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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과 창] 말(言語)이 순해져야 세상도 편안해져
말이 독해졌다. 거칠어졌다. 거세졌다. 더러워졌다. 지저분해졌다. 말이 말이 아니다. 말 감옥이 뚫린 모양이다. 탈옥한 말들이 세상을 활보하고 있다. 오랜 세월 동안 이런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일제강점기 엄혹한 세상에서도 안 그랬다. 6·25전쟁 중 포성 속에서도 이러지는 않았다. 민주화를 외치며 함께 팔 흔들 때도 이러지 않았다. 큰 걱정이다.공동체를 이룰 때 사람들은 가슴속에 말 감옥 몇 개씩 지었다. 어떤 사람은 어설프게 지었고, 어떤 사람은 튼튼하게 지었다. 예의염치 감옥, 양심 감옥, 도덕 감옥, 자존심 감옥, 품격 감옥 등 사람마다 다양한 양식의 말 감옥을 지었다. 영국 사람은 젠틀맨십(Gentlemanship) 감옥, 프랑스 사람은 톨레랑스(tolerance) 감옥, 미국 사람은 다이버시티(Diversity) 감옥, 독일 사람은 게마인츠(Gemeinschaft) 감옥을 주로 선택했다.누구든 공동체 발전에 해가 되는 말은 감옥에 가두었다. 함부로 사용하면 서로 낯 붉힐 말도 가두었다. 욕설을 먼저 가두었다. 성 언어를 포함한 각종 외설스러운 금기어를 골라 가두었다. 혐오의 말, 분열의 말, 비방의 말, 무고의 말, 거짓의 말을 가두는 사람도 있었다. 심지어 예단의 말, 근거 없는 말, 지르고 보는 말을 찾아내어 가두는 사람도 있었다. 사람에 따라서는 타인의 명예를 더럽히는 말을 가두기도 했다.전쟁통에 살아남는 일이 급해서 감옥을 지키기도 힘들었다. 사람들이 욕설 감옥부터 열었다. 감옥을 나온 욕설은 갇혀있던 분풀이라도 하듯 온 세상을 휘저었다. 때맞춰 장난감이 없던 어린애들이 장난감 대신 욕설을 불러내 같이 놀았다. 지체 높은 어른들도 아무 생각 없이 욕설을 썼다. 잠깐 사이 어지간한 욕설은 일상의 말이 되었다.감옥 지키는 힘을 덜어 편하게 된 사람은 더 험한 말도 풀어주었다. 그와 더불어 세상이 산업화, 근대화, 도시화라는 이름으로 갇힌 말의 탈옥을 부추겼다. 돈과 권력이 생기면 탈옥을 돕기도 했다. 의도적으로 탈옥한 말을 이용하는 사람도 생겼다. 1인 방송 시대가 되면서 탈옥한 말과 야합하는 사례가 늘었다. 교통수단, 인터넷과 SNS의 발달은 지구 전체에 영향을 미쳤다. 최근 선거철을 맞아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이제 말 감옥을 유지하겠다고 하면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 어리석은 사람, 이상한 사람이 되었다. 특히 편 가르는 말을 붙잡아 두는 사람은 여지없이 공격 대상이 되었다.그러니 말이 멀쩡한 사람을 습격하기 시작했다. 가짜 말, 잘라낸 말, 짜깁기 한 말에 인격이 무너졌다. 변명하는 말, 우겨대는 말, 남 탓하는 말, 덮어씌우는 말에 품격이 사라졌다. 편 가르는 말, 논점 흐리는 말, 무시하는 말에 신뢰가 무너졌다. 억울하지만 당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 탈옥한 말을 다시 가둘 때까지.감옥을 처음 열어 준 사람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합당한 이유를 밝히지 못하면 엄벌해야 한다. 그런데 감옥 허물기에 동참한 사람이 너무 많다. 독한 말을 내보낸 사람을 대놓고 감싼다.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오히려 떠밀려 문을 연 사람을 가리키며 책임지라고 몰아붙인다. 나쁜 말이 사람을 나쁘게 만들었다. 나쁜 말이 세상을 나쁘게 만들었다.선거가 끝났다. 다시 건강한 대한민국 공동체를 생각하자. 말의 습격으로 입은 상처를 서로 보듬어 주자. 말 감옥을 재건하자. 탈옥한 말을 잡아들이자. 양심과 도덕의 말, 예의염치의 말을 쓰는 품격 있는 세상을 만들자. 말이 순해져야 세상도 편안해진다.박정곤 대구행복한미래재단 상임이사박정곤 대구행복한미래재단 상임이사
[김요한의 도시를 바꾸는 시간] '대구' 하면 떠오르는 사람
도시는 저마다 사람, 기업, 자본을 끌어당기려고 도시를 상품화하고 판촉하는 도시마케팅 활동을 한다. 도시마케팅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구체적인 삶터인 지역을 홍보하기 때문에 장소마케팅이라고도 한다. 프랑스 '파리' 하면 에펠탑이 떠오르고, 미국 '뉴욕' 하면 자유의 여신상이 떠오르는 랜드마크(landmark)가 대표적인 장소마케팅이다. 한국에서는 서울을 제외하면 지방도시들은 랜드마크를 가지기가 사실상 어렵다. '대구' '광주' 하면 어떤 랜드마크가 떠오르는가? 이렇다 할 대표적인 구조물도 없는 지방 소도시의 몸부림은 눈물겹기까지 하다. 자고 일어나면 전국에 케이블카가 개통되고 있고, 출렁다리는 150개가 넘었다. 도시마케팅은 도시와 관련한 가치를 창출하고, 전달하는 일련의 과정이라는 관점에서 브랜드마케팅도 중요하다.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도시 브랜드 슬로건은 미국 뉴욕의 'I♥NY'이다. 1977년부터 현재까지 단 한 번도 바꾼 적이 없고, 도시 브랜드 슬로건은 시민의 것이었다. 'Seoul, My Soul' 'Busan is Good' 'Powerful Daegu', 서울, 부산, 대구의 브랜드 슬로건이다. 시장 임기 따라 계속 바뀌다 보니 브랜드마케팅이 안 되고, 시민들의 사랑도 못 받는다.사랑받는 브랜드 슬로건이 없고 주목받는 랜드마크도 없는 지방도시들은 어떻게 도시에 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좋은 이미지를 형성할 수 있을까? 물리적인 랜드마크와 정형화된 도시브랜드에서 사람, 시민으로 눈길을 돌려보자. '이인성 화가의 피사체 계산성당' '시인 이상화 생가터 라일락뜨락1956', 작년 대구문화예술진흥원에서 주관한 '대구인물기행'의 코스다. 가수 김광석과 방천시장이 만나서 '김광석다시그리기길'이 만들어졌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과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조선에 귀화한 일본 장수 김충선과 명나라 장수 두사충, BTS멤버인 뷔와 슈가까지 대구의 인물 기행 코스가 이어진다면 도시의 집합적 매력을 만들어낼 것이다.뉴욕시민들은 2001년 9·11테러 이후 'I♥NY More Than Ever'라는 구호로 상처받은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졌다. 대구시민들은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을 공동체 시민정신으로 극복했다. 청년들은 SNS를 통해 '1339 캠페인'을 주도했다. '#힘내라대구' '#내가대구다'라는 문구를 해시태그 한 캠페인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무려 5만5천여 명이 기부에 참여했다. '대구'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83타워 전망대'나 'Powerful Daegu'가 아니라 누구에게는 당신과 함께한 작은 장소, 소중한 기억이다. 누구에게는 당신이 도시의 랜드마크, 도시의 브랜드다.김요한 지역과 인재 대표김요한 지역과 인재 대표
[김종현의 블록체인과 AI] "디지털 배지(Digital Badge)"
전월에 작성한 칼럼에서 코인 투자 위험성을 언급하였는데 이 글을 쓰기 이틀 전부터 큰 하락으로 인해 많은 분들이 손해를 보신 것 같습니다. 건전한 투자 되시기를 기원합니다.대통령 국정 과제로 지정된 디지털 배지에 관해 블록체인 업계에서는 관심이 뜨겁습니다. 디지털 배지란 디지털 교육 인증제라고 정의합니다. 비교과 과정에서 수료한 교육들을 디지털 배지를 발급받아 web3뿐만 아니라 기존 웹서비스 또는 모바일 서비스 등에서도 보여줄 수 있고 교육의 참여자가 맞는지 교육 간의 태도나 성적 등을 통해 다양한 색깔이나 이모티콘 등으로 표현할 수 있는 기술로서 모질라 재단(Mozilla)이 처음 시작하였고, 현재 블록체인 기술을 통해 오픈 배지(OPEN BADGE)라는 국제 표준을 통해 발전해 나가고 있습니다. 제가 운영하는 회사에서도 항상 많은 사람들을 신규로 채용하고 있으며 많은 이력서를 저도 검토하고 있습니다. 국내 이력서는 학력 이력 자기소개 정도로 구성됩니다만, 해외에서의 개발자 구인 구직 정보를 보면 취업 시 바로 투입할 수 있게 세부 요구 기술과 본인이 갖춘 기술 중심으로 적혀집니다. 국내 이력서가 서사적이라면 해외 개발자를 뽑는 이력서는 각자가 이수한 교육과 경험을 중심으로 서술이 됩니다.때에 따라서는 정성적인 부분이 중요한 사업영역에 투입할 서정적·창조적인 인재도 있으나 디지털 시대와 인공지능 시대에는 좀 더 정교한 다면적인 평가 체계를 요구하며 인재가 준비한 것들이 진실이며 데이터로 제공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DID 기술을 통한 극도로 보안성을 강화한 개인 신원증명과 전자지갑에 인재들의 교육 정보를 차곡차곡 쌓아서 여러 소셜 서비스 등을 통해 본인들 자랑하고 역량에 걸맞은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세상과 사람이 모두를 검토해야 하는 단순반복적인 업무를 시스템을 통해 모으고 인공지능을 통해 분석하는 효율적인 회사 운영은 정말 편한 세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항상 새롭고 편한 기술을 만들어 가다 보면 "굳이 돈을 들여서 만들어야 하나?"라는 질문들을 받습니다.과거 TV쇼에 출연한 빌 게이츠에게 인터넷으로 무엇을 할 수 있냐는 진행자의 질문에 야구 경기를 보거나 쇼핑을 할 수 있다는 대답에 진행자가 많은 웃음으로 대한 사례를 최근 다시 본 적이 있습니다. 기술의 초기 단계는 다양한 가능성을 보여주지 않고 한두 가지 뚜렷한 변화만을 보여줍니다.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개발자가 되어라"라는 10여 년 전 이야기들이 기억나는데요. 굳이 인문학적 소양을 갖추지 않아도 상상력을 활용해 이렇게 저렇게 머릿속으로 상상해 본다면 또 다른 서비스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2023년 기준 디지털 배지 시장은 연 1억986만달러라고 발표하였고 연 19% 이상의 성장률을 예상한다고 합니다.DID 시장에 대한 시장성이 가트너 발표 기준 2025년 예상 252억달러인데 비해 다소 작게 느껴집니다.아주 심플하게 수명의 연장에 따른 더 많은 교육과 제2, 제3의 삶에 대한 욕구로 인한 자기 개발과 자기 자랑의 시장은 조사기관의 예상을 한참 벗어나 더 큰 시장을 만들어 줄 것 같습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나 관련 기술과 기업이 투자 애널리스트들을 통해 언급되기를 기원합니다. 블록체인을 기반으로 하는 코인이 아닌 실사용 기술에 대해 고민하다가 디지털 배지를 소개해 드립니다.〈주〉루트랩 대표이사김종현 (주) 루트랩 대표이사
[시시각각(時時刻刻)] 에티켓도 국력이다
해외여행이나 유학 생활을 하다 보면, 가끔 감동적인 일을 경험하기도 하고 소매치기 같은 낭패를 당하기도 한다. 한 나라에서 짧은 기간 어쩌다 겪은 경험이 그 나라의 이미지로 각인되는 경우도 많다. 유럽에서 우연히 겪은 경험의 단상들이 스쳐 간다. 유럽사람들은 어떤 곳이든 출입구를 드나들 때 반드시 뒤를 돌아보며 사람이 뒤따라오면 문을 잡아주고, 엘리베이터에서도 누군가의 기척이 있으면 열림 버튼을 누르고 끝까지 기다려준다. 한번은 여행 중 호텔을 찾지 못해 헤매다 행인에게 길을 물으니, 꽤 멀리 떨어진 호텔 앞까지 직접 데려다주고 가던 길을 한참 되돌아가던 사람도 만났었다. 이런 모습이 나에게는 아직 낯설었던 시절, 타인에 대한 작은 배려들이 깊은 인상을 남겼다. 해외에서 좋은 경험만 있지는 않았다. 관광지에서 지하도를 걸어가다가 능청맞게 내 백팩의 물건을 훔치려다 눈이 마주쳐도 놀리듯 헤죽거리며 지나가는 소매치기범도 만났었다. 지하철에서 뒷주머니의 지갑과 휴대폰을 훔치는 사람도 있었다. 또 자리에 앉아서 나의 이런 상황을 빤히 지켜만 보는 현지인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경우 적극적으로 제지하거나 도와주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낯선 곳에서 더 외로워지고 불안한 마음이 들곤 했었다.어떤 나라에서 좋은 경험을 통해 얻은 좋은 이미지가 그 나라의 전부가 되기도 하고, 안 좋은 경험이 또 그 나라의 전부로 인식되기도 한다. 한 나라 국민의 작은 에티켓이 한 국가의 이미지를 만들고 그것이 국력이 된다. 그렇다면 외국인의 눈에 한국은 어떤 모습일까?외국인들이 한국에 오면 치안이나 도둑이 없다는 점에 매우 놀란다고 한다. "한국은 밤에도 안전하게 거리를 다닐 수 있다" "카페에서 휴대폰이나 노트북 등 비싼 물건을 두고 화장실에 다녀와도 없어지지 않는다"라고 한다. 사실이다. 하지만 한국 사람의 윤리의식이 강해서 그런 것만은 아닐 수도 있다. 한국은 사생활이 침해될 정도로 곳곳에 CCTV가 설치되어 있다. 사생활 보호가 약하지만, 치안은 좋을 수밖에 없는 환경이 한몫하기도 한다.2021년 유엔무역개발회의 운크타드(UNCTAD)는 만장일치로 우리나라를 선진국 지위에 올려놓았다.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지위가 변경된 만큼 경제적 지위뿐만 아니라 윤리·도덕적 지위도 '동방예의지국'의 명성답게 선진국으로 평가받았으면 한다. 하지만 정치인들의 막말에 이젠 놀라지도 않는다. '맹자'에 "윗사람이 잘하면, 아랫사람은 반드시 그보다 더 잘하는 사람이 있다(上有好者, 下必有甚焉者矣)"라는 말이 있다. 또 '논어'에는 "군자의 덕은 바람이요, 소인의 덕은 풀이라, 풀 위로 바람이 불면 풀은 눕는다(君子之德, 風, 小人之德, 草. 草上之風, 必偃)"라는 말도 있다. 국민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모범을 보여야 사회가 더 건전해지지 않을까. 고대부터 법만 따지고 정치인들이 염치가 없으면 국민도 염치가 없어진다는 가르침이 있지 않은가. 노약자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젊은이의 배려와 서로 눈이 마주치면 웃어주는 에티켓이 모이면 국격도 높아질 것이다.최근 문화체육관광부는 해외에 대한민국을 체계적·포괄적으로 바로 알리기 위해 현재 전 세계에 유통되고 있는 한국 관련 정보의 현황을 점검·조사한다고 밝혔다. 케이팝, 불닭볶음면, 떡볶이 같은 것뿐만 아니라 한국이 전통 예절을 지닌 바른 나라의 이미지로 세계에 인식될 수 있기를 바란다.권세훈 <주>비즈데이터 이사·파리1대학 법학박사권세훈 비즈데이터 이사·파리1대학 법학박사
[이하석의 발견과 되새김] 신록의 꿈과 소통에의 열망
# 꽃 잔치그 많던 꽃들이 자취를 감추고, 새잎들의 그늘이 무성해진다. 신록의 계절이 열리는 것이다. 너무나 화려했지만, 한편 너무 짧았던 지난 꽃 시절을 아쉬워한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지난주 총선 날 오후, 각자 선거를 한 다음 전국의 문인들 수십 명이 영천의 보현산 자락에 모였다. 나도 한자리를 차지했다. 산돌배나무가 거의 만개한 때여서 그 꽃을 보기 위해서였다. 꽃나무 하나를 보려고 서울서 부산에서, 대구에서 그리고 대전과 전북에서까지 문인들이 찾아오다니, 봄 호사의 극치가 이런 게 아닌가 여길 만도 하다. 하지만 참으로 진정이 넘치는 소박한 꽃 잔치였다. 오래된 고목이 한껏 가지를 뻗친 채 꽃핀 장엄한 나무에의 예찬이 잇달아 나왔다. 누군가는 '어르신'이라며 나무에 경배하기도 했다. 이들은 꽃나무 그늘에서 흔쾌한 술자리를 가진 후 이내 뿔뿔이 헤어졌다. 그때가 꽃 시절의 절정기였던 듯하다. 영천시에서 보현산 자락을 찾아가는 길가는 물론 영천 댐 주변의 길은 온통 벚꽃들이 터널을 이루었고, 산록과 들에는 복사꽃이 만개했다. 사과꽃과 자두꽃들 등 봄꽃들이 다투어 피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불과 일주일도 안 되어 꽃들이 지고, 신록이 세상을 덮기 시작한 것이다. 새삼, 꿈을 꾼 듯이 한 계절의 변화를 바라본다. 이런 글이 눈에 띈다."아침이면 새 소리 구르고 언덕은 다시 부풀어 올랐다. 그러므로 어제의 밤이 결코 괴롭고 긴 것만은 아니었다."문학과지성사의 시인선 600번째 기념으로 나온 앤솔러지 '시는 나를 끌고 당신에게로 간다'에 실린 이시영 시인의 글이다. 이 책은 시인선 501번에서 599번째에 걸쳐 나온 시집들의 시인들이 직접 쓴 뒤표지글을 모은 이색적인 앤솔러지다. 이 시인은 시집 '나비가 찾아왔다'의 뒤표지글로 이 짧은 글을 붙였다. 아침에 듣고 보는 자연의 놀라운 변화 앞에서 험난했던 지난밤을 되돌아보는 눈길이 애틋하게 느껴진다. 그것을 나는 혹독했던 겨울을 지나 그 보상처럼 맞이하는 놀라운 꽃 잔치의 풍성함에 이어 새롭게 다독이는 신록에의 기대로 받아들인다. #시단의 경사말이 나온 김에 우리 시단의 경사를 짚고 가야겠다. 이번에 우리 문단의 대표적인 시인선으로 꼽히는 문학과지성의 시인선집과 창작과비평의 시선이 각각 600권째와 500권째를 내놓아 우리 문학의 눈부신 성과를 펼쳐보이고 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의 첫 출간은 민음사의 '오늘의 시인총서'(1974년)나 창비시선(1975년)보다 늦었지만 활발히 시집을 펴내며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시인선으로 거듭났다. 1호는 황동규 시인의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로 1978년 출간 이후 46년이 됐다. 창작과비평도 꾸준히 시선을 펴내어 500권이라는 기념비적인 부피를 쌓았다. 창비시선 1호는 신경림의 '농무'다. 이들 시인선들은 우리 문단의 꽃을 활짝 피워 다른 시인선들의 출간을 견인하는 역할을 해왔다. 이에 따라 한국 시단은 더욱 다채로워졌다. 민음사는 '오늘의 시인총서' 외에도 1986년 시작한 '민음의 시' 시인선으로 최근 320호를 펴냈다. 문학동네도 2011년부터 '문학동네시인선'을 출간하며 최근 208호까지 이르렀다. 이들 시인선들의 꾸준한 출간은 우리 문학에의 신뢰와 수준에 대한 자신감이 이룬 업적이라 할 수 있다. 세계적으로 시에 대한 관심이 점점 옅어지는 상황에서도 우리 문단에서 시집들이 꾸준히 발간되는 건 놀라운 일이다. 그야말로 눈부신 꽃의 시절을 거쳐 신록의 푸르름으로 거듭나 새로운 도약의 토대를 마련하고 있는 것이다. 이시영의 말처럼 우리 문학은 어렵던 시절을 견뎌내어 이제 눈부신 아침을 맞이하고 있는 것 같다.#소통의 꿈그래, 다시 말하지만, '아침의 새소리와 부풀어 오른 언덕'은 풍성했던 꽃 시절을 거쳐 맞는 신록의 푸르른 세계로 볼 수도 있다. 그런 아침의 새 기운으로 간밤의 '괴롭고 긴' 시간을 넘어서는 것이다. 이 말을 나는 또 우리가 맞이한 새로운 시간으로 바꾸어 말해보고 싶어진다. 선거가 끝난 것이다. 이번 선거는 엄청난 말의 성찬이었다. 온갖 말들이 강렬한 기세로 피어나 봄꽃처럼 화려하게 전국을 덮었다. 그리고 야당의 압도적인 승리로 막을 내렸다. 특히 불통이라는 현 정부를 겨냥한 야권의 집요한 정권 심판론의 공격이 주효한 듯하다. 이러한 판세 때문에 여러 가지 정국의 전망이 나오지만, 어쨌든 여든 야든 국민의 선택을 받아들여 새롭게 관계를 설정하고 타협하며, 소통해야 한다. 어떤 면에서는 우리 정치도 꽃 시절을 지나 신록의 차분하고도 푸른 시기에 접어든 것이라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문득 학창 시절에 읽은 이양하의 수필 '신록 예찬'이 생각난다. 자연의 혜택을 고맙게 여기면서 그 가운데서 "봄과 여름이 혜택이 많고 그 가운데서도 봄, 봄 가운데에서도 만산(萬山)에 녹음이 싹트는 이때"를 제일 혜택이 많은 것으로 꼽는다. 그러면서 "나는 역시 사람 사이에 처하기를 즐거워하고, 사람을 그리워하는 갑남을녀(甲男乙女)의 하나요, 또 사람이란 모든 결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역시 가장 아름다운 존재의 하나라고 생각한다"라고 생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를 신록에 빗대어 관조한다. 서로가 가장 아름다운 꽃이라고 마구 꽃피어대던 시절을 지나 한층 차분해진 녹음의 시기를 맞으면서 서로는 서로를 돌아본다. 그렇게 새롭게 우거지면서 강렬한 여름의 세계로 함께 나아가야 한다. 선거 기간 중의 온갖 막말과 상대에 대한 증오의 기세를 누그러뜨리고 다시 서로는 얼굴을 풀고 소통해야 함을 이번 선거를 통해 국민은 요구하고 있다. 지난주 산돌배나무 아래서 원로 문인이 강조했던 "우리는 꽃도 좋아하지만 사람이 먼저라는 마음으로 이곳에 모였다"는 말처럼 서로 대립했던 마음을 풀어서 어우러지고 상응하는 게 인간의 미덕인 것이다. 꽃 지고 푸르러지는 신록의 계절을 맞아 갖는 바람의 마음이다. 시인이하석 시인
[단체장의 생각:長考] 상주가 '모자'와 '만화'를 주제로 축제를 여는 이유
지역 축제는 지역의 특색과 문화를 홍보해 관광객을 유치하고 지역경제를 활성화하는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최근에는 지역 축제가 너무 많아지고 경쟁력이 약화되면서, 효과가 반감되는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또한 지역 축제가 지역의 정체성과 연결되지 못하고, 단순한 소비와 유희에 그치는 경우도 많다. 이런 상황에서 지역 축제는 어떻게 변화하고 발전해야 할까.우선, 지역 축제는 지역의 고유한 자원과 역사를 살려 독창적이고 주민이 참여하는 축제로 만들어야 한다. 전북 임실군의 N치즈축제는 임실만의 차별화된 임실N치즈라는 고유 콘텐츠와 치즈 테마파크를 조성해 전국에서 유일한 치즈 축제로 자리매김했다. 볼거리, 먹거리, 살 거리, 체험 거리가 풍성하고, 주민들의 참여도가 높아서 지역경제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반면, 축제의 콘셉트와 상관없이 흥미를 끌 수 있는 요소를 동원하거나 다른 지역과 비슷한 축제를 열면서 정체성을 잃는 경우는 피해야 한다.둘째, 지역 축제는 지역의 생활인구를 늘리고, 지속 가능한 관광으로 이어지는 방향으로 발전해야 한다. 지역 축제는 단기적으로 관광객을 유치하고 소비를 촉진하는 효과가 있지만, 지역의 인구 감소와 쇠퇴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 따라서 지역 축제는 지역의 매력을 알리고 관계인구를 확대하고 재방문을 유도하는 전략이 필요하다.셋째, 지역 축제는 지역의 문화와 환경을 보호하고 지속 가능한 발전을 추구해야 한다. 지역 축제는 지역의 문화와 자연을 소개하고 발전시키는 촉매제가 되어야 한다. 전남 함평군의 나비축제는 생태축제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한 산업축제다. 이 축제는 나비와 관련된 다양한 체험과 전시를 통해 나비의 생태와 문화를 알리고, 나비 산업을 육성하고 있다. 반면, 축제를 통해 동물이나 식물을 대상화하거나 파괴하는 경우는 지양해야 한다. 축제는 단순한 이벤트가 아니라 지역의 문화와 환경을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장이 되어야 한다.지역 축제는 지역의 정체성과 자부심을 높이고 지역발전을 이끌어내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지만 지역 축제가 이대로는 안 된다는 것을 인식하고 변화하고 발전해야 한다. 지역 축제는 지역의 고유한 자원과 역사를 살리고, 지역의 생활인구를 늘리고, 지역의 문화와 환경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지역 축제가 지역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상주시라고 다르지 않다. 독창적이고 참여적인 축제와 관계인구를 늘리고 재방문을 유도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상주세계모자페스티벌과 만화축제다. 지난해 개최한 상주세계모자페스티벌은 대한민국 어디에서도 하지 않은 축제다.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선점하고 '모자'라는 세계인 공통의 소재를 이용하여 축제로서 지역 경제의 동력을 확보하고자 힘써왔다. 처음부터 성공이 보장될 것이라 여기지 않았다. 그저 가능성을 보고 만들어갔다. 상주시는 지난해 그런 가능성을 확인했다.만화축제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준공한 만화특화 시립도서관을 통해 창의력과 상상력이 발동되고, 그곳에 가야만 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 외지에서도 찾아오는 공간으로 만들어나갈 것이다. 일본 다케오시는 인구 5만명의 소도시지만, 시립도서관 하나가 연간 100만명의 방문객을 창출했다. 우리도 이와 같다. 일본 고치현의 만화 고시엔 같은 행사를 기획하고, 전국의 청소년과 가족들이 찾아오는 상주를 만들어 가는 게 목표다.강영석 상주시장강영석 상주시장
[단상지대] 삶의 정수에 다가가다
얼마 전 어떤 조직에서 경력변호사를 대거 채용한다는 공고를 보았는데 조건이 좋았다. 신입도 아니고 경력인 데다가 내가 했던 일과 관련이 있어서 나는 관심을 가지고 공고를 읽었다. 지원자의 나이 조건이 40세까지이니 지원 가능 나이도 넉넉하고 적절하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글을 읽던 중 현실타격감이 왔다. 내 나이가 47세인 것을 새삼 깨달은 것이다. '흥, 경력이면 50세까지는 뽑아야지.'며칠 후 나는 문득 오랫동안 미루던 조혈모세포 기증(골수 기증)을 결심했다. 예전에 장기기증 희망등록은 한 적이 있었는데, 조혈모세포 기증의 경우 입원해서 채취하고 회복하는 기간이 필요하다고 해서 하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더 나이가 들기 전에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절차를 알아보기 위해 국립장기조직혈액관리원 홈페이지에 들어갔다. 그곳에는 조혈모세포 기증희망자 등록은 '만 18세 이상 40세 미만의 건강한 사람'이라고 되어 있었다. 해가 바뀌어도 나는 똑같은데 내 나이의 숫자만 관용 없이 더해진다는 것이 억울하게 느껴졌고, 철없는 내가 이쯤 되면 삶의 지혜를 축적했을 것만 같은 나이가 되었다는 것이 받아들이기 힘들었다.나이가 든다는 것이 이렇게 억울한 생각도 들지만, 나이가 든다는 것의 장점도 종종 발견한다. 나이가 들면 유독 꽃 사진을 찍게 되는 것뿐만 아니라 여러 변화가 생기는 것 같다. 아침에 아파트 거실에서 밖을 내려다보면 늘 비슷한 자리에서 운동하시는 어머님 아버님들이 보인다. 나는 주로 스쿼트를 하면서 밖을 보는데, 그분들의 직관적인 맨손체조나 스트레칭을 보면 웃음이 나서 자세가 무너지곤 했다. 하루는 독수리가 날개를 활짝 펴듯 팔을 펴고는 허리를 90도로 구부렸다 폈다 하는 것이다. 퍼득퍼득 거리면서. 날갯짓은 일정하고 엄숙했다. 그런 날갯짓 이외에도 온몸을 일정한 규칙 없이 배배 꼬는 운동도 하셨다.그런데 어느 날 나는 그 족보에도 없는 운동을 따라 해 보았다. 독수리가 날아오르듯 시동을 걸고 큰 날갯짓으로 퍼덕이며 상체를 접었다 폈다 했다. 이 근본 없는 몸짓은 심장을 빠르게 뛰게 하여 유산소 느낌을 줌과 동시에 하체를 강하게 지탱하여 근력운동도 되는 느낌을 주었다. 그리고 새가 나는 듯 명상효과와 마음의 평온까지 느껴졌다. 꽈배기처럼 배배 꼬거나 몸을 꿀렁거리며 예측하기 어려운 동작들을 정적으로 연결하는 이 직관적인 운동은 평소 쓰지 않는 근육을 자극하여 피로를 풀고 스트레칭 효과가 있는 느낌이었다. 예전에는 앞뒤로 손을 손뼉 치거나 뒤로 가는 어르신들, 특이한 동작으로 몸을 푸시는 분들을 보면 '풋' 했는데 지금은 그게 삶의 정수에 다가가 있는 몸짓처럼 느껴진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오로지 내 근육을 푸는 것과 편안함만 추구하는 경지에 이르러야 할 수 있기 때문이다.예전의 나는 놀기로 약속하면 맛있는 것 어떤 것을 먹을지 어디에 갈지 등 계획을 짰다. 무언가를 경험해야 할 것 같고 최대한 신나야 하고 맛있는 것을 먹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제대로 놀았다고 생각되는 날은 자주 오지 않았고 그렇게 놀고 나면 놀아서 기가 털리는 느낌도 있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목적적이지 않은, 잔잔하고 무색무취한 그런 시간에도 '놀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날씨가 좋을 때 걷거나 앉아 있는 것, 전통시장을 천천히 걸어 지나갈 때도 놀았다는 생각이 든다. 사소하고 작고 평범한 것들, 다른 사람의 인정보다는 내 마음이 채워지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게 된 것이다.이은미 변호사이은미 변호사
[박재열의 외신 톺아보기] 이스마일 하니예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최근 확전 기미를 보이고 있다. 그 전쟁의 종전과 이스라엘 인질석방을 위한 협상은 지지부진하다. 이스마일 하니예(62)는 그 협상의 하마스 측 책임자다. 그는 지난 4월10일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아들 3명을 잃었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입장이나 결의에 흔들림이 없다고 언명했다. 이스라엘은 그 아들들이 하마스 공작원이라고 했으나 그는 아들들을 순교자라고 치켜세웠다. 지금까지 그의 대가족 중 60명이 이스라엘에 의해 목숨을 잃었고 지난 공습에 아들들 외에 손자 셋도 함께 희생당했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동포는 자유와 존엄성을 쟁취하기 위해 어떤 희생도 감내할 각오가 되어 있다는 말도 했다.하니예는 2006년에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총리가 되었으나 그 이듬해 대통령에 의해 해임되었다. 그는 그 해임을 인정치 않았다. 그때부터 웨스트뱅크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통치하였으나 가자지구는 총리인 그가 통치하였다. 2014년 두 지역의 통합정부가 꾸려지자 그때 총리직을 내려놓았다. 그때부터 2017년까지 가자지구의 실질적 통치기구인 하마스를 이끈 사람도 그였으며 그 이후로도 정치국 의장으로 여전히 그 지역을 책임지고 있다. 2017년부터 그는 카타르 도하에 거주하고 있으나 가자지구의 참혹한 현실을 외면하고 일류호텔에서 생활한다고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다. 그는 이집트에서 땅굴을 통해 들어오는 상품에 20% 세금을 매김으로 많은 돈을 그러모아 가자시 경치 좋은 해변에 엄청난 땅과 여러 채의 주택을 사들였다. 그러나 지난해 12월에 시행한 차기 대통령 적격자 여론조사에서 어느 지역에서든 현 대통령보다 몇 배 높은 인기를 얻고 있다. 경북대 명예교수·시인경북대 명예교수·시인
[송재학의 시와 함께] 복희
복희야,부르는 소리가 들린다차가운 바닥에 앉아주인을 기다리고 있던 개가 일어선다개가 걷고 소녀가 따라 걷는다인기척을 느낀 소녀가 먼저 지나가라고 멈춰 서서개를 가만히 쓸어주고 있다희미한 달이 떠 있다모두 눈이 멀지 않고서는 이렇게 차분할 수 없다 남길순 '복희'개의 이름은 복희, 소녀는 개와 잘 연결되어 있다. 호수 주변의 길을 산책하면서 몸짓이 큰 복희와 어린 소녀는 자주 다른 사람을 위해서 멈추었다. 그때마다 소녀는 복희를 쓸어주고 있다. 복희는 소녀의 손길을 잘 받아주고 있다. "모두 눈이 멀지 않고서는 이렇게 차분할 수 없다"는 장면, 개와 소녀 그리고 호숫가와 달이 정물화처럼 느리게 움직이고 있다. 커다란 개와 소녀는 낯선 풍경이지만 조금도 거슬리지 않으면서 미소를 머금고 있다. 소녀를 따르는 우리의 개 복희는 소녀가 좋아하는 잔잔한 호수와 다르지 않다. 따뜻함이란 이처럼 비범하다. 사족, 희미한 달은 낮달일까 아니면 초저녁의 달을 가리키는 걸까.시인시인
[윤성은의 천일영화] 연상호 감독의 K-크리처 시리즈 '기생수: 더 그레이'
한국 오리지널 시리즈물, '기생수: 더 그레이'가 다시 한번 넷플릭스 비영어권 글로벌 순위 1위에 올랐다. 연상호 감독은 '부산행'(2016)으로 K-좀비물의 부흥을 알렸고, 코로나가 한창이던 시기에 공개된 '지옥'(2021)까지 세계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오징어 게임'(2021) 이후 K-콘텐츠 신드롬을 이어가는데 큰 몫을 해왔다. 그사이에 개봉한 '염력'(2017)과 OTT 오리지널 영화, '정이'(2022), '기생수: 더 그레이'에 이르기까지 그의 실사 작품들은 모두 비현실적인 캐릭터 및 사건들을 다룬다는 공통점이 있으며, 모두 '판타지'라는 광범위한 단어 안에 포함시킬 수 있다. 그러나 세부 장르는 좀비물, 초능력물, SF 등으로 제각각인데, '기생수: 더 그레이'는 좀비물과는 또 다른 크리처물로 분류해 볼 수 있다. 크리처물에는 사람을 죽이거나 위협하는 괴물이 등장하기 때문에 호러물의 한 장르로 분류되기도 하고, 스릴러적 요소도 많이 가미되는 것이 특징이다. 그간 K-크리처물은 여타의 재난 영화들과 맥을 같이해 왔는데,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과 유사한 스릴을 선사함은 물론, 재난 상황에서 인간의 이기심을 날것 그대로 드러내는 날카로움도 들어있고, 한때 인간이었던 존재에 대한 애잔함이나 허무함까지 남긴다. 연상호 감독의 이번 시리즈 또한 그러한 특징들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기생수: 더 그레이'는 인간이 인간의 몸속에 기생해야만 살 수 있는 정체불명의 생명체에 대항해 사투를 벌이는 이야기로, 연상호 감독의 새로운 장르적 시도와 성취를 확인할 수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이제는 고전(古典)이라 불릴만한 인기 일본 만화 '기생수'를 원작으로 하고 있음에도 '인간의 몸을 숙주로 삼는 생물'이 있다는 기본 설정 외에 캐릭터 및 서사를 대부분 변형시켰다는 점이다. 주인공 '수인'(전소니)의 몸에 침투한 기생생물은 수인의 뇌를 반만 잠식하는 바람에 하루에 15분 정도만 괴물('기생수')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변종이 된다. 그래서 수인은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처럼 두 개의 인격으로 존재하게 되는데, 이런 특수성 때문에 수인을 같은 동족이라며 포섭하려는 기생수들과 기생수들을 박멸하려는 특수 전담반 '더 그레이'팀 모두의 표적이 된다. 원작의 주인공 '신이치'는 한쪽 팔만을 잠식한 기생수와 계속 소통하며 위기를 극복하지만, 수인은 해리성 장애처럼 자신 안에 있는 '하이디'와 동시에 깨어 있을 수 없기에 제 3자가 그들 사이의 소통을 담당해야 한다는 큰 차이가 있다. 우연히 그 역할을 담당하게 된 '강우'(구교환)는 수인과 도움을 주고받으며 우정을 쌓아나간다. 그들의 최종 목표는 시장의 뇌를 노리는 기생수 집단을 처치하는 것이다. 이처럼 '기생수: 더 그레이'는 변주된 세팅에 흥미로운 전사(前史)를 가진 캐릭터들이 더해져 새로운 이야기로 다시 태어났으며, 연상호 감독의 뛰어난 대중적 감수성으로 완성되었다. 심형래 감독의 '디 워'(2007) 흥행이 증명하듯 한국의 영상 기술이 일천하던 시절에는 CG만 매끄러워도 관객들의 호응을 얻을 수 있었지만, 이미 세계 정상급의 영상 기술을 가진 현재에는 신선하고 짜임새 있는 내러티브가 인기의 정확한 바로미터가 되고 있으며, '기생수: 더 그레이'는 그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콘텐츠의 휘발성이 강한 시대에 보다 롱런하기를 빌며, K-크리처물의 진화와 연상호 감독의 다음 도전도 기대해 본다.영화평론가윤성은 영화평론가
[경제와 세상] 동굴의 환영
칠흑 같은 지하 동굴 속에 죄수들이 갇혀 있다. 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팔다리가 묶이고 목조차 족쇄가 채워져 움직이지 못하고 그저 동굴 벽만 보고 살고 있다. 죄수들의 등 뒤에는 횃불이 타고 있고, 그 사이에서 사람들은 인형극 놀이를 한다. 나무로 만든 동물과 사람을 가지고 꼭두각시놀이를 하는 것이다. 죄수들은 횃불에 의해 동굴 벽에 투영되는 자신들과 인형들의 그림자를 볼 뿐, 인형들과 이들을 움직이고 대사를 읊는 사람들의 실제 모습은 볼 수도 없고 본적도 없다. 죄수들에게 그림자는 실재이고 들리는 대사는 그림자의 대화로 인식한다. 그림자라는 인식은 아예 없는 것이다. 그러다 한 죄수가 탈출하여 동굴 밖으로 나가면 평생 처음 경험하는 눈부신 햇살 때문에 한참을 헤매다 서서히 보이기 시작하는 자연과 사람들의 모습에 몹시 당황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동굴 속에서 봤던 그림자들의 진짜 모습이라고 아무리 일러줘도 그 사실을 거부하고 오히려 그것들이 환영이라고 우긴다.이 이야기는 플라톤의 '국가론'에 담긴 유명한 동굴 우화다. 동굴은 우리가 사는 세상이고 죄수는 바로 우리 자신이다. 우리는 보이는 세계의 이미지만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한다. 진실을 아무리 알려주어도 알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이를 인지심리학에서는 '확증편향'이라고 부른다. 사실 여부를 떠나 자신의 판단에 부합하는 정보만 수용하고 그 판단과 반대되는 의견들은 의도적으로 무시해버리는 현상이다. 개미 투자자 김씨는 A 기업의 주가가 오를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이 기업에 몰빵 투자를 했다면, 신제품 출시나 해외 수주 같은 이 기업의 호재에만 귀를 기울이고, 취약한 재무구조나 경쟁기업의 약진 같은 불리한 정보는 배척하거나 사소한 요인으로 애써 무시해 버린다. 갭 투자에 의해 다주택을 보유한 사람은 우리나라 부동산 가격은 장기적으로 언제나 우상향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고, 무주택자들은 현재 집값에는 과거 일본처럼 거품이 잔뜩 끼어있다고 판단을 하고 있다. 그래서 다주택자들은 건축자잿값 인상과 부동산 불경기에 따른 재개발·재건축 부진, 이어지는 주택 공급부족 현상에 주목한다. 반면 무주택자들은 미분양 아파트 양산과 저출산율, MZ세대에서 속출하는 주포자(주택 구입 자포자기) 기사에 몰입한다.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세계와 함께 사이버세계 역시 또 다른 동굴이다. 유튜브에서 주식이나 부동산 투자 관련 영상을 검색하여 보고 나면 내재된 필터버블 알고리듬에 의해 내 입맛에 맞는 내용으로 도배된 또 다른 영상을 보게 된다. 편의성을 높이기 위해 설계된 알고리듬이지만 역설적으로 구독자의 확증편향성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는다. 입맛에 맞는 주장을 선택할 수 있는 SNS와 OTT 플랫폼도 우리가 살고 있는 동굴의 일부이고, 이들은 모두 과잉·과격·과몰입을 부르는 알고리듬을 장착하고 있다. 요즘 선거철에 정치인과 정치 유튜버들이 뻔한 가짜뉴스와 거짓말을 마구 해댈 수 있는 것은 이에 환호하는 대중이 있기 때문이다, 확증편향에 기대 정치인들은 강성 팬을 얻고 유튜버들은 돈을 번다. 여기에 우리 사회를 이어주고 지탱하는 도덕과 윤리는 설 자리가 없다. TV 화면에 비치는 정치토론은 공정성을 내걸지만 사실 여부와 관계없는 확증편향 간의 싸움이라는 것이 전북대 강준만 교수의 말이다. 결과적으로, 우리 사회를 보수와 진보 간 이념적 견해차도 아니고 미래 비전과도 관계없는 감정적으로 극단적인 대립상태로 몰아가고 있다. 한국사회및성격심리학회는 올해 두드러진 심리현상으로 확증편향을 꼽았다.권 업 객원논설위원권 업 객원논설위원
[광장에서] 기후·환경 공약, 구호가 아닌 이행이 중요
2023년 '환경보전에 관한 국민의식조사' 보고서에 의하면, 일반 국민과 전문가 모두 '지구온난화·기후변화'에 가장 높은 관심을 보인 것으로 확인됐다. 이번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기후유권자'라는 신조어가 등장할 정도로 그 어느 때보다 기후변화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이를 고려한 듯 각 정당들은 유권자의 표심을 잡기 위해서 사회·경제 분야 등에 대한 전통적인 공약과 함께 기후·환경 공약을 강조하고 관련 분야의 전문가를 영입하기도 했다. 국내뿐만 아니라 최근 미국 대선에서도 '기후변화' 이슈가 핵심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는 보도가 있기도 했다. 그만큼 기후변화는 더 이상 국내, 환경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고 정치·경제·사회 등 전반에 영향을 끼치는 글로벌한 의제가 되었다. 이에 이번 선거에서 제안된 기후·환경 공약의 주요한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여당인 '국민의힘'의 주요 공약은 첫째로 기후대응기금 확충(2024년 2.4조원→2027년 5조원) 로드맵 마련, 탄소중립녹색성장위원회 기능 강화, 국회 기후위기특별위원회 상설화, '탄소중립녹색장기본법' 개정 등을 통한 기후위기 대응 강화이다. 둘째로, 원전·재생에너지의 균형적 확충, 수소 생태계 구축 및 수소경제 선도국가 도약 등에 더해 감축 목표 상향 및 유상할당 확대를 통한 온실가스 배출권거래제를 혁신하고, 재정지원 및 글로벌 탄소 규제 대응 지원 등을 통한 기업의 저탄소 전환을 촉진하는 것이다. 그 외에 지역 기반의 기후테크산업과 기후테크 유니콘 육성, 민관합동 녹색투자 펀드 조성 및 산업은행 탄소중립 정책금융 확대 등을 통해 기후산업 및 녹색금융 성장을 지원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더불어민주당'의 주요 공약은 첫째로 2035년 국가온실가스감축목표(NDC) 감축(2018년 대비 52%) 추진, 2040년까지 석탄발전소 가동 중단 추진, 기후대응기금 확보(2027년까지 7조원 이상) 및 단계적 확대, 배출권거래제 유상할당 비율 상향 등 탄소 감축으로 국가경쟁력을 확보하는 것이다. 둘째로 2050년 탄소중립 실현을 위해 산업구조 대전환 지속 추진, 탄소중립산업법(한국형 IRA) 제정으로 산업의 글로벌 경쟁력 강화 및 기후위기에 적극 대응, 탄소중립 신산업·신기술 발굴로 탄소중립 역량 강화 등 산업 경쟁력을 높이는 것이다. 그 외에 재생에너지 보급 강화, RE100 활성화를 위한 제도개선, 기후에너지부 신설로 탄소중립과 에너지 전환에 적극 대응 등 친환경 재생에너지 대전환으로 RE100 시대를 여는 것이다. 양당 모두 기후대응기금을 대폭 확대하고 기후산업 및 녹색금융 성장 지원, 탄소중립형 산업전환 추진 등을 통해 기후위기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의지를 보인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원전과 재생에너지 등 에너지 전환 외에 큰 차별성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고 일부 공약은 그 구체적인 실현 가능성에 의문이 있기도 하다.결론적으로 기후변화는 단기간의 노력으로 해결될 수 없고, 중장기적인 관점에서 지속적으로 대응해야 하는 이슈이다. 이제 기후변화가 주요한 정치적 의제가 된 만큼 2026년 지방선거, 2027년 대선 등 선거 국면에서 계속해서 이슈가 될 것이다. 이제부터는 선거용 구호가 아닌 기후·환경 공약의 실제적인 이행에 가장 힘써야 할 것이다. 김도형 (법무법인 화우 환경규제대응센터장·한양대 공학대학원 겸임교수)김도형 (법무법인 화우 환경규제대응센터장·한양대 공학대학원 겸임교수)
[더 나은 세상] 삶에 항복할 때 오는 것들
운전을 즐긴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20대 초부터 운전을 했음에도. 유학생활 때도 최대한 좋은 위치에 집을 얻어 걷거나 대중교통으로 일상이 이루어지도록 했다. 그러다 새스커툰에 처음 왔을 때, 눈보라 속에서 혹은 빙판길 도로를 캐나다의 긴 겨울 동안 운전해야 하는 건 가장 큰 공포 중의 하나였다. 차에 대한 의존도가 매우 높은 북미 특히 중소도시의 대중교통은 비효율적이라 "여기는 운전 안 하면 못 살아"라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고 또 그렇게 사는 곳. 첫 학기 단과대학 교수회의 때 학장에게 "오늘 회의에 못 갈 것 같아. 이 날씨에 도저히 운전을 못 하겠어"라고 e메일을 보냈을 정도였다. "이해해. 다들 익숙해지는 데 시간이 걸려"라는 답이 왔지만, 그것도 처음 한두 번이지 계속될 순 없는 일. 게다가 수업은 꼭 가야 하니 어깨와 목에 바짝 힘이 들어간 채 죽을 것 같은 무서움을 참고 운전해서 수업 갔다 집에 오면 "휴 오늘은 이제 안 나가도 돼"라고 절로 안도의 숨이 내쉬어졌다. 그리고 정말로 전혀 밖에 나가고 싶지 않았다. 지인이 식사 초대를 해도, 운전이 무서워 못 간다고 했을 정도로. 사람들은 친절해서 태우러 와주기도 했는데 그것도 처음 한두 번이고.코로나 때 한국에서 지내다 연말 복귀하면서 한동안은 운전하지 않고 지내겠다고 결정했다. 상점들 많은 곳에 집을 얻었고, 수업 가야 하는 날은 정 안되면 비싸도 택시나 우버를 이용하리라 마음 먹었다. 그건 10여 년 전의 나에게, 정말 무서워서 죽을 것 같은데 그래도 해내야 한다고, 나를 도와줄 사람은 누구도 없으니 내가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그때의 나에게,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정말 무섭고 싫으면 안 해도 된다고, 지금의 내가 주는 선물이었다. 삶이란 참 신비로워서, 그러고 나니 우연히 만난 예전 학생이 마침 근처에 사는 대학 교직원이 되어 있어 캠퍼스 가는 날 태워주겠다고 나섰다. 로터리 클럽 모임 때는 멤버들 중 가는 길에 태워주는 사람들이 생겼고, 이곳에 한국 성당은 없으니 좋은 교회나 성당을 찾는다고 했더니 동료가 자기가 다니는 교회에 오면 태워주겠다고 했다. 예전 친척이 이 도시 살 때 10년간 예배가는 길 태워준 적 있다고. 그렇게 그 동료의 남편까지 매주 교회 오가는 길에 만나며 친구가 되었다. 친한 친구들과 공연이나 식사 약속이 있을 때는 이제 당연히 몇 시까지 태우러 갈게 이런 메시지가 온다. 물론 내가 타협해야 하는 부분도 당연히 있다. 교수들은 수업, 회의 외에는 컴퓨터로 대부분 업무가 이루어지니 집에서 일했는데, 교직원들은 출근 시간이 이르니 아침 일찍 가서 퇴근 시간까지 오피스에서 일한다. 집보다 불편한 점이 많지만, 이 또한 덕분에 업무를 되도록 집에 가져오지 않아도 되고 동료들과 더 친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내 삶의 주인으로 살 줄 아는 건 중요하고, 동시에 도움이 필요할 때 내 나약함을 인정하고 도움 청할 줄 아는 건 내면이 강해졌을 때만 할 수 있더라. 그렇게 내 에고를 항복할 때 삶은 내 힘으로 해낼 수 있는 것 이상의 결과를 가져다주고. 지금 지치고 외롭고 힘든데 끝내 해내야 한다고 애쓰는 사람이 있다면, 한 번쯤 놓아보라고, 그때 펼쳐질 새로운 삶에 마음 열어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찬란히 아름다운 봄이니까.신현정 캐나다 사스카추안대 교수신현정 캐나다 사스카추안대 교수
[박규완 칼럼] 국회의원 특권 없애자
국회의원을 흔히 '신의 직장'이라 한다. 왜일까. 의원 개개인이 독립된 헌법기관이라서? 지역 민의의 대표자라서? 아니다. 당론을 충실히 따르는 '정당 병정'일 뿐이며, 민의를 대변하기보단 정쟁과 명예 탐닉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국회의원이 '신의 직장'인 까닭은 오롯이 그 많은 특권과 특혜 때문이다. 의원 당선이 입신양명의 압축판인 이유이기도 하다. 특권·특혜 및 의전 관련 조항이 무려 186개다. 항공기 비즈니스석, KTX 특실을 공짜로 타고 공항과 역 귀빈실을 이용한다. 의원회관 내 이발소·헬스장·목욕탕과 약국·치과·내과·한의원이 무료다. 수입도 쏠쏠하다. 2023년 기준 국회의원 세비는 연 1억5천426만원이다. 국민소득 대비 OECD 국가 중 3위다. 여기에 1억원가량의 의원실 경비를 별도로 지원받는다. 의원 차량 유류비, 출장비 등이 포함된다. 9명의 보좌진을 거느리는 것도 대한민국 국회의원만의 시그니처다. 4급 보좌관 2명, 5급 비서관 2명, 6·7·8·9급 비서 각 1명, 인턴 1명이다. 보좌진 총급여는 5억2천여만 원. 의원 1인당 연간 7억원의 세금이 들어가는 꼴이다. 2000년 이전까진 보좌진이 5명이었다. 국회의 씀씀이가 더 방만해졌다는 증좌다. 이뿐이랴. 국회의원은 매년 1억5천만원, 선거가 있는 해는 3억원까지 정치후원금을 모금할 수 있다. 출판기념회도 공공연히 의원들의 주머니를 불려준다. 게다가 선거에서 15% 이상 득표하면 선거비용 전액을 국고에서 환급받는다. 임도 보고 뽕도 따고. 출마하고 돈도 받고. '선거 재테크'가 가능한 구조다. 국민세금으로 의원 전용 '화수분'을 만들어주는 격이다. 특권의 백미는 또 있다. 불체포 특권이 방호해주니 웬만한 비리·불법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거짓말해도 면책특권 뒤에 숨으면 그만이다. 유감스럽게도 의회 효용성 평가는 OECD 국가 최하위다. "가성비가 낮다"는 말만으론 우리 국회의 '고비용 저효율' 체계를 온전히 웅변할 수 없을 듯싶다.한데 '신의 직장'치곤 진입 문턱이 낮다. 사기 행각이 드러나거나 막말을 쏟아낸 인물, 성범죄 옹호자, 부동산 투기꾼이 걸러지지 않는다. 특권은 강고하고 구성원은 열화(劣化)하는 형국이다. 구태정치의 야누스다. "국회부의장이 직접 커피를 뽑아 탁자 위에 놓았다. 3선 의원인데도 따로 보좌관이 없고 방은 작았다" 최연혁 스웨덴 린네대 교수가 전한 스웨덴 국회의 단면이다. "온갖 특권을 누리기 위해 국회의원이 되려고 하니 정치가 부패·타락하는 것"이라는 장기표 신문명정책연구원장의 진단은 틀리지 않는다. 이제 특권을 내려놓을 때가 왔다. 계몽주의의 초석을 놓은 영국 정치사상가 존 로크는 "정치인은 국민에게 권한을 위임받은 대리인일 뿐"이라고 했다. 일하는 대리인에 특혜와 특권, 과잉 의전이 왜 필요한가. 특권 폐지는 22대 국회에 부여된 소명이자 국민의 여망이다. 국회의원은 '신의 직장'이 아닌 '3D 업종'이어야 한다. 그래야 상시 '일하는 국회'가 구현된다. 지역패권주의와 양당 독과점 구도를 혁파할 수 있다. 여의도가 바뀌어야 공정과 지방의 가치가 존중되며 대화와 협상의 문화가 작동할 수 있는 '새 정치'가 열린다.세계가치조사에 의하면 스웨덴 국회의 신뢰도는 63.3%인데 비해 한국 국회는 20.7%에 불과했다. 특권의 역설이다. 특권 폐지가 정치 업그레이드의 시작점이다.박규완 논설위원논설위원
[돌직구 핵직구] 대한민국은 지속가능할 것인가?
22대 총선에 투표하면서 걱정과 불안이 앞섰다. 여당도, 야당도 흔쾌히 좋아서 선택한 게 아니다. 나라를 생각해서 투표한 것이다. 정치인들에게 국가의 미래를 맡길 수 있을 것인가 걱정하는 국민이 많다. 막스 베버의 정의대로 "정치란 국가를 운영하는 활동"이다. 이번 총선도 예전과 다름없이 야당의 '정권심판론'과 여당의 '야당심판론' 간판 아래 철 지난 구호들만 난무했다. 미래 지도자가 될 신선한 인물을 발굴하지 못하고, 국민의 생활을 진보시킬 정책도 없고, 국가의 미래를 담보할 공약 하나 없었다. 증오로 가득 찬 독설과 해프닝을 가십화하는 이미지 정치, 구시대적 매너리즘의 반복뿐이었다. 낡은 시대 청산이라는 시대적 요구는 외면한 채 무능한 구악(舊惡)과 부패한 신악(新惡)들만 양산했다. 정치 수준이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는 우려가 많다. 이들에게 '대한민국 위기론' '지속불가능론' 해결을 기대하는 게 연목구어는 아닐까. 위기론의 핵심은 인구 감소이다. 미국의 한 대학교 연구소에 따르면 2100년 대한민국 인구가 현재의 절반 수준인 2천680만명으로 급감할 것이라고 한다. 통계청도 2021년부터 인구가 줄어들기 시작해서 2070년 3천766만명으로 감소할 것이라고 예측한 바 있다. 지역의 인구 소멸은 더욱 심각하다. 행정안전부와 감사원은 인구 소멸위험 단계에 들어선 기초단체가 83~89곳에 이른다고 밝혔다. 전국 시·군·구의 3분의 1이 넘는다. 2005년 '저출산고령화기본법' 제정 이후 약 380조원에 달하는 예산을 투입했다는데 결과는 참혹하다. 작년 합계출산율이 0.72에 그쳤고 올해는 더 떨어질 전망이다. 국민 없는 국가는 존재할 수 없다. 점증하는 사회적 갈등과 대립은 또 하나의 문제이다. 다른 용어로 국가 통합성, 국민 응집력이 현저히 떨어지고 있다. 지역·세대·계층 간의 갈등이 증폭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갈등지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에서 3위에 오를 정도로 심각하다. 갈등을 관리하는 정부의 능력은 최저 상황이다. 반대로 사회통합지수와 국민행복지수는 최하위를 기록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자살률, 노인빈곤율과 자살률, 청년자살률, 이혼율 등이 세계 최고 수준이다. 경제 격차도 문제이다. 계층 간 소득의 불균형 정도를 나타내는 지니계수와 소득 상하위 비율도 크지만, 자산의 격차는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평생 월급 모아서 집 사기가 불가능해졌다. 갈등의 경제·사회적 비용은 증가하고 종국에는 공동체 붕괴의 위기에 직면한다.국가의 지속성과 통합성을 유지하는 기본 원리는 '자유'와 '공정'이다.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자유를 누릴 수 있고, 땀 흘려 노력하는 사람이 잘사는 게 공정이다. 정치적 자유는 주어졌지만 경제적 자유는 요원하고, 편법과 탈법이 극성이다. 권력과 지위를 이용해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고, 정직과 성실은 바보들의 덕목이 되었다. 결과 달성을 위해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는 사회가 되었다. 청년들의 '헬조선' '이생망'이란 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니다. 정치인에게 도덕성과 양심을 포기한 지는 오래되었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애국심과 정책 능력을 기대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22대 국회에서는 대한민국의 존립을 위해 대책이라도 세워주길 바란다. 국가대개조 혹은 국정대혁신도 좋다. 그리스 번영을 가져온 솔론의 민주적 개혁이든 페리클레스의 포용과 대통합 정책도 괜찮다. 거기에 미치지 못해도 좋다. 거시적 프로그램이든 미시적인 정책이든 최소한의 노력이라도 있기를 기대해본다.서성교 건국대 특임교수·전 청와대 행정관서성교 건국대 특임교수·전 청와대 행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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