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완의 디자인 생각] 도시는 책이다
'북성로 글자 풍경'. 2019~2020년, 대구 북성로에서 전시를 열었다. 거리에 있는 간판 글자, 낙서 등을 통해 북성로의 이야기를 수집하고 기록하는 전시였다. 오랜 시간 동안 거리글자에 관심을 가져 왔던 터라 즐겁게 작업할 수 있었다. 그때 인터뷰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북성로는 ○○이다'라는 문장에 빈칸을 채워달라는 질문이 있었다. 나는 "북성로는 책이다"라고 대답했다. 책은 그것을 보려고 하지 않으려는 사람에게는 견고하게 닫혀있는 사물이다. 하지만 그것을 손에 들고 표지를 넘기면서 읽으려는 사람에게는 자신을 솔직하고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책 내지는 무엇 하나 감추지 않고 독자가 모든 것을 경험할 수 있도록 돕는다. 책을 덮고 난 후에도 어떤 문장은 읽은 이의 마음속에 오래도록 남는다. 좋은 책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기도 하고 시공간을 가르며 여기저기 전해지기도 한다. 이야기의 힘이자 책의 힘이다. 그러니까 나는 북성로가 책과 같다고 생각했던 것이다.거리를 걷지 않고 읽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에게 북성로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반대로 거리를 걸으며 글자를 읽고 이야기를 상상하는 사람에게 북성로는 절대적이며 모든 것인 장소다. 성곽이 있던 때, 성곽을 허물고 신작로를 만든 때, 신문물이 화려함을 뽐내던 때, 6·25전쟁 후 기술자들이 터를 잡던 때, 공업사와 공구상이 있던 곳이 이제는 재개발되어 주거지역으로 변화하고 있다. 시간이 쌓여가는 모습과 장소가 흐르는 장면을 상상하고 목격하면서 지금의 북성로가 진행 중이다. 닫혀있는 책을 펼치듯 북성로를 산책하는 일이 내가 전시를 통해 경험한 것이었다. 당시에는 갑작스러운 질문에 조금 머쓱해하며 '북성로는 책'이라고 말했지만, 다시 곱씹어도 괜찮은 비유였다고 생각한다. 책의 물리적 크기를 '판형'이라고 부른다. 판형이 크다고 해서 무조건 멋진 것도 아니고 작다고 해서 마냥 볼품없는 것도 아니다. 디자이너는 책에 담기는 텍스트와 이미지의 특성을 고려해서 책 판형을 결정한다. 판형을 고려할 때 비례도 중요하다. 책은 세로로 길쭉한 형태도 있고 가로로 넓적한 것도 있고 정사각형 모습을 가진 것도 있다. 조금 더 들어가 보면, 책 내지의 지면에서 여백을 제외한 부분을 '판면'이라고 부른다. 판면에는 글자들이 줄을 이루고 있다. 상식적으로도 지면 가득 글자가 놓이는 책은 없다. 지면의 적당한 여백은 글자가 숨을 쉴 수 있는 공간이자 독자가 메모를 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여백은 기능적으로도 필요하지만 여백과 판면의 관계를 황금비율 원칙에 따르는 디자이너도 있다. 시각적으로 아름다운 판형과 판면은 결국 기능에도 충실하다. 여기에 레이아웃은 글자와 그림, 사진 등을 보기 좋게 배치하고 독자가 잘 읽을 수 있도록 연출하는 것이다. 레이아웃 핵심은 모든 요소들이 서로 얼마나 잘 어울리느냐 하는 것이다. 거리전시서 "북성로는 책이다" 답변산책하며 시공간 변하는 장면 상상책 판형 크다고 무조건 멋진 거 아냐독자 잘 읽을 수 있는 레이아웃 중요개인·공동체, 공·사적 영역, 언어 등좋은 도시도 구성요소 조화로 결정물리적 외형보다 이용 방식에 집중다소 전문적인 이야기인데 '마이크로 타이포그래피'라고 부르는 것이 있다. 디자이너가 세부적으로 글자를 다루는 일인데, 마이크로라는 말처럼 우리 눈에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모든 디자인의 기초가 되는 중요한 문제다. 폰트(글자꼴), 글자 간격, 단어 간격, 글줄 길이, 글줄 간격, 단락 정렬 방식 등이 그것이다. 어떤 폰트를 사용할 것인가, 폰트 크기를 키울 것인가 줄일 것인가, 글자 간격이 너무 좁아서 글자끼리 획이 겹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글자 간격이 너무 넓은 것도 독서 흐름을 방해할 수 있다. 단어 간격을 어느 정도 벌릴 것인가 하는 문제도 고려해야 한다. 단어 간격이 적당할 때에 문장을 읽는 속도가 붙게 되고 오랜 시간 독서가 가능하다. 글줄 간격이 좁으면 시선이 다음 줄로 넘어갈 때 혼란을 주고 글줄 간격이 너무 넓으면 효율적이지 못하다. 글줄 길이도 우리에게 익숙한 호흡 안에서 고려되어야 한다. 일반적인 단행본 기준으로 10~11㎝ 정도가 적당하다. 마이크로 타이포그래피는 가장 적절한 크기와 간격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여기에 더해 최근에는 다국어 타이포그래피에 대한 고려도 필요해졌다. 사회 구성원이 쓰는 언어와 문자가 다양해질수록 우리를 둘러싼 언어경관(Linguistic landscape) 또한 복잡해진다. 서로 다른 언어와 문자를 함께 배열하는 것을 '섞어짜기'라고 하는데, 이때 문자 사이의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도록 비슷하게 접근하는 방법도 있고, 문자가 다르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각각의 차이를 강조하는 방법도 있다. 섞어짜기에 정답은 없다. 전체적인 맥락 안에서 개성을 드러낼 것이냐 목소리 톤을 차분하게 만들 것이냐를 판단하는 것이다. 북성로가 책인 것처럼 '도시는 책이다'. 책이라는 사물을 통해서 도시를 투영해본다. 도시의 판형, 도시의 판면, 도시의 레이아웃 그리고 도시의 마이크로 타이포그래피에 대해 생각해본다. 도시를 구성하는 세부로서 사람, 자동차, 집 등이 있다. 글자가 한 사람의 시민이라면, 글자 간격은 사람 사이의 관계인 셈이다. 단어는 각 개인이 이루는 크고 작은 공동체다. 단어 간격, 글줄 간격도 결국 도시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접근에서 시작한다. 책을 디자인할 때에 글자와 그림, 사진 등을 보기 좋게 배치하고 독자가 잘 읽을 수 있도록 연출하는 것처럼 도시의 레이아웃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당연한 말이지만 레이아웃의 핵심은 개인과 공동체, 사적 영역과 공공 영역, 밀집과 여백, 서로 다른 언어와 가치관 등이 얼마나 조화롭게 배치되는가이다. 그리고 여백이 없는 도시는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 도시 속 공원, 녹지, 수변 공간 등 비어있는 곳은 버려진 땅이 아니다. 그런 공간은 의도된 여백이자 도시의 아름다움을 만들어낸다. 책은 기록이다. 우리의 생각은 문자나 그림으로 기록하지 않으면 흩어져 버리고 만다. 책은 그것들을 붙잡아두는 기억 저장소다. 그렇다고 해서 책이 단순히 기억을 붙잡아두는 기능만 하는 것은 아니다. 문집(文集), 시집(詩集), 사진집(詩集) 등에 쓰는 한자 '集(모일 집)'은 나무 위에 모여 앉아있는 새를 의미한다. 그런데 책을 기획하고 엮는 과정인 편집(篇輯)에 쓰는 한자 '輯(모을 집)'은 조금 특별하다. 글자를 자세히 보면 입(口)과 귀(耳)가 있고 수레(車)가 있다. 나무에 앉은 새를 관조하는 것보다는 확실히 능동적 커뮤니케이션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책이 단순히 정보를 모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적극적인 이야기 생산의 역할을 한다고 믿고, 또 책은 그런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책에 담지 않으면 흩어지는 것들을 모으기 시작했더니 어느새 새로운 에너지가 발생하는 것이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창발이자 융합이다. 물론 여기에는 편집이라는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마음 좋고 솜씨 좋은 편집자가 만든 책은 사람을 끌어안는다. 마찬가지로 잘 편집된 도시는 사람을 환대한다. "파리의 진정한 자랑거리는 물리적 외형이 아니라 파리 사람들이 그곳을 이용하는 방식이었다."(메트로폴리스, 벤 윌슨 지음, 박수철 옮김, 매경출판, 2021년) 도시 이용자라는 말이 떠오른다. 도시이용자는 도시의 편집자다. 도시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배경 같은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이용하는지에 따라 완전히 다른 곳이 될 수도 있다. 능동적인 도시이용자가 도시를 읽고 쓰는 경험이 쌓일 때 어느덧 도시는 한 권의 멋진 책으로 완성될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께서는 이제 골목을 걷고 거리를 걷고 도시의 글자와 기호를 해독하면서 대구라는 책을 감상하길 바란다. 독해가 익숙해졌다면 책의 가장 작은 단위인 글자가 되어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도시이용자가 될 수도 있다. 북디자이너·영남대 시각디자인학과 교수정재완 (북디자이너·영남대 시각디자인학과 교수)