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하상의 기업인 열전] 삼성가 이야기 <4> 일제패망과 이승만, 김구의 귀국
1945년 8월15일 정오, 일본 천황 히로히토가 항복선언을 했다. 이른바 옥음방송이다."짐은 세계의 대세와 제국의 현 상황을 감안하여 비상조치로서… 더욱이 교전을 계속한다면 결국 우리 민족의 멸망을 초래할 뿐더러 나아가서는 인류의 문명도 파각(破却)할 것이다.… 제국신민으로서 전진(戰陣)에서 죽고 직역(職域)에 순직했으며 비명(非命)에 스러진 자 및 그 유족을 생각하면 오장육부가 찢어진다.… 세계의 진운(進運)에 뒤처지지 않도록 하라. 그대 신민은 이러한 짐의 뜻을 명심하여 지키도록 하라"로 끝이 난다.전문을 읽어보면 2차세계대전에 죽은 한국, 동남아, 미국 등의 국민이나 장병에 대한 사과는 한마디도 없다. 아예 반성이 없다. 그날인 8월15일 조선은 광복을 맞았다.미국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이 1945년 10월4일 뉴욕을 출발했다. 그는 하와이와 괌을 거쳐 10월12일 도쿄에 도착한 뒤 맥아더사령관부터 만나 한반도 처리문제를 협의한 후, 맥아더 장군의 전용기 '바탄(Bataan)'호를 타고 10월16일 오후 5시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33년 만의 귀국이었다. 이후 중국에서는 1945년 11월23일 김구 선생 등 중칭 임시정부 요인 15명이 C-47 비행기를 타고 여의도 경성비행장에 귀국했다. 김구 선생의 일행 속에는 이시영과 그 손주뻘인 이종찬(국회의원·국정원장 역임)도 있었다.이시영은 이회영의 동생으로 일제하에서 일찍이 사재를 모두 정리하고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중국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한 집안이다. 그 당시 이회영·이시영 일가가 독립운동자금으로 만든 돈은 소 1만3천마리와 서울 종로 일대의 토지, 가옥들을 정리한 재산으로 지금 돈으로는 2조원에 가깝다.이승만은 한국에 살 집이 없어 조선호텔, 마포장 등을 전전하다 종로구 이화동의 이화장에 지인들의 십시일반으로 숙소를 마련하였고, 김구 선생은 종로구 송원동 경교장(오늘날의 삼성서울병원 별관)에 숙소 겸 캠프를 차렸다.이승만은 미국 프린스턴대학 정치학 박사 출신답게 새로운 나라에서 새로운 정부구상에 몰두했고 김구는 김구대로 새로운 정치를 꿈꾸었다.◆백범 김구의 통곡김구가 제일 먼저 한 일 중 하나가 상해임시정부에 돈을 보낸 조선의 유지들이 보낸 돈을 확인하는 일이었다. 즉 경주의 최부자, 진주의 허만정 등이 보낸 군자금과 백산 안희제가 가져온 금액이 일치하는가였다. 사실 김구는 조선의 유지들이 보낸 돈 중 일부분은 백산 안희제가 교통비, 숙박비, 식대 등으로 썼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한데 금액을 대조해보니 안희제는 상해임시정부까지 오는 동안의 모든 여비는 모두 자신의 개인 돈으로 썼고, 조선의 유지들이 준 돈은 단 한 푼도 건드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김구는 그 서류를 보고 책상에서 일어나 비서에게 물었다. "안희제 선생의 묘소가 어느 방향인가 ?" 비서가 경남 의령이 있는 남쪽을 가리키자 그는 묘소 방향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그리고는 엎드려서 꺼이꺼이 울기 시작했다. "백산, 나를 용서해주게. 나는 당신이 금액 일부를 쓰고 남은 돈을 우리에게 가져다 주었다고 생각했네. 백산, 나를 용서하시게."조선의 독립은 미국이라는 강대국의 힘이 작용했지만, 풍찬노숙의 상해임정 지도자와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한 이승만 등 애국지사의 공로가 컸다.이승만·김구, 새 나라 이끌 방법 구상이후 이승만 정부 귀속재산처리법 제정기업인들 생필품 공급 위해 사업 시작진주 남강에 있는 솥바위 전설 따르면함안·의령·진주 근처서 거부 세 명 탄생오늘날 이병철·조홍제·구인회 빗댄 말◆광복, 대한민국 산업에 시동을 걸다이승만과 김구는 새 나라를 어떻게 이끌어 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사람의 의견을 듣고 있었다. 1945년 8·15 광복 이후 미군정은 재조선 일본인들을 쫓아냈고 그들의 조선 내 자산 반출도 불허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후 이승만 정부는 귀속재산처리법을 제정해서 대부분의 적산기업을 한국의 기업인들에게 불하하기 시작했다. 기업인들이 북에서, 남에서 서울로 모여들고 있었다. 이제 광복된 국가에서 마음껏 사업을 펼쳐보고 싶었던 것이다.우선 일본의 기업인들이 버리고 도망간 적산기업들은 조선의 기업인들이 인수했다. 일제하에서도 조선인이 경영하던 기업은 여럿 있었다. 김연수의 경성방직, 박흥식의 화신백화점, 이종만의 대동광업 등이 그러했다. 또한 일본인이 경영하다 버리고 간 회사들도 많았다. 면방직 회사로는 종연방직, 동양방직, 시멘트의 오노다시멘트, 아사노시멘트, 조선시멘트 등이 있었고 기계산업으로 조선기계, 반동기계 등과 화학의 조선화학, 미쓰이유지화학, 중공업으로 미쓰비시제강, 조선스미토모금속, 동양경금속, 조선타이어공업 등 약 80여 개의 회사가 있었다. 당시 조선의 인구는 2천600만명. 그 많은 인구가 먹고살며 생활하려면 생필품 조달이 시급했다. 일본인이 철수한 적산기업은 물건 생산을 제대로 못하고 있는 데다 한국인들이 경영하는 공장들은 물건의 공급에 한계가 있었다. 이에 한국기업인들은 우선적으로 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공급하기 위해 사업을 하기 시작했다.◆기업인 이병철, 조홍제, 정주영 서울로 올라오다경남 서부 지역에서도 제조업을 하기 위한 사업가들이 많이 상경했다. 특히 진주, 의령, 함안 등지의 사업가가 많다. 진주 지수면에는 허만정 가문이 무려 1만8천석의 대지주로 경남서부 일대에서는 가장 부자였다. 바로 그 허만정은 훗날 진주여고를 설립했고 진주여고의 제 1회 졸업생이 소설 '토지'로 유명한 작가 박경리이다. 허만정의 장남 허정구(1911~1999)는 의령군 출신인 이병철과 합작으로 제일제당을 설립하게 되며, 조홍제 또한 제일제당의 설립에 참여하게 된다. 허정구의 바로 밑의 동생은 허준구(1923~2002)로 그는 LG의 창업주인 구인회와 함께 1946년 오늘날 LG그룹의 전신인 락희화학공업을 창업하게 된다. 이병철은 대구의 인교동에서 삼성상회와 조선양조를 경영하다가 1948년 효성그룹의 창업주가 되는 함안의 조홍제와 함께 서울로 올라온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으나 함안에서 진주로 나아가는 진주 남강 줄기에는 솥바위라는 특이하게 생긴 바위가 강의 중간에 솟아있다. 즉 옛날의 무쇠솥처럼 3개의 다리가 바위를 받치고 있는 형국인데, 예부터 함안, 의령, 진주 일대 그 근처에서 세 명의 거부가 탄생한다는 전설이 있었다. 바로 오늘날의 삼성그룹의 창업주인 이병철, 효성그룹의 창업주인 조홍제, LG그룹의 창업주인 구인회를 빗대어 말한 것으로 알려진다. ◆정주영도 칩거 끝내고 상경강원도 통천 고향에 칩거하고 있던 정주영은 광복 이후인 48년경 서울로 내려와 현대자동차수리공업사와 현대토건(오늘날 현대건설의 전신)을 중구 필동에 창업했고, 코오롱그룹의 창업주 이원만은 일본에서 욱공예라는 모자공장으로 돈을 벌어 거금 180만원이라는 돈을 가지고 귀국, 옷가지를 만드는 경북기업이라는 섬유회사를 차렸다. 쌍용그룹의 창업주 김성곤도 대구에서 서울로 이주, 안양의 조선직물을 불하받아 금성방직을 창업, 역시 옷감생산업을 시작했다. 금호아시아나 그룹을 창업하게 되는 박인천은 46세의 늦은 나이에 택시 2대로 광주시내에서 택시사업을 하다가 버스 2대로 운송업을 시작했다. 즉 광주~순천 간의 버스사업이었다. 이어 그는 도요타 트럭 4대를 구입했고 운송업을 하는 광주여객을 창업했다. 이양구는 함흥에서 내려와 서울에서 자전거로 과자행상을 하다가 서소문에 과자를 만드는 동양식품회사를 만들었다. 오리온제과의 전신이다. 지금은 사라진 대농그룹의 박용학도 고향인 강원도에서 서울로 와 간장공장을 시작했으며, 신동아그룹의 창업주 최성모는 황해도 사리원에서 정미소를 경영하다 서울로 내려와 고무신을 만드는 공장을 열었다. 1945년 광복은 우리나라 기업인들이 새로 창업을 하고 오늘날 세계적인 기업의 초석을 마련한 첫해이다. 기업인들은 모두 조국의 광복을 맞아 새로운 희망을 가지고 서울로 서울로 올라오고 있었다. 새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홍하상 작가·전경련 교수1945 11월24일 이승만(왼쪽부터), 김구, 하지 중장. 홍하상 작가·전경련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