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상과 책상 사이] 공부와 재미
"일이 재미있어서 하나, 먹고살기 위해 하지." 일상화된 장시간의 고된 노동을 인내하며 살아온 산업사회 세대가 많이 하는 말이다. "수학이 좋아서 공부하나, 대학 가려고 하지." 치열한 입시 경쟁을 뚫고 살아남은 부모들이 자주 하는 말이다. 아직도 '재미'란 주로 경박하고 진중하지 못한 사람이 입에 담는 찰나적이고 하찮은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늦은 밤 고3 아이가 문을 열고 들어온다. 엄마는 아이의 눈치를 살핀다. 아이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가방을 소파에 던진다. 엄마는 아이의 동태를 살피며 묻는다. "오늘 공부 많이 했어? 공부한다고 힘들었지. 뭐 좀 먹을래?" 아이는 소파에 벌렁 드러누우며 더 이상의 질문을 단호하게 차단하는 대답을 한다. "말 걸지 마. 피곤해." 고교생이 있는 가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부모님은 아이의 무표정과 신경질이 공부를 너무 많이 해 지쳤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천만의 말씀이다. 사는 게 재미없다는 말이다. 공부와 상관없는 헛짓이나 잡생각을 많이 한 자신에 대한 불만 때문에 그런 반응을 보인 것이다. 공부에 몰입하여 성취감을 느꼈다면 현관문을 열고 들어올 때 표정이 환하게 밝아야 한다. 엄마를 꼭 껴안거나 콧노래를 부르며 간식을 달라고 할 수도 있다. 현명한 부모는 표정만으로 아이의 하루를 짐작할 수 있다. 어린아이들은 놀이에서 재미를 느낀다. 그들은 재미와 몰입을 같은 것으로 받아들인다. 나이가 들수록 이 둘은 분리된다. 사회화 과정을 거치면서 재미는 유치한 것이고 목표가 뚜렷하고 꿈이 있다면 재미없이 견디는 법을 알아야 한다고 배운다. 이런 환경에서는 특별한 인내심을 타고난 아이만 마지막까지 살아남을 수 있다. '재미란 무엇인가'를 쓴 영국 서식스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벤 핀첨은 "규범 이탈, 책임으로부터 자유, 타인과의 상호작용, 정체성 부여, 기분전환, 보상, 접근성, 자발성, 규칙이나 관계에 대한 이해 정도, 몰입" 등을 재미의 요소로 꼽는다. 이 중 몇 가지가 결합하면 재미의 강도는 높아진다. 저자는 재미에는 '행복, 휴식, 몰입, 순간, 근심 없음, 잊어버림, 유대감, 웃음, 가벼움, 따뜻함, 희열감' 등의 속성이 있다고 말한다. 제시된 용어를 학교생활과 공부에도 적용할 수 있다.공부하는 학생이 '규범 이탈'이나 '책임으로부터 자유'를 통해 일시적으로는 '기분전환'을 할 수 있지만, 궁극적인 즐거움이나 행복감은 얻을 수 없다. '자발성과 몰입' '보상과 휴식' 등이 조화를 이룰 때 생활에 활력이 넘치고 살맛이 난다. 주중에 집중해서 공부하고 주말 한나절 정도는 푹 쉬며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과정이 일상적으로 반복될 때 학습 의욕은 유지된다. '자발성'이 없으면 일이든 공부든 재미없다. 나의 결단이 아니고 부모님이 원하는 바를 해주기 위해 부모님의 잔소리가 싫어 책상에 앉으면 학습 생산성은 기대하기 어렵다. 어려운 수학 문제를 풀 때 그 과정은 힘들어도 정답을 구했을 때의 '희열'이 그 모든 수고를 짜릿한 즐거움이라고 생각하게 한다. 사람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성취감이 주는 희열을 만끽하고 자신의 성장을 확인하게 되면 최고의 행복감을 느끼게 된다. 이런 경험을 한 사람만이 라틴어 'VERI TAS LUX MEA', 즉 '진리는 나의 빛(Truth is my light)'이란 어구의 진정한 의미를 안다. 지적 호기심을 가지고 어떤 문제를 각고의 노력으로 탐구해 그 원리나 이치를 깨닫게 될 때 우리는 가슴이 환하게 밝아지는 '희열'을 경험한다. 이 경지에 이르러야 비로소 자기주도학습을 제대로 실천하게 된다. 성취감이 주는 희열은 탐욕스러운 식욕과 같다.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프듯이 몰입하고 또 몰입하게 한다. 밤을 새워도 피로를 느끼지 않는다.이제 부모와 자식 간에도 질문 방식을 바꾸어 보자. "오늘 학교에서 재미있었나?"라고 자주 묻자. 재미가 없었다고 말할 때는 꾸짖거나 비난하지 말고 함께 머리를 맞대고 그 방법을 찾아야 한다. 앞으로는 단순 반복적인 일과 단편적인 정보의 축적은 인공지능과 IT 기술이 해결해 줄 것이다. '통찰력과 직관력' '생각하는 힘'을 가진 사람이 남다른 상상력과 창의력을 발휘하게 된다. 노동 시간은 획기적으로 단축되고 놀 시간이 많아질 것이다. 어릴 때부터 '재미있게 놀며' '몰입하는 방법을 배운' '동료와 협력할 줄 아는 괴짜'가 감성지수가 높고 사회성도 뛰어나 성공할 확률이 높다. 모든 일에서 '재미'는 삶의 활력과 생산성을 추동하는 매우 강력한 힘이 된다.윤일현(시인·윤일현교육문화연구소 대표)윤일현(시인·윤일현교육문화연구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