형, 지금은 소리타래라는 이름으로는 함께하지 않지만 그 힘겨운 시절 함께 울고 웃었던 우성민·최태식·위동희 동생들…, 정말 이 지면을 빌어 고맙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다. 함께 울고 웃고 만들어간 '소리타래'해체위기 극복 새로운 희망으로 시작 2집 발표 후 '푸른 웃음…' 전국 무대 1997년 후 활발한 활동, 전성기 만끽 공동체 생활속 같은 꿈 향한 멤버들 새로운 변화 '소리타래' 밴드 '달과 함께 걷다' 12년간 공연 소극장 '달과 함께 걷다' 장기 계획 주민과 연대, 복합문화사업 공동실현 연근단지 생태예술제·안심온마을축제 안심 습지 예술마을 생태예술제 개최 많은 공기관·민간단체서 찬사 이어져 문화예술 기여 공로, 장관표창도 받아 ◆생활문화공동체 만들기 소리타래의 전환점은 2006년부터였다. 소리타래 내부로 봐서는 10년을 넘는 왕성한 활동을 음악적으로 한번 정리도 하고 또 다른 10년을 계획할 시기였던 것이다. 첫 번째 계획은 그간 해온 음악들을 좀 더 정리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공부를 하는 것이었다. 2007~2009년까지 3년이란 시간을 고스란히 우리 식구 모두 음악 공부에 투자하게 된다. 서울재즈아카데미(SJA) 정규과정과 대구예술대 실용음악과를 찜했다. 각자 역할을 나누어 작곡, 기타, 베이스, 보컬 등을 공부했다. 음악적 영역을 좀 더 전문화시키는데 집중했다.2009년 가을부터 경관 형과 함께 '달과함께걷다(이하 달다)'라는 밴드를 만들었다. 소리타래 심화 확대의 일환이었다. 그 후 방송출연(TCN, 울산 뒤란방송), 해외초청공연(일본, 프랑스), 각종 축제(문경새재 아리랑제, 전주 세계소리축제, 광주 디자인 비엔날레, 춘천 페스티벌, 부산 영호남 민족예술제 등) 등. 12년간 400회가 넘은 공연활동을 해왔다. 두 번째의 장기적인 계획은 소극장 달과함께걷다가 마음껏 지역문화예술에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우리만의 예술공간을 가지는 것이었다. 연습공간을 넘어선 인근 주민들과 문화적으로 연대할 수 있는 복합문화사업을 문화공동체적으로 실현해내는 것이다. 작정하고 2003년 우리의 캠프를 반야월 연근 단지·신서혁신도시와 맞물려 있는 동구 안심3동으로 옮겼다. 2005년부터 터다지기를 시작했고 2011년 겨울부터 달다는 본격적인 '문화사랑방'의 면모를 갖춰가게 된다.그 와중에 내 평생 도반이 되는 아내 문경빈을 만나게 된다. 분명 '신의 한 수'였다. 서울에 있는 노래극단 '희망새'의 나름 잘나가는 배우였던 아내, 그녀는 2000년대 초반부터 선후배로 알던 사이였다. 둘이 의기투합, 자생할 수 있는 '생활문화공동체축제'를 만들고 싶었다. 예술에 문외한인 주민들을 가르칠 수 있는 전문가들이 필요했다. 극단 지팡이 강신욱 대표, 밴드 굿락의 멤버 문경빈(가야금), 배지오(바순), 제갈은하(장구) 등이 맨투맨식으로 주민을 커버했다. 지난해 비로소 고대하던 축제가 열릴 수 있었다. 반야월 연근단지 내에 조성된 점새늪 쉼터에서 제1회 생태예술제, 그리고 2020·2021년 안심 온마을축제가 열리게 된다. 풍물패 한판, 주민 록밴드, 극단 다봄, 가야금 연주단 바라, 리코더 연주단 열손가락, 대금연주단, '안심마을방송국'이란 닉네임을 갖고 있는 '삶꽃두레'란 유튜브 TV, 그리고 예전에 있던 안심농악은 안심연꽃놀이패로 확대 재편되기에 이른다. 2021년에는 안심 습지 천연생태지역을 세계적인 거리예술축제가 펼쳐지는 지역으로 만들고자 '제1회 안심 예술마을 생태예술제'를 개최한다. 지역주민들과 함께 만드는 공연 '문패밀리 페스티벌'도 1년에 1~2회 개최했다. 연이은 마을축제와 생태예술제를 지켜본 동구청, 안심3동 행정복지센터, 안심창조밸리 주민협의체, 반야월 연꽃마을협동조합, 안심3동 주민자치위원회 등 많은 공기관과 지역 민간단체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덕분에 2019년 달다는 대구 동구 제1호 민간 소극장으로 정식 등록하게 된다. 지난해 달다가 지역 문화예술 기여에 대한 공로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표창까지 받게 된다.예산과 지원에만 의존한 문화운동가들은 주민들이 직접 만들고 주민이 주체가 되는 마을축제를 보곤 답이 안 나온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달다는 소리타래 예술의 전진기자이자 안심3동 주민들의 문화사랑방, 그리고 동구 유일의 민간 소극장이기도 하다. 공유된 주민은 얼추 50명. 이들은 수시로 달다를 들락거린다. 이들과의 대화를 더욱 흥미진진하게 만들기 위해 부부는 바리스타 교육도 받았다. 매주 화·목요일에는 연습 등을 위해 오전 10시부터 문을 열어 밤 9시 문을 닫는다. 나는 족히 50여 잔의 커피를 직접 드립 해 준다. 서울에서 배우로 잘살아가는 아내를 문화 불모지인 대구 동구 끝자락 안심에 오게 한 게 늘 미안하고 짠 하기만 하다. 날 믿고 우리를 믿고 함께 힘든 길을 걸어 준, 앞으로도 함께 걸어갈 각시에게 '하트와 엄지척'을 전하고 싶다. 30년 전 '스무 살이던 아무것도 모르던 나'를 '지금의 나'로 서 있게 도와준 선후배 예술가들에게도 감사의 맘을 전한다. '예술이 모두의 밥을 너머 맘'이 될 수 있는 날까지 우리 달다는 주민과 동행할 것이다. 초월만 꿈꾸던 예술의 시대는 간 것 같다. 소시민의 마지막 보루인 일상, 거기로 예술을 끌고 오는 것, 그게 나의 향후 화두일 것 같다. 누구만의 예술이 모두의 예술이 되는 것, 그것도 하나의 혁명 아니겠는가? 글·사진=이춘호 대중문화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2020년 제1회 안심 마을문화축제 관계자들이 한데 모여 기념 사진을 찍었다. 〈소극장 달다 제공〉예재창 대표가 노래 부르는 모습을 아내 문경빈씨가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다.지난해 처음 반야월 연근단지에서 열린 생태예술제에 자녀들과 함께 흥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안심 주민들. 〈소극장 달다 제공〉지난해 열린 안심 온마을축제 포스터.
의료대란으로 번진 의대 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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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까지 전공의 복귀해야"…전문의 취득 늦어질 가능성 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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