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세상] 5월에 꺼내보는 '촌지 사건'의 추억
몇 년 전 책 출간을 계기로 지역방송에 출연한 적이 있었는데 고3 시절 담임선생님이 우연히 TV를 보고 반가워하며 연락을 주셨다. 선생님은 정년퇴직 후 어머니 간병을 하며 지낸다고 근황을 전하시다 내 어머니 안부도 물으셨다. "너거 엄마도 연세 많으시제? 시장에서 장사하셨잖아. 힘든 일 이제는 그만두셨제?"근 40년 교사 생활을 하신 선생님이 그동안 만난 학부모가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을 텐데 30여 년 전에 딱 한 번 만난 내 엄마를 기억하고 계셔서 잠시 놀랐지만, 이내 '그럴 만한 사건이지' 싶었다. 그땐 '가정방문'과 '촌지' 문화가 남아 있을 때였다(담임이 학생들 집을 일일이 다 방문하는 가정방문은 교사가 학생 형편을 살피고 학부모가 교사와 편하게 상담할 수 있도록 만든 제도였지만, 학부모가 교사에게 촌지를 주는 관행 등의 부작용이 사회 문제가 되어 일괄적 가정방문은 사라졌다). 선생님의 가정방문은 언제나 부담스러웠지만, 아빠가 사고로 돌아가시고 난 후 처음 맞는 가정방문은 더 그랬다. 당시 40대 후반의 엄마는 준비도 없이 하루아침에 가장이 되어 시장에서 묵과 국수를 만들어 팔아 생계를 꾸리고 있었다. 그런 상황이니 선생님의 가정방문을 앞두고도 별다른 준비는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선생님은 허름한 가게에 딸린 좁고 어두운 방에서 차 한 잔으로 목을 축이시며 엄마와 대화 몇 마디 나누고는 일어나셨다. 엄마는 선생님이 일어나 가시려고 하는 순간 퍼뜩 촌지 생각이 나셨는지 물건값을 받고 거슬러주는 용도로 쓰는 앞치마 주머니에서 짚이는 대로 지폐 몇 개를 꺼내 "누추한 데까지 오셨는데…" 하며 선생님 양복 주머니에 그걸 욱여넣었다. 돈이 이 주머니에서 저 주머니로 이동하는 그 짧은 순간 난 그 지폐를 보고 말았다. 선생님도 보았을 것이다. 분명 천원짜리였다! 봉투조차 준비 안 한 교양 없는 엄마에 대한 부끄러움에다 금액의 충격까지 더해져 나는 얼굴이 시뻘게졌다. 선생님은, 아마도 진심으로, 손사래를 쳤지만 엄마가 "아입니더, 아입니더, 제 성의라예" 하며 강하게 만류하자 어쩔 줄 몰라하시며 허둥지둥 가게를 나가셨다. 그날 이후 선생님은 나를 많이 챙겨주셨다.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은 자녀에게 주는 장학금을 찾아 주선해 주셨고,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가고 싶어 안달 내던 철없던 나를 설득해 전액 장학금을 받을 수 있고 졸업하면 안정적인 직업을 가질 수 있는 대학에 진학하도록 지도하셨다. 엄마의 안부를 묻는 선생님께 치매로 기억을 잃고 많이 안 좋다고 했더니 "아이고, 너거 엄마가 젊었을 때 너무 고생해서 그렇제"라고 하셨다. 선생님은 구겨진 1천원짜리 지폐 몇 개에 담긴 엄마의 고단한 삶을 다 이해하고 계셨던 거다. 자식들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엄마가 내 고등학교 선생님을 기억할 리는 없겠지만 엄마에게 그 옛날 일을 기억하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그땐 엄마가 너무 부끄럽고 미웠는데 엄마도 그걸 눈치챘는지…. 하지만 코로나 시국에 요양병원 대면 면회는 엄격히 통제되어 엄마와 대화다운 대화를 할 수 없었고, 끝내 그 일에 대해 물어보지 못하고 엄마는 돌아가셨다. 카네이션을 달아드릴 부모가 더 이상 없는 어버이날을 앞두고 선생님을 생각한다. 졸업 후 한 번도 챙기지 않은 스승의 날을 졸업 30여 년이 넘어서 처음으로 챙겨봐야겠다.정혜진 변호사정혜진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