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영의 연필의 무게 걸음의 무게] '혁명의 아이콘' 체 게바라…사람을 사랑한 쿠바의 혁명가
시인 박정대는 복간된 시집 '체 게바라 만세'에서 이렇게 썼다. '자신을 둘러싼 이 세계가 바뀌지 않는다면 열악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세계를 개선하려는, 혁명하려는 지난한 사투이거나 자신의 몰락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것 외에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으리라.' 이 글을 읽고 나는 오래 생각한다. 시 쓰기가 혁명이라 여기는 시인은 '진정한 혁명을 이끄는 것은 위대한 사랑의 감정이다'에서 발현해 '진정한 혁명은 자기 자신에 대한 혁명이며, 어떤 물질적 보상도 생각하지 않는다'는 체 게바라의 말을 자신의 시로 실현하려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 체 게바라의 본명은 에르네스토 라파엘 게바라 데 라 세르나(Ernesto Rafael Guevara de la Serna)다. 1928년 6월(5월)14일 아르헨티나 산타페 로사리오에서 미숙아로 태어났다. 바스크 혈통을 물려받은 아버지가 제법 큰 병원 원장이라 별 부족함 없이 자랐다고 알려졌는데 동생 후안 마르틴 게바라의 책 '나의 형 체 게바라'에 따르면 가난하진 않았지만 부자도 아니었고 특히 학창 시절은 아주 빈곤했다고 한다. 두 살 때 앓은 천식으로 아홉 살 때까지 학교에 가지 못하고 어머니와 많은 책을 읽고 시와 일기를 쓰는 문학소년으로 자랐다. 평생 흡입기를 들고 다녔던 중증 천식을 이기기 위해 럭비를 비롯한 격렬한 스포츠로 자신을 단련하고 부에노스아이레스 의대에 입학한다.1951년에서 1952년에 걸쳐 9개월 동안 친구 알베르토 그라나도와 오토바이를 타고 떠난 남미대륙 횡단여행(영화 '모터 사이클 다이어리'의 바탕이 됐다)이 어쩌면 평범한 의사로서 평탄했을지도 모를 그의 일생을 뒤바꿔 놓게 된다. 안데스산맥을 가로질러 사막을 건너 아마존을 거쳐 베네수엘라에 이르는 동안 그는 지금까지 알던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세상의 불합리함에 분노하고 만다. 사탕수수, 커피, 바나나 농장과 미국 다국적기업이 운영하는 칠레 구리광산에서 빵 한 덩이를 위해 노예처럼 착취당하는 빈민들의 실상에 혁명가의 꿈을 품기 시작했으니 말이다.여행에서 돌아온 그는 의대를 졸업하고 '알레르기 연구'로 의사면허를 취득한다. 그러나 인간의 질병을 치료하는 것보다 이 세계의 모순을 치료하는 것이 우선이라 확신한 그는 혁명에 뛰어든다. 1954년 참여한 과테말라 아르벤스정권의 토지개혁이 우익 쿠데타로 실패하자 피바다가 된 그곳을 피해 페루에서 망명한 사회주의 여성운동가 일다 가데아와 결혼해 함께 멕시코로 망명한다. 당시 반자본주의 혁명을 통한 국가 전복이 남아메리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그는 쿠바에서 미국과 마피아의 지원을 받던 바티스타 정권에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망명한 피델 카스트로를 만나 바로 의기투합해 반(反)바티스타 무장 게릴라 투쟁에 합류한다.1956년 11월25일 그는 어머니에게 '저는 예수와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습니다.… 저들이 나를 십자가에 매달아 두게도 하지 않을 것이며 어머니가 바라시는 방식으로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라며 편지를 보내고 8인승 레저 보트 그란마호에 탑승한다. 하지만 폭풍을 뚫고 7일 만에 쿠바에 상륙한 카스트로를 비롯한 게릴라 82명은 미리 잠복해 있던 정부군에 의해 12명만 살아남고(17명이라는 설도 있다) 궤멸되고 만다. 천신만고 끝에 도주한 그들은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맥 깊은 곳에서 쿠바 국내 반정부세력과 규합하여 조직을 재건하게 되는데 이때 군의관으로 참여한 그는 특유의 인내심과 성실, 상황 분석, 냉정한 판단력,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뛰어난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게 된다. 포코 이론식으로 산골 빈민들의 생활 깊숙이 스며들어 그들의 신망을 얻어내고 라디오 레베르데를 설립하여 정치방송을 하며 뉴욕 타임스 등과 민중 해방 의사 게릴라로서 인터뷰를 하는 등 언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쿠바는 물론 서방에서의 대중적 지지도 끌어낸다.체(che, 어이! 친구, 동지라는 뜻) 또는 엘 찬초(El Chancho)는 곧 에르네스토 게바라의 다른 이름이자 별명이 되었다. 가까운 혁명 동지들은 물론 대중들까지 경계를 풀게 만드는 그의 친화력과 소탈한 매력 덕분이었다. 이는 또 '코만단테'(사령관, 지휘관 아래 분대와 분대를 지휘하는 대장)에 임명되어 카밀로와 라울 등을 젖히고 카스트로에 이어 명실상부 혁명군 2인자가 되는 데 엄청난 역할을 했다.1959년 1월8일 쿠바 혁명이 성공한다. 이제 막 30세가 된 체 게바라는 쿠바 시민권을 받고 혁명 정부의 초대 산업부 장관을 시작으로 토지 개혁, 중앙은행의 설립, 쿠바 혁명부대 건군과 같은 일들을 주도한다. 그해 쿠바 통상사절단을 인솔하여 일본, 인도네시아, 파키스탄, 수단, 유고슬라비아, 가나, 모로코를 방문했다. 일본에서는 일정에 없는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내의 원폭 희생자 위령비에 헌화하고 네루, 티토 등 세계 지도자들을 만났다. 나중에 유엔에서 연설을 하고 북한으로 가 김일성도 만난다.미국이 피그스만 침공을 일으키자 이에 대한 군사 대응도 지휘했다. 당시로선 획기적인 의료 개혁도 단행해 '쿠바의 두뇌'라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혁명을 더욱 전진시키기 위하여 사형제도를 부활시켜 친서방 또는 반혁명세력 약 1만4천명을 처형한 것이나 서투른 산업 국유화로 인한 자본 이탈과 함께 미국의 경제 봉쇄로 쿠바가 가난을 면치 못하게 만들었다는 주장도 있다. 사실 체 게바라의 게릴라 이미지 때문인지 가끔 그를 아나키스트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체 게바라는 아나키즘과는 전혀 관련 없는 마오주의 성향의 공산주의 혁명가다. 1965년 카스트로에게 '제국주의에 신음하는 다른 땅들이 나의 미천한 힘을 요구한다'라는 편지 한 장을 남기고 내전 중인 아프리카 콩고로 떠난다. 구(舊) 소련과 껄끄러운 관계로 인한 카스트로 형제와의 불화 때문이란 주장도 있지만, 또 다른 혁명을 위해 간 그곳에서 그는 처절한 실패를 겪고 간신히 탈출한다.1966년 다시 남미혁명이라도 완수해야겠다는 결심으로 대머리 사업가로 변장해 볼리비아로 갔다. 그러나 소련에 낙인찍힌 그를 볼리비아 공산당은 대놓고 무시했고 그 지도자는 지휘권을 두고 그와 갈등했다. 볼리비아 빈농들조차 백인인 그를 믿지 않던 와중인 1967년 10월8일 최후의 결전에서 17명의 대원과 함께 미국이 지원하는 레인저부대에 체포되어 재판도 없이 총살당하고 만다.한 개의 별이 붙은 검은 베레모에 아무렇게나 기른 긴 머리칼, 덥수룩한 턱수염 그리고 열정적인 눈빛으로 굳게 입술을 다문 그의 사진은 1960년 사진작가 코르다가 찍은 것이다. 체 게바라의 사망 후 이 사진은 혁명의 아이콘으로 여긴 코르다의 저작권 포기로 폭발적 복제 배포되었다. 하지만 티셔츠, 담배, 커피잔 등의 상업적 용도마저 뛰어넘어 보드카 광고에도 사용되자 코르다가 법정 소송을 제기한다. 받은 합의금은 쿠바 의료계에 기부됐다.'20세기 가장 성숙한 인간'(장 폴 사르트르), '총을 든 예수', '롤렉스시계를 찬 혁명가' 등이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그에 대한 수사(修辭)다. 어느 다큐멘터리에서 누워서 괴테를 읽는 그의 모습을 보고 나는 그가 마지막으로 자신의 아이들에게 남긴 편지를 떠올렸다. '이 세계 어디선가 누군가에게 행해질 모든 불의를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을 키웠으면 좋겠구나. 너희 자신에 대해 가장 깊이. 그것이 혁명가가 가져야 할 가장 아름다운 자질이란다.' 나중에 어떤 자리, 죽은 그의 얼굴에서 예수를 겹쳐 본 이가 나뿐만 아니었다는 생각도 문득. 시인체 게바라. 알베르토 코르다 作박미영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