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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춘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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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牲劇場 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예재창 소극장 '달과 함께 걷다' 대표(1)...대구경북 첫 사회노래패 30여년 이끌며 자급자족 마을축제 운동가로 살았다
'생존공동체'가 긴 여정을 마치게 되는 종점은 모르긴 해도 '문화공동체'가 아닐까 싶다. 지금껏 별별 문화공동체가 명멸했지만 나는 자급자족이 가능한 늘 푸른 축제가 있는 '마을(골목)생활공동체'를 꿈꾸며 살아간다. 예전 한민족이 산업사회로 건너오기 전 가동됐던 두레·품앗이 정신이 그 안에 빼곡하게 스며 들어가 있는 공동체 말이다. 지금 우리의 불행은 뭔가? 더 많이 갖고 있음에도 도무지 만족하지 못하는 대책 없는 불안 아닌가. '그 두려운 가슴에 연초록 카타르시스를 불어넣어 주는 그 뭔가'가 있어야 된다. 그게 바로 '마을축제'가 아니겠는가. 문화예술이 일상과 버무려지게 만들고 주민이 예술가로 변신토록 도와주는 것이다. 하지만 작금의 축제는 하위상달이 아니라 거의 '상위하달'이고 '소모적'이다. 정부의 각종 예산이 '문화꾼'한테 휘둘린다. 전시용으로 달달하고 트렌디한 콘텐츠를 백화점식으로 나열해 놓는 것으로 끝이다. 유명 방송연예인들이 축제를 좌지우지한다. 동원형 축제이기 때문에 거금을 주고서라도 인기 절정의 누군가를 데려오는 것이다. 그래서 엇비슷한 행사만 있을 뿐 주민의 동참은 언감생심, 축제가 사라지면 관계자들도 약속이나 한 것처럼 뿔뿔이 흩어져 버린다. 소시민들에게는 '너무나 먼 당신' 같은 각종 축제들. 지금도 문화행사는 복부 비만이 걸렸다고 할 정도로 흘러넘치고 있지만 서민과의 접점은 너무나 멀기만 하다. 나는 자발·자립·주체적인 마을축제 운동가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예재창(51)이다. 문화사업과 문화운동가의 노정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늘 참담하다. 살림을 거덜내지 않으면 빚만 떠안고 행방불명이다. 다들 시작할 때는 청운의 꿈을 품는다. 하지만 중간에 확인해 보면 다들 넉아웃돼 있기 십상이다. 하지만 나는 30여 년째 이 짓을 하고 있다. 당연히 생계의 맨 밑바닥에 있지만 그래서 더 하고 싶은 짓을 맘껏 저지르고 살아간다.1970~80년대 청년문화금지곡·대학마다 민중 노래패 등장대중적 인기 '노래를 찾는 사람들' 대구 대학가서도 같은 흐름에 편승30여년 민족·민중예술의 길 대구서 출범, 내 삶의 화두 '소리타래'지역 문화운동 도약대로 공동체 운명90년초 사회노래패 건설준비위 활동대구경북 문화운동 운명속 뛰어들어연극 배우·사회 운동가·풍류 대장 전방위 문화쟁이 아내와 함께 여정30년 전 '참세상, 그리고 열린노래, 민족·민중예술'이란 모토를 갖고 대구에서 출범한 지역의 첫 노래패 격인 '소리타래'. 그게 내 삶의 최강 화두다. 그걸 아직 품고 있다. 대표 머슴이 돼 소처럼 우직하게 몰아가고 있다. 연극배우, 소리꾼, 풍류대장, 그리고 사회운동가의 유전자를 갖고 살아오던 전방위 문화쟁이 문경빈, 지금 내 아내가 돼 있다. 내 각시가 안 됐다면 심산유곡 암자에서 비구니의 길을 걷고 있을지도 모를 '말릴래야 도무지 말릴 수 없는 쟁이'다. 생존의 바닥을 쳐도 별로 애달파 하지 않는 아내. 재거나 따지지 않고 오직 내 호흡대로 살아가는 나를 '부처'라 불러준다. 닦달하거나 바가지를 긁지 않는다. 덕분에 나는 한없이 천하태평일 수 있다.김민기·한대수 등이 주도했던 1970년대 청년문화는 1972년 10월유신, 그리고 뮤지션에게 치명타였던 1975년 대마초 파동, 금지곡 계엄령 등으로 인해 청년문화는 공중분해되는 과정에 등장한 방송국 주도의 대학 가요제로 후퇴된다. 1984년부터 각 대학을 축으로 신개념 민중노래패가 우후죽순처럼 등장한다. 서울대 메아리, 고려대 노래얼, 이화여대 한소리, 성균관대 소리사랑, 그리고 1984년 등장한 가장 대중적인 포스를 가진 '노래를 찾는 사람들' 등이다. '하얀 공장 하얀 불빛 새하얀 얼굴들 저물고 저물도록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란 소절이 암시하듯 전태일 열사의 기운이 담긴 파업가 성격의 노래 '사계'를 비롯해 '광야에서' '그루터기' 등은 노찾사의 얼굴과 같은 곡이다.대구 대학가도 이 흐름에 편승한다. 1990년 '대구경북지역 사회노래패 건설준비위원회'를 거쳐 1991년 9월 소리타래가 창단 공연을 신호탄으로 노래를 통해 사회변혁을 주도해나간다. 허나 용두사미적 흐름이었다. 그 많은 사람이 처음에는 용암처럼 모여들었다가 채 3년도 안돼 제 갈 길을 가버렸다. 계속되는 이합집산의 나날들. 현재 나와 조원주(보컬과 색소폰 파트)·김학수(기타)가 식구로 남았다. 소리타래는 지역 문화운동의 도약대였고 새로운 공동체운동의 신호탄이었다. 나는 그 용광로 안으로 불쏘시개처럼 뛰어내렸다.1989년 경북대 공과대학 전자공학과에 입학했다. 음악을 좋아했던 나는 경북대 통기타 동아리 '청음반'에 매료돼 버렸다. 입학식도 하기 전에 동아리 입단원서부터 썼다. 그 시기 나는 맹했다. 소위 말하는 민중음악, 데모음악 등은 한 번도 접해 보지도 못했다. 지금처럼 민족·민중예술의 길로 30년을 보낼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1년의 청음반 활동을 마치고 2학년에는 경북대 공대 대표 록밴드 '일렉스'에 들어간다. 입대를 위해 휴학하던 중 경북대 북문 근처 레스토랑 '힐탑'에서도 일하게 됐다. 어느 날 한 무리의 손님이 들어왔다. 청음반 선배들이었다. 그들은 군부독재에 맞서기 위한 수단으로 노래패 결성의 필요성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노래패는 대학가요를 위해 급조된 겉멋 든 캠퍼스밴드와는 차원이 달랐다. 나는 그게 무슨 음악인지도 모르면서 그냥 끼워달라고 했다. 나는 1990년 가을이 넘어가는 무렵 '대구 경북지역 사회노래패 건설준비위원회'의 막내로 활동하게 된다. 이에 앞서 1980년대 지역에 민중음악 선배격인 노래패가 있었다. 바로 '산하'였다. 개인적으로 산하의 유완순 선배의 곡인 '들꽃그대'라는 노래를 아직도 흥얼거릴 만큼 좋아한다. '밤새워 내린 비…비바람 속에서…그대는 무사한가…저 아침햇살처럼 무사한가…'.사회노래패 건설준비위원회에서 노래패 이름을 '소리타래'로 정한다. 본격적인 활동을 하기 시작한 건 1991년 초였다. 그해 9월 창단공연을 했다. 특히 노래패 건설준비위원장이었던 도진형 형은 위암 투병 중에도 항상 내 손을 잡아주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내가 첫 휴가를 나왔을 때 형님은 이미 지리산 백무동에 낮은 돌무덤으로 계셨다. 형의 빈 자리를 새로이 튼튼히 메워 주신 분은 다름 아닌 박재욱 형이었다. 두 분은 비단 음악의 영역만이 아닌 전 예술분야에 걸쳐 지역 민족·민중예술에 지대한 공헌을 하셨다. 글·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人牲劇場 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예재창 소극장 '달과 함께 걷다' 대표(2)에서 계속됩니다.30년째 민중노래패 소리타래의 명맥을 이어오면서 새로운 마을생활공동체 일환으로 안심 온마을축제와 생태예술제를 재능기부 연주단체 관계자와 손을 잡고 성공적으로 일궈낸 문화운동가 예재창 소리타래·소극장 '달과함께걷다' 대표. 2005년부터 운영하기 시작한 동구 지역의 민간소극장 1호가 된 '달과함께걷다'는 커피향이 흐르는 주민들의 문화사랑방 구실을 한다. 김민기 톤의 민중가요를 부르고 있는 예 대표의 표정에서 험난한 길을 걸어온 문화운동가한테서만 느낄 수 있는 곡직스러운 성정이 감지된다.소리타래 공연 장면. 왼쪽으로부터 기타리스트 김학수, 보컬 조원주·예재창, 그리고 드러머 석경관.연극배우, 소리꾼, 가야금 연주자, 풍류대장, 그리고 사회운동가의 유전자를 갖고 살아오던 전방위 문화쟁이 문경빈, 지금은 예 대표의 아내가 되어 있다.
"영토의 주인이 된다는 건, 그대에게 이로운 건가 불리한 건가"
오 그대, 진정 호랑이든가! 너는 진정 무섭고 두려운 존재이든가. 으르렁~, 그대는 결코 아니라고 말한다. 그대는 여느 동물이 아니지. 오로라처럼, 은하수처럼 광휘로움과 성결함을 간직한 도도하면서도 지극히 외로운 동물. 덕분에 그대의 표정은 전인미답의 원시림 같았지. 깊이가 최고조에 달하면 두려움 비슷한 광채가 부처의 후광(後光)처럼 다가서고. 너는 우주 저 멀리서 유성처럼 지구로 날아들었어. 그대한테서 발견되는 무섭도록 균정한 위엄. 그건 결국 자연이 대지의 생태계를 질서있게 선순화시키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건가. 수십만 명에게 매달 봉급을 줘야 하는 메이저급 CEO한테서 느껴지는 사려 깊음과 모험, 그리고 강단. 하늘은 대지의 살림에 제대로 관여할 수 없지. 그럴 때 너는 시베리아 제사장처럼 하늘의 천명을 재빨리 간파해내지. 번개와 천둥을 눈빛과 포효로. 그래서 너는 세속의 동물이 아니라 하늘의 기운을 위탁 경영하는 불가항력의 상징인 거야. 그대에겐 동서남북 모두가 외로움. 따지고 보면 인간의 역사라는 게 '외로움을 피하기 위한 방편의 역사'라면, 호랑이의 역사는 외로움을 전제로 한 '야성(野性)의 역사' 아닌가. 호랑이, 그대를 해칠 수 있는 다른 맹수가 과연 존재할까? 사자도 있고 표범도 있고 치타, 하이에나, 악어 등이 있지만 맹수 중 맹수는 단연 그대였지. 사자처럼 너저분하게 먹이 사냥을 대놓고 하지 않아. 감쪽같이 나타났다가 신령하게 사라져버려.어떤 영토의 주인이 된다는 것, 그게 그대에겐 이로운 건가 불리한 것인가. 만약 그대가 없다면 하부의 생태계 균형도 단번에 파괴될 것이야. 그대는 자기 영토에 필요한 호랑이 숫자를 단번에 간파해내지. 적절한 호랑이 개체 수, 그대는 자기한테 허락된 먹잇감만 먹어치우고. 부족하지도 남아돌지도 않게 생태계를 핸들링하지.외로움한테 내몰리면 거의 모든 인간은 몇 가지 방편 뒤에 숨을 수밖에 없어. 우선 가족과 친척, 친구 등으로 '인연이란 장막'을 구축하지. 그리고 이성과의 사랑, 주색잡기에 빠져드는 일이지. 하지만 그건 제 근육이 제대로 가동할 때만 가능한 일. 늙고 병든 뒤 다가서는 무료함을 동반한 막막한 외로움, 그건 무리 지어 살아가야만 하는 인간에겐 치명적일 수밖에 없어. 하지만 예술로 내몰린 아티스트에겐 외로움이 창작의 핵이랄 수 있지. 그대도 자신만의 예술을 실천하고 있는 셈이랄까. 그대는 사람한테 제대로 노출되지 않아. 먹이사슬의 최상층부에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 건가. 그것은 먹이사슬의 하층부를 이루는 군집된 무리와 달리 실로 외로움과 고독의 정점을 찍는다는 것. 비로소 자기 내면의 경계를 보게 되고 그럼 외부로 향하던 온갖 호기심과 욕망도 무력해지게 되고, 결국 자신이 자기를 딛고 이윽고 자기와 연결된 우주의 접점을 발견하게 되지. 비로소 모든 걸 관망할 수 있는 평화로움을 체득하게 되는 거지. 우린 모든 인문학을 동원해도 중력계를 벗어나 심우주로 연결되는 '유니버셜 조인트(Universial joint)'를 결코 볼 수 없어. 하지만 그대의 블랙홀 같은 동공을 보면 어쩜 그 망막의 한 소실점이 유니버셜조인트일 것 같아.다시 호랑이. 우린 그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어. 우리 인식은 고작 최상위 포식자급 맹수로만 기억하지. 무고한 사람을 물어 죽이는, 호환(虎患)의 장본인으로 지목하기도 하지. 하지만 그의 정면 표정을 응시해봐. 절정을 아는 자만이 지니고 있는 쓸쓸함 같은 게 느껴져. 최강의 송곳니를 갖고 있는 그대. 측정 불가의 동공의 깊이, 폭풍전야의 정적감, 그건 이승이 아닌 저승의 시간을 서성거리는 듯해. 한겨울 백두산 천지의 얼음장이거나 태백산·지리산·설악산 정상부에 있는 고사목과 주목의 기세도 간직하고 있어. 짝짓기 순간을 제외하곤 태산급 바위처럼 홀로 독존(獨存)해. 그건 과연 호연지기일까, 아니면 초연(超然)의 경지일까? 신년 첫 위클리포유 사진은 동구 아양아트센터에서 기획한 호랑이그림전 모둠사진을 독자제현께 올리는 바다. 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동구문화재단 아양아트센터(관장 김기덕)가 새해 띠를 주제로 한 '새해 맞이전'을 2009년부터 매년 연말과 연초에 걸쳐 진행해 왔다. 올해에도 지난달 28일 오픈해 오는 11일까지 전시된다. 참여 작가는 김상용, 우희경, 이명희, 장정희, 황미숙, 김광석, 강옥경, 김정기, 김동휘, 남충모, 정용인, 최종건, 김유경, 장수경 등 95명이다. 코로나 예방을 위해 예약제를 우선으로 하고 2차 이상 접종자만 관람이 가능하다. 〈동구문화재단 아양아트센터 제공〉
[이춘호기자의 행간을 찍다] 섣달그믐 밤
추위라면 족히 영하 10℃는 되어야지. 그럼 비로소 코털이 얼기 시작한다. 으스스하고 카랑카랑하고 그러면서 유현(幽玄)한, 죽음도 삶도 아닌 것 같은, 조선 민초의 슬픔 총량보다 더 묵직한, 눈표범 송곳니의 굳셈으로 다가서는 새벽 3시의 설한풍, 그 앞에 속옷까지 죄다 벗어젖히고 참선에 든, 죽기 작정한 그 어떤 노승의 처연한 몸매 같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지금 자살의 심정으로 멍하니 자신의 울음을 뒤적거리고 있는 어떤 절망한 자의 퀭한 눈빛이거나….무한 과거도 무한 미래도 모두 미지에 덮여 있는, 그래서 이승이란 놈도 따지고 보면 전생과 저승 사이에 형성된 '특수감옥'에 갇혀 있는 종신형 죄수 같기도 하고. 이승에서의 일상은 예측불허이고, 아군과 적군의 구별이 무의미한, 선행의 삶과 악행의 삶도 요모조모 다 따져보면 도토리 키재기 수준으로 비슷해질 것이고…. 그렇다면 우리는 왜 한 해의 마지막 날 지는 해를 보며 '착한 사람 코스프레'를 벌여야 하는가. 드러나지 않은 인류의 죄악은 아직 빙산의 일각 아닌가. 남에게 절대 알려지지 않은 우리 모두의 지난 과오, 그 섬뜩한 잘못이 수면 하에서 암약하고 있다. 그래서 당신은 안심인가.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처럼 드러나 정죄된 집단광기가 무서운 게 아니다. 자기 양심에조차 포착되지 않는, 자신에게 한없이 유리하게 설정된 합리화의 범죄, 그리고 천사의 가면을 쓰고 있는 저 숱한 위선들은 바람 한 점 놓치지 않는다는 조물주의 감시망에도 걸리지 않을 것 같다. 있는 자의 부가 없는 자의 한숨에 기원을 두고 있다면? 있는 자들만이 감지할 수 있는, 변사또 잔치판 같은 그 번지르르하고 득의만면한 자존감 또한 있는 자의 폭행인 것이다. 원래 내 것이 있는가? 천지는 영역이 없고 천하는 달리 자기 것을 만들지 않는다. 계절처럼 서로 연결돼 있는 탓이다. 그래서 본질은 없고 변화만 있다. 우열이 존재할 수 없지만 인류는 우열을 고집했다. 그 우열이 모든 악행의 출발인지도 모른다. 저 없는 자들, 자신이 얼마나 없는지를 도무지 알지 못하고 오로지 자기 분노에만 충실한 바람에, 세상에서 가장 험악한 사지(死地)로 내몰린 자의 자기 멸시와 자학의 시간이 있어 섣달 그믐밤은 더욱 어둑해지고 꿈은 더 야물어진다.이 밤이 지면 신축년도 진다. 삶에도 죽음이 있듯 언젠가 지구도 고단한 궤적을 뒤로하고 죽음의 행성으로 소멸할 것이다. 하지만 지구의 표정을 보면 많이 지쳐있긴 하지만 아직은 견딜만 한 것 같다. 태양, 그 자체로 하나의 '종교'다. 어쩜 태양이 조물주인지도 모른다. 태양의 저 무서운 기세, 저자의 에너지 총합을 상상하면 어안이 벙벙할 정도다. 지구 생명의 생사 여탈권을 독점하고 있는 태양. 태양이 작정하고 궤도를 벗어나 지구에서 멀어져 버린다면? 인류사도 종언을 고하고 만다. 빛 한 톨 도달하지 않는 지구. 자본주의도 참수될 것이고, 덩달아 인간의 모든 갈등, 그리고 인류가 축적해 놓은 이 경이로운 문명의 이기도 한 줌 재로 추락할 것이다.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한 잿더미 지구, 그 위에 다시 태양이 재림해 제 온기를 포갠다면 다시 빛이 파종될 것이고, 그럼 지구에 다시 태초의 첫 단추가 채워질 것이다. 그게 부활이고 부활 아니겠는가. 아참, 그대의 심야 보일러는 제대로 작동되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인생 잘살고 있는 거다. 이 지구상에서 진정 내 것이 뭐겠는가? 그 내 것이란 것도 실은 남의 것 아닌가? 임인년 호랑이가 있는 자에게 던지는 화두였다. 십수 년 전 지리산의 한 산골에서 포착한 소박한 흙집 창문에서 새어 나온 불빛을 행찍용 사진으로 내밀어본다. 글·사진 = 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
[동대구로에서] 희망교 단상
신천 중동교와 대봉교 사이에 '희망교'가 살고 있다. 자전거를 타고 희망교 아래를 지날 때는 나도 모르게 어르신들에게 목례를 올린다. 그건 어쩜 내게 올리는 목례인지도 모른다. 미구에 나도 저 다리 밑으로 출근할지 모를 일이니…. 어느 날 그 언저리에 자전거를 세워놓고 벤치에 앉았다. '희망' 곁으로 모여든 비둘기 떼 같은 어르신들의 표정, 대화, 어투 등을 조금씩 챙겨보게 됐다. 그분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있다. 사랑은 내리사랑, 자식은 결국 떠나는 자, 결국 배우자가 제일이라는 점, 그런 배우자를 잃었을 때 섬뜩한 외로움의 시간이 닥쳐온다는 것이었다. 나이 들수록 자기 심정 알아주는 진정한 말벗을 찾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다들 희망교로 말벗을 찾아온 것이다. 외로움 앞에선 돈은 그다지 힘을 쓰지 못한다. 종일 말문 닫고 멍하니 TV만 보고 있는 그 시간, 그게 '생지옥' 아닌가. 그러니 자식보다 손자로부터 걸려 오는 살가운 전화 한 통, 그건 산삼보다 더 낫다. 세월은 여성보다 남성에게 더 치명적이다. 일제강점기 말엽 언저리에 태어났을 할아버지들. 남존여비로 대변되는 한국 가부장 사회의 마지막 보루였다. 그들에겐 '가장(家長)'이란 역할은 지상명령이었다. 돈 버는 일은 남편의 몫, 아내는 아이 키우고 살림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는 일념이 있었다. 그래서 맞벌이 부부는 언감생심. 아버지란 이름의 남편은 조직폭력배가 제 구역 지키듯 생때같은 제 식솔 밥 안 굶기려고 30년 이상 별별 궁상스러운 짓을 다 감내해야만 했다. 봉급생활자는 누른 봉투에 담긴 빳빳한 월급을 현금 형태로 아내한테 보란 듯이 내밀었다. 아내에게 그 돈은 '복음'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내는 남편에게, 남편 또한 아내에게 서로 고마워했다. 아내는 고단했을 남편의 지친 어깨를 주물러 주고 다음 날 단골 한의원으로 달려가 보약을 주문한다. 이런 정도면 부족해도 훈훈한 집안이다.어르신이 어린 애였을 땐 너나없이 저학력 시대였다. 다들 농경·문중사회 일원으로 살았고 고향 언저리에 살다가 고향 뒷산에 묻혔다. 여성은 16세 정도면 아이를 낳았다. 그러니 쉰도 안 돼 손자를 볼 수도 있었다. 영양도 부족하고 의료시스템 미비로 다들 예순 넘기기 힘들었다. 사는 게 힘들었지 죽는 건 참 쉬웠던 시절이다. 임종이 가까워지면 별채 초당으로 옮겨 자진해 곡기를 끊고 저승 갈 준비를 했다. 잿불 꺼지듯 저승으로 수월하게 잘 떠났다. 이젠 세상이 달라져 살기보다 죽기가 더 어려워졌다.앞으로 할아버지의 여생은 할머니보다 더 힘들 것이다. 이유가 있다. 그 시절처럼 남편 혼자 감내했던 생계가 아닌 탓이다. 아내도 맞벌이 전선에 나서야만 했다. 설상가상 아이까지 낳고 양육의 부담까지 지고 있으니. 남편에 대한 각별한 맘이 희석될 수밖에. 이미 가정은 아내들에 의해 장악(?)된 지 오래다. 명문대 입시에 혈안이 된 손주가 수시로 살갑게 '할배~ 하며 안기는 게' 쉽겠는가. 여든 넘어서면 동창·친구·동호회원도 전멸이다. 말하고 싶어도 말벗이 증발했으니. 그 끔찍한 외로움을 지워내기 위해 어르신들은 희망교 아래로 몰려드는 건지도 모른다. 조만간 적적함을 달래주는 다양한 '말벗보험'이 개발될 것 같다. 희망교! 가부장 실종 시대 등장한 새로운 '말벗교'다. 빈 가슴을 촉촉하게 적셔주는 '친구교'다. 이참에 신천에 가설된 여러 다리가 실버복합문화공간으로 증강됐으면 좋겠다. 기자도 조만간 희망교를 찾아 버스킹 버전으로 '옛가요 토크쇼'를 선물하고 싶다. 이춘호 주말섹션부 전문기자
[김영복·이춘호 '한식 삼천리'] 대구 육개장~따로국밥 연대기(2)...걸쭉한 고추기름 넣고 끓인 '육개장'. 사골 육수에 선지 넣고 끓인 '따로국밥'
◆보신탕과 육개장 사이1929년 12월1일 종합잡지 '별건곤(別乾坤)'. 필명을 달성인이라 불리는 저자가 이런 말을 한다. "대구탕반(大邱湯飯)은 본명이 육개장이다. 대체로 개고기를 한 별미로 보신지재(補身之材)로 좋아하는 것이 일부 조선사람들의 통성(通性)이지만 특히 남도지방 촌간(村間)에서는 사돈이 오면 개를 잡는다. 개장은 여간 큰 대접이 아니다. 이 개장 기호성(嗜好性)과 개고기를 먹지 못하는 사람들이 사정까지 살피고 또는 요사이 점점 개가 귀해지는 기미를 엿보아서 생겨난 게 바로 육개장이다. 이는 소고기로 개장처럼 만든 것인데 시방은 대발전하여 본토인 대구에서 서울까지 진출을 하였다." 즉 육개장은 개장국을 먹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태생된 음식으로 소고기를 뜻하는 '육(肉)'과 보신탕을 의미하는 '개장'이 합쳐진 말로 서민들이 먹었던 '개장국'에서 유래한 음식이다.예로부터 개장국이 꽤 인기가 있었던지 사찰의 스님들도 그 맛을 보기 위해 고기를 대신해 '고기나물'이라 불리는 눈개승마를 비롯해 마른나물과 버섯을 넣고 요리한 '채개장'을 만들었다. 삶은 닭을 결대로 찢어 만든 닭개장도 있다. 19세기 말엽에 편찬된 조리서 '시의전서(是議全書)'에는 육개장 만드는 법과 함께 '영계국'이라는 닭요리가 나오는데 육개장인 듯 언급되어 닭개장 역시 오래전부터 있었던 음식임을 확인할 수 있다. 시의전서에 나오는 육개장 만드는 법은 소고기의 여러 부위와 함께 특이하게 전복·해삼 등도 넣는다. 고기는 다지고 그 외 부분은 골패처럼 네모지게 썰어 넣는다. 식사로도 할 수 있지만 건육에 겨자를 쓰면 술안주로도 좋다고 첨언한다.소고기가 귀하던 시절 우리 조상은 입맛을 잃고 원기가 떨어졌을 때 개고기를 먹고 원기를 회복했다. 한글로 된 최고의 고조리서 '음식디미방'(1670)에는 개장 고는 법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 '규합총서'(閨閤叢書·1809년)에 '개찜'이라 명명된 개장국이 설명돼 있다. 여기에서는 고추장을 처음 넣은 조리법이 소개된다. 이걸 보면 김치보다 앞서 고추를 개장국에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이후 고춧가루가 널리 퍼지면서 뒤늦게 매콤한 육개장이 등장하게 된다.손정규의 '조선요리'(1940년)에는 고춧가루를 넣고 빨갛게 끓인 육개장의 조리법을 소개하고 있다. "양지머리와 사태를 소· 양 등과 함께 푹 삶아 건져내고 국물을 식혀서 기름을 걷어 낸다. 건져낸 고기는 결대로 찢거나 칼로 썰고 양도 저민다. 이 고기나 양을 진간장, 다진 파와 마늘, 참기름, 깨소금, 후춧가루 등으로 양념한다. 한편 고춧가루에 참기름을 끓여 넣어서 잘 개어 놓고 대파를 데쳐 놓는다. 이들을 끓어오르는 장국에 넣어 한소끔 끓여낸다." 이것이 서울식 육개장이다.대구식 육개장의 별칭 '대구탕'고기결이 풀릴 만큼 큼지막하게 썰어 손으로 비틀어 자른 대파 넣고 끓여얼큰한 국물에 감칠맛·단맛 우러나와삶은 닭을 결대로 찢어서 만든 닭개장임란후 고춧가루 넣어 매콤한 육개장◆대구탕을 아시나요일제 강점기에는 대구탕으로도 불렸던 대구탕반, 그리고 6·25전쟁을 거치면서 '따로국밥'이라는 국밥 형태의 음식이 향토음식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음식학적으로 볼 때 대구탕은 생선 '대구탕(大口蕩)', 육개장의 별칭인 '대구탕(代狗蕩)', 그리고 대구식 육개장의 별칭인 '대구탕(大邱蕩)'이 있다.19세기 말엽 대구 우시장은 번창했다. 1910년 당시 통감부에서 출판한 '한일합방 기념 대일본제국 조선사진첩'에는 대구시장(서문시장)과 우시장이 소개돼 있다. 대구 우시장은 지금의 대구 달서구 성당동에 위치하고 있었다. 1924년에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조선의 시장'에서는 1년에 2만마리 이상을 취급하는 최대 규모의 9개 축산시장을 기술하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대구 우시장이다. 당시 2만마리 이상 거래되는 우시장 9개소 중 6개소는 북한에 있으며 남한은 대구 외 수원과 부산이었다고 한다. 2만 마리면 하루에 50마리 꼴이니 당시 소의 무게를 생각하면 대구에는 당시 하루 10t가량의 소고기가 풀렸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관계로 대구의 대표적인 음식으로는 소고기나 소의 내장을 사용한 음식들이 비교적 많을 수밖에 없었다.대구에는 육개장 형태인 대구탕이 있다. 거기다가 따로국밥이라는 또 다른 음식이 있어 식도락가들을 헷갈리게 하고 있다. 같은 듯 다른 대구탕이라 불리는 육개장과 대구 명물 '따로국밥'은 재료나 조리학적으로 볼 때 전혀 다른 음식이다.대구탕의 특징 중 하나는 붉고 걸쭉한 고추기름. 국이 끓을 때 고춧가루를 넣지 않고 녹인 소기름으로 고추기름을 만들어 양념으로 넣는다. 따로국밥은 육수를 사골로 만들고 거기에 선지까지 들어간다.일제강점기 초기 경부철도 건설로 대구에 사람들이 모이고 시장이 선다. 이때 개고기를 피하는 이들도 적잖았다. 덕분에 대구 명물 대구탕이 태어난다. 육개장은 '소고기+개장국'이다. 개장국 스타일로 끓인 쇠고깃국으로 시장통 등에서 팔던 주막 음식이었다. 육당 최남선도 '조선상식문답'에서 소설가 김동리도 대구가 한국 육개장의 명소란 점을 적시했다. 김동리는 직접 '대구탕'이란 표현을 사용했다.서울의 전동 대구탕 집은 대구탕으로 시작해서 연계탕(연계백숙)과 구운 갈비를 메뉴에 추가해서 장사를 했는데, 그 뒤로는 같은 메뉴를 제공하는 식당들이 여러 곳 생기게 된다. 1896년 발행된 연세대 소장 '규곤요람'에서 소개하는 육개장도 대구탕에 가깝다. 1930년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경성 시내 음식점 조합이 음식값을 내렸다'는 기사를 보면 육개장은 없고 대구탕반(대구탕)만 등장한다. 육개장이라는 이름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경성에서 육개장보다 대구탕이라는 이름이 더 흔히 쓰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풍연도 '서울 잡학사전'에서 육개장이 대구탕의 영향으로 전국으로 퍼졌다는 설을 내놓고 있다. 육개장은 서울에서 지역 특성상 더운 날이 많은 대구로 건너가면서 더욱 인기를 얻었다 보는 것이다.대구탕은 소고기를 푹 끓여낸 얼큰한 국물로 다른 지역의 육개장과 달리 고기를 찢어서 넣는 게 아니라 고기의 결이 풀릴 정도로 큼지막하게 썰어 대파와 함께 걸쭉해질 때까지 끓여낸다. 특히 대파를 자를 때 칼을 대지 않고 손으로 비틀어 잘라 넣는다. 여기에 소량의 고구마 줄기나 무를 넣기도 하지만 소고기의 감칠맛과 대파에서 나오는 단맛이 맛의 핵심이다.6·25 전쟁 후 향토음식 따로국밥19C 전국 최대 규모 번창 대구우시장소고기·내장 재료 대구대표 음식 발전사골·양지머리 육수 쓰는 두가지 방식 경상도서 즐겨먹는 소고기국밥 스타일1946년에 오픈한 대구 국일식당 명성 ◆따로국밥대구를 따로국밥의 고장으로 만든 주인공은 1946년 오픈한 '국일식당'이다. 한국전쟁 이후 만들어진 따로국밥은 겉모습은 비슷해 보여도 다른 음식이다. 경상도 사람들이 즐겨 먹는 소고기 국밥에 더 가깝다. 따로국밥은 대구탕반과는 전혀 다른 해장국 스타일의 국밥에 가깝다.'전통 육개장 스타일'은 옛집·온천골·진골목·벙글벙글, 선지가 들어가는 해장국 방식의 따로국밥은 국일·교동·한우장·한일 등이 명맥을 잇고, 우거지와 선지가 들어간 대덕식당은 '선지국'으로 분류된다.육개장도 사골 육수를 베이스로 하는 쪽과 그렇지 않고 일반 반가의 소고깃국처럼 양지머리 육수를 갖고 국을 끓이는 두 방식이 있다. 경상도 일반 민가의 소고깃국에 가장 가까운 형태를 내는 식당은 경산 영남대 기숙사 근처에 본점이 있는 '온천골'. 여기는 양지머리, 대파와 무, 그리고 마늘 양념장만으로 끓인다.◆팔도 별별 소고깃국 1920년대에 이미 대구탕이 유행했지만 지금도 팔도엔 이런저런 소고깃국이 남아있다. 대구권 가정식 소고깃국은 일명 '소고기무국'으로도 불린다. 경주에 가면 채 썬 묵이 들어가는 묵사발국 같은 '팔우정 해장국', 의령 종로식당의 육개장은 콩나물국 같다. 양평해장국은 소양을 베이스로 한 선지해장국 스타일이다. 서울과 충청도 지역에서는 고사리 등을 넣지 않고 많은 양의 파를 큼직하게 썰어 넣었기에 '파국'이라고도 한다. 같은 충청도 안이라도 지역에 따라 부추를 넣는 곳도 있다. 전라도에서는 소고기와 함께 대파와 달걀지단만 넣기도 하고 토란 대를 꼭 넣는 지역도 있다. 제주도는 '육=소고기' 하는 등식이 통하지 않는 지역이다. 대표적인 게 바로 '고사리육개장'이다. 육개장 역시 소고기가 아닌 돼지고기가 들어간다. 또 고사리의 형태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푹 끓이며, 걸쭉하게 하기 위해서 들깨·보릿가루를 넣는다. 재료들의 차이로 인해 다른 지역의 붉은색 육개장과 달리 황톳빛에 가깝다. 북한에도 육개장이 있는데 '소고깃국'이라고 말한다. 그 명칭만 다를 뿐 만드는 법은 육개장과 동일하다. 육개장은 기본적으로 밥과 함께 먹지만 면과 먹기도 한다. 강원도 지역에서는 메밀면이나 당면을 넣어 밥과 함께 나오기도 하며, '육개장 칼국수'라 하여 육개장에 칼국수를 넣어 '육칼'이라고도 한다. 대구의 경우 중구 종로 진골목식당에서는 육칼이라 하지 않고 '육국수'라 한다. 한국인이 자주 틀리는 맞춤법에 육개장이 꼭 들어간다. 실제로 식당에 가면 '육계장'이라 쓰여 있는 곳이 종종 보인다. 아마도 삼계탕(蔘鷄湯)의 '계'와 연관 지어 기억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제 육개장이 소고기로 만든 개장국에서 유래했다는 것을 알았으니 더이상 '육개장'을 잘못 쓰는 일은 없도록 하자. 대담=김영복 식생활문화연구원장, 이춘호 음식전문기자 정리=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구한말 노점 식당 전경. 그 시절 민초들의 식탁이 얼마나 초라했는가를 암시하는 길거리 한 편에 가마니를 둘러 벽을 삼고 송판을 테이블로 삼은 노변 주막형 장국밥집.일제강점기 시절의 허름하기 이를 데 없는 음식점. 길에서 만난 식당은 주막 아니면 장터국밥 스타일이었고 고관대작은 훗날 요정으로 불리는 조선 갑종 요릿집·청요릿집(중화요릿집)을 애용했다.일제강점기 대구 성당못 근처에 있었던 우시장 전경.지금 개장국은 국민적 지탄을 받고 있지만 20년 전만 해도 대구·경북은 한국 보신탕 문화특구로 불릴 정도로 즐겨 먹었다. 일제강점기 개장국집 전경.대구 따로국밥과 비슷하지만 레시피가 사뭇 다른 중구 시장북로 미싱골목 옆 50년대식 골목·움집 같은 식당에서 반세기 이상 대구 스타일의 육개장인 대구탕 외길을 걷고 있는 옛집 육개장 골목길. 이춘호기자한국에서 가장 독특한 소고기 탕반문화를 가진 대구의 대표 음식 중 하나인 국일 따로국밥. 1946년 옛 한일극장 서편 공터에서 좌판 형태로 오픈했는데 6·25전쟁 때 숱한 피란민들의 추억이 스며든 곳이기도 하다. 대구의 따로국밥은 타지방의 육개장, 해장국, 장터국밥, 설렁탕, 곰탕 스타일이 한데 혼재된 것 같다. 반드시 선지가 사용되고 육수를 빼기 위해 사골을 밤새 고아낸다. 그리고 보조재료는 대파와 무, 고기는 양지머리를 사용한다. 그리고 콩팥 기름에 고춧가루를 섞은 고추기름을 흥건하게 올려주며, 마늘 양념이 빠지지 않아야 된다. 이춘호기자
[김영복·이춘호 '한식 삼천리'] 대구 육개장~따로국밥 연대기(1)
이번 회에는 개장국(보신탕)에서 비롯된 한국 고유의 탕 문화가 '탕반의 고장' 중 하나인 대구에 와서 어떻게 대구탕(대구식 육개장)과 따로국밥으로 분화했는지를 추적해 본다.구한말까지만 해도 한국의 식문화는 아주 단출했다. 특히 장터나 주막의 주메뉴는 거의 '장국밥' 하나로 압축된다. 국밥은 한자어로 '탕반(蕩飯)'. 국과 밥이 한 세트로 묶인 거다. 한 세기 전만 해도 뚝배기에 찬밥을 넣고 그걸 뜨거운 국물로 토렴하고 마지막에 미리 썰어놓은 고기를 고명으로 올려준다. 반찬이라 해봐야 간 맞추는 간장과 깍두기가 전부다. 지금처럼 밥 따로 국 따로 형태는 그 시절 너무 번거롭기 때문에 외면당했다. 소고기 또한 너무 귀했기 때문에 소고기 국밥, 육개장 등은 서민이 먹기 힘들었고 대다수 시래기·우거지국에 만족했다.한국 탕반 문화의 원류 '보신탕'대구경북, 20년전 보신탕 특구 번창예로부터 삼복에 먹는 절식 개장국소고기 '肉'+보신탕 '개장' 육개장서민이 먹었던 개장국에서 유래한국 탕반문화의 원류는 보신탕이다. 지금은 동물보호단체 등 때문에 보신탕 문화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지만 20년 전까지만 해도 대구·경북은 한국 최강 보신탕 특구로 군림했다.우리는 역사적으로 개(犬)를 식용해 왔다. 그래서 그런지 개고기 식용 흔적보다 애완견에 관한 역사적 문헌을 찾기가 쉽지 않다. 조선 중기의 문신 조경(趙絅·1586~1669)의 시문집 '용주유고(蓉洲遺稿)'에 애완견 관련 한 구절이 있다. '宗太守下朴狗短歌(종태수하박구단가)'라는 재미있는 애완견에 대한 시다. 하박구(下朴狗)는 뼈대가 굵고 털이 북실북실한 개의 일종이라고 한다. 이 가운데 자그마한 품종을 '발바리'라 하는데 시에 잘 묘사되어 있다. 다산 정약용도 개고기를 상당히 좋아한 것 같다. 그는 채소밭에 파가 있고 방에 식초가 있으면 이제 개를 잡을 차례라고 했다. 다산 시문집 제20권에 보면 초정 박제가가 개 삶는 법을 소개한 대목이 있다. "우선 티끌이 묻지 않도록 달아매어 껍질을 벗기고 창자나 밥통은 씻어도 그 나머지는 절대로 씻지 말고 곧장 가마솥 속에 넣어서 바로 맑은 물로 삶는다. 그리고는 일단 꺼내놓고 식초·장·기름·파로 양념을 하여 더러는 다시 볶기도 하고 더러는 다시 삶는데 이렇게 해야 훌륭한 맛이 난다"고 했다.개고기를 주재료로 끓인 국을 '개장국'이라 한다. 이 개장국을 '백호전서(白湖全書)'에서는 '견갱(犬羹)', '무명자집(無名子集)'에는 '가장(家獐)',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개장(狗醬)'이라 했다.흥부전에도 개장국이 나온다. 흥부는 워낙 가난한 탓에 자식들에게 옷을 다해 입힐 수 없다. 한 놈이 "애고 어머니, 우리 열구자탕에 국수 말아 먹었으면…" 하자, 또 한 놈이 "애고 어머니, 우리 벙거짓골 먹었으면…" 하고, 거기에 또 한 놈이 "애고 어머니, 우리 개장국에 흰밥 조금 먹었으면…" 한다.조선 정조 1년(1777) 이찬을 추대하려 역모를 꾀하던 정조 시해 미수사건 당시의 주모자 홍상범 일당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정흥문이란 자의 자술서에 개장국 이야기가 나온다. 당시 한양에 개장국을 상시적으로 파는 가게가 있었던 것이다.개장국을 복날에만 먹은 게 아니다. 봄철에 선비들이 모여 술을 마시는 '향음례'(鄕飮禮)에서도 개장국을 대접했다. 성균관 유생들에게는 철 따라 별미가 제공되었는데, 초복에는개장국 한 그릇, 중복에는 참외 2개, 말복에는 수박이었다. 충남 부여에 가면 상중(喪中)에 개장국을 끓여 손님을 접대한다. 그러나 통상 개장국은 삼복에 먹는 절식(節食)이다. 여기서 '복(伏)'이란 말은 '엎드려 숨는다'는 뜻이다. 하지(夏至) 후의 세 번째 경일(庚日)이 초복, 하지 후의 네 번째 경일이 중복, 입추 뒤의 첫 경일이 말복이 된다.홍석모의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는 "개고기를 파와 함께 푹 삶은 것을 개장이라고 한다. 여기에 닭고기와 죽순을 넣으면 더욱 좋다. 또 개장국을 만들어서 산초가루를 치고 흰밥을 말면 시절음식이 된다. 이것을 먹고 땀을 흘리면 더위도 물리치고 보신도 된다"라고 소개했다.조선 정조 15년(1791) 청나라 연경으로의 사행단을 따라간 김정중이 쓴 '연행록(燕行錄)'에서 "중국인들은 비둘기·오리·거위 등을 먹지만 개고기는 먹지 않는다"는 대목이 나온다. 조선 후기까지만 해도 중국 베이징에서는 개고기를 먹지 않았던 것 같다. 대담=김영복 식생활문화연구원장. 이춘호 음식전문기자 정리=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김영복·이춘호 '한식 삼천리'] 대구 육개장~따로국밥 연대기(2)에서 계속됩니다.육개장에 국수를 단 육국수.육개장이 절정기를 맞을 때도 승려 등 일부는 고기 대신 갖은 채소류에 된장·고추장·고추기름 등을 넣어 '채개장'을 해먹었다. 사진 속 음식은 김영복 원장이 직접 조리한 채개장.
[이춘호기자의 행간을 찍다] 늘 그 '너머'에 있던 그의 50주년
김민기(金珉基·1951 3월31일~). 그의 중간 이름자 '민'은 흥미롭다. 옥돌 '민(珉) 자다. 임금(왕)과 백성(민)이 합쳐져 있다. 왜 임금 왕 변이 들어간 민 자였을까? 그것은 있는 자와 없는 자의 동행의식, 그리고 백성이 곧 임금, 바로 민주주의의 요체를 말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모든 사람은 성공과 출세(임금)를 향하고 있지만 실은 늘 실패와 좌절을 통해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야만 된다는 메시지도 담긴 것 같다. 오르는 자는 주저앉은 자의 연장이고 그리고 주저앉은 자는 오르는 자의 출발선이라는 걸.김민기는 늘 그 '너머'에 있다. 그는 병적일 정도로 자기의 말과 글이 행동과 한 치도 어긋나지 않는다. 투사 같은데 실은 꿈쟁이, 그래 몽상가 같다. 그는 비유보다 '고백'에 능하다. 결코 주장과 선언을 하지 않는다. 내 밖의 존재(전체)가 나를 규정한다는 걸 절감한다. 인문학적 측은지심이 그의 유전자에 각인된 탓도 있다. 한때 사람들은 '제2의 애국가'로 평가받던 '아침이슬'을 떠올리며 운동권 리더 김민기를 떠올렸다. 하지만 아침이슬은 운동권을 겨냥한 노래가 아니었다. 그냥 미래가 봉쇄된 스무 살 청년의 응어리진 지성이 독백으로 그려진 또 다른 서정시였다. 단지 양희은이 카랑카랑하게 진군가처럼 불렀던 아침이슬 때문에 대중에게 그렇게 인식된 탓도 있다. 이후 그 어떤 정치인도 그를 자기 진영으로 데려오지 못했다.그의 무정하고 무심하고 무표정·무덤덤한 얼굴을 읽어 본다. 무당같이 혼령스럽고…, 한 문장으로 정리될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서양음악과 국악의 접점이 어딘지 안다. 아침이슬, 그사이, 저 부는 바람, 바람과 나, 길, 친구, 봉우리, 작은 연못, 상록수, 늙은 군인의 노래, 아름다운 사람…. 일상과 초월을 뒤섞어 놓은 듯한 유장한 노랫말, 기존 대중가요와 현격하게 구별되는 클래식 작곡법이 가미된 김민기만의 코드 진행, 그리고 서편제 특유의 애조(哀調)가 감돈다. 한(恨)의 정조가 판소리를 벗어나 '포크의 방식(겨레의 노래)'으로 몸을 비튼다. 김민기가 아니라 '한민기' 같았다.대한민국에 숱한 싱어송라이터, 그중 한 명을 손꼽아 보라면 나는 단연 이 남자를 꼽겠다. 물론 그 옆에 송창식, 한대수, 조용필, 조동진 등도 둘 수 있지만 아무튼.그는 아직 물음표이기도 하고 느낌표이기도 하다. 한때 그의 노래는 운동권에게는 '위안'이었고 독재권력자에겐 '눈엣가시'였다. 1971년 출시한 첫 앨범 재킷 사진에 올라 온 선한 청년 김민기 얼굴. 평범하고 우직하고 가식의 제스처가 지워진 착한 얼굴 하나. 그의 노래는 음울한 그 시대의 '문화현상'이었다. 1991년 극단 학전을 오픈하면서 뮤지컬 제작자로 변신한다. 김광석추모사업회도 맡았다. 2002년 전집음반을 내고 가수의 삶을 접는다. 이후 언론과의 접촉도 피했다. 단지 2015년 한겨레신문, 2018년 손석희가 진행하던 jtbc 뉴스룸에만 반짝 등장했다. 그게 끝이었다. 원칙주의자인 그는 이후 그 어떤 음악 무대에서도 노래하지 않았다. 한때는 포크의 대명사였지만 미련 없이 포크와 결별했다. 그리고 뮤지컬 제작자의 길을 갔다. 올해는 김민기 노래(아침이슬) 50주년. 박학기, 한영애, 장필순 등 후배 가수 40여 명이 한사코 말리는 그를 설득해 50주년 헌정 앨범과 콘서트를 낳았다. 대중문화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1971년 발매한 김민기의 첫 앨범 재킷 사진. 〈출처: 대도레코드〉
[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이산하 시인(2)…나는 착한 일 했는데, 타인은 죽어가…선과 악은 멀리 있는 게 아니다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동물이 사람이고그중에서도 더 잔인한 동물이 바로 나 자신이었기 때문이다세상에서 가장 위험하면서도 그 위험을 모르기 때문에더욱 위험한 동물이기도 하다인간은 가장 큰 바퀴벌레다남의 허물 열 개보다 내 허물 하나가 삶의 벼랑을 만든다이쪽 인간의 벼랑 끝과 저쪽 인간의 벼랑 끝이 마주 본다그리고 서로 괴물이 된다.-이산하의 편린-그는 1984년 9월부터 수배 인물로 살아간다. 그리고 한라산 때문에 1987년 11월 체포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 필화사건을 맡을 담당변호사가 없었다. 그 많은 인권 변호사들 가운데 누구 하나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대선 한 달전'이었다. 시국사건 변호사들은 내심 이제 한 달만 지나면 DJ나 YS로 바뀐 민주정권하에서 '한 자리' 할 수 있는데 쓸데없이 막판에 '한라산'이라는 '지뢰'를 밟아 데미지를 받을 필요가 없다는 계산이었다.이에 앞서 1986년 여름, 수배 3년째 접어드는 이 무렵에 그는 대충 4가지 일을 병행하고 있었다. 첫째는 인천지역에서 노동자들을 학습하고 조직하는 사업이었고 둘째는 고 김근태가 의장으로 있던 민청련 선전국에서 '민중신문'과 '민주화의 길' 등 각 정파에 대한 대항 팸플릿 같은 유인물들을 작성하고 배포하는 것이었다. 셋째는 고교 동기가 편집장으로 있던 녹두출판사에 가끔 나가 기획하는 것이었는데 그 중에는 문학평론가 도정일의 서재에 들어가 찾아낸 '레닌'(루카치·알튀세르 공저)이라는 책도 있었다. 그리고 넷째로는 당시 그의 이념적 경향이 'NL'이었던 만큼 문화예술 분야에 민족해방을 지향하는 '민족해방문학 혁명소조' 같은 문예전위를 조직하는 사업이었다. 쓰기로 결단을 내린 다음부터는 4·3 주변 참고 자료준비 등 당연히 은밀하게 작업을 진행했다. 그런데 4·3에 대한 극우적 관변자료 외에는 거의 없는 실정이었고 현대사 전공자들 역시 제대로 아는 이들이 없었다. 더구나 전두환 독재정권의 살벌한 공안정국에서 수배자 신분으로 제주 현지까지 내려가 생존자들의 증언을 취재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니 본래대로 '제주도 피의 투쟁사'를 텍스트로 해서 시적으로 각색하는 수밖에 없었다. 추도사를 쓰는 데 화려한 미사여구는 자제하듯 참혹한 4·3을 다루는 데도 과도한 레토릭은 금물이라는 원칙을 처음부터 세우고 썼다. 문제적 폭로자 4·3항쟁 폭로한 책을 詩로 각색'두 계급 특진' 걸린 수배자 신세 1987년 11월 대선 직전 체포돼 선뜻 나서는 변호사가 없었다 항소이유서에도 폭탄 글 투척 출소 후엔 사회가 감옥…絶筆 사회적 유배 30년만에 풀려 2018년 '제주 4·3 추념식' 현장 이효리·대통령 입에서 내 詩가… 21년만에 펴낸 시집 '악의 평범성' 김훈 "나른한 문단에 철퇴" 극찬 김달진·이육사 문학상 동시 수상 현대사 앞에선 우리 모두가 喪主 한라산 재심·인혁당 시집 계획◆이산하란 유령문단에서도 이륭은 알아도 이산하란 존재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지 못했다. 공안 당국도 시의 내용이 워낙 구체적이고 희생자가 아니라 항쟁 주체들 중심으로 전개돼 이 건 남파 된 고정간첩의 소행이라 판단했을 정도다. 안기부, 보안사, 치안본부 등 국내 모든 공안 당국자들이 이산하 체포에 혈안이 된다. 현상금 400만원, 두 계급 특진의 포상이 걸려 있었다. 그는 울산에 있던 노동문학의 상징이 된 백무산 시인, 현대자동차 노동운동가의 거처, 빵집 등에 피신해 있다가 상경, 결국 수배 4년여 만에 체포돼 안양교도소에 수감된다. 김지하의 '오적', 양성우의 '겨울공화국', 남정현의 '분지'에 이어 국내 필화사건의 대미를 장식한다. 워낙 센 사건이라 누가 선뜻 나서는 이가 없었다. 문단에 대한 섭섭함을 포함, 항소이유서에 '김일성의 노래'를 적어버렸다. '한라산'도 실은 '자기검열'을 거친 작품이었다. 이 점에 대해선 아직도 그의 마음이 편치 않다. 타협해서는 안 될 문제를 타협해서라도 풀겠다는 마음의 틈새를 스스로에게 들켰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늦게나마 그것을 조금이라도 덜어보려고 몇 년 전 낸 '복원판 한라산' 시집에 그때 삭제 혹은 완곡하게 수정한 대목들을 모두 복원했다. 1988년 10월3일 개천절 특사로 출소했지만 고문 등으로 인해 '사회적 식물인간' 상태였다. 10여 년 절필 상태였다. 그는 그 어떤 이념과 가치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최인훈의 소설 '광장' 주인공 이명준의 삶과 비슷했다. 한국전쟁 포로 석방 때 남과 북을 모두 버리고 중립국으로 가던 배에서 투신 자살하는 이명준의 삶이 포개졌다. ◆하마르티아삶의 모순과 이율배반을 처절하게 실감하면서 1999년 첫 시집을 펴낸다. 그리고 21년 만에 제2시집 '악의 평범성'을 출간한다. 그의 속내는 이랬다. 인간이든 사회든 어떤 문제가 잘 안 풀려 벽에 부딪히면 고전으로 돌아가는 버릇이 있는데 이번 시집의 메시지도 그랬다. 바로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를 관통한 '하마르티아(Hamartia)'다. 과녁을 벗어나 '자신도 모르고 지은 죄'가 하마르티아다. 자신이 살해자라는 사실을 거부하다가 깨달아가는 오이디푸스의 슬픈 생애 같다. 난 착하고 아름다운 일을 했는데 실은 나도 모르는 사이 타인은 죽어가고 있는 상태, 그게 곧 세계 역사를 관통하는 하마르티아다. 그가 김민기의 노래 '친구' 2절의 한 구절 처럼 가만히 일어난다. 그리고 91쪽 시 살아남은 죄를 낭독한다.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으로 세상이 폭발 직전일 때/ 키 큰 한 젊은 노동자가 광화문 광장에서/ 살인마 전두환을 처단하라고 외치며 분신했다/ DJ YS 를 비롯한 재야인사들이 병원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죽을 줄 알았던 노동자가 '기어이' 소생해버리자/ 그들은 더 이상 병원을 찾지 않았다/ 박종철의 관에 또 하나의 관을 쌓아 연쇄폭발시킬/ 큰 호재가 사라져 내심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노동자는 살아난 것이 죄여서 30년이 지난 아직도/ 우울증을 앓으며 자기 몸의 불을 꺼준 사람들을/ 원망하고 또 원망하고 있다시에 나오는 그 노동자, 1980년대 중후반의 실화다. 김지하 시인도 그 연장에 있다. 그가 황폐하게 된 여러 원인들 가운데 하나와도 아주 유사하다. 악의 평범성은 보수와 진보 어느 쪽도 차별하지 않고 모두 공평하다. 극한상황과 조건이 갖춰지면 좌우 이념의 껍질을 벗고 똑같아진다. 악은 차별하지 않는다.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러셀은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제국주의다'라고 말했다. 그 말이 이번 그의 시집 전체를 관통한다.문학청년 시절, 그는 방학 때마다 경산의 깊은 산속 암자로 가서 책을 읽거나 글을 썼다. 매화와 붉은 능소화로 뒤덮인 작은 암자의 주지 스님은 그의 외할머니였다. 이 암자에서 만행 중인 이 젊은 '백구두 스님(법운)'을 우연히 만나 함께 전국 도보여행을 하게 되었다. 여름방학이 끝나가는 한 달 뒤 오대산 적멸보궁에서 헤어졌다. 스님은 곧 '혈사경 수행'에 들어간다고 했다. 혈사경 수행은 혈서처럼 자신의 손가락들을 벤 피로 방대한 분량의 경전을 전부 베껴 쓰는 고도의 수행단계였다. 그로부터 25년 후, 그는 주말마다 홀로 전국의 절들을 찾아 떠났고 예전에 스님과 함께 소주를 마시며 걸었던 그 길을 다시 걸었다. 나름대로의 '만행'이었다. 청도 운문사에서 교련복을 입은 17세의 산하, 잿빛 승복에 '백구두'를 신은 스님. 함께 찍은 사진을 보니, 절로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법정의 동백꽃죽은 기형도 시인도 그를 좋아한다. 그가 감옥에 있을 때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 전질을 보내주었다. 당시 한국일보 기자 신분이던 김훈도 그를 주시했다. 이번에 시집이 나오자 밥을 사주면서 '나른한 한국 문단에 철퇴를 가했다'면서 좋아했다.젊은 시절 그를 충격에 빠트린 소설가가 있다. 바로 '죽음의 한 연구' '열명기' 등 국내 소설사상 가장 난해한 작품 소설을 펴낸 박상륭이었다. 그를 처음 만나 무려 7일간 통음하면서 문학의 뿌리에 대해 천착했다. 그와 인연이 된 법정 스님과 동백꽃에 얽힌 사연도 알려준다. 법정이 서울대병원에서 임종을 맞았을 때 해남 미황사 금강 스님이 딴 송광사 불일암 동백꽃은 가수 노영심을 통해 법정에게 전해진다. 법정이 스님이 된 이유는 바로 인혁당 사건 때문. 사형당한 8명의 양심수 때문에 사회운동도 접고 출가하면서 그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불일암 한 쪽에 동백나무를 심은 것이다. 그 사실을 아는 이는 별로 없다.◆한라산 유배에서 풀려나다2018년 봄 '제주 4·3 추념식'. 사회자인 가수 이효리가 '생은 아물지 않는다'라는 그의 시를 낭송. 이어 문재인 대통령 입에서 '이산하 시인의 장편서사시 한라산이란 말까지 나왔다. 혼자 TV를 보던 그는 환청처럼 들리면서 현기증이 일어났다.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 이산하라는 이름이 30년 만에 유배에서 풀려나는구나….' 하지만 출소 후 그는 보수단체 관계자들로부터 협박을 받고 심지어 테러까지 당해 병원 신세를 진다. 사회 또한 그에겐 감옥이었다. 그는 그를 운구하며 살았다. 그는 '한국 현대사 앞에서는 우리는 모두 상주'라고 말한다. 이념 폐기 시대. 지난 독재정권 발 각종 용공 조작사건이 무더기로 무죄판정을 받고 있다. 인혁당 사건도 그렇고, 제주도 4·3 항쟁도 그렇다. 그도 이정희·심재환 변호사를 통해 대법원에 한라산 사건 재심을 신청해둔 상태다.2018년 세계위안부국제심포지엄 초청 강연을 위해 유럽을 방문했고 그 기회를 통해 독일, 폴란드 등 유럽 각처 수용소 20 군데를 방문했다. 대다수 한국인 방문이 없는 곳이었다.올해 '악의 평범성' 덕분에 두 개(김달진·이육사 문학상)의 문학상을 동시에 받았다. 상금은 그동안 쌓여 있던 빚을 갚는 데 써버렸다. 서울 상수역 근처 반지하 단칸방에서 '이끼식물' 처럼 살아가고 있다. 오랜 지하 생활로 인해 몸이 너무 안 좋다. 지인의 도움을 받아 내년 1월 제주도로 거처를 옮길 모양이다. 지금도 정치권으로부터 러브콜을 받지만 그 어떤 정치 관련 단체와도 손을 잡지 않고 있다. 오직 시인의 길만 걷겠단다. 그는 문학을 순수와 참여로 나누는 방식도 거부한다. 그는 순수인 동시에 참여란다. 그게 문학의 전위란다. 서둘러 져버린 인혁당 사형수를 위해 노랫말을 지었고 이와 관련한 북콘서트도 준비 중이다. 조만간 인혁당 관련 서사시집도 펴내겠단다. 글=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 사진=이산하 시인 제공 이산하 시인은…△1960년 경북 영일 출생 △시집 '악의 평범성' '한라산' '존재의 놀이', 산문집 '생은 아물지 않는다' '피었으므로 진다' '적멸보궁 가는 길', 성장소설집 '양철북', 번역시집 '살아남은 자의 아픔'(프리모 레비 지음), '체 게바라 시집'(체 게바라 지음) 등 △2021년 김달진·이육사 문학상 수상이산하는 출소 후 인간의 악마성이 어느 정도인지를 실감하기 위해 유럽 각처에 흩어져 있는 20여 군데의 수용소를 기행했다. 선인이 악인이 될 수 있고 악인 또한 선인의 정황에 처할 수밖에 없는 제국주의적 악령이 감도는 현대사의 질곡을 관통하고 싶었다. 2018년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 앞에 섰다.2018년 독일 본에서 열린 위안부국제심포지엄에서 초청강연을 하고 있다.김지하의 '오적'과 함께 자신의 문학의 사표라고 말하는 법운 스님과 청도 운문사에서 함께한 모습. 이산하의 고교 시절이었다.2014년 파리 페르 라세즈 공동묘지 내 파리코뮌 전사 무덤 앞에 선 이산하.
[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이산하 시인(1)…절체절명의 순간에도 피하지 않고 쓰는 것, 그것이 詩
좌절의 순간, 사람들은 별빛을 보지만허공의 喪家에 조문하는 것과 같아예술도 어쩌면 그런 맥락일지도…극단, 아니 최정점, 그것도 아니라면 파국, 그래서 절체절명의 순간이라고 해두자. 사형수의 목에 밧줄이 걸리는 순간이거나 이슬람 극단주의자의 칼 끝이 고개를 숙인 한 포로의 목을 노리는 순간이거나…. 희망이 절망으로 내려앉을 때 인간의 말과 글은 무력해지고….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는 불가항력의 순간, 사람들은 그 좌절의 맘으로 하늘에 압정처럼 쏟아져 있는 뭇별을 올려다 본다. 하지만 저 별 또한 오래전에 죽은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가 별빛에 감탄하는 것은 허공의 상가에 조문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어쩌면 예술도 이미 소멸했거나 곧 소멸할 세계의 허상을 뒤늦게 조문하는 의식인지도 모른다. 단지 작두를 타고 하느냐, 타지 않고 하느냐, 그 차이일 뿐이다.이 대목에서 그의 이름을 밝히는 게 좋을 것 같다. 이산하(62) 시인. 포항시 죽장면 첩첩산중 상옥마을에서 태어난 뒤 공부를 위해 부산으로 건너간다. 혜광고교 시절 그의 망명지는 학교 도서관과 보수동 헌책방이었다. '예비대학 시절'이었다. 혜광고는 훗날 사회적 이슈의 중심이 된다. 물고문 때문에 사망한 박종철 열사, 그리고 파란의 법무부 장관으로 물러난 조국, 1980년대 양심수 같은 잡지로 평가받았던 녹두평론의 편집장 신형식 등이 있었다. 그는 78학번부터 '한국 문단의 심장부'로 불리게 되는 경희대 국문과에 들어간다. 정호승, 류시화(안재찬), 이문재, 박덕규, 하재봉, 박남철, 이혜경(소설) 등 25명이 라인을 형성했는데 모두 훗날 쟁쟁한 문인이 된다. 그 중심에 시와 경제와 함께 당시 양대 동인지로 불렸던 '시운동'이 있었다. 그는 고교 시절부터 사회적 이슈에 민감했다. '금기어(禁忌語)'나 마찬가지였던 '미군 철수'에 대한 생각을 담은 시 '옮겨 앉지 않는 새'를 발표했다. 그에겐 이름이 세 개가 있다. 본명은 이상백, 시인이 되면서 갖게 된 필명은 '이륭', 그리고 '이산하'다. 이륭으로 문학을 시작할 때 1탄으로 내민 200자 원고 80매 분량의 장편 시 '존재의 놀이'는 단연 문제작이 된다. 한국 최고의 문학평론가로 불렸던 김현에게조차 난해한 대상이었다. 이상의 '오감도', 2000년대부터 새로운 신장르 문학으로 주목받은 미래파의 난해한 시 못지않았다. 이 시는 신춘문예 본심에까지 올라갔지만 분량 때문에 당선작이 못 된다. 아깝게 여긴 심사위원이 현대시학, 세계의문학(민음사) 등단을 강권했지만 그는 고사한다.고교시절 미군철수 관한 문제작 발표4·3항쟁 폭로 '한라산'은 핵폭탄급먼저 안 자가 먼저 쓸 수밖에…1987년 3월 두 번째 내놓은 장편 서사시 '한라산'의 강도는 핵폭탄급이었다. 당연히 필화사건에 휘말린다. 그는 당초 '민족해방 서사시 전 3부작'을 구체화시키는 작업에 들어갔다. 핏자국으로 얼룩진 한국현대사의 백두대간을 종주하면서 혁명 전사들의 동맥을 잇는 아주 '리스크'가 큰 계획이었다. '장백산' '지리산' 그리고 '무등산'이 바로 그 동맥들이었다.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모 사회과학 출판사 편집부 직원을 만나 두툼한 일본판 번역 원고 하나를 입수하게 된다. 무려 40년이나 묻혀 있던 제주 4·3항쟁(이하 4·3)의 진실을 폭로한 '제주도 피의 투쟁사'(김봉현 지음)였다. 김봉현에 대해 신원을 알아보니 조총련 오사카지부 서열 3위인 '코뮤니스트'였다. 번역서 그대로 내면 출판사가 주범이 되지만 시집으로 내면 저자인 그가 주범이 되는 상황. 그는 '운명'이라 여기고 그 책을 토대로 서사시를 적는다.그건 주변 사람을 모두 죽음으로 내몰 수 있는 시한폭탄이었다. 그는 스스로 폭탄운반책이 아니라 제조책을 자임한다. 문득 고교 시절에 몰래 숨어서 읽었던 김지하 시인의 '오적'이 번쩍 생각났다. '아~ 씨발, 이런 게 진짜 시고 시인이지. 이런 시를 쓰지 않으면 떳떳하게 시인이라 할 수 없지. 나도 언젠가는….' 그 많은 사람 중에서 그 기회가 하필 나에게 주어진 것이라면 피하지는 말자. 피하지 말고 죽든 살든 한번 불 속으로 뛰어들어 보자. 폭탄이 하필 나한테 날아온 건 거창한 명분 이전에 어쩌면 계획된 운명의 실수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것조차도 거부하면 앞으로 이 세상은 나에게 어떠한 문도 열어주지 않을 거다. 폭탄이 터지는 것도 운명의 실수일 거다. 운명은 그런 거다. 먼저 안 자가 먼저 쓰는 것. 이번엔 내가 먼저 알았으니 내가 먼저 쓸 수밖에 없다는…. 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이산하 시인(2)에서 계속됩니다.제주 4·3항쟁을 테마로 한 대서사시 '한라산 필화사건'으로 모진 고문과 옥고를 치르고 출소했지만 '사회적 식물인간' 시절을 보낸 이산하 시인. 10여 년 간의 절필 시기를 딛고 1999년 '존재의 놀이'란 첫 시집, 그리고 올해 제2시집 '악의 평범성'(창비)을 펴냈고 덕분에 올해 김달진과 이육사 문학상을 동시에 거머쥔다. 그는 이제 더 이상 문학을 순수와 참여로 가르는 걸 거부한다. 동시에 그 어떤 정치 진영과도 거리를 둔 채 오직 시인으로 여생을 살겠다고 다짐한다. 조만간 제주도로 거처를 옮겨 인혁당 서사시를 쓸 모양이고 아울러 한라산 사건 재심을 대법원에 신청해 둔 상태다. 〈이산하 시인 제공〉
[김영복·이춘호 '한식 삼천리'] 조선조 땐 밥 종류만 34가지…韓食의 원형, 어디로 갔을까
세상의 음식이 무차별적으로 한식을 폭격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 한식은 회복이 힘들 정도로 크게 왜곡된다. 그리고 1980년대 후반부터 맹위를 떨치기 시작한 일식·중식·양식이 다시 한식의 본질을 크게 뒤흔들어 버렸다. 이명박 정권 때 한식세계화를 선언했지만 그건 본질의 한식이 아니라 퓨전 한식 알리기에 머물렀다. 한식이 너무 비틀려버려 사람들은 '이제 한국에는 한식(韓食)이 없다' 고 탄식할 정도다. 변형에 변형을 거듭한 결과 한식은 그 정체성을 잃어버렸다. '한식의 종언'이랄 수 있다. 각국으로부터 무차별로 수입되는 식재료, 퓨전요리 신드롬, 다국적 패스트 푸드의 맹위…. 이런 흐름은 결국 한민족의 유전자를 형성하는데 기여했던 한식의 법통을 수시로 변질시키고 있다. 누군 그 변질을 한식의 진화, 한식의 발전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요즘 새내기 셰프들은 한식의 원류·본질에 관심이 없다. '세계음식이 곧 한식'이라 여길 정도다. 그들은 되레 성공적인 마케팅, 창업 등에 혈안이 돼 있다. '잘 팔리는 메뉴'만 갈구한다. 그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한식이라는 게 일식·중식·양식의 변형태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음식 관련 학과 교수들조차 한식에 대한 인식이 극도로 박약하다. 위기의 한식문화, 그걸 안타깝게 주시하고 있는 식생활문화연구가 김영복(75), 그리고 경상도 음식의 원류를 추적하고 있는 이춘호 기자, 두 사람이 월 1회 한식을 주제로 나눈 대담 내용을 '한식 삼천리'란 주제로 연재하게 된다. 김씨는 한식 따라 전국을 주유하다 최근 대구에 안착, 남구 이천동에 문화사랑방 격인 전통식생활문화연구원에 머물며 원형에 입각한 진주냉면 전문점을 오픈할 예정이며 향후 원형의 한식 레시피를 전수하기 위해 셰프와 음식해설사 등을 위한 'K-푸카데미(한국푸드아카데미)'도 개설할 예정이다. 한식의 원형에 관심이 있는 지역의 외식업자, 그리고 독자제현의 폭넓은 관심과 제언을 바란다.◆한식이란.한식은 한국의 삼면이 바다라는 지형적인 여건과 사계절이 뚜렷한 계절적인 조건을 가지고 궁중요리, 반가음식, 사찰음식, 두레음식, 장터음식 등 사회 계층적 기반과 '향토음식'이라는 지역적 특수성을 가지고 태어났다. 이후 반만 년을 뛰어넘는 검증과정을 거쳐 면면이 이어져 온 우리만의 역사성을 가진 음식을 말한다.원시 수렵사회 및 어로 문화와 불의 발견으로 한 화식(火食) 문화는 구이(炙)문화를 낳는다. 그리고 구석기 시대의 무문토기, 신석기 시대의 원시 민무늬·빗살무늬토기를 중심으로 설치된 시루 및 부뚜막 등, 그리고 가야로부터 삼국시대 이후 철기문화의 영향을 받은 가마솥 문화는 찌고 삶는 '증숙(蒸熟) 문화'를 통해 한식 조리의 다양성을 가져오게 되었다.증숙(蒸熟)문화는 도기 문화와 수저 문화의 발달을 가져오게 되었다. 수저 문화는 고려 시대 탕반(湯飯) 문화 태생의 기반이 된다. 특히 사계절이 뚜렷한 계절적 영향은 다양한 산물이 생산되는 장점과 함께 계절이 바뀌어도 장기간 보관할 수 있는 저장법, 이를테면 삼국시대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말리고(脯), 삭히고(醬·醯), 다양한 저장법이 발달하게 되었다.내륙의 장(醬)문화의 발달과 함께 해안지방의 삭히는 문화는 서해에서 남해의 전남 광양까지 젓갈 문화와 동해에서 남해의 경남 하동까지 식해 문화로 극명하게 갈린다.고려 시대 초기는 불교의 영향과 개성 중심의 채식문화와 국수 문화, 고려 시대 후기 13세기는 대원제국(몽골제국)의 영향을 받은 탕(湯)문화가 삼국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수저 문화와 함께 탕국문화를 가져 온다. 이 탕국문화는 고려 개경(개성), 안동, 탐라(제주) 등 몽골군의 주둔지를 중심으로 곰국, 몸국, 설렁탕, 국밥, 해장국 등으로 놀라운 변신을 하면서 발전하게 된다. 한편 이 지역에서 태어난 개성 소주와 메밀국수, 안동 소주와 메밀만두, 제주 고소리술과 메밀 빙떡 등은 몽골의 영향을 부인할 수 없는 음식이다. 반면에 원나라 수도에서는 '고려양(高麗樣)'이 번진다. 대표적인 것이 우리의 유밀과인 '고려병(高麗餠)'과 소불고기인 '고려육(高麗肉)', 돼지불고기인 '고려저(高麗猪)'이다.고려 후기 1296년(충렬왕 22) 원나라 세자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그곳을 방문한 충렬왕이 유밀과를 내놓아 격찬을 받은 뒤 크게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 후기 사행 기록의 하나인 '계산기정'에 따르면, '고려보(高麗堡)에서 판매하는 송병(松餠) 혹은 속절병(粟切餠)이 조선의 떡을 본떠서 만들었다고 하여 고려병이라 부른다'고 했다. 이 중 속절병은 우리의 인절미와 같은 떡이다. 야오닝성(遼寧省) 고려보(高麗堡)에서 고려병을 판매하는 장사꾼은 조선 사람들이 이를 많이 사먹자 경쟁적으로 길을 막으며 먼저 팔려고 했다고 한다.중국에 고구려 시대의 '맥적(貊炙)'이 있었는데, 여기서 맥(貊)은 중국의 동북지방인 고구려를 지칭하고, 적(炙)이란 고기를 미리 조미한 후 꼬챙이에 끼워 직화에 굽는 것을 말한다. 즉, 중국의 고려육(高麗肉)이나 고려저(高麗猪)는'맥적(貊炙)'에 그 뿌리를 둘 수도 있다.◆조선조 밥 종류만 34가지조선 시대에 와서는 영·정조 시기에 음식문화가 절정기를 이루게 된다. 1400~1700년대 고문헌 50권에 나오는 밥의 종류만 34가지. 고조리서에 수록된 조리법 중 향신료가 사용된 조리법은 총 238개였다. 사용된 향신료는 겨자, 계피, 고추, 마늘, 천초, 생강, 정향, 참깨, 후추, 회향 등 모두 10종이었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일본 제국시대에 이르기까지 전쟁과 식민시대 풍속의 쇠퇴기와 외세의 영향으로 한식의 정체성이 훼손되기 시작한다. 오죽하면 구한말 이왕직 선무실주임 조동원씨가 1921년 4월4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개탄어린 쓴소리를 기고했다. 그 지적은 자못 심각하다. 이미 한 세기 전부터 한식의 원형이 크게 손상되고 있음을 암시한 섬뜩한 지적이다. '음식은 개량보다 부흥'이 필요하다는 제목 하에 "조선요리를 전문으로 한다는 각 요리점에서는 이익에만 눈을 뜨고 다시는 조선요리의 본질과 조선요리의 특색을 보존하여서 조선요리의 맛을 이어가려는 생각은 못하는 결과 점점 조선요리가 서양그릇에 담기고, 조선 신선로 그릇에 얼토당토 아니한 일본요리 재료가 오르는 것은 실로 아는 사람의 안목에는 도저히 그것을 순전히 조선요리라고는 할 수 없는 애석한 지경에 이르렀오. 그러할 뿐만 아니라 전유어 한 점, 찌개 한 그릇에도 다 각기 상에 오르기까지에 상당히 차이와 규모가 있어서 너무 차도 못 쓰고, 너무 더워도 못 쓰고, 너무 짜거나 싱거워도 못쓰는데, 도무지 일반요리점에서는 요리법이라고는 그대로 덮어 놓고 오직 어떻게 하든지 이익이나 보자하는 무서운 영업방침을 가지고 장사를 하는 모양이니 만일 외국손님이 조선에 와서 조선요리를 맛보겠다고 조선요리 집에 가면 되는대로 울긋불긋이 차려 내일 터이니 참으로 생각을 하면 부끄러울 일이다." ◆100년 전 한식 비판의 소리한편 조선 양념이 사라지거나 변한 것에 대해 이왕직(李王職) 전선과(典膳課)에 근무하는 이익환도 개탄해 마지 않는다. 역시 당시 조선요리 양념에 대한 개량보다 원상회복을 주장하는 내용의 기사가 1923년 1월2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실린다.우리 것을 지키고 그 가치를 보존하면서 외국의 문물을 받아들여야 함에도 우리 것을 간과하고 편의성을 따져 단순화시켜 온 우리 식생활 문화에 대한 회의적 내용의 기사들이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통해 한식은 많은 부분 사라지거나 잃어버리고 주로 서민들이 즐겨 먹던 향토음식이나 장터음식, 두레음식 등이 한식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특히 개화기에 한식을 표준화 및 계량화한다며 일본, 미국, 영국 등에서 공부를 한 영양학자들이 한식의 조리법을 개량 컵 같은 레시피로 만든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처사였다. 서양음식이나 일본음식의 조리법처럼 시종일관 '재료 1, 2, 3, 4, 5~만드는 법 1, 2, 3, 4, 5' 패턴으로 단순화시켰다. 자연 한식은 그 고유한 맛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게 된다. 이렇게 단순화된 조리법을 기초로 한 요리책은 50년 이상 이어오며 수많은 요리책을 양산하게 되었다. 시집가는 여성들에게 선물로 안겨진 그런 책이 한식의 전범처럼 전해질 수밖에 없었다. ◆양념과 배합과 숙성의 미학한식의 맛은 양념과 배합과 숙성에서 나온다. 그런데 각종 요리책의 조리법에는 이러한 부분이 대부분 생략되었다. 음악으로 말하자면 음(音)과 음 사이의 울림을 알아야 하는데 현재 우리의 요리법은 음밖에 모르는 것 같다. 마치 수초가 사라진 잘 정리된 강줄기의 물에서 진정한 산하의 울림을 공감하기 힘든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한편 영양학·조리학·가공학 등은 있으나 식생활 문화를 체계적인 학문으로 하는 전공자는 눈을 닦고 찾아봐도 없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한식의 정체성이나 스토리를 잃어버리게 되는 건 불을 보듯 뻔하다. 한식이 중국이나 일본에서 자국의 음식으로 둔갑해도 이에 대한 대응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위클리포유는 이번 주부터 전국 한식의 현장은 물론 인근 중국과 일본을 뛰어다니면서 문헌자료와 구전 등을 자료화해 오면서 한국 식생활 문화의 신지평을 열어 온 김영복 식생활문화연구가와 이춘호 음식전문기자가 함께 꾸며나가는 대담연재 '한식 삼천리'란 기획물을 싣는다. 두 사람은 동행취재를 하면서 대구·경북을 시작으로 팔도 한식에 대한 현장 점검과 특정 한식 메뉴 원형 복원 등을 통해 22세기를 대비한 한식의 본류를 탐험한다. 이와 관련, 한국음식포럼 정회원인 제주도 출신 양용진, 부산경남 출신 최원준, 통영 출신 이상희, 광주전남연구원 책임연구위원 김준, '음식강산' 저자 박정배, 한식연구가 황광해, 음식 원류 연구가 윤덕로 등과도 '크로스 체크 식 정보 공유망'을 형성할 작정이다. ▨대담=김영복 식생활문화연구가·이춘호 음식전문기자 ▨정리=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전국에서 가장 다양한 소고깃국을 가진 대구의 명물 따로국밥. 육개장 베이스에 사골육수, 그리고 선지를 섞은 게 특징이다.제주도의 명물 몸국. 모자반에 돼지 사골이 어우러져 있다.서울식 육개장을 닮은 대구발 조선육개장.전국에서 가장 오래 된 노포 중 하나인 서울 이문설렁탕.젓갈의 바다랄 수 있는 서해안의 대표적 별미 국인 우럭젓국.심각하게 왜곡된 한식의 원형을 팔도 음식연구가들의 증언 등을 통해 복원키로 다짐하며 대담연재 '한식 삼천리'를 진행하게 될 김영복(왼쪽)씨와 이춘호 음식전문기자.잔칫 날 끓여 먹던 경상도식 가마솥 소고기국밥 스타일인 경산 온천골 소고깃국.
[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 영호남 상생 서화 연대기(2)…20세기 남종화, 21세기 단색화…전통과 현대 융합한 'K-아트' 꿈틀
작가의 흥취가 글씨보다 그림에 있으면 어떻게 되는가? 자연스럽게 '산과 강(山河)'을 품게 된다. 그게 한때 동양화의 요체가 됐던 '수묵 산수화'. 물론 이 산수화가 민초의 일상까지 포함하면 풍속화, 민화 등으로 변화를 하게 된다. 산수화 속에도 붓글씨가 들어가는데 그게 바로 '화제(畵題)'다. 글씨가 주인이냐 그림이 주인이냐에 따라 서예가와 서화가로 나눌 수도 있다. 전주 세계서예비엔날레 눈길예천 출신 권창륜과 전주 출신 박원규전통·현대 융합한 '천인천각' 선보여영호남 서화의 새로운 도약 신호탄영호남 서화의 과거와 미래교류 물꼬 터준 사람은 소헌 김만호환갑축하 25인 휘호 병풍, 교류 상징전라도 산수는 추사와 소치의 기운야송·소산, 영남 산수화 신지평 열어솔거미술관, 내년 한국화 세계순회전美 LA서도 韓미술전 2차례 열릴계획한국화의 판도 바꿀 '빅 이벤트' 예상◆일본으로 미술 유학15세기 유럽에서는 빠르게 물감(유화)이 만들어진다. 1868년 서양식 일본의 신기원이 된 메이지 유신의 심장부로 그 물감이 밀려든다. 문방사우밖에 모르던 일제강점기 한국인 유학생은 일본 현지에서 이젤·캔버스·물감을 접하게 된다. 먹물과 물감이 미학적으로 충돌하게 된다. 20세기 초 비로소 한국형 회화가 발흥하게 된다. 1920년 이 나라에서 처음 '동양화'란 말이 등장한다. 이 동양화는 서양화와 구별하기 위해 1981년부터 '한국화'란 명칭을 갖게 된다. 이젠 동양도 서양도 없다. 설치미술, 개념미술, 공공미술, 팝아트 등 별별 미술 장르가 다 생겨났다. 동양화와 서양화의 구분도 무의미. 캔버스를 떠난 신종 미술이 수두룩하다. 1960년 초 앤디 워홀의 팝아트가 상종가를 칠 때 '현대미술의 종언'이 선언된 바 있다. 현재 대한민국 최고의 인지도를 가진 서예가와 화가는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둘 다 예천 출신이다. 그 두 사람은 한국서예단체총연합회장인 초정 권창륜(78), 그리고 국전 반대 운동을 주도했고 1970년대 한국 단색화의 기수이자 홍익대 미대 산파역인 박서보(90)다. 그리고 의재 허백련이 1977년 타계하면서 추사의 수제자가 된 소치 허련(1808~1893)에서 시작해 그 아들 미산 허형-손자 남농 허건-증손자 임전 허은, 의재의 손자인 허달재로 이어진 소치 일가의 전라도 수묵산수화의 명맥도 현대미술의 급습을 받고 숨 고르기 단계에 들어간다. 겸재 정선에서 발원한 한국 진경산수화의 기운. 추사를 촉매로 전해진 전라도 산수화보다 야송 이원좌(1939~2019)와 소산 박대성(1945~)한테 더 강력하게 스며들게 된다. 둘은 대구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다. 한국에서 가장 큰 가로 46곒 세로 6.7곒 '청량대운도'는 야송만의 '시점 이동 산수화'의 신기원. 한국 산수화의 백미였다. 의재와 남농의 산수화는 영남의 야송과 소산의 산수화를 만나면서 영호남 서화는 신지평을 확보한다. 넷 모두 서울을 거점으로 삼지 않고 광주와 목포, 청송과 경주에 배수진을 쳤다. ◆전라도 산수의 맥전라도 산수의 맥은 특이하게 추사 김정희와 그의 제자 소치 허련의 기운이 상생해 만들어 낸 문인화 기풍의 수묵산수화였다. 좀 부풀려 말해 20세기 한국 서화의 축이 단연 진도-목포-광주-전주를 연결하는 전라도였다면 한 세기가 지난 지금 야송과 소산 덕분에 영남의 서화는 새로운 르네상스를 맞은 셈이다. 그런데 아이로니컬하게도 영남의 서화는 온통 현대미술에 잠식된 것 같다. 그 흔한 근대미술관 하나 짓지 못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제대로 된 국제적 서화 관련 비엔날레 하나 잉태하지 못했다. 올해 13회를 맞는 전주 서예비엔날레가 아주 뜻깊은 전시를 선보였다. 서두를 장식한 '천인천각천자문'이란 전서체 글씨는 초정 권창륜, 그리고 말미에 놓인 작품 설명 발문은 강암 송성용의 제자로 상경해 서예의 전통성과 현대성을 융합하는 데 힘을 쏟고 있는 하석 박원규가 적었다. 국내 770명, 중국에서 230명이 한 글자씩 골라 돌에 각을 해서 집행위 측에 보낸 것이다. 이 작품이 바로 한국서예의 총체적 호흡, 특히 영호남 서화의 새로운 도약대를 의미하는 신호탄으로 보였다.◆남도 남종화의 맥고래로 동아시아 화가의 존재방식은 크게 둘이다. 국가의 그림 제작 관청인 '도화서'에서 직업으로 그림을 그리는 '화원', 그리고 취미로 자신의 사색의 깊이를 그림으로 풀어내는 사대부 전유물이랄 수 있는 문인화가 있다. 전자는 국장, 국혼 및 국가의 주요 행사와 관련된 의궤도(儀軌圖), 초상화, 양반들의 아회(雅會) 같은 실용적인 걸 주로 그리는데 이를 '북종화' 계열, 후자 문인화를 '남종화'로 분류한다. 그런데 명나라 회화이론가 동기창(1555~1636)은 '남북종화론'(소치 허련·김상엽 저, 돌베개, 2008년)을 통해 남종화의 우월성을 주창하게 된다.전라도 남종화의 단초가 된 소치 허련은 진도 출신의 무명 화가였다. 28세 때 초의선사의 소개로 윤두서의 후손 윤종민과 김정희를 소개받는다. 이후 소치는 뛰어난 그림 솜씨에 시와 서예를 겸비하게 되면서 조선 화단의 다크호스가 된다. 40세를 전후해서는 여러 차례 헌종 앞에서 그림을 그려 바쳤다. 남도 남종화의 총사령부가 처음에는 진도 운림산방이었다. 이유가 있다. 소치는 1856년 스승인 추사 김정희가 타계하자 고향에 내려와 초가를 짓고 터를 잡는다. 그는 더 이상 중국의 산수화 화풍을 답습하지 않고 조선 회화만의 특성을 잘 살린 화가였다. 허련의 화풍은 그 누구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이 독특하였는데 붓을 다루는 솜씨가 강직하였고, 구도 및 수묵의 농암 표현이 자유분방하였다. 따라서 허련 이후부터 조선 남종화가 중국 남종화 화풍에서 벗어나 조선 남종화만의 특성을 지닌다. 허련의 특성은 아들 미산 허형을 거치고 그 아들인 남농 허건에게 전해진다. 허건도 실험적이었다. 고답적인 조선의 회화 양식에서 벗어나 특유의 '신남화(新南畵)'라는 새로운 화풍을 만들어 내었다. 허건의 동생 허림은 일본 유학 중 사물을 점으로 표현하는 '토점화'라는 독창적인 화법을 발전시켜 일본 화단에서 주목을 받았으나 요절한다. 임전 허문은 소치의 고손자. 구름과 안개의 움직임을 수묵 담채로 잡아낸 동적인 한국화 '운무(雲霧) 산수'라는 독자적인 화풍을 개척했다. 이 흐름에서 파생된 대가가 바로 의재 허백련이다. 남농은 목포, 의재는 광주를 축으로 1938년 창설한 '연진회'를 통해 제자를 양성해 호남을 예술의 본고장으로 만든다. 개괄적으로 볼 때 전남은 산수화, 전북은 서예, 영남은 문인화 계열이 강세였다.◆영호남 서화의 교류1922년 불세출의 서예가 석재 서병오가 대구에서 '교남시서화 연구회'를 만들 때 직접 작품을 출품하면서 교류를 하기 시작한 사람은 의재 허백련이었다. 결정적으로 영호남서화 교류의 물꼬를 터준 사람은 봉강 문하를 일군 소헌 김만호. 현재 소헌미술관을 지키고 있는 그의 아들 김영태가 그 사정을 지역 신문을 통해 알렸다. 소헌의 필명이 알려진 건 1960년대부터. 이때 원곡 김기승, 일중 김충현, 어천 최중길, 동강 조수호, 여초 김응현, 전주 송곡 안규동, 한학자 이가원과도 교분이 두터웠다. 1976년 국전 인연으로 만난 광주의 송곡 안규동과 의기투합 영호남교류전을 시작하게 된다. 88고속도로도 없던 시절이라 그 교류는 끈끈할 수밖에 없었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때문에 잠시 중단 위기도 맞았지만 곧 재개됐고 그 흐름이 달빛동맹으로 개화된다. 60년대 대구 서예계의 중심축이었던 '해동서화협회'의 소당 김대식, 목산 나지강, 계전 최현주, 죽농 서동균, 학연 문기석, 삼우당 김종석, 희재 황기식, 긍농 임기순 등도 전라도 서화인과 교류를 했다. 소헌이 이끌던 봉강서도회는 1968년 전국적 관심을 불러일으킨 제1회 봉강서도회서예전으로 확고한 기반을 갖게 된다. 소헌 환갑 때는 전국구 서예가 25인이 축하 휘호를 보내왔다. 전라도에서는 의재 허백련, 남농 허건, 송곡 안규동, 강암 손성룡. 이밖에 당시를 호령하던 일중 김충현과 여초 김응현도 동참했다. 이 작품들은 한데 합쳐져 25인 합작 '송수병'으로 태어나게 된다.재평가 되어야 할 서예가가 있다. 유당 정현복이다. 진주 촉석루, 해인사 해인총림 현판 글씨를 썼다. 천석 재산을 서예를 위해 다 쓸 정도로 붓글씨에 정성을 쏟았다고 한다. 촉석루는 유당이 50세 때 쓴 작품으로 원래 이승만 전 대통령의 글씨로 만들었으나 민주당이 집권하면서 그 글씨를 깎아내고 유당의 글씨를 새로 새겼다고 한다. 작품 하나를 건지기 위해 500장을 썼다고 한다. ◆영호남 서화는 단색화를 낳고21세기 추사 정신을 들라면 나는 '한국 단색화(Monochrome painting)'를 들고 싶다. 1972년 한국미술협회 주최 제1회 앙데팡당전이 그 시원이다. 이때 이동엽의 '상황', 허황의 '가변의식'이 단색화의 첫 징후라고 미술평론가 윤진섭이 지적했다. 2000년 제3회 광주 비엔날레 특별전 '한일현대미술단면전'. 이후 단색화가 뚜렷한 트렌드를 형성한다. 윤진섭은 이 흐름을 'DANSAEKHWA'라 명명한다. 단색화의 원조격은 1961년 미국에서 '청색 점화'를 그리기 시작한 김환기, 그리고 이우환의 정신적 사부랄 수 있는 달성군 출신 곽인식. 그는 1961년 'WORK61' 'FIELD FIVE' 등 빨강 노랑 단색화를 선도한다. 이후 이우환이 1968년 도쿄 국립근대미술관에서 '한국현대미술전'을 열었을 때 핑크, 빨강 계열 단색화 3점을 '풍경 1,2,3'으로 전시한다. 단색화를 먼저 주목한 건 우리가 아니라 일본이다. 도쿄화랑 야마모토 다카시 대표 등이 먼저 주목한다. 그 관심망에 들어 온 최초 5인은 '박서보, 서승원, 이동엽, 허화, 권영우'. 하지만 아직 세계 최고, 꿈의 갤러리로 불리는 구겐하임에 명실상부하게 론칭 될 수 있는 한국 화가는 박서보도 이우환도 아니고 오직 백남준뿐이다.새로운 서광도 비치고 있다. 미국 LA카운티미술관의 마이클 고반 관장이 4년간 공을 들여 2019년 6월 '선을 넘어서-한국 글씨 아트전'을 오픈했다. 2022년, 2024년 20세기 한국미술전과 한국현대미술전까지 계획 중이다. 파급력이 상당할 것 같다. 아울러 경주엑스포대공원 솔거미술관은 내년부터 박대성을 중심으로 한국화의 브랜딩을 통한 3년간 일정의 세계 순회전에 착수할 모양이다. 호남은 서화 비엔날레, 영남은 한국화 브랜딩 순회전, 이게 합쳐지면 한국화의 판도를 바꿀 '빅매치'가 될 것 같다.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취재협조=현초 이호영, 일파 박영근, 청가 고홍선, 소헌미술관, 강암서예관, 청목미술관 박형식 대표. ☞[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 영호남 상생 서화 연대기(3)에서 계속됩니다.소헌 김만호가 현판체로 적은 '봉강재(鳳岡齋)', 소헌의 해서체는 전라도와 달리 영남 사대부의 웅혼함과 고졸함이 태백산맥처럼 우뚝한 기운을 뿜어낸다. 〈소헌미술관 제공〉경남 진주 출신의 유당 정현복(1909~1973)이 50세에 적은 진주 촉석루 현판 글씨. 광복 이후 전국구 국전 초대작가로 활동하다 일찍 타계해 명성이 덜 알려져 있다.영남과 호남의 서화는 겸재 정선과 추사 김정희의 산수화와 글씨를 토대로 석재 서병오, 회산 박기돈, 긍석 김진만, 죽농 서동균, 소헌 김만호, 그리고 전라도는 소치 허련을 필두로 미산 허형, 남농 허건, 의재 허백련, 그리고 전주 서예는 강암 송성용, 석전 황욱, 남정 최정균, 여산 권갑석, 운봉 이재수 등을 축으로 한국화의 신지평을 열어갔다. 올해 13회를 맞는 전주 세계서예비엔날레에서는 예천 출신 초정 권창륜, 전주 출신의 하석 박원규의 기운이 영호남적으로 소통돼 '천인천각천자문'으로 피어났다. 〈전주 세계서예비엔날레 조직위원회 제공〉강암 송성용이 그린 '죽림도'. 서양화식 원근법이 적용돼 훗날 그의 대표적 문인화로 불리게 된다.〈강암서예관 제공〉1920년대 석재의 작품. 글자마다 결구와 장법이 조화롭게 엮어져 있다. 석재 도록에서 발췌
[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 영호남 상생 서화 연대기(1)…영호남 서화의 맥 서로 통달하는 중
한국 서화의 맥은 결국 영호남에 집중된 것 같다. 물론 '문자 추상'의 개척자였던 두 예술가, 예산 출신의 추사 김정희, 고암 이응로가 홍성에서 태어났으니 충청도 서화도 발언권이 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전체 얼개를 보면 돌출하고 지속적이고 맥통의 색깔이 분명한 영호남 서화의 위세에 비하면 충청도 서화의 맥은 상대적으로 단발적이다. 한국 서화, 아니 영호남 서화의 본질은 뭘까. 2013년 시작된 '달빛(대구와 광주)동맹'을 통해 영호남 서화도 동지적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과연 그보다 앞선 영호남 서화 교류의 첫 단추는 뭘까? 그게 궁금해 여러 전문가를 만나고 자료를 뒤지고 전라도권의 미술관 등을 기행해보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선이 모여 '형(그림)'을 만든다. 그 선을 '획'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서예는 회화(동양·서양화를 포함)의 뿌리다. 붓글씨는 흥미롭다. 글씨를 적다 보면 그림으로 젖어 든다. 5체(해서, 행서, 예서, 전서, 초서)에 능해지면 자연스럽게 획은 사군자(매난국죽)로 웅비한다. 글이 곧 그림이 돼 버린다. 이게 문인화의 요체다. 서예라고 하면 의당 붓글씨 5체와 사군자가 세트로 붙어 다닌다. 이 바닥에선 그걸 '문자향 서권기가 있고 시서화가 한 몸이 된 삼절(三絶)'이라 칭한다. 한학적 실력까지 겸비해야 된다. 그 길은 형극의 길이다. 이제 삼절형 문인화는 박물관에서 찾아야 될 것 같다. 오히려 현대미술이 더 치열성을 확보하고 있다. 언론과 갤러리의 관심도 거기로 쏠리고 있다. 그 유명하다는 석재 서병오, 석전 황욱의 옥션 거래가가 100만원도 못 넘고 있다.지금은 '한글 전용시대', 무늬만 서예가인 사람도 부지기수이다. 수많은 공모전 등도 점차 권위를 잃는다. 서예가의 인품은 점차 문파적이고 세속화되고 있다. 다들 명예와 돈에 휘둘린다. 20세기 거장들의 고매한 인품과 치열한 작가정신은 찾아보기 힘들다.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기 시작한 현대서예는 너무 질퍽거려 진로를 잘 찾지 못하고 있다.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온 게 서양화 진영의 수묵 정신이다. 그와 맞물린 제주도 출신의 두 화가. 변시지(1926~2013)와 강요배다. 현재 대구미술관에서 이인성미술상 수상작 전시 중인 강요배는 '황색의 절규'를 말하는 듯한 변시지의 정서를 제주도스럽게 이었다. 으스스한 한의 정서를 자신만의 갈필 기법으로 적셔간다. 형식은 서양화인데 본질은 지극히 동양적이다. 그는 수묵화 같은 서양화의 신지평을 열었다. 한국미의 본령을 건드린 셈이다. 흔히 청전 이상범, 이당 김은호, 소정 변관식, 심산 노수현, 심향 박승무, 춘곡 고희동, 묵로 이용우, 정재 최우석, 무호 이한복, 의재 허백련 등을 '근대미술 10대가'로 부른다. 지난해 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이 주최한 '한국근대서예명가전 23인전'. 석봉 고봉주, 원곡 김기승, 영운 김용진, 여초 김응현, 일중 김충현, 효남 박병규, 동정 박세림, 시암 배길기, 석재 서병오, 죽농 서동균, 평보 서희환, 소전 손재형, 강암 송성용, 검여 유희강, 철농 이기우, 갈물 이철경, 월정 정주상, 학남 정환섭, 동강 조수호, 남정 최정균, 어천 최중길, 소암 현중화, 석전 황욱이 선정됐다. 전라도 출신은 평보, 강암, 석전, 남정 등이고 영남 출신은 석재·죽농·동강·시암·월정·효남이다. 전라도의 송곡 안규동, 그리고 한때 근대서예 10인에 포함됐던 대구의 소헌 김만호, 그리고 촉석루와 해인총림 현판 글씨를 적은 진주 출신의 유당 정현복이 빠진 게 '옥에 티'였다.상당수 1세대 거장들은 한국이란 조건 때문에 모두 붓글씨에서 출발, 나중에 새로운 가능성을 보고 서양화 쪽으로 터닝했다.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로 불리는 춘곡 고희동(1886~1965), 한국 최초 누드화를 그린 김관호(1890~1959), 그리고 대구 출신의 이인성(1912~1950), 전남 신안군 출신의 김환기(1913~1974), 박수근(1914~1965), 수묵 추상의 신지평을 연 대구 출신의 산정 서세옥(1929~2020), 청송 출신의 남관(1913~1990), 전남 화순 출신의 오지호(1905~1982), 운보 김기창(1913~2001)…. 한때 '서화라 하면 전라도'라 했는데 지금 그 중심축이 영남 쪽으로도 성큼 이동하면서 '영호남 상생 서화'의 새로운 미래가 도래하는 것 같다. 그 연대기 속으로 들어가 본다. W2면에 계속 글=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그래픽=최은지기자 jji1224@yeongnam.com☞[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 영호남 상생 서화 연대기(2)에서 계속됩니다.
[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사진가 류태열(2) 칼바람 맞으며 갓바위 77번째 오르던 날, 동이 트자 불국토가 펼쳐졌다
나의 목공 기술은 한 단계 더 고급스러운 직장으로 인도된다. 대구백화점 8층에 있었던 대백화랑이었다. 당시 상아·무지개 등 시내 곳곳에 미술용품 전문가게가 있었는데 대백화랑도 메이저급으로 대우받는다. 자연스럽게 지역에서 명성을 날리는 화가와 사진작가 등을 지켜볼 수 있었다. 거기서 고난도의 액자 만드는 기술을 전수한다. 1년 후 중구 화전동 자유극장 뒷골목에서 '태 갤러리'를 오픈한다. 그 갤러리는 화전동을 거쳐 2004년 약전골목 남쪽 초입으로 이전, 2020년까지 존속한다.그 갤러리는 액자 업계에선 나름 실력을 인정받는다. 당시 서울에서조차 구할 수 없었던 사진 원판을 덜 산화시키는 중성지를 미국으로부터 수입했다. 전남 광주의 모 대학 강용석 교수(현재 백제예술대 사진학과)가 중성지 관련 정보를 알려준 덕분이다. 서울에 있던 구본창과 김아타, 그리고 훗날 내 사진의 사부가 된 이상일, 화가 이봉기, 조각가 이재홍 등이 단골이 된다. 사진과 조우한 목공기술자 목공실기교사 하다 사진에 눈 떠 액자 전문 갤러리 운영하며 출사"사진은 무슨…" 작가들 냉소도◆첫 화두는 장승20여 년의 태 갤러리 시절, 사진가가 되는 데 필요한 기본기를 축적해나갔다. 1985년 생애 첫 카메라를 구한다. 삼성카메라였다. 다음은 니콘 F3, 다음은 핫셀, 다음은 독일제 612 파노라마 카메라인 닌호프(Linhof) 등을 소유하게 된다. 처음 관심을 둔 피사체는 '장승'이다. 한국의 얼굴, 난 그걸 장승에서 발견하고 싶었다. 평일에는 갤러리 업무에 집중했고 주말이 되면 장승 탐사에 나선다. 목장승은 충청도권, 돌 장승은 전라도권에 많이 집중돼 있었다. 내비게이션도 없던 시절, 장승 소재지를 찾는 일은 너무나 어려웠다. 수소문의 나날이었다. 1990년대로 넘어가던 시절. 한국 장승은 사몰 위기에 내몰린다. 1970년대를 넘어오면서 새마을운동 등으로 인해 상당수가 없어진다. 제주도 돌 하르방, 전남 섬지방에 흩어져 있는 벅수 등 돌 장승류는 도난 품목 1호나 마찬가지였다. 장승은 마을 어귀 당산나무 근처에 많이 세워져 있었다. 잡신들이 발호하는 걸 막는 일종의 벽사 수호목(守護木)이었다. 한국의 혼, 그 한 줄기가 장승에 스며 들어가 있었다. 그게 사라지고 있었고 사진가는 의당 기록할 의무가 있었다. 지역 사진가들이 고운 시선으로 봐주지 않았다. '사진은 무슨…, 액자나 만들면 되지…'. 그런 냉소는 견디기 힘들었다. 전국 130여 개의 목·석장승 사진을 골라 2001~2002년 대구·부산·서울에서 전시회를 가졌다. 내 사진의 사부인 이상일 사진가의 소개로 서울 인사동 HAUT 갤러리에서도 초대전을 할 수 있었다. 강상규, 김재수, 강위원 등 대구 사진계 리더들이 갤러리를 찾았다. 장승 찾아 삼만리 사라지고 있는 '한국의 얼굴' 전국 장승 수소문 해가며 기록 130여점 대구·부산·서울서 전시 사진계 리더들도 내 작품 봐줘◆마애불에 도전하다장승이란 조그만 구멍 안으로 들어가 무릉도원 같은 불교미학을 만나게 된다. 성황당·상여집 등이 불교를 만나 산신각·칠성각 등으로 회통하게 된다. 내 사진 화두 2탄은 바로 마애불. 전국 마애불을 모두 찍어보고 싶었다. 일단 갓바위부터 탐험하기 시작한다. 그동안 갓바위 사진은 올려다 보면서 앙각으로 찍은 것들이 주종이었다. 위로 올라가 갓바위 시선으로 대구 권역을 담아보고 싶었다. 1년6개월 이상 선본사 측에 졸라대서 겨우 허락을 받아낸다. 얼추 갓바위를 위해 팔공산을 200번 이상 올라갔다. 77번 올라가던 날을 잊을 수 없다. 한겨울 산 위에서 노숙을 했다. 설한풍 사이로 희붐하게 동이 트고 있었다. 순간 내 눈 앞에 불국토가 깔린다. 멀리 경산권이 운무에 숨겨진 신비한 사진이었다. 2009년부터 2011년까지 갓바위 특집전을 한다. 이후 경주 남산 신선암과 칠불암, 서산 마애불, 월악산, 경주 선도산 등 15년간 전국 120여 곳의 지방을 돌면서 184점의 마애불 사진을 낚을 수 있었다. 대구사진비엔날레 때 공개했는데 반응이 좋아 미국 휴스톤에 있는 갤러리 포토페스트로부터 초대를 받는다. 2017년 마애불 도록이 나왔다. 이때 강우방 전 경주국립박물관장이 발문을 보내왔다. 그는 내 사진을 두고 '적정의 다큐멘터리'로 명명했다. '작가와 대상이 하나가 되어 있다'고 격려를 해주었다. 사진가 구본창은 2007년 경주 선도산에서 찍은 마애불 사진을 구입해 갔다. 모두 사건에 가까운 감동이었다.불교미학에 심취 갓바위 시작, 15년간 마애불 천착 사진비엔날레 호평 받고 美초대전 봉정사·화엄사…'절의 혼' 담기도 불상의 본질, 빛과 그림자로 구현 경주 토함산 석굴암 '인생의 과제' ◆절집을 찍자불상 촬영이 늘어날수록 친해진 주지 스님도 늘어났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안동 봉정사도 2017년 사진집·개인전을 연결하는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행자가 된 양 요사채에서 1년간 머물 심산이었다. 얼추 200일 정도 절집에서 공양한 것 같다. 절은 단순한 피사체가 아니다. 모양만 봐선 안 된다. 창건·중창 관련 구전설화, 유명한 승려들의 야사, 소유한 국보와 보물 등의 흐름등을 모두 꿰차고 있어야 한다. 절집 사진은 빛과의 싸움이다. 사계절의 빛이 어떤 각도와 세기로 어느 지점에 떨어지는지를 간파해야 된다. 그리고 눈, 비바람, 안개, 달빛 등이 어떻게 스며드는가도 주요 변수다. 불상의 본질은 빛과 그림자의 대비를 통해 구현된다. 불상의 금빛은 너무 강한 자연광 앞에서는 제대로 포착되지 않는다. 조명을 쏘아 부딪혀 나오는 반사광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대낮보다 한밤이 제격이었다. 달빛도 거추장스러웠다. 조심조심 노심초사 해가며 촬영하니 주위 스님들은 다들 "대충 찍어라"고 위로한다. 어렵사리 2018년 120쪽의 도록이 출간된다. 또 다른 봉정사의 역사랄까.화엄사 주지 덕문 스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갓바위 촬영 때 집요한 내 근성을 옆에서 지켜본 분이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역사책 같은 사진집을 만들지 마라"고 했다. 나만의 시각을 원했던 것이다. 나는 10개의 범주를 만들었다. 조화, 문, 의식주, 느낌, 도, 붓다, 고요, 공, 말사 등이었다. 촬영 주제는 '절의 혼(Soul of the temple)'이었다. 산의 라인, 절의 처마와 기와의 선, 그리고 꽃과 숲의 라인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파고들어 거기에 가장 맞는 각도를 찾아냈다. 고품격 미학을 찍기 위해 드론을 날렸다. 추운 겨울 오전 1시30분, 눈 맞은 각황전의 아득하고 적막한 아름다움 앞에서는 셔터가 쉬 눌러지지 않았다. 대웅전 앞 석등 꼭대기 보주에 걸린 절묘한 달무리 한 컷을 위해 1주일을 장고해야만 했다. 그리고 노트 한 권 크기의 파편으로 남은 '화엄석경'을 간신히 빌려 계곡에 집어넣었다. 물의 어른거림과 어울리는 석각된 한자 글씨체를 탐색했다. 너무 또렷한 것도 아니고 너무 흐릿한 것도 아닌 모습, 그러려면 알맞은 유속을 유지해야 된다. 이리저리 돌의 위치를 수십 번 바꾸고 수백 컷을 찍었다. 그렇게 고생한 화엄사 사진은 2019년 화엄사 성보박물관에서 전시되고 도록도 출간된다. ◆남은 개인전, 그리고 나의 꿈조계종 산하에 26개 교구 본사가 있다. 죽기 전에 그 사찰을 모두 사진으로 남기고 싶다. 불교예술의 정곡을 찌르고 싶다. 특히 팔공산에는 두 개(동화사·은해사) 본사가 있는데 은해사에 딸린 거조암에는 오백 나한상이 있다. 저작권은 절과 내가 동시에 공유하기로 하고 1년간 나한전에서 쪽잠을 자면서 촬영을 했지만 원하는 사진이 아니라서 다 버렸다. 빛과 각도의 문제였다. 나한을 모두 밖으로 끄집어내 재촬영을 했다. 하지만 아직 나한전 개인전을 못 하고 있다. 제대로 보여주려면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구미술관 정도의 크기라야 하는데 아직 장소 섭외 문제로 고민 중이다. 동남아 불교국가의 영성을 얻기 위해 5년간 태국, 캄보디아, 미얀마, 라오스 등 6개국 불교미술을 촬영했지만 아직 개인전을 못하고 있다. 경주 토함산 석굴암도 제대로 촬영하고 싶었는데 내게 허락된 시간이 너무 짧아 부족한 사진만 찍고 말았다. 언젠가 류태열 버전의 석굴암을 찍고 싶다.■사진가 류태열은?충북 옥천에서 태어났다. 대구로 온 뒤 대구백화점 내 대백화랑을 거쳐 중구 화전동에서 액자 전문 갤러리 '태'를 운영하며 사진촬영을 병행했다. 1996년 첫 개인전을 연 그는 이후 한민족의 숨결이 담긴 장승 촬영을 시작으로 전국 각처의 마애불, 그리고 새로운 모습의 갓바위 시리즈를 건졌다. 2년 일정으로 안동 봉정사, 지리산 화엄사의 미학을 촬영했고, 안개와 바다 이미지를 주제로 한 5번의 존재 시리즈를 엮어냈다. 2011년에는 마애불을 주제로 미국 휴스톤 포토페스트갤러리 초대전도 가졌다. 마애불·화엄사 등 모두 6권의 도록 및 사진에세이집을 펴냈다. 코로나19 시즌에는 인간관계의 중요성을 절감하며 소중한 인연 35명을 선정해 '내가 만난 사람들'이란 개인전, 청도군의 요청으로 '청도의 사계' 사진집도 펴낸다. 사진은 개인전 도록과 에세이집. 글·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마애불 시리즈 중 경산 방향으로 찍은 갓바위의 색다른 모습. 〈류태열 제공〉경주 남산 신선암 마애불의 신령스러운 자태. 〈류태열 제공〉초봄 흑매화와 오버랩된 지리산 화엄사 각황전 아미타불. 〈류태열 제공〉사진을 처음 시작했을 때 심취의 대상은 장승이었다. 장승 앞에 선 젊은 날의 류태열. 〈류태열 제공〉
[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사진가 류태열(1)... "사진은 찍는 것이 아니다, 피사체에 내가 찜 당하는 것"
카메라는 절대 주인의 안목을 능가 못 해취미 수준의 욕망으론 예술을 할 수 없어절묘한 순간, 모두가 갈망하는 바 이지만아무도 알려줄 수 없고 전수해줄 수 없어장승·마애불·불상…'얼의 본령' 담는 중사진기 옆에 사진작가가 있다. 자연은 둘 사이에 '연골'처럼 박혀 있다. 사진기가 존재하는 것은 그 어떤 피사체 때문이다. 피사체 앞에 선 사진기와 사진작가. 누가 주인공인가? 애송이 시절에는 사진기가 사진을 가져다주는 걸로 착각한다. 그래서 초심자들은 저급에서 벗어나 고급 사진기로 기종을 자꾸만 업그레이드 한다. 하지만 지상 최고의 사진기를 손에 넣어도 원하는 사진이 나오지 않는 시절이 온다. 그때는 어떻게 하나?절체절명, 한계의 순간이 도래한다. 자신이 뭘 찍고 싶은지를 모른다는 것, 모든 걸 찍고 싶다는 것, 둘 다 사진가를 절망케 한다. 취미 수준의 욕망으로는 절대 예술의 범주로 스며들 수가 없다. 사진기는 절대 주인의 안목을 능가하지 못한다. 눈 깜짝하는 사이 좌르륵~, 사진기가 '연사'란 방식으로 뭔가를 포착해내지만 '바로 이거야' 란 탄성을 자아내게 하는 결정적인 한 방의 사진은 그런 연사의 그물망에는 걸리지 않는다. 절묘한 순간, 천의무봉의 순간, 그건 모든 예술이 갈망하는 바지만 그게 어떻게 가능한 건지는 아무도 알려줄 수 없고 전수해줄 수도 없다. 기술은 설계도가 있지만 예술에는 그게 없는 탓이다. 그래서 예술은 인생보다 더 유구하고 장구할 수밖에. 다들 절망의 보법으로 '신탁의 시간'을 기다린다. 그게 예술의 희망이자 절망 아닌가.1996년 대구 동아쇼핑 내 동아갤러리에서 생애 첫 개인전을 열었다. 애송이 풍경 사진이었다. 이후 나는 모두 15번의 개인전, 6권의 도록 및 에세이 집을 펴냈다. 2회 개인전부터 주제를 확실하게 정했다. 장승, 그리고 마애불, 다음에는 불상, 사찰 등으로 주제를 심화시켜 나갔다. 이제 비로소 나는 '나만의 것을 찍는 류태열'이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지금 나는 사진의 강을 벗어나 사진의 바다로 접어들었다. 강의 시절 내 사진은 다소간 균형과 비례, 그리고 섬뜩한 아름다움의 정령을 파악하려고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 정령은 본질을 보지 못한 '어떤 시류에 휩쓸린 상업적 미학의 일단'이란 것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사진가가 아니면 하지 못 하는 일 그것은 내가 태어나고 내가 자라나고 끝내 내가 죽어 파묻히게 될 조국 산천, 그 한반도에 깃들어 살아온 한민족만의 문화 정신, 다시 말해 '얼의 본령' 같은 걸 사진으로 담아야 된다는 천명을 절감하게 됐다. '류태열 버전의 포토 다큐멘터리즘'이라고나 할까? 나는 지금 아주 어스름한 경북 청도군 각북면의 한 강변에 닻을 내리고 살고 있다. 복합문화공간 같은 갤러리 '해브(HAVE)'의 큐레이터로 일 하며 틈틈이 별채에 마련된 내 숙소 겸 사진스튜디오에서 나만의 빛을 연구하고 있다. 낮에는 이 공간을 찾는 이들에게 커피와 차를 서빙한다. 해가 지면 야성의 시간으로 침잠하게 된다. 사람 소리, 자동차 소리, 심지어 농가의 창문으로 스며 나오는 불빛조차 귀한 사진 원판 같은 깜깜한 밤. 더욱 초롱해지는 나를 인화한다. 달과 별빛 쪽으로 내 맘을 전송해 보며 지나온 날과 다가 올 날의 사진들을 파노라마처럼 완상하고 있다. 나는 아주 오래, 사진이란 찍는 건 줄 알았다. 그게 아니었다. 사진은 결국 '피사체한테 내가 찍히는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찍는 것의 미학은 '아름다운 풍경'에 걸려 넘어진다. 잘 빚어진, 그 알량한 풍경이란 놈은 얼마나 치명적인가. 풍경 그 너머, 그걸 누가 가르치고 누가 배울 수 있단 말인가.1958년 충북 옥천에서 태어난 나는 농사 짓는 가난한 부모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가난의 명령 때문에 세 형은 모두 직장으로 가버렸다. 우리 집에선 대학도 사치품이었다. 이원역 앞에 우리 집이 있었다. 역전 장돌뱅이. 그게 유년기 내 자화상이었다. 그 시절 '역전문화'란 예의와 범절을 조롱하는 것, 자연 나도 성난 말벌처럼 또래와의 관계를 피멍으로 망가트렸다. 보다 못한 어머니가 날 사람 만들기 위해 대구로 불러 내렸다. 15세 무렵이었다. 남구 대명동 미도극장 근처 언덕배기 판자촌에서 얼기설기 살았다. 어쩔 수 없이 형이 다니던 가구공장 견습공이 된다. 등교하는 또래 학생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그게 내 첫 열등감이었다. 검정고시를 통해 인하대 영문과에 입학하지만 이내 그만두고 다시 9급 공무원 시험에 매달려 합격한다. 중구 남산동의 모 동사무소가 첫 근무지였다. 지금은 대단한 자리지만 그때는 그렇게 궁상맞은 자리도 없었던 것 같다. 두 달 만에 때려치운다. 가구공장에서 배운 목공기술 덕분에 동구에 있는 성보특수학교 목공 실기교사로 채용된다. 3년 정도 찐득하게 앉아 있었다. 그때 우리 학교 장애우를 촬영하던 사진작가 차용부의 사진에 크게 매료된다. 내가 목공을 대하는 자세보다 더 진지하고 성실하고 깊이가 있어 보였다. 그는 미국으로 사진을 배우러 유학을 떠났다. 귀국해 개인전을 했을 때 그를 찾았다. 그게 내 사진의 첫 단추 시절이랄 수 있다. 글·사진=이춘호 음식·대중문화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사진가 류태열(2)에서 계속됩니다.1985년 생애 첫 카메라를 손에 거머쥔 사진가 류태열. 그는 장승, 마애불, 불상, 안동 봉정사, 지리산 화엄사, 팔공산 은해사 거조암 오백 나한상 등 한민족의 얼과 맞물린 불교예술의 정수를 사진으로 포착해 그동안 모두 15번의 개인전을 열고 6권의 도록 및 에세이집을 출간했다.청도군 각북면 복합문화공간 갤러리 '해브'의 큐레이터 일을 하면서 사진스튜디오 작업을 겸하고 있는 류태열. 그는 모두 5번의 존재 시리즈를 통해 불교 관련 흑백사진과 맞물린 안개와 바다의 다양한 모습을 포착하기도 했다. 그가 갤러리 카페 벽면에 걸린 자기 사진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동대구로에서] 정치…청맹과니 CCTV 같은
지난 세기에는 성실과 부지런함만 있으면 절대 산 입에 거미줄을 치지 않아도 됐다. 그런데 그 속담도 이젠 시대착오적인 것 같다. '구멍가게 정신'은 갈수록 조롱감이 되고 있다. 구멍가게 하나, 하지만 옆에 독버섯(?)처럼 생겨난 막강한 다국적 대형매장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된다. 결국 편의점한테 먹혀버린다.부동산 가격 때문에 도시에서도 시골에서도 살기 힘들다. 새로운 버전의 노숙인, 텐트족, 차박족, 빈집 몰래 들어가 잠자기족 등으로 떠밀리게 된다. 아무튼 이 나라에서 태어나면 '묻지마 학원의 아이'로 출발한다. 조부모와 단절된다. 조상 산소에 갈 이유도 없다. 여러 학원만 전전한다. 부모도 왜 그런지 잘 모른다. 아프리카 누떼처럼 그렇게 몰려다니도록 길들여져 버렸다. 우등생 다툼 전쟁, 다음에는 평생 보장(이젠 그런 직장도 없지만) 직장에 들어가려고 기를 쓴다. 실패하면 더 홀쭉한 카드에 베팅해야 된다. 여기에도 저기에도 못 들어가면 어떻게 하지? 국가를 양육권자로 알고 살아야 한다. 정부를 움켜쥐고 버틴다. 코로나19 정부지원금이 그런 욕망을 심어주는데 일조했다. 백수들은 각종 연금, 지원금, 후원금, 수당 등을 휴지통 뒤지듯 챙긴다. 정부는 그런 자를 양산한다. 그 재원은 있는 자한테서 나온다. 이러다 나라가 침몰한다고 하는데 한국은 아직 세계 9위권 경제 강국으로 순항 중이다. 방탄소년단, 넷플릭스, 그리고 클래식·골프·축구까지도 한국의 독무대가 된 것 같다. 한국인, 화교·유대인보다 더 오래 살아남을 근성이란다. 그런데 한숨 소리는 더 커지고 있다. 세계를 호령하고 있는데 나라 곳곳에 크레바스가 산재해 있다. 우린 이 아이러니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난 우리의 기업이 응석받이가 된 현 정부를 먹여 살리고 있다고 본다. 내년 대통령선거의 승부처도 바로 그 욕망에 대한 우리 국민의 생각일 것 같다.마이너족들의 비빌 언덕인 택배·배달·알바가 신종족을 만들어냈다. 절벽 앞 청년 백수들은 이들 신종 3종 세트를 '울며 겨자 먹기식 직장'으로 품는다. 여기에도 못 끼는 '나홀로 원룸족'에겐 유튜브가 새로운 우상이다. 모든 연락처도 버리고 오직 자기가 찜한 유튜버와 동고동락하며 '음지족'으로 산다. 편의점은 그들의 부엌이자 식당. 감당할 수 없는 외로움과 고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반려견·반려묘를 입양한다. 동물은 그들의 '신의 한 수 아바타'가 된다. 결혼도 포기하고 직장도 포기하고 미래도 포기하고 오직 그 동물한테 모든 걸 건다. 미래는 사라져도 맘은 되레 편하단다. '역설적 평화로움'이다. 발가벗은 몸 하나로 충분한 인도의 극단적 수행파 구루(GURU)의 삶과 포개진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닌 일상의 터널. 최소한의 생리적 본능만 살아 있고 사회적 일원이 되기 위한 근육은 깡그리 불태워버린 그들.내년이 되면 이재명 혹은 윤석열 중 한 명이 대통령이 될 것이다. 과연 살아도 산 게 아닌 저들, 현대판 좀비로 전락한 저 신종족에게 어떤 최면을 걸까? 행복·희망·꿈이 코스프레가 된 지금. 청년의 미래가 창고 대방출된 것 같다. 가끔 정치라는 게 CCTV 같다. 그 은밀한 눈빛의 카메라는 인상착의만 볼 뿐 절망과 슬픔은 못 보는 것 같다. 우리 정치도 또 다른 청맹과니 CCTV 아닐까? 이춘호 주말섹션부 전문기자이춘호 주말섹션부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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