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벤처·스타트업 생태계 현주소] 창업 3년 지나면 지원 끝…혁신도 하기전에 ‘데스밸리’ 가속
AI 인터렉티브 뉴스 보러가기 대구의 창업 생태계가 기술 인증 중심의 '전통적 벤처'와 고속 성장을 지향하는 '혁신 스타트업' 사이 과도기적 혼란에 빠졌다. 벤처와 스타트업의 개념이 정책 현장에서 모호하게 혼용되면서, 정작 자금이 절실한 성장기 기업들이 지원 사각지대에 놓여 '데스밸리(죽음의 계곡)'로 내몰리고 있다.대구의 벤처투자 비중은 전국 평균을 밑도는 2%대에 머물러 있으며, 유망 기업들은 '사람과 돈'을 찾아 본사를 수도권으로 옮기는 '탈(脫)대구' 행렬을 이어가고 있다. 영남일보는 창업 초기 지원에만 쏠린 정책의 불균형을 진단하고, 수성알파시티와 동대구 벤처밸리를 중심으로 지역 벤처의 자생력 확보 방안을 집중 분석한다. ◆ 이름 혼용에 정책은 '초기'에만 쏠려 벤처기업과 스타트업의 가장 큰 차이는 지향점이다. 한국에서 벤처기업은 법적 개념에 가깝다. '벤처기업육성법'에 따라 기술보증기금이나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 등으로부터 기술력을 인정받아 확인서를 발급받은 기업을 뜻한다. 세제 혜택과 금융 지원이 목적이다. 반면 스타트업은 성장 방식이 다르다. 최수진 대구창조경제혁신센터 기획팀장은 "일반 중소·벤처기업이 검증된 시장 안에서 안정적인 매출 구조를 구축하는 데 초점을 둔다면, 스타트업은 불확실한 시장을 전제로 빠른 실험과 피봇(사업 방향 전환)을 반복하며 새로운 성장 경로를 만들어가는 조직"이라고 정의했다. 즉, 벤처기업은 '안정성'과 '기술 인증', 스타트업은 '모험성'과 '시장 확장'에 방점을 둔다. 문제는 성격이 판이한 두 용어가 50년 세월이 지나 '벤처·스타트업'이라는 모호한 이름으로 묶여 정책 현장에서 혼용된다는 점이다. 더 큰 걸림돌은 용어 혼재가 지원 축소로 이어진다는 데 있다. 스타트업은 '모험', 벤처는 '인증'을 기반에 두지만 정부 정책은 이들을 한 데 묶어 창업 초기 기업에 혜택을 집중한다. 임수현 <사>벤처기업협회 대구경북지부(이하 벤처협회 대경지부) 사무국장은 "벤처기업은 업력을 떠나 신시장을 발굴하는 모험적 기업을 뜻한다. '벤처·스타트업'이라는 용어가 함께 쓰이면서 세제 혜택 등이 창업 3년 이내 초기 기업에만 한정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바이오나 하드웨어 기반의 딥테크 기업은 기술 개발에 수년 걸린다. 매출 발생 전 '창업 3년' 골든타임이 지나면, 정작 자금이 가장 필요한 시기에 정책지원 대상에서 배제되는 '데스밸리(죽음의 계곡)'에 빠진다. 성장 궤도에 진입하더라도 '스케일업(규모 확대)'이라는 더 큰 파도가 기다린다. 창업 초기 반짝이는 아이디어와 기술력으로 버틸 수 있지만 다음 단계는 전혀 다른 역량이 요구된다. 대구창조경제혁신센터는 스타트업과 일반 중소기업의 차이를 '성장을 전제로 한 실험'이라고 정의했다. 최수진 팀장은 "스타트업은 초기 기술력으로 성과를 낼 수 있으나, 이후 단계에서는 지속 성장을 위한 매출 구조 확립과 조직 운영 역량이 필수적이다. 이 과정에서 많은 지역 기업이 한계를 느낀다"고 설명했다. 낡은 규제도 기업가의 사기를 꺾는다. 새 기술은 기존 법망과 충돌하기 마련인데, 한국의 법 제도는 혁신을 수용하기보다 기존 산업을 보호하는 데 무게를 둔다. 벤처기업협회 측은 최근 국회 상임위를 통과한 이른바 '닥터나우 방지법(약사법 개정안)'을 대표적인 사례로 꼽았다. 비대면 진료 플랫폼의 약 배송을 제한하는 이 법안처럼, 서투른 규제 정책들이 혁신 벤처기업의 성장을 가로막는다는 것이다. 협회는 "IMF와 글로벌 금융위기를 벤처 특유의 야성으로 극복해온 한국 경제가 이제는 정책적 굴레 탓에 경쟁력을 잃고 있다"며 시급한 개선을 촉구한 바 있다. ◆ '투자형 벤처' 15% 불과…대구는 여전히 '제조업 벤처' 데이터로 본 대구지역 벤처산업 현황은 여전히 전통적인 '제조업 벤처'에 머물러 있다. 하지만, 이들의 신사업이 대구 미래를 이끌기도 한다. 벤처기업확인기관 벤처확인종합관리시스템에 따르면 2025년 12월 말 기준 국내 벤처기업수는 3만8천598개다. 이 중 수도권(서울·인천·경기) 지역 벤처기업이 2만5천187개로 65%를 차지한다. 이에 반해 대구는 1천186개로 3%에 그쳤다. 벤처협회 대경지부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기준 대구 소재 벤처기업 1천170개 사 중 벤처캐피털(VC) 등으로부터 투자를 받은 '벤처투자유형'은 177개 사로 전체의 15.1%에 불과하다. 이는 전국 평균인 20%를 밑도는 수치다. 대다수 기업이 투자가 아닌 대출이나 보증 중심의 '혁신성장유형' 등에 쏠려 있다는 의미다. 업종별 편중도 뚜렷하다. 협회 회원사의 평균 업력은 14.2년으로, 창업 10~20년 차 기업이 주축을 이룬다. 최근 6개월간 가입한 회원사 64곳 중 제조업 비중은 66%(42개 사)에 달한 반면, 정보통신업은 6개 사에 그쳤다. 임수현 벤처협회 대경지부 사무국장은 "대구는 정밀 가공, 기계 부품 등 전통 제조업 기반이 강해 수도권 VC가 선호하는 '고성장 플랫폼' 업종과는 거리가 있다"며 "지역 금융 인프라의 한계로 인해 투자를 받기 어려운 환경"이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모빌리티, 로봇, 2차전지 등 최근 주목받는 '딥테크' 분야는 결국 탄탄한 제조 역량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현장의 반론도 제기된다. ◆ "융자에서 투자로"…변하는 생태계 하지만 변화의 바람도 감지된다. 수성알파시티와 동대구 벤처밸리를 중심으로 ABB(인공지능·빅데이터·블록체인) 기반의 기술 창업이 늘면서 '투자'에 대한 인식도 바뀌고 있다. 수성알파시티는 현재 비수도권 최대 ICT기업 집적지로 평가받고 있으며, 312개 기업과 상주 종사자는 4천명이 넘는다. 최근 지역 ICT기업 최초로 코스닥에 상장한 ICT기업 <주>이지스도 수성알파시티에 본사를 두고 있다. 지역 디지털·소프트웨어(SW) 산업 발전을 지원하는 대구디지털혁신진흥원(DIP)이 알파시티에 중심을 형성하고 있다. 동대구벤처밸리는 현재 정보처리·SW 등 IT 기반 기업을 중심으로 약 450개 기업이 입주해 있다. 투자자와 기업 지원기관도 밀집해 창업과 사업화, 투자 연계가 활발히 이뤄지는 지역으로 평가된다. 또 대구테크노파크(대구TP), 대구상공회의소, 대구무역회관, 대구콘텐츠비즈니스센터, 대구스케일업허브 창업보육센터(DASH), 대구경북디자인진흥원 등 6개 기업 지원 기관들이 자리하고 있어 창업 거점으로 거듭나고 있다. 실제로 중소벤처기업부의 창업기업 동향을 살펴보면, 대구 전체 창업 기업 수는 감소세(2020년 5만5천여 개 → 2024년 4만4천여 개)이나, 기술 기반 업종은 일정 수준을 유지하며 질적 고도화를 꾀하고 있다. 단순 생계형 창업보다 기술 스타트업 육성으로 무게중심이 이동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과제는 '스케일업(Scale-up)'. 초기 기술 검증 단계를 넘어 매출 구조를 만들고 조직을 확장하는 단계에서 지역 기업들은 큰 어려움을 겪는다. 최수진 팀장은 "과거에는 투자를 '부담'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강했으나, 최근에는 성장을 위한 필수 과정으로 인식하는 비율이 빠르게 늘고 있다"고 전했다. ◆서울행 막을 '핀셋' 지원 절실 스타트업과 벤처를 가리지 않고 수도권행(行)을 택하는 기업도 적지 않다. 본사는 대구에 있더라도 지사나 본부를 서울에 두고 비즈니스를 하는 기업도 많다. AI·클라우드 기업 A사는 수성알파시티에 본사를 두고 서울 서초구에 지사를 두고 있고, 또 다른 AI솔루션 기업 B사는 비즈니스센터 이름으로 서울 강서구에 지사를 두고 있다. 취재진이 'CES 2025'에서 만난 지역 스타트업 대표들 명함에도 본사와 서울지사가 병기된 사례가 많았고, 심지어 해외바이어들이 대구를 모를 수 있다는 이유로 서울 주소만 적어놓은 명함도 보였다. 지사를 수도권에 두는 가장 큰 이유는 사람과 돈이다. 지역에서는 인재 구하기가 하늘에 별따기라 말한다. ICT업계의 경우 경력직 개발자를 뽑으려면 수도권에서 물색해 높은 임금을 주고 스카웃하는 경우가 많은데, 만약 지역에서 인재를 뽑아 키운다 하더라도 더 나은 처우를 위해 수도권으로 이직이 많은 것으로 전해진다. 극심한 '수도권 쏠림' 현상은 지역 기업의 스케일업을 가로막는 거대한 장벽이다. 한국벤처캐피탈협회 벤처투자종합포털 공시에 따르면, 국내 벤처투자의 약 73%가 서울·경기·인천 등 수도권에 집중된 반면, 대구·경북 지역의 투자 비중은 2%대다. 수도권엔 4조9천704억원이 투자됐지만, 대구와 경북엔 각각 986억원, 904억원에 그쳤다. 기술력을 갖춘 유망 딥테크 기업조차 지역에서 후속 투자를 유치하지 못해 자금난을 겪고 있으며, 결국 '사람과 돈'을 찾아 본사나 핵심 부서를 수도권으로 이전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대구의 벤처 생태계 위기는 비수도권의 다른 광역시와 비교에서도 뚜렷하다. 초기투자액셀러레이터협회(KAIA)에 '2025년 상반기 액셀러레이터 산업백서'에 따르면 자원과 기회가 수도권으로 집중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수도권 액셀러레이터(AC) 누적 투자금액은 2조9천149억원으로 전체 76.6%의 비중에 달한다. 이에 반해 대구가 포함된 경북권은 누적투자금액이 1천307억원(3.4%)로 수도권-충청권(9.4%)-경남권(7.7%)에 이어 4위에 그쳤다. 연구개발(R&D) 특구와 카이스트(KAIST)를 품은 대전은 딥테크 중심의 투자 유치 비중이 비수도권 최고 수준을 기록했고, 부산 역시 지역 주도의 대규모 펀드 조성을 통해 '데스밸리' 극복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수도권으로 떠나려는 지역 유망 벤처를 붙잡기 위해서는 지자체 차원의 과감하고 실질적인 지원책이 요구된다. 임수현 벤처협회 대경지부 사무국장은 "벤처기업은 초기 연구개발비와 인건비 지출이 크지만 매출은 즉시 발생하지 않아 재무구조가 부실해지고, 이로 인해 다시 지원에서 제외되는 악순환을 겪는다"고 설명했다. 해법으로는 인건비 직접 지원과 공공조달 우대 혜택 확대가 제시됐다. 여성기업, 사회적기업에 준하는 수의계약 한도 증액 등 피부에 와닿는 혜택을 통해 초기 어려움을 극복할 도움을 줘야 한다는 것. 지역 제조업의 뿌리 위에 신기술을 접목하는 '혁신 벤처'가 대구에서 성장할 수 있도록 정책의 디테일이 절실해졌다. ◆정책 중심, 창업 '초기'에서 '성장'으로 정부 정책 역시 성장을 뒷받침하는 방향으로 선회해야 한다. 2026년 중소벤처기업부 예산은 총 16조5천억원으로 확정됐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벤처·스타트업의 '스케일업' 지원에 배정된 4조원대 예산이다. 그동안 창업 3년 미만 기업에 집중됐던 지원이 '성장기 기업'으로 대폭 확대된다는 의미다. '3년 만 지나면 지원이 끊겨 데스밸리에 빠진다'는 현장 목소리를 반영한 결과로 기술 보증과 융자 중심이었던 지역 벤처 생태계에 모험 자본이 흘러들어올 물길이 트인 셈이다. 기술 창업의 등용문인 '팁스(TIPS)' 프로그램 강화도 주목된다. 정부는 딥테크 분야 팁스 지원금을 기존 최대 5억 원(연구개발(R&D) 자금 기준)에서 최대 8억 원까지 상향 조정했다. 연구개발에 막대한 자금과 시간이 소요되는 딥테크 스타트업들이 초기에 자금난 걱정 없이 기술 고도화에 집중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다. 투자 시장의 마중물 역할을 하는 '모태펀드'의 변화도 벤처 생태계에는 반가운 소식이다. 삭감됐던 예산이 회복된 것은 물론, 사실상 폐지 수순이었던 펀드 존속 기한이 연장됐다. 이는 단기 수익 실현에 급급했던 투자 관행을 벗어나, 회수 기간이 긴 바이오·AI 등 딥테크 분야에 장기적 관점의 투자가 가능해질 것으로 보인다. 이동현(경제)기자 shineast@yeongna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