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국의 영남좌도 역사산책] 조상의 글, 한문·이두·언문
1895년부터 조선왕조실록은 국한문으로 되어있다. 이천여 년 동안 문명의 언어, 공용문자로 군림하던 한자 천하에서 갑오개혁으로 한글이 처음 나라 글로 등장하게 된다. 지혜롭고 학문에 대한 열정이 넘쳤던 우리 조상들은 왜 오백년 세월 동안 우수한 우리글 언문을 외면했을까? 세종대왕이 만든 언문을 후대 왕들이 과연 천한 글이라고 여겼을까? 1894년 11월 언문을 나라 글로 한다는 칙령이 내려지자 그 흔한 반대 상소 하나 없었다.이두는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우리말을 표기했다. 우리말을 글로 적으려는 욕구에서 시작됐고 한자 글자이지만 한문이 아니다. 한문으로는 해독이 불가능하고 우리말로 읽어야 그 뜻을 알 수 있다. 삼국시대에 처음 만들어져 조선시대 내내 중인 서리(胥吏)들이 사용하다가 갑오개혁으로 국한문이 혼용되면서 사라졌다.사대부 우월적 자존감…우리글 외면평민 등 광범위하게 사용 '이두 표기'세종·수양 왕가, 언문에 공들이기도'천한 글 언문' 일제 때 왕조유물 폄훼부녀자들도 글 깨우쳐 내방가사 성행◆조상의 한자생활우리 조상들은 입말(구어·口語)로 우리말을 사용했지만 글말(문어·文語)로는 한문을 쓰는 이중적인 언어생활을 했다. 출생과 더불어 입으로 우리말을 하고 일상생활의 문자는 한자로 했다. 작명, 호구단자, 천자문, 관혼상제, 과거공부 등 주변 글은 모두 한자였고 공부도 어려서부터 한자만 하여 사대부의 한문 이해도는 무척 높았다.한자는 기원전 2세기경에 한반도로 들어와 나라 글로 자리 잡았다. 15세기 훈민정음 창제 후에도 한글을 언문(諺文), 한문을 진서(眞書)라 하여 한문을 글다운 글이라 했고 조선후기에는 한문화 숭상이 더욱 심해져 한자를 중화의 상징으로 여겼다.조상들은 일생을 한자로 생활하면서 수많은 글을 남겼다. 하지만 평생 한시를 지었으나 당송 시문을 뛰어넘을 수 없었고, 사대부의 빼어난 글이라지만 춘추전국시대에 지어진 유가경전의 틀 속에 맴돌았지 그 틀을 깨뜨리거나 벗어나지 못했다. 외국어 아닌 외국어로 어려운 한문 문장을 잘 짓는다는 것은 버거운 일이었다. 당대 최고의 문장가라 했지만 그것은 변방 동이(東夷)의 나라, 우리 이야기였고, 글로써 한자문화권에 문명을 떨친 이들을 찾아보기 어렵다. 언문불일치의 불편함이 무척 컸을 터이지만 사대부라는 우월적 자존감과 기득권에 빠져 우리글을 외면했다.우리말은 중국말과 달라 항상 역관이 필요했고 평민들 가운데 극히 일부만 한자 해독이 가능했다. 양반 부녀자와 평민들은 언문으로 문자생활을 했다. 한자는 배우기가 쉽지 않은 문자로 전근대기 중국의 문맹률은 무척 높았다. 한자의 글자 수는 대략 5만자로 이체자(異體字)까지 합치면 8만여 자 된다. 그중 실제 쓰이는 상용한자는 5천여 자이고 조선선비는 5천자 이상을 안 듯하다.◆한문과 이두(吏讀)삼국시대에 우리 조상들은 우리글이 없었으므로 한자를 빌어 우리말을 문자화했다. 한자의 소리를 빌리든 뜻을 빌리든 그것으로 우리말을 적었다. 사람이름인 유리, 거칠을 儒理, 居柒로, 벼슬이름인 이사금, 마립간을 尼師今, 麻立干으로 소리를 빌려 나타냈고, 우리말 '없거늘'은 無去乙, '특별한'은 別爲, '당하여'는 當爲, '이었음'은 亦是在, '하다'는 爲如로 표기했다. 이를 차자(借字)표기라 하는데 이두이다.이두는 문자라기보다 표기 방법이다. 신라향가에 쓰인 향찰, 불경에 사용한 구결, 한문의 토 등도 넓은 의미의 이두이다. 이두는 설총이 만들었다고 하나 대부분 문자가 그러하듯 서서히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났으므로 그동안 사용해 왔던 이두를 설총이 집대성했다고 본다. 이두는 하급관리인 이서(吏胥)들이 많이 사용했고 명칭도 그런 연유에서 나왔다.이두 표기가 처음 나오는 금석문은 5세기 초 광개토태왕의 비문이다. 이후 많은 고문에 이두가 나오고 신라향가나 고려가요에서 보듯 이두로 우리말을 완벽하게 적었다. 세종 때 정인지는 "설총이 처음 만든 이두를 비루하지만 관부와 민간에서 지금까지 쓰고 있다"고 했고, 최만리는 "천년 동안 서리의 장부에 이두를 사용하여도 문제가 없었다"며 한글창제를 반대했다. 임진란 때 선조는 교서를 내리면서 "평민들은 이해하기 어려우니 이두를 넣어 방문을 붙이고, 언문으로도 번역하여 촌민들이 쉽게 알 수 있도록 하라"고 했다. 이처럼 조선시대에 이두가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었고 한문·이두·언문의 사용계층이 일정하게 나누어져 나름대로 문자생활을 하고 있었다.정조 때 문신 이의봉은 신라·고려의 이두를 묶어 나려이두(羅麗吏讀)를 지었는데 이두 어휘 172종에 언문으로 독음을 달아놓았다. 조상이 쓴 옛글에는 이두가 수시로 나오고 그것을 한문으로는 해독이 안 되니 고문 국역화 작업은 그만큼 더디게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실록 속의 훈민정음훈민정음은 1443년 섣달에 창제하였는데 실록에 이렇게 썼다. "임금이 친히 언문 28자를 지었는데 그 글자가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고, 초성·중성·종성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루었다. 무릇 문자와 속된 말을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요약하지만 전환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것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 일렀다." 우리글을 언문이라 했으며 글씨체는 고서체인 전서를 모방하여 만들었고 백성을 가르치는(훈민) 바른 소리(정음)라 했다. 오늘날 널리 알려진 "나랏말씀이 중국과 달라 문자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는 1446년 반포할 때 어제(御製)에 나온다.예조판서 정인지가 쓴 훈민정음해례 서문에 "지혜로운 사람은 아침나절이 되기 전에 이를 이해하고,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 만에 배울 수 있다. 정음(正音)의 창제는 전대의 것을 본받은 바도 없이 자연히 이루어졌으니, 만물의 뜻을 깨달아 모든 일을 이루는 큰 지혜는 대개 오늘날에 기다리고 있을진저"라고 한나절이면 언문을 익힐 수 있고 세상을 이루는 큰 지혜라고 했다.집현전 부제학 최만리는 상소문에 "우리 조선은 개국 때부터 지성스럽게 대국을 섬기어 중화의 제도를 준행했는데, 이제 따로 언문을 만드는 것은 중국을 버리고 스스로 오랑캐와 같아지려는 것으로 문명의 큰 흠절이다"하여 사대모화에 어긋나기 때문에 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한다고 했고, 이후 조선 사대부의 일관된 생각이 됐다.◆언문은 천한 글일까한글은 문자의 창제 기원과 원리, 반포일까지 알려져 있는 세계 유일의 문자이다. 세종대왕은 우리글을 만들고 이름을 무엇으로 할지 무척 고심했다. 그래서 실록에 훈민정음과 언문이 함께 나오는데 주로 언문이라 했다. 실록을 검색하면 훈민정음은 10회만 나오고, 언문은 151회, 언간·언찰·언서·속언 등으로 1154회 나온다. 언문서적의 편찬과 인쇄를 위해 언문청을 만들었고 정인지·성삼문·최항·신숙주·박팽년·강희안·이선로 등 당대 명신들이 근무했다.언문은 과연 천한 글자를 나타내는 말일까? 성군 세종대왕이 직접 참여하여 끝까지 챙겼고, 세자를 비롯하여 수양과 안평대군, 정의공주까지 참여해 공을 들인 언문을 후대 왕들이 과연 천한 글이라고 여겼을까? 전혀 아니다. 왕조실록 어디에도 언문이 천한 글이란 뉘앙스가 없다. 언(諺)은 말씀 언(言)에 선비 언(彦)을 합친 '선비의 말'이란 뜻이다. 실록에는 언문과 진서가 쌍둥이처럼 나온다. 언문은 한글을 조선시대에 불렀던 말이지 부녀자의 글이나 비속어가 아니다. 중국글을 진문(眞文), 진서라고 한 것이 문제이지 언문은 훌륭한 이름이다. 언문이 천한 글이 된 까닭은 일제 때 한글로 이름 바꾸면서 당위성을 강조하고 민족주의 고취를 위해 언문을 왕조 유물로 폄훼한 데서 나온 듯하다. 갑오개혁 때는 국문이라고 했다.◆조선시대 문자생활언문은 배우는 글이 아니고 익히거나 깨우치는 글이다. 한나절이면 다 익힐 수 있다고 했다. 정조 때 대제학을 지낸 이계 홍양호는 길거리 아이들이나 아낙네라 할지라도 능히 언문으로 통한다고 했다. 부녀자들은 음식하기처럼 글하기로 언문을 깨우쳐 언간과 내방가사를 많이 지었다. 부녀자 언간을 '내간'이라 했고 언문편지 교과서인 '언간독(諺簡牘)'이 일찍 나왔다. 최근 함경도 하급군관 나신걸이 부인 신창맹씨에게 보낸 언간 2장이 대전 유성에서 출토됐는데 이는 한글 반포 후 50여 년 만에 함경도 변방까지 언문이 보급되고 언간이 써졌음을 보여준다. 또 충북 청원의 순천김씨 묘에서 192장의 16세기 편지가 출토됐는데 그중 언간이 189장이고, 달성 현풍의 진주하씨 묘에서 172장의 17세기 편지가 출토됐는데 그중 167장이 남편 곽주가 쓴 언간이다. 내방가사는 영남 양반가 부녀자들 사이에 성행했는데 현재 발굴된 것만 6천편에 달한다.한문으로 문명을 떨쳐 해외까지 널리 알려진 인물은 거의 없었고 외국에서 가장 많이 발간된 우리 저작물은 의서 동의보감이다. 사대부는 언문을 주로 놀이나 여흥, 즉 시조·가사·소설·편지를 쓰는 데 사용했으며 지은이를 모르는 작품이 많다. 17세기 명·청 교체기 때 백성생활과 밀접한 조세·농사·송사 등의 업무에 언문을 사용하도록 국정을 바꿀 기회가 있었는데 혜안을 가진 군주와 명신이 없어 이루지 못했다.그래도 왕조 내내 언문사용을 막지 않았다. 연산군의 언문 금지는 일시적이었다. 왕실 부녀자의 언간이 많았고 대비의 언문 교서가 자주 내려왔다. 왕조의 언문 정책은 묵인이었다. 언문은 시대의 흐름을 타고 백성 속에서 자연스럽게 변화했고 우리글이 되어 한글이라는 이름으로 독창적이고 우수한 문자로 세계에 널리 알려졌다. 여행작가·역사연구가1490년대 군관 나신걸이 쓴 언간.이두로 쓰인 임신서기석. 경주 석장동에서 발견된 신라 유물로 552년 혹은 612년 제작된 것으로 추정, 경주박물관 소장.1895년 1월 고종실록. 나라기록의 중심인 실록에 한글이 처음 나오고 사관은 사초를 국한문 혼용으로 썼다.용비어천가. 훈민정음 창제 후 최초로 만든 한글 기록물. 1447년 간행했다. 〈문화재청 제공〉언간독의 차례. 언간독은 언간 쓰는 법을 적은 책으로 초기에 필사본이었으나 후기에 수요가 많아 목판본으로 간행.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이도국 여행작가·역사연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