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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춘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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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날] 서예가 김정숙
"한자 시대가 저물고 한글의 시대가 도래고체와도 소통 되는 현대 서예 가능성 타진필선의 음양감, 직선곡선의 앙상블, 집중 분산신감각 결구와 장법 사용해 찾은 조형미"12년 전 첫 서예 개인전을 열었다. 시아버지가 그를 서예가로 이끈 것 같다. "고희 때 다른 선물은 필요 없고 못 써도 좋으니 네가 쓴 글씨 하나 받고 싶다"라면서 벼루를 하나 선물로 주었다. 그 벼루 하나가 그를 서예가로 성장시켰다. 취미 수준의 고만고만한 서예에서 벗어날 심산이었다. 어디 가나 비슷한 궁체. 전통은 마땅히 존중돼야 하지만 그 전통이 미래를 겨냥하지 않으면 서예는 예술작품으로 승화될 수 없다고 봤다. 대구예술대 서예과(1회)에 입학한다. 수운(水雲) 김정숙. 현대 서예의 신지평을 연 김태정 대구예술대 서예과 교수(작고)가 스승 자격으로 아호를 주었다. 한자시대가 저물고 한글시대가 도래하고 있었다. 그럼, 한글서예의 새로운 가능성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건 경주대 정범모 교수가 첫 개인전에서도 언급했듯이 '고체(古體)와 민체(民體)의 융복합'이었다. 훈민정음과 광개토대왕비문 같은 고체, 그리고 예전 가사 형식의 '내간체'를 섞는 것이었다. 예스러운 정신, 현대적 감각을 섞자, 수제천 같은 궁중제례악에 민요를 섞는 수준이랄까. 말은 쉬운데 막상 적어보면 한쪽으로 쏠린다. 너무 고투여도 너무 실험적이어도 곤란하고…. 그럼 어쩌지? 죽어라 쓰고나서 보면 틀에 갇혀 있었다. 어디서나 본 것 같은 글씨로선 설 자리가 없다. 넘어서야 하는데…. 내 재주가 여기서 끝인가….누가 말했던가, '예술은 자정 이후'라고. 작품 삼매경, 그래서 툭하면 자정을 넘겼다. 아파트 경비원은 이상한 종이 뭉치를 들고 다니는 그의 실체가 궁금했다. 매일 가족과 예술 사이를 오갔다.서예계는 특히 남성 독무대. 그 시절 여성은 살림살이에서 쉬 벗어나지 못한다. 벗어나려면 섬뜩한 강단이 있어야 한다. 1회 개인전은 기본기의 연장이었다. 2017년 2회 개인전(영원한 사랑)에서는 수많은 고서와 시문에 담긴 고대·현대의 사랑법을 천착했다. 가장 몰입한 작품은 서거정의 '대구십경'의 한글 고체였다. 절절한 사랑의 주인공 안동 '원이 엄마'의 편지를 수운체로 재해석했다. 고체와도 소통이 되고 그러면서 현대 서예의 가능성도 타진했다. 이번 개인전을 준비하면서 한 명의 지역 시인과 조우한다. 바로 김동원 시인이다. 그의 시 24점을 정독했다. 작품마다 질감과 서풍을 달리하려 노력했다. 제목과 본문의 대립적 긴장미, 필선의 음양감, 직선과 곡선의 앙상블, 부드러움과 강함의 집중과 분산. 새로운 결구와 장법을 사용해 수운만의 조형미를 찾았다. 주상절리의 단면 같은 질감을 가진 '시인'이란 작품에는 광개토대왕체가 녹아있다. '번쩍'이란 작품에선 튀겨져 나가는 먹선을 의도적으로 삽입했다. '밥'이란 작품에선 시어를 밥알로 얹었다. 가장 어려운 작품은 '오십천'이었다. 김 시인의 어둑한 가족사, 특히 서럽게 울다 가신 시인의 모정(母情)이 조선 여인의 한(恨)처럼 크게 와닿았다. 잘 쓰는 것보다 제대로 못 쓰는 게 얼마나 어려운가를 절감했다. 3회 개인전. 그는 다시 태어난다. 강에서 벗어나 서예의 바다로 진입하는 첫날 같달까.오는 25~29일 DGB갤러리(토·일요일 휴관). 4월30일~5월10일 군위생활문화센터 행복숲갤러리. 글·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광개토대왕비의 기운이 꿈틀거리는 작품 '시인'.
[김영복·이춘호 '한식 삼천리'] 등겨장 명인 신청 준비를 하고 있는 백말순씨, 성주지역 60여년 외길 백말순표 등겨장 명성
등겨장은 보리쌀겨 반죽을 왕겨를 태운 재에 넣고 구운 것을 띄워 말려 빻은 가루에 보리쌀을 갈아 엿기름물에 삭힌 식혜, 무청, 당근, 풋고추, 메줏가루, 다진 마늘, 고춧가루, 산초가루, 소금 등을 섞어 버무려 삭힌 것이다. 메줏가루와 소금을 섞은 보리밥에 절인 무채, 당근 채, 무청, 풋고추를 고루 버무리기도 한다. 경북에서는 '등겨장', 경남에서는 '개떡장'이라고도 한다. 장이 떨어지는 시기인 이른 봄에 담가 비빔, 쌈, 찌개, 반찬 등으로 이용한다. 서늘한 온도에서 삭혀야 제맛이 나므로 한여름은 피한다.특히 성주 지역이 등겨장으로 유명하다. 초전면 동포리에 살고 있는 백말순, 그리고 성주읍 감골식당 이천혜자와 그녀의 어머니 박말순 때문이다. 백말순은 60여 년 등겨장 외길을 걸어 왔다. 16년 전 아들 최계환이 가업을 이으며 공장을 짓고 전국구 마케팅을 시작했다. 현재 청국장이 들어간 청국쌈장까지 특화했다.감골식당도 50년 역사를 가졌다. 성주읍 감골식당은 이제 등겨장을 만들지 않고 그 명맥은 딸 최해숙이 잇는다. 모친이 타계하자 9년 전 달서구 성서로 와서 감골식당(053-587-7026)을 차렸다. 1년에 3번 등겨장을 만드는데 특이하게 무와 고추씨를 섞는다. 감골식당에서는 도넛처럼 생긴 메주를 '딩기뭉테기'라 부른다.아무튼 고래의 장류문화의 연대기를 보면 한민족의 양념(발효장류) 감각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 같다. 이 장류의 범주에 맞는 신개념 음식이 양식, 중식, 일식 전문가와 공유됐으면 좋겠다. 김영복 원장도 이번 기획시리즈와 관련 다양한 셰프와 한식 세계화를 위한 합종연횡을 시도하고 있다. 소중한 흐름은 늘 '등잔 밑'에 숨어 있다. 먼 곳, 유행하는 트렌드 라인 속에서 '파랑새'를 찾긴 힘들 것 같다. 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
[김영복·이춘호 '한식 삼천리'] 팔색조 매력의 맛 '된장 이야기' (2) 고운 보리쌀 겨로 만드는 경북 별미 '등겨장'…이른봄 담가 비빔·쌈·찌개 즐겨
집장과 즙장여러 재료로 만든 '집장' 단기간 발효 '즙장'두개 醬 모두 여름에 담가…메줏가루 사용'집장(集醬)'은 여러 재료를 모아서(集) 만든 장(醬)이다. '즙장(汁醬)'은 간장, 된장, 고추장 등과 같은 기본장과는 달리 일부 지역에서 단기간에 별미로 담가 먹었던 장으로 액체가 많은 장이다. 또 즙장은 장기간 발효시키는 된장과 달리 담가서 단기간 발효 시켜 먹는 속성장으로 독특한 풍미가 있고, 지방마다 원료의 종류, 발효 및 숙성 조건 등이 달라 그 형태 및 품질이 매우 다양하다. 또 보릿가루가 주원료여서 단맛이 강하고 그대로 밑반찬으로 이용되는 특징이 있다.즙장이란 말은 '규합총서(閨閤叢書)' '시의전서(是議全書)' '부인필지(婦人必知)' 등 많은 문헌에 나타나 있으며, 고문헌에서는 '콩과 밀기울과 메주를 만들고 야채류를 넣어 말똥 속에서 숙성시킨 것'이라고 했다. 즙장은 밀기울과 콩을 물에 불려 시루에 쪄서 절구에 찧은 뒤에 밤톨만큼씩 덩어리를 만들어 메주처럼 띄운 후 건조하여 가루를 만들어 누룩 가루와 물을 섞고 소금을 넣어 밀봉하여 두었다가 십여일 후 설탕을 타서 먹는 음식이다. 막장과 비슷하게 담되 수분이 줄줄 흐를 정도로 많고, 무나 고추, 배춧잎을 넣고 숙성시킨다. 산미도 약간 있다. 밀과 콩으로 쑨 메주를 띄워 초가을 채소를 많이 넣어 담근 것이다. 경상도·충청도 지방에서 많이 담그는 장으로 두엄 속에서 삭히도록 되어 있다.경북 성주 한개마을 이원조가의 즙장 담는 법은 이렇다. 누룩과 채소(박, 가지, 고추, 부추 등)를 준비하고, 찰밥을 해서 뜨거운 상태로 준비한 누룩과 채소를 섞으면서 국 간장으로 간을 맞추고 쌀엿이나 조청을 추가해 만든다. 채소 중에는 박을 가장 많이 넣는다. 왕겨를 많이 쌓아두고, 항아리에 채소하고 재료를 버무려 담아 뚜껑을 덮은 후 왕겨 불로 중탕을 한다. 다만 부추는 중탕할 때 넣기도 한다. 즙장과 집장은 모두 여름에 제조한다는 공통점이 있고 메줏가루를 사용하거나 두엄 속에서 삭히는 공통점이 있다. 특히 집장을 경북에서는 '거름장', 경남에서는 '보리겨장'이라고 한다. 거름장이란 명칭은 이렇게 '퇴비 속에 파묻어 익힌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다. 우선 경북의 거름장은 콩을 삶다가 보리를 섞어 익힌 뒤 메주를 만들어 뽕나무나 닥나무 잎을 덮어 띄운다. 이것을 말려 가루로 만든 다음 오이, 가지 등을 섞어 퇴비 속에 묻어 익힌다. 경북 예천 춘우재 권진 종가는 집장으로 유명하다. 메줏가루에 쪄서 삭힌 찹쌀을 버무린 후 가마솥에 다시마, 찐 오징어, 호박오가리, 가지, 대파, 버섯, 고춧잎, 무, 마늘 등 아홉 가지 재료와 함께 넣고 오랫동안 타지 않게 정성 들여 불을 때 끓인다. 다 끓인 집장을 하루에서 하루 반 정도 숙성시킨 다음 먹는다.청국장(靑麴醬)병자호란 당시 국내 유래한 설은 근거 희박청나라 장이 아닌 '푸른 곰팡이'란 뜻의 장청국장은 삼국시대부터 이미 존재한 음식으로 408년 백제 영토였던 전남 나주 흥덕리 고분에서 발굴된 묵서명(墨書銘)에 '염시(鹽시)'가 나오는데 '시'는 메주를 뜻하는 한자로 염시는 된장이나 청국장일 가능성도 매우 높다.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는 '전국장(戰國醬)'이 네 번 등장한다. 청국장은 전시장, 전국장, 청국장(靑局醬), 청국장(靑麴醬) 등으로 쓰다가 청국장(淸麴醬)으로 통일됐다. 청국장(淸國醬)이 병자호란 때 청나라 병사들이 말안장에 삶은 콩을 싣고 다니다 발효시켜 먹은 데서 유래됐다고 하고 있으며 중국 청나라 장이라고 주장한다. 과연 그럴까? 병자호란은 1636년부터 1년간 청나라가 우리나라를 침범했던 전쟁이다. 그러나 이런 설은 근거가 희박하다. 병자호란보다 100여 년 앞서 발간된 1527년 최세진의 '훈몽자회'를 보면 '시'를 '쳔국'으로 해석하고 있었다. 조선 후기의 문신 김간이 1766년에 쓴 시문집 '후재집(厚齋集)'에서 '전국장(戰國醬)은 칠웅전쟁(七雄戰爭) 때 만들었다고 하는데 어디서 나온 이야기인지는 알지 못한다'라고 적었다. 청국장이 전쟁용 음식이란 속설에 관한 가장 오랜 기록이다. 조선 숙종 때 김창업이 펴낸 '연행일기(燕行日記)' 계사년(1713·숙종 39) 1월26일을 보면 '북경에 사는 박득인의 집 주안상에 청국장도 맛이 역시 좋은데 대개 우리나라의 방법으로 만든 것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때가 청나라 때인데 북경에서 먹은 청국장이 우리나라 방법으로 만들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더라도 병자호란 때 청나라 병사에 의해 전해졌다는 것은 신빙성이 떨어지는 그야말로 설에 불과하다. 조선 초와 중기에는 '시'를 주로 며주·메조·며조·메주라고 했고 조선 후기 무렵에는 전국장·쳔국장·청국장이라고 했다. 즉 '시'에서 메주와 청국장이 분화돼 현재까지 발달해 온 것으로 보인다. '훈몽자회'의 '쳔국'과 '사류박해'에 나오는 '청국장', '전국장' 등의 연관 관계이면 청국장이 '靑麴醬' 이어야 하지 '淸國醬'은 아니다. 즉 청국장은 청나라(淸國) 장(醬)이 아니라 '푸른곰팡이'란 뜻의 청국장(靑麴醬)이다.빠금장동지~봄에 먹어… '빠개장'이라 부르기도부뚜막서 띄워 먹는 된장, 세월따라 사라져장(醬)도 제철에 맞게 담가 먹어야 맛이 있다. '가을 청국장, 겨울 빠금장'이라 했다. 청국장은 가을 콩을 발효시켜 동지 전까지, 동지 이후부터 봄까지는 빠금장을 만들어 먹는다. 이 빠금장을 '빠개장'이라고도 부른다.'빠금장'은 동지 전에 메주를 쑤고서 몇 개 정도를 장 담그기 전에 여분으로 남겨두었다가 만들어 먹는다. 부엌 개량화로 인해 발효시킬 부뚜막이 사라지면서 우리의 토속음식인 빠금장도 함께 사라진 게 아쉽다. 빠금장은 부뚜막에서 띄워 먹는 된장으로 된장이 떨어질 무렵인 봄에 된장을 만들기 위해 소금물에 담고 남은 메주를 절구에 거칠게 빻아서 동치미 국물에 걸쭉하게 개어 항아리에 담아 부뚜막에 올려 따뜻하게 둔다. 2~3일 후 항아리 위로 떠올라 오면 고춧가루와 소금을 넣고 간을 한 속성장이다. 예전에는 화롯불에 뚝배기를 올려놓고 바글바글 끓는 채로 먹기도 하고 나물 무치는 데도 쓰고 봄 채소 쌈장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경상도 대표주자 등겨장보리 찧은 당가루에 조금 거친 겨와 섞어서늘한 온도에 삭혀야 제맛, 한여름은 피해가장 경상도스러운 장이 있다. 바로 '등겨장'이다. 고운 보리쌀 겨로 만드는 경북 지역의 별미다. 두산백과사전에는 '시금장'이라는 이름으로 올라 있다. 그러나 우리 지역에선 '딩기장'이라 하면 훨씬 쉽게 알아듣는다. '딩기'는 '등겨'의 지역 토속어이다. 등겨도 종류가 여럿이다. 벼를 찧을 때 현미기를 거쳐 나온 등겨는 '왕겨'인데 이는 주로 땔감이나 거름으로 쓰인다. 껍질이 벗겨진 현미가 정미기를 여러 차례(이 횟수에 따라 7분도, 8분도 하는 식으로 '분도'가 정해진다) 돌아 나오면 쌀이 되는데 이 과정에서 나오는 등겨는 '쌀겨'라고 한다. 처음은 거칠고 누런 겨지만, 나중에는 '싸라기'라 하여 쌀알 부스러기까지 나온다.보리를 찧을 때 나오는 등겨는 벼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벼는 껍질을 벗기는 게 가능하지만 보리는 아니다. 낟알의 가장자리를 갈아내 보리쌀을 만드는 것이다. 당연히 처음에는 거칠고 누런 겨가 나온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겨는 점점 부드러워진다. 보리쌀 모양이 갖추어지기 시작하면서부터 나오는 겨를 토박이 업자들은 '당가루'라고 한다. 이 당가루에 직전의 조금 거친 겨와 섞어서 등겨장을 담근다. 정리·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불에 그슬린 백말순표 등겨장 메주.모 방송국 제작진에게 등겨장 레시피를 설명 중인 백말순.메주는 된장과 간장의 원천이 된다. 메주 한 덩이. 그건 '한식의 맛'이란 건축물을 만드는 '벽돌'과 같다.백말순 등겨장의 주재료가 한자리에 모였다. 보리메줏가루, 콩, 보리, 콩물, 고춧가루, 천일염 등 9가지.60여 년 역사의 백말순 등겨장 상품들.
[김영복·이춘호 '한식 삼천리'] 팔색조 매력의 맛 '된장 이야기' (1) 메주 빠갠 가루로 담근 속성장 '막장'
메주와 물, 그리고 소금이 만나면 간장과 된장이 탄생한다. 한식의 출발선이랄 수 있다. 간장, 된장, 고추장, 그리고 젓갈, 식혜, 장아찌…. 최소한 이 스펙트럼을 알아야 한식의 연대기를 이야기 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한국의 장류 문화는 서양발 소스문화에 지배된 듯하다. 마치 서양음악이 국악을 호령하는 모양새랄까.지난 회에서는 '간장 인문학'에 대해 알아봤는데 이번 회에서는 오묘하고 변화무쌍한 팔색조 된장의 연대기에 대해 알아본다.콩(豆)을 가르(支)면 메주란 의미의 '시(시)'가 된다. 시란 용어는 삼국사기 신라 본기에도 등장한다. 신문왕 3년에 왕이 김흠운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할 때 납채(納采) 품목으로 장(醬)과 시가 포함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된장 중 특별한 스펙트럼을 가진 '별미장'이 있다. 바로 '속성장(速成醬)'이다. 지역별로 만드는 방법이나 명칭 등이 약간씩 다르다. 크게 나누어 보면 청국장, 막장, 담북장, 빰장, 빠개장, 가루장, 보리장(등겨·시금장) 등으로 나뉜다. '막장'은 날 메주를 가루로 빻아 소금물에 말아 숙성시킨 것, '담북장'은 메줏가루에 고춧가루를 섞고 물에 풀어서 하룻밤 재웠다가 간장과 소금으로 간을 맞춘 된장이다. '빰장'은 굵게 빻은 메주에 소금물을 부어 담근 것, '빠개장'으로도 불리는 '빠금장'은 메줏가루를 콩 삶은 물로 버무리고 고춧가루와 소금을 섞어 담근다. 또 '가루장'은 보리쌀을 빻아서 찐 것에 메줏가루를 버무려 소금물로 간을 맞춘 것, '보리장'은 보리쌀을 삶아 띄운 다음 가루로 빻아서 메줏가루와 반반씩 섞어 소금물로 버무려서 만든 걸 말한다.메주에서 된장으로 변주되는 과정의 첫 관문은 뭘까? '막된장(막장)'이다. 메주를 소금물에 담가 숙성시킨 후 간장을 빼고 난 부산물이다. 그다음 주자는 '토장(土醬)'이다. 막장에 메줏가루와 소금물을 섞거나, 막장을 넣지 않고 메줏가루에 소금물만을 넣고 담가 2~3개월 숙성시킨 된장이다. 일반적으로 간장을 뜨지 않은 된장을 '토장'이라 한다.막장은 장을 담근 지 15일 정도 지나면 먹을 수 있는 속성장으로 메주를 빠개어 가루로 만들어 담갔다고 하여 지역에 따라 그 이름이 달라진다. 강원도를 비롯해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등 주로 보리 생산이 많은 남부지역에서 먹었다. 경상도 지역에서는 '빰장', 충청도 지역에서는 '빠개장'이라 하였다. 메줏덩이로 간장을 만드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므로 '가루장'이라고도 부른다. 1766년(영조 42)에 유중림(柳重臨)이 엮은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에는 별미장인 '담수장(淡水醬)'이 소개된다. '가을에서 겨울 사이에 만든 메주를 초봄에 부숴서 햇볕에 6~7일 숙성시켰다가 햇채소와 함께 먹으면 맛이 새롭다'라는 대목이다. 막장의 원형으로 보인다.막장은 봄·가을철에 만든다. 재료는 메줏가루 5홉·찹쌀 2홉·물 6홉·소금 1홉. 만드는 방법은 이렇다. 찹쌀 4공기에 메줏가루를 섞어서 덮어 1일 동안 지낸 후 물에다가 소금이나 간장을 섞어서 반죽한 것에 섞어서 잘 덮어 주면 한 10여 일 후부터 익기 시작한다. 조선 시대에 된장 대용으로 사용한 속성장이다. 막장은 처음부터 메줏가루로 된장을 만들기 때문에 간장을 빼고 남은 건더기로 만든 재래식 된장보다 맛이 좋고 영양가도 높은 편으로 주로 쌈장이나 양념으로 쓰인다. 막장은 일반 메줏가루로 만들기도 하지만 콩, 밀, 멥쌀, 보리 등의 전분을 섞어 막장용 메주를 만들어 장을 담그기 때문에 콩으로만 메주를 쑨 재래식 된장과 달리 소금을 조금 넣고 오래 숙성시키지 않아도 된다. 이는 메주에 전분이 들어가면서 당분이 분해되어 발효가 빨리 진행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막장은 다른 된장에 비해 단맛이 강하다. 막장용 메주는 멥쌀가루로 찐 떡이나 삶은 보리쌀을 전분질 재료로 하고 콩은 무르게 삶아 사용한다. 이들 재료를 절구에 찧어 주먹만 하게 메주를 빚은 뒤 속이 노랗게 되도록 잘 띄운다. 요즘에는 옛날과 달리 보릿가루와 엿기름을 섞어 죽을 쑨 다음 여기에 고춧가루(또는 고추씨 가루), 메줏가루, 소금 등을 섞어 따뜻한 곳에서 한 달 정도 숙성시켜 먹기도 한다. 쌈장, 수육이나 편육을 찍어 먹는 양념장, 생선회로 물회를 만들 때의 양념, 국이나 찌개를 끓이는 데 사용한다. 대담=김영복 식생활문화연구원장·이춘호 음식전문기자 정리=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김영복·이춘호 '한식 삼천리'] 팔색조 매력의 맛 '된장 이야기' (2)에서 계속됩니다.
[김동욱의 낚시시대/손맛] 참돔 타이라바 in 제주…바다의 여왕, 그 선홍빛 품격과 마주하다
오전 10시20분. 북쪽 수평선 멀리 희미하게 작은 섬 하나가 보인다. 섬의 이름은 사수도. 제주도 북쪽 도두항을 빠져나간 뉴명성호(선장 손강석)는 꼬박 1시간 반을 달려 사수도 남쪽 해상에 도착했다.손 선장이 포인트 정보를 알려준다."바닥 수심은 90m권이고, 조류는 1.5노트로 흐르고 있습니다."지난 2월25일 한국다이와 김종필 마케팅 차장은 성상보 솔트루어 필드테스트, 이춘기 솔트루어 필드스태프와 함께 특별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2년여 동안 개발해 온 참돔 타이라바 전용 로드, 코우가 ST TG(紅牙 ST TG)의 3월 출시를 앞두고 최종 필드 테스트를 겸한 홍보 영상 촬영이 그것. 물때는 2물, 수온은 12.7℃. 끝 썰물이 진행되고 있다."사수도라고? 확실해?"생각보다 첫 입질은 빠르게 들어왔다."히트~!"왼쪽 뱃머리에서 성상보 프로가 가장 먼저 입질을 받았다. 코우가 ST 65M 로드가 부드럽게 휘더니 버트(손잡이 대) 앞까지 큰 곡선을 그린다. 참돔 타이라바 낚시는 히트 후 펌핑 없이 로드의 탄성과 릴의 드랙 만으로 랜딩한다. 성 프로는 최대한 로드의 탄성을 이용하면서 부드럽게 릴링한다.바닥까지의 수심이 깊어서 랜딩 시간이 길어진다. 이윽고 수면이 붉게 물들고, 선홍빛 참돔이 얼굴을 내민다. 이때가 오전 10시40분.첫 입질은 이렇게 의외로 쉽게 들어왔지만 사실 우리 취재팀의 첫 포인트 선정에는 고심이 컸었다. 어젯밤(2월24일) 저녁 식사를 한 후 근처 커피숍에서 우리는 갑론을박을 벌였다. 손강석 선장이 추천한 곳은 사수도였다. '최근 1주일 동안 마릿수 입질이 가장 활발했던 곳'이란 것. 그런데 문제는 오늘(2월24일) 사수도는 몰황이었다는 점. 우리는 이 부분이 마음에 걸렸다.바닥까지 수심 깊어 길어진 랜딩시간수면 붉게 물들자 얼굴 내미는 여왕최근 일주일간 입질 많은 곳 사수도첫 조과 올린후 50㎝급 연속 걸어내더이상 입질 없자 삼양항 앞바다 이동 연속 입질 후 60㎝급 참돔으로 피날레◆다시 제주 앞바다로"도두항에서 사수도까지 거리는 1시간 반. 만일 내일도 오늘과 같은 상황이라면 거기서는 대안이 없어요."제주 현지 꾼이기도 한 성 프로는 그나마 마릿수 입질 확률이 높은 곳으로 제주 서쪽 신창 해역을 꼽았다. '신창항 남쪽의 차귀도 부근은 항상 조류 흐름이 좋은 곳이기에 절대 꽝 칠 일은 없을 것'이라는 게 성 프로의 주장이었다.그러나 손 선장은 완강했다."오늘은 비록 꽝 쳤지만 내일은 다를 겁니다." 선상낚시에서 선장은 언제나 '갑'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결국 사수도까지 왔고, 다행히도 빠르게 첫 조과를 올렸다. 비슷한 시각에 이도훈 사무장도 50㎝급 참돔을 낚아 올렸다. ◆제주 북쪽에서 마릿수 히트그러나 그걸로 끝이었다. 오후 1시 점심을 먹을 때까지 그 누구에게도 입질은 없었다. 손 선장은 여기서 자신의 고집을 꺾었다. 뉴명성호는 왔던 뱃길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간다. 1시간 정도 달려가서 도착한 곳은 제주도 북쪽 함덕해수욕장이 보이는 곳, 수심은 80~90m. 여기는 사수도 해역보다 표층 수온이 2℃ 정도 더 높다. 역시 입질도 활발하게 들어온다. 성 프로가 먼저 50㎝급 참돔을 걸어 냈고, 이어서 이춘기 프로도 상사리 한 마리로 응수한다. 오후 3시. 뉴명성호는 여기서 서쪽으로 좀 더 이동한다. 이제는 삼양항 앞바다. 다시 성 프로와 이춘기 프로가 연속 입질을 받았고, 김종필 차장은 이날 가장 큰 씨알인 60㎝급 참돔으로 피날레를 장식했다. <월간낚시21 기자 penandpower@naver.com>이춘기 프로가 막 낚아낸 참돔을 들어 보인다.입질을 받은 성상보 프로가 랜딩 도중에 코우가 ST TG의 휨새를 살피고 있다.김종필 차장이 타이라바 채비 헤드와 '나카이튠' 스커트를 바꾸고 있다.김동욱 월간21 기자
김해자 시인이 본 권선희는 "빨간바지에 노랑머리가 놀믄서 얘기 들어주는데 무슨 시인이라는 거라"
뭐 하나가 동네 굴러 들어와 사는데, 뾰족구두 신고 굽실굽실 노랑머리에 빨간바지나 입고설랑, 부영식당 골방블루스에 막걸리나 마시고 포구 온천지로 싸돌아댕기는데 그 모양새가 영락없이 다방 레지인기라, 어느 날은 돼지뼈 싸들고 과메기덕장 경비 찾아가 덕수씨, 덕수씨 불러쌓고 종팔씨는 말할 것도 없고 목포집 덩실이에 못된 놈, 쫄쫄이 온갖 동네 개들이 노랑머리 앞에선 꼬리를 살살 흔들어 쌓는디, 그게 개철이 아니 예비군중대장 최규철이 각시라 카데, 어느 땐 어판장 바닥에서 괴기도 만지작거려 쌓고 덕장에 퍼질러 앉아 꽃마차 울고 가는 이바구도 해쌓고 물장화 고무장갑 냅다 던지고 관광차 안에서 씨바씨바 봄이 간다 막춤도 춰쌓는디, 그기 다방 레지가 아이고 무슨 시인이라는 사람이라는 거라, 시인이 머시라? 고래 잡고 오징어 잡고 청어 배째가 말리고 물질하는 사람들하고 놀믄서 얘기 들어주는 사람이라?어느 날 전화가 왔는데요, 동네 사람들이 맘을 모다 상을 준다카데요, 무슨 상이요 물었더니 그냥 상이라는 기라요, 서류도 일체 필요없고요, 수협에 와가 커피도 한잔하고 총무과장 딱 5분만 만나고 가믄 됩니더카데요, 풀풀 날리는 사자대가리 다림질하고 꽃단장하고 갔더니만, 가다마이 쫙 빼입은 수협장과 이사 둘에 총무과장이 나란히 앉아있는데, 고기잡을 때 모습이 생각나 웃음도 나오고 코도 빨개지고요, 그래도 이 감격스런 상을 받았는데 사진은 한장 박아야 할 거 아니냐 했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바다 사진 걸린 버티컬 척 내려 딱 한 장 찍더구만요, 평생 시도 안 읽고 지가 무슨 시를 썼는지도 모르는 냥반들이 시인이라는 사람을 읽어주는 것 같아서 뭉클합디다, 돈 많이 주면 부담스러워 안 받을 수도 있으니 그냥 3백만 주자고, 일체 서류도 받지 말고 아무 이름도 달지 말고 그냥 주자 했다는데.얼떨결에 그 큰 마음 넙죽 받은 권선희 시인 왈, '뭉클상'이라고 얘기 전해 들은 아무개 시인은 고것이 대한민국 제일 위대한 상이라고. 이춘호 전문기자
[人生劇場 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詩人 권선희(2), 해녀·뱃사람·뱃공장 누렁이·주막·방파제 사람들 '포구 온천지가 詩想'
처음 내가 구룡포에 나타났을 땐 정말 가관이었다. 빨간 바지에 노랑머리 차림이었다. 아무도 내가 시인인 줄 몰랐다. 다들 다방 레지인 줄 안다. 두 권의 시집과 구룡포 관련 몇 권의 책을 내며 출판기념회, 관련 인터뷰 기사가 신문에 보도되자 '권 작가'라 불러준다. 심란한 날마다 놀러가는 뱃공장'구룡포 뱃공장 이야기' 책 출간 출판기념회 열고 신문에 실리자 사람들이 '권작가'라고 불러줘 癌 투병과 치료 후 작업실 복귀 다시 달력처럼 훑는 바다 표정◆내 놀이터는 뱃공장해녀는 또 다른 분신이다. 20여 년 구룡포에 살며 만난 해녀를 통해 한 권의 산문집(숨과 숨 사이에 해녀가 산다)을 잉태할 수 있었다. 다들 제주도 해녀만 알지 도내 해녀의 삶은 모른다. 작업 도구부터 품목별 채취법, 분배 방식, 해조류의 생태 등을 구술을 통해 정리해나갔다. 김남일 경북도 환동해지역본부장 등이 적극적으로 나서는 바람에 경북 동해 해녀 관련 조례와 전승 및 기타 부대 사업이 빛을 보게 된다.맘이 심란하고 꿀꿀한 날에는 내 놀이터인 구룡포 뱃공장(조선소) 별채에 살고 있는 누렁이를 만나러 간다. 그의 이름은 '동자'. 그가 한 달 전쯤 7마리의 식구를 낳았다. '일타칠피'인가. 사라져 가는 뱃공장의 담론을 취재하기 위해 참 많은 지인을 만났다. 구룡포 조선소 박창근·대성조선소 김영섭 대표, 구룡포수협장 김재환, 배 목수인 오정남과 안인모, 그리고 배 고사 증언을 해 준 배영숙·황보선 보살, 목선 멸치잡이 시절 이야기를 들려준 고명수, 길다방 박위자 사장, '우리배 용어사전'을 구해준 이상모, 완도에서 손수 목선 제작과정이 담긴 책을 등기로 보내주신 마광남…. 포항문화재단 덕분에 최근 '목선과 사람들이란 구룡포 뱃공장 이야기'를 책으로 묶어낼 수 있었다. 뱃공장 내에도 주막이 두 개 있었다. 그러나 대성 뱃공장 옆에 있던 주막도, 구룡포 뱃공장 우물 옆에 있던 주막도 문을 닫은 지 오래다. 배목수들의 누이로 어머니로 참을 해주고 술을 주었던 주모는 10여 년 전 문을 닫고 자식 집으로 가 지내다 작년에 돌아가셨다. 살아계시면 올해 92세. 뱃사람에겐 그들만의 어법이 있다. 투박하면서도 속정은 엄청 깊다. 그런 상념이 담긴 시가 바로 '골방 블루스'다. '자작나무 모텔과 항구다방 사이 골목에 부영식당 있는데요/ 그 식당 명물 돌아앉은 골방이지요/ 사내들 지퍼 열며 드는 변소 앞이지만요/ (중략)/ 들추는 겨드랑이마다 핀 하얀 소금꽃과/ 긁을수록 부풀어 오르는 슬픔도 말입니다'◆시버럴 유방암찔락락거리며 놀 때 알아봐야만 했다. 2019년 10월 덜컥 유방암 진단을 받는다. 수술과 치료를 마치고 구룡포로 돌아온다. 가장 길게 구룡포를 떠났던 시간이었다. 요양병원에서 나보다 어린 동료를 셋이나 잃었다. 돌아와 제일 먼저 당사포 내 작업실로 갔다. 챙길 수 없었던 복실이가 걱정이었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이 먹을 것을 마구 챙겨주셨다. 구룡포와의 관계가 일방적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가끔 나에게 '넌 누구야'고 묻는다. 야, 넌 솔직히 '구룡포 주모'가 딱이야! 한때 주막 구상도 했다. 상호는 '욕망두꺼비'. 비 오는 날은 오전 10시30분, 평소에는 늦은 오후에 아주 게슴츠레한 포즈로 영업을 시작한다. 해녀 형님을 알바 찬모로 고용해 활어어판장 해산·해조류로 안주를 만들고…. 하지만 성사되지 못했다. 그래도 괜찮다. 지금 내가 바로 '걸어다니는 주막' 아닌가. 글·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 ☞ 권선희의 책두 권의 시집(구룡포로 간다/꽃마차는 울고 간다) 출간. 구룡포 일본인가옥거리 관련 일본인 진출과 당시 양국 어민들 생활상에 관한 '구룡포에 살았다(2인 공저)'를 소설가 조중의와 발간. 17일간 항해기 '우리는 한배를 탔다', 해안길 도보여행기 '바다를 걷다 해안누리길(생각의나무·7인 공저)', 경북해녀 관련 산문집 '숨과 숨 사이 해녀가 산다(사진 김수정)', 목선과 사람들(사진 김규형) 등 출간.하늘을 향해 하이파이브를 하고 있는 권선희 시인.뱃공장의 연대기를 출간하기 위해 뱃사람들을 만나 현장 취재를 하고 있는 권선희 시인.집에서 1만 보쯤 떨어져 있는 활어위판장 옆 방파제 등대는 그녀가 뮤즈를 만나는 명상 포인트.2021~2022년 구룡포 인문학의 한 획을 긋게 만든 해녀 인문학 산문집과 구룡포 조선소 연대기를 녹여낸 '목선과 사람들'.(사진 왼쪽) 첫 시집 '구룡포로 간다' 표지.
[청년 장사꾼] 막창도둑 김병철 대표…과일즙 숙성 생막창·3가지 소스·무한리필 라면 '유쾌한 막창맛'…가맹점 110개 전국구 발돋움
유쾌발랄한 막창문화를 개척하고 있는 핫플 막창집 중 하나인 '막창도둑(대표 김병철)'. '아재·꼰대·노가다 막창'이란 20세기형 우중충한 막창의 이미지를 말끔하게 불식시키고 있다. 그를 사령부격인 수성못점에서 만났다.2007년 론칭, 지금까지 110개의 가맹점 확보. 제주도 서귀포, 강원도 홍성, 전라도 광주, 무안 등 전국구로 발돋움했다. 184㎝ 100㎏에 달하는 육중한 체격. 하지만 스포츠맨의 야성과는 거리가 먼 아주 유순하고 느긋한 심성이다. 올해 46세의 김 대표는 식당 콘셉트를 감옥으로 설정했다. 룸 마다 검정 쇠창살을 설치해놓았다. 무한 리필 라면도 그만의 색깔을 입혔다. 오뚜기에 주문해 '도둑라면' 이란 명칭을 부착한 것. 가게 입구에 강도 캐릭터가 곰 인형처럼 앉아 있다.원래 학창 시절에는 범생이었다.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생계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돈이 유일한 탈출구다 싶어 일찌감치 생업전선으로 나왔다. 경일대 전기공학과에 다녔지만 전공을 버렸다. 북구 유통단지 EXCO 근처에서 스팀세차장을 운영했다. 날씨에 너무 영향을 받고 육체적으로도 너무 힘들어 반야월에 있는 호프집을 임차했다. 그 집 상호가 특이했다. '카페를 도둑맞다'. 막창도둑도 거기서 착안됐다. 그리고 외식업에 도전했다. 생애 첫 식당은 반야월 막창 5호점. 예전 스팀세차장 자리에서 직원 한 명 데리고 북치고 장구치고 했다. 삶지 않는 생막창 시대를 연 반야월막창에서 배웠다. 8년 정도 운영하다가 막창도둑으로 승부수를 띄웠다. 여긴 '막스토랑(막창레스토랑)' 스타일. 찌그러진 드럼통 테이블, 연탄불 화덕, 고만고만한 소스…, 그런 걸 거부했다. 고가의 백탄, 철사 불판, 동그란 막창을 잘 펴서 네모 모양으로 펴서 구워준다. 이 버전은 반야월 막창이 처음 시도했다. 반찬에도 포인트를 준다. 어디 가나 비슷한 된장 소스에서 벗어났다. 발상의 전화를 했다. 그렇게 해서 등장한 게 파스타 샐러드. 소스도 3가지다. 된장·고추장·마늘간장 소스. 그리고 묵은지, 아삭한 질감의 콩나물, 무채 무침…. 김 대표는 절정의 맛은 잘 굽는 데서 결정된다고 믿는다. 하지만 대다수 원하는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덜 굽거나 아니면 타버리거나. 그래서 여력만 되면 직접 구워서 각자 접시에 얹어주고 싶단다. 여긴 막창을 삶지 않는다. 생막창을 고집한다. 연화제 구실을 하는 키위·파인애플 등 과일즙 속에서 3일 정도 넣어 둔다. 퍽퍽하지도 않고 졸깃하면서도 부드러운 식감이 형성됐다. 돼지 막창도 좋았지만 소 막창의 졸깃함은 이 살점이 내장이란 생각을 불식시키기에 충분했다. 다들 '저작삼매경(咀嚼 三昧境)'에 푹 빠져 있다. 글·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막창도둑' 김병철 대표
[人生劇場 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詩人 권선희(1), "내 詩의 뮤즈는 구룡포다"
구룡포는 바다이면서 온전히 '사람'이다. 그의 파도는 '주름살'이다. 그가 내쉬는 한숨 또한 '해풍'이다. 따지고 보면 난 구룡포 바다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매일 집에서 1만 보쯤 떨어진 등대 아래로 가서 구룡포 바다의 표정을 달력처럼 훑는다. 바다 밖과 바다 안의 경계, 거기에 방파제가 있다. 일상의 '변곡점'이다. 그래서 방파제는 또 다른 세상으로 연결되는 '비망록'이기도 하다. 비빌 구석이 없는 절망도 여기에 오면 잠시 '희망'으로 숙성되기도 한다. 나는 이 포구가 '연금술사'라 여긴다. 대낮 수면 위에 소금꽃처럼 돋아나는 윤슬은 꼭 '낮별' 같다. 여기에선 절망이 더 절망스럽게 유보되기도 한다. 바다에서 일어선 바람은 방파제에 모여들었다가 선창 곳곳으로 분배된다. 사람들은 거기서 백기투항을 하거나 무장해제된다. 즐거움과 웃음, 여유로움은 왠지 모르게 '이물감'이 있어 보인다. 나는 방파제로 출근하는 정말 다양한 사람의 표정을 꾹꾹 기록해나갔다. 뇌졸중에서 갓 살아난 환자, 파산자, 실연자, 실직자, 배신당한 자…. 구룡포는 그렇게 철부지 군인 마누라를 새내기 시인으로 익혀 주었다. 방파제로 출근하는 다양한 표정 기록구룡포 풍경 너머 파고든 사람 이야기선창의 삶에 찌든 행간 풀어가기 시작철부지 군인마누라가 시인으로 농익어남편을 만난 것도 운명이듯, 춘천에서 태어났다가 구룡포를 제2의 고향으로 찜한 것 또한 운명 아닐까. 문학청년 시절 '시 한 번 제대로 써봐야겠다'며 불퇴전의 각오로 서울예전에 들어가 문예창작을 전공했다. 아버지도 군인, 남편도 군인이었다. 툭하면 다른 도시로 이사를 갔다. 백령도·포항·진해·제주도·광주로 근무지를 따라 옮겨 다녔다. 행복인지 불행인지 시를 잊은 세월이었다. 시인은 무슨, 그냥 꼬질꼬질한 시민의 나날이랄까.1999년 어째어째 포항에 정착했다. 강물 위 나무토막처럼 마냥 떠내려갈 순 없었다. 시집 한 권 야무지게 만들어 볼 요량으로 2000년 3월24일 구룡포로 망명한다. 시집 제목도 정해 놓았다. '구룡포'. 내가 '구룡포 시인'이 되겠다고 결심하니 가족사도 요동칠 수밖에. 아들은 구룡포중으로 전학, 남편은 구룡포 예비군중대로 이적한다. 2~163번, 그렇게 구룡포 연작시를 발표해나갔다. 어라, 3년이 지나도 시집 발간을 못 했다.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지! 난 그냥 구룡포에 눌러 앉아버렸다.어슬렁거리며 이 골목 저 골목을 후벼팠다. 어느 날 포구의 다방 숫자를 세보니 무려 26개. '징그럽다. 뭔 다방이 저렇게 많다냐~'. 봄이 되면 다방 레지도 젊어진다. 그들은 두 달을 못 견디고 떠난다. 선장이 선원을 보듬기 위해 몰려드는 세왕식육식당, 방이 3개밖에 없는 부영식당, 그리고 종일 막걸리 출렁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까꾸네와 민속동동주집, 그리고 배 고치는 뱃공장, 돌멩이처럼 널려 있는 숱한 해녀들, 주인 잃은 개도 내 벗이다. 구룡포의 연대기가 궁금했다. 풍경 너머 사람을 파고들었다. 잘난 사람보다 못난 사람이 더 눈에 밟혔다. 선창의 삶에 찌들어 버린 사람들의 행간을 풀어냈다. 일에서 태어나 일 속에서 죽는다는, 2천명에 육박하는 경북 동해안 해녀들의 입이 되어주기도 했다. 해녀는 내게 모두 '형님'이다. 포항 시내 갈 때면 추억의 빵을 곧잘 사다 준다. 그럼 형님들도 갖은 어패류와 해조류를 십시일반으로 슬쩍 건넨다. 객지에서 굴러들어온 내가 아닌가. 그래서 나는 늘 '읍민들 삥은 뜯지 말자' 고 다짐한다.시는 일생과 일상 사이에 길을 낸다. 하늘과 땅 사이에 신탁의 루트도 깐다. 그게 어찌 맨정신으로 가능하겠는가. 난 평소 타인에게 시심(詩心)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냥 자객처럼 사람들 가슴속으로 잠입한다. 훗날 모리국수 전문 까꾸네집은 내 첫 단골 주막이었다. 처음엔 막걸리 가격이 1천원, 안주는 공짜. 5천원만 있으면 한나절 푸짐하게 취할 수 있다. 내겐 '별천지'였다. 거기 서 놀다가 퇴근 무렵 슬그머니 일어나 남편을 마중하러 간다. 내겐 죽이 맞는 별스러운 문인이 좀 있다. 소설가 성석제는 장편소설 '단 한번의 연애'를 집필하기 위해 구룡포에 한 달 머물다 갔다. 오토바이 타고 나타난 지리산 시인 이원규, 최근 내 삶을 녹여낸 '그냥상'이란 시로 날 오글거리게 만든 김해자 시인, 척하면 척인 제주도 사는 조각가 최정미, 울진에서 유기동물 구조사로 밥벌이하는 김명기 시인도 침투조처럼 조우한다. 그러면서 온갖 읍민과 사통팔달 부대낀다. 그들은 내 시의 누룩 같은 존재다. 글·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人生劇場 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詩人 권선희(2)에서 계속됩니다.해풍이 을씨년스럽게 불고 맘이 꿀꿀할 때면 놀러 가는 자신의 놀이터 중 하나인 구룡포 뱃공장. 권선희 시인은 2000년부터 이곳을 축으로 선창 골목의 주막집, 길다방 등을 섭렵하고 재차 구룡포 인문학을 위해 해녀의 연대기를 바늘 끝처럼 기록해나갔다. 가장 소중한 것이 자본에 의해 지워져 나가는 걸 지키기 위해 그녀는 지금도 구룡포 주모를 자처하며 토박이들의 빛과 그림자를 놓치지 않고 시문학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동대구로에서] 村의 텃세, 그 두 얼굴
산촌과 어촌. 도시에서 태어나 어른이 된 자들은 과연 촌을 얼마만큼 알까. 촌(村). 다들 촌을 순수와 순박의 상징으로 착각한다. 그건 20세기 초·중반까지의 정서 아닌가. 지금은 단연코 아니다. 지금 촌은 너무나 살벌하다. 절대 평화롭지 못하다. 얼마 전 왕따 당한 것에 앙심을 품고 산불을 지른 촌사람의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이젠 촌사람 상당수가 부자다. '가난한 촌'은 옛말이다. 이제는 도시인보다 더 이재(理財)에 민감하다. 어느 날부터 촌사람보다 도시 은퇴자들이 촌을 더 아끼고 보듬으려고 한다. '나는 자연인'도 그런 종족이다. 촌 살리기 도시인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촌사람은 풍경에 무감한데 도시인은 감격해 한다. 주객이 전도된 형국이 전국 곳곳에서 포착된다. 하지만 토박이 촌사람들은 들어오는 귀촌·귀어인을 탐탁지 않은 눈길로 경계한다. 제주도 토박이들은 더 심하다. 관광하러 온 도시인을 '육지 것들'로 폄훼한다. 그건 제주 학살 사건 등에서 보듯 외부인들에 의해 척박해진 지난 시절 생긴 상처의 연장으로 봐야 한다. 미워서 미워하는 게 아니다. 자신도 모르게 트라우마처럼 육지인들을 믿지 못하는 것이다. 자연 도시의 맘이 쉬 깨지고 만다.그런 갈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촌극이 있다. 갓 집들이를 하게 된 한 귀촌인. 색소폰 부는 친구가 흥에 취해 연주를 했다. 조금 있으니 경찰이 다가와서 '민원 때문이니 연주를 그치라'는 거였다. 옆집 어르신이 신고한 것이다. 귀촌인의 집 분위기가 급랭할 수밖에. 그런데 해가 뜨기도 전에 경운기 모는 소리가 들린다. 옆집 어르신에게 퉁명스럽게 '너무 일찍 논에 가는 것 아니냐' 했다. 어르신이 버럭 화를 낸다. '농사꾼한테 논에 가지 말라고 하면 그게 무슨 망발이야·굴러들어온 돌이 어디 함부로….' 귀촌인은 얼마 못 가 집을 팔고 도시로 가버렸다.가난이 형벌처럼 도사리고 있던 그 시절의 촌부들은 순박했고 가난했다. 다들 좋은 시절 못 보고 돌아가셨다. 그 촌부의 아들은 형편이 나아졌고 누구보다 '촌테크'를 잘한다. 경북 동해안 주요 포인트가 펜션, 카페, 리조트, 빌라, 게스트하우스 등으로 뒤덮이고 있다. 부산 영도의 경우 최근 2년 사이 무려 250개로 급증했다. 포항권 주요 해안가도 카페 짓기 열풍이 불고 있다. 산과 바다를 위한 각종 매머드급 프로젝트가 형성되고 있다. 뭐가 급선무일까. '토박이와 귀촌·귀어인의 상생 마인드'다. 모범 사례가 있다. 춘천에서 태어나 2000년 구룡포로 들어온 권선희 시인. 그녀는 20여 년간 잊히는 구룡포 '뱃공장'과 경북 동해안 해녀 문화를 책으로 정리했다. 그게 너무 고마워 읍민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그녀에게 전했다고 한다. 경북도 환동해지역본부도 호미곶 국가해양정원, 문무대왕 마린스쿨, 해녀학교 등 토착민과 도시인이 상생할 수 있는 여러 사업을 추진 중이다. 도시인은 촌사람을 먼저 배려해야 한다. 그건 평생 거기서 산 사람들에 대한 예의다. 그런 배려를 당연한 듯 받아들여선 안 된다. 촌사람 또한 도시인과 윈윈해야 된다. 산과 바다는 모두의 자산이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눈먼 돈에 의해 망가지는 산촌과 어촌의 원형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이춘호 주말섹션부장 겸 전문기자이춘호 주말섹션부장 겸 전문기자
[이춘호 전문기자의 푸드 블로그] 봄맞이 음식…봄 알리는 1호 음식 '도다리 쑥국'…봄 밥상에 꽃처럼 핀 '부지깽이밥' '톳밥'
봄이 오는 구절도 크게 세 토막으로 나눠볼 수 있다. 초반전의 봄(初春), 중반전의 봄(中春), 그리고 종반전의 봄(終春). 초·중·종장으로 구성된 시조와 비슷한 구도다. 일반인들은 진해 군항제가 열릴 때 흐드러지게 핀 벚꽃을 보면서 '아 봄이 왔구나!' 한다. 중반전의 봄은 개나리와 목련, 진달래와 산수유 등이 주도한다. 하지만 1~2월 초반전의 봄은 심미안을 가진 자에게만 겨우 보일 정도로 빼꼼하게 존재한다. 바람의 계절인 음력 2월, 봄과 겨울 사이에 놓인 '연골' 같다. 태풍보다 더 거센 바람이 꽃샘추위와 함께 몰려온다. 어쩜 이 변곡점이 봄의 시작이랄 수 있다. 이때 추위를 '영등 할매 추위'라고 한다. 영등 할매는 음력 2월 초부터 보름 동안 지상에 머물며 비바람을 관장한다. 제주도는 물론 해안가 해녀와 어부들에게는 섬겨야 하고 빌어야 하고 의지해야 할 존재다. 그래서 음력 보름쯤 다들 용왕제와 비슷한 영등제를 봉헌한다.통영지역 섬 곳곳서 고개 내미는 쑥산란 직후 잡은 도다리와 만나 봄맛된장 풀어 끓인 보리싹홍어애국 별미강구안에서 즐기는 해초 멍게비빔밥 부산 청사포 광어쑥국도 입맛 돋워성주댐 봄 건강식 고로쇠수액 닭백숙 대구 한식당 '산내향' 힐링밥상취나물·숙주·봄동 등 제철나물 한상홍합밥으로 유명한 주인장 내공 담아 ◆봄의 전령사역시 봄꽃이 가장 만만하고 익숙하다. 꽃이 피면 봄이 온 것이다. 대한민국 봄의 전령사 1호. 세월 따라 그 주인공이 조금씩 달라졌다. 예전에는 제주도 유채꽃, 섬진강 매화, 남해안 동백꽃, 복수초…. 하지만 2000년 들어 제주도로 유배 간 추사 김정희 때문에 유명해진 수선화가 봄의 전령사로 등극했다. 추사의 유배지가 있는 대정읍은 남도 봄꽃 1번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그 뒤를 이어 너무나 많은 군락지를 갖고 있는 별별 동백꽃이 빛을 발한다. 여기에 설중매가 합세하면 초반전 봄을 장식하는 '삼정승(영·좌·우의정)'이 완비된다.신년이 펼쳐지게 무섭게 제주도 한림공원에는 수선화가 핀다. 보통 1월1일이면 꽃잎이 달리기 시작한다. 수선화의 꽃향기는 제주도와 남해안의 동백꽃과 맞물린다. 수선화와 동백꽃의 꽃향기는 유채꽃을 불러들이고 이걸 신호탄으로 육지에선 수양버들과 산수유가 노란 화맥(花脈)을 열기 시작한다. 울릉도에서는 전호나물과 명이나물, 부지깽이나물이 싹을 피워문다. 남부지방의 고로쇠가 수액을 팽팽하게 밀어 올린다. 물론 이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북극성처럼 멀리 떨어져 봄의 전령사의 고성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꽃이 있으니 바로 '고매(古梅)'다. 섬진강의 매화는 설중매보다 너무 흐드러져 꼭 4월의 벚꽃 같아 갈수록 상춘객 버전으로 추락하는 것 같다.제주도의 동백은 애기동백과 토종동백으로 분류된다. 두껍고 풍성한 육지의 겹동백에 비해 제주도 동백은 비단처럼 하늘거리고 화사하다. 색도 연분홍에서 담적색까지. 애기동백은 벚꽃처럼 난분분하게 지지만 토종동백은 꽃은 뚜 둑~, 불두(佛頭)처럼 떨어져 땅에 나뒹군다. 사진작가에겐 가지에 매달린 동백보다 바닥에 져버린 꽃에 더 혹한다. 부산 동백섬과 여수 오동도는 동백꽃으로 유명했지만 이젠 명함을 내밀지 못한다. 워낙 쟁쟁한 랜드마크가 많기 때문이다. 제주도 동백꽃 명소는 크게 제주시 조천읍 선흘리 동백동산, 서귀포 남원읍 위미리 동백수목원, 그리고 서귀포시 안덕면 카멜리아힐으로 정리된다. 동백꽃은 겨울과 봄에 걸쳐져 있다. 보리는 겨울과 봄을 품고 이른 여름까지 전개된다. 제주 동백꽃은 매년 11월부터 전개되어 육지에선 겨울이 한창인 2월에 동백꽃 퍼레이드를 마감하고 육지 동백꽃에게 바통을 넘겨준다. 해남 대흥사, 고창 선운사, 강진 백련사, 충남 서천 마량포구 동백정, 통영 욕지도와 지심도…. 특히 570여 개의 통영 섬 가운데 남동쪽의 외딴섬 장사도 '해상공원 카멜리아'에는 동백나무가 10만 그루 퍼져 있다. 1월부터 애기동백과 참동백이 차례로 꽃을 피우는데 3월 중·하순이 절정. 거제도의 이름난 외도 보타니아처럼 섬 전체를 생태공원으로 꾸몄다. ◆봄맞이 음식봄맞이 음식에도 계열이 있다. 2000년을 변곡점으로 국내에도 식도락 미식가가 급증하기 시작한다. 봄맞이 음식 1호는 뭘까, 단연 통영을 축으로 확산된 도다리쑥국이다. 2월 중순이면 한산도·소매물도·욕지도, 추봉도 등 통영 섬 곳곳에서 쑥이 고개를 내민다. 그게 20년 전부터 도다리를 만나 상춘객의 맘을 설레게 하고 있다. 그런데 봄 도다리(문치가자미)가 최고라는 건 매스컴 보도용 멘트인 것 같다. 이맘때 잡힌 도다리는 산란 직후여서 살도 적고 식감도 무른 편이다. 남해안의 봄맞이 음식이라면 서남해안권, 그러니까 목포·나주권은 그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홍어 애에 된장을 풀고 거기에 보리싹을 넣어 끓인 '보리싹홍어애국'을 추천한다.이맘때 잡히는 어종이면 굳이 도다리가 아니어도 괜찮다. 지금 미더덕과 멍게가 제철인데 통영 강구안에 가면 이상희 음식연구가가 운영하는 '멍개가'에서 해초가 가세한 봄맞이 멍게비빔밥을 맛볼 수 있다. 부산 해운대구 청사포 다릿돌전망대 인근에 '광어쑥국' 전문 횟집 '해림이네'도 매스컴을 타고 있다. 통영에서 도다리쑥국을 몇 번 먹어봤는데 솔직히 내 입에는 별로였다. 그러다가 통영권보다 더 괜찮은 맛을 보여주는 식당을 고령대가야시장 안에서 찾았다. 바로 '미주식당'이다. 올해는 2월10일쯤 첫 개시를 했다. 1만5천원인데 육수와 쑥, 그리고 도다리 살점이 너무나 잘 섞여 있다. 여느 식당은 솔직히 식재료가 제각각 따로 논다. 쑥을 먹는 건지 도다리를 먹는 건지, 육수를 마시는 건지 헷갈린다. 미주식당은 각 식재료가 잘 혼융돼 있다. 도다리쑥 진액을 먹는 것 같다.울릉도는 눈을 뚫고 나온 전호나물, 그 뒤를 잇는 명이나물과 부지깽이나물로 겨우내 답답했던 위장을 풀어낸다. 주당에겐 이게 봄맞이 해장국인 셈이다. 물론 울릉도와 전남 광양시 백운산 고로쇠수액도 토박이들에겐 봄맞이 음식이다. 지난주 방문했던 성주군 수륜면 성주댐 상류에 있는 '넉바우식당'의 고로쇠수액으로 요리한 닭백숙이 아직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산내향의 봄나물봄나물이 듬뿍 올려진 봄꽃 같은 한식당을 찾아봤다. 달서구 도원동 '산내향'의 봄밥상을 맛보고 왔다. 여사장 강민지씨는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로 제철음식에 집착한다. 한때 수성구에서 홍합밥의 신지평을 넓힌 '청아람'을 운영하기도 했다. 그런 그녀가 왜 1인분 1만원, 가성비 높은 제철 힐링밥상을 내밀었을까?33세에 처음 외식업계에 들어왔다. 서구 아리랑호텔 2층에서 3년쯤 한정식을 차렸다. 어머니는 종부의 삶을 살았다. 내림음식이 어떻게 완성되는 가를 어렸을 때부터 지켜볼 수 있었다. 살림의 연장에서 식당을 경영하고 싶었다. 1천원짜리 김밥 전문 '돌풍김밥'에 이어 '김밥 25시'를 차렸다. 여기서 지역에서 처음으로 '멸치땡초김밥'을 출시한다. 마요네즈소스 같은 인공감미료는 일절 사용하지 않았다. 기본기는 갖춰진 것 같았는데 뭔가 성에 차지 않았다. 그냥 식당 주인의 범주에 묶여 있는 것 같았다. 2년 정도 짬을 낸다. 대구한의대 김미림 교수를 만나 약선요리, 그리고 묵신 스님을 통해 사찰 음식를 배웠다. 너무 실험적이고 이론적인 음식은 대중성이 떨어졌다. 대중적인 맛을 위해 서울의 요리 고수한테 원포인트 레슨도 받았다. 몸에 좋고 가격도 저렴하고 맛도 있는 제철 힐링푸드. 그게 자기가 갈 길이라 다짐한다.14년 전 수성구 범어네거리 근처에서 청아람 한식당을 차린다. 홍합밥에 도전했다. 울릉도에서 우연찮게 만난 홍합밥에 매료됐다. 한 펜션 주인 모친한테 홍합밥 레시피를 전수했다. 당시 계산동 서영, 범어동 울릉도 성인봉, 동성로 왕건이집 등이 홍합밥 3인방으로 유명했다. 홍합밥은 너무 담백해 두끼를 먹으면 금세 질려버렸다. 이를 보완해야만 했다. 흑산도에 있는 지인을 통해 마른 톳을 공수받았다. 홍합에 톳을 섞어봤다. 느끼한 맛이 많이 제거됐다. 밥의 질감도 중요했다. 시행착오 끝에 찹쌀과 멥쌀을 3 대 7 비율로 섞으니 원하던 식감이 형성됐다.홍합밥에 이어 '톳전복밥'도 파생 메뉴로 올렸다. 조미료는 멀리했다. 현미찹쌀가루를 천연 향신료로 활용했다. 청아람은 홍합밥의 강자로 자릴 잡았다. 하지만 몸이 말이 아니었다. 갑상선암에 걸린 것이다. 투병하는 과정에 식당도 지쳤다. 일상에서 한발 물러났다. 항암치료 직후 다시 일어선다. 식당주 대상 요리교실, 그리고 반찬 전문점 '더 찬'을 병행한다. 그동안 내공을 이용해 바지락쑥국 등 무려 200여 가지 반찬을 만들었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자! 지난해 풍광 빼어난 달서구 월광수변공원 옆에 계절밥상 힐링푸드레스토랑 '산내향'을 오픈한다. 제자리로 돌아온 것 같았다. 한식이 뭔가를 아는 중년 단골이 늘어났다. 가성비 탓이다.밥상을 받았다. 부지깽이밥과 톳밥이 꽃처럼 피어 있다. 울릉도 취나물, 숙주나물, 봄동, 세발나물, 달래, 방풍나물, 냉이, 마라황과(오이로 만든 중식 짜샤이 스타일의 짠지), 백김치, 우엉, 멸치볶음, 가지구이, 부지깽이나물과 톳까지. 청아람의 홍합밥 내공이 그대로 전해졌다. 이렇게 차리고도 1만원. 전복과 소고기가 들어간 미역국정식은 1만3천원. 매주 월요일 휴무. 달서구 도원동 수밭동길 14. (053)635-5838 글·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봄맞이 음식 1호는 뭘까. 단연 통영을 축으로 확산 된 도다리쑥국이다. 2월 중순이면 한산도·소매물도·욕지도·추봉도 등 통영 섬 곳곳에서 해쑥이 고개를 내민다. 그게 20년 전부터 도다리를 만나 상춘객의 맘을 설레게 하고 있다. 통영 강구안의 한 식당에서 만난 도다리쑥국.달서구 도원동 산내향의 제철 나물이 합세한 봄밥상 .겨울과 봄을 동시에 만끽하는 포항 호미곶 대보면 포항초(포항 시금치).올해 2월초 첫 하우스 미나리를 출하하기 시작한 달성군 가창면 정대미나리 작목반의 김정복씨(75).보리싹홍어애국
[人生劇場 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대중음악저술가 김형찬(2) 청춘 바쳐 찾아다닌 광기에 가까운 수집벽…다락방 빼곡한 보물 6만여 점
아버지는 평생 외항선을 타면서 마도로스의 삶으로 일관했다. 어머니는 제주도 여자였다. 나름 괜찮게 살았고 중학교 때는 전교 1등도 해봤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과학전집을 독파하여 과학지식도 상당했다. 그래서 중학교 때 학교 대표로 과학실험실습경진대회에 나가 수상하기도 했다. 아버지 피를 물려받았는지 공학도 기질이 다분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뭔가 이상한 물건이 보이면 다 집으로 갖고 왔다. 약병, 스티커, 과자 봉지…. 물건을 보면 그냥 두지 않았다. 라디오와 전축을 모두 분해해 다시 조립할 정도였다. 다들 유능한 기술자가 될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런지 부산 공대 기계과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날부터 괴로운 나날이었다. 난 대학에 들어가서 비로소 수학적 머리가 꽝이란 사실을 알게 된다. 낙제와 유급의 나날이었다. 그래서 전기계열로 갔는데 더 악몽이었다. 유일한 낙은 클래식기타 동아리 활동이었다. 중학교 3학년 때 한 여친으로부터 팝송을 좋아하냐는 말을 듣고 아는 곡이 없어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걸 계기로 팝송과의 전쟁에 돌입한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좋은 곡을 다 녹음했다. 그리고 매주 토요일 캐이시 케이슨(Casey kasum)이 AFKN 라디오를 통해 4시간 진행하던 세계 최고의 팝송 40곡(American top40) 리스트를 모두 녹음하고 라벨을 붙여 나만의 리스트를 만들었다. 장르별로 녹음하기 위해 항상 테이프를 3개 정도 준비해 놓았다. [人生劇場 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풍운아 같은 외길을 가다공대생 박차고 음대생으로 새로운 길서양·국악접목 기타곡 만든 '새야새야'전국 주요 도서관 서가 저인망식 탐색가수 뒷이야기·사진 등 차곡차곡 모아1960~80년대 대중가요 연대기 꿰 차분신 같은 '韓대중음악사 산책' 발간LP·비디오·CD·테이프 디지털화 분주◆이정선의 뭉게구름 고교 시절, 난 한 포크 명인한테 심취된다. 김민기, 송창식, 한대수, 이장희 등보다 단연 이정선이었다. 그는 1974년 첫 앨범(섬소년)에서 모든 곡을 작사·작곡·편곡·노래·연주까지 해버렸다. 그의 음반을 모두 샀다. 악보가 없어서 그 곡을 수십 번씩 반복해 들으면서 오선지에 음표와 코드를 적어나갔다. 그렇게 해서 나만의 이정선 악보집을 갖게 되었다. 그게 정확한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부산진역에서 통일호 완행열차를 타고 상경했다. 이정선이 사는 동부 이촌동의 한 아파트의 초인종을 눌렀다. 시큰둥한 표정의 그에게 다짜고짜 내 악보집을 보여주었다. 크게 반색하지 않았다. 나 같은 광 팬이 한둘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시행착오를 통해 음악이론의 기본기를 축적할 수 있었고 그 여력을 앞장세우고 더 깊은 화성악의 세계로 빠져들었다.그 저력이 대학 클래식 동아리에서 제대로 먹혀들었다. 일단 이정선을 염두에 두고 '뭉게구름'이란 부산 공대 혼성 포크그룹을 결성한다. 황성재, 황성준, 전수경, 이경희, 이선경 등이 의기투합을 한다. 88년에는 전국 대학가에 민중노래패 문화운동이 크게 일었다. 나는 '노래야 나오너라'란 노래패를 결성에 참여해 음악부장을 맡는다. 편곡까지 도맡았다. 부산일보, 대우조선 등 여러 파업현장을 찾아 '광야에서' '그날이 오면' '백두에서 한라까지' 등 민중가요를 많이 불렀다.◆공대생에서 음대생으로 변신그때 서울대 성악과에 다니던 한 친구가 '넌 공대보다 음대가 더 어울릴 것 같으니 말을 갈아타보라'고 권유했다. 찾아보니 국내 음대에서 음악이론만 전문적으로 가르쳐 주는 학과가 거의 없었다. 나는 조곡, 변주곡, 실내악, 소나타 등의 체계적 음악공부를 하며 음악이란 비밀의 문을 열게 되었다. 93년 부산 예술대 음악학과에 입학을 한다. 공대와 작별을 해버렸다. 하지만 당시 학과 분위기는 클래식만을 위한 학과였고 일반 저잣거리의 대중가요는 금기시했다. 나는 학기마다 작곡 발표 시간을 통해 새로운 개념의 기타곡을 발표했다. 94~96년 3번의 '기타를 위한 실험 시리즈'였다. 기타로 구현할 수 있는 온갖 소리를 악보로 나타냈다. 특히 서양음악과 동양음악(국악)의 통섭을 시도했다. 서양음악의 골격에 국악의 색깔을 입혔다. 대표적인 곡이 '기타를 위한 실험3-새야새야'다.◆결혼해도 백수 상태이에 앞서 90년 결혼을 한다. 하지만 난 직장생활은 언감생심. 생활비는 오직 아내의 몫이었다. 나는 서울대 대학원 진학을 위해 올인해야만 했다. 분위기를 익히기 위해 매주 월요일 학부 강의를 들으러 서울로 갔다. 막차를 타고 가면 서울역엔 새벽에 도착한다. 그렇게 무박 2일의 청강의 나날이 무려 2년이 지속된다. 하지만 서울대 입성은 이런저런 제약조건 때문에 불발로 끝나고 만다.이때 내 앞에 나타난 두 음악평론가가 있다. 바로 강헌과 임진모. 두 사람은 한국 대중음악계의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 같은 분이다. 두 사람의 집을 다 방문해 그들이 축적한 음악에 대한 여러 콘텐츠를 벤치마킹했다. 강헌의 수업이 있으면 모두 챙겼다. 둘의 장점과 단점을 취사선택하면서 나만의 라인을 정리해나갔다.1997년 한국종합예술학교 음악원에 입학한다. 그때부터 2010년 부산으로 내려오기까지 나는 대중음악 관련 자료 더미 속에서 살아야만 했다. 논문의 제목은 '한국 초기 포크음악의 사적연구'. 1960~70년대 관련 자료를 샅샅이 뒤졌다. 일단 국립중앙도서관, 국회도서관 등 전국 주요 도서관 서가를 저인망식으로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대중음악 관련 수집 카테고리를 작성했다. 그리고 인용할 내용을 보면 일단 대학노트에 개괄적으로 적고, 그걸 집에서 목록작업을 했다. 색인한 걸 다시 새로운 공간에 배열을 했다. 하나의 팩트가 3개의 다른 차원으로 쌓여나갔다. 1만장 작업하면 망가지는 스캐너를 종류별로 6개를 갖고 있었다. 가수별 색인박스를 만들었다. ◆자료는 나의 생명월간 팝송, 음악세계, 뉴팝스, 빌보드, 뮤직라인, 팝스 코리아나 등 국내 유통되던 그 시절 주요 팝송 잡지를 움켜쥐었다. 대중가수의 뒷이야기 보고인 선데이서울, 명랑, 아리랑, 여원, 로맨스 등 주·월간지를 정독해나갔다. 진귀한 대중가수의 얼굴 사진과 관련 기사 등을 차례로 복사했다. 아침이슬의 김민기 항목에 들어가면 모두 36장의 이미지가 있다. 그의 결혼식 사진, 그리고 86년 그가 잠시 서울미술관에서 기획일을 하게 됐다는 기사도 확보하게 됐다. 음악 영화 자료도 놓칠 수 없었다. 싸이와 방탄소년단이 빌보드에 입성한 기념비적 자료도 금쪽같은 역사적 자료였다. 자료 때문에 TV를 봤다. 가요무대, 노영심음악회 등 주요 음악 프로그램을 모두 녹화를 했다. 그렇게 해서 수집 된 비디오 테이프가 1천개가 넘어섰다. 3천여 장의 CD, 300여 권의 가요책, 뿌리깊은나무, 마당 등 전통문화 관련 잡지, 500여 권의 대중음악 전문서적, 그리고 소녀시대 멤버 얼굴이 들어간 비타500 박스, 심수봉 얼굴이 들어간 부산 소주 '좋은데이', 소녀시대 쇼핑백, 아이유가 모델로 들어간 프라이드치킨 박스, 최근에는 코로나 바이러스 백신 케이스까지 다 챙길 정도다. 정말 르네상스 맨에 가까운 광폭한 수집의 범주를 갖게 됐다. 지금도 다락에 올라가면 돌탑처럼 쌓인 복사물 더미가 나를 설레게 한다.◆나는 이제 바다에 도착했다논문이 나왔다. 다들 '박사학위급'이라고 칭찬해주었다. 하지만 도무지 취업이 되지 않았다. 내심 대중음악 전문 박물관의 큐레이터 정도를 기대했지만 그건 혼자만의 몽상이었다. 다들 내 콘텐츠에는 동의는 하면서도 선뜻 나의 콘텐츠를 품어주는 기관도 사람도 없었다. 대중음악을 위해 무리할 필요는 없다는 게 의사결정권자의 대체적인 의식이었다. 나는 절망을 하고 자료를 챙겨 부산으로 내려왔다. 93년 음대에 입학해 2015년 기념비적인 한 권의 책이 나오기까지 22년 세월이 흘러갔다. 나는 누군가 해야 될 일을 목숨 걸고 완수했다. 지금도 하루 10시간 정도는 자료에 파묻혀 산다. 공학도로서의 꿈은 좌절되었지만 허튼 세월을 보낸 것은 아니었다. 매달 10만원을 투자해서 구입한 기록매체에 LP·비디오 CD·방송녹음테이프의 내용을 기록하거나 디지털화를 시도했다. PC에 CA-TV, 비디오 재생기, 앰프, 카세트 플레이어 등을 연결해서 모든 소스를 디지털화하며 공부를 했다. 평소 공학도로서의 기계에 대한 관심 때문에 이 모든 과정을 재미있게 해냈다. 생각해 보니 10대 후반부터 시작된 음악에 대한 몰두가 실개천에서 하천으로 강으로 불어나 이제 종착역인 바다를 앞에 두고 있다는 느낌이다. 가슴이 벅차오른다.언젠가 세상은 희귀해진 20세기 대중음악사의 연대기를 알기 위해 나를 러브콜 하게 될 것이다. 나는 그때까지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의 콘텐츠를 공유해주면서 나머지 32권의 대중음악 백서 시리즈를 완간할 것이다. 한 번밖에 없는 삶, 미련도 후회도 없다. 글·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청춘을 바쳐 수집했던 귀중한 시청각 자료가 산더미처럼 아카이빙 돼 있다. 족히 6만여 점이 된다. 여느 박물관, 자료관, 기념관 등에 비해 공간은 좁지만 그 내용의 질과 양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손때가 묻은 자료 목록집. 석사 논문 하나를 위해 저만큼 많은 자료를 찾아냈을 그의 열정. 언젠가 빛을 보게 될 것이다.알마 출판사에서 펴낸 '한국대중음악사 산책'(1960~70년대 대중음악의 결정적 장면들)이다. 나름 기념비적이라 자부한다.백수 신세라 틈이 나면 우쿨렐레 레슨, 원고료 등으로 생계를 잇고 있다. 하지만 생계의 대다수는 아직 아내가 책임지고 있다. 내 분신 같은 작업의 첫 결과물이 2015년 9월에 나왔다.
[人生劇場 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대중음악저술가 김형찬(1), 한국 대중음악 연대기 25년간 돌탑처럼 쌓다
몰입과 쏠림. 비슷한 것 같지만 실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몰입은 뭔가에 홀려야 작동되고 쏠림은 일종의 '결핍'의 연장이랄 수 있지. 한 시절 몰입은 가능하지만 평생 몰입은 너무 어렵다. 그건 성인(聖人)의 반열에 들어야 가능할 것 같다. 영혼과 육신이 오직 하나의 숭고한 가치를 향해 올인했을 때만 피어날 수 있는 거다. 절망이 희망으로 작동되는 천의무봉의 경지랄까. 예술도 혁명도 그 범주에서 파생되리라.나는 대중음악저술가 김형찬(61). 그냥 무늬만 저술가가 아니다. 이름에 걸맞은 안목을 위해 대학원에 들어가서 음악이론을 전공했고, 실제 프로급 연주도 하고, 그 대중음악을 에워싼 대중문화의 연대기 관련 거의 모든 자료를 찾아 25년 세월을 풍운아 같은 외길을 걸어왔다. 광기에 가까운 수집벽, 그리고 한번 목표를 설정하면 절대 포기하지 않는 끈기, 그리고 세상사를 한 걸음 뒤에서 볼 수 있는 나름 태평스러운 안분자족의 기질, 이 셋이 잘 연결된 탓에 나는 한국에서 가장 낯설고 척박하고, 그렇지만 가장 귀한 특수한 행로의 삶을 살고 있다. 당신의 꿈은 뭔가? 누가 그렇게 물으면 이렇게 대답해주고 싶다. '한국 대중음악 연대기를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버전으로 완성시키는 것'. 나는 광장의 인문학보다 '골목의 인문학'에 천착하기 위해 태어난 모양이다. '골목'이란 뭔가? 그건 달의 그림자 같은 것. 그 골목문화가 거느리고 있는 것 중 하나가 교과서와 대척점에 있달 수 있는 선데이서울 같은 통속스러운 잡지다. 문장보다는 낙서 같은 거. 광장이 클래식을 잉태했다면 골목은 대중음악을 낳았다. 바로 그게 '유행가'다. 광장이 관공서 차지라면 단연 골목은 집을 품고 있다. 골목을 무시하면 삶은 껍데기에 불과하다. 아티스트가 아니라 그냥 '딴따라'의 한숨 같은 것, 난 그게 좋다. 지난 한 세기 유행가 가사만 챙겨도 20~21세기 한국인의 욕망과 좌절과 위로의 행간을 삼국유사 버전으로 정리할 수 있다.나는 모난 게 좋고 찌그러진 게 좋다. 밝고 반듯하고 휘광스러운 건 싫다. 신제품보다 중고가 좋다. 달동네를 품은 골목이 딱이다. 지금 내가 꼭 그런 데서 기거한다.부산 중구 범천동의 한 달동네, 볕도 잘 들지 않는 고시원 쪽방만 한 곳에 배수진을 쳤다. 장모가 세상을 떠나기 전 머물렀던 좁디좁은 공간이다. 벽에는 쥐오줌·곰팡이·빗물 자국이 흥건하다. 겨울이 와도 생활비를 아끼기 위해 난방조차 거의 하지 않는다. 하하하~. 일상은 어둑하지만 가슴은 항상 활화산이다. 나를 기죽게 할 수 있는 일상은 없다. 나는 가난 모드로 내 삶을 배수진 쳐버렸기 때문이다. '한 인생 조진 셈 치자'. 약해질 때마다 나는 나를 그렇게 다독인다.내 방안에는 진귀한 대중음악 자료가 광활하게 정리돼 있다. 청춘을 바쳐 수집했던 귀중한 시청각 자료가 산더미처럼 아카이빙 돼 있다. 족히 6만여 점이 된다. 여느 박물관, 자료관, 기념관 등에 비해 공간은 좁지만 그 내용의 질과 양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모르긴 해도 1960~80년대 웬만한 대중가수의 연대기는 내가 다 꿰고 있다고 자부한다. 짜잔~, 내 분신 같은 작업의 첫 결과물이 2015년 9월에 나왔다. 알마 출판사에서 펴낸 '한국대중음악사 산책(1960~70년대 대중음악의 결정적 장면들)'이다. 나름 기념비적이라 자부한다. 이 책의 서두에 이런 말을 읊조렸다. 50년대부터의 일간지, 주간·월간·화보집을 저인망식으로 읽고 자료를 수집하는 과정에 알게 된 것이 하나 있다. 이제까지 한국대중음악을 다룬 어떤 글에서도 당대의 자료들을 제대로 다룬 적이 없으며, 대부분의 글들이 피상적으로만 저술되었다는 것이다. 왜 아직 이 정도 수준인지 이해하는 데도 오랜 세월이 걸리지 않았다. 학계에서는 대중음악에 관심이 없거나 있더라도 이른 시일 내에 성과를 요구하는 분위기이기 때문에 기초 토대에 관한 장기적인 연구는 설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한 번 사는 인생인데 하고 싶은 일을 할 수만 있다면 굶어 죽어도 좋다는 생각이었다. 이런 무대뽀 인생관과 아내의 경제적 뒷받침이 결합, 드디어 미개척의 신천지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글·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나는 부산 중구 범천동 달동네 옴팡집에 산다. 하지만 그 안에 있는 대중음악 관련 자료는 우주만큼 넓다. 내 방안에는 진귀한 대중음악 자료가 광활하게 정리돼 있다. 국립중앙도서관 등을 뒤져 복사해 둔 자료 더미(오른쪽 위 작은 사진).
대구시낭송학교 수강생모집
대구시낭송협회(회장 이유선)는 시 작품을 소리 에너지로 전환함으로써 새로운 감동을 선사하게 될 시 낭송학교 수강생을 모집한다. 강좌를 통해 시극, 시퍼포먼스, 시 뮤지컬 등 시낭송의 여러 테크닉을 입체적으로 배울 수 있다. 과정을 수료하면 <사>녹색문화콘텐츠개발연구원 및 한국직업능력 개발원에 등록된 시낭송2급 자격증을 부여한다. 개강은 3월 마지막주 예정. 시낭송학교 프로그램은 12강 (1주 2시간씩)으로 구성된다. 수강료 15만원.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이춘호 전문기자의 푸드 블로그] 부산 자갈치시장 연탄 별미 (하) 양곱창
대구만큼이나 내장(소양·막창·곱창류) 요리에 사족을 못 쓰는 고장이 부산이다. 대구는 곱창·대창·소양이 따로 놀지만 부산은 한 세트로 붙어 다닌다. 그래서 붙여진 '양곱창'. 소의 첫 번째 위장인 '양'과 작은 창자인 '곱창'을 붙여 양곱창이라 한다. 소의 위는 네 개인데 제1 위는 양, 제2 위는 벌집, 제3 위는 천엽, 제4 위는 홍창(막창). 특히 소의 막창은 위의 일부분인데 이는 대창과 소창(곱창)과 헷갈리게 만든다. 미식가는 네 장르로 구역 지어진 소양이 갈빗살, 안심, 등심보다 더 열광한다. 특유의 쫄깃한 식감 때문이다. 특히 제1 위의 앞쪽 두툼한 부위를 '양깃머리'라 한다. 구워놓으면 꼭 조개관자 구이 맛이다. 이밖에 삶아 놓은 갑오징어 같은 질감인 오드레기(대동맥)와 차돌박이(양지머리뼈의 한복판에 붙은 기름진 고기)까지 가세하면 별미 중 별미가 완성될 듯하다.아무튼 부산 남포동은 양곱창 총사령부다. 자갈치농협 뒷골목을 시작으로 자갈치로 59번길 350여m 세 블록에 걸친 골목 50여 업소가 집단을 이루며 개별로 영업하는 '코너'까지 합치면 250~300곳. 양곱창 '단일 품목' 식당가로는 전국 최고다. 지금은 서면, 문현동, 해운대, 대연동 등 부산 전역을 찍고 서울 등으로도 진출했다. 하지만 제주도, 전라도, 충청도, 강원도 등은 이 메뉴가 무척 낯설기만 하다. 대신 부산·경남권, 인천, 울산 등 광역시급 도시인에겐 스트레스를 날려주는 술안주로 공유되고 있다. 대구의 경우 수성구 '봉희가든' '봉이돌양곱창', 2001년 범어네거리로 입성한 '부산양곱창' 들안길 '양곱화' 등이 세몰이를 하고 있다.◆원양 선원의 유토피아자갈치 뒷골목은 한때 '마도로스 골목'으로 유명하다. 원양 선원들이 배에서 내려 술로 목을 축이던 공간이었다. 맥줏집과 작부 집으로 흥청대던 곳이었다. 만선의 배에서 내릴 때 선원들의 씀씀이는 대기업 임원 못지 않았다. 그 돈이 온전히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긴 쉽지 않았다. 다들 양곱창 골목에 있던 유흥가에서 돈을 탕진했다. 그래서 '원양어선 호주머니 돈은 먼저 본 사람이 임자'란 말이 생겨났다. 망망대해를 돌아들던 선원들은 생선요리에 질려 있다. 양곱창은 싸고 맛있는 단백질. 하선하기 무섭게 먼저 이곳에서 짠물에 절은 목젖을 씻었다. 바다로 떠날 때도 바다에서 육지로 돌아올 때도 어김없이 양곱창에 젖어 들었다. 세상 시름을 잊게 해준 위안과 위로의 안주였던 것이다. 선원들은 물론 인근 관공서 공무원들도 단골이었다. 대구 사내들이 소주 한 잔에 뭉티기 한 점으로 활력소를 찾는 것과 같은 방식이었다. 어쩜 부산의 '아지매 기질', 대구의 '단디 정신'도 일반 음식보다 어둑한 뒷골목에서 낚아 올리는 안주에서 기인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일본인 기생관광1990년대 들어 엔고(円高) 시대가 무르익자 난데없이 일본인들의 부산 방문이 잦아진다. 이른바 '기생관광'이라는 음성적 관광이 맞물려 돌아가던 시절이다. 이때 일본인들이 빠지지 않고 들르던 곳 또한 양곱창집이었다. 그 음식은 일본에서는 '호르몬야키'라 한다. 당시 일본 남성들에게는 '정력식품'으로 알려져 있었다. 동행한 부산의 대표적 음식칼럼니스트인 최원준 시인이 부연 설명을 해준다. "이 속설의 시작은 일본 관동대지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많은 일본인이 굶어 죽었는데, 조선 사람들은 통통하니 살이 올랐다는 목격담이 돌았다. 전후 일본 식품학자들이 연구해보니 당시 일본인은 먹지 않았던 양곱창에 우수한 영양 성분이 다양하게 함유돼 있었고 그래서 양곱창은 재일동포들이 즐겨 먹던 음식이 된다."자갈치 뒷골목 일대 250~300곳 영업양곱창 단일품목 식당가로 전국 최고육지 내린 원양 선원들 위로의 안주70년 세월 터줏대감 장사 백화양곱창양 씹히는 맛·곱창 기름맛 조화 '환상'마늘양념 소스 버무려 굽는 소금구이 고추장 버무려 돌판 올리는 양념구이먹고 남은 양곱창에 밥·양파 넣고 볶아그 뒤 일본의 규슈와 히로시마를 중심으로 일본인도 양곱창 요리를 보양식으로 널리 먹는다. 그런데 일본에 비해 부산 현지 양곱창은 가성비가 너무 좋았다. 자연 일본인의 필수 관광코스가 될 수밖에. 그런데 1980년대 전후 수산업 경기가 안 좋아졌고 이 골목은 양곱창집으로 하나둘 업종을 변경해 오늘에 이른다. 2000년대 접어 들어 부산국제영화축제, 먹방과 쿡방 덕분에 대중화 과정을 거치면서 지금의 양곱창골목이 본격적으로 형성되고 남녀노소 즐겨 먹는 부산의 대표 음식 중 하나로 널리 알려지게 된다. 남구 문현동의 곱창 골목에 있는 '칠성식당'은 2001년 영화 '친구' 때 알려져 핫플레이스가 된다.◆터줏대감 백화양곱창을 찾아서가장 오래된 곳은 1952년 영업을 시작한 백화양곱창. 주인이 여럿이 있다. 흡사 스탠드바처럼 모두 11개 업소가 코너 장사를 하고 있다. 여긴 손님을 모시는 원칙이 있다. 호객 행위가 비효율적이라 생각한 모양이다. 일단 단골은 터치하지 않는다. 자기가 원하는 테이블에 앉게 해준다. 하지만 일반 손님은 안내인이 순서대로 가게를 배정해 준다. 터줏대감이랄 수 있는 김초달 할매. 그는 자갈치아지매의 상징과 같은 존재이자 이 골목을 찾는 시름 많은 남정네들에겐 '대모'와 같은 존재였다. 김 할매의 가업을 혈족들이 잇는다. 셋째딸인 이구자, 그 큰딸 김시은은 이후 1호 사장, 작은딸 김예숙은 6호 사장, 1호 사장의 넷째아들 최정은은 현재 체인점인 '이구자양곱창'을 꾸려가고, 6호 사장 아들 김범직은 서울에서 태극음식 전문점 셰프를 하다가 귀향해 코너를 도와주고 있다. 자갈치가 알아주는 백화양곱창 패밀리인 셈. 바로 옆 대광곱창 등 주변 다른 가게도 40~50년은 족히 됐다. 오후 4시쯤 6호 가게에 첫 손님으로 앉았다. 양, 곱창, 대창, 염통이 4인 1조로 굽힌다. 불판에서 초벌, 석쇠로 옮겨져 재벌이 된다. 대구 뭉티기 양념장 같은 마늘에 참기름을 두른 소스가 맛의 중심을 잡아준다. 마늘 향과 곱창의 기름내는 환상의 복식조. 양의 가장 두꺼운 부위인 양깃머리는 관자보다 더 쫄깃했다. 대창의 곱은 참기름보다 더 구수하고…. ◆중독성 강한 디저트~ 볶음밥현장에 오기 전 기자는 백화가 단일 가게인 줄 알았다. 그런데 여럿이 모여 있어 무척 놀랐다. 가게 전체가 기름 범벅이 된 듯하다. 몸에 나쁜 기름기라 하지만 여기 오면 다들 기름 맛에 환장한다. 그 맛을 위해 가스가 아니라 연탄불을 사용한다. 양과 곱창, 그리고 염통이 세트로 움직인다. 양은 씹히는 맛, 곱창은 기름 맛, 그리고 염통은 기름 범벅된 혓바닥을 맑게 중화시켜준다. 곱창은 시각적 효과와 풍미를 위해 장만하는 과정에 뒤집힌다. 일반인들은 그걸 알 리 없다. 원래 꽈리처럼 곱창에 매달린 지방 부위가 곱창의 겉을 감싸고 있다. 그런데 업자들이 최강의 맛을 위해 안팎을 바꿔놓은 것이다.여긴 정해진 거리가 없다. 손님끼리 엉덩이가 맞닿는 걸 당연시한다. 환풍기가 쉴 새 없이 돌지만 자욱한 연기는 빠질 줄 모른다.수십 년 기름기가 식탁과 테이블, 천장 등에 가득 엉겨 붙어 있다. 깔끔 떠는 사람들은 기름기 줄줄 흘러내리는 실내 공기가 부담스러울 것이다. 뭐랄까, 경상도 사람이 처음 마주하는 삭힌 홍어 맛과 비슷한 '난감함'일 것이다. 하지만 한두 번 길들여지면 기름 부위를 밥처럼 마구 퍼먹을 것이다. 연탄불에 달궈진 기름 덩어리는 그래서 더 '치명적 유혹'이다.소금구이는 마늘양념 소스에 버무려 석쇠에 굽고, 양념구이는 고추장 양념을 해 돌판에 굽는다. 양곱창과 밥, 양파 등을 넣고 볶아주면 볶음밥이 된다. 먹고 남은 양곱창은 일본 요리 타다키처럼 잘게 다져 볶음밥으로 먹었다. 소금구이의 고기가 남으면 볶음밥으로 먹고, 양념구이는 국물에 우동사리를 넣어 비벼 먹었다. 지금은 남은 양곱창을 그대로 볶아 김에 싸 먹는 것을 별미로 친다.내가 최 시인을 바라 보며 '양곱창 엄지척~' 하니 그는 '대구 뭉티기 최고' 라고 화답한다. 밤의 그 골목이 곱창 같았다. 글·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 도움말=음식칼럼니스트 최원준 시인자갈치시장 뒷골목에 자리한 양곱창 골목의 터줏대감인 백화양곱창, 그 6호집의 식탁 정경. 초벌(사진 오른쪽)과 재벌을 통해 먹도록 해준다. 소양·곱창·염통이 한 세트로 불판에 올라간다.자갈치 뒷골목은 한때 '마도로스 골목'으로 유명하다. 원양 선원들이 배에서 내려 술로 목을 축이던 공간이었다. 맥줏집과 작부 집으로 흥청대던 곳이었다. 만선의 배에서 내릴 때 선원들의 씀씀이는 대기업 임원 못지 않았다.기름(지방)의 맛이 어떤 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불꽃 속 곱창.남은 양곱창을 그대로 볶아 김에 싸 먹는 것을 별미로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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