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재발 대책’ 발표날 “쾅”…64t 천공기 대구 도심 덮쳤다
정부가 지난해 발생한 경기도 용인 대형 중장비(항타기) 전도 사고의 재발을 막겠다며 강력한 이중 안전장치 의무화 대책을 발표한 당일, 대구 도심 한복판에서 보란 듯이 64t급 천공기가 전도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1초만 빨랐어도 대형 참사로 이어질 뻔한 이번 사고는 정부의 안전 대책이 현장까지 도달하지 않는 '안전 사각지대'의 민낯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도심 출근길서 '1초'가 가른 생사 4일 오전 9시6분쯤, 대구 수성구 만촌네거리 도시철도 2호선 만촌역 지하통로 공사현장. 높이 21m, 무게 64t에 달하는 천공기가 왕복 8차선 도로 위로 쓰러졌다. 다행히 사고 당시 직접적으로 사람이나 차량을 덮치지는 않았으나, 쓰러진 천공기를 들이받은 택시기사와 승객이 다쳤다. 천공기 기사도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큰 부상은 피한 것으로 확인됐다. 사고를 목격한 수성구 주민 이모(67)씨는 "보행신호를 기다리는데, 오른쪽에서 어마어마한 물체가 '어머머' 하는 사이에 넘어갔다. 눈으로 보기에 넘어가는 속도가 빠르지 않은 듯했는데도 사고는 한순간이더라. 택시가 1초만 빨리 지나갔어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증언했다. 사고는 천공기의 비트(날) 교체 및 점검을 위한 선회(스윙)를 하다가 발생했다. 천공기는 상부에 무거운 해머가 달려 있어 무게 중심이 매우 높다. 이에 원래는 아웃트리거(지지대)를 지면에 견고히 박아야 하지만, 당시 작업을 위해 지지대를 모두 들어 올린 상태였다. ◆비에 젖은 지반 영향? 인재? 원인규명 착수 이번에 전도된 천공기는 지하통로 출입구 공사를 위한 기초공사 목적으로 지난 1월말부터 현장에 배치된 것으로 확인됐다. 현장 관계자들은 최근 연일 비가 오면서 사흘간 작업이 중단됐고, 이날 다시 작업을 재개하려던 중 사고가 발생했다고 설명했다. 공사현장 안전관리 경험을 다수 보유한 건설업계 인사는 비가 사고의 한 요인이 됐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그는 "빗물이 지반에 스며들어 땅을 지탱하는 '지내력'을 약화시켰을 것"이라며 "이로 인해 지반 한쪽이 꺼지는 부동침하가 발생하면서, 천공기가 이동 중 균형을 잃었을 가능성이 있다. 간이 지내력 테스트를 통해 지반 지지력을 확인한 뒤에 작업을 재개하는 것이 기본"이라고 분석했다. 특히, 해당 만촌역 출입구 공사는 당초 2024년 완공 예정이었으나, 지장물 이설과 암반 발견 등으로 공기가 수차례 연장되며 2027년으로 미뤄진 상태다. 잦은 공기 지연은 현장에 '속도전' 압박을 줄 수밖에 없고, 이는 안전 절차 생략으로 이어지기 쉽다. 실제 국토안전관리원 데이터에 따르면, 공정률이 10% 이상 지연된 현장의 중대재해 발생 위험도는 정상 공정 현장 대비 약 1.5배인 것으로 나타난다. 다만, 현장 관계자는 "지내력 테스트는 공사 초기에 하는 것이다. 비가 오더라도 별도 작업 중지 매뉴얼이 있는 것은 아니며, 이번에 장마처럼 큰 비가 온 것도 아니다. 평탄한 현장에 철판을 보강했으므로 지반 문제는 아닐 것"이라며 "안전 수칙을 철저히 지키고 있다"고 했다. ◆정부 대책 무색하게 한 대형사고 이번 사고와 관련해 대구지방고용노동청·경찰 등은 정확한 사고 원인을 조사 중이다. 대구노동청 및 경 관계자는 "사고 당시 작업 방식과 안전수칙 준수 여부, 지반 상태, 안전관리 계획 이행 여부 등 산업안전보건법 전반을 파악 중"이라고 밝혔다. 이러한 도심 한복판에서 이뤄지는 중장비 작업은 시민 안전을 위협한다. 만촌네거리는 평소 교통량이 상당하다. 사고 시각은 출근 시간대로 신호 대기 중이던 차량과 보행자가 많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천공기 등 중장비 전도로 인한 사고는 십수년 전부터 숙지지 않고 있다. 지난 2012년 8월엔 대구의 한 도시철도 공사현장에서 대형 천공기가 옆으로 넘어지며 1명이 숨지고 1명이 다치는 참사가 발생했다. 그 후로도 천공기 전도 사고는 잊을 만하면 발생, 이번 만촌네거리 사고를 두고도 "터질 게 터졌다"는 비판이 나온다. 지난해 6월엔 경기도 용인에서 천공기와 유사한 항타기가 균형을 잃고 전도돼 아파트를 덮친 일도 있었다. 더욱 뼈아픈 대목은 국토교통부가 이날 용인 사고에 대한 후속 대책을 발표했단 점이다. 정부는 △이중 안전장치 설치 의무화 △기울기 실시간 감지 장치 도입 △발주청의 현장관리 책임 강화 등을 골자로 한 대책을 내놨으나, 공사 현장에선 다시 한번 큰 사고가 발생했다. 대구노동청은 향후 현장 점검 및 감독에 이러한 사항을 반영하도록 검토할 예정이다. 장정희 대구노동청 과장은 "시공사인 태왕이앤씨가 대구경북지역에서 시공하는 현장을 대상으로 불시감독을 실시하겠다"면서 "부처를 가리지 않고 중대재해를 예방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더욱 철저한 점검을 통해 사고를 방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최시웅기자 jet123@yeongna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